전북5길: 원평 장터
일 시: 2015년 5월 29일
구 간: 금구향교 - 서봉사 -하천리 - 용점마을 - 봉은교차로 - 서릿골 - 반곡마을 - 쌍룡사 - 화평마을 원평장터 - 학수제 (11km)
전북 제5길(원평): 11km
금구향교를 뒤로하고 모악산 마실길을 따르면, 전북문화재자료 157호인 서강사에 도착한다. 항일투사 장태수선생은 1841년(헌종7년)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서 태어나 1861년(철종1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양산군수, 고산현감을 지내다 단발령(斷髮令)에 반대하여 벼슬길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게 된다.
나라 잃은 설음을 분통해 하며, 국가에서 녹을 먹던 관리가 일본천황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을 수 없다며, 단식투쟁 끝에 순국한 선생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정부에서도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하였다.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현판이 걸린 내삼문이 있고, 안쪽으로 장태수 선생을 배향한 사당이 있다.
救國一念으로 소중한 목숨을 草芥와 같이 버린 憂國忠情에 깊은 感謝를 드린다. 하천마을버스정류장에서 오른쪽 마을길로 접어들어 1번국도와 고속도로 토끼굴을 빠져 나가면, 하천마을이다. 메타쉐콰이어 숲길이 마을입구를 장식하고, 시원한 그늘 속에 정자 한 채가 반겨준다.
목마른 이에게는 물 한 바가지로 구세주가 되고, 피로에 지친 나그네에게는 시원한 그늘속이 천국이다. 정자에 올라 신발부터 벗고, 물병을 찾는다. 인심 좋은 마을에서 원기를 화복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용정마을로 들어서는데, 불러 세우는 인기척에 반가운 통성명이 이어진다.
배낭하나 걸머지고 悠悠自適하고 있으니, 어찌 무심하게 보낼 수 있으랴. 방랑시인 김삿갓의 후예 풍운아라는 인사에 이어 육십갑자를 맞추어보니, 5년 후배에다 월남까지 다녀온 동지가 아닌가. 커피 한잔에 융숭한 대접을 받고 보니 호남의 인심을 귀전으로 흘릴 수가 없다.
이곳 용산리에는 전라도에서도 알아주는 萬石꾼 집이 있었다고 한다. 쌀 70가마가 들어가는 뒤주를 행랑 곁에 두고 없는 사람을 위한 규휼미로 활용했다는 美談은 없는 자들이 부담 없이 받을 때, 베푸는 사람의 진정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흐뭇한 미담을 가슴속에 새기며, 고속도로 토끼굴을 빠져나와 용정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1번국도와 나란히 걷는다. 늘푸른농장에는 매실과 복숭아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봉은교차로와 금남초등학교 표지판을 지나 그늘하나 없는 뙤약볕을 4km를 걸어간 뒤에야, 1번 국도를 통과하여 반곡마을로 들어선다.
구릉지를 베개 삼아 터를 잡은 앞들에는 門前沃畓이 펼쳐지고, 수백 년 된 거목에 정자까지 갖춘 반곡마을이 옛 고향처럼 낮 설지가 않다. 모내기철을 맞이하여 금평저수지에서 내려오는 수로에는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밭고랑에도 물길을 터놓아 물 걱정이 없는 마을이다.
금산면 소재지를 바라보면서도, 활등처럼 휘어진 마을길을 돌아가는 것은 쌍룡사와 모악산 마실길 제1코스 정여립 용마무덤이 있어서 일까. 금구향교에서 7.1km, 금평저수지 2.1km 표지판이 갈 길 바쁜 사람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대동계를 조직한 정여립이 구성산과 상두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용마를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정여립은 전주남문 밖에서 태어나, 선조3년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강직한 성품으로 선조와 서인의 미움을 받아 고향으로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모악산 기슭의 제비산(금구면)에 머물면서, 진안군 천반산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개혁파 정여립은 “만민은 평등하고 나라는 만백성의 것이다”라는 만민평등사상을 주장하며 민중을 규합하고 장차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고자 천반산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정여립이 백성을 현혹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다며, 반역자 정여립을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려진다.
천문지리에 밝은 정여립은 큰 별이 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의 명운이 다 된 것을 짐작한 뒤, 장졸들을 마당바위에 모아 놓고 머지않아 나라에 환란이 일어나면 나라를 구하는데 살신성충하라는 훈시와 함께 장졸들을 해산 시킨다.
며칠 후에 천반산의 기슭, 죽도에서 “정공을 모시러 왔다”는 진안군수의 전갈을 받고 정여립은 장군바위에서 천지신명에게 “나라를 굽어 살피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긴 뒤 자진 포박되어 1589년 임지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동구 밖 정자나무 아래서 휴식을 한다. 금구면 소재지를 목전에 두고, 그늘을 자주 찾는 것은 2일간의 여독이 그만큼 많이 쌓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오가 가까워오며 30도가 넘는 가마솥열기가 대지를 녹이고, 발바닥에 잡힌 물집으로 걸음걸음마다 고통이 따른다.
용암교에 올라서면 금평저수지 제방이 보이고, 모악산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金山寺路를 건너 화평마을에서 아름다운 순례 길을 따라 금산중고등학교와 부평마을을 지나 원평장터로 진입한다.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1919년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난 만세운동이 3월20일 원평 장날을 기해 일어난 것이다. 당시의 흔적을 찾을 길은 없지만, 원평장터를 돌아보며 회상에 잠겨본다. 또한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금구원평집회장소로 기록하고 있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 태인으로 빠지는 길목에 동학혁명의 주역 김덕명의 기념비를 조성한 학수제(鶴壽齊)를 찾는다. 김덕명은 1845년 금산면 쌍용리 용계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42세에 전라도 지방에 동학이 포교되고, 최시형에게서 도를 받은 그는 원평에 도회소를 설치한다.
1892년(고종29년) 삼례에서 신원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 여 명의 교도를 동원하고 전봉준이 주동한 고부민란이후 총참모장이 되어 백산에서 활약하였다. 황토현전투에서 전주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원평 귀미란전투에서 패하고 1895년 51세의 나이로 형장에서 순국하고 만다.
용정마을 구현근씨
금산중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