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 문경새재
1. 수주팔봉
금년 들어 가장추운 날씨가 되겠다는 일기예보가 2일전부터 뉴스를 타고 전해지는 가운데 雪上加霜으로 폭설까지 쏟아지고 말았으니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평정심을 잃고 우왕좌왕 하면서도 오기가 생긴다. 산을 오르는 것도 아니고 강을 따라 가는 길이라 여차하면 중간에서 돌아서면 되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얻는다.
어쩌면 일기예보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지. 이른 새벽 뉴스 첫머리에 한파특보가 계속 전해진다. 서울지방 현재기온이 영하17도. 2월 기온으로는 56년 만에 찾아온 한파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고 2일전에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끄러우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는 당부의 말까지 잊지 않는다.
한번 빼어든 칼을 도로 넣을 수도 없는 일이라, 두툼한 방한복차림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6시20분 출발하는 고속버스에는 승객이라야 몽땅 4명. 마음이 착잡하기는 매한가지라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는다. 충주시내로 접어들며 동녘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고운 빛깔로 주위를 밝히고 있지만, 눈 폭탄을 맞은 대지에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다.
인적도 없는 탄금대는 영하19도에 강한바람까지 불어오니,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에 온몸이 오그라든다. 千여山을 오른 오기로 발목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치며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탄금교 쪽으로 접근하자 자연의 신비함에 넋을 잃고 만다.
주위에 펼쳐지는 모든 사물이 눈 속에 몸을 숨기고 강물도 흐름을 멈추는 빙판 속에서 한 줄기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농무가 탄금대 일대를 휘감는다. 天地調和는 지금부터시작이다. 피어오른 물안개가 황량한 대지위에 내려앉으며 벌거벗은 나무와 갈대숲에 눈꽃을 피워 올린다. 겨울 산을 오르며 상고대를 많이 보았지만, 눈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는 처음이다.
충주시 하수처리장 진입로 쪽으로 새재길이 연결되고, 강둑으로 조성된 자전거길이 달천 쪽으로 이어진다. 강둑에서 시내 쪽을 바라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비닐하우스가 장관이다. 전에는 충북 북부지방의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황금들녘이었지만, 쌀 소비량이 급감하면서 소득이 높은 대체작물로 전환하여 비닐하우스 촌이 형성된 것이다.
충주대학 쪽으로 달천과 합류하는 요도천은 가엽산(710m)에서 발원하는 하천으로 길이가 26km에 유역면적이 150.5㎢이다. 내 고향이 주덕이라 초등학교시절 다리도 없던 요도 천을 건너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남금북정맥상의 보현산(483m)에서 분기해서 부용산(644.3m) -수레의산(678m) -매방채산(375m) -자주산(483m ) -병풍산(395m) -삼봉(276m)을 지나 요도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산자락을 내려놓는 도상거리 43km의 부용지맥이 있다.
탄금대3.8km 이정표가 있는 달천교에서 자전거 길은 다리 밑으로 내려선다. 철교를 지나 다시 강둑으로 올라서면, 순백색의 눈가루가 곱게 깔려있는 강물이 맹추위속에 온몸을 결박당한 몸부림인가?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던 고통소리에 강바닥이 쩍쩍 갈라진 흔적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자연의 신비함을 바라보며 이어가는 강둑에 버드나무 한그루와 상면한다. 수령이 자그마치 450년, 나무둘레가 280cm에 높이가 13m나 되는 거목이다. 홍수로 강둑의 범람이 잦았던 이곳에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희귀한 버드나무는 달천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며, 충주시에서 보호수로 관리하고 있다.
활등처럼 돌아가는 제방 왼쪽으로 건국대학교 단월캠퍼스와 임경업장군의 사당인 충렬사가 있다. 선조 27년(1594) 충주 대림산 기슭에서 태어난 임경업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출중하여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서훈되고, 정묘(丁卯),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백마산성(白馬山城)과 의주성(義州城)을 수축하여 국방강화에 전력하였다.
청나라와 명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시절, 일관되게 반청친명(反淸親明)의 입장을 주장했던 장군은 청의 요청으로 명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명과 내통하여 오히려 청을 공격하려다 청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모반(1644)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친국(親鞫)을 받다가 억울한 일생을 마쳤다. 장군이 죽고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어 그의 고향인 단월에 사당을 건립하고, 영조3년(1727) 충렬사(忠烈祠)의 사액(賜額)을 받았다.
단월정수장을 지나면 곧바로 유주막 삼거리에 도착한다. 탄금대에서 충주 시내를 돌아오는 제방이 9km나 되는 곳이다. 시내를 뒤로하고 수안보로 향하는 길은 삼초대쪽으로 이어진다. 임경업장군이 어린 시절 무예를 연마하기위해 가파른 바위에 3단의 석축을 쌓고 하루에 세 번씩 오르내리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을 삼초대라 부르며, 지금은 정심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강을 거슬러 오를수록 산세가 험해지고 강물의 흐름 또한 빨라진다. 嚴冬雪寒의 기세로 강물도 얼어버린 두메산골.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수직절벽 밑으로 길이 이어지고, 산굽이가 심해질수록 물길도 휘돌아 흐른다. 살미면 경계석 옆으로 대림산성 들머리가 보인다. 충북 기념물110호인 대림산성은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에 있는 대향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경사면과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여 자연스럽게 치와 옹성의 구조를 갖춘 성이다. 고려 고종40년(1253년) 몽고군이 전국을 유린 할 때 70일간 항전하며 몽고군의 남진을 봉쇄한 곳이다.
달천을 일명 달래강이라 부르는 연유는 옛날 부모를 일찍 여윈 오누이가 인근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여름날 길을 가던 중, 달래 강을 건너다 소나기를 만나 누이의 몸에 옷이 달라붙어 아름다운 여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누이의 모습을 본 남동생은 욕정이 발동했지만, 도덕적 윤리규범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에 스스로 자기의 거시기를 돌로 찍어 죽고 만다. 이 광경을 본 누이가 슬피 울면서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했다는 애절한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향산 삼거리에서 남한강을 따라 가면 싯계 보호비가 반겨준다. 충주시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수질이 양호하며 야생 동, 식물과 멸종위기에 있는 수달의 서식지로 알려지면서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달천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괴산의 명소를 두루 거치며 128Km를 흘러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아름다운 강이다. 미원, 청천, 괴산, 음성등지의 생활하수가 흘러들어 수질을 오염시키지만, 강가의 수초와 자갈들의 정화작용으로 충주시상수원으로 1급수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참고로 달천의 물은 조선시대 오대산의 우통수, 속리산의 삼파수 등과 함께 "조선 3대 좋은 물"로 알려져 왔다.
싯계교를 건너면 그 유명한 수주팔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승천하는 용이 꼬리를 물에서 치켜 올리는 형상이라. 수주팔봉(水周八峰 493m)은 물레산의 암맥이 뻗친 칼바위, 송곳바위, 중바위 등 창검을 곧추세운 날카로운 바위들이 수직절벽을 이루고, 백설이 뒤덮인 기암괴석과 폭포수에 소나무, 그 아래 정자까지 구색을 갖추었으니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절경을 이룬다.
背山臨水의 마을(충주시 살미면 향산리)에는 우참찬 이자, 이조참판 이연경, 이조참판 김세필, 영의정 노수신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신 팔봉서원이 있고, 산 주위에 물이 흐르고 8개의 봉우리가 있어 물놀이를 겸한 가벼운 산행지로 좋은 곳이다. 마을아래는 조선시대 기와를 굽던 와요지가 보존되어 선조들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달래강으로 합류하는 석문천(石門川)의 물줄기가 칼바위를 한참이나 돌아가므로, 중간의 낮은 협곡을 절단하여 물을 바로 빼면 수 십 만평의 하천부지를 옥토로 이용 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1963년 이곳 능선을 절단하여 달천으로 물길을 연결하게 된다. 석문천에서 이어지는 물길과 달천의 낙차가 약 10m가 되므로 이곳에 폭포가 생기고, 1981년 폭포 오른쪽 봉우리에 모원정을 건립하니, 수주팔봉의 운치가 한층 더 아름답게 보인다.
달천과 작별하고 석문천을 따라 5km를 진행하면 문강온천과 만난다. 전국제일의 유황온천으로 이름난 문강온천은, 유황이 주성분인 온천으로 썩은 달걀의 유황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유황이 피부에 닿아 피부의 각질을 연화시켜 피부병, 만성피부염, 만성류마티스, 동맥경화, 부인병, 당뇨병과 무좀에 특히 효과가 있으며, 식수로도 사용이 가능해 유황수를 마실 경우 신진대사가 왕성해지고 혈색소재생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강지교를 지나 낮은 언덕을 넘어서면 수회리의 너른 벌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곳 수회리에는 중앙경찰대학과 국립산림품종관리센터가 있다. 민주경찰을 양성하여 올바른 공직관과 인권의식을 함양하는데 목적을 두고, 전문적인 경찰의 실무적인 능력을 배양하는 기관이다. 국립산림품종관리센터에서는 식물 신품종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므로, 육종가의 권익보호와 신품종 개발촉진 및 종자 산업을 위하여 기여하고 있다.
원통교를 지나며 중원대로 옆으로 동행한다. 제설작업을 하면서 뿌려놓은 염화칼슘으로 질척거리는 눈이 차가 지나갈 때 마다 흙탕물세례를 퍼부으니 도저히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별다른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통과하는 6km야말로 절박하고 애간장을 녹이는 구간이다. 惡戰苦鬪속에 온천비각이 있는 수안보입구에 들어서니 온몸이 파김치가 되고 만다. 그래도 56년 만에 찾아온 한파 속에서 30km를 완주하고 보니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우리나라 최초의 용출온천수로 유명한 수안보온천은 약 알카리성 온천수로 인체에 이로운 각종광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일찍이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보러가는 길에 들렸다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정기를 받아 과거에 급제한다는 속설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쇠는 풀무질로 단단해지고 장인의 망치질에서 명검으로 태어난다고 하지 않던가. 극한 속을 헤치며 감행하는 것도 건강이 우선하는 것이고,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몸을 항상 단련하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일 것이다. 온천 욕실로 들어서면 뿌연 김이 온몸을 감싸고, 탕 속으로 몸을 밀어 넣으면 피로도 말끔히 사라진다.
2 . 문경새재
한 달 만에 찾아온 수안보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56년 만에 찾아온 한파에 20여cm나 쌓인 폭설로 수안보가 온통 눈 속에 고립된 동화속의 별천지를 이루었는데, 그사이 눈이 모두 녹아내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오늘 진행할 구간이 4대강 국토대행진에서 가장 험난한 이화령(580m)을 넘는 길이라, 폭설이 쌓인 한겨울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눈이 녹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동서울에서 6시40분차로 달려온 탓인가? 생각보다 빠른 8시 45분에 도착한다. 화창한 봄 날씨에 하늘까지 맑게 개였으니 워킹하기에는 가장 좋은 날씨다. 온천비각이 있는 공원에서 시작된 자전거 길은 3번 국도를 따라 돌 고개를 넘으면, 제주목사 조정철과 홍랑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조감사묘를 지나 옛날 영남과 충청도를 넘나드는 나그네쉼터와 공문서 전달역할을 했던 안보삼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석문동천이 흐르는 계곡을 따르면 미륵사지와 국립공원 월악산 가는 길이고, 남쪽은 은행정마을과 냉천동을 지나 소조령으로 향한다. 소조령에서 자전거 길은 연풍으로 향하고, 고사리마을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는 갈림길이 나온다. 문경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문경새재는 영남과 충청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와 문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문경새재 쪽으로 자전거 길이 연결되는 것이 순리겠지만. 이곳은 도립공원의 경내를 지나는 곳이라 자전거 통행을 제한하여 부득이 이화령으로 자전거길이 조성된 것이다. 걸어서 넘는 데는 문경새재 쪽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으로 소조령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화여대 생활관이 있는 고사리 마을에 들어서면, 신선봉(968m)과 마패봉(927m)이 날카로운 암봉을 드러내고 낙엽송이 무성한 계곡으로 그림 같은 조령산 자연 휴양림이 펼쳐진다. 심신이 피로한 도시인들이 잠시나마 자연을 벗 삼아 문경새재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더 없이 좋은 안식처이다.
드디어 영남 제3관으로 부르는 조령관(650m)에 도착한다.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이라 부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領)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산이 높고 험준하여 새들도 넘기 힘들고 억새가 많아서 또는 새로 닦은 길이라 해서 새(新)재로, 하늘재(麻骨領)와 이우리재(伊火峴)사이에 있는 고개라 하여 새재로 부른다.
조선 초부터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는 가장 큰 대로였던 새재는 영남과 충청도를 구분하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으로 부봉과 조령산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적을 막기 위해 선조 초에 성을 쌓고 숙종(숙종 34년:1708)때 중창하였다. 1907년 육축(陸築)만 남고 불에 탄 것을 1976년 홍예문 및 석성135m와 누각을 복원하여 성벽과 관문이 위엄을 갖추고 있는데, 우리 역사의 숨결이 거칠고 고단할 때 마다 주 무대로 등장하는 요충지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科擧 길”은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하던 길이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을 쑨다는 속설 때문에 새재를 즐겨 넘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령관을 넘어서면 수백 명의 장졸들이 주둔할 수 있는 너른 공터가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히 일품이다. 이제 이곳부터 주흘관이 있는 9.6km가 우리 문화와 역사의 숨결이 서려있는 문경새재길이다.
科擧에 及第하여 고향으로 錦衣還鄕하는 길목으로 내려서면, 정성스레 쌓아올린 책 바위가 반겨준다. 책 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속설이 있어, 지금도 입시철이 되면 소원성취를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한다. 잠시 후 문경초점(聞慶草岾)에 도착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의하면 낙동강의 발원지를 3곳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이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초점이고, 하나는 소백산 순흥으로, 상주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의 이름을 달고 부산의 을숙도까지 흐른다.
조령산성에는 북암문과 동암문이 있다. 북암문은 미륵리를 지나 충주, 제천쪽으로 3관문, 깃대봉 조령산으로 연결되고, 동암문은 관음리를 지나 단양, 예천쪽으로 탄향봉수와 하늘재로 연결된다. “암문이란”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 전시 상황이 되면 군수물자를 조달하거나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시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숲이 우거진 곳이나 성곽 깊숙한 곳에 만들어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설치한다.
이진 터에서 우리의 슬픈 역사를 되돌아본다. 임진년(1592년)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쳤다.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정탐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申砬) 장군이 농민 모병 군 8,000명을 이끌고, 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2진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이곳 조령산 능선에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하고 충주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치게 된다. 조선초병 머리위에서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한편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 장군의 조선 농민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나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문경시 자료 인용)
얼음이 녹아내리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한결 상쾌하고, 산을 찾은 아낙네들의 웃음소리에서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조령산 줄기에 가려 새색시의 수줍은 듯 자태를 감추고, 겨울에는 큰 빙폭으로 장관을 이루는 색시폭포를 지나면 너른 암반에서 청정옥수가 물보라를 일으킨다. 소낙비를 피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깊은 사랑을 맺었다는 바위굴을 자나 제2관문인 조곡관에 도착한다.
영남 제2관으로 부르는 이곳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중성이라고 한다. 숙종 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3관문)과 초곡성(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 또는 주서문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에 훼손된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주흘산 등산로 입구를 지나면 산불됴심 표지석을 만난다. 옛날 주흘산의 산불을 막기 위해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 됴심" 비는 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 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을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 초부터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는 가장 큰 대로였던 새재길 중턱에 경상감사가 교체 할 때 마다 업무와 직인을 인계인수했던 교귀정이 있다. 문경현감 신승명이 1466년에 세웠다고 하지만, 구한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교귀정을 굽어보고 있는 소나무는 오랜 역사와 함께 지나온 세월을 말없이 전하고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 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 등 여러 계층의 백성들이 험준한 새재 길을 오르다 지친 몸을 한 잔술로 달래고, 여독을 풀면서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주막. 산수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주막의 뜨락에서 바라보는 조령산의 자태는 선경이 따로 없다. 左靑龍右白虎의 지세로 주흘산과 조령산이 양립한 문경새재는 정상의 세찬바람도 비껴가는 명당자리다.
조령원 터에 도착한다. 원(院)이란 조선시대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시설이다. 조령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라 조령원터 외에도 동화원, 신혜원 터가 있었다고 한다. 조령원터의 넓이는 1,980㎡ 규모의 직사각형으로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돌담장과 석축, 4개의 건물지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돌담장 한 쪽에는 문을 내어 위에 긴 돌을 가로로 얹어 놓았다. 특히 돌담장의 축조형태를 살펴보면, 바깥쪽은 수직으로 쌓고 안쪽은 계단 형태로 쌓아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일반적인 담장이라기보다는 유사시에 성벽의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된 것을 1995년에 보수하였다.
드디어 문경오픈세트장이 나온다. 2.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경내로 들어서면 반영구적으로 지은 궁궐의 모습이 실제와 흡사하다. 70,000㎥의 부지에 경복궁, 동궁을 비롯하여 사대부집, 저잣거리, 성문 등 130동의 건물이 있다. 2000년 문경시와 KBS가 이곳에 고려시대 사극촬영장을 조성하면서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등을 촬영했고, 2007년 문경시에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오픈세트장을 새롭게 단장하여 대왕세종, 천추태후, 제중원, 명가, 추노를 촬영했다.
경북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광장을 벗어나면, 제일 관문 주흘관이 반겨준다. 주흘관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다.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하는데,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문경시에서 왕건세트장을 유치하여 후삼국, 고려시대의 왕궁과 양반, 서민들의 가옥을 재현한 세트장을 지어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면서, 주변의 웅장하고 수려한 산의 모습과 잘 어울려 마치 역사 속에 들어선 듯 신비로움까지 든다.
문경새재야 말로 우리역사와 문화, 전설에 오픈세트장까지 볼거리가 많아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안성맞춤이다. 문경새재 광장을 벗어나 조령천이 흐르는 개천 옆으로 도로를 따라 읍내로 들어가면, 이화령을 넘어온 자전거 길이 문경도자기전시장이 있는 진안교에서 만난다. 이화령으로 돌아오는 길보다는 5km가 짧지만, 문경새재의 아름다운 비경을 몸소 체험하는 일정으로 만족한다.
면소재지보다 조금 커 보이는 문경읍은, 세월이 비껴가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잣밭고개에 걸린 청운각에 호기심이 일어 찾아보니, 박정희 전 태통령이 문경 초등학교 선생으로 재직할 때 하숙하던 집을 작은 기념관으로 구며 놓은 곳이다. 문경새재를 넘어오며 견문을 넓이는 것도 4대강 살리기 국토대행진의 보람이 아닌가 싶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다음구간을 기약해 본다.
3. 진남교반
일주일 만에 찾아온 문경은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벌써 봄이 오고 있으니, 상풍대교를 지나 부산의 을숙도까지 달려가는 꿈이다. 문경읍을 보듬어 안고 있는 주흘산은 어느 곳에서 보아도 호걸선풍(豪傑仙風)으로 믿음직스럽게 보인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하는 자전거도로가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월남참전 기념비를 발견한다. 추억 속에 살아 숨 쉬는 백마부대. 44년 전 젊은 혈기로 열대의 밀림 속을 누비던 시절을 회상하며, 지금은 아들 재형이가 경제의 역군으로 베트남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우리 부자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아닌가 싶다. 부디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바란다.
문경온천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갈대 사이로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아침햇살에 반사되는 모습은 황홀감의 극치라 할까.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산수화의 경지로 빠져든다. 호두나무라면 천안을 먼저 떠 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곳 문경에도 호두나무가 많아 가로수로 심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집집마다 담장사이로 호두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으니, 문경호두가 명성을 날릴 그 날을 기대해본다.
봉명교를 지나 철교 밑으로 통과한다. 1955년 점촌∼가은(加恩)간 개통한 경북선과 연결하여 문경지방의 자원개발(석탄수송)을 위해 건설된 산업철도라고 한다. 그 후 1969년 진남~문경 간 연장공사로 점촌~문경구간 22.3km를 개통하여 문경선이라 하고, 이미 완공된 진남∼가은을 가은선이라 부르며 전성기를 구가하다 석탄 산업이 쇠락의 길을 걸으며 2005년 4월 이후 운행이 중단되고 말았다.
가은(은성탄광)과 마성(봉명탄광)지방에는 질 좋은 석탄이 매장되어 강원도 장성탄광, 충남 보령탄광과 함께 전국3대 석탄생산지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다. 경기가 좋은 시절에는 문경지방의 경제를 좌우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가은읍에는 은성광업소자리에 석탄박물관을 개설하여 그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와 3번국도가 만나는 마성면 소재지에 도착하면 소야솔밭을 지난다. 강둑을 중심으로 수백 년 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작은 백사장에 간이시설이 있어 캠핑장으로 적당한곳이다. 건너편으로 기암절벽의 주지봉(368m)을 휘돌아 흐르는 강물이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니, 지루한 여정 속에서도 산천경개(山川景槪)를 벗 삼아 벚나무 가로수의 호위를 받으며 찾아간 곳이 봉생교다.
울창한 소나무숲속에 자리 잡은 봉생정은 조령천과 영강이 만나는 지점을 굽어보고 있는 정자다. 조선중기의 학자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이 고향인 하회마을을 오갈 때 이곳에 들러 주변 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했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훼손된 것을 근래에 와서 문경시의 보조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영강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속리산)에서 발원하여 대야산에서 발원하는 물과 합류하여 흐르다가, 진남교반 부근에서 조령천과 만나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66.2㎞에 이르는 강이다.
영강을 따라 진남교를 지나면 고모산성을 만난다. 2세기 말 신라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모산성은 삼국의 세력이 팽팽히 맞서던 곳이었고, 임진왜란 때는 산성의 규모를 보고 놀란 왜군이 성이 텅 빈 줄도 모르고 진군을 주저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6·25전쟁의 격전지로도 알려진 곳이다. 총 길이가 1,646m에 이르는 고모산성은 주변산세를 이용해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축조하였다.
산성 아랫길은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토끼비리를 지나던 길이다.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을 빼앗고 서라벌로 진격할 때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고려 태조는 정기병(精騎兵) 5천을 이끌고 고모산성에 이르렀으나, 나아갈 길이 없어 고민하던 중. 새벽에 일어나 밖을 보니 토끼 한 마리가 바위 절벽 중간을 가로질러 가는 게 보이는지라. 군졸들이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위험한 길을 통과 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토끼비리(兎遷)라 부르고 있다.
문경팔경 중 으뜸인 진남교반은 자연과 인공구조물이 어우러지는 관광명소다.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사이로 산줄기와 강물이 태극 문양을 만들고, 강물 위로 철교, 3번국도,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3개의 교량이 지난다. 노송이 어우러진 강변을 따라 문경선 철길이 지나던 자리에 마련된 레일바이크를 타고 주변경치를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진남교반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진남교반은 수안보의 수주팔봉, 경북예천의 회룡포,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자연경관을 아름답게 빗어 놓은 절경이다.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원에서 국토의 높이를 측량하기위해 인천만 해수면을 표준점으로 정하여 국토의 중요한 지점에 수준점을 표시하였으니, 진남교반의 현 위치가 경도 128도 08분 05초. 위도 36도 39분 15초. 높이(해발고도) 104m로 표시하고 있다.
녹슨 철길위로 펜션열차를 운행하는 불정역을 지나 문경관광사격장 입구에서 불정교를 건너 34번 국도를 따른다. 산기슭에 거창한 건물들이 터를 잡고 있는 국군체육부대 시설물을 지나면, 바둑판 모양의 창동들을 감싸는 십리제방길이 아득하게 이어진다.
문경시민들이 즐겨 찾는 영신 숲은 이조 선조 때 횡성현감과 고성군수를 역임한 溪亭 高興雲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을 하면서, 영신 뜰에서 땀 흘려 일하는 농민들의 휴식공간을 위해 영강 변에 소나무를 심은 것이 효시라고 한다. 문경시 환경사업소를 지나 상주시로 들어서면, 새재길 100km의 여정도 멀지않은 듯, 사로면 퇴강나루에 도착한다.
안동댐에서 시작된 낙동강본류와 영강이 만나는 퇴강나루는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와 예천군 풍양면 와룡리를 잇는 나루터인데, 낙동강 7백리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남해바다에서 올라온 소금 배를 퇴강나루에서 내려 문경새재를 넘고, 물물교환으로 쌀과 목재를 실은 배가 남해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그 증표로 물미마을에는 낙동강 7백리 표지석이 있고, 상주시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천주교회가 있어 퇴강나루가 번창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상풍대교는 새재길 100km의 종착점이다. 충주 탄금대에서 시작하여 영남과 충청도를 가르는 문경새재를 넘어오며 조상들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문화유적을 살펴볼 수가 있어 더욱 값진 답사 길이라 생각된다.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거대한 장벽이 있어 문경새재가 존재하고, 이번 국토대행진으로 한강과 낙동강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했으니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