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구간: 죽서루
일시: 2014년 4월 23일
구간: 공양왕릉입구 - 근덕면사무소 - 덕산해변 입구 - 상맹방 해수욕장 - 삼척역 - 죽서루- 삼척 터미널 (24.8km)
제31, 32구간 : 공릉왕능-죽서루 (25.6km)
해파랑길 답사를 위해 8개월 만에 찾는 감회가 새롭다. “함께하는 등산클럽”과 오륙도에서 함께 깃발을 올렸지만, 강원도 고성까지 완주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다. 전적으로 내개인 사정으로 대열에서 이탈하고 말았으니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13년 건강검진을 받은 결과 “만성기관지염”으로 판정이 나왔다. 신생아 시절부터 잦은 병치래를 달고 살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던 약골이었다. 그러던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감기한번 걸리지 않고 70평생을 건강하게 살아왔다. 그뿐이랴. 월남전에 참전하여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고, 40대 후반부터는 산 사나이로 돌변하여 국내의 千 여산을 오르며 백두대간을 완주하고, 4대강 천 삼백여 km를 완주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어인 변고란 말인가.
의사의 진단으로는 그 동안 너무 심한 운동으로, 기가 약해지면서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찬바람이 불어오며 기침도 심해지고 누런 가래가 쏟아지며, 칼로 도려내는 듯이 통증이 심하여 외출도 못하면서 고통의 날을 보냈다. 몇 달 전만해도 세상에 거칠 것 없이 돌아다녔는데,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전전하지만, 백약이 무효라 특별한 처방 없이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이다. 기관지에 좋다는 산도라지 액기스를 장복하며, 추운 겨울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다행이 날씨가 풀리면서 병세가 호전되어 둘레길 정도를 산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인가. 겨우내 그 고생을 하고서도 병세가 호전되고 보니, 미련을 떨쳐버릴 없으니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참아도 병이된다고 하지 않던가. 여러 날 준비 끝에 동서울터미널로 달려간다. 삼척까지 3시간 10분.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추억의 순간들. 다시 시작한다는 설램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삼척터미널에서 시내버스(24번)로 40여분을 달린 끝에 공양왕릉 입구에 내려선다.
공양왕릉은 버스 정류장에서도 바라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지만, 너무도 초라한 왕릉 앞에서 마음이 서글퍼진다. 500년 사직이 무너진 마지막 왕, 그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공민왕 이후로 허울 좋은 왕으로서 실권도 없이 권문세도정치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던가.
비문에 의하면 강원도기념물 71호로 지정된 궁촌왕릉은 고려의 마지막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우, 왕석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다. 왕위 4년 만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함에 따라 고려는 멸망하고, 공양왕으로 봉하여 원주로 유배하고, 그도 미덥지 않아 3부자를 삼척시 근덕면 궁촌으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한 달 만에 사사하고 말았다.
패자는 말이 없다. 민초들의 무덤에도 망주석과 표지석에 상석은 갖추게 마련인데, 왕의 무덤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이 봉분만 덩그러니 버림받고 있으니 보기에도 민망하다. 그나마 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이 묘지를 개축하고, 1977년 삼척군수와 근덕면장이 개축 보수하여 이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공양왕의 넋이 환생한 것인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하얀 민들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혀를 끌 끌차며 돌아선 곳이 궁촌 마을이다. 너른 마당에는 이곳의 특산물인 미역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7-80되어 보이는 촌 아낙들이 뙤약볕아래서 미역줄기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모습은 시간도 정지된 듯, 조용한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버스 정류장으로 되돌아 나오면 삼척이 자랑하는 궁촌레일바이크 승강장이다. 2시간에 한 번씩 운행하는 궁촌레일바이크는 2인승과 4인승으로 구분되고, 용화역까지 7.2km에 1시간이 소요된다. 국내에서 해변가를 달리는 레일바이크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30구간을 지날 때 한번 기대하면서 다음목적지로 향한다.
오늘 예정된 구간이, 공양왕릉 입구에서 덕산해변까지 31구간(9.8km)과 죽서루가 있는 삼척시내까지 32구간(15.4km)에 25.2km 거리다. 평소의 체력이라면 해 볼만 한 거리지만, 현재의 컨디션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7번 국도를 따라가는 31번구간은 특별한곳이 없어 시내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근덕면사무소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나오면 삼척노인복지센터가 있고 곧바로 마읍천을 만난다. 낙동정맥이 남진하며 고산준령을 이루는 응봉산(1267m)과 사금산(1092m)에서 발원하여 상마읍리와 중마읍리를 두루 거치며 동막리를 지나 덕산해수욕장과 맹방해수욕장을 사이에 두고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덕산교를 건너 제방을 따라가면 작은 공원이 나타난다.
거창한 원석위에 검은 글씨로 “원전백지화기념탑”이라는 비석이 서있다. 근덕면민들이 결사 반대하여 덕산원전 건설계획을 취소시키고, 그것을 기념하여 세운비석이다. 처음에는 90%가 넘는 삼척주민들이 찬성했으나,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고, 삼척시장 주민소환제까지 주장하며 일구어낸 승리라고 한다.
덕산해수욕장과 맹방해수욕장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있는 산이 덕봉산이다. 전설에 의하면, 금강산에서 동해바다로 떠내려 온 덕봉산은 삼형제인데, 맏이는 마읍천 하구의 덕봉산이요, 둘째는 호산의 해망산, 막내는 울진의 축산이라고 한다. 덕산해수욕장에서 덕봉대교를 건너면 그 유명한 명사십리 맹방해수욕장이 반겨준다.
푸른 바다와 입자고운 백사장, 울창한 소나무숲길이 어우러진 맹방해수욕장은 그 길이가 장장 시오리길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해변 길, 부서지는 파도가 모래톱을 삼키며 포말을 일으키는 정경이야말로 선경이 따로 없다. 송림사이로 아름다운 리조트가 자리를 잡고, 한가로이 해변을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비친다.
모처럼 해파랑 길 이정표를 만난다. 울창한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길을 나서니 삼척이 자랑하는 유채꽃 밭이 펼쳐진다. 하지만 관광객도 별로 없는 쓸쓸한 모습이 안쓰럽다. 한 눈 팔고 있는 사진사에게 사진 한 컷을 부탁하며, 말을 건네니 지난겨울의 폭설로 유채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파장이 되고 말았다며, 그때를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우리야 안방에서 TV를 보면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현 지민들의 타들어가는 분통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쌓이고, 치우고 나면 또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하늘을 원망하던 그들. 민가의 지붕과 맞닿은 눈높이로 이웃과도 단절된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는 설명이다.
맹방해변과 오분해변을 가르는 고개가 한치재다. 자동차들이야 한치터널로 손쉽게 통과하지만,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을 찾아가는 풍운아(風雲兒)에게는 고통의 연속이라, 한치고개 십리 길은 그리 녹녹치를 않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지다가도 또 다시 멀어지는 고갯마루, 하지만 힘들게 올라선 고갯마루는 이 세상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이 아름답다.
일망무제(一望無際)라.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시오리 맹방해수욕장이 시야에 가득하고, 유성의 꼬리처럼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가는 쾌속선과 한자리에 정박한 채 때를 기다리는 어선들, 급경사를 이루며 바다위로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비경을 연출한다.
올라올 때의 고통도 내려가는 상쾌함에 비할 수 있으랴.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거칠 것이 없고, 때 이른 여름 날씨가 등줄기로 쏟아져도 목적지가 가까워짐에 따라 생기가 난다. 봄단장이 한창인 삼척역에 도착한다. 1936년 개통된 삼척선은 동해역을 연결하는 영동선의 지선으로 길이가 12.9km에 불과한 미니철도이다. 60년대는 특산물을 실어 나르는 황금노선이었지만, 지금은 강릉역까지 관광객을 위한 바다열차가 운행 중이다.
오십천 제방으로 올라선다. 오십천은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미인폭포를 빗어놓고, 삼척시내로 들어오며 죽서루의 비경을 간직한 채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가 59.5km에 이르는 하천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삼척에서 발원지까지 가는 동안 마흔 일곱 번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오십천으로 부른다고 한다.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관동팔경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유독 죽서루만이 강가에 자리 잡고 있다. 오십천이 휘도는 벼랑위에 정면이 7칸이요, 측면이 2칸으로 세운 2층 누각이다. 동쪽에 대나무 숲이 있어서, 죽서루의 동편에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어서 죽서루라 부른다.
옛 성현들이 즐겨 찾던 죽서루의 서쪽에는 송강정철의 가사비가 있다. 조선중기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그는 1536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명종16년(1561)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별시에도 장원급제한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되어 금강산을 비롯하여 동해안 일대를 유람하면서, 그 유명한 관동별곡을 발표하였다.
누각 안에는 부사 허목이 쓴 죽서루기와 고려 말의 학자이며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의 시와 근대의 서예가 일중 김현충이 쓴 율곡이이의 죽서루 차운, 등 26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죽서루(竹西樓)”의 현판은 숙종41년 삼척부사 이성조의 글씨이고,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 현판은 조선헌종3년 삼척부사 이규헌의 글씨라고 한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삼척의 아름다운 명소들을 둘러본 것보다도 나의 건강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완치된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 속으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조심 또 조심하며 나머지 시간들을 소중하게 활용하고 싶은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