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 영산강

제4구간: 백제의 한

김완묵 2012. 9. 14. 04:51

일   시: 2012년 9월 3일

경유지: 부소산성 - 구드레 나루 - 백제대교 - 맹꽁이 서식지 - 현북리 양수장 - 석성천 - 논산천 - 강경읍

 

                                                     백제의 한(恨) (25km)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서연이가 의정부생활을 정리하고 보금자리인 수서로 가는 날이다. 육아일기에 어설픈 어미가 미덥지 않아 백일까지라도 보살펴 준다는 마음으로 취미활동을 뒤로 미루고 오직 서연이를 위해 올 인하기로 하였다. 자식이 물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부모라 하지 않던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국토 대행진도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덕분에 삼복더위도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9월이 되었으니 운동하기에는 가장 좋은 계절이다.

 

 

부여는 남부 터미널에서 2시간 10분이면 도착하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다. 백제는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기원전 18년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기슭의 위래성에 도읍을 정하고 490여 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위례성에서 밀려나 538년까지 60여 년간 백제의 수도로 사용하던 곳이 웅진이요. 성왕 16년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간 사용하던 도읍지이다.

 

 

부여 읍내로 들어서면 중심가 로타리에 성왕의 동상이 있다. 광화문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부여에는 성왕이 있어 백제 인들의 긍지를 높여주는 곳이다. 성왕은 백제26대 왕으로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중흥을 위해 538년 사비(泗泚)로 천도하여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고쳐 부르며, 554년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고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에 빼앗기자 신라를 공격하다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다.

 

 

사비성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있는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사적 제5호로 지정된 부소산성은 둘레가 2,200m에 면적이 약 74만㎡로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흐르는 백마강과 함께 어우러진 절경이다.

 

 

성왕동상이 있는 로터리에서 부소산성 매표소까지는 100m 남짓한 가까운 거리다. 월남에 참전한 경력으로 국립공원이나 유적지를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특혜를 받고 보니 국가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산문을 지나면 곧바로 동헌이 나오고 오른쪽 오솔길을 따르면 삼충사가 반겨준다. 폭정을 일삼던 의자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우국충정으로 마지막 혼을 불사른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의열문(義烈門)을 지나면 충의문(忠義門)이 나오고, 그 뒤로 영정을 모신 사당(삼충사)이 있어 중앙에 흥수, 왼쪽에 성충, 오른쪽에 계백의 영정을 나란히 모시고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던가. 삼충사의 충언을 가납하여 나라를 돌보았더라면 백제의 역사는 새롭게 쓰였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평시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전시에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사용하던 사비성은 많은 문화유적지가 산재하여 부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곳이고, 이곳주민들에게는 심신을 단련할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사비 길로 명명된 오솔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노약자도 쉽게 오를 수가 있다.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국정을 계획했다는 영일루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라 그대로 지나치고, 노송이 어우러진 군창지를 지나 반월루 2층 누각에 올라서면 부여 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좋은 곳이다. 후원을 거닐다가 반월루에 올라 백성들이 살고 있는 도성을 굽어보며 국정을 구상하고, 교교히 흐르는 달빛을 벗 삼아 시조한수 풀어내는 왕족들의 모습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오늘의 행로가 만만치가 않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가쁜 숨을 몰아쉬면 곧바로 사자루에 오른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2층 누각에 올라서면 사면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울창한 나무숲에 가려 전망이 신통치를 않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낙화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106m에 불과한 부소산이지만 낙화암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다. 층층계단을 내려서면 기암괴석위에 날렵하게 올라앉은 백화정이 반겨준다. 1929년 당시 군수였던 홍한표의 발의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소동파가 혜주에 귀양을 갔을 때 성 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榭百花州)라는 시에서 취해왔다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배경으로 강 건너 백제문화단지와 부소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가파른 계단을 좀 더 내려가면 낙화암이다.

 

 

백마강과 낙화암은 백제를 지켜주는 보루였지만, 종말을 알리는 비극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수십 길 벼랑위에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급경사를 이룬다. 꽃잎처럼 스러져간 삼천궁녀의 혼이 서려있는 낙화암은 충주의 탄금대와 함께 우리역사에서 가슴 아픈 현장이다. 두 곳 모두 수심이 깊은 한강과 금강이 흐르고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한곳이 탄금대이고, 백제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 낙화암이다.

 

 

씁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사자루가 있는 정상으로 되돌아와 구드레나루 쪽으로 내려선다. 금강에 산재한 100여 곳의 나루터 중에서 웅진과 함께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이었다고 한다. 「구드레」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하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레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드레나루터에는 황포돛배로 백마강을 유람할 수 있는 선착장이 있고, 2010년 백제대전을 기념하여 조성해놓은 조각공원을 중심으로 자전거도로와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천연잔디로 조성된 축구연습장이 있어 학생들의 체력단련은 물론, 타지방 학생들의 전지훈련장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 건너 부소산을 바라보며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면 부여읍과 규암면을 연결하는 백제대교와 만난다. 대청댐에서 내려오는 자전거도로도 백제문화단지를 지나 규암면소재지에서 백제대교를 건너 금강하구 둑으로 이어지며, 백제대교 남단에는 대청댐 88km, 금강하구 둑 55.4km 이정표가 반겨준다.

 

 

불교전래 사은비와 선화공원이 있는 부여대교를 지나며, 백마강이 동쪽으로 몸을 틀어 석성면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사비의 혼이 흐르는 백마강 비단물길” 표지 석을 지나면서 인적도 별로 없는 한가로운 둔치에는 멋없이 웃자란 망초대가 숲을 이루고, 맹꽁이 서식처 입간판이 반겨준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요란하게 울어대는 맹꽁이는 수놈이 암컷에게 구애하는 표현방식으로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울어댄다고 한다. 환경부 멸종위기종(2급)으로 지정된 맹꽁이는 주로 땅속에서 생활하며 장마철인 6~8월 사이에 이곳 웅덩이에 알을 낳는다. 참개구리가 부화하는데 10일이 걸리지만 맹꽁이는 2일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만큼 주위에 천적이 많고 생존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꽁이는 땅속 10cm깊이에서 동면하며 양분이 글리코겐이라는 단백질로 변해 혈관 속에서 부동액 역할을 하여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특이 체질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강 건너 장암면에는 성흥산성이 있다. 백제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에 쌓은 석성으로 산 정상에서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이다.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백제부흥운동 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 드리는 사당이 있고, 장하리에 있는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으로 자연석에 가까운 바닥 돌을 깔고 그 위에 같은 돌로 너비를 좁히면서 3단의 기단(基壇)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또한 금강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언덕에는 조선시대 과천현감을 지낸 난재(蘭齊) 조태징(趙泰徵) 선생을 배향한 흥학당(興學堂)이 있다.

 

 

둔치로 진행하던 자전거길이 논산 23km이정표를 지나며 제방위로 올라선다. 단조롭고 지루하던 여정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현북리 일대의 문전옥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허나 이일을 어쩌랴. 지난 8월 28일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으로 비닐하우스가 갈기갈기 찧어지고 농경지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농민들의 심정이 오죽할까. 사람도 날아갈 정도로 순간초속 풍속이 51m에 많은 비를 동반한 볼라벤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며 가뭄을 극복하고 거둔 결실이 한순간에 초토화되고 말았다. 물 빠진 농경지는 멍게 흙으로 범벅이 되고, 갈 갈이 찢겨진 비닐하우스는 엿가락처럼 뒤엉켜있다. 출하를 앞둔 과수원의 사과와 배들이 밭고랑에 수북하게 쏟아져 내리고, 남해안의 가두리양식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니 경천동지할 현실 앞에서 농민들의 가슴이 미어지고 만다.

 

 

참담한 현장을 바라보며 무거운 발길을 이어가면 현북 양수장을 만난다. 현북리 일대의 문전옥답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양수장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금강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부여의 백마강에서 흘러온 강물이 넓은 호수를 이루고, 수초가 무성한 강변에는 철새들이 둥지를 틀어 안락한 보금자리를 만든다. 협소한 벼랑길에는 나무테크로 다리를 놓고 시원하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 속을 지나는 동안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꿀맛 같은 2km를 지나고 나니 또다시 폭염속의 뙤약볕 아래로 내몰리고 만다. 어쩌겠는가. 내가 가야할길이 이 길이고, 극복해야할 난관이니, 대청댐100km 이정표를 바라보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대청댐 기점100km 표지를 지나며 많이도 걸어왔다는 생각이 미치자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만은 천리라도 달려갈 기세다. 그래서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매사를 긍정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힘도 덜 들고 능률도 배가되지만, 마지못해하는 피동적인 생각은 금새지치고 결국에는 포기하고 마는 실망스런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부여와 논산이 접경을 이루는 석성천을 지나며 금강하구 둑 40km 이정표를 만난다. 활등같이 휘어진 제방길로 올라서면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너른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풍년을 기약하던 문전옥답이 태풍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좌절과 실의를 이겨내려는 극복의 현장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군인들의 모습이 마음 든든하다.

 

 

아직도 우리기억에 생생한 태안 앞바다에서 일어난 기름 유출사건을 되돌아보자. 2007년 12월 7일 충청남도 태안군 앞바다에서 인천대교 공사를 마친 삼성물산 소속 크레인 부선 “삼성 1호”를 예인선이 경상남도 거제로 끌고 가다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정박해 있던 홍콩 선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하여 유조선 탱크에 있던 1만 2,547㎘(7만 8,918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해역으로 유출된 사고였다.

 

 

유출된 원유가 심한 풍랑을 타고 태안군과 서산시 양식장, 어장 등 8,000여㏊를 덮치며 어폐 류가 폐사되고 짙은 기름띠는 만리포, 천리포, 모항, 안흥항과 가로림만, 천수만, 안면도까지 유입되었다. 또한 타르 찌꺼기는 안면도와 군산 앞바다까지 밀려가는 재앙으로 자연 정화되는 데는 30년이 걸리는 죽음의 땅으로 벼하고 말았다.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기위해, 전국에서 130만 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찾아와 기름제거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고발생 2년 만에 태안국립공원의 해양 수질과 어종이 기름유출사고 전과 유사한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기적을 일구어낸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불암산 기슭을 돌아 개척리 제방에 올라서면, 강경읍의 고층아파트들이 윤곽을 드러낸다.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58㎞를 흘러온 논산천이 금강과 어우러지는 두 물머리 강어귀를 막아 개척리와 삼호동 앞뜰에 수 십 만평의 옥토를 일구었으니 광활하게 펼쳐지는 평야가 장관을 이룬다.

 

 

논산 천을 건너면 곧바로 강경읍이다. 금강하구 둑 36.7km 이정표를 지나 유람선과 등대모형으로 만든 “강경젓갈전시장”앞에서 금강 제4구간 답사를 완료한다. 부소산성과 금강답사 20km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강경역에서 14시 41분에 출발하는 호남선 무궁화호 편으로 상경하여 양천문학회 시화전까지 참석하였으니 보람 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