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구간: 솔바람다리
일시: 2014년 9월 22일
구간: 고속버스터미널 - 임영관 - 중앙시장 - 남대천 - 솔바람다리 - 강릉항 - 송정해변 - 강문해변 - 허균생가 -
경포호 - 김시습기념관 - 선교장 - 오죽헌 - 고속버스터미널(18.6km)
제39구간: 임영관-솔바람다리-오죽헌(18km)
대관령을 넘어온 버스가 강릉IC를 빠져나오면, 가장먼저 보이는 건물이 강릉시 청사다. 푸른 숲속에 우뚝 솟은 하얀 건물. 높이가 18층에 연면적이 5만2,000여㎡로 맘모스 빌딩이다. 백년대계를 생각하여 인구50만에 걸 맞는 설계라고 하지만, 강릉의 인구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2만 명이라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강릉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임영관이다. 임영관은 강릉관아에 부속된 건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와서 머물던 건물터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객사문은 강원도에 산재한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51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정문에는 공민왕이 쓴 ‘臨瀛館(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중앙시장을 지나 남대천 고수부지에 도착한다. 강릉시의 중심부를 흐르는 남대천은 대관령과 삽당령에서 시작하는 물줄기가 성산면 오봉에서 모여,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가 32㎞에 이르는 하천이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날 등에서 모아진 빗물이 동쪽으로 흘러내리며 남대천상류에 무성한 소나무 숲을 만들고, 강릉시민의 상수원과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원천이다.
남대천에 걸려있는 강릉교를 건너면서 해파랑 길은 병산마을로 인도하지만, 남대천의 매력에 이끌려 고수부지로 발걸음을 이어간다. 남대천도 한때는 각종 오염물질이 넘쳐나는 시궁창이었다. 1992년 남대천 정화사업이 시행되면서, 주민들의 노력으로 연어도 돌아오고, 은어와 칠성뱀장어까지 서식하는 깨끗한 하천으로 정화되었다.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중앙고등학교를 바라보며 강변길을 걸어가면, 자전거와 산책길에 체육시설까지 조성하여 체력단련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남대천 하류에는 철새들을 탐사할 수 있는 탐조대와 망원경까지 설치하여, 인간과 생물이 공존할 수 있는 친환경공간이 펼쳐진다.
공항대교를 건너 하류로 내려가면, 남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두 물머리에 걸려있는 솔바람다리가 환상적이다. 길이192m의 솔바람 다리는 자전거와 보도전용으로 설계되고, 물고기 몸통을 형상화하여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다리 중심부에 올라서면 바닷물의 거친 물결이 도도하게 강물을 밀어 올리며, 두 물이 한데 어울려 멋지게 보듬어 안는다.
해파랑길(39구간)을 이어가는 안내간판을 확인하기 위해 솔바람다리를 건넌다. 바우길 안내도 옆으로 “아름다운 바다 위를 나비처럼 훨훨 날아간다.”는 아라나비체험장이 있다. 발동하는 호기심으로 달려가지만, 휴업중이라 솔바람다리를 다시 건너 강릉여객터미널로 향한다.
강릉항은 울릉도를 오가는 뱃길이 가장 가까운 항구다. 울릉도 저동항까지 2시간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는 선전문구가 관광객을 유혹한다. 관광객도 찾지 않던 강릉항 여객터미널에 솔바람다리와 죽도봉 공원, 커피거리가 있는 안목항까지 멋진 드라이브 코스를 조성하여 강릉의 새로운 관광코스로 부상하고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커피거리를 조성한 안목항. 서양에서 들어온 식품이고 보니, 거리 또한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커피를 마셔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습관이다.
우리 조상들도 예로부터 차를 즐겨 마셨다. 고구려시대부터 전해온 차 문화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귀족과 승려층에서 즐겨 마셨고, 이조시대에 들어와 양반들의 전유물이 되어 예술의 한 부분으로 승화되었다.
차를 우려내는 다기를 정갈하게 차려놓고,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코로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차 문화가 우리의 전통예절이었다. 곡우 이전에 따는 차를 우전이라 하여 으뜸으로 치고, 녹차와 발효차로 가공하여 마시던 차 문화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1890년 이후라고 한다. 서양외교관들이 왕실과 귀족들에게 환심을 사기위해 진상하면서 보급이 시작되고, 1920년대부터 명동, 충무로를 중심으로 커피전문점(다방)이 등장하면서, 6.25전쟁이후 본격적으로 커피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커피 전문점이 즐비한 안목해변에서 강문해변까지 5km에 이르는 소나무숲길이 시작된다. 동양최대를 자랑하는 소나무 숲. 솔바람이 불어오는 그늘 속을 걸어가노라면, 심신의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동해안을 답사하며 수많은 솔밭을 걸어왔지만, 강릉의 솔밭이 으뜸이다. 나무테크 대신 마대를 깔아 반영구적으로 친환경에도 좋고, 발바닥에 전해오는 감촉이 부드러워 피곤한 줄을 모른다.
강문해변에 도착하면, 손님을 부르는 횟집들이 즐비하다. 군침 도는 회집들을 지나가는 중에 ‘회막국수집’이 눈에 들어온다. 붙임성 있는 아주머니에 이끌려 회덮밥으로 정하고, 반주까지 걸치고 보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강문해변과 경포해변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경포천위로 아름다운 강문솟대다리가 걸려있다. 송강정철의 ‘관동별곡’중에서 강릉을 노래한 구절을 인용하여 만든 명소다. 또한 푸른 숲속을 배경으로 공사가 한창인 ‘호텔현대경포대’ 가 완공되고 나면, 경포해수욕장과 경포호수를 바라보는 명소로 탄생할 것이다.
경포호수 순례가 시작된다. 강릉에서 대표적인 명소라고 하면, 단연 경포호수를 꼽는다. 경포호수는 모래톱에 바닷물이 가로막혀 형성된 자연석호다. 예전에는 호수의 둘레가 12km이었지만, 토사의 유입으로 지금은 4,3km로 작아졌다고 한다. 호수의 평균수심이 2~3m정도로 얕고, 호수 한 가운데 월파정과 새 바위가 있어 풍치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경포호수는 수면이 거울과 같이 맑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수 동쪽은 경포대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소나무숲과 벚나무가 어우러진 도립공원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허균과 허난설헌’ 기념관이다.
울창한 소나무숲속에 자리 잡은 허균생가. 홍길동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은 1569(선조 2)년에 태어나서 1618(광해군10)에 참수형을 당한 조선중기의 학자, 문인, 정치가이다. 대대로 학문에 뛰어나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 그리고 누이인 난설헌(본명: 초희)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다.
정시(庭試)합격으로 벼슬길에 오른 그는,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한다. 그 후 사신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장대가로 명성을 날리는 한편,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 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사당에 봉안된 허균의 초상화는 정갈한 옷차림에 날카로운 눈매가 범상치 않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난 초희는, 오빠와 동생사이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글로,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냈으니, 천재의 기질을 타고난 신동이 아닌가.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신선시와 삶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 ‘난설헌집’에 담겨있다.
1563(명종1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은 엽(曄)의 딸이고, 봉(篈)의 여동생이며, 균(筠)의 누나이다. 15세에 혼인했으나, 관직에 나간 남편은 기방을 드나들며 酒色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시어머니의 시기와 질투로 학대를 당한다. 더구나 어린 남매를 잃고,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어, 동생 허균도 귀양을 가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에 요절을 하고 만다.
美人薄命(미인박명)이라 했던가. 허난설헌의 동상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哭 子’ 의 시 구절은 자식 잃은 어미의 애끊는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수 백 년 세월을 지나온 배롱나무는 알고 있겠지, 허난설헌의 심정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시인 허난설헌은 모진풍파 속에서 꽃망울도 터트리지 못하고, 가녀린 꽃대가 꺾이고 말았으니 허망한 일이다.
다시 경포호수로 올라선다. 시비와 조각상을 조성한 호숫가에는 벚나무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우고, 연잎이 만발한 늪지로 산책길이 이어진다. 삼복더위의 열기 속에서 수줍은 꽃잎을 피워 올리더니, 어느새 구멍이 숭숭 뚤 린 연밥이 탐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의 시 구절을 읍 조리며 도착한곳이 강릉지역 三一獨立萬歲運動紀念塔 앞이다.
이곳에서 경포대쪽은 다음 행선지로 미루고, 매월당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기념관의 문이 굳게 잠기고, 건물수리가 한창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본관이 강릉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1435년 한양에서 출생한 김시습은 어려서 신동의 이름을 떨쳐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삼각산 중흥사에서 단종의 폐위소식을 듣고 세상을 비관하여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21세의 나이에 머리를 깎고, 유리걸식하며 방랑의 길을 걷는다. 경기도 양주(楊州)의 수락산(水落山)을 시작으로,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며 금오신화를 저술하고, 노년엔 부여 무량사에서 보내다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선교장이다. 선교장(船橋莊)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한 99칸의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서, 국가지정 중요민속 문화재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개인소유의 국가 문화재이다.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 무경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며, 예전엔 배로 다리를 만들어 경포호수를 건너다녀서 선교장이라 불렀다.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인 오죽헌으로 향한다. 경포동주민센타를 지나 난곡교를 건너면, 곧바로 양지바른 언덕을 배경으로 오죽헌이 자리 잡고 있다.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이란 이름은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율곡이이선생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얻은 것을 보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見得思義(견득사의)는 공직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어머니는 오만원, 아들은 오천원 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모신 신사임당과 율곡이이선생은 우리의 사표로서 영원히 추앙받는 모자상이다. 보물로 지정된 몽룡실이 있는 오죽헌, 용이 문머리에 서려있는 태몽을 꾸고 신사임당이 조선최고의 학자 율곡 이이선생을 낳았다고 한다.
율곡이이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는 인조임금이 율곡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이 막힘없이 통달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사임당과 율곡의 신화를 지켜보았을, 600년이 넘는 배롱나무가 오죽헌 앞마당에서 오늘도 변함없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박물관 앞뜰에 조성된 신사임당의 인자한 모습을 바라보며, 강릉이 낳은 두 집안이 너무도 대조되는 삶을 실감한다. 두 집안 모두 명문가에서 천재적 기질을 타고난 신동이었다. 율곡의 집안은 천추만대에 추앙을 받는 명문가의 길을 걸어왔지만, 허균의 집안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참수형을 당하는 비극의 종말을 맞고 말았으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의미심장하게 새겨야할 사표라고 할 수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