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 영산강

제2구간: 행정도시 세종

김완묵 2012. 7. 11. 05:56

 

일   시: 2012년 7월 9일

경유지: 부강리- 합강정 - 독락정 - 세종시 -  세종보 - 한림정 -  산림박물관 - 불티교 - 청벽대교 - 장암휴계소 -

          신공주대교 - 공주대교 - 금강교 - 공산성

 

                                              행정도시 세종 (32km)

가슴속을 태우던 가뭄도, 세찬 폭우 속에 말끔히 씻겨 내리고 둔치로 넘실거리는 강물에서 생동감을 맛본다. 임진년 7월을 맞아 우리집안에는 큰 경사가 났다. 둘째 딸 미숙이가 결혼 한지 4년 만에 예쁜 공주를 순산한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사위 정모가 40이고 산모의 나이 38세에 얻은 보물이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이다.

 

 

집안의 경사를 생각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로한 줄을 모르니, 새로운 활기를 찾아 금강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기만 하다. 지난 6월27일 청주와 청원군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청주와 청원은 한 몸이면서 둘로 갈라져 기형적인 삶을 살아오는 도너츠형 도시라는 말이 실감나게 청주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청원이요. 모든 생활권이 청주에 있지 않은가.

 

 

66년 만에 숙원을 이룬 청주와 청원군이 옥동자를 분만하는 기쁨으로 축제의 분위기속에 들떠있다. 2년간 준비가 완료되고 나면 통합시로 거듭 태어나 인구 83만 명의 충청권 최대 기초자치단체로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집안의 경사와 내 고향 충청도의 경사가 겹쳤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의미가 깊은 것이 아닌가.

 

 

세종시로 편입된 합강리로 들어서면 合江亭이 반겨준다. 금강 8경으로 선정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새로 지은 정자다. 합강정 2층 누각에 올라서면 유유히 흘러온 금강과 미호천이 어우러지는 두 물머리가 시야에 가득하다. 왕 버들 무성한 수초사이로 백로들이 날아오르고,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미호천 보행교를 건너면 공주(27km)와 청원(35km)으로 갈라지는 자전거도로분기점에 두강이 하나로 모아진다는 상징적인 조형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보현산(普賢山:482m) 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미호천은 진천군을 지나 청원군 오창읍 신평리에서 청주 시내를 관통한 무심천과 만나 미호평야를 일구고, 세종시 남면 월산리와 동면 합강리 사이에서 금강에 흘러드는 길이가 89㎞에 이르는 제법 긴 하천이다. 하천연안을 따라 평야가 발달해 충청북도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루며, 주변 구릉지에서 과수재배와 낙농업이 발달하여, 수박과 고추, 인삼이 특용작물로 인기가 높다.

 

 

미호천 기슭에 있는 함호서원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주자학을 전파한 고려시대 안향 선생의 영정(충남문화재자료 41호)을 모신 곳이고, 덕성서원은 임헌회를 배향한 사우(祠宇)로 창건되었다. 임헌회는 풍천(豊川) 사람으로 1811년(순조 11) 천안 직산면 산음리에서 태어나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뒤 방축리에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합강정에서 독락정으로 내려오는 6km는 노적봉(181m)과 전월산 기슭을 따라 자연 늪지가 형성되어 四時節 철새들이 찾아드는 보금자리다. 4대강 살리기로 습지가 많이 사라졌지만, 이곳 만큼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그나마 다행이다. 1번국도가 지나는 금남교를 목전에 두고 강기슭에 자리 잡은 독락정이 반겨준다.

 

 

고려시대 최영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고 공조전서를 역임한 임 난수 장군이 忠臣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둘째아들 양양도호부사 임목이 아버지가 머물던 자리에 지은정자다. 세종대왕께서 그의 충절을 기려 林氏家廟를 써주고 不遷之位로 모시도록 명하였으며 賜牌地로 羅城一丘江山을 하사하였다.

 

세조 14년(1468)에 세운 독락정은 후손

들이 지극정성으로 모신 까닭에 600년이 넘었지만, 옛 모습 그대로 단청도 선명하고 연기 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경관이 빼어나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감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곳이다.

 

 

금남교를 지나며 세종시개발현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 세종시는 2002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후보의 신행정수도공약으로 시작돼 헌재의 위헌판결, 수정안 논란 등을 거쳐 지난 7월 2일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탄생한 것이다. 원수산을 중심으로 전월산과 괴화산을 합하여 삼산(三山)을 이루고, 동쪽의 금강과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미호천이 이수(二水)가 되어, 산과 물이 어우러진 연기군이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서부개척시대를 연상하리만치 어수선한 공사현장에는 중장비들의 굉음소리가 요란하고 세종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한두리대교와 입주가 시작된 첫 마을 아파트단지가 선을 보인다. 세종시는 면적이 서울의 77%에 이르고, 2030년 까지 인구 50만의 행정 타운으로 발전한다는 계획이다.

 

 

안내 표시도 없이 인증센터부스가 나타난다. 영문도 모른 채 도장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세종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금강110km이정표가 반겨준다. 앉은뱅이 다리로 금강을 건너 남쪽 제방을 따라가며 세종시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의 의지가 세상을 바꾸고 驚天動地할 역사를 창조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행정도시 세종” 이라는 목표가 용두사미로, 또는 기형아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금강 7경으로 선정된 세종보가 나타난다. 금강 3개보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세종보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 자음 14개와 측우기 모양을 형상화하여 길이 348m(고정보 125m, 가동보 223m)에 높이 2.8~4.0m의 개량형 전도식 수문형태로 건설됐다. 일반 하천의 수중보처럼 단순하게 강을 가로막아 금강 변 생태공원에 인접한 세종공원과 어우러지는 구조물로, 세종시의 경관을 보호하기위해 간결하게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당진대전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금강교를 지나면 翰林亭이 나타난다. 平山申氏世居地로 소개하는 강 언덕에 자리 잡은 한림정은 주위에 펼쳐지는 경관이 수려하고, 세종시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신 한림학사가 새 거주지로 정하고 이곳에 정자를 지으려고 제자들과 터를 닦고 있었는데, 술에 취한 사나이가 신 한림학사 앞을 지나자 숲속에서 꿩 한 마리가 갑자기 날아오르며, 놀란 말이 뛰어오르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금강 쪽 절벽으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불길한 예감으로 공사를 중단한 것을, 그의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이 한림정이라고 한다. (백제신문 인용)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물이 불티교와 만난다. 옛날 금강 하구에서 소금을 가득 실은 배가 이곳 나루까지 올라와 짐을 풀면, 기다리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소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 불티나루라 불렀다고 한다. 이제는 주홍색 아치로 멋을 부린 불티교가 나루터를 대신하고 강물이 굽이치는 청벽에서 물살을 가르는 수상스키와 충남산림박물관 팔각정이 새로운 명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불티교를 건너 금암리 강변길을 따른다. 장맛비가 멈춘 틈새를 비집고 떠 오른 태양이 가마솥 열기를 쏟아낸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바람도 숨을 죽이고, 아스콘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와 습도가 합하여 40도가 넘는 한증막에서 숨이 턱턱 막힌다. 인간의 한계라는 극한상황에서 확고한 목표의식이 없다면 견디기 어려운 고행이다.

 

 

TV에서 ⌜차마고도⌟라는 프로를 본적이 있다. 중국 서남부에서 티베트를 넘어 네팔·인도까지 이어지는 육상 무역로인데, 길이가 5000㎞에 평균고도가 4,000m 이상인 높고 험준한 설산(雪山)에서 수십 마리의 말을 이끄는 마방들과 오체투어를 하는 성지순례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쪽은 살아가는 생활수단이고, 다른 쪽은 극락정토를 찾아가는 성지 순례길이다. 극한상황에서도 자신의 삶과 정신세계를 찾아가는 모습은 처절하고도 엄숙한 모습이다.

 

 

그 어려운 난관을 뚫고 이루어낸 목적달성은 그 어느 것 보다도 소중하고 달콤한 열매가 아닌가. 이제 국토대행진의 여정도 ⅔를 지나고 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의지가 살아나고 앞으로 갈 길에 힘이 솟는다. 한 여름 한증막에서, 한 겨울의 눈보라를 헤치는 것도 내 마음을 다지는 경종이고, 체력을 길러내는 보양 책이다.

 

 

국립공원 계룡산으로 가는 청벽대교 밑을 지난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지금의 계룡시)에 도읍을 정하려고 할 때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요.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형국이라 닭(鷄)과 용(龍)을 따서 鷄龍山(845m)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풍광이 아름답고 고유 동·식물들의 서식처로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기위해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청벽대교를 지나며 공주 시내가 아련히 바라보인다. 공주는 백제22대 문주왕이 하남위례성에서 왕도를 웅진(현재 공주)으로 옮긴 뒤,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성왕이 사비성(현재 부여)으로 천도 할 때까지 5대 64년 간 백제의 도읍지로 사용하던 곳이다. 공주는 금강기슭에 자리 잡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선사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유서 깊은 고을이다. 고종 32년에는 (서기 1895년) 공주부를 신설하어, 1932년 도청소재지가 대전으로 이전할 때까지 충청남도의 수부로서 인근 27개 군을 관할하였다.

 

 

시내로 들어오며 금강 둔치에는 각종 체육시설과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신시가지에는 공주 교육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예로부터 공주를 교육도시라 지칭한 것도 공주교육대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충청남도에서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주대-공주교대-충남대가 통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통합 후 세종시에 글로벌 융복합 캠퍼스가 조성되면 총 학생수가 4만9000명에, 천안, 공주, 대전, 세종시 등 충남권 각지에 캠퍼스가 있는 초대형 국립대로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을 찾아간다. 금강교 남쪽 곰나루 형상이 있는 소공원에 도착하면 금강 하구 둑 92km, 대청댐 52km 이정표가 반겨준다. 무더운 날씨에도 31km를 걸어왔으니 대단한 의지가 아닌가. 공산성의 정문인 금서루를 찾아가는 길옆으로 이고장의 자랑인 공덕비가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여 왕도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 변 야산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부른 성의 길이는 석성이 1930m, 토성 730m를 합하여 2660m에 이르는 철옹성으로 금강의 기암절벽을 따라 축성하였다.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하던 임류각은 공산성에서 가장 큰 누각이고, 정상에 있는 광복루는 1946년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이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광복루가 있는 정상에서 이어지는 공산성 둘레 길은, 공주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절경이다. 금강이 있어 공주가 돋보이고 공산성이 있어 금강의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천혜의 요새인 성벽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면 백제의 사직과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듯, 강 건너 신시가지가 그림같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