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세계/시산 반년간지

제 81호 - 소녀와 해바라기

김완묵 2015. 1. 29. 11:02

 

일  시: 2015년 3월 8일

 

                                                        유럽 이야기 4

7. 터키 관광

형제의 나라를 찾아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달과 별을 사랑하는 터키는 우리와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주 먼 나라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터키의 이스탄불 공항까지 장장 7.945km에 11시간 30분이 걸리는 지루한 여행이다. 하지만 터키를 방문한 사람마다 극찬하는 터키여행. 그 들의 진실을 확인하기위해서 어렵사리 비행기에 오른다.

 

지구촌 230여개 나라 중에서 유독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6.25참전국이라서 그럴까?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동양의 아주 작은 나라 코리아의 참화를 보다 못한 젊은 청년들이 자원입대하여 달려온 정의의 사도들이 눈물겹도록 고맙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1만5천명을 파견하고, 미국다음으로 많은 3천명의 희생자를 낸 터키가 아닌가. 백골난망이라. 그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못할 일이거늘, 88올림픽 때 터키의 어느 기자가 한국에 와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터키를 아느냐. 어디에 있는 줄 아느냐고 재차 물었지만,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실망을 안고 돌아간 기자는 코리아를 짝 사랑하지말자고 선언한 것이 이슈가 되어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하필이면,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며 형제의 나라 터키와 3,4위전을 치르게 되었다. 올림픽 때의 잘못을 뉘우쳐서 인가. 자국에서 조차 보지 못하던 초대형 터키국기가 관중석을 뒤덮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터키의 승리로 끝난 그라운드에서 양국선수들이 어깨동무로 하나 되어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고, 그 뒤로 양국은 피를 나눈 형제로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인가. 이번여행의 현지가이드인 신 은영씨의 설명에 의하면, 터키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과거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가 귀에 익는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뒤 서방으로 이동하여, 어려운 고통 속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한 것이 터키의 뿌리인 셈이다.

 

돌궐과 고구려는 우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로 불렀고, 세월이 흐른 지금도 터키에 자리 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형제의 나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일제식민사관의 잔재인 역사 교과서와 교육의 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중.고 국사교과서에 돌궐이란 나라를 단지 몇 줄만 적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되고,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된 사실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 우리 교육정책의 맹점이라 할 수가 있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돌궐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기술하여 1.500년 전부터 형제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후손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무지했던 사실을 상기하는 뜻에서, 터키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 본다. 터키는 민주공화국이며 수도는 앙카라(인구4백 만 명)이고, 면적이 780,580㎢(남한의 8배 한반도의 3.5배)에 인구가 8천만 명이다. 국민소득이 1만5천불에 통화는 리라를 사용하고 있다.

 

97%가 아시아 땅이지만 유럽에 편입되어 있다. 북쪽으로 흑해와 서쪽으로 에게해 남쪽으로 지중해와 연결된 소아시아(아나톨리아)반도와 보스포루스해협을 끼고 유럽의 발칸반도와 동트라키아 지방에 걸쳐 동서길이가 2천km이고, 남북으로 1천km의 방대한 면적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또한 매년 1.7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관광 대국이다.

 

역사적으로는 고대 오리엔트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에 이르기까지 5천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동서양의 문명이 어우러진 용광로라 할 수 있다. 주민의 90%가 13세기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와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건설했던 터키의 인접국가로는 불가리아, 그리스, 키프로스, 시리아 이락, 이란,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 8개국이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기수를 북서쪽으로 돌려 푸른창공을 날아오른다. 여행길에 오른 즐거움으로 한 시간 정도는 참을만하지만, 좌석버스보다도 비좁은 이코노미 석에서 11시간 30분 동안 견디기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스탄불(아타튀르크 공항)에서 2시간을 기다린 끝에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이즈미르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서울 시각으로 새벽 4시가 되었으니 여행도 하기 전에 파김치가 되고 만다.

 

우리가 첫날밤을 보낸 이즈미르는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구 200만 명)이자 최초로 공업화된 에게해를 대표하는 항구도시이다. 이즈미르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코낙광장에는 이즈미르의 상징인 시계탑이 있다. 널찍한 대로(大路)와 1924년 이후에 건설한 현대식 건물들이 이즈미르 만 동쪽으로 흐르는 키질출루강의 삼각주와 남쪽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다.

 

                                                 에페소

첫날밤을 4성급인 AKSAN HOTEL에서 보낸 우리는 호텔식으로 내놓은 아침식사가 입에 맞지도 않고, 선 잠속에 맞는 아침이라 먹는 둥 마는 둥 오늘의 일정에 따라 버스에 오른다. 6박 8일 동안 우리를 도와줄 버스기사 우르 베이, 터키 가이드 규네쉬 하늠, 현지가이드 신 은영, 본사 인솔자 이영미 등 4명에 최신형 독일제 벤스(35인승)로 모시고 있으니 귀빈행차가 부럽지 않다.

 

인천공항에서 합류한 일행이 모두 20명이다. 면목동 팀이 8명으로 가장 많고, 대전 팀 3명, 일산 팀 3명, 용인에서 온 부부, 의정부 금오동에서 온 부부, 그리고 우리부부까지 모두20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자17명에 남자가 3명으로 꽃밭 속에 들어온 벌 나비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끼리끼리 어울리다보니 서먹서먹한 분위기 속에 일정이 시작된다.

 

이즈미르 시내를 차창으로 바라보며 1시간 동안 달린 끝에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에페소 유적지에 도착한다. 25만 명이 상주하던 에페소가 대지진으로 한 순간에 폐허로 변한 역사 속으로 들어선다.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가이드는 발밑조심과 소지품조심을 강조하며 단체행동에서 이탈하지 말 것을 재삼 당부한다.

 

가장먼저 찾은 곳이 소극장인 오데온이다. 오데온은 지붕이 있는 원형소극장으로 각종 공연과 귀족들의 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소극장이라고 하지만, 23개의 계단에 14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목조 지붕으로 덮여 있었으나, 지금은 지붕이 날아간 채 공개되고 있다.

 

가이드가 신신당부한 발밑조심이 실감나는 곳이다. 바닥을 대리석으로 깔았는데 1년에 다녀가는 관광객이 천만 명을 넘다보니 바닥이 반질반질 윤이 나고, 비알 진 언덕을 내려가며 관광을 하는 탓에 잠시라도 한 눈을 팔다가는 엉덩방아를 찧기 십상이다.

 

에페소는 기원전 1,050년경 그리스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되었고, 현재의 에페소는 BC 300년경 알렉산더대왕의 휘하 리시마코스 장군에 의해 최초로 건립되었다. 헬레니즘시대와 로마시대에 걸쳐 최대의 황금기를 누리며, 소아시아의 수도로서 인구 25만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좁은 문을 지나면, 크레티아 도로를 따라 고대 그리스유적과 기독교유적, 이슬람유적이 공존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는 길고양이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슬람교에서 생명을 살상하지 않는다는 교리에 따라 길거리에는 개와 고양이가 넘쳐난다.

 

도미티아누스 신전은 로마의 폭군이었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악명 높은 폭군으로 알려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여 사도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킨 장본인이다. 2층으로 지어진 이 신전에는 토대를 포함해 7m가 넘는 도미티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으나, 황제가 암살된 뒤로 신전과 동상이 파괴되어 팔은 셀축 박물관에 남아있고, 머리 부분은 이즈미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바로 앞 광장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 앞에서 카메라가 불을 뿜는다. 니케 여신이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승리의 월계관이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이 종려나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스포츠용품으로 유명한 나이키사가 심 볼 마크를 공모할 때, 니케여신의 치마 자락을 응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190년경 로마가 아나톨리아에 진출하면서 에페소는 그리스시대에서 로마시대로 운명이 바뀐다. 에페소는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에 가장 번성하여 로마의 5대도시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 트라야누스 샘은 트라야누스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102년~104년에 지어진 분수대이다. 샘 중앙에는 실물크기로 만들어진 황제의 석상이 있고, 황제의 발끝에서 흘러나온 물을 귀족계층의 가정과 목욕탕에 공급하였다고 한다.

 

로마는 목욕탕 때문에 망했다는 전설처럼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가 심했다고 한다. 스콜라스티카 목욕탕과 세계최초의 수세식 공중 화장실은, 목욕탕에서 흘러나온 물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변기의 앞과 밑으로 흘러내리도록 만들어 오물이 아랫물에 흘러 내려가고, 앞에 흐르는 물에 손을 닦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셀수스도서관 앞에 있는 마불 거리는 매춘부의 집단촌이다. 신분이 확실한 여인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돌에 새겨진 발 그림보다 큰 사람은 돈을 가지고 오라는 광고 문구가 있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사치풍조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셀수스도서관은 에페소 유적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 옛날 2천여 년 전에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정면 입구만 남아 있지만, 아름다운 코린트식 기둥과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네 명의 여인상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발굴하여 진품은 비엔나로 가져가고, 현재 있는 여인상은 복제품이라고 한다.

 

셀수스도서관은 서기135년 로마시대 아시아지역의 통치자인 셀수스 플레마이아 누스의 아들 아퀼라(C.Aquila)가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지은 도서관이라고 한다. 셀수스도서관은 12,000여권의 장서를 소장하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셀수스 대극장이다. 연극공연이나 시의회가 열리고, 이곳에서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한 곳이다. 대극장은 바닥을 바라보며 부채꼴모양으로 펼쳐진 원형극장이다. 헬레니즘시대에 시작하여 로마시대에 완공된 건물이다. 무대에서 극장꼭대기까지의 높이가 60m에 이르고, 2만5천 여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에게해 연안에서 가장 큰 극장이다.

 

무대 1층과 2층은 네로황제(AD54~68)때 만든 것이고, 3층은 세베루스황제(AD193~211)때 만들었다. 귀빈석 정면으로 2.7m높이의 무대가 있고, 니쉐, 기둥, 부조물, 그리고 동상들로 장식되었으며 양쪽의 경사로를 통해 무대로 갈 수 있다.

 

소아시아지역의 수도였고 기독교의 중심지 화려한 로마도시 에페소는 로마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을 나눈 곳으로도 유명하고, 하드리아누스 신전을 비롯하여 헤라클레스의 문, 메미우스 기념관, 크레티아 거리, 하드리안 신전, 아고라 등 로마시대의 역사 유물이 가득한 보물단지다.

 

에페소는 주변도시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하지만 고난의 식민지역사 속에서도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기원전 6세기에 건축된 아르테미스신전과 로마제국시대에 건축된 도미티아누스신전(기원후 1세기)으로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 받던 대상이어서 기독교 초기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고,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역사에서 비중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기15년 사도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소로 오게 된다.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하여 에페소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바오로 2세가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뒤로 카톨릭 교회의 성지가 되었다.

 

1시간 반 동안, 2천 500년 전의 역사를 돌아보며, 무수한 유물들 속에서 혼미한 머리를 가다듬기가 어렵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가이드의 설명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파묵 칼레

에페소를 떠나 파묵칼레를 오는 동안 차창 너머로 비치는 들녘에는 목화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연간 생산량이 40만t에 달하는 목화는 곡물다음으로 중요한 작물이며, 유럽으로 대량 수출되는 효자종목이다, 목화는 주로 이즈미르와 아다나 지방에서 생산 된다. 양모가게에 들려 패션쇼를 참관하고, 식당에 들려 점심을 해결하면서 3시간이 소요되었다.

 

석양이 내려 비추는 오후, 멀리서 보아도 목화송이처럼 언덕 전체가 은백색으로 빛을 발하며 우리를 유혹한다. 특이한 지형으로 만들어낸 터키 남서부 지역의 온천 파묵 칼레는 새하얀 석회층위로 따뜻한 물이 흘러내리며, 우리나라의 천수답처럼 산 비알을 따라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다랑논이 펼쳐진다.

 

계절에 따라 수량의 차가 있기 때문에 온천수의 방출량을 조절하는 관이 있고, 홈통처럼 패인 수로에 앉아 온천수에 발을 담그면 그동안의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다랑논은 너무도 미끄러워 매사에 조심해야하고,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벼랑 밑으로는 오아시스의 별천지가 펼쳐진다.

 

거대한 물웅덩이가 만들어낸 온천지대. 희귀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위해 전 세계 관광객이 몰려온다. 자연이 만들어낸 특이한 지형과 고대유적, 온천수까지 어우러진 관광지로 소문난 파묵 칼레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우리나라의 온천은 조그만 구멍에서 나오거나 펌프로 퍼 올리는데 비해 이곳은 시냇물처럼 수량이 많이 나온다.

 

또한 온천물에 녹은 석회성분이 오랜 세월(1만 4천년)을 지나는 동안 산을 이루어 마치 목화같이 보인다고해서 목화성(파묵 칼레)으로 부른다. 온천의 수온은 34도로 목욕하기에 알맞은 온도이며, 햇볕에 비추는 온천수의 색깔이 수시로 바뀌어 맑은 날은 옥색으로 보이다가 흐린 날은 하얀색으로, 석양노을에는 황금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로마시대에는 교황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고, 그 당시 세계 각국에서 병 치료를 위해 부자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병이 치료되면 고국으로 돌아가고, 치료를 못하면 이곳에 죽어서 호화로운 무덤을 남겼는데, 현재 발굴된 석관만 1,700여기가 된다고 한다.

 

파묵 칼레의 언덕 위에 있는 고대 도시 히에라 폴리스.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 왕국에 의해 세워지고 오랜 세월동안 여러 세력들을 거치며 번성했던 히에라 폴리스의 전성기는 로마제국이 정복했을 때라고 추정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이곳을 정복한 후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으로 히에라 폴리스라고 불렀는데, 그 때의 명칭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산 비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적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곳은 히에라폴리스 원형극장이다. 수용인원이 1만 5천명. 그 당시 이곳에 거대한 도시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마이크도 없던 시절, 관중석 끝까지 울려 퍼지는 과학적인 구조는 현대인들도 경탄을 금할 수 없다고 한다.

 

히에로 폴리스는 로마제국에 이어 비잔틴제국에 정복되면서 계속해서 번성하였는데, 1354년 있었던 대지진으로 무참히 파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을 새롭게 발굴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원형극장 아래 있는 온천은 클레오파트라가 목욕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바닥이 선명하여 옥색으로 빛나고, 대추야자나무와 어우러진 온천이 너무도 환상적이다.

 

서산으로 내려앉는 낙조의 빛깔이 너무도 고와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휴식처인 호텔로 향한다. 4성급인 C&H HOTEL에 여장을 풀고, 호텔식으로 만찬을 즐긴 다음 아내는 맛사지 실로 내려가고, 나는 호텔 내에 있는 온천수영장에서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낸다.

 

 

국토순례  -  삼남길

 

한양관문길

의주길에 이어 삼남길을 찾아간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각 지방으로 연결되는 6대로 중에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지방을 이어주던 길을 삼남대로(三南大路)라 부른다.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을 이루던 곳. 해남 땅 끝 마을에서 서울의 남대문에 이르는 삼남1000리 길을 새로 복원한다는 취지에서, 2012년 4월 전남구간을 완성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경기구간을 개통하였다는 경기도 문화재단의 설명이다.

 

남태령역 3번 출구로 올라서니 아침 7시다. 일교차가 심한 계절이라 옷깃을 파고드는 아침공기가 제법 싸늘하다. 보무도 당당히 발걸음을 내딛지만 이정표가 없으니 불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의 목적지를 찾아가자면 어차피 남태령을 넘어야 하기에 고갯마루를 향해 심호흡을 가다듬는다. 8차선 도로에는 자동차행렬이 꼬리를 물고, 오른쪽으로 수도방위사령부가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

 

수시로 보아오던 남태령 표지석이 오늘따라 더욱 늠름하게 보인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다. 땅 끝 마을까지 천리가 넘는 삼남길을 답사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아닌가. 4대강 천삼백 km를 답사 할 때에도 처음에는 미미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인간승리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명언을 가슴깊이 되새긴다.

 

용마골 입구에 도착해서야 삼남길 표지판을 발견한다. 글자도 선명한 삼남길, 주황색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고 있다. 대로를 버리고 관악산 기슭으로 파고든다. 새로운 리본 관악둘레길과 겹쳐지는 구간이다. 향기 짙은 아카시아 꽃잎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실개천을 건너 둘레길 제1쉼터를 빠져나오면, 대로변에 있는 과천 성당 앞이다.

 

성당에서 오른쪽 주택 골목으로 접어들어 400여 m를 진행하면 과천시건강가정지원센터 정문이 보인다. 무심코 지나치려다 수령이 60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심상치 않아 가까이 다가서니 경기도 유형문화재 온온사(穩穩舍)자리다. 과천의 객사였던 온온사는 조선 인조 27년(1649년)에 건립되었는데, 정조가 생부인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원묘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참배하기 위해 과천의 객사에서 머물며 주위 경치가 쉬어 가기가 편하다고 하여“온온사”란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느티나무 옆에는 역대 과천현감들의 비석이 한자리에 모셔있다. 조선 정조6년(1782)에 건립된 현감 정동준의 비로부터 1928년에 세워진 변성환에 이르기까지 15명의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장방형의 비좌에 비신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비석이 눈길을 끌지만, 오랜 세월 모진풍파에 글자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것이 흠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과천향교다.

 

관악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향교는 등산객들이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는 곳이라,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자물쇠가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주변을 돌아본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과천향교(果川鄕校)는 태조7년에 창건되어 숙종16년(1690)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 개축하였으며,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 대성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등산로 입구에는 연주대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관악산에 머물면서 한양이 그리워 눈물지으며 바라보는 모습이 안스러워, 이를 본 사람들이 군주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연주대(戀主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세군 요양원을 지나 과천외국어 고등학교 골목으로 내려서면, 별천지가 따로 없다. 도심 속 숲속이다, 하늘을 가린 나무숲속에 산책 나온 사람들의 활기 넘치는 모습에서 살기 좋은 과천을 실감할 수가 있다. 수림 속을 벗어나면 과천경찰서와 시청이 반겨준다. “언제나 살고 싶은 과천”의 슬로건이 마음속 깊이 와 닿는다.

 

탄탄대로 광장에 도착하면, 관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정부과천청사가 반겨준다. 우리나라의 브레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과천정부청사다. 관악산의 정기를 받은 웅장한 건물들,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아늑한 터전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석학들의 집합장소가 예 아닌가.

 

 

“과천부터 긴다” 는 말이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 길에 오른 시골 촌뜨기들이 한양이 코앞에 어른거리는 과천부터 겁이 나서 주눅이 든다는 말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사통팔달로 통하는 세상이지만, 50여 년 전 만해도 서울구경하는 것이 달나라 여행보다도 힘든 세상이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서울도 가기 전에 이곳 과천에 정부의 핵심부가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수자원공사가 있는 대로변을 지나 갈현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공원하나가 나타난다. 이곳이 물맛 좋기로 소문난 “가자우물터”이다. 이 우물은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이 부왕 사도세자의 능침을 참배하러가던 도중에 물맛을 보고, 물맛이 하도 좋아 당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가자우물로 칭하라는 어명이 내린 후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우물 옆에는 커다란 자연석에 “김영철 기념비”라는 표지석이 있다. 외줄타기 중요무형문화재 58호로 지정된 김영철은 아홉 살에 스승 김관보에게서 외줄타기를 배우게 된다. 재주와 슬기가 뛰어난 김영철은 당대 최고의 명창 김동백을 비롯하여 유명연예인들과 공연하며 칠현금이라는 악기를 직접 제작하여 연주할 정도로 음악성에도 뛰어난 재인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전쟁의 영웅 김승철 중위.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맞아 이한림장군 부대가 갈현동 부근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게 된다. 이때 김승철 중위는 부대원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기위해 단신으로 북한군 1개 소대와 맞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고 만다. 살신성인의 충혼비를 바라보며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내 한 몸 살기위해 수 백 명의 고귀한 생명을 헌신짝처럼 버린 선장과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다.

 

도심 속을 지나 한가로운 갈현동 비닐하우스 촌을 지난다. 싱싱하게 자라야할 비닐하우스엔 말라비틀어진 화초들이 을씨년스럽다. 과천지식정보타운이 들어설 곳이라고 한다. 살벌한 문구 속에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의 현수막이 주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곳. 누구의 잘못이라는 판단은 성급하지만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인덕원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인덕원역 골목길로 접어들면 인덕원 옛터가 나오고 이곳에서 제1구간 8.7km를 마감한다.

 

경기 제2길(인덕원길)

인덕원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환관들이 한양에서 내려와 살면서 주민들에게 어진 덕을 베풀었다하여 인덕(仁德)이라는 말과, 이곳에 관원들의 숙소가 있었기에 인덕원(仁德院)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인덕원은 일찍부터 교통이 발달하여 마을과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한양을 오가는 길손들이 끊이지 않았다.

 

정조대왕이 부왕인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위해 여섯 차례나 이곳을 지나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맞아 1597년 5월 초사흘 인덕원에서 쉬어갔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도 적혀 있다. 삼남길은 학의천을 건너 47번 국도를 따라 평촌, 호계, 고천동으로 이어지는 모락산 서쪽으로 추정되지만, 이곳은 의왕신시가지의 도심을 통과하게 되어 편의상 학의천을 따라 백운저수지 쪽으로 선정한 것이다.

 

학의천 고수부지에 도착하면 시원하게 조성된 자전거도로위로 걷기열풍이 실감나게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능수버들 휘늘어진 개천 변으로 붓꽃과 창포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한강에서 27.9km라는 이정표가 반갑게만 느껴진다. 2008년 6월 27일 한강 양화대교 밑에서 백운호수까지 30여 km를 걸어온 경험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이명박 정부가 4대강사업에 피치를 올리고, 자전거천국을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아래 전국의 하천 부지를 자전거 도로로 조성하던 시기였다. 공과(功過)야 후세에 넘기면 되는 일이지만, 자전거 도로만큼은 국민들의 의식수준에 부합(符合)되는 것이고 보면 아주 잘한 일로 보인다.

 

백운저수지에서 시작하여 안양시 비산동에서 안양천과 합류하는 학의천은 3.5km의 비교적 짧은 하천이지만, 전문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흰뺨검둥오리, 쇠오리, 고방오리, 딱새 등 11종 230여 마리의 철새들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눈길이 어지러운 학의JC를 지나면 백운호수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바라산과 백운산, 모락산의 물길이 모여 형성된 백운호수는, 농업용수의 원활한 공급을 목적으로 1953년에 준공한 인공호수다.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북동쪽의 청계산과 남동쪽의 백운산, 그리고 서쪽의 모락산이 만나는 25만 여 평의 분지 중에서 호수가 11만평에 이르고, 나머지는 유원지로 조성되어 있다.

 

도시의 팽창과 더불어 인덕원을 중심으로 의왕시가 발전하고,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울창한 수림 속에 맑은 공기를 찾아오는 인파가 늘어나면서, 대형주차장과 호수순환도로를 따라 라이브 카페, 수상스키, 각종전문요리를 즐길 수 있는 유원지로 조성하여 가족나들이와 데이트코스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