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프르트
2013년 4월 19일
2. 독일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고속열차를 건설할 때, 독일의 ICE와 프랑스의 TGV가 치열한 경쟁 끝에 차량선정에서 테제베(TGV)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와 프랑스가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며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공식으로 방한하게 된다. 그만큼 고속철도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미래 동력성장의 필수품인 것이다.
선진국인 독일의 이체(ICE)는 객차 내에 대형여행용가방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편리한 점 외에는 경부고속열차와 큰 차이가 없고, 안락함과 편안함에서는 우리의 KTX가 나은 것 같다. 고속 열차가 출발하며 프랑스의 대평원이 펼쳐지고, 여행사 측에서 마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한국식당에서 특별히 주문한 도시락은 하얀 쌀밥에 야채까지 곁들인 성찬이다. 든든하게 포식을 하고 소주로 입가심을 하고나니 포만감속에 스르르 잠이 몰려온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녹색평원에 그림 같은 마을이 차창 너머로 스쳐간다. 70%가 산악지역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이나 서유럽에서 대평원을 바라보면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유럽의 풍속도를 경험하는 것도 참된 추억이라. 장거리 이동의 피곤함도 잊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1시간 반 만에 프랑스국경에 도착하여 기차표검사로 국경선을 넘어 2시간을 달린 끝에 프랑크 프르트 중앙역에 도착한다.
서울역과 흡사한 고풍스런 역을 빠져나오면 가장먼저 반겨주는 것이 기아 모터스 간판이다. 외국에 나오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유럽의 경제도시 프랑크프르트 한복판에서 우리의 위상을 높여주는 간판하나에도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인원점검과 함께 리므진 버스에 올라 시내관광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뢰머광장이다. 뢰머란 로마인이라는 뜻으로, 프랑크프르트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뢰머광장은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뢰머광장에 있는 시청사는 15세기 초 프랑크프르트 시의회가 로마귀족의 저택 3채를 사들여 개조한 후 시청사로 사용하였으며, 그중 가운데 건물을 뢰머라 부르며 현재도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계단식으로 된 붉은 지붕의 세 개 동이 연결되어 있는데, 신성로마시대에는 황제대관식후 화려한 축하연을 하던 곳이고, 뢰머라 부르는 2층의 테라스는 중요 행사가 있을 때, 각료들이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연설하며 환호를 받던 곳이다. 분대스리가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하던 차범근씨가 85-86년 시즌 그의 팀이 우승하였고, MVP로 선정된 그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발코니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뢰머광장 중앙에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동상은 오른손에 검을 왼손에 천정(저울)을 들고 있는데, 유스티티아는 정의와 법을 담당하는 로마의 여신이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양날의 검은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뢰머광장 뒤편으로 로마시대 공중목욕탕 유적과 우뚝 솟은 성 바돌로메성당의 첨탑(95m)이 주는 위압감에 매료된다.
고딕양식의 성 바돌로메성당은 1152년 이래 1792년까지 600여 년 간 황제나 국왕을 선출하고 역대 황제들의 대관식이 치러지던 유서 깊은 장소로서 카이저 돔이라고도 부른다. 852년 카롤린 왕조시대에 성 바돌로메와 카를대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유서 깊은 성당이다.
프랑크 프르트는 인구 65만의 독일에서 5번째 도시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나라 경제인들이 유럽시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라 한다. 경제, 금융, 상업도시로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유로 금융센터가 자리 잡고 세계 각국의 은행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수 만 명의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는 금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중앙역과 뢰머광장 중간지점에 유태인 학살모습의 석상을 만날 수가 있다. 세계2차 대전의 주범인 독일에서는 유태인을 학살한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사죄의 뜻으로, 거리 곳곳에 잔인한 학살행위를 묘사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태도는 어떠한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저들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를 느끼며, 독도를 저들의 땅이라고 우겨대는 야만성이 여실히 대조되는 현장이다.
저녁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며 맥주의 본고장, 독일맥주 시음회를 갖는다. 500L에 3유로(4,500원). 독일에서 맥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라고 한다. 독일 전역에서 각 지역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양조장이 1,300개가 넘는다고 하니 다양한 맛에 놀라고 만다. 그만큼 독일 사람들에게는 생활화된 음료수로서, 독일맥주는 김이 빠져도 맛이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4성급 머큐리(Mercure)호텔에 여장을 풀고 프랑크프르트에서의 밤을 보낸다. 호텔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곧바로 하이델베르크 고성으로 향한다. 이곳에서도 현지가이드가 합승한다. 성우 송도순씨의 미모와 목소리를 닮은 가이드의 안내로 시작된다. 하이델베르크는 네카어강(江)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 1225년 라인 백작령(領)이 되었고, 1720년까지 선제후의 거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해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된 곳이다. 시내 인구의 약1/4 이 대학생과 학교관계자들이라고 한다. 30년 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여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하이델베르크는 1952년 이후로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어 17세기말 프랑스에 의해 파괴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치욕적인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산 교육장이다. 이 성의 지하에는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는 약 5만 8080갤런 규모(10만 명분)의 거대한 술통이 있다.
하이델베르크성 광장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이 너무도 아름답다. 유럽 중세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황갈색 지붕으로 고풍스럽고,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강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철학자의 길로 명명된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선다.
옛날부터 교육의 도시로 알려진 하이델 베르그에 위치한 고성은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마음의 평온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곳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알려진 괴테가 젊은 애인과 사랑에 빠진 곳이다.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있고, 1701∼1703년 건립된 시청사와 거대한 성당을 중심으로 쇼핑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점심메뉴로 독일 전통 돼지족발 슈바인학세를 기대하며 식당에 들어선다. 한국족발에 길들여진 입맛에, 생소한 슈바인학세는 생각보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도 여행길에서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포기해서는 안 되겠기에 천천히 음미하며 생맥주와 곁들이는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남한의 4배나 되는 357,022㎢의 면적을 자랑하는 독일에서 만 하루도 못되는 시간을 체류하는 것은 “장님 문고리 잡는 것보다도 못하지 않은가”. 1883년(고종 20) 11월 조선전권대사 민영목(閔泳穆)과 주일(駐日) 요코하마[橫濱] 독일총영사 자페 간에 한·독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처음으로 독일과 공식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됨에 따라 한·독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반세기가 지난 1957년 대한민국과 서독정부가 상호승인을 교환함으로써 공식교류가 시작된다. 이후 한국의 간호사와 광산근로자들이 서독으로 진출하고, 1964년 12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하여 경제선진국인 독일의 도움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원동력이 된다. 독일에서의 짧은 여정을 맥가이버 칼을 사는 것으로 대신하고, 빗방울이 흩날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 속에 스위스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