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 영산강
1. 대나무의 고장 담양
4대강 답사도 영산강을 남겨두고 주춤거린다. 눈이 많은 호남지방이라 한 겨울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봄이 오기를 기다리다 아내와 함께 1박2일 일정으로 담양의 자전거 도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관광코스를 답사하는 색다른 체험을 시도한다.
순창IC를 내려서 먼저 찾은 곳이 순창고추장체험마을이다. 순창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몰라도, 순창고추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특산품이다. 순창고추장기능1호점인 문정희 할머니 고추장을 비롯하여 점포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호객행위가 벌어진다.
사진을 찍어주는 친절로 시선을 끄는 서영순 할머니 댁에서 매실 장아치를, 막걸리 공세를 펴는 김영순 전통 집에서 된장단지를 사들고 박물관으로 향한다. 고려 말 이성계가 순창군 구림면 만일사에 기거하고 있는 무학대사를 찾아가던 중, 어느 농가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고추장맛을 잊지 못해 왕으로 등극한 뒤 진상품으로 선정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순창고추장은 독특한 재래비법에 의해 제조되어, 혀끝에 닫는 알싸한 맛과 은은한 향기, 감미로운 맛이 다른 지방의 고추장에서 느낄 수 없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음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4번 국도를 따라 담양 땅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이 메타세퀘이아가로수 길이다.
이름부터 생소한 이 나무는 1940년까지만 해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수종(樹種)이다. 겨우 몇 천 그루만이 중국 중부의 700~1,400m 고도지역에 살아있는 것을 씨와 삽수(揷穗)를 통해 전 세계로 옮겨 심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길가나 정원에 널리 심고 있는데, 한 여름 가로수가 만들어내는 터널이 500m에 이르러, 2002년 산림청과 유한킴벌리에서 선정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다.
금성면 농공단지를 지나 담양호 진입로를 따라가면, 담양온천과 영산강 자전거 도로종착점 인증센터가 있다. 영산강하구언에서 130km, 담양호에서 0,9km 지점이다. 영산강 발원지로 알려진 가마골 용소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양댐이 완공되며 생겨난 인공호수다. 길이 306m, 높이 46m, 저수량이 6,670만t인 담양댐주변으로 추월산과 금성산성의 경치가 수려하여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자전거 인증센터에서 시작하는 영산강은 석현천의 이름을 달고 시작된다. 갈수기인 탓에 댐에서 방류하는 수량이 적어 하천이라는 이름도 무색하게 시작이 미미하다. 하지만 금성면 소재지에서 금성천과 합류하며 영산강의 이름으로 모양새를 갖춘다.
금월교를 지나며 시작되는 관방제림은 300여년 된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곰의 말채나무 등이 2km에 걸쳐 아름다운 풍치림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관방제림은 나무마다 고유번호가 부여되고, 2004년 산림청이 주체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상을 차지한 곳이다.
담양을 대표하는 대나무. 관방제림에서 향교교를 건너면 곧바로 죽녹원이 시작된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빽빽이 들어찬 죽림 속으로 오솔길이 펼쳐지고, 소슬바람에 실려 오는 음이온으로 정신이 맑아진다. 햇볕도 스며들지 못하는 대나무 숲은 평균온도가 4~7도정도 낮은데 이는 산소량이 많기 때문이란다.
대나무는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소나무의 4배나 되어 저탄소 녹색성장의 대표적인 식물이다. 때문에 아토피, 스트레스 등에 효과가 있는 피톤치드발생량이 편백나무보다 2배 이상으로 많아 현대인의 병리적인 치유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죽마고우 길을 지나 일지매 촬영장이 있는 운수대통 길을 올라서면 노무현 대통령이 찾아온 사색의 길로 연결된다.
정자마루에 누워 심호흡도 해보고, 야외무대에서 투호놀이도 하며, 전망대 2층 누각에 올라서면, 울창한 관방제림 사이로 영산강이 흐르고 담양 읍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1시간동안 대나무 숲 마사지로 피로를 풀고 홍살문을 나서면, 영산강 하구언 120km 이정표가 반겨준다. 관방제림 둔치로 조성된 자전거 길을 따라 담양교까지 산책을 한 뒤, 이곳의 특산품인 떡갈비정식으로 만찬을 즐기고 대나무이야기 호텔에 여장을 푼다.
다음날 먼저 찾은 곳이 대나무박물관이다. 1960년까지만 해도 생활필수품의 대부분이 대나무로 만든 제품들이다. 정월초하루 돌리는 복조리부터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즐기는 죽부인까지, 지천으로 깔려있는 대나무로 만든 제품들이 전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갈 때, 서울사람 부럽지 않은 풍요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인가. 80년대 프라스틱 제품이 개발되며, 죽세품도 사양길로 접어들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골동품이 되고 말았다. 때문인지 담양은 읍 소재지 이면서도 세락의 길을 걷는 죽세품과 함께 80년대의 정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산강을 따라 봉산면 제월리에 도착하면, 오례천을 굽어보는 산언덕에 자리 잡은 면앙정을 만난다.
면앙정은 송순(1493∼1582)선생이 관직을 떠나 선비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던 정자로, 퇴계 이황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면앙정가”를 비롯하여 시조 22수와 한시 520여 수를 남긴 유서 깊은 곳이다. 면앙정 주변의 빼어난 경치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며 내면의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강호가도의 선구적 모습을 보여준 가사문학의 태두(泰斗)이다.
창평천을 바라보는 야산의 송림 속에 자리 잡은 송강정은 정철(1536∼1593)의 호인 송강에서 지은 이름이다. 정철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로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그가 송강정에 머물면서 지었다고 하는 “사미인곡”은 조정에서 물러나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이다.
봉산면 소재지가 있는 신학리에서 유구천과, 삼지리에서 증암천이 합류하며 영산강도 제법 그럴듯한 강으로 면모를 갖춘다. 증암천을 거슬러 오르면 상류에 광주호가 자리 잡고 있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협곡을 가로막은 광주호가 생기기전에는 자미탄으로 부르던 하천가에 많은 선비들이 낙향하여 가사문학(歌辭文學)의 꽃을 피우던 곳이다.
광주호 상류에 있는 소쇄원은 조선중기 양산보가 조성한 민간별서 정원이다.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자, 세속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송순, 김인후의 도움을 받아 그의 아들 자징과 손자 천운 등 삼대에 걸쳐 완성하여 후손들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소쇄원은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하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은 주인이 거처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는 공간이며,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광풍각은 손님을 위한사랑방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초정(草亭)과 대봉대(待鳳臺)는 양산보가 꿈꾸는 염원이 담겨있으며, 애양단(愛養檀)담장에는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사십팔영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 가사문학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중국의 竹林七賢의 고사처럼,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유림들이 세상에 염증을 느낀 뒤, 현실정치를 피해 따듯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으로 인심 좋은 호남지방, 특히 담양으로 내려와 누정을 건립하고 인재양성은 물론 시단(詩壇)의결성과 詩會를 통해 훌륭한 가사문학을 창작하였다.
임억령의 식영정이 있는 부근의 너른 부지에 건립된 가사문학관을 찾아가면, 가사문학에 관련된 고문서와 전적 자료를 전시하여 송순의 면앙정과 정철의 송강정을 제1전시실에, 규방가사와 허난설원의 규원가, 기타 전시물이 제2전시실에, 석천 임억령, 소쇄처사 양산보, 하서 김인후, 서하당 김성원의 가사집이 제3전시실에 진열돼 있다.
영산강 자전거 종주노선이 차질을 빚고 있다. 논란이 된 곳은 담양댐 인근 금월교에서 용산교 20.34㎞ 구간이다. 도로 포장 방식을 둘러싼 자치단체 간에 의견대립으로 도는 당초 계획대로 콘크리트 공법을 주장한 반면 담양군은 친환경적 흙 포장을 요구하면서, 결국 일부구간이 자갈길로 남아 자전거 도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국책사업인 4대강 살리기의 완성품으로 주목받고 있는 자전거길이 일부 지자체간의 독선적인 고집으로 주민들의 불편을 초래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타협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해소되었으면 하는 바램 이다.
2. 광주 직할시
영산강 2구간 답사를 위해 광주역에 내리니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봄 가뭄이 심했던 터라 내리는 비가 싫지만은 않다. 얼마나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던가. 춘삼월을 맞이하여 가장 필요한 생명수가 바로 물이다. 얼었던 대지를 녹여주고, 목마름에 신음하는 나무들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수호천사가 아닌가?
광주역 광장에서 바라보는 도시경관이 너무도 아름답다. 유동사거리 쪽으로 뚫린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펼쳐지는 5거리 도로가 시원한 소통을 보인다. 정면이 빌딩숲으로 가로막힌 서울역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하지만 2구간 출발지인 용산교를 찾아가기에는 너무도 생소한 도시다.
예비지식을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한지라 이른 점심을 겸하여 식당에 들어가 자문을 구한다. 북광주우체국이 있는 요한병원버스정류장에서 95번 버스를 타라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는다. 20분마다 운행하는 버스를 바로 탈 수 있는 행운까지 얻어 40분 만에 도착한 시각이 12시 20분이다.
담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용산교는 담양댐에서 26.5km, 영산강 하구 둑에서 103km지점이다. 원래는 없었지만, 중간에 인증센터까지 설치하여 종주 팀들이 쉬어가는 쉼터까지 마련해 놓았다. 강 건너 제방을 따라 펼쳐지는 대나무 숲이 영산강 8경으로 손꼽히는 담양 대나무 십리 숲길이다. 잠시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인증센터를 출발하면 곧바로 광주광역시가 시작된다.
호남지방의 맹주를 자처하는 중심도시로서, 무등산의 정기를 받은 광주는 선비의 대쪽 같은 정신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골정신이 흐르고 있는 도시다. 인근에 있는 5.18국립묘지가 광주인 들의 긍지를 높여주고, 자존심이 살아 숨 쉬는 성지라 할 수 있다.
5ㆍ18민주화운동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후,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는 민중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제5공화국”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시켜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50년만의 여. 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광주는 백제시대 무진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고려시대에 들어와 태조 23년(940년)에 武州를 光州로 부르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1949년 광주시로 승격되어 1986년 부산ㆍ대구ㆍ인천에 이어 네 번째 직할시로 개편되었다.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민주인권도시, 문화관광도시, 첨단산업도시를 표방하는 광주는 2010년 말 현재 5개 자치구에 150여만 명이 상주하는 전국5대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비 그친 하늘이 엷은 구름 속에 묻혀 시원한 그늘 속으로 답사 길이 시작된다. 담양 쪽은 무색콘크리트, 광주 쪽은 붉은색 아스콘으로 지역 간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광주57이라는 숫자는 나주와 경계지점까지 28.5km를 표시하고, 500m마다 이정표로 거리를 알려주고 있다.
용산교에서 승촌보(27.5km)까지 광산구의 동쪽 경계선을 따라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잠시 후 유선형의 지아대교를 지나면, 건너편으로 첨단과학 산업단지가 펼쳐진다. 광주의 미래를 열어가는 첨단산업단지는, 대덕연구단지에 이어 호남지역 개발촉진을 위한 거점사업으로 2001년 3지구까지 완공했다.
영산강의 자연생태계와 산업단지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연기가 솟아오르는 굴뚝이 아니고, 무공해의 깨끗한 환경에서 최첨단산업이 가동하므로 멀리서 찾아온 철새들이 자유롭게 둥지를 틀고, 영산강을 따라 올라온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우리인간들이 추구하는 미래의 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어 광주의 자긍심을 높여주었으니, 광주에 겹경사가 펼쳐진 셈이다. 필자도 무등산을 5번 오른 적이 있다. 멀리서 보면 부드러운 유선형으로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해 보이지만, 산속으로 들어서면 유연한 곡선과 날카로운 강직함이 함께 어우러진 다. 억새가 펼쳐지는 장불재의 넉넉한 분지와 억겁의 세월 속에서도 주상절리의 돌기둥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서석대와 입석대, 규봉암을 바라보며 자연의 신비 속으로 빠져든다.
철교가 지나는 강 언덕에 고풍스런 풍영정은 조선시대 승문원판교를 지낸 김언거(1503∼1584)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김언거는 중종 20년(1525)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명종 15년(1560) 승문원판교를 끝으로 고향에 내려와 김인후, 이황 등 유학자들과 교우하였다. 정자 안쪽에는 이황, 김인후 등이 지은 현판들과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서광주역 부근에 있는 만귀정은 흥성 장씨의 선조인 장창우가 학문을 가르쳤던 옛 터에 그의 덕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지은 정자이다.1934년에 세운 만귀정 안에는 많은 시문과 현판들이 걸려 있고, 큰 연못 가운데에 세운 정자들과 조화를 이룬다. 이렇듯 가사문학의 영향을 받은 선비들이 고향으로 내려와 시문학의 교류와 함께 후학들을 가르치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광주천을 만난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 보이는 광주천은 무등산(無等山:1,187m) 남서 계곡에서 발원하여 광주시 중심부를 관통한 뒤, 서구 치평동과 광산구 우산동 사이에서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길이 23㎞의 영산강 제2지류이다. 유역에는 지산유원지를 비롯하여 증심사계곡과 광주공원, 어린이대공원, 사직공원, 동물원 등의 위락시설과 광주시립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등이 있다.
광주천을 지나며 고막이 터질듯이 요란한 굉음소리가 들려온다. 여객기의 이착륙과 함께 전투기들이 공중곡예를 하며 내는 소음이다. 광주비행장이 생길 때는 조용한 외곽이었겠지만, 도시의 팽창과 함께 중심지로 변모하면서 시민들의 정서불안이 가중되어 市에서도 무안에 후보지를 정하였지만, 현지주민들의 반대로 사업에 차질을 빗고 있다고 한다. 님비현상으로 국책사업이 차질을 빗고 있으니, 국민모두가 조금씩 양보하는 미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황룡강 습지에 도착한다. 자연 생태는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휴식공간으로, 생물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다. 졸졸 흐르던 개울물이 여러 계곡의 물골과 만나며 하천을 이루고, 황룡강과 만나며 영산강도 큰 흐름을 이룬다, 내장산국립공원에 있는 백암산에서 발원하는 황룡강은 총연장 50km의 영산강 제일지류이다. 장성호를 지나며 시작되는 황룡강 습지가 백리 길을 달려오는 동안, 광산구 송산유원지 앞에서 평림천과 합류하고, 광산구 유계동에서 영산강과 합류한다.
승천보까지 3km가 남았다. 영산강 하구언에서 80km, 담양댐까지 50km이정표를 바라보며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이 넓어지며, 영산강도 서서히 낙조가 드리워진다. 빛바랜 갈대숲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강물위로 내려안는 해 그림자와 비상하는 백로들의 한가로운 몸짓이 너무도 아름답다.
시간이 지나며 붉은빛이 점점 더 짙어지고, 강물위로 비추는 해 그림자는 긴 꼬리를 남긴 유성처럼 모든 사물들을 황금색으로 물들인다. 오전에 내린 비로 더욱 선명해진 하늘가에 역광으로 비친 태양이 삼성산 봉우리에 걸쳐 앉을 때, 온 세상이 붉은 광채로 빛난다. 승촌보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4대강 답사에서 길이길이 남을 황홀경이요, 추억이다.
4대강 사업 16개 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조물이라는 승촌보, 나주평야에서 나는 쌀알 모양을 형상화한 승촌보는 윗부분을 티타늄으로 처리하여 멀리서 보면 한 개의 구조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여러 개의 판을 접합한 것이다. 영산강8경중에 제6경인 승촌보는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 전망대에 올라서면 광주의 무등산과 영암의 월출산이 보일정도로 주위에 펼쳐지는 경관이 아름답다.
3. 영산 포구
Q모텔에서 승촌보 관찰데크가 있는 자전거도로까지는 3km나 되는 먼 거리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장님 문고리 잡는 식으로 물어물어 제방위로 올라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무안까지 40.5km 이정표가 반겨준다.
안개 속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강 건너 신기리와 동섬사이로 흘러드는 지석천이 있다. 지석천은 옛날 홍수피해가 잦아 둑을 쌓고 보를 만들었으나, 계속 둑이 터지자 “드들”이란 처녀를 제물로 바쳐 둑 속에 묻고 보를 만들었다고 하여 이 강을“'드들강”이라고도 한다.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580m) 남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나주시 도곡면에서 화순천(和順川)과 합류하는 길이가 55㎞에 이른다.
지석천의 지류인 대초천을 막아 영산강 유역 농업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축조한 나주댐은 높이 31m, 길이 496m, 총저수량 9,120만t에 이르며, 주변 112㎢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나주호는 나주시 다도면과 화순군 도암면에 걸쳐 있으며, 영산강 지류에 있는 담양댐, 장성댐, 광주댐과 함께 이지역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우천 시에 홍수조절을 하는 다목적 댐이다.
가시거리가 1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안개 속에서 영산강 전망대가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다. 나주대교와는 200여 m 떨어진 거리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보지만 아직 완공전이라 그러한지 문이 굳게 잠겨있다. 안개만 아니라도 주위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련만, 지척에 있는 나주대교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나주시를 관통하는 자전거도로가 너무도 아름답다.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오가는 자전거 길을 구분하고, 그 옆으로 시원하게 질주하는 강변로와 영산강을 형상화한 가로등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영산강 하구둑 70km, 담양댐60km 이정표를 지나며, 태양의 위세에 눌린 안개도 서서히 벗어지고 있다.
나주역과 빛가람도시 間 도로를 개설하는 제2나주대교 건설현장을 지나게 된다. 우리의 토목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여 넓은 강이나 연륙교를 가설할 때 흔히 사용하는 사장교를 많이 볼 수가 있다. 수심이 깊은 곳에 교각의 거리를 멀리세우고, 상판을 와이어 줄로 지탱하는 교량은 큰 배도 쉽게 통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풍과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기능과 외관이 수려하여 미적인 감각이 뛰어나다.
활등처럼 휘어진 제방을 따라가면 나주 저류지와 만난다. 죽산보와 승촌보 중간지점에 조성된 영산강 저류지는, 홍수가 나면 영산강이 범람하여 농경지가 침수되는 것을 방지하기위하여 물이 빠져나갈 때까지 물을 담아두는 물그릇과 같이 평상시에는 비워두게 된다. 남한강의 여주 저류지와 함께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조성하였다.
설명에 따르면 영산강 살리기 사업으로 조성된 강변 저류지 52만여 평에 스포츠마케팅을 통한 지역관광 활성화와, 친환경 뽕나무단지 2만1000여 평을 조성해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뽕나무 열매인 '오디' 따기 체험행사 등 이색적인 상품을 개발하고, 17만여 평에 20메가와트(MW)급 태양광 발전단지를 조성하여 신재생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전망이다.
영산강교에서 종주 길이 강을 건넌다. 영산강 절반이 되는 65km지점이다. 영산강 지명의 유래는 나주의 영산창(지금의 영산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부터 이곳에 조창이 생겨 인근 전라도의 전세를 여기에 모았다가 해상을 통해 서울로 운반했다고 한다. 또한 흑산도 앞 영산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서 살면서 영산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영산교를 건너면서 가장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홍어집이다. 바다도 아닌 육지인 영산포에 홍어집이 많은 것에 의아심이 든다. 연유는 고려 공민왕으로 거슬러간다.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조정에서 흑산도 사는 어민들을 영산포로 강제 이주시키고 섬을 비워두게 되었다. 이때 이주해온 흑산도 주민들과 함께 홍어도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냉장시설이 별로 없던 시절. 애써 잡은 생선들을 며칠씩 걸려 배로 운반해오면, 상하기 십상인데, 유독 홍어만은 배탈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삭혀먹기 시작하여 막걸리와 곁들여 먹는 발효식품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홍어를 특히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다. 많은 점포들 중에 호감이 가는 홍어사랑 집으로 들어섰다. 80여세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홍어손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배짱 좋게 1인분을 싸달라고 주문을 하자, 하도 어이가 없는지 며느리에게 미루고 만다. 인상 좋은 며느리의 후한인심으로 홍어를 사들고 덤으로 맛까지 보았으니, 이런 맛에 힘든 종주 길도 즐거운 추억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죽산보의 잔디밭에서 홍어 맛을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싱글벙글 발걸음이 가볍다.
제방으로 올라서면 그 유명한 영산포 등대와 만난다. 영산강의 기항종점인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등대는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하여, 우리나라 내륙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등대라 한다. 영산포 선창은 드넓은 나주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고, 소금을 비롯하여 해산물을 싣고 온 배가 닻을 내리면, 나주와 광주 담양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 영산포가 사시사철 성시를 이루었으나, 영산강 하구에 둑을 막으며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침체기를 맞고 말았다.
영산강 제5경이 “錦城祥雲”이란다. 커다란 돌비석에 새긴 문구를 해독하며 뒷면을 보니, 나해철 시인의 영산포가 적혀있다. 60년대 보릿고개의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서울로 떠나간 누님의 애절한 사연을 노래하고 있다. “春來 不以春”이라. 중부지방은 꽃샘추위로 몸이 움츠러드는데, 남녘땅은 어느새 봄볕이 완연하여 영산강 둔치에 꽃씨를 뿌리는 아주머니들의 손놀림이 분주하고, 강 언덕의 산수화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정량마을 돌아서면, 가야산 자락이 강기슭으로 뻗어 나온 벼랑위로 정자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영산강의 물살이 돌아가는 수십 길 절벽이라. 愛國志士 “羅月煥 將軍”의 기념비가 있는 소공원에서 나무데크로 만든 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서면,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정자에서 바라보는 남도의 정취가 한 폭의 산수화로 그려진다. 영산강을 보듬어 안고 살아가는 영산포와 나주평야를 바라보며 진부마을로 내려선다.
활등처럼 굽어진 제방으로 달려가는 종주길이 죽산보까지 8km.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죽산보가 꿈속의 신기루처럼 아른거리고, 2시간동안의 고통 속에 죽산교를 지나며 나타나는 죽산보가 구세주처럼 보인다. 고통의 보상으로 주어진 홍어회를 생각하면 피로가 싹 가시지만, 죽산 보에서 고통의 끝이 아니다.
교통의 사각지대에 있는 죽산 보는 사방을 둘러봐도 탈출구가 만만치를 않다. 4시 27분 나주역에서 출발하는 ktx 시간표를 생각하면 마음이 초조하다. 경비서는 아저씨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1시에 버스가 들어오니 승강장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하지만 1시가 넘어 10여분이 지나도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고,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친절하던 아저씨도 말끝을 흐리며 자리를 뜨는 바람에 고마움이 원망으로 변하고 만다. 택시를 대절하면 2만원이라는 말에 나주역까지 걷기로 했다. 다시면 쪽의 교통편을 알 수는 없지만, 나주시내와 연결되는 교통편이 있을 것으로 희망을 걸고 죽산 보를 건넌다. 제방과 농로를 가로질러 1시간 반 만에 다시면 회진리에 도착하며 희망이 생긴다.
나주로 가는 버스들이 수시로 있으니 말이다. 그제 서야 배낭에 담아두었던 홍어 생각이 난다. 나무그늘 정자에서 맛보는 홍어는 씹을 겨를이 없다. “마파람에 게눈 감 추 듯”, 시식을 하고보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물집 잡힌 발바닥이 후끈 거리기 시작한다. 그 도 그럴 것이 어제 32km, 오늘 30 여km를 걸어오며 마음고생이 심했으니, 강철인들 견디어 내겠는가.
시간이 남는 덕분에 절뚝이는 걸음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나주시천연염색공방” 앞을 지난다. 이곳이 염색 공방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예로부터 영산강 주변으로 쪽을 많이 심어왔다고 한다. 맑고 푸른 하늘을 쪽빛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주지방이 쪽 염색의 본고장이라 한다. 쪽빛의 전통을 지켜오는 천연염색 박물관주변으로 8개의 공방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정관채, 윤대중 장인들의 노력으로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풍호나루” 유래비가 있는 강기슭을 따라가면, 詩人 “임제문학관”과 영모정을 만난다. 조선시대인 1520년(중종 15)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이 창건하였고, 이 지방 출신의 명 문장가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 불렀으나,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고 하였다. 400여 년 된 팽나무가 많아 주변 환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목조건축의 규범을 잘 갖추고 있다.
전주와 나주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전라도 지명에서 보듯이, 전주시와 함께 호남지방의 중심도시인 나주는 나주읍성을 비롯하여 나주의 궁궐로 일컬어지는 금성관이 있으니, 유서 깊은 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나주배가 으뜸이고, 나주 쌀은 면화, 소금과 함께 호남의 3백으로 명성이 높다. 1995년 나주군과 통합하여 인구 9만 여명이 상주하는 중소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영모정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만에 나주역에 내리면서 오늘의 고초도 끝을 맺는다. 일박2일간의 강행군으로 파김치가 되었어도, 영산강 답사를 위해 천리 길을 마다않고 찾아가는 열정. 그 보람으로 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ktx에 몸을 싣고 꿈속으로 빠져든다.
4. 나주평야
교통의 사각지대인 나주역에서 죽산 보까지는 10여 km가 넘는다. 택시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기에 부득이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 덕분에 복암리 고분을 돌아볼 수 있는 행운을 얻는다. 고분이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계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은 영산강이 흐르는 길목으로 원래는 7기의 고분이 있었으나, 30여 년 전 경지정리를 하면서 3기가 없어지고 현재 4기가 남아 있다.
복암리 고분은 도굴의 흔적이 전혀 없어 8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나주역로비에 진열된 금관(국보295호)이 반남 고분군 중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지방에 고도로 발달된 부족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3세기에 해당하는 옹관묘를 비롯하여 횡혈식석실분(굴식 도방무덤)중에는 7세기 전반까지 내려오는 묘제가 한 분구 안에서 발견되어 400여 년 간 동일 문화를 가진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사례라고 한다.
20여 일만에 찾아온 죽산보는 꽃샘추위로 영하의 날씨에 강한바람까지 불어 겨울이 다시 찾아온 느낌이다. 영산강제4경인 죽산춘효(竹山春曉)란 영산강변에 봄이 찾아오면 꽃향기가 널리 퍼지고, 죽산보가 나주평야를 살찌우는 생명의 화원이라 노래하고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수변공원에 조성된 야외공연장을 중심으로 삼남제일의 곡창지대인 다시평야와 석희 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우각호란 사행(蛇行)하는 하천의 만곡부가 떨어져나가 생긴 호수를 말한다. 그 면적이 하도 커서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홍보관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면 조등마을에서 월천리까지 영산강 직선화 사업으로 수 십 만평의 농경지가 생겨나며 물이 흐르지 않는 담수호로 변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죽산보는 184m의 가동보를 설치하고, 4.5km의 옛 강을 복원하여 4대강사업을 통해 탄생하는 전국16개보 중에서 유일하게 유람선이 통과할 수 있는 수문을 만들었다. 이번 공사로 인해 34년 만에 영산강에 뱃길이 복원되어 목포에서 죽산보를 거쳐 영산포, 승촌보까지 70km 구간을 유람선으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죽산보 관리직원과 인천에서 온 자전거 팀들의 환영을 받으며 영산강 하구언을 향한 1박2일의 여정이 시작된다.
영산강하구 둑 54km, 몽탄대교 21.9km 이정표를 바라보며 제방을 따라가면, 강물이 굽이치는 절벽위로 나주영상테마파크가 펼쳐진다. 인기드라마 주몽과 바람의 나라 촬영장으로 알려진 야외 스튜디오는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른 듯, 고풍스런 집들과 웅장한 대궐을 중심으로 14만㎡의 면적에 조성된 국내최대 규모의 영상전문 테마공원이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드라마와 영화촬영을 위한 민속촌으로 기획되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MBC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드라마 주몽, 태왕사신기의 촬영 장소로, 동부여성과 졸본부여성, 철기방, 신단, 해자성문, 목책성루, 태자궁, 영상체험관, 탁본체험관 등이 있다.
정문을 나서면 신곡리 들을 살찌우는 사암제가 펼쳐지고, 지방도로를 따라 봉곡마을을 지나 영산강 본류와 만나는 강어귀에서 강 건너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석관정을 바라본다. 함평이씨 석관(石串) 진충공(盡忠公)이 신녕현감을 역임한 후 귀향하여 영산강과 고막강이 합류하는 석관정 나루터에 1530년(중종 25년) 정자를 창건하여 후학을 기르며 말년을 지낸 곳이다.
석관정, 금강정, 이별바위, 나주영상테마파크 등 주변의 아름다운 절경을 모아 석관귀범(石串歸帆)이라 하여 영산강 3경으로 꼽으니, 나루터 복원과 함께 하구언에서 죽산보에 이르는 황포돛배 길이 다시 열렸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황포돛배에 오르던 낭군의 무사귀환을 빌던 아낙의 바람처럼 강이 쪽빛으로 물들면, 님이 돌아온다는 희망의 전설이 강물 따라 전해진다.
지루하도록 이어지는 신곡리 제방이 활등처럼 휘어지고, 둔치에 웃자란 청보리가 봄의 화신처럼 녹색물결을 이룬다. 동강대교가 있는 사포나루터는 조선시대 부근의 대곡마을에 전라도 수군 지휘본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 이였으나, 영산강 하구 둑이 축조되면서 메기, 붕어, 잉어 등 담수어가 크게 늘어나는 육지속의 호수로 변하고, 1992년에는 학교면과 나주시 동강면사이에 동강대교가 건설되었다.
영산강 중류지역인 나주지방에서 생산되는 팔진미(八珍味)를 영산강 주변의 지방수령과 방백들이 임금께 진상했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는데, 소팔진(蔬八珍)은 동문안의 미나리와 신월의 마늘, 흥룡동의 두부(豆腐), 사매기의 녹두묵(黃圃菜), 왕곡의 생강(生薑), 송월동의 참기름(眞油), 복암골의 열무, 금계동의 봄동(겨우살이)이고, 어팔진(漁八珍)은 조금물의 도랑참게, 몽탄강의 숭어, 영산강의 뱅어(빙어), 구진포의 웅어, 황룡강의 잉어와 자라, 수문포의 장어, 복바위의 복어 등이다.
동강대교를 지나며 펼쳐지는 곡강평야가 월송리에서 대지리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영산강도 몽탄면 장구부를 향해 유유히 흘러간다. 유순하게 흘러가던 강물이 옥룡산벼랑에 가로막혀 U턴하면서 이산리와 옥정리를 빗어놓으니, 영산강의 물결도 느러지에 반하여 느려졌다는, 한반도의 지형을 꼭 빼닮은 숨겨진 비경이 펼쳐진다.
강물도 산줄기를 피해 돌아간 곳에서 자전거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데, 육탄공격이 가장 빛을 보는 구간이다. 수십 길 벼랑사이로 오솔길이 열리고, 솔밭사이로 기어오르면, 그림 같은 4층 전망대가 반겨주고 한반도의 지형이 그대로 재현된다. 장구부와 어오지는 남한의 평탄한 지형을, 뒤구지와 당치마을은 이북의 험준한 산세를 그려내고 있다.
무안 느러지를 몽탄노적(夢灘蘆笛)이라 하여 영산강제2경으로 선정하였으니, 이곳에 자리 잡은 식영정은 한호(閑好) 임연(林煉, 1589~1648) 선생이 무안에 入鄕하여 후학들을 가르치며, 그의 호인 '閑好'처럼 여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낸 곳이다. 전남문화재자료 제237호인 식영정은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교우를 즐긴 곳이다. 선생은 "1610년(광해군 2)에 성균관 진사가 되고 1613년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영암군수, 진주목사, 남원부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자전거길이 옥정리 봉추마을을 찾아가지 못하는 것도 자연을 거스르지 못하고 순리에 따르기 때문이다. 용새마을과 몽탄마을을 지나 모처럼 영산강을 건너는 몽탄대교 위로 올라선다. 정부의 간척사업으로 영산만(榮山灣)과 남해만(영암구간의 영암만)으로 불렸던 영산지중해(榮山地中海)도 옛말이 되었다. 지난 1981년 길이 4,351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하구 둑이 준공되면서, 2억5,000만t의 물을 담수하는 영산호(榮山湖)가 생겨나고, 무안군 몽탄면과 나주시 동강면 사이에 길이 668m의 몽탄대교가 건설되었다.
영산강 하구둑은 무안군 몽탄면 복룡리 양도(염소섬) 동쪽 영암과 나주 땅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서 19㎞연장된 목포시 삼향동과 영암군 삼호(나불도)를 잇는 초대형 구조물이다. 목포에서부터 6㎞지점에 들어선 하구둑으로 영산포까지 올라갔던 조수가 막혔고 대신 5,500정보의 농경지가 생겨났다.
춘분을 지나며 낮의 길이가 길어진 탓인가. 오후 6시가 지나서야 태양도 서산너머로 걸터앉으며 제방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김제평야 다음으로 방대한 무안과 영암평야가 지평선을 이루는 들녘의 한가운데 낮은 구릉을 양도라 부르고 있다. 간척사업 이전에는 섬이었으나 지금은 복룡4리로 부르는 양도는 염소가 호수위에 앉아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강 건너 한 없이 넓어진 강폭사이로 삼포강이 흘러든다. 삼포강(三浦江)은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 백룡산(481m)에서 발원하여 영암군 신북면과 시종면, 나주시 반남면, 공산면, 동강면으로 이어지는 29.4㎞의 물길이다. 자미산을 중심으로 마한시대의 고분과 옹관묘가 밀집한 곳이기도 하다. 조수가 밀고 올라오던 시절, 목포로 쌀을 실어 내고 잡화를 들여오는 길목인 남해포, 수문포, 석해포 등 세포구를 아우르는 강을 삼포천이라 한다.
영산강 본류와 삼포천이 갈라지는 곳에 남해신당이 있었다.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남해신당의 상부는 강이요, 하부는 남해바다가 시작되는 곳으로, 영산강 수로를 빠져나와 남해만으로 들어선 배들이 안전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드리던 신당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해(東海)의 양양(襄陽), 서해(西海)의 풍천(豊川), 남해(南海)의 나주(羅州) 등 세 곳에 해신당(海神堂)을 두고 국가에서 거행하였다.
죽산보에서 양도까지 33km에 이르니 많이도 걸어온 셈이다. 오늘의 숙박지로 점찍어둔 회산리 백련저수지까지 2km를 더 걸어간 뒤에야 허름한 민박집을 만날 수가 있다. 회산저수지는 세계최대의 연꽃 산지로, 10만평에 이르는 연못에 백련이 가득 채워진 모습을 상상만 해도 황홀하지 않은가. 연꽃이 절정에 이르는 8월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로 즐거운 비명을 올린다지만, 철지난 회산저수지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회산저수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방안에 들어서니, 냉천한골이 따로 없다. 벽에 걸린 달력이 작년 9월로 표시되어 있으니, 한겨울이 다 가도록 민박손님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연꽃축제를 제외하고는 외지인들이 찾아올 이벤트가 없다는 농촌마을. 초면이지만 일로읍을 순례하며 친절을 베풀어 주신 고영남 선생님 갑사 합니다.
5. 영산 하구언
오늘은 내 생애 또 하나의 금자탑을 세우는 날이다. 2011년 10월17일 한강에 자전거 길이 열리던 날. 팔당역에서 새로운 희망을 안고 양평까지 걸어간 것이 4대강 답사의 시작이다. 처음부터 국토대행진의 거창한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니고, 힘이 다할 데 까지 걸어보자는 생각이 회를 거듭할수록 희망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이다.
1년 6개월 만에 한강과 낙동강, 금강에 이어 영산강까지 일천삼백km를 걸어가는 동안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나는 곳마다 아름다운절경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우리조상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새로운 문화유산을 체험하며, 삶의 지혜를 얻는 보람으로 무사히 완주하여 큰 결실을 얻게 되었다.
민박집(연 방죽슈퍼)을 나온 시각이 6시. 일로평야를 가로질러 3km를 걸어간 뒤에야 자전거 길과 만난다. 영암군 시종면과 마주보고 있는 영산강은 하구 둑에서 차오른 영산호가 수평선을 이루고, 국립공원월출산의 북쪽 자락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강물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인의산(154m) 돈도리 마을에 도착하면 영산하구언 19.1km 담양댐 110.4km 이정표가 반겨준다.
활등처럼 굽어진 제방을 따라가면 “몽탄진등표” 표지석과 강물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등표를 만난다. 1978년 영산강 하구에 둑을 막으며 사라진 등대표를 2009년 복원 점등하였다고 한다. 몽탄진등표는 우리나라 등대 역사상 내수면에 있는 최초의 등표로서 해양교통시설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감안, 등명기를 설치하여 등표기능을 갖추고 있다.
서 남해 일원의 홍어 잡이 등, 어선들이 만선의 꿈을 싣고 영산포로 항해할 때, 선박의 안내와 이정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목포항만청에서는 영산강 하구 둑 축조로 해양교통시설이 상실된 몽탄진입표에 등명기를 설치하여 야간에 6마일(11.1Km)이상의 거리에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해안경비대 ‘등대표’ 자료에는 몽탄진의 높이가 7.6m로 간조 때 보이는 초(礁)가 1.5m”라고 기록돼 있고, 전라남도 근대문화유산조사 자료에는 1934년 건립된 등대로 지리적 광달거리(光達距離)가 13마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전에 뱃길이 열렸을 때 목포항에서 영산강 뱃길로 20여㎞를 거슬러 오르면 주룡협곡을 지나게 되고, 그 협곡을 벗어나면 드넓은 내해(內海)가 펼쳐지는 지점에 영암천이 흘러든다. 영암천은 영암군 영암읍 학송리 풀치재 북쪽에서 발원하여 학송저수지를 지난다음 금성천과 회문천을 모으고, 호동천과 학산천을 만나 서호면 금강리에서 영산강(영산호)으로 합류한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남녘땅, 제방에는 연분홍 자운영 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다. “나의행복, 관대한 사랑”의 꽃말을 가진 자운영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에게 유익한 사랑을 베푸는 꽃이다. 자운영의 어린순은 나물로 먹을 수가 있고, 풀 전체는 약제로 쓰이며, 꽃이 지고 죽어서는 농토를 비옥하게 만드는 비료가 되는 2년생 풀이다.
연분홍 자운영이 봄기운을 한껏 불어넣으며,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지는 소댕이 나루를 지나면, 청매화,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겨우내 움츠리던 시금치와 봄동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푸른빛을 더해가는 청호리 벼랑길이 반겨준다. 삼포천과 영암천에서 모인 물길이 호리병처럼 좁아진 협곡을 빠져나가며, 그 유명한 주룡협곡(朱龍峽谷)을 빗어 놓고 있다.
주룡포는 30년 전만해도 무안의 일로와 영암의 독천 우시장을 왕래하던 상인들이 많이 이용했던 나루였다. 이곳은 강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지역이라. 영산강 하구 둑을 막기 전에 큰 비가 내리면 상류지역에서 시뻘건 황토물이 내려와, 밀물이 되면 바닷물과 시뻘건 황토물이 부딪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구불구불 강줄기를 타고 흐르는 황톳물이 붉은 용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주룡협곡(朱龍峽谷)이라 부르던 이곳에 아름다운 무영대교가 건설되어 영암군과 무안군이 더욱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고 있다. 주룡협곡에 건설된 무영대교를 바라보며 청호리 벼랑을 돌아가면, 상사바위에 가로막혀 우회로를 따르게 된다. 청호2리에서 상사바위가 있는 작골로 향하다가 우비마을을 돌아선 곳이 영산강 제방길이다.
곧게 뻗은 제방을 따라가면 영산석조(榮山夕潮) 비석이 있는 영산강 제1경이다. 담양댐에서 119.7km 영산강 하구언10.3km 지점이다. “저녁노을에 물든 영산호에서 당신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한다.”는 문구가 아니라도, 통일신라의 해신 장보고는 영산강 뱃길을 통해 청해진과 광주를 오갔고, 왕건과 견훤이 영암 덕진포에서 목포까지 전함을 주둔시키며 최후의 일전을 벌인 곳으로 전해진다.
제1경: 목포영산호 -영산석조(榮山夕照) 제2경: 무안느러지 -몽탄노적(夢灘蘆笛)
제3경: 나주황포돛배-석관귀범(夕串歸帆) 제4경: 죽산보 - 죽산춘효(竹山春曉)
제5경: 나주평야 - 금성상운(錦城祥雲) 제6경: 승촌보 - 평사낙안(平沙落雁)
제7경: 광주풍영정- 풍영야우(風詠夜雨) 제8경; 담양대나무- 죽림연우(竹林煙雨)
영산강의 아름다운 절경을 노래한 8경을 읍 조리며 제방 길을 걸어가노라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영산호를 가로막은 삼호대교(하구둑)와 대불공단으로 연결되는 철교가 한없이 길어만 보인다. 남창천이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강어귀에서 남창대교까지 U턴 하여 나오는 1.2km가 한 없이 길어만 보이고, 철교 밑을 통과하여 전남도청이 있는 남악신도시로 진입한다.
동양철학에서 풍수지리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 전남도청을 이전하며 새로운 부지를 선정할 때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안으로 안착될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무안의 남악(南岳)은 서울의 북악(北岳)과 맥을 같이하는 지명이라고 한다. 북악은 북쪽의 큰 산을 뜻하는 것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더 나아가 동북대륙을 향해 뻗어나가는 기상을 대표하는 지명이고. 북악에 상응하는 지역이 이곳 남악(南岳)이라고 주장한다.
남악은 남쪽 바다, 즉 해양을 경영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며, 남악은 유(儒), 불(佛), 선(仙) 삼도(三道)가 회통(會通)하는 터라고 한다. 유학을 상징하는 목포 유달산(儒達山), 불교를 상징하는 무안 승달산(僧達山), 그리고 선(仙)을 상징하는 영암 선황산(仙皇山)의 각 정상을 꼭지점으로 하여 선을 그으면 반듯한 삼각형이 그려지는데, 그 삼각형 중심이 바로 무안 남악리이고 이곳이 바로 유불선 삼도회통의 자리라는 주장이다.
남악 新 도청이 들어선 곳에 오룡산(五龍山)이 있고, 오룡산 아래 마을 이름이 회룡리(回龍里)라고 한다. 다섯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다 되돌아오는 땅이라는 뜻이다. 무안과 목포의 경계를 지난다. 목포(木浦)는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영산강을 끼고 있는 탓에, 뭍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는 관문이요, 섬사람들이 육지로 올라오는 가교역할을 하면서 1897년 목포항이 개항한 뒤로, 인구 6만 명에 전국 6대도시로 성장하여 一黑(김),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명성을 얻게 된다.
선교사들에 의해 전남지방에서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고, 근대적인 학교와 의술도 들어왔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호남지방의 특산물을 수탈하는 창구로 이용하기도 했다. 1949년 목포부를 목포시로 고쳐 부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포 신항과 무안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대불공단과 삼호공단을 조성하여 서남해안 시대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한 미래의 도시로 도약하고 있다.
정오가 가까워 오며 자전거 도로를 질주하는 메니아들의 행렬이 늘어나고, 배낭에 꽂은 “4대강 답사 국토대행진”의 깃발을 보고 시선이 집중된다. 오전11시 30분 영산강 하구언에 마련된 황포돛배 선착장에 도착하며 대미를 장식한다. 自畵自讚이란,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보다 더한 바보라지만, 삼천리가 넘는 길을 두 다리에 의존하여 완주했다는 자부심에 한없는 희열을 느낀다.
선착장매표소에 마련된 인증센터에서 4대강 완주를 확인하는 황금빛 스티커를 받아들고,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 유람 길에 나선다. 유달산은 서울의 남산과 비슷한 228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산정이 가파르고 기암절벽이 첩첩이 쌓여 있어 호남의 개골산(皆骨山)으로 불린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적을 속인 노적봉이 관광객들을 가장먼저 반겨준다.
애절하게 울려 퍼지는 “목포의 눈물” 속에 층층계단을 올라서면, 목포항에 출입하는 선박과 시가지, 목포대교, 삼학도, 영산호,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유달산은 신선이 춤을 추는 모습과 흡사하여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유달산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로 옮겨 대기하고 있다가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이 3마리의 학(三鶴島)을 타고 고하도에 있는 용머리에 실려 떠나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거북(龜島)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떠났다는 전설이 있다. 4대강 답사 국토대행진을 하는 동안 백만 원군이요. 절대적인 후원자인 아내와 함께 축배를 들기 위해, 싱싱한 홍어 한 상자를 가슴에 안고 상경하는 호남선에 몸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