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락산 길
제3길: 모락산길(12.6km)
일 시 : 2014년 5월 17일
구 간 : 백운호수 - 임영대군묘 - 오매기 마을 - 김징묘역 - 사근행궁터 - 의왕시청 - 골사그네 - 지지대비(12.6km)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아름다운 호수에 마음을 빼앗긴 채 아까운 시간이 흘러간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호수삼거리에서 문화예술로를 따라가는 중에, 뒷골삼거리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잘록한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임영대군의 사당이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1418년~1469)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근검하여, 아랫사람들을 대하는데도 교만하지 않고 자상했다고 한다. 안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을 한 임영대군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사물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 총통을 제작하는데 직접 참여하여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으며, 화차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
사당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계단에는 아담한 연못이 있고, 마을길을 돌아서면 사당에서 남쪽으로 200 여m 떨어진 곳에 임영대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돌계단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묘역은 3단으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임영대군의 둘째 형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페하고, 왕위에 오른 후 셋째형인 안평대군마저 죽이는 살벌한 세상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모락산 자락의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며 대궐을 향해 망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능안 마을 가는 길엔 출출한 시장 끼를 달래주는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차량도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길에 특색 있는 식당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중에 가야금식당이 눈길을 끈다. 심금을 울리는 가야금소리가 가는 발길을 부여잡는데, 무심하게 뿌리칠 수가 있는가. 한정식으로 배를 불리고, 산길로 접어드니 세상이 모두 내 것인 것을. 오호라 즐거운 인생이어라.
울창한 숲속에 잘록한 허리, 서낭당의 돌무더기까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갯마루는 10 여 년 전, 백운산에서 모락산으로 종주 길에 지나간 길이다. 옛 추억을 떠 올리며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던 리본을 찾아보지만,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가 있는가.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남쪽의 오매기 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사색의 길이다. 수양대군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오백년 전이나, 세월호의 참사로 온 나라가 초상집처럼 슬픔에 잠겨있어도 울창한 숲에 가린 하늘이 보이지 않아 임영대군이 천수를 누린 곳이 예아닌가. 수 백 년을 지나온 고목나무가 겉껍질만 남긴 채 속이 텅 비어 있어도 사랑의 표시로 ♡를 그려내고 있으니, 마음이 끌리는 곳이 오매기 마을이다.
오매기 마을은 용머리, 목배미, 사나골, 백운동 등 작은 마을로 구성되어 조선시대에는 오막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문화류씨를 비롯하여, 진씨, 노씨, 마씨, 문씨가 움막을 지어 정착하므로 오매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용하던 오매기 마을을 벗어나면 모락산 자락(터널)을 빠져나온 차량들이 과천과 의왕을 이어주는 도시고속도로위로 질주하고 있다.
이제는 김징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이다. 고속도로 굴다리를 빠져나가면 조용한 숲속 길이다. 시원한 그늘속이 좋아 무작정 걷다보니 김징의 묘소를 지나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고,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만다. 김징(金澄, 1623~1676)이란 인물은 조선후기 문신이다. 그의 아들로부터 시작하여 100년간 6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인 청풍김씨 세거지라고 한다. 장남 김구-우의정, 손자 김재로(金在魯)-영의정, 증손 김치인(金致仁) -영의정, 차남 김유(金楺)-대제학, 손자 김약로(金若魯)-좌의정, 손자 김양로(金陽魯)-우의정, 손자 김상로(金尙魯)-영의정 등 영조시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다.
의왕요금소에서 나오는 고소도로 밑을 통과하여 모락산 기슭에 있는 현충사로 향한다. 6.25전사에 빛나는 모락산 전투(慕洛山 戰鬪)는 1951년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한국군 1사단 15연대와 중공군 1개 연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수원에서 북쪽으로 지지대고개를 넘어서면 좌전방에 수리산, 우전방에 백운산과 모락산이 우뚝 솟아있다. 안양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할 중요한 지역이다. 피아간에 격전지를 사이에 두고 4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중공군 663명을 사살하고, 90명의 포로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린다. 한편 한국군도 전사 70명에 2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에게 흥망성쇠(興亡盛衰)란 비일비재한 것이 아닌가. 숨 가쁘게 돌아본 6.25전사를 뒤로하고 사근행궁(肆覲行宮)으로 향한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성으로 옮기는 중에 경기감사에게 이르기를 이곳 노인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라하고, 행궁을 지으니 이곳을 사근행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근행궁 표지석이 고천동 주민센터 앞마당에 있다. 지금의 고천동 주민센터 자리는 옛날 사근행궁 터라고 한다. 의왕의 중심지이자 현릉원으로 능행하던 정조대왕이 쉬어가던 곳이기도 하다. 행궁 터였던 이 자리가 예전에는 면사무소가 있던 자리이고, 이곳에서 주민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던 역사적인 자리였다.
8차선 경수대로를 건너 의왕시청방면으로 진입한다. 인구16만 명의 의왕시는 경기남부 교통 요충지이자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는 고장이다. 과거에는 의곡면과 왕륜면에 속하던 의왕시가 1914년 행정개편으로 의곡면과 왕륜면을 합하여 수원군 의왕면이 되면서 현재의 지명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지대고개 아래 삼태기처럼 오목한곳에 골사그네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산세가 험하고 맹수가 많아 사람들이 안주하기를 꺼려하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경주이씨, 경주배씨, 마씨들이 살기시작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1970년 무렵 식목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서 직접 식목일 행사를 거행하고,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마을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서면, 수원시 둘레 길과 한남정맥, 삼남 길이 함께 어울리는 의미 깊은 길을 만난다. 한남정맥은 백두대간이 속리산 천황봉에서 한남금북정맥으로 분기하여 내려오다 칠장산(492m)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한강 남쪽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분계 하는 마루금을 한남정맥이라 하며 구봉산(455m), 문수봉(404m), 함박산(349m), 석성산(471m), 광교산(582m), 백운산9564m), 수리산(395m), 소래산, 계양산(395m), 가현산(215m)으로 북서진하여 강화대교 전 우측의 문수산 보구곶리에서 맥을 다 하는 173km의 여정을 일컫는다.
어제 내린 비로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와 미세먼지가 씻겨 내리고 싱그러운 아침공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지지대비와 만난다. 지(遲)자를 파자하면 가파른 언덕을 소 한 마리가 힘들게 올라간다는 뜻으로 “더디다”로 표현한다고 한다. 정조가 화성을 떠나 환궁할 때 이 고개를 넘으면 한동안 다시 어버이의 묘소를 볼 수가 없음을 한탄하며 얼마를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여 행차가 너무 지지하다하여 그때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수십 길 벼랑 아래로 의왕IC를 넘어온 1번 국도가 북수원 IC를 향해 신나게 질주하고 있다. 지지대고개의 옛말도 역사의 추억 속에서 아른거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현실세계에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실감하며, 삼남길 3구간(모락산길)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