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제21구간: 축산항

김완묵 2013. 9. 2. 06:10

일   시: 2013년 9월1일

경유지: 창포말등대 - 대탄리 - 오보리 - 석리 - 경정리 - 축산리해안 - 현수교 - 죽도산 전망대 - 영양남씨 발상지 - 괴시리전통마을 (15.5km)

 

                               

                                   제21구간: 영덕해맞이공원 - 축산항(15.5km)

 

동대문 역사역에서 출발한 하나관광이 강남을 순회하여 복정역에 도착하며 滿車를 이룬다. 40인승 버스에 빈자리가 없이 만원사례를 이룬 것은 해파랑길 21구간을 지나오며 처음 있는 일이다. 거친 풍랑 속에서 만선의 꿈을 이룬 어부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모두들 환한 미소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영덕의 상징인 대게가 등대를 감싸고 있는 창포말 등대에서 시작하는 B코스는 해맞이공원 계단으로 내려서며 해안가 산책길을 따른다. 강구면과 축산면 중간 쯤 되는 해안선에 위치한 해맞이공원은 1997년 화재로 해안뿐만 아니라 인근 山 전역이 불타버린 자리를 복구하며 “자연 그대로의 공원” 조성을 목표로 바다와 연계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각종 야생화와 꽃나무가 어우러진 나무계단을 따라 산책로를 내려서면, 5분 거리에 대탄리 해수욕장이 반겨준다. 피서인파가 휩쓸고 간 빈자리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돈다.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작은 포구는 피서철이 지나고 나면 찾는 발걸음도 없이 마을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이어지는 조용한 어촌마을이다.

 

 

잠시 후 옹기종기 횟집들이 모여 있는 오보리 어촌마을을 지나 고개하나를 넘으면 영덕과 영해로 가는 7번국도와 만나게 되고,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전형적인 갯마을 해수욕장이다. 규사질 성분의 왕모래가 깔려있는 해수욕장은 몸에 잘 달라붙지 않아 모래찜질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주변의 갯바위들은 감성돔, 광어, 가자미, 우럭, 보리멸치 등이 잘 잡히는 바다낚시터로 유명하고, 푸른 대게의 길로 명명된 해안 길을 따라 노물리 방파제에 도착하면 물질을 끝내고 뭍으로 올라오는 해녀상이 반겨준다. 삼복더위로 애를 먹던 가녀린 몸매에도 어느새 해안가 바위틈을 비집고 갈대와 들국화가 가을바람에 살포시 눈인사를 하고 있다.

 

 

석리어촌체험마을은 마을에 돌이 많아 석동이라 부르다가 석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병자호란당시 순흥안씨가 정착하며 마을이 형성되고 기암괴석과 해안절경이 빼어난 곳으로 돌미역, 돌김채취, 데트라포트를 쌓아 만든 해수풀장, 해풍산림욕에 감성돔, 놀래미, 망상어가 주어종인 갯바위낚시터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란 문화부와 관광공사가 전국의 아름다운 길 7개 코스를 선정했는데, 그 중 한곳이 영덕 강구항 언덕에서 강원도 삼척까지 이어지는 “동해트레일” 64km 구간이고, 그 중심에 석리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서 보면 가파른 해안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70여 호의 주민들이 가파른 산 비알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정겹게 보인다.

 

 

마을을 끼고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면 불루로드 종주를 확인하는 스탬프가 있고, 철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경관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아슬아슬한 해안 길을 15분간 걸어가면 군인 상을 만난다. 관광객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고픈 마음에서 세웠다는 군인상은 늠름하고 경직된 군인이 아닌 옆집 아저씨처럼 한손을 번쩍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감성돔이 아니면 잡어로 취급 한다”는 용바위 낚시터에는 벼랑 끝까지 자리를 잡은 낚시꾼들의 모습이 위태롭기만 하다. 갯바위까지 안전산책로를 설치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쉬어갈 수 있는 벤치에서 바라보는 동해는 티끌하나 없이 깨끗한 에메랄드 해안이다.

 

 

이곳바다에서 생산하는 미역은 국을 끓여 일주일동안 두어도 미역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질이 좋아 전국각지로 비싼 값에 팔려나가는데, 거친 파도가 밀려오며 미역이 깨끗하고 질긴 것으로 알려져 인기가 높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짐을 풀고 휴식을 하는 중에 안타까운 소식을 전달 받는다.

 

 

일행 중에 한분이 해변의 날카로운 돌에 부디 치며 안면에 타박상을 입었다는 소식이다. 모두들 긴장이 되어 무사하기를 바라지만 응급조치를 위해 후송중이라는 전갈이다. 好事多魔라고 해야 할지, 滿車의 기쁨도 뒷전으로 밀려나고 모두들 마음이 숙연해진다. 안전사고에는 예고가 없고 순간적인 방심이 큰 화를 당하는 것이니, 안전산행을 위해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제주도의 쪽빛바다보다 아름다운 석리 해안가. 에메랄드의 고운빛깔이 암초를 덮치며 일어나는 물보라, 그렇게 심한 풍랑 속에서도 살아남은 소나무 한그루. 정말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이 절로난다.

 

 

촛대바위가 반겨주는 경정리는 오두산과 매화산에 둘러싸여 오매(烏梅)라 불렀으며, 뒷산이 까마귀가 춤을 추는 형상이라 오무(烏舞)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500여 년 전 권씨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마을 앞 동신바위에 심은 향나무가 현재까지 살아남아 동신당 뒤편의 기암절벽을 덮고 있어 道에서 보호수로 관리하고 있다.

 

 

한국아름다운길 표시판이 있는 곳에서 바닷길을 따르면, 험난한 등산로가 펼쳐진다. 아슬아슬한 벼랑의 연속이라 산책로가 조성되기 전에는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던 위험한 곳이다. 비알 길을 내려가면 두어 길 남짓 되는 벼랑에는 로프까지 걸려있고, 모래톱을 질러가면 대게원조마을 기념비가 서있다.

 

 

요즘에는 원조가 하도 많아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영덕 앞바다는 대게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도 강구와 축산사이의 해역이 가장 적합한 서식처로 차유마을이 대게원조마을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용두암을 지나며 험한 벼랑길도 끝이 나고, 죽도산전망대가 우리를 손짓한다. 발이 푹푹 빠지는 백사장을 통과하면, 아름다운 현수교를 만난다. 축산천을 가로지르는 불루로드교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물위로 건설된 교량으로 길이가 약 100m 정도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 곧바로 죽도산으로 향한다.

 

 

대나무가 많은 죽도산은 원래 섬이었으나 일제시대 방파제를 쌓으며 매립된 산이다. 산전체가 희귀식물이 자생하는 자연생태보고로 각광을 받는 죽도산은 해발 80m 중심부에 하얀 등대전망대가 있어, 축산항과 주변의 경관을 바라보면 오늘 걸어온 동해안의 절경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강구항과 더불어 영덕을 대표하는 축산항은 낙동정맥에서 곁가지로 뻗어 나온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해안선을 형성하여 동해안 제일의 미항으로 알려진 곳이다. 부둣가로 내려오면 영양 남씨 발상지 표지석을 만난다. 설화에 의하면 당나라 안렴사공 김충이 712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축산항에 기항하게 된다.

 

 

신라의 경덕왕이 당의 천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천자는 김충 부자의 생존은 천우신조라 그들이 원하는 곳에 살도록 허락을 한다. 김충 부자가 신라에 살기를 원하자 경덕왕은 여남에서 왔다하여 성을 南이라 하사하고 그의 아들 석중을 영양김씨로 살게 하였으니 영양 남씨와 영양김씨의 발상지로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서 해파랑길 21구간도 끝을 맺고, 점심이 예약된 영해시장으로 가는 길에 괴시리 한옥마을을 찾는다.

 

 

괴시리 전통마을은 그 옛날 호지촌 이었을 때, 가장 먼저 정착한 함창김씨가 목은 이색의 외할머니셨다고 한다. 외가댁에서 태어난 이색선생은 중국 원나라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고향에 돌아와 중국의 괴시마을과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하다고 하여 괴시(槐市)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주봉인 망월봉아래 여덟팔(八)자 형국의 괴시(槐市)마을은 고려 말 함창 김씨가 가장 먼저 터를 잡았고, 이조 명종 때 수안김씨, 영해신씨가 입촌하고, 인조8년에 영양남씨가 정착하면서, 삼씨성이 집성촌을 이루며 40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괴시리에 남아있는 고택은 30여 채로 대부분 1800년대 후반에 지은 문화재급 건물이다.

 

 

고색창연한 전통마을의 고샅길을 지나 너른 공터로 나오면, 전통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괴정(槐亭)에 이른다. 경북문화재자료 제39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누각으로 1766년(조선 영조 42) 괴정(槐亭) 남준형(南峻衡)이 고려말의 유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경목재(景牧齋)”라고 한다.

 

 

괴정을 찾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영양남씨 종부 이분녀여사로부터 향기 그윽한 작설차를 대접받으며 괴시리와 전통마을의 유래를 듣고, 동해안 3대평야로 손꼽히는 영해평야를 바라보며 예약된 식당을 찾아 영해시장으로 향한다. 영덕군에서 규모가 가장 큰 영해시장은 한때 동해안일대에서 거래량이 많은 시장으로 소문이 나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영해, 영덕 지역에서 잡은 고등어를 내륙 지방인 안동으로 들여와 판매하려면, 꼬박 하루가 걸려야 임동면 채거리 장터에서 물건을 넘길 수 가 있는데, 이때 고등어는 뜨거운 날씨를 견디면서 뱃속의 창자가 상하게 되므로 이곳에서 창자를 제거하고 뱃속에 소금을 한 줌 넣은 것이 얼간재비 간 고등어이다. 임동면에서 다시 걸어서 안동장에 이르러 팔기 전에 한 번 더 소금을 넣은 것이 안동 간 고등어로 탄생하는 과정이다.

 

 

이렇듯 번성했던 영해시장은 1919년 3월 18일, 영해장날을 기해 북부4개 면민 3천여 명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우국충절의 고장이다. 영덕이 낳은 항일운동의 대명사인 신돌석장군은 평민의병장으로 30년의 짧은 인생 중에서 12년간 의병활동에 몸 바친 우국지사로 1962년에 건국훈장을 수여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