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묵 2012. 6. 6. 03:51
조선왕조 500년 실록모음 (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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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 http://cafe.daum.net/asd3311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저

도서출판 들녘/ 1996

(개국 이전)

. 1355년 고려 말 이자춘은 공민왕을 도와 원이 고려 땅에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치고, 고려가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데 공을 세우고 동북면을 안정시키는 토착 세력으로 성장한다. 1360년 그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 이성계가 그 자리를 이어 받는다.

. 1335년 이성계는 두만강변의 화령부(영흥)에서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엽의 중원(中原)은 명(明)이 일어나 원(元)을 위협하고 있었고, 만주지역에는 여진족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쪽에는 왜구가 창궐하여 한반도와 중국의 양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이른바 무인(武人) 우대시대였다.

.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에서의 승리, 1362년 원의 나하주(여진족 장수)가 북청, 흥원 일대를 침범하자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이를 격퇴, 1364년 원이 공민왕을 폐하고 새 고려왕으로 지명한 덕흥군이 의주로 처 들어오자 최영과 이성계가 이를 섬멸, 1369~ 1370년 만주지역 점령을 위한 동녕부 공격, 1376(우왕 2년)~1367년 왜구의 격퇴, 1382년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한 여진 격퇴, 1388년 위화도 회군까지 동북면을 지키는 이성계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 1388년 4월 위화도 회군 ... 우왕이 최영의 요동정벌 주장을 받아들여 최영(팔도도통사), 조민수(좌군도통사), 이성계(우군도통사)로 하여금 용동정벌을 감행했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하여 이른바 4대불가론(四大不可論)을 내세워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진입하여 일대 접전 끝에 승리, 최영을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한다. 이듬해 창왕 또한 폐위되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34대)이 등극하게 된다.

□ 고려왕조 ... 34왕, 474년( 918년~ 13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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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 27왕, 519년(1392년~ 1910년)

제1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 생졸 1336~ 1408년(73세)

재위 1392. 7~ 1398. 9(6년 2개월)

부인 3명, 자녀 8남 5녀

신의왕후 한씨 진안대군(방우), 제2대 정종(定宗) 영안대군(방과), 익안대군 (방의), 하안대군(방간), 제3대 태종(太宗) 정안대군(방원), 덕안대군(방연),

경신공주, 경성공주

신덕왕후 강씨 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방석), 경순공주

후궁(?) 의령옹주, 숙신옹주

. 1392년 7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고, 이듬해 3월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했다. 국호는 ‘화령’ 또는 ‘조선’ 중에서 조선으로 확정되었다. 이때 국호를 택정 받기 위해 명나라로 파견된 주문사는 한상질(한명회 조부)이다.

. 1394년 10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다. 천도론은 하륜은 모악산(지금 의 연희동 일대)을 주장,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로 하는 안을 주장, 정도전은 북한산 아래쪽을 각각 주장했으나 정도전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앞서 권중화로 하여금 계룡산을 도읍지로 물색한 바가 있다. 일찍이 신라 고승 도선은 “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王城)이 들어설 것이며, 주인은 이씨가 될 것”을 예언한 바 있다.

. ‘제1차 왕자의 난’ ... 1398년(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일으킨 난으로서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政社)’ ‘정도전의 난’이라 한다. 이성계는 즉위 즉시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 소생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았으며, 특히 이성계 등극에 지대한 공을 세운 다섯째 아들 방원은 세자(방석)를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은 물론 방번까지 함께 살해한다. 개국공신 중에서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되었고, 여타의 훈신과 왕실세력, 그리고 개국의 핵심 무장세력 등은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1396년 최대의 난적이자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세력인 강비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 복귀 노력은 한층 가속화 되었다. 정도전 일파가 1398년 이른바 진법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을 혁파하려 하자 위기를 느낀 방원 일파가 벌인 대반격이었다. 이 사건으로 태조는 그해 9월 둘째 아들 방과(제2대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安邊韓氏) ... 1337년~ 1391년(55세)

증(贈)영문하부사(領門下府使) 한경(韓卿)의 딸로, 방우, 방과(정종), 방간, 방원(태조), 방연 등 5남과 경신공주, 경선공주 등 2녀를 두었다. 능호(陵號)는 재릉으로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信川康氏) ... ~ 1396년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방번(芳蕃), 방석(芳碩)(세자책 봉), 경순공주를 두었다. 능호(陵號)는 정릉(貞陵)으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200년 뒤인 현종 때 송시열의 상소에 따라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 도 복귀되었다.

. 정도전(鄭道傳) ... 1337년~ 1398년(62세)

조선의 개국은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으며, 이러한 논리를 고려왕조에 대입 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다. 그는 국운이 기울어진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 학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그는 1337년 경북 영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운경이 목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의 친구였던 탓으로 이색 문하에 서 수학, 포은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그는 1375년(우왕 1년) 권신, 이인임, 경복홍 등의 친원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에 유배되었 으며, 2년 뒤 유배지에서 풀려나 낙향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올라와 후학을 가르치다가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은 후 이성계의 천거 로 대사성에 오르는 등 혁명가로서의 꿈을 키우면서 강비 소생 방석을 세자 로 옹립하고, 세자를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를 꿈꾸었지만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방원에 의해 세자 형제와 함께 제거되 었다.

. 능호(陵號)는 건원릉(建元陵)이며,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소재 동구릉(東九 陵)에 있다.

제2대 정종(定宗) 방과(蒡果) ... 생졸 1357~ 1419년(43세)

재위 1398. 9~ 1440년 11월(2년 2개월)

부인 8명, 자녀 15남 8녀

정안왕후 자식 없음

성빈 이씨 2남, 숙의 지씨 3남 1녀, 숙의 기씨 4남 1녀, 숙의 문씨 1남,

숙의 윤씨 4남 1녀, 숙의 이씨 1남

.

‘제2차 왕자의 난’ ...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윗 형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일으킨 난으로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 한다. 박 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한 장본 인으로서 일등 공신에 피봉되지 못했음을 불평하다가 도리어 죽주(영동)에 귀양 중이었다. 방원에 대한 원망을 풀어보고자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한다고 밀고를 한 것이다. 난은 곧 평정되었다. 그해 2월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었 고, 이어 11월에 정종은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간 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 죽었다.

제3대 태종(太宗) 방원(芳遠) ... 생졸 1367~ 1422년(56세)

재위 1400. 11~ 1418. 10(7년 10개월)

부인 12명, 자녀 12남 17녀

원경왕후 민씨 양령대군, 효령대군, 충령대군(제4대 세종 世宗), 성령대군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효빈 김씨 1남, 신빈 신씨 3남 6녀, 신빈 안씨 1남, 의빈 권씨 1녀

소빈 노씨 1녀, 숙의 최씨 1남

안씨 1남 2녀, 김씨 1녀, 이씨 1녀, 궁녀 1녀

.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驪興閔氏) ... 1365년~ 1420년(56세)

.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양령(讓寧), 효령(孝寧), 충령(忠 寧 제4대 세종 世宗), 성령(誠寧) 등 4남과 정순(貞順)공주, 경정(慶貞)공주, 경안(慶安)공주, 정선(貞善)공주 등 4녀를 두었다. 능호(陵號)는 헌릉(獻陵) 으로 강남구 내곡동 산 13-1 대모산 남쪽 기슭에 있다.

. ‘민무구, 무질 형제의 옥(獄)‘ ... 1406년 8월 태종이 세자 양녕(讓寧)에게 선위 할 뜻을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오빠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 를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挾幼執權/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 혐의 를 받게 되자, 1407년 7월 옥사가 발생하였으나 곧 진압되어 이들은 유배 중 1413년 자결하였다.

. 육조직계제(六曹職階制) 단행 ... 태종은 1406년 시행된 의정부 기능을 축소 하고,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의 육조 장관들의 품계를 정3품에서 정2품으로 높였다. 당시까지 존속한 독 립관아 중에서 의정부(議政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승정원(承政 院), 한성부(漢城府) 등을 제외한 900 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 속 시켰다.

1400년(태종 14년) 마침내 육조직계제(六曹職階制)를 단행, 그때까지 ‘왕- 의정부- 육조’ 체제를 ‘왕- 육조’ 체제로 전환하여 왕권과 중앙집권제를 크 게 강화시켜 왕조의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 신문고(申聞鼓) 설치 ... 1401년 8월 태종은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떠 신문고 를 설치하여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정을 구현하려고 했다.

. 한양으로 다시 천도 ... 1394년(태조 3년) 태조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하였다가 1398년(정종 원년) 정종이 한양에서 개경으로 다시 옮겼다가 1404년 9월(태종 5년) 경복궁이 중건되자 수도를 다시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이후 한양은 5백여 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이 되 었다.

제4대 세종(世宗) 충령대군(忠寧大君) ... 생졸 1397~ 1450년(54세)

재위 1418. 8~ 1450. 2(31년 6개월)

부인 6명, 자녀 18남 4녀

소헌왕후 심씨 문종(제5대 文宗), 수양대군(제6대 세조 世祖),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영빈 강씨 1남, 신빈 김씨 6남, 혜빈 양씨 3남, 숙원 이씨 1녀, 상침 송씨 1녀, 안씨 1남 2녀, 김씨 1녀, 이씨 1녀, 궁녀 1녀

. 폐위되는 양녕(讓寧) 세자로 책봉되는 충녕(忠寧) ... 1404년 태종은 13세의 어린 양녕을 세자로 책봉하고 1406년 선위 표명을 하는 등 재위 기간 중 네 차례 선위 파동을 일으킨다. 1418년 양녕을 폐하고(유정현 청원, 황희 등 일부 반대했다가 유배) 대신 6월 충녕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두 달 후 양위 하니 그가 곧 제4대 세종(世宗)이다.

. 의정부사서제(議政府署事制) ... 1437년(세종 19년)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사 서제(議政府署事制)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를 넘기 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토록 하며, 집현전(정종 때 설치)을 통하 여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여 편찬사업 및 훈민정음 연구사업 등이 활기를 띠 었다.

1421년 세자 향(珦)이 8세때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42년 서무 결재권을 넘겨 주어 1450년까지 8년간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히도록 했다. 이를 위하여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고 첨사, 동첨사 등 관원을 두었다.

. 소의왕후(昭憲王后) 심씨(靑松沈氏) ... 1395~ 1446년(52세)

영의정(領議政) 심온(沈溫)의 딸로, 향(珦)(제5대 문종 文宗), 수양(首陽)대 군 제6대 세조 世祖), 안평(安平)대군, 임영(臨瀛)대군, 광평(廣平)대군 : 방 번(芳蕃) 봉사손, 금성(錦城)대군 : 방석(芳碩) 봉사손, 평원(平原)대군, 영응 (永膺)대군 등 8男과 정소(貞昭)공주, 정의(貞懿)공주 등 2女를 두었다. 능호 (陵號)는 영릉(英陵)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에 있다.

. 황희(黃喜) ... 본관은 장수(長水). 호는 방촌(厖村).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 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 (金祐)의 딸이다. 1363년 개성에서 출생,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하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지만 조 정 요청으로 성균관학관으로 돌아왔다. 태종이 그를 신임하였으나 1418년 양녕대군 폐위를 옹호하다가 유배되어 1422년(세종 4년) 유배에서 풀려나 참찬의 직위로 등용된 후 1432년 영의정부사에 오르기까지 18년 동안 국정 을 통리하며 세종을 보필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 成)이다.

. 맹사성(孟思誠) ... 본관은 신창(新昌). 호는 동포(東浦) 아버지는 고려 수문 전제학(修文殿提學) 맹희도(孟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다. 1360 년 온양에서 출생. 은거한 것과는 달리 태조 때부터 승진을 거듭해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 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 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이듬해《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1431 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 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 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 검소하여 남루한 행색으 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 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 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 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 시 가(江湖四時歌)》가 있다.

. 장영실(蔣英實) ...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15세기 최고의 공학자

동래현 관노로 알려진 그가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15세기 최고의 공 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미스테리한 그의 일생에서의 실마리는 건국 대 남문현 교수에 의해 일부 풀렸다. 세종 때 훌륭한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이 장영실의 매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동래현 관노였지만, 천문 학에 대한 기본적인 식견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집안 배경이 작용 했을 것이다.

노비 출신이 종3품 벼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문신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일 개 기술자가 그 높은 벼슬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간 장 영실이 세운 업적은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하여, 대간의· 소간의·규표·앙부일구·일성정시의·천평일구·정남일구·현주일구·갑인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그가 더 이상 재주를 펴지 못하고 공직에 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비단 불경죄만이었을까. 『동국여지승람』에 ‘아산의 명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년을 아산에서 보내다가 세상을 떴을 것으로 추측된다.

. 박연(朴堧) ... 조선 전기의 문신·음률가(音律家). 세종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해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 거 음률의 정확을 기했다. 또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고구려의 왕 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 3대 악성으로 추앙되고 있다.

본관 밀양(密陽), 자 탄부(坦夫), 호 난계(蘭溪), 시호 문헌(文獻), 초명 연 (然), 영동(永同) 출생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 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악사(樂事)를 맡아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 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 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 을 폐하고 아악(雅樂)으로 대체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 다. 1433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고 아악에 종사, 공조 참의·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다. 1445년 성 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다. 특히 저[大笒]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다.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가훈(家訓)》이 있다.

. 정초(鄭招) ... 조선의 정치가. 자는 열지(悅之), 시호는 문경(文景). 본관은 하동(河東). 집의(執義) 희(熙)의 아들. 1505년(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507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집의ㆍ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ㆍ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를 거쳐 우사간(右司諫)이 되고 1419년(세종 1) 공조와 예조의 참의(參議)ㆍ우대언(右代言), 이듬해 좌대언(左代言), 1322년 예조 참판을 지낸 뒤 다음해에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나갔다. 그 뒤 형조 참판(刑曹參判)ㆍ이조 참판ㆍ좌군총제(左軍摠制)를 역임, 1330년 공조 판서로서 왕명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撰)했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역법(暦法)을 개정했다. 다음해 다시 왕명으로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을 찬진(撰進), 이어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필요한 이론적 자료를 여러 고전에서 수집했다. 이천(李蕆)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했으며 《삼강행실도발(三綱幸實圖跋)》을 편찬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역산(暦算)ㆍ복서(卜筮)에도 통달했다.

. 이종무(李從茂) ... 본관은 장수(長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 고,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 (精勇護軍)이 되었다.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재직중 왜구가 침입해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芳幹)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의주의 병마절제사를 거쳐, 1406년(태종 6)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고 이어 우군총제를 겸했으며, 이 해 장천군(長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08년 남양·수원 등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안주도병마사, 1411년 안주절제사를 거쳐, 이듬 해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었다. 1417년 좌참찬·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년 (세종 1)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 해 왜선 50여 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해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절제사 이사검(李思儉)을 해주·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는 등 침입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의 허점을 틈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벌군을 지휘해 대마도를 공략, 대소 선박 129척과 가호(家戶) 1,940여 호를 소각했으며, 적 114급(級)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귀국한 뒤 찬성사에 승진했으나, 불충한 김훈(金訓)·노이(盧異)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상원(祥原)에 유배되었다.

이듬 해 복관되고, 1421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다음 해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행한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직 계하지 않아 1423년 과천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나와 복관되었 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 김종서(金宗瑞) ... 태종~ 문종 때 문신

1383년(고려 우왕 9) 전라남도 순천에서 도총제로 봉직하던 무관 김추(金 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동안 맡았다. 또한 여진족들의 정세를 탐지·보고하고, 그에 대한 대비로 비변책을 지어 건의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변방에서 중앙의 관직을 맡았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대 신으로 역할했다. 1440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예조판서·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고 1449년 권제(權踶) 등이 고친 《고려사(高麗史)》가 잘못되었다 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하였다. 그는 변방의 장수에서 역사서 편찬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거쳐 1450년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 정 정분(鄭苯)과 함께 좌의정으로서 문종의 마지막 유명(遺命)을 받아 12세 의 어린 단종(端宗)을 보필하였다.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혜와 용 맹을 겸비한 명신(名臣)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후의 세 조)에 의하여 1453년(단종 1)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되고 대역모 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 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復官)되었으며, 시조 2 수가 전해지고 있다.

저서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다.

제5대 문종(文宗) 충령대군(忠寧大君) ... 생졸 1414~ 1452년(39세)

재위 1450. 2~ 1452. 5(2년 3개월)

부인 3명, 자녀 1남 2녀

현덕(顯德)왕후 권씨 단종(제6대 端宗), 경혜(敬惠)공주

귀인 홍씨

사측 양씨 경숙(敬淑)옹주

.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安東權氏) ... 1418~ 1441(23세)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사망

능호(陵號)는 현릉(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 내)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이다.

. 1450년 2월 세종이 죽자 문종은 8년의 섭정을 끝내고 왕으로 등극했다.

문종은 1414년(태종14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향(珦) 8세 되던 해인 1421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29세 되던 해인 1421 년 세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세종은 집권기 절반을 병석에 누어있었고, 후반기에 세자에 의한 섭정이 계속되었기에 수양, 안평 등 왕자들의 세력이 비대해져 언관들의 종친들에 대한 탄핵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문종 집권기 내내 종친과 언관들 사이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제6대 단종(端宗) 홍위(弘暐) ... 생졸 1441~ 1457년(17세)

재위 1452. 5~ 1455. 윤6(3년 2개월)

부인 1명, 자녀 없음

정순(定順)왕후 송씨

. 아버지는 제5대 왕 문종이고,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이다. 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이다. 1448년(세종 30) 8세 때 왕세손 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전에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여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했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신숙주 등에게도 좌우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유언을 했다. 그러나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군국(軍國)의 모든 권리를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단종은 한명회·권람 등의 강요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모두 처형된 뒤,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세조찬위). 그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봉되었으며 10월에는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색인 : 단종 복위운동)

짧은 재위기간 중에도 1453년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 朝鮮都圖〉·〈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황극치평도 皇極治平 圖〉를 간행하게 했다. 1454년 〈고려사〉를 인쇄·반포했으며, 그해 12월 각 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1681년(숙종 7)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복위되어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 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다.

장릉(莊陵)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 121-1

복위 ... 1457년(세조) 노산군 → 1681년(숙종) 노산대군 → 1698년(숙 종 24년) 단종

. 계유정난(癸酉靖難) ...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세종·문종 때 부터의 원로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이 반역을 모의한 것을 평정했다는 명목으로 정난이라는 말을 붙였으나 실상은 수양대 군이 왕이 되려는 야심에서 이들을 제거한 정변으로, 이 해가 계유년이어서 계유정난이라 한다.

1452년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시로는 수렴 청정(垂簾聽政)이 제도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단종의 모후(母后)인 권씨도 세자빈 때 단종을 낳은 뒤 바로 죽어서 수렴청정을 할 만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영의정부사(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남지(南智)· 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좌의정 남지가 죽고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鄭苯)이 우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상태에서 황보인·김종서 두 고명대신이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세종비 심씨의 왕자이자 단종의 숙부들인 대군(大君) 7명도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세력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안평대군의 집에는 많은 문신이 출입하고 있었고, 수양대군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을 모사로 하여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1453년 봄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왔는데, 이 동안에 김종서나 안평대군 등이 그를 제거하려 한 일이 없었던 것은 이들이 단종에

역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정변은 단종 즉위 직후부터 계획되기 시작하여 수양대군이 명에서 귀국한 뒤 뛰어난 무인 또는 문신을 본격적으로 규합함으로써 구체화되어 갔다. 그 결과 1453년 10월 즈음에는 수양대군 휘하에 홍달손(洪達孫)·홍윤성(洪允成)·양정(楊汀) 등 30 여 명에 이르는 정예 무인들이 모이기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은 이들 심복 무사들을 거느리고 3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나서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서 죽였으나, 일이 갑자기 일어나 아뢸 겨를이 없었다."고 보고하고는 곧 왕명을 빌어 고위관료들을 불러들여서 사전 에 계획한 대로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의정부찬성 이양(李穰) 등 반대세력에 속하는 중신들을 대궐 문에서 죽였다.

이어서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을 보낸 뒤 목을 매 어 죽이고, 김종서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그의 자손을 죽였으며, 안평대군은 강화에 귀양 보낸 뒤 왕명으로 스스로 죽도록 했다.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 은 영의정부사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를 맡아 문 신·무신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는 한편 새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 使)를 설치하고 이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군사권까지 독점했다. 또한 권람·홍 달손·한명회 등 정변을 이끄는 주요인물과 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최항(崔 恒) 등 자기세력이 될 만한 주요관료 등 43명(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靖 難功臣)에 책봉하고 이들을 요직에 기용함으로써 권력기반을 다져갔다. 이같 이 정변에 이어 취한 여러 조치를 바탕으로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변은 당시 재상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던 정인지·최항·신숙주(申叔舟)·박 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之)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관직자들 까지 김종서·황보인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된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정변이 난 뒤 수양대군이 권력을 독점하자 이들은 수양대군에 협력하는 사람들과 수양대군에 반대하여 단종을 보위하려는 사 람들로 나뉘게 되고, 결국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 1456년(세조 2) 박 팽년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제거 당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다.

아울러 김종서의 심복 무장으로서 함길도(咸吉道) 병마도절제사로 강력한 군 사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징옥(李澄玉)을 정변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파직했 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징옥의 반란이 나기도 하였다. (단종, 세조, 세조찬위)

. 이징옥의 난(李澄玉의 亂) ...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수양대군 일파의 권 력 장악과 자신의 파직에 대해 불만을 품고 여진족 등과 함께 일으킨 반란 이다. 1453년(단종 1년) 이징옥이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부터 파직되 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고 여진에 도움을 청하여 반란을 일으 킨 사건이다. 그러나 정종(鄭種), 이행검 등의 습격으로 이징옥이 살해되어 실패로 끝났다.

후일 채제공은 그가 단종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므로 역모는 아니라고 하였으며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에 대한 반발로 이징옥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 사육신(死六臣)

조선시대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6명의 신하.성삼문(成三問:1418~56),하위지(河緯地:1387~1456),

이개(李塏:1417~56)·유성원(柳誠源:?~1456), 박팽년(朴彭年:1417~56), 유응부(兪應孚:?~1456) 등을 일컫는다.

. 생육신(生六臣)

조선시대 단종(1452~55 재위)이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6명의 신하.

김시습(金時習:1435~95)·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1420~89)· 성빙수 (成聃壽)·남효온(南孝溫:1454~92)을 말한다.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 로 죽음을 당한 사육신에 비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켰다는 의미에서 생육 신으로 불렀다.

.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礪山宋氏) ... 1440~ 1521(중종16년) (82세)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송현(宋玹壽)의 딸로, 능호(陵號)는 사릉(思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에 있다.

제7대 세조(世祖) 수양대군(首陽大君) ... 생졸 1417~ 1468년(52세)

재위 1455. 윤6~ 1468. 9(13년 3개월)

부인 2명, 자녀 4남 1녀

정희왕후 윤씨 덕종(의경세자), 해양대군(제8대 예종), 의숙공주

근빈 박씨 덕원군, 창원군

.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坡平尹氏) ... 1418~ 1483년(성종 14년) (66세)

영의정(領議政) 윤번(尹璠)의 딸로, 의경(懿敬)세자(추존 덕종 德宗), 해양(海 陽)대군(제8대 예종 睿宗), 의숙(懿淑)공주 등 2남 2녀를 두었다.

능호(陵號)는 광릉(光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247번지에 있 으며,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이다.

. 의경세자(懿敬世子) 장(暲) ... 조선 세조의 장남 월산대군과 성종의 아버지. 예종의 형이다. 어릴 때 이름은 숭(崇)이었는데 장(暲)으로 고쳤으며 자는 원 명(原明)이다.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세자가 되었다. 서예를 잘 했고 평소에 학문을 즐겼다고 하는데 몸이 병약하여 잔병 치레를 자주 했다. 결국 1457년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단종을 몰아낸 업 보로 세조의 형수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저주를 내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 다.

사후 의경세자(懿敬世子)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 로 즉위하자 왕으로 추존되어 의경왕(懿敬王)이 되었다가 덕종이라는 묘 호를 받았다. 조선 최초로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가 임금으로 추존된 사례다.

그의 부인이 바로 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걸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 씨. 추존 왕 덕종(德宗)의 능호(陵號)는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 동 산 30-1 서오릉(西五陵) 내에 부인 소혜왕후(昭惠王后 : 仁粹大妃)와 함 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이다.

. 권람(權擥) ... 1416(태종 16)~ 1465(세조 11). * 수양대군의 좌장 격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웠다. 본 관은 안동.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할아버지는 찬성사를 지낸 문충공(文忠公) 근(近)이고, 아버지는 우찬성 문경공(文景公) 제(踶)이다. 남 이(南怡)의 장인이다.

1450년(문종 즉위) 향시(鄕試)와 회시(會試) 및 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이듬해 집현전교리로서 〈역대병요 歷代兵要 의 음주(音註) 편찬에 참여했는데, 이때 수양대군과 가까워졌다. 그뒤 일찍부 터 깊이 사귀어왔던 한명회(韓明澮)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했으며, 그와 함께 양정(楊汀)·홍달손(洪達孫)·유수(柳洙) 등의 무인들을 포섭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세조의 즉 위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이어 승정원의 여러 벼슬을 거쳐, 1455년(세조 1) 이조참판이 되고 좌익공 신(佐翼功臣) 1등에 올랐다.

세조의 즉위를 알리기 위한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이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판서·대제학·동지경연사(同知經筵 事)·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등을 거쳤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456년 과 1457년 김문기(金文起) 등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된 사람들의 토지를 하 사받았다. 1458년 5월에는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수찬관(修撰官)으로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했으며, 대제학·우찬성·좌찬성·우의정 등을 두루 지낸 다음 1462년 5월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병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 나면서 길창부원군에 봉해졌다. 같은 해 9월에는 〈동국통감 東國通鑑〉 편 찬에도 참여했다. 세조를 도운 공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재산을 모았 으나, 횡포와 축재가 심하다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기도 했다.

저서로 시문집인 〈소한당집〉이 있으며, 할아버지 근이 지은 응제시(應製 詩)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 應製詩註〉는 민족시조(民族始祖)나 개국시조 (開國始祖)를 거의 빠짐없이 수록하는 등 설화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어, 세 조 때의 역사인식·사서편찬 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세 조묘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 한명회(韓明澮) ... 1415(태종 15)~ 1487(성종 18). 수양대군의 ‘장량’ 격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 鷗亭)· 사우당(四友堂).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상질(尙質)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기(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이다. 딸이 예종 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 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 격하지 못하고 권람(權擥)과 더불어 산천을 주유했다. 1452년(문종 2) 문음 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 (首陽大君)과 의기투합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 한 계유정난 때 심복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에 임명 되 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받았다. 곧이어 사 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1454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가을 동덕좌익 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 위운동을 좌절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 졌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었으며, 1461 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다. 그 뒤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고 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유교명(遺敎命)을 받들어 다른 대신들과 함께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서정(庶政)을 결재했다. 같은 해 남이(南怡)가 제 거된 후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推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 다.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 판서가 되었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 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같은 해 대궐의 동·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청 하고 직접 서영(西營)을 거느렸으며, 흥학(興學)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성균 관을 정비·확충하게 했다. 1484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고자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성종으로부터 궤장(几杖)을 받았다. 세조의 총신으로 성종 대까지 고관요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초기의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했으며, 부 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성(忠 成)이다.

. 신숙주(申叔舟) ... 1417(태종 17)~ 1475(성종 6). * 세조의 ‘위징’ 격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보급과 국가 중요서적의 찬수(撰修)에 참여하는 등 조선 전기 문물제도의 완비에 기여했다.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齋).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를 지낸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지냈다. 1441년에는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 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왕에 게까지 알려져 세종으로부터 어의를 받기도 했다. 1443년 통신사 변효문 (卞孝文)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우 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對 馬島]에 들러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 하는 내용의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집현전수 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 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명나라 한림학사로서 요동에 귀양와 있던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찾아 10여 차례 요동을 왕래하면서 음운에 관해 논의 했으며, 명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도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하면서 운 서(韻書)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 연구했다. 특히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에 능통했으 므로 훈민정음 창제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었고, 이어 장령·집의·부제학 등을 두루 지냈다.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면 서 그와 깊은 유대를 맺었다. 1453년 부승지가 되었으며, 이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 악했을 때 중용되어 수충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1등에 오르고 이듬 해 도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해지고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이해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주문사의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가서 맡은 일을 완수하 고 이듬해 귀국했다. 이 공으로 토지·노비·안마(鞍馬)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병조판서, 판중추원사 겸 판병조사, 우찬성 판병조사, 대사성 등을 지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계획이 발각되자, 정승들과 함께 노산 군(魯山君)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이어서 노산군과 금성대군 (錦城大君)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457년 우의정, 1459년 좌의정에 오르고, 1460년 강원도·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2 차례에 걸쳐 동북방면에 자주 출몰하던 여진족을 크게 소탕했다. 1462년 영 의정이 되었으며,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이끌었 다. 이해에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 炳幾定難翊戴功臣)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에는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 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에 책록되고 다시 영의정을 맡았다.

그는 세조의 즉위과정에 가담하고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사육신(死六 臣)과 뚜렷이 구별되는 삶을 살았다. 이 점에서 후대에 종종 변절자로 비판 을 받고 있지만, 뛰어난 학식과 문재(文才)를 갖추어 조선 초기의 문물을 정 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던 것은 이와는 별도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세종 때 훈민정음의 창제와 발전·보급에 공헌했음은 물론,〈동국정운東國正 韻〉·〈사성통고 四聲通攷〉 등 운서 편찬에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이후에도 국가의 기본질서를 적은〈국조오례의〉를 교정·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세 조실록〉·〈예종실록〉·〈동국통감〉·〈국조보감〉·〈영모록 永募錄〉의 편찬 에도 참여했다. 또한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과의 교류에 도움을 주고, 오랫동안 예조판서로 있 으면서 명과의 외교관계를 맡는 등 외교정책의 입안·책임자로서도 활약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문집인 〈보한재집〉과 〈북정록 北征錄〉·〈사성통고〉 등이 있고, 글씨로 〈몽유 도원도 夢遊桃源圖〉의 찬문과 〈화명사예겸시고 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전 한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제8대 예종(睿宗) ... 생졸 1450~ 1469년(20세)

재위 1468. 9~ 1469. 11(1년 2개월)

부인 2명, 자녀 2남 1녀

장순왕후 한씨 인성대군

안순왕후 한씨 제안대군, 현숙공주

.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淸州韓氏) ...1445(세종 27)~ 1461(세조 7)(17세)

영의정(領議政) 한명회(韓明澮)와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딸로, 1457년(세조 3) 세조의 둘째 왕자인 광(胱 : 뒤의 예종)이 세자로 책봉(冊 封)된 뒤 아버지의 후원을 받아 1460년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어 가례 를 행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1461년 원손(元孫 : 仁城大君)을 낳은 뒤 병으로 일찍 죽었다. 1472년(성종 3) 장순왕후에 추존되었다.

능호(陵號)는 공릉(恭陵)으로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동 산 5-1에 있 다.

.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淸州韓氏) ... 1445년? ~ 1499년

예종의 계비 시호는 인혜명의소휘제숙안순왕후(仁惠明懿昭徽齊淑安順王后)이 다. 청천부원군 양혜공 한백륜(淸川府院君 襄惠公 韓伯倫)과 서하부부인 임 씨(西河府夫人 任氏)의 딸로, 제안(齊安)대군 현(琄), 현숙(顯肅)공주를 낳았 다.

능호(陵號)는 창릉(昌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1 서오릉 내에 예종과 함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로 있다.

.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

당시 세자이던 아버지 예종(睿宗)과 세자의 종5품 후궁인 소훈(昭訓) 한씨(안순왕후)사이에서 태어났다. 예종의 세자빈이던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는 인성대군 이분(李糞)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었고, 뒤이어 입궐한 소훈 한씨는 세자의 후궁이었으나 빈의 공상(供上)과 예로 대우받았다. 이복형 인성대군이 세조 9년(1463년) 3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예종 즉위년(1468년)에 원자로 책봉되었다.

예종 1년(1469년) 아버지 예종이 임종할 당시, 왕위승계 1순위였으나 나이 가 4세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조모 정희왕후가 백부 의경세자의 차남이자 대 군의 종형인 자을산군 이혈(성종)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승계에서 밀려났 다. 성종 1년(1470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 봉해졌다. 봉작을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으나, 직계를 대접한다는 방계의 명분이 컸다.

성종 5년(1474년) 증조부 세종의 적7남인 종조부 평원대군 임(琳)의 봉사손 으로 출계하였다. 평원대군은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다. 이러한 조처는 성종 초기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한명회(韓明澮)의 신권 강화에 맞서, 본인 의 뜻과는 상관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왕실 종친을 보호하 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첫 부인은 김수말(金守末)의 딸로, 성종 10년(1479년)에 이혼하고 박중선(朴 仲善)의 딸과 재혼하였으며, 이후에 김씨와 다시 합치게 된다. 그러나 자식 을 두지는 못하였다. 연산군의 총희(寵姬) 장녹수는 그의 집종이었다. 장녹수 가 대군의 노비가 된 이유는 대군의 가노(家奴)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라고 전 해진다.

정치와는 평생 거리를 두고 살았다.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 을 연주하기를 좋아하는 등 풍류에 심취하였다. 당질 연산군과 친분이 두터 웠으나, 1506년 중종반정 이후에도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중종에게 도 연산군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당숙부가 되므로 중종 20년(1525년) 60 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일생 왕실 종친으로 존대를 받았다.

* 성종 즉위 초 안순왕후는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와의 서열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 1468년 세조가 중병을 이유로 왕세자에게 양위하여 예종이 즉위하 였다. 태상왕이 된 세조가 소훈 한씨를 지목하여 왕비로 삼도록 하였는데, 당시 한씨는 만삭의 몸으로 친정에 있었기에 위사(衛士)를 보내어 집을 지키 도록 하였다.

1469년 12월 31일(음력 11월 28일), 예종이 보위에 오른 지 13개월 만에 훙서하자 원자(元子)인 제안대군의 보령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대비 정희왕후 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예종의 형이었던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인 갈산군(乽山君: 성종)을 예종과 안순왕후의 양자로 입적시켜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이후 제안대군은 성종의 정통성에 위해가 된다는 이유로 1474년에 세종의 7번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입양되었다.

1469년 12월 31일(음력 11월 28일), 한씨는 선왕(先王)의 왕비이자 성종의 법모로서 왕대비로 진봉하여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가 되었다. 그로부터 불 과 2개월 후인 1470년 2월 22일(음력 1월 22일)에 성종의 생부인 의경세 자가 의경왕으로 추숭되었고 그의 생모 수빈 한씨(소혜왕후)도 인수왕비로 진봉되었다. 이에 문제화 된 것이 인혜왕대비와 인수왕비의 서열이었다.

1472년, 신숙주의 주장과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 정희왕후)의 윤허 아 래 인수왕비와 인혜왕대비의 위계를 왕실의 법칙이 아닌 사가의 법칙대로 형제 서열로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세조의 맏아들 의경왕의 아내인 인수왕비가, 둘째아들 예종의 아내인 인혜왕대비의 윗동서이니 인수왕비가 인혜왕대비보다 위라는 뜻이다. 성종 6년(1475년), 의경왕이 의경대왕으로 추숭되어(후에 덕종의 묘호를 받음) 인수왕비는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진봉되는데, 이때 인수대비와 인혜대비의 서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으나 역 시 인수대비를 웃전으로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후일 성종이 승하하고 그의 장남 연산군이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함 에 따라, 인수왕대비와 함께 대왕대비로 진봉되었다.

. 남이(南怡) 역모사건 ...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 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고,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 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 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 하면,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 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촌수로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 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 직에서 해임시켜버 렸던 것이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났을 때 하늘에 혜 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이 광경을 보면서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 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변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 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로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 난 자였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공을 세 운 남이가 세조의 사 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 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 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이 때 증 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 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유자광은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 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변은 반드시 간신 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 하며 “그 간 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남이 측근들 에 대한 문초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남이와 함께 겸 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를 시인했다. 문효량은 여진 출신 장수로 남 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었다. 문효량은 “언젠가 남이의 침소 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남이는 하늘의 변화를 기화로 간신들이 모반 할 징조가 엿보이므로 자신과 함께 이들을 몰아 내 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제의를 했으며, 그리고 이 거사에 영의정 강순(康純)도 뜻 을 함께하고 있 으니 왕이 산릉에 갈 때 도중에 두목격인 한명회 등을 제거한 다음 영순군 과 구성군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문효량의 이 진술은 남이로 하여금 역모를 시인하게 만들었다. 버텨봐야 문 초만 더 당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는 역모 관련내용을 모두 인 정했고, 영의정 강순 역시 시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 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으로 모 두 처형되었다. 또한 조경치의 장인인 김개가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측 근 30여 명도 함께 죽였다. 그리고 이 밖의 가솔들과 친분 관계가 있는 자 들은 공신녹권이 몰수당하고 종으로 전락시키거나 변방에서 종군하게 하였 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이때의 역모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 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27세의 나이로 병조 판서에까지 오른 그가 예종이 즉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병조판서에서 밀려 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더구나 남이가 무인이었고 역모사건 발각 당시에 가까이 지내던 영의정 강순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무인이었던 점을 고려 할 때, 한명회, 노사신 등의 훈구대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 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는 점 이 주목 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 인데, 여기에서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임진 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조 선 중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 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 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 상에서 '남이의 역모'는 단지 그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극이라고 믿고 싶었다 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현재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설화들은 그의 출생, 결혼, 입공, 죽음 등의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4단계는 모두 원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 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남았다는 등 대개는 그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 기다. 이 때문에 민간과 무속에서는 남이장군 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 돼 지 금도 전승되고 있다. 이는 용맹을 떨쳤던 남이의 위용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 하고 있다.

추존왕 덕종(德宗) 장(暲) ... 1438년(세종 20)~ 1457년(세조 3). (20세)

조선 전기의 왕족. 초명은 숭(崇), 이름은 장(暲). 자는 원명(原明). 세조의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이다. 1445년(세종 27)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의 공으로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올랐다. 1455년(세조 1)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를 비(妃)로 맞아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成宗)을 낳았다. 1471년(성종 2) 덕종으로 추존(追尊)되었다. 능호(陵號)는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번지 서오릉(西五陵) 내에 소혜왕후와 함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이다. 시호는 의경(懿敬)이다.

.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淸州韓氏)

1437년(세종 19년)~ 1504년(연산군 10년) (68세)

.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이며 시호는 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작되었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로 즉위하여 자신은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1457년(세조 3년)에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다. 그러나 1469년에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등극하고,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곧 왕비로 진봉되었다가 1475년(성종 6년)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城府院君 襄節公 韓確)과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과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열녀》,《여교》,《명감》,《소학》등에서 발췌하여 엮어 《내훈》(內訓)을 편찬하였다. 내훈은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이자 당시 여성교육의 기본서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금승법(禁僧法)과 그녀가 추진한 봉선사 금자경 간행 작업이다.

그녀는 연산군의 할머니로도 유명한데,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윤씨가 왕비 시절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사건으로 내쫓기고 사사되는 데에는 거의 전적으로 그녀의 의지로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1504년(연산군 10년) 봄에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했다. 이 과정에서 윤씨를 폐비하고 사사하는 데 개입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추방했는데, 인수대비는 당사자가 되므로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을 빚었다. 능호(陵號)는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번지 서오릉(西五陵) 내에 추존왕 덕종과 함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이다.

제9대 성종(成宗) ... 자을산군(者乙山君) 생졸 1457~ 1494년(38세)

재위 1469. 11~ 1494. 12(25년 1개월)

부인 12명, 자녀 16남 12녀

공혜왕후 한씨 자식 없음

정현왕후 윤씨 진성대군(제11대 중종 中宗), 신숙공주

폐비 윤씨 연산군(제10대 연산군 燕山君)

명신 김씨 1남, 귀인 정씨 2남 1녀, 귀인 엄씨 1녀, 숙의 하씨 1남,

숙의 홍씨 7남 3녀, 숙의 김씨 3녀, 숙용 심씨 2남 2녀, 숙용 권씨 1녀 등

.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을 통한 왕위 계승

성종(成宗)의 휘는 혈(娎) 초명은 아무. 사후 시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 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의 요절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나, 숙부 예종이 일찍 죽어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와 훈신들의 추대로 즉위했다. 즉위 후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적극 등용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 대신들의 세력을 견제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 고, 친정 이후에는 외척 세력의 영향력이 강하였다. 여색을 좋아하여 여러 후궁들 간의 갈등을 다스리지 못하고 폐비 윤씨를 사사, 이는 훗날 아들 연 산군으로 하여금 대량 숙청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한다.

. 예종은 불과 14개월의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고, 예종이 죽던 날 세조

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왕위에 앉혔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 중 7년 동안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하였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4세 밖에 되지 않아

제외될 수 있었겠지만, 16세였던 자을산군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을 제외

한 조치는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

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구성군을 유배시켰다. 이때 29세의 구성군(龜城

君)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아들로서 1468년(세조 14년) 남이

(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오른 왕실

의 중심인물로서 예종이 죽자 위협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이러한 정치적 결

탁은 성공하여 한명회, 신숙주 등은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으나, 월

산대군이나 제안대군 등은 희생자로 남았다.

. 성종의 도학정치

1476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대신

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출납과 서무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사림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세력들을 유배시켰다.

성종의 세력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고려 말의 대표적 유학자

정몽주, 길재의 후손들에게도 녹을 주는 한편, 그의 학맥을 잇는 사림(士林)

세력 등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세력들을 철저히 견재하였다. 김종직 문

하에는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유호인, 이맹전, 남효온, 조위, 이종손 등 당

대 문인들이 집결되어있었다.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항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

학을 진흥시키고, 편찬사업을 융성시켰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

회의 한쪽에 퇴폐풍조를 낳기도 했다.

. 사림파(士林派)의 거두 김종직

1431(세종 13) 경남 밀양~ 1492(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로. 재지

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

(師祖)이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

으켰다.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성

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

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

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

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

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

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

(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

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

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

다.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 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

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

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

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

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

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

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

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

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

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양노례(養

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

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

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

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

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

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유

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

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

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

혼 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

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淸州韓氏)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는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

의 왕비이며 시호는 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이

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작되었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수양대군

이 왕위로 즉위하여 자신은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1457년(세조 3년)에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

러 났다. 그러나 1469년에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등극

하고,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곧 왕비로 진봉되었다가 1475년(성종 6

년)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城府院君 襄節公 韓確)과 남

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과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열녀》,《여교》,

《명감》,《소학》등에서 발췌하여 엮어 《내훈》(內訓)을 편찬하였다. 내훈은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이자 당시 여성교육의 기본서가 되었다. 또

한 그녀는 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이 때문

에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금

승법(禁僧法)과 그녀가 추진한 봉선사 금자경 간행 작업이다.

그녀는 연산군의 할머니로도 유명한데,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윤

씨가 왕비 시절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사건으로 내쫓기고 사사되는 데에는

거의 전적으로 그녀의 의지로 단행되었기 때문이다.[2] 1504년(연산군 10

년) 봄에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했다. 이

과정에서 윤씨를 폐비하고 사사하는 데 개입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추

방했는데, 인수대비는 당사자가 되므로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을 빚었다.

능호(陵號)는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산 30-1 서오

릉(西五陵) 내에 위치한다. 추존 왕 덕종(德宗) 과 함께 동원이강릉(同原異岡

陵) 형태이다.

. 공혜왕후(공혜왕후) 한씨(淸州韓氏) ... 1456(세조 2)~1474(성종 5년(19세)

조선 성종(成宗)의 비. 영의정(領議政) 한명회(韓明澮)의 딸로서 1467년(세조

13) 세조의 손자인 자을산군(者乙山君:뒤의 성종) 혈(娎)과 가례를 올렸다.

1469년 자을산군이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

다. 1474년 19세의 나이로 소생이 없이 죽었다. 1498년(연산군 4) 휘의신숙

(徽懿愼肅)의 휘호가 추상(追上)되었다.

능호(陵號)는 순릉(順陵)으로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 산 15-1에 있

다.

. 폐비 윤씨(坡平尹氏) ... 1455년?~ 1482년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며, 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

의(淑儀)의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와 신씨의 딸

로 윤관의 11대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파평(坡平)이다. 남편(성종)의 후궁

들 문제로 남편과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서인 된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피를 토한 금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넘겨주며 아들이 자라면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로 왕비의 작호가 추숭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

시 삭탈되었다. 신숙주는 그의 외당숙이며, 명종 때의 권신 이량은 그의 오

빠 윤구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 정현왕후(정현왕후) 윤씨(坡平尹氏) ... 1462(세조 8)~1530(중종 25)(69세)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중종의 생모. 우의정(右議政)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1473년(성종 4) 대궐에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고,

1479년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1480년 11월 왕비로 책봉

되었다.

진성대군(晉城大君 : 뒤의 중종)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았는데, 공주는

일찍 죽었다. 1497년(연산군 3) 자순(慈順), 1504년 화혜(和惠)로 존호되었

다. 휘호는 소의흠숙(昭懿欽淑), 능호(陵號)는 선릉(宣陵)이며, 강남구 삼성동

135-4에 성종(成宗)의 능과 함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를 이룬다.

. 조의제문(弔義帝文) ... 조선시대 김종직(金宗直)이 세조찬위를 풍자하여 쓴

글로 운문체로 씌어졌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

山 : 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

(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

다.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노산군(魯山君)에 비유해 세

조 찬위를 비난한 내용이다.

이후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

서,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여 스승을 칭찬했다. 1498년(연산군 4) 이극돈

(李克墩)·유자광(柳子光)·노사신(盧思愼) 등이 왕에게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

하는 내용이라고 알려, 김일손 등 많은 사림들이 죽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되

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무오사화

【원문】弔義帝文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

懷王心 爲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遂

爲文以弔之 惟天賦物則以 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

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

孟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思網漏而 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

氓 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 握乾符

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芉氏 遣長者而入關 亦有足覩其仁義 羊狠狼貪 擅夷冠

軍兮 胡不收而膏齊斧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

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 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 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循紫陽

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번역】조의제문​

정축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숙박하

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

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인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

江)에 잠겼다.” 그래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이

르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으로 지역 간 서로 떨어진 거

리가 만여 리가 될 뿐만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

겼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

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

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

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오랑캐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

을 조문한다. 옛날 조룡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

가 되었어라

비록 전유와 추애일지라도 어찌 보전하겠는가!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과 짝이 되었다오.

항량(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어호(魚狐)를 쪼치 일을 일으켰

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

존하였도다. 건부(乾符)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

았다. 양흔 낭탐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어찌 잡아다가 제부

(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오호라!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

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물

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할까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옵건데 영령은 와서 제

사 음식을 받으소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 ... 조선왕조 통치의 기틀이 된 기본 법전.

6권 4책. 인본. 조선왕조 건국 전후부터 1484년(성종 15)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간의 왕명·교지(敎旨)·조례(條例) 중 영구히 준수할 것을 모아 엮은

법전이다.

<경국대전〉은 6조의 직능에 맞추어 이·호·예·병·형·공전의 6전으로 구성하

였다.

조선의 행정사무는 모두 6조에 집중되었으며, 6조는 필요한 규정을 국왕에

게 비준을 받아 수교(受敎)나 수판(受判)으로 법조문화 했다. 이중 영구히 시

행해야 할 사항들을 편집하여 6개의 전(典)으로 묶은 것이다.

이전(吏典)은 총 29항목으로 국가 의 통치기구와 조직체제, 동반의 경·외관

직, 아전·토관의 직제와 인사고과제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밖에 노

인직·추증·급가·한품서용 등 관료제 운영규정이 있다.

호전(戶典)은 30항목으로 재정·토지·조세·녹봉·공물·양전·부역·토지매매·상속

에 관한 규정들을 수록했다.

예전(禮典)은 61항목으로 교육·문과와 잡과의 시험규정·외교· 의장·오복(五

服)·의례에 관한 규정이 주인데, 그밖에 각종 공문서양식과 음악·인장· 구호

사업 규정과 불교관계 규정을 수록했다.

병전(兵典)은 51개 항목인데 경외의 군사기구와 무반직, 무과와 취재 규정,

군사기구 검열과 번상규정, 면역·급보·성곽· 역마·봉수(烽燧) 규정을 수록했

다. 이 밖에 비상시의 소집과 행동지침, 순찰규정을 상당히 상세하게 수록해

두었다.

형전(刑典)은 28개 항목으로 크게 형법제와 노비규정으로 나누어진다. 형법

제는 형벌과 금령, 각종 형구와 형 집행 방법, 재판규정을 수록했다. 그러나

이것이 형법의 전부는 아니다. 형전 첫머리 용률(用律)조에서 〈대명률〉을

사용한다고 규정했는데, 각종 형법은 〈대명률〉을 따르고, 형전에는 〈대명

률〉과 다르거나 〈대명률〉에는 없는 법만 수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국

대전〉의 형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명률〉을 함께 참조해야 한다.

노비규정은 노비상속, 혼인, 노비신공과 추쇄, 노비에게 가하는 형벌, 소송규

정과 대궐의 근수(根隨), 차비노(差備奴)의 소속과 수에 관한 규정을 함께 실

었다. 그리고 형전 부록으로 국초 이래 노비소송에 관한 판례를 편집한 〈노

비결송정한 奴婢決訟定限〉을 달아두었다.

공전(工典)은 14항목인데, 도로·다리·관사·궁궐·원우(院宇)에 대한 관리, 보수

규정과 과수(果樹)·산림보호에 관한 규정, 각종 광물산지의 등록과 야장(冶

場) 조항, 도량형 규정을 싣고, 중앙과 지방의 장공인의 직종과 인원을 소속

처 별로 수록해두었다. 조선시대 문물제도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기본 자료이다.→ 경제육전 , 대전통편 , 대전회통 , 속대전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이 책은 1481년(성종12년) 50권으로 편

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

문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편찬 체제는 남송의 '방여승람'과 명의 '대명

일통지'를 참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 는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 풍속, 인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구성에 따라 고적 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없는 성 씨, 봉화 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 임사홍, 성현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 하였으나 내용상으로

는 큰 변동이 없었 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23

년)에 착수하여 15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신증'이라는 두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고 했다.

이 중종 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

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

동국여지승람' 책머리에는 진전문, 서문, 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

에 수록된 노사신의 진전문, 서거정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 찬수관직명, 목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책의 끝에는 홍언필, 임사홍, 김종직의 발문이 실

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책의 몇몇 권에

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전

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

다. 이 지도들은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

고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동서의 폭은 넓고 남북의 길이는 짧아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팔도총서의 모양은 꼭 실제 지형을 위에서 꾹 눌

러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당시의 지도들이 이 같은 모양 을 띠게 된

것은 남북의 교통로에 비해 동서의 교통로가 전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

라 추측된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고서저, 즉 서쪽에 평야가 모여 있고 동쪽

에 산악이 집중되어 있기에 동서쪽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고 남북쪽의 거리

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쨌든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

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또한 내용에서도 각 도의 연혁과 총론에서부터 성씨, 인물, 풍속, 봉수, 능

묘, 교량 위치 등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

다. 특히 인물 속에는 관원뿐 아니라 효자, 열녀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구역에 관해서도 지역의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여

기에는 세종 대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 인구 등 경제,

군사, 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에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조되어 있는

데, 이는 세종 대에 비해 성종 대가 그 만큼 평화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1485년(성종 16)에 서거정(徐居正 : 1420~88) 등 이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 56권 28책. 활자본. 1458년(세조 4)에 편찬사업이 시작되어 고대사 부분이 1476년(성종 7)〈삼 국사절요〉로 간행되었으며, 1484년에 일단 완성을 보았다.

그러나 사론(史論)이 문제가 되었으므로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 를 대본으로 하여 1년 만인 1485년에 편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동국통 감〉 56권을 새로펴냈다. 수사관(修史官)은 서거정 등 10명이다. 편년체 사 서로 단군조선으로부터 삼한까지는 자료가 부족하여 체계적인 서술이 불가 능하다는 의미에서 외기(外紀)로 다루었고, 삼국건국부터 신라 문무왕 9년 (66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 부터 고려 말까지를 고려기로 구분하여 서술했다.

삼국기는 권근(權近)의 〈동국사략 東國史略〉과 노사신(盧思愼)의 〈삼국 사절요〉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서술하되 삼국의 역사를 대등하게 서술하고 무정통(無正統)의 시기로 처리했다. 연기(年紀) 표기에 있어서도 〈동국사략〉의 서술인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과는 달리 삼국 당시의 제도대로 즉위년칭원법을 썼다.

삼국의 연기는 연호로써 표기하지 않았고 중국과 삼국의 연기를 아울러 썼다. 또한 범례는 〈자치통감〉에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은 〈자치통감강목〉을 따라서 두 사서의 체제를 절충했다.

이 책에는 모두 382편의 사론이 실려 있는데, 그중 178개는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 204개는 찬자 자신들이 써놓은 것이다. 이중 118개의 사론은 최부(崔溥)가 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론의 대부분은 사실을 고증한 것보다는 사실에 대한 포폄(褒貶)과 관련되는 것인데, 중국에 대한 사대명분(事大名分)을 중요시하는 입장이었다. 다음으로 강상윤리(綱常倫理)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아 이를 잘 지킨 사람은 칭송하며, 군신·부자·남녀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현실적으로 성종과 사림(士林)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공리(功利)를 배격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아 종래의 인물에

대해 지절(志節)과 업적을 구별하여 평가했으며 문무를 차별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정치적 차원에서 아직 정통론을 도입하지 않고 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 기자조선-마한-신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을 주류로 정립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종 자신이 적극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사림이 참여하여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반영된 역사서이다. 사림의 성리학적 명분주의는 성종의 왕권안정에 유리하게 작

했으며 강상의 명분을 강조할수록 세조(世祖)와 훈신(勳臣)에 대한 비판을 내

포하는 것이다. 조선 전기 대표적 관찬사서 (官撰史書)의 하나이다. 국립중앙

도서관·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 『동문선(東文選)』... 1478년(성종 9)에 서거정(徐居正 : 1422~92)이 처음 엮은 시문집.

중국 양(梁)의 소통(瀟統 : 501~531)이 진(秦)·한(漢) 이후 제(齊)·양(梁)대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문선 文選〉을 본떠 만들었다. 본문 130 권 42

책과 부록 3책을 합해서 모두 133권 45책이다. 뒤에 나온 〈동문 선〉과 구

별하여 〈정편동문선 正編東文選〉이라고도 한다. 사(辭)·부(賦)·시 (詩)·문(文)

등 여러 종류의 작품 4,300여 편이 실려 있다.

1518년(중종 13)에는 신용개(申用漑 : 1463~1519) 등에 의해서 〈속동문선

續東文選〉이 다시 편찬되었다. 본문 21권 10책과 목록 1책을 합한 23 권 11책에 약 1,300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강한 유교사상이 엿보인다. 3번째로는 1713년(숙종 39) 송상기(宋相琦 : 1657~1722) 등에 의해 개편 되었다. 이것은 청(淸)의 강희제(康熙帝)가 우리나라의 시문을 보고 싶다고 하여 만든 것이다. 이 책은 〈동문선〉이라고 했으나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신찬동문선 新纂東文選〉이라고도 부른다. 본문 33권 14책, 목록 1책을 합해서 35권 15책에 약 1,200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동문선〉의 편찬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역사적·문학적 의의나 분량 으로 볼 때 맨 처음에 나온 〈동문선〉이 가장 중요하다. 서거정은 서문에서 조선조의 여러 대를 거쳐 나온 많은 인재들이 훌륭한 정기로 글을 지어 그 글들이 생동감 있고 뛰어나다면서, "우리나라의 글은 송(宋)·원(元)의 글이 아니며, 한(漢)·당(唐)의 글도 아니며, 우리나라의 글이다"라고 하여 당시의 독자적인 국학의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의식을 드 러냈다.

.『악학게범(樂學軌範)』... 1493년(성종 24)에 편찬된 음악이론서.

9권 3책. 당시 장악원(掌樂院)에 있는 의궤(儀軌)와 악보가 오래되어 헐었고, 제대로 남아 있는 것들도 모두 소략(疏略)하고 틀려서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편찬했다. 참여한 사람은 유자광·성현·신말평·박곤·김복근 등이었고, 그 중에 서도 한문 문장과 음률에 밝은 성현의 공로가 가장 컸다.

한국음악사·음악이론 연구에 중요한 원전으로서 한국음악학의 기본사료 가운 데 하나이다. 국문학·국어학·전통무용·복식·의물(儀物) 연구에도 기본사료로 이용되고 있으며, 동양문화연구에 있어서도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조선 초기 궁중의 제향·조회·연향(宴享) 때 필요한 음악의 이론과 실제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치밀하고 정확하게 쓰여 진 악서(樂書)였기 때문에, 궁중음악문의

의 재건이 필요할 때마다 복간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610년(광해군 2), 병자

호란 후 1655년(효종 6), 그리고 아악기의 중수(重修)를 위하여 1743년(영조

19)에 각각 복간되었다.

권1의 내용은 음악이론에 관한 것이며, 권2는 성종 당시의 여러 제향과 조회

연향 때 악기를 진설(陳設)하는 법을 세종 때와 비교하여 도설(圖說)하는 등

오례의(五禮儀) 또는 의궤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권 3에는 〈고려사〉지

의 당악정재· 속악정재가 실렸고, 권4는 성종 때의 당악정재도의(唐樂呈才圖

儀), 정재들의 춤사위와 순서를 다루고 있다. 권5는 향악(鄕樂) 정재도의의 춤

절차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한글로 적힌 〈동동〉·〈정읍〉·〈처용가〉·〈진작 眞勺〉 등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동동〉·〈정읍〉의 가사는 〈대악후보 大樂後譜〉·〈악장가

사〉에도 없고 오직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노래여서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

료이다. 권6은 아 부악기도설(雅部樂器圖說)로, 아악기의 전체모양을 그림으로

그리고 자세한 주(註)를 달아 악기제작에 참고가 되게 했다. 권7은 당부악기

도설(唐部樂器圖說)과 향부악기도설(鄕部樂器圖說)이, 권8은 당악정재와 정대

업(定大業) 정재의 의물도설(儀物圖說)·연화대복식도설(蓮花臺服飾圖說)·향악

정재악기도설이, 권9에는 악사·악공·무공(舞工) 들의 관복이 설명과 함께 실려

있다.

≪악학궤범≫은 12율의 결정, 여러 제향에 쓰이는 악조(樂調), 악기의 진설,

정재의 진퇴, 악기·의물·관복, 그리고 제향·조회·연향의 음악연주에 필요한 사

항을 빠짐없이 망라함으로써 성종 당시의 아악·당악·향악 등 음악 전반을 포

함하고 있다.

중국의 여러 악서와 한국의 악서를 참고하여 편찬했는데, 이에 인용된 중국

문헌은 〈악서〉·〈율려신서 律呂新書〉·〈주례 周禮〉·〈송사 宋史〉·〈옥해

玉海〉·〈문헌통고 文獻通考〉·〈주례도 周禮圖〉·〈예서 禮書〉·〈대성악보

大晟樂譜〉·

〈악기 樂記〉·〈석명 釋名〉·〈풍속통의 風俗通義〉·〈수서 隋書〉 등이다.

이중에서 송나라의 진양(陳陽)이 지은 〈악서〉의 인용 횟수가 33회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원나라의 〈문헌통고〉로 20회 인용되었고, 나머지는 1~4 회에 걸쳐 부분 또는 완전 인용되었다. 한국 문헌은 〈삼국사기〉와 〈고려 사〉에 각각 4회와 3회

인용되었다. 이와 함께 〈세종실록〉이 참고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융(漋) ... 생졸 1476~ 1506년(31세)

재위 1494. 12~ 1506. 9(11년 10개월)

부인 2명, 자녀 4남 2녀

폐비 신씨 폐세자, 창녕대군, ? 공주

? 양평군, 돈수, ? 공주

. 재위 중 무오·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관(言官) 제도를 크게 축소했으며, 당시 사대부들의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 인 폭군으로 손꼽힌다. 이름은 융(漋).

. 즉위와 무오·갑자사화

연산군 융(漋)은 성종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지평(持平) 윤기묘(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이다.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된 뒤인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徐居正)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썼

다. 또한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는 등 빈민구제

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으며, 〈경상우도지도

慶尙右道地圖〉·〈국조보감 國朝寶鑑〉·〈동국명가집 東國名歌集〉 등을 간행

하고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 歷代帝王詩文雜著〉·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완성했다. 그러나 사림파 제거를 노린 훈구파의 정

치적인 공작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되면서형성된 성격상의 문제가 겹

쳐 1498, 1504년 2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사화를 일으켰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실은 김종직

(金宗直)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한 것이라 하여, 김

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을 처형했으며, 정여

창(鄭汝昌)·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강혼(姜渾) 등을 귀양 보냈다. (무오사화

(戊午士禍) 1504년에는 어머니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했던 후궁들과 윤

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김굉필 등을 처형하고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

明澮)·정창손(鄭昌孫)·정여창·남효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甲

子士禍). 이 옥사에서는 무오사화 때와는 달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와 함께

훈구파의 거목들도 대거 참화를당했는데, 이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등을

위해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훈구파가 이러한 조

치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 중종반정(中宗反正)과 폐위 ...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연산군에 대한 반감은 사림만 아니라 훈구세력들 간에도 커지게 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킨 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3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의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채청사(採靑使)·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징발하고, 장악원(掌樂院)을 두어 기녀(妓女)를 양성한데다가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사대부의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등 음행을 일삼았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세움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75번지에 있으며, 폐비 신씨(居昌愼氏)와 나란히 쌍분이다.

. 무오사화(戊午士禍) ...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김일손·권오복·이목 등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사초(史草)가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태종에서 세조 대에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조선 봉건국가 체제는 성종 대에 이르러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경국대전〉의 반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의 실시 등 법제가 완성되고, 유학이 일어나면서 유교문화가 융성했다.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세조 이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했는데, 이로부터 정치·경제·사상 등 여러 면에 걸쳐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깊어갔다. 훈구세력은 예종

대와 성종 초년에 걸친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수렴청정기간 동안 남이(南怡), 구성군 준(龜城君 浚)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인척과 정실 등이 벌족을 이루면서 부패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세종대 이후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던 경제적 상황과 훈구파의 권력 장악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한편 길재(吉再)로부터 학문적 연원을 갖는 사림파는 경제적으로 지방의 중소 지주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점에서 토지겸병 확대현상을 시정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사상적으로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이의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찾고 있었다.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 보급운동과 유향소(留鄕所) 재건운동을 통해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편성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 같은 사림세력의 정치·경제·사상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결합되면서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사림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급속히 성장하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꾀하게 되었다. 1498년의 무오사화가 그 시작이었다.

사림파는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유자광·이극돈·윤필상 등 집권세력을 비판했다.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단종의 어머니

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대의 실정을 비판하는 한편 이극돈의 비행을 문제 삼았다. 또한 이목은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 사림을 중용한 성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던 훈구파는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

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 이라고 지목하고 이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노사신·한치형·윤필 상·신수근 등과 사림파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외척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 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연산군은 김일 손·이목·허반 등을 보름간 스스로 신문하여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 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하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나무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 다"며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 죄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이미 죽은 김 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생전 에 지은 많은 저서들이 불살라졌으며, 김일손·이목·허반·권오복·권경유 등은 세조를 욕보였다고 처형했다.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이주·김굉필·이계 맹·강혼 등은 〈조의제문〉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 종직의 관작만을 빼앗자고 주청한 대간(臺諫)들도 모두 논죄되었으며, 어세 겸·이극돈·유순 등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신들은 논밭과 노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무오사화의 결과 신진사림파는 커다란 타격을 받고 중앙정계에서 일단 후 퇴하게 되었다. 사화로 많은 수의 사림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을 뿐만 아니 라 연산군의 전횡과 훈구파의 득세로 분위기도 크게 경색되었다.

한편 이 옥사의 주모자 가운데 유자광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서 위세를 떨쳤으며, 이극돈은 잠시 벼슬에서 쫓겨났으나 곧 광원군(廣原君)으로 봉해 지는 등 훈구파들은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그뒤에도 연산군과 중종의 재위 동안 사림파는 잇단 사화를 겪으면서 훈구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 다. 그러나 사림은 재지(在地)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조선 성리학의 중 심을 이루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도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 을 장악하게 되었다.

.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 복위문제로 야기되어 훈구와 사림이 피해를 입은 사건.

성종 때부터 사림이 중앙정치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면서, 언론기관을 중심으 로 훈구들의 비리를 지적하는 등 새로운 정치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변화 는 홍문관의 언관화에 따른 언권의 강화와 성종이 훈구들의 위세를 견제하 기 위해 사림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강화되었다. 이런 변화 위에서 사림의 진출이 강화되었고, 훈구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세력보다는 오히려 사림을 더욱 견제했다. 사림 역시 연산군의 정치성향이 성종과는 달리 유교적인 왕도정치에 입각하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연산군을 적극 견제하였다. 이와 같이 사림은 훈구와의 갈등관계 위에서 연산군을 견제하는 이중적인 부담을 지게 되었고, 결국 왕과 훈구의 결속에 의한 반격인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휩쓸리게 되었다.

무오사화의 결과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던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고 언론도 위축 되었으며, 주도권은 왕과 훈구 재상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재상들 사이에는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연산군이 언론의 견제가 약화된 상황에서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국가재정은 궁핍해졌고, 그 재정 부담을 백성뿐 아니라 훈구 재상들에게 지우자 재상들과 연산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왕과 재상의 갈등이 심화되자 재상들은 궁중의 경비를 절약하고 왕의 방종을 견제하려 했으나, 외척인 신수근(愼守勤 : 연산군의 비인 신씨의 오빠)을 중심으로 임사홍(任士洪) 등이 연산군을 지원하면서, 오히려 사화를 야기하여 훈구 재상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무오사화로 위축되었지만 일정한 기능을 하면서 왕의방탕을 견제하던 사림이 그 피해에 같이 연루된 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갑자사화의 구체적인 계기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 문제였다(→ 숙의윤씨).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성종은 1479년(성종 10) 폐비하고 다음해 사사(賜死)하였다(→ 색인 : 윤씨폐비사건). 왕과 재상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사실이 임사홍에 의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지자, 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은 귀양 보내어 사사했다. 또한 윤씨를 왕비로 추존(追尊)하고 성종 묘에 배사

하였다. 연산군은 이때 반대한 언관 권달수(權達手)는 죽이고 이행(李荇)은 유배하였다.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들과 사림들을 제거하려 획책하였으므로 더욱 확대되어 폐위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하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찾아 죄를 ane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윤씨의 사사에 찬성하였던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浚)·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 10여 명이 사형되었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이 부관참시 되었다.

이들은 훈구 재상들을 거의 망라하는 것이었다. 이외에 홍귀달(洪貴達)·심원(沈源)·이유녕(李幼寧)·변형량(卞亨良)·이수공(李守恭)·곽종번(郭宗藩)·박한주(朴漢柱)·강백진(康伯珍)·최부(崔溥)·성중엄(成衆淹)·이원(李黿)·신징(申澄)·심순문(沈順門)·강형(姜詗)·김천령(金千齡)·정인인(鄭麟仁)·조지서(趙之瑞)·정성근(鄭誠謹)·성경온(成景溫)·박은(朴誾)·조위(曺偉)·강겸(姜謙)·홍식(洪湜)·홍상(洪常)·김처선(金處善) 등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들은 대다수가 사림이었다. 또한 피해자의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되어 그 피해가 무오사화를 웃돌았다. 폭력적인 사화로 견제세력을 제거한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정당성과 권력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연산군의 방탕한 행위가 심해지고 그 폭정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훈구와 사림의 결속된 반격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었다.→ 무오사화 , 사림파 , 사장파 , 사화 , 연산군 , 윤씨 폐비사건

※ 사림파(士林派) ... 조선시대 정치세력의 하나.

특히 조선 전기 집권세력인 훈구파에 대응하는 세력을 가리킨다. 고려 후기 에 성리학을 학문배경으로 하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사족'(士族)·'사대 부'(士大夫)· ‘사인'(士人)·'사류'(士流)와 같은 용어와 함께 사림이라는 용어 가 쓰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광범위한 독서인 층, 곧 지식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종전의 지배계급은 사회체제 및 정치권력 구조의 재편성에 따라 조 선 사회 내부에서 분화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기존의 양반지배층은 물 론 향촌사회의 향리까지도 조선의 관료제에 참여하거나 향촌사회의 지배 세 력으로 남게 되었다. 중앙에서는 신진사대부가 관료체제의 정비와 함께 문 무 양반으로 정권에 직접 참여했고,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은 관권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던 품관 층, 일반사족, 그리고 향리세력으로 나뉘었다. 조선 초에는 품관 층이 사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들 역시 신분 으로 보아 사족이라 불렸다.

사림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자주 쓰이게 된 것은 학통으로 보아 정몽주(鄭 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류가 15세기 후반 중 앙정계에 진출하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사림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 한 것은 성종 연간에 김종직·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중앙정계 에 진출하여 활동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들은 근거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영 남 사림파와 기호사림파로 나누기도 하는데 주로 비거족계(非鉅族系) 재지사 족 출신이 주축이 되고 일부의 훈구계 가문 출신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사 림파라 해도 시기에 따라 상이했으며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혹은 사림파에서 훈구파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훈구파에 비하여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하는 시기가 늦었던 영남사림파의 경우에 대체로 고려 말 조선 초기 에 이족으로부터 사족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크게 나 누어 성종과 연산군 대에 일어난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의하여 축출되는 때 까지, 그리고 중종반정 이후 점차 세력을 형성했던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또 그 활동은 각각 영남사림파와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었다.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한 비판활동을 제기하면서 향촌사회에서 세력근거지 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언론활동과 유향소(留鄕所)의 복립 노력이었다. 세조 즉위 이후에 군주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비롯한 훈구파들이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강력한 인신적 지배예속을 매개로 농장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넓은 토지를 점유하고 양인농민에 압력을 가하여 전지노비(田地奴婢)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인구(人口)를 은점(隱占)하고 있었던 훈구파에 대하여, 하천부지 등을 개간하여 자신의 농지를 확대하면서 소농(小農)을 기초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던 사림파로서는 그러한 행위가 자신들의 경제적 기초를 침해하는 것이기도했다. 성종 대에도 좌리공신(佐理功臣)이 정치세력의 중심이었다.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부는 물론이고 이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대간(臺諫) 등 언관(言官) 계통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결국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의 운용이 어려워지는 것을 뜻했다. 김종직이 경직(京職)에 복귀하면서 그의 문인 중에서 관리가 되어 대간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생겼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직에 진출한 이들은 훈구파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 시기의 사림파의 정치활동은 주로 이러한 언론활동에 한정되었으며 한편으로 향촌질서의 안정을 위한 유향소 설치를 주장했다. 유향소는 조선 초에 유향품관 층을 중심으로 조직한 기구로서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하던 태종에 의해 한차례 폐지되었다. 그 뒤 세종대에 향풍교정(鄕風矯正)을 내세우면서 부활되었지만 유향소세력이 수령과 결탁하여 농민을 수탈하거나 자체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세조 말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유향소 복립운동은 사림파에 의하여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질서 수립을 위한 조직으로 인식되어 추진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세조 말년에 혁파된 유향소라는 제도를 부활시킨다는 데 있지 않았으며, 〈주례 周禮〉의 향사례·향음주례를 시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향소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두 의례는 덕행이 있는 자와 연로한 자를 각각 앞세우는 것으로서 유교윤리 기준에 의한 향촌질서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유향소의 복립운동은 훈구파의 맹렬한 반대로 1483년(성종 14)부터 5년간 논의되다가 1488년에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경재소(京在所)를 통한 유향소의 장악이 가능한 상태에서 유향소가 곧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는 없었다. 경재소는 본디 그 지방 관련자에 의하여 구성·운영되는 것이었는데 훈구파는 경재소제도를 고쳐 중앙 고위관료의 지방연고권의 범위를 넓혀 그를 발판으로 수령을 통해 유향소를 장악하도록 했다.

따라서 사림파는 우세한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마소(司馬所)를 세워 대항하고자했다. 그러나 사마소가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시) 통과자라는 제한적인 인적 자원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강력한 세력 구축이 어려웠고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는 강제 혁파 당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타격을 받았지만 훈구파 역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양대 사화로 희생된 사림파 인물은 주로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김굉필·정여창 등의 문인은 크게 관련되지 않았다. 중종반정은 훈구파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므로 중종 초기에는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림파의 본격적인 진출은 1515년(중종 10) 이후에 가능했다.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중종 대의 사림파는 강력하게 삼대(三代:夏·殷·周)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도학정치를 내세웠다. 이들은 주로삼사(三司)와 같은 언관직(言官職)에 진출하여 훈구파를 비판하고, 천거제(薦擧制)를 통하여 과거제나 문음으로써 등용할 수 없는 유일(遺逸)과 학생(學生)을 선발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또한 여악(女樂)·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기신재(忌晨齋)·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책봉된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제거 당했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사림파는 중종의 제1계비 윤씨에게서 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제2계비 문정왕후가 난 경원대군(慶原大君)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두 외척 다툼 사이에서 위축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윤원형과 이기(李芑) 세력이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를 제거했다. 이후에도 명종 연간에 잇달아 일어난 사화로 사림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권신 이기의 죽음과 척신의 배후였던 문정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더 이상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넓은 의미에서 사림의 재등장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훈구파와 대립하는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사림파는 훈구파가 정리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찾기 어렵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동일한 계급으로, 두 세력을 차별 짓게 하는 것은 성리학 실천의 방법에 있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중시하고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으나 양자는 서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향촌에서 주자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수양론(修養論)·도학론(道學論) 등을 깊이 연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훈구파를 비판했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사상은 수신(修身)에 두고 있었다.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은 유교정치 사상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의 강조점은 시기와 사람에 따라 달리 나타났다. 사림파는 치인보다는 수기를 앞세웠고, 수신의 기본교재인 〈소학〉 공부를 강조했다. 〈소학〉은 생원·진사시나 잡과의 필수과목으로 되어 있으며 성균관의 학령(學令)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나 그에 대한 강조는 사림파의 수기강조라는 또 다른 뜻이 있었다. 그 외에도 수신을 강조한 것은 〈삼강행실〉·〈이강행실〉의 번역·배포라든가 향약·향음주례·향사례의 실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학의 정통을 세우고 이를 현실사회에서 급속히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도 알 수 있 듯이 수기의 강조가 곧 치인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계에 서의 활동 자체가 이미 치인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종 대 사림파의 경우 치인에의 관심은 보다 확실했다. 사림파가 군주의 수기와 권 한을 강조했다고 하여 곧 전제적 왕권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 었다. 오히려 현량과(賢良科)의 실시와 같이 관료제의 강화를 통하여 그들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는 추진 하는 힘이 필요 했던 것이고 현실적인 필요에서 군주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 이다.

※ 훈구파(勳舊派) ... 조선 전기의 양반관료층 내부에 형성된 하나의 정치 세 력. 관학파라고도 한다. 훈신(勳臣)·훈구대신·훈구공신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 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측근으로 등장 하여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는데, 이는 정치변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신으로 책봉되었 기 때문이다. 즉 1453(단종 1)~71년(성종 2)의 약 20년 동안 정난(靖難)· 좌익(佐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그 뒤 에도 1506년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공신으로 거듭 책봉됨으로써 중요한 정치세력을 이 룰 수 있었다. 이들은 때로 군주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체 적으로 사림파(士淋波)와 정치적 갈등을 빚어 여러 사화를 일으키기도 했 다. 이러한 갈등은 여러 면에서 지적되고 있지만, 대체로 향촌통치의 방법 을 둘러싸고 관권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훈구파와 사족중심의 지배 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림파 사이에 나타났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양 세력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훈구파나 사림파는 모두 동일하게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계급으로 다만 성리학을 실천함에 있어서 서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훈구파의 학문경향을 사장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초기 국가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경술보다는 현실적으로 사장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훈구파는 사림파에 비해 이른 시기에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 했으며, 정치적으로 사림파와 대립하여 훈구파라는 정치세력으로 이해되기 전부터 조선의 국가체제 정비에 깊숙이 참여했다. 한명회·권람·홍윤성·정인지·신숙주·조석문·정창손·최항·김국광·구치관 등이 이에 속한다. 이 계열에 주축이 된 관료 들은 대부분 집현전을 거쳐 성장한 이들로, 그중에는 〈경국대전〉·〈동국통감〉·〈동문선〉·〈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왕조의 통치이념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 초의 집권인물들 모두가 훈구파는 아니고 대개 세조 대 이래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집권 정치세력이 훈구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즉 세조의 즉위를 도왔던 이들은 1453년(단종 1)에 정난공신, 1455년(세조 1)에는 좌익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세조의 즉위가 선양(禪讓)이라는 합법적인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이라는 기준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육신 사건, 금성대군 역모사건 등이 일어났고 그 결과 세조와 공신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정계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며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토지를 강점하고 양인농민을 노비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등 각종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이러한 훈구파의 지위는 세조 대 후반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1467년에 세조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한명회·신숙주·김국광·노사신 등 일부 훈구대신들이 연루되었고, 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남이 등의 신진세력이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책록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남이는 태조의 외손이라는 강력한 배경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오위도총부총관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왕권강화책을 둘러싸고 남이 등의 세력과 종전의 훈구파 사이에 본격적인 갈등이 재연되어 남이옥사가 일어나게 됨으로써 정치세력의 변동이 일어났다. 남이의 옥은 남이가 한명회·노사신·김국광 등의 훈구대신을 제거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유자광의 고발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옥사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이 등의 새로운 세력은 제거되고 종전의 훈구파가 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더욱이 이들은 이 사건 직후에 익대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정치적 위치가 크게 강화되었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고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훈구대신들은 더욱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471년(성종 2)의 좌리공신 책봉 때 종전의 공신으로 책봉 받았던 자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들의 친인척이 다수 포함됨으로써 훈구파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아울러 훈구파는 1467년(세조 13) 이래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무를 다스리는 직책)이 되어 특정한 직사를 갖지 않고도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가문 상호간에 통혼관계를 맺음으로써 세습적으로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외척으로서의 지위도 확보했다. 독점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은 15세기 후반 이후에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를 운용하기 어렵게 했다.

조선은 고려와 비교하여 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정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 진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대단위 농장을 경제기반으로 한 훈구파가 권력을 독점하자, 이에 대해 이 시기 성장하고 있던 중소지주층인 사림파가 비판을 제기했다. 이러한 권력독점과 관료들의 사리사욕 추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논리로 나온 것이 성리학적인 공도론(公道論)을 제시했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치운영을 주장하면서, 훈구파의 권귀적(權貴的) 성향에 대해 비판을 한 정치공세 논리였다.

1476년(성종 7) 성종이 세조비의 수렴청정을 철회하고 원상을 폐지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훈구대신들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강화되는 한편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림파계열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을 추구하고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정착시킴으로써 향촌민의 안정과 향촌지주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훈구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사림파는 이전에 혁파되었던 유향소(留鄕所)를 복립하고자 했으며 훈구파는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대립은 1483년부터 계속되다가 1488년에 유향소가 다시 생겼으나 이때의 유향소는 중앙집권체제의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 복립된 유향소는 결국 이전과 같이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없었다. 이에 사림파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훈구파를 더욱더 비판해갔다. 이러한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은 결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사화를 초래했다. 무오사화에서 사림파가, 1504년 갑자사화에서는 훈구파가 각각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가 1506년의 중종반정은 훈구파가 재기하는 계기

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배출된 정국공신은 이후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1515년(중종 10)을 전후하여 서서히 사림파가 언관 진출 등을 통해 등장하여, 정국은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되었다. 그리하여 1519년(중종 14)에 훈구파가 주도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후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하다가 외척인 김안로가 잠시 전횡했으며 김안로를 제지한 이후 다시 훈구파가 장악했다(→ 색인 : 기묘사화). 그런데 김안로 일파의 제거에 외척들도 가세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훈구파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외척세력과도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갈등하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로 인해 책봉된 위사공신 역시 외척에 의존한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종 연간을 거쳐 이기와 같은 인물이 잠시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하더라도 점차 종전의 공신세력은 퇴조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중요한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는 척신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사림파와 대립했던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도 퇴색되어 갔다.

제11대 중종(中宗) 역(懌)... 진성대군(晋城大君) 생졸 1488~ 1544년(57세)

재위 1506. 9~ 1544. 11(38년 2개월)

부인 10명, 자녀 9남 11녀

단경왕후 신씨 자식 없음

정경왕후 윤씨 인종(제12대 인종 仁宗), 효혜공주

문정왕후 윤씨 경원대군(제13대 명종 明宗),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헌공 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

경빈 박씨 1남(복성군) 2녀, 희빈 홍씨 2남,

창빈 안씨 영양군, 덕흥대원군(선조의 아버지), 정신옹주 등 2남 1녀

숙의 홍씨 1남, 숙의 이씨 1남, 숙원 이씨 2녀, 숙원 김씨 1녀

. 중종의 능호(陵號)는 정릉(靖陵)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5- 4번지에 단 릉(單陵)으로 있다.

. 중종반정(中宗反正) ...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등이 조선왕조 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인 중종을 즉위시킨 사건.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 때는 그동안의 농업진흥책에 힘입어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15세기 말엽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향시(鄕市), 즉 지 방 장시(場市)가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집약적 농업기 술의 발달로 구매력이 증대되어 마침내 전국적인 유통 경제망이 건설되었다. 또한 그동안 소규모적·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무역(公貿易) 중심의 대외무 역이 점차 국내 수요의 증가와 해외시장의 확대로 인해 활발해지면서 사무 역(私貿易)이 크게 늘어났고, 드디어 공무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국내의 전국 적인 유통망 건설과 중국과의 사 무역 증가는 국내 은광업의 발달을 가져왔 다. 중국과의 무역 결제수단은 금·은·철 등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은은 당시 중국에서 지정은제(地丁銀制)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 지했다. 이 때문에 사상(私商)들에 의해 은광 개발이 서둘러졌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는 농민층이 해체되어 일부는 소상인으로 전환하여 농촌을 떠났고, 많은 수가 농토를 상실하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적란(賊亂)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층의 관료로서 특권적 성향이 강한 훈신·척신계(勳臣戚 臣系)와 신진의 관료군인 사림계(士林系)로 나뉘어 대립했다. 양자 중 훈신· 척신계는 왕권 또는 왕실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하여 지위를 보장받은 집단 이었다. 이들은 자신과 연관된 부류들에게 당시 유행하던 공납의 방납권(防 納權)을 보장해주면서 일정한 대가를 관례적으로 상납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남 연해지역에서 지방관에게 사주해서 다수의 지방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간 석지를 개발해 얻은 수익을 가지고 무역이나 은광 개발에 투자했다. 이들 은 곧 새로운 경제변화 속에서 관권을 매개로 부상(富商)들과 결탁해 부를 늘려 갔다. 이에 대해 지방의 재지지주(在地地主) 출신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정치계에 구현하고자 노력했던 신진관료집단인 사림파들의 공격이 거세게 일어 났다. 이들은 훈신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비호하는 국왕과 그의 측근인 궁금(宮禁) 세력들에게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국왕인 연산군 은 훈신·척신계와 궁금 세력의 강력한 후원 아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 화를 일으켜 사림파들을 제거했다. 그 후 연산군의 비호를 받은 궁금 세력들 은 훈신·척신계와 대결하여 정치 및 경제계에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기도했 다. 그 결과 연산군과 궁금 세력은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를 일으켜 훈신계열을 철저하게 숙청하고 잔존의 사림파마저 제거했다. 그러나 이 과 정에서 궁금 세력의 지나친 독주는 지배층 내부의 불만을 야기 시켰고, 특히 연산군 자신은 방종한 생활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러 한 약점을 이용하여 훈신계열인 박원종· 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이 모의해 1506년 9월에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군기시첨정 (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무사들을 모아 궁금 세력의 대표 자인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을 제거한 다음 궁중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등극 시켰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를 기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개혁정치를 시도했으나, 훈구파·척신파가 반발하자 기묘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했다. 재위기간 중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침입 이 끊이지 않았다.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

. 중종반정과 즉위 ...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尹氏)이며,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 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 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 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1506 년(연산군 12) 연산군 재위기간 동안의 연이은 사화(士禍)와 실정(失政)에 반감을 품은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에 의해 연산군 이 폐위된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 개혁정치의 시도 ...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때 파괴되었던 여론제도 등 유교정치의 복구와 교학(敎學)의 강화를 최대의 과제로 삼고 개혁정치를 시 도했다. 이를 위해 성리학을 장려하고 사화를 입은 사림들을 복권시키는 한 편, 홍문관을 강화하고 문신의 월과(月課)·사가독서(賜暇讀書)·춘추과시(春秋 課試) 등을 엄격히 시행했다. 1513년(중종 8) 김세필(金世弼)·김안국(金安國) 등으로 하여금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연구시켜 경연(經筵)에서 강의하게 했으며, 1515년에는 사림파의 추앙을 받던 조광조를 6품직으로 등용했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고 도학(道學)에 근거한 지치 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 정치를 행하려고 했다. 중종은 조광조·김안국·이장 곤(李長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의 건의를 받아 들여 성리학적 사회질 서를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했다. 1517년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 約)을 본받아 전국적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편성했 다. 이듬해에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도교적인 의식을 없애는 한편, 도 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고 도성 안에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게 하는 등 불교를 억눌렀다. 또한 정치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여, 과거제를 폐지하고 현 량과(賢良科)를 두었다. 이 제도로 1519년 김식(金湜)·박훈(朴薰) 등 28명을 뽑았으며, 이후 김정(金淨)·김구(金絿)·기준(奇遵) 등이 등용되었는데, 이들은 조광조 등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척신의 대두 ...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반정공신세력을 비롯한 훈구파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1515년 김정 등이 역신의 딸이라 하 여 왕비 신씨의 폐출을 관철시켰던 박원종의 처벌을 주장했다가 유배되자, 조광조가 이는 언로(言路)를 막는 행위라고 상소함에 따라 양파의 대립은 표 면화되었다. 1518년 현량과가 설치되어 사림파가 대거 언관으로 기용되면서 현량과의 혁파를 주장하는 훈구척신을 탄핵하고, 1519년에는 조광조의 주장 으로 반정공신 가운데 76명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고 그들의 토지와 노비 가 몰수됨에 따라 훈구세력은 사림의 제거를 모색하게 되었다. 심정(沈貞)·남 곤(南袞) 등이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탄핵하자 마침 조광조 등 사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과 급진적인 개혁에 압박감과 불안 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조광조·김정·기준 등을 죽이고, 박훈· 김안국 등을 파직 또는 유배시켰다. 사림은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다시 타격을 받은 뒤 중앙정치에서 배제되어 향리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정국은 훈구파 내부의 갈등, 훈구세력과 척신세력의 갈등으로 대립의 양상이 바뀌었다. 1524년에 남곤· 심정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던 김안로(金安老)가 1530년 심정이 경빈박씨(敬 嬪朴氏)와 내통했다고 하여 심정 일파를 몰아내는 데 성공, 이듬해부터 실권 을 장악했다. 김안로는 외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를 제거하 고 기반을 튼튼히 했으나, 1537년 문정왕후를 쫓아내려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고 유배된 뒤 죽음을 당했다. 그 결과 문정왕후와 남매간인 윤원로 형제가 점차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慶元大 君:뒤의 명종)으로 왕위를 잇게 하려다가, 세자(世子:뒤의 인종)를 낳다가 죽은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尹任)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두 외척간의 대립은 중종이 죽은 뒤 을사사화로 이어졌다.

.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居昌愼氏) ...1487(성종 18)~1557(명종 12)(71세)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비. 본관은 거창. 좌의정(左議政) 익창부원군(益昌 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1499년(연산군 5)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 대군(晉城大君)과 혼인하여 부부인(府夫人)에 책봉되었다. 1506년 박원종(朴 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을 내쫓고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추대하면 서 왕후에 올랐다. 그러나 반정모의에 반대했던 아버지가 성희안 등에게 살 해되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7일 만에 폐위되어 본가로 쫓겨났다. 1515 년(중종 10)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죽음을 계기로 김정(金淨)·박상(朴 祥) 등이 복위운동을 펼쳤으나 이행(李荇)·권민수(權敏手) 등의 반대로 이루 어지지 못했다. 자식은 없고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었다. 능호(陵號)는 온릉(溫陵)으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 19번지에 단릉(單陵)으로 있다.

.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坡平尹氏) ... 1491(성종 22년)~1515(중종 9 년) (25세)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繼妃).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고모인 월산대군(月山大 君)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1506년(중종 1)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 儀)에 봉해졌으며,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愼守勤)이 반정모의에 반대한 일로 살해된 뒤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가 폐위되자 1507년 왕비로 책봉되 었다. 1515년 2월에 세자(世子 : 인종 仁宗)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었다. 휘호(徽號)는 숙신명혜(淑愼明惠)이며, 1547년(명종 2)에 선소의숙(宣昭懿淑) 이 더해졌다.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능호(陵號)는 희릉(禧陵)으로 경기도 고 양시 원당동 산 37-1번지 서오릉(西五陵) 내에 있으며, 단릉(單陵)이다.

.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坡平尹氏) ... 1501(연산군 7)~ 1565(명종 20년) (65세) 중종의 계비(繼妃)이며 명종(明宗)의 어머니. 본관은 파평. 영돈녕부 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다. 중종 비 신씨가 즉위 직후 폐위 되고,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세자 호(岵: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자,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다. 1545년 자신의 소생인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母后)로서 8년간 수렴청정했다. 그동안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소윤)에게 권력을 주어,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대 윤) 일파를 제거한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한편 보우(普雨)를 신임해 1550년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度牒制)를 다시 실시하 는 등 불교 부흥을 꾀했다. 1553년부터 명종이 직접 정치에 임했으나, 실제 로는 문정왕후가 윤원형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했다. 소생으로 명종· 의혜공주(懿惠公主)·효순공주(孝順公主)·경현공주(敬顯公主)·인순공주(仁順公 主)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호(陵號)는 태릉(泰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번지에 단릉(單陵)으로 있다.

.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 ... 1482(성종 13)~ 1519(중종 14).

조선 전기의 학자·정치가 중종 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출신 및 수학)

조선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17세 때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 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소학 小學〉·〈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 를 경전에 응용하는 등,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 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연산 군 10)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 등과 함께 처형되면서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당하게 되자, 조광조도 유배당하는 몸이 되었다. 정계의 현실을 몸소 겪 은 그는 유배지에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이때는 연산군 시절의 폐해에 느낀 바 있 어 '정군심'(正君心)·'치군지'(致君知)를 급선무로 삼아 〈대학〉의 도를 역설 하는 한편, 도학정치·철인정치를 주장한 대자성 유숭조(柳崇祖)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정치사상)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고, 이어 알성문과에 급 제하여 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계비 책봉문제가 논의될 때, 박상(朴祥)· 김정(金淨) 등이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 반정공신(反正功臣)인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으로 유배되자, 정언으로 있던 조광조는 대사간으 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과 관계된 다고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했다. 그 뒤 수찬을 거쳐 호조·예 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그는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입시(入侍)할 때마다 도 학정치를 역설했다. 당시는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직후로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였고, 중종은 조광조 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 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 데,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도학정치라고 했다. 그는 지치(이상정치)를 실 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며,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 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뜻을 세움이 크고 높아 시류(時流)에 구애되지 않아야 함을 논하고, '조종(祖宗)의 옛 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지만 만일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역시 변통(變通)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변 법주의(變法主義)를 주장했다. 한편 지난날의 사림의 참화를 거울삼아, 임금 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을 이룸으로써 마음을 밝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해야 이상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개혁정책의 시행)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여씨향약 呂氏鄕 約>을 반포·간행하여 8도에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 의 복리증진을 꾀했다. 1518년 부제학이 된 후 미신타파를 내세워 당시 폐 해가 많아 지식층 사이 에 비난이 많았던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해 이를 혁파했다. 그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하고 세자부빈객(世子 副賓客)을 겸했다. 이때에 당시의 과거가 사장(詞章)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비 판하고, 내외의 요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재(才)·행(行)이 있는 선비 들을 천거하여 왕이 선택하게 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이듬해에 이를 실시했다. 현량과의 실시로 김식(金湜)·기준(奇遵)·한충(韓忠)· 김구(金絿)·김정(金淨) 등 소장학자들이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색인 : 사림파). 이후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인 소장학자들은 조정의 내외요직에 포 진하여 당시를 이상 정치 실현의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제도 의 실시와 전래 제도의 개혁, 교화의 보급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를 시 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한편, 1519년 반정공신 중 지나치게 공을 인정받은 사람의 훈작을 삭탈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신진사류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요청은 이미 기성 귀족이 되어 있는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왕도 급격한 개혁주장을 꺼리고 있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요청이 강력했기 때문에 마침내 전(全) 공신의 3/4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을 삭제하게 되었으며, 이는 기묘 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기묘사화(己卯士禍) ... 사림 세력의 후퇴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사림(士林)이 화를 입은 사건.

성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한 사림은 연산군 때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위축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주도권을 장 악한 반정공신들은 연산군 때 악정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사림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종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공신세력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사림을 주목했다. 그러한 배경에서 일시 물러났던 사림들이 대거 중앙정치에 등장했다.

이들은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개 혁을 추진했다. 이들은 경연을 강화함으로써 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중 종을 모범적인 군주로 만들려 노력했다. 또한 기존의 언론기관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권력에 관여하기 위 해서 낭관(郎官)에게 결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부여하여 실무의 결정과 집행 과정에서 재상들을 견제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 위에서 천 거제를 실시하여 지방의 사류와 성균관의 학생들을 정치에 참여시켰고, 공론 정치를 강화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의견도 정치에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사림은 향촌의 운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향약(鄕 約)의 실시로 나타났다.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수용하여 〈언해여씨향 약〉을 통해 일반민에게까지 보급했는데, 그들의 호응에 힘입어 단시일 내에 전국적으로 실시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사림의 움직임에 대하여 반정공신들은 초기에는 호의적이었으나 낭 관권의 형성, 천거제의 시행, 현량과의 실시, 향약의 실시 등으로 인해 자신 들의 기득권이 위협 당하자 사림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림들이 언론을 이용하여 공신들의 잘못을 탄핵하자 갈등은 점차 심해졌다. 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519년(중종 14)에 다시 가열된 중종반정 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였다. 사림은 일찍부터 이 문제를 주목하여 공이 없이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사림의 힘이 커지면서 1519년에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여 마침내 공 신의 3/4에 이르는 76명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그들에게 분급한 토지와 노비 를 몰수하게 했다. 중종은 공신세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림들 을 지원했으나 사림의 독주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공 신 삭제와 같이 사림의 독주를 허용하는 조처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했다. 그 러나 당시의 사림의 주장에 밀려 삭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종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사림을 견제할 방법을 모색했다. 피해를 입 은 공신들 역시 사림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사림 의 탄핵으로 상당수 중앙정치에서 탈락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권력이 위축되 어 있던 상황에서 대규모 공신 삭직은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심한 위기의식을 가졌다.

김전(金銓)·남곤·고형산(高荊山)·심정 등은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홍 경주를 중심으로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이들은 희빈홍씨를 통해 "나 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 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는 趙의 破 字)이라는 글자를 나뭇 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갖게 했 다.

1519년 11월에 홍경주 등은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 차지하고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고 건의하자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사림들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사사(賜死)되었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 가서 사형당하 거나 자결했다. 이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홍언필(洪彦弼)· 이자(李)·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유배·파직을 당했다. 사림들이 언관과 낭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만큼 피해를 입은 이들 역시 언관과 낭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것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주로 언 관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것과 대조가 된다(→ 기묘명현).

사화 이후 공신세력이 요직에 임명되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이들은 사 직된 공신들에게 다시 공신호를 반환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면서, 사림 의 권력기반이었던 낭관권의 혁파에 노력했다. 이들은 낭관권의 핵심요소인 자천제(自薦制)나 낭관들의 정치적 결속을 문제 삼으면서 사림이 강화될 수 있는 길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 을 뿐이었다.

이는 공신들의 정치적 비리를 공격하는 사림의 정치이념이 당시의 상황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고, 그러한 근거 위에서 언권과 낭관권이 서 있었으므 로 근본적인 불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광범위한 재지사족 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의 중앙 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기묘사화는 사 림이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인 공신재상들의 반격으로 야기 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사림정치로 나아가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 기묘록 , 기묘명현 , 사화

. 기묘명현(己卯名賢) ...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들을 가리켜 부르는 말. 연산군 때의 난정(亂政)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중종의 최 대 급무는 유교질서의 재건을 통한 전반적 국가체제의 정비였다. 이러한 과 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용된 이들이 바로 성리학을 자신들의 학문적 기 반으로 하여 삼대(三代)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광조(趙光祖) 일 파였다. 이들은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을 장악하고 경연(經筵)과 같은 언론활동을 통하여 기존의 보수 세력을 견제하면서 급격한 개혁정치를 시도 했다. 그러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 보수 세력의 공격을 받아 실각하고 말았다. → 기묘사화

이들 기묘사림들에 대해서는 김정국(金正國)이 편찬한 〈기묘당적 己卯黨 籍〉에 94명이 수록되어 있다. 또 김정(金淨)의 후손 김육(金堉)이 편찬한〈기묘제현전 己卯諸賢傳〉에는 218명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중종대의 개 혁정치를 주도한 조광조·김정국·김안국(金安國) 등 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 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사화에서 가장 혹심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1518년(중종 13) 현량과 (賢良科)를 통해 등용되었던 김식(金湜)·안처근(安處謹)·박훈(朴薰)·김정·박상 (朴祥)·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 등과 조광조 등 주로 30대의 소장파 였다. 김안국의 경우는 권신 김안로(金安老)와의 친분관계로 파직되는데 그 치고 별다른 화를 입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림들의 교유·연결 관계가 단순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기묘록 , 기묘사화, 기묘유적

. 남왜북로의 침입과 국방대책

중종 대에는 남쪽에서는 왜구, 북쪽에서는 야인(野人)의 침입이 빈번했다. 1510년 삼포(三浦)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쓰시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켜 경상도 해안일대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삼포왜란). 이에 1512년 임 신약조(壬辰約條)를 체결, 세견선(歲遣船)·세사미(歲賜米)를 줄이고 제포(薺 浦)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왕래를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 가 끊이지 않아 1522년에 추자도, 동래 염장(鹽場)에 왜변이 일어났고, 1525년에는 전라도에 왜구가 침입해왔다. 1544년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왜구가 침입한 것을 계기로 일본 국왕의 사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왜인의 출 입을 금지했다. 한편 북쪽 변경지방에서는 6진·4군 지역에 야인들이 침입하 여 인마(人馬)·재물을 약탈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여 이들을 회유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쌓는 등 방어선을 마련했다. 1524년에 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들을 토벌했으나, 이후에도 야인들의 침입이 자주 있었다. 이 같은 남왜북로의 침입에 대비한 제도적 정비도 이루어져 정로위 (定虜衛)·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었다.

. 중종조의 사회·경제 정책

중종은 즉위 초부터 성리학을 장려하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윤리 를 향촌사회에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려 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된 뒤 에도 이러한 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소학〉·〈이륜행실〉·〈속삼강행 실〉 등을 간행했으며, 말년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안향(安珦) 을 모시도록 했다. 또한 〈경국대전〉·〈대전속록〉·〈대전후속록〉 등을 간 행하여 법제의 확립을 꾀했다. 이같이 간행사업이 활발히 진전된 것은 재위 기간 동안의 인쇄술 발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1516년 주자도감(鑄字都 監)을 두어 구리활자를 주조하고, 〈사성통해 四聲通解〉·〈신증동국여지승 람〉 등 각 방면의 서적들을 편찬·간행했다. 이밖에 1536년 찬집청(撰輯廳) 을 설치하여 각종 서적의 번역·편수를 맡기고, 1540년 역대실록을 베껴 사 고에 비치하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1522년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 을 반포하여 악포의 유통을 막고, 1524년 전라도·강원도·평안도에 양전 (量田)을 실시했으며, 1530년 상의원(尙衣院)에서 서양의 세면포(細綿布)를 무역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한 저화(楮貨)·동전의 사용을 장 려하고,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간의혼상(簡儀渾象) 등 농업과 관계된 천문 기구를 새로 만들었다.

.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 1489(성종 20)~ 1546(명종 1). 조선 중기의

학자.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

學)의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

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가계 및 생애)

할아버지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호번(好蕃)이다.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

을 부쳐 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

(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 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 때문에 건강을 해

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

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

를 구경하고, 기행 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

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

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

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해에 병이 깊

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 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

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

는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기일원(氣一元)의 철학)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

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시원

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를 선천설(先天說)로 설명했다.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끝이 없

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

한 것이 기의 시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고 털끝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계가 없는 것

을 태허라 하고 시초가 없는 것을 기라고 하니 허가 바로 기이다. 허가 본래

무궁하고 기 역시 무궁하니 기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곧 물질적인 기이며 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근원을 기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정신, 지각까지도 포함한 천지만물은 기의 취산(聚散)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담연청허하면서 보편타당한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

이지만 그 하나는 둘을 함유하여 낳고 둘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변화의 작

용을 한다. 둘은 곧 음양·동정(動靜)·감리(坎離) 등을 가리킨다. 둘을 낳는 하

나는 곧 그 음양이나 감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담연주일(淡然周一)한 기

이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를 극한 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이 땅이 된다. 또 양의 정수가 맺혀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들이 하늘에서는 별이 되고 땅에서

는 물과 불이 된다. 그는 이런 과정을 선천에 대해서 후천(後天)이라고 했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기의 운동이다. 그런데 그는 이기의 운

동이 다른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를 '기자이'(機自爾)라고 표현

했다. 한편 그는 기의 취산에 따라 무형의 기와 유형의 기로 구별하여 보았

다. 시원적인 기로서의 태허는 감각할 수 없는 무형의 기이며 천지만물을 형

성하는 기는 유형의 기라고 했다. 즉 기가 쌓이면 유형의 기가 되고 흩어지

면 무형의 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전

개했다.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주장 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를 기

에 선행하는 1차적 존재라고 주장한 주희의 견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

적인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사생귀신은 오직 기의 취산에 불과하며, 그

취산은 결코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환의 과정임을 설명했다. 한편

인성론에서는 전통적인 성선설을 주장하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주정(主靜)을 제시했다. 또한 현실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대상복제

에 대해 올린 상소에서 왕릉이나 기타 묘지가 무분별하게 지정되고 확장되

는 데 따른 폐단과 왕릉의 축조를 위한 채석의 노역동원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루었던 정주학의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분

이 많았으므로, 이황·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이황은 정주의 학설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서경덕의 기론에 대해 그가 이를 잘못 풀이했다고 비

판 했다. 이황은 "그의 견해는 별달리 정밀하지 못하다. 그의 학설을 보면

편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다"고까지 비판했다. 이이도 "퇴계는 모방을 주로

하여 매끄럽게 꿰뚫는 맛이 없는 반면, 화담은 총명이 지나쳐서 스스로 얻은

견해가 많지만, 그 자득의 견은 더 향상이 되지 못하고 그 위에 이통기국(理

通氣局)의 일절(一節)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것은 방만하기 쉬워 잃는 바가 있으므로 차라리 이황의 모방을 본받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妙)를 분명하게 터득한 것으로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송했다. 더욱이 이이는 서경덕의 기자이설을 취하여 이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학파에 이어

져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대표하게 되었다. 서경덕의 학설은 우리나라 성리

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이 등 주

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주(朴洲)·박순(朴淳)·허엽

(許曄)·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지함(李之菡)·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

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

었다.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에,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

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

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황진이(黃眞伊) ... ?~ ?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시조시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

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

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

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

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

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

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

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

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

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

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

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

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

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

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

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

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

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

다.

황진이가 이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

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

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 버렸

다고 한다.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

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

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

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

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

수 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영반월 詠半月〉·〈송별

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

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

〈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중경지 中京誌〉·

〈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 백호(白湖) 임제(林悌) ... 1549(명종 4)~ 1587(선조 20). 조선 전기의 문

인.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

山)·소치(嘯癡)·겸재(謙齋). 아버지는 오도절도사 훈련원 판관을 지낸 진(晉)

이다. 큰아버지 풍암(楓岩)이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돌보았다. 초년에는 늦도

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

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

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

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

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 용만·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

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문인인 이이·허균·양사언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

(文才)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

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

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

국을 누비다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

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肉談)적인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

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

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

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 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 중 전국

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 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 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

자한 〈화사 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

제12대 인종(仁宗) 호(岵) ... 생졸 1515~ 1545년(31세)

재위 1544. 11~ 1545. 7 (8개월) * 짧은 치세

부인 2명, 자녀 없음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羅州朴氏) 자녀 없음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로, 1514년(중종 9년)~ 1577년 (선조10년) (64세)

귀인 정씨 자녀 없음

. 인종(仁宗)의 휘는 호(峼), 자는 천윤(天胤)이다. 사후 시호는 인종영정헌문 의무장숙흠효대왕(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며 중종의 장남으로 어머 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이다.

인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를 잃었다. 1520년(중종 1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522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신들과 옛 글을 강론했다.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중종이 병이 들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1543년 3월부터 부왕 중종을 보좌하여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1544년 11월 28일에 부왕의 선위를 받아 즉위했으나 병으로 인하여 정사를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다. 1545년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김정, 기준(奇遵) 등을 신원하고 현량과를 다시 설치했다.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했다.

능호(陵號)는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번지 서삼릉 (西三陵) 내에 인성왕후와 함께 쌍릉(雙陵) 이다.

묘호는 인종(仁宗)인데, 의정(議定)하는 이유를 정하느라고 약간의 논란이 있 었다. 원래는 현친(賢親)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여 인(仁)이라 한다고 정했는 데, 시법(諡法)에 맞지 않다고 하여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했다고 하여 인(仁)이라 정한다고 고쳤다. 시호는 헌문의무장숙흠효(獻文懿武章肅欽孝)이 다.

제13대 명종(明宗) 환(峘) ... 경원대군(경원대군) 생졸 1534~ 1567년(34세)

재위 1545. 7~ 1567. 6 (22년)

부인 1명, 자녀 1명

.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靑松沈氏) 1532(중종27년)~1575(선조8년)(44세)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순회세 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세자는 13세에 요절했다.

. 명종은 재위기간 동안 양반 관료층의 분열과 분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문정 왕후(文定王后)와 외척 윤원형(尹元衡)의 그늘 밑에서 을사사화·을묘왜란 등 을 겪었다. 이름은 환(峘), 자는 대양(對陽).

능호(陵號)는 강릉(康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번지에 인순왕 후와 함께 쌍릉(雙陵)을 이루고 있다.

. 즉위와 을사사화(乙巳士禍) ... 명종(明宗)은 중종과 계비(繼妃)인 문정왕후 (文定王后)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로 인종의 이복동생이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갑자사화, 중종 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 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 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 졌다. 중종의 첫 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 王后) 윤씨 소생의 세자 호(岵 : 뒤에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尹 任) 일파의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 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숙 청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 째 아들인 봉성군(奉城君)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임·유관(柳灌) 등을 사사 (賜死)케 하고 봉성군·이언적·노수신(盧守愼) 등을 유배시켰다. 그 뒤에도 반 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을사사화 이래 5~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 는 사람들이 죽었다.

. 을사사화(乙巳士禍) ... 조선 전기에 발생한 4대사화의 하나.

조선 전기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정치세력을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는데, 이 들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주로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사화는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들을 가리키며 '사림의 화'의 준 말이다. 4대사화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 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 의 을사사화가 있다.

사림파는 기묘사화 이후 중앙정치세력이 거의 없었는데, 1538년에 김안로 일파가 실각한 뒤 서서히 등용되어 요직에 배치되고 1543년에는 김인후가 향약시행을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1544년에는 조광조의 신원문제가 거론 되어 이를 계기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재연되기 시작했으며,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사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빚어졌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 종을,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미 중종 대 에 외척 김안로를 축출하면서 다른 쪽 외척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외척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것은 예고한 바나 마찬가지였다. 문정왕후는 그 의 족질을 시켜 김안로가 왕후를 폐하려 한다는 밀고하여 김안로를 제거했 다.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공신계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외척들이 여기에 가세하여 단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뿐만 아니라 보다 복잡한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종의 제1계비 윤씨가 낳은 원자(元子)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터 에 제2 계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뒤의 명종)을 낳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 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 형제는 세자를 교체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에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두 외척 간에 왕위 승계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져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로·윤원형 형제 를 소윤(小尹)이라 했다. 대윤과 소윤의 알력 가운데 중종이 죽자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인종은 즉위하여 중종 말년부터 진출해 있던 사림 파를 중용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12세의 경원대군이 즉위했다. 모후인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윤원형이 이기(李芑),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을사사화 를 일으켰다. 윤원형은 핵심 동조세력과 결탁하여 형조판서 윤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양사(兩司)를 통해 제거하려 했다. 당시 양사는 사림파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이를 반대하자 이기 등 은 중신회의를 통하여 위 3명의 죄상을 아뢰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에서 일 단 윤임은 유배, 유인숙은 파직, 유관은 체차(遞差)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러한 결정에 대하여 홍문관을 비롯하여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 하고 항의하자 이기 등은 3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양사의 관원을 파직 시켰다. 또 위의 3명을 역모로 몰아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이어 종친인 계 림군도 관련되었다 하여 죽였으며 윤임을 동조하던 사림 10여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사림파는 왕위계승 문제에서 대체로 인종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을사사화에서 큰 화를 당했다. 을사사화는 척신인 윤원형 이 권신인 이기와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에게 타격을 가한 정치보복이었 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 등은 명종의 보위 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신 책록을 서둘러 28명을 일단 위사공신(衛社功臣) 에 봉했다. 따라서 명종 초년에는 이들 공신집단이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 었다. 을사사화의 경우 싸움은 외척 간에 벌어졌으나 사림파도 다수 제거 되었다. 사화는 대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지는 지배계급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부분적으로 정치론에서 차이가 나거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엇갈려 일어난 사건이었다. 비록 사림파가 화를 당한 것이나 을사사화는 외척이 중 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정치적 갈등이었다.

. 을묘왜변과 비변사의 상설기구화 ...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 을 겪어온 왜인들이 전라도지방을 침입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에 1510 년(중종 10) 삼포왜란 때 설치되어 임시기구로 존속해오던 군사기관인 비변 사가 상설기구로 되어, 청사가 새로 마련되고 관제상으로도 정1품 아문의 정 식아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비변사는 군사문제를 총괄하는 관청으로 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변사 기능의 강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 쟁 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서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군국사무 전반을 처 리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최고권력 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조선후기까 지 지속되었다.

. 을묘왜변(乙卯倭變) ...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한 사건.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난 이래 조선 정부가 일본에 대한 세견선(歲遣船)을 감축하여 교역량을 줄임으로써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쓰시마섬[對馬島] 등지의 왜인들이 1555년 5월 11일 배 70여 척을 타고 전라도 영암(靈巖)의 달량포(達梁浦)와 이포(梨浦)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했 다. 가리포(加里浦) 수군첨사(水軍僉使) 이세린(李世麟)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원적(元積)은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량포로 출전했으나 오히려 왜 구에게 포위되어 원적과 한온은 항복했다가 피살되고 이덕견만 탈출했다. 이 로써 전라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사가 붕괴하자 침입한 왜구의 횡행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저 항을 받지 않고 어란 포(於蘭浦)·장흥(長興)·강진(康津)·진도(珍島) 등을 짓밟으며 다시 영암으로 침입했다. 이에 정부는 금군(禁軍) 등 서울의 정예군사를 동원함과 아울러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공사노(公私奴)·승도(僧徒) 등을 강제 징발하 는 한편,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 김경석(金 慶錫)·남치훈(南致勳)을 좌·우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이들을 토벌하도 록 하고, 삼포 왜인의 준동을 방지하고 침입한 왜구의 진공을 막도록 경상도 와 충청도에도 각 각 장수를 파견했다. 후원군이 도착하자 전주부윤 이윤경 (李潤慶)이 군사를 이끌고 영암으로 가서 남치훈 등과 힘을 합하여 5월 25 일에 적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비로소 왜구를 몰아낼 수 있었다. 왜구는 퇴각 하는 길에 녹도(鹿島)를 습격한 데 이어 6월 27일에 제주도를 습격했으나, 상륙한 왜구를 목사 김수문(金秀文)이 군사를 이끌고 격멸했다. 당시 왜구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견고한 전함을 만들어 사용하고 총통(銃筒) 제작 기술 및 사용법을 익혀서 전력이 강화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는 지방 수 군과 정병(正兵)에 대한 방군수포(放軍收布)가 공공연히 행해져 실제 근무하 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그나마 가난한 농민들뿐이었으며 제대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특히 국방체제인 진관체제(鎭管體制)가 기능을 잃 어 군사 지휘체계가 문란했고, 봉수(烽燧)마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여 적침 에 대비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같은 해 4월에 이미 왜구 침입 기미를 탐지했 으면서도 큰 군사적 실패를 겪었던 것이다. 한편 같은 해 10월 쓰시마 도주 [對馬島主] 소오[宗義調]가 이들 왜구의 목을 잘라 보내어 죄를 사과하고 세견선의 증가를 호소해오자 정부에서 이를 승락, 세견선을 5척 증가시켜 임 진왜란 전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이 전란은 비변사가 상설기관으로서의 위치 를 굳히는 데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 왕권강화의 시도 ...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을 하 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 양(李樑)을 이조판서, 그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다. 그 러나 이양 등은 왕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형성하여 횡렴을 일삼았으며 사림 출신의 관료들을 외직으로 추방했다. 이에 사림들이 반발하자 이양은 사화 (士禍)를 꾀했으나 심의겸(沈義謙)에게 탄핵당하여 1563년 숙청되었다. 결국 1565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과 보우(普雨)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 치를하려고 노력했으나, 1567년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와의 사이 에 낳은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일찍 죽어, 왕위는 중종의 9번째 아들인 덕흥 부원군(德興府院君)의 셋째 아들 선조가 계승했다. 능호(陵號)는 강릉(康陵) 이며, 시호는 공헌(恭憲)이다.

. 양재역 벽제사건(良才驛 壁書事件) ... 1547년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 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왕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 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하여 생긴 사건이라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 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관계에 있던 이약수 를 사사하고 많은 사림 계 인물들이 유배되었다.

이 사건으로 윤원형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윤원형의 세도가 극심 해졌다. 윤원형은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한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죽이고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을 독살하고 그 자리에 노비 출신 인 정난정을 앉혔다. 정난정은 윤형원의 권세로 상권을 장악하여 모리 행위 로 치부하고 봉은사의 승려 보우(普雨)를 문정왕후에 소개시켜 병조판서 직 에 오르게 했다.

윤원형의 세도가 명종의 친정 후에도 계속되자 명종은 윤형원을 견제하기 위해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량을 중용했으나 이량 역시 세도를 부려서 사회 는 더욱 혼란 속에 빠졌다.

이러한 사회혼란은 툭하면 왕을 불러 욕을 해대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왕의 빰을 때리는 문정왕후가 원인이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조정은 정상을 찾았다.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 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 정난정과 함께 강음 에 유배 되었다가 자살했다.

. 임꺽정의 난(林巨正의 亂) ... ?∼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의적(義賊).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한다. 양주의 백정 출 신이다. 여러 해 연이어 흉년이 계속된 데다가 당시 척족 윤원형(尹元衡)·이 량(李樑) 등이 발호하고, 관리들의 수탈이 횡행하는 틈을 타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날쌔고 용맹스러웠으며 자기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어지러운 사회를 틈 타 난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해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삼아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 는 등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 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결탁해 내통하였 다. 그리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났다 한다.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정탐시키자 그들 무리는 미투리를 눈 위에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행방을 감추었다. 선전관이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돌아 올 적에 도둑들은 선전관을 잡아 죽였다.

1559년(명종 14) 집을 개성에 두고 개성 근방에서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 (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인 20여 명을 데리고 그들의 소굴을 습격했다 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한 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임금은 도둑잡기를 게을리 하는 수령에게는 엄벌 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작은 도 둑 무리만 잡았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년 8월에는 서울에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였다. 장통방(長通坊 : 현 종로구 종로2가 부근)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부장(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다. 이 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을 잡았다. 그리고 임 꺽정의 아내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 해 10월에 금교역(金郊驛)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 천·양덕·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 를 마련하고 겁탈을 일삼았다. 이리하여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혔다. 이들은 이 때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 정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이 해 12월에 엄가이(嚴加伊)라는 도둑 두 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는데,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徐林)이었다.

서림의 입을 통해,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났다. 또, 이 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의 여러 차례 잡은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 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 로 진격하였다. 그 때 도둑 무리는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을 무찔러 부 장 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이에 임금은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해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辛商輔)가 도 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자, 백주에 도둑 무리가 들이 닥쳐 옥사를 깨고 처자들을 구출한 사건도 있었다.

이 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李思曾)이 임꺽정을 잡았다 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추고(推考 : 죄가 있는 관원을 신문 해 그 죄를 살펴 봄)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였다. 그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 추관(推官) 강려(姜侶)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다.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해졌고, 관군의 물 자마저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1561년 9월에 평안도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李壽鐵)이 임꺽정과 한온(韓溫)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들을 의금부에 데려 와 조사를 하니 해주 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했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 고 지적한 것이다. 이에 이수철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이 해 10월 임 꺽정 일당이 해주에서 평산으로 들어와 대낮에 민가 30여 호를 불태우고 많 은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림을 통해 임꺽정을 꾀 어낸다는 방침을 바꾸고 새로운 조처를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황해도 토포사(討捕使)로 남치근(南致勤), 강원도 토포사로 김세한 (金世澣)을 임명해 정병을 딸려 보냈다. 이어 개성과 평양의 성내를 샅샅이 뒤졌으며 서울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등에 수문장의 수를 늘리고 날짜를 정 해 새벽부터 일시에 수색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는 자는 달아났다. 이에 포졸들은 달아나는 자들을 잡아들였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으면 감옥에 넣어 온종일 서 울은 호곡 소리로 들끓었다 한다.

한편, 정시(停市 : 시장을 일시동안 정지시킴) 및 모든 관청 일을 중단시켰는 데, 대신이 죽는 때 외에는 없던 일이었다. 또,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도둑으 로 끼어드는 일을 막기 위해 수색을 금했고, 황해도에는 전세 전부를, 평안 도에는 전세 절반을 탕감하였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의정부에서는 “토포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 유 둔하고 있어서 군민(軍民)이 곤궁, 피로하고 일도가 탕연해 원망의 소리를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고 일단 많은 도둑의 졸개가 잡혔으니 임꺽 정을 잡는 일은 평안도·황해도의 감사·병사에게 맡기고 토포사를 올라오게 하였다.

1562년 정월, 남치근은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郭舜壽)와 홍언성(洪彦誠)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기재잡기 寄齋雜記≫에는 임꺽정이 잡 힐 적의 정황을 이렇게 전한다.

남치근이 재령 땅에서 진을 설치하니 임꺽정은 날쌔고 건장한 자만을 데리 고 구월산에 들어갔고 나머지 무리에게는 요소요소를 지키게 하였다. 산을 올라가며 계속 수색하며 남은 무리를 죽이자 임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 했는데, 계속 민가를 수색하자 임꺽정이 민가에 뛰어 들어왔다.

임꺽정이 주인 노파를 위협해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며 나가게 하였다.

이에 임꺽정이 칼을 빼고 뛰어나오며 도둑놈은 달아났다고 소리쳤다. 군졸들 이 혼란한 틈을 타 술렁거리자, 군졸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다가 서림이 “저 놈이 임꺽정이다.”라고 소리쳐 끝내 상한 몸으로 잡혔다는 것이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고, 잡힌 지 약 15일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실록의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하였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 다.”

임꺽정은 이러한 정상을 이용해 자기의 신분 차별에 대한 한을 풀어보려고 했고, 그러한 처지에 놓인 두령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5도를 횡행하며 관군 을 괴롭혔고 온 나라를 소란에 빠뜨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명화적(明火賊)은 그를 의적으로 떠받들었으며, 무수한 설 화를 낳았고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에서 그의 앞 시대의 홍길동(洪吉童), 뒷시대의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 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다.

그리하여 일부는 살육을 자행하는 포악한 도둑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일부는 백성을 위해 관곡을 털어 나눠주는 의적으로 평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명종실록(明宗實錄)』『기재잡기(寄齋雜記)』『성호사설(星湖僿 說)』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1491(성종 22) 경북 경주~ 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성리학의 이설(理說)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로 경주손씨 (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 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 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 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 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 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 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 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 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 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년)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서원이다. 회재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옥산서원은 사액서원으로, 1572 년 임진왜란에도 병화를 면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이다. 서원은 화개산(華蓋山)을 주산으로 하여 수려한 풍 광을 보여주는 자계(紫溪)와 주변의 울창한 수목이 빼어난 경관을 이룬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 앞 계곡물은 폭포가 되어 소리를 내며 용소(龍沼)를 이 루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원을 감돌아 흘러 나간다. 그 옛날 유생들이 심 신을 깨끗이 씻고 자연을 관조하며 학문을 연마하라는 의미로 계곡 너럭바 위에 ‘세심대(洗心臺)’라 각자(刻字)하였다.

.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연산군 7) 경북 안동~ 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이동설(理動說)·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 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 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 (退溪)·퇴도(退陶)· 도수(陶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 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 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 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 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 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 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 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 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 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 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 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 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 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 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을 진강(進 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 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안동 시 도산면 토계리에 세운 서원으로, 사적 제170호이다. 1574년(선조 7) 지 방 유림의 발의로 도산 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의 사액을 받았다. 영남 유림의 정신 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존속한 47개 서 원 중의 하나였다. 1969~70년 정부의 고적 보존 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 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이황과 제자 조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상덕사(보물 제211호), 서원의 강당인 전교당(보물 제 210호), 향례 때 제수를 두던 전사청, 유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와 서재, 장서 를 보관하던 광명실과 장판각,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제자들 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농운정사 등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 고 있다.

제14대 선조(宣祖) 균(均) ... 하성군(河城君)

생졸 1552(명종 7)~ 1608(선조 41).(59세)

재위 1567. 7~ 1606. 2(40년 7개월)

부인 8명, 자녀 14남 11녀

의인왕후 박씨 자식 없음

인목왕후 김씨 영창대군, 정명공주

공빈 김씨 임해군군, 광해군(제15대 光海君)

인빈 김씨 4남 5녀, 순빈 김씨 1남, 정빈 민씨 2남 3녀,

정빈 홍씨 1남 1녀, 온빈 한씨 3남 1녀

. 사림정치(士林政治) 확립,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 시작 ... 선조 재임기간 중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 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 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 王后)이다.

※(사림정치의 확립)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즉위했 다. 선조가 즉위할 무렵은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이 정계를 주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 조는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을 널리 등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 (講筵)에서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기묘사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을 신원하고 을사사화로 귀양 가 있던 노수신(魯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기용하는 한편, 훈신세력 인 남곤(南袞)·윤원형(尹元衡)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거나 삭훈(削勳)했다. 또한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하고,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 (曺植)·성운(成運) 등을 등용했다.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 서의 간행에 힘써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하고 1585년에는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해 경서의 훈해(訓解)를 교정하게 했다. 1588년 사서 삼경의 음석언해(音釋諺解)를 완성하고 〈소학언해〉를 간행했다.

한편 조선 초부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 록〉·〈대명회전 大明會典〉 등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고치기 위해 주청사를 거듭 파견했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 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목적을 달성했고, 1589년 성절사 윤근수(尹根壽)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옴으로 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 (동서분당과 붕당정치의 성립)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 하에서 성 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前輩)와 후배(後輩)가 대립하게 되었다. 전배는 소윤(小尹)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정 계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은 심의겸을 포함한 구 세력의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朴 淳)·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유성룡(柳成龍)·이 산해(李山海)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 로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 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에는 세자책봉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 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그 뒤 선조 대의 정국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항 복(李恒福)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대내적으로 붕당간의 권력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대외적으로 는 여진족과 일본의 외침이 있었다. 1583년 니탕개(尼蕩介)를 중심으로 회령 지방에 살던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경기감사 정언신(鄭彦信)을 도순찰사로 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했다. 또한 1587년에도 니응개(尼應介)가 이끄는 여진족이 대거 침입하자 조산만호(造 山萬戶) 이순신(李舜臣)과 경흥부사 이경록(李景祿)이 이를 격퇴했으며, 이듬 해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을 시켜 두만강 건너에 있는 여진족 근거지를 소탕했다.

한편 선조는 1590년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許筬) 등을 파견하 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 臣秀吉]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 船)을 준비하고 있어 멀지 않아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동 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대신들은 김성일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통신사와 함께 온 일본사신이 "1년 후에 조선 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假道入明)"이라고 통고하자 조선 정부는 크 게 놀라 뒤늦게 경상도·전라도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각 진영(鎭營)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592년 4 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보름 만에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이곳에 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光海君) 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 청 했다. 이에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사이 이순신·권율(權慄)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 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 선조는 공사천 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천인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 국민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힘썼 다. 일본군이 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 아왔다. 이후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과 탄환을 만드는 기술을 배 우도록 했다. 1597년 일본은 명과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자 다시 침입했 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의 전투에서 연이은 패배와 도요토미의 사망으로 총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임진왜란 후의 사회변동과 전후 수습책)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회복하고 전쟁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1601년과 1603년에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또한 전쟁 중에 명군의 식량 조달을 위해 실시했던 납속(納粟)을 더욱 확대했다. 납속책의 실시는 부유한 상민·천민의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해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각 궁방(宮房)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임시변통으 로 왕자·옹주 23명에게 예빈시(禮賓寺)에 소속되었던 어전(漁箭)·염분(鹽盆)· 시전(柴田)을 획급했는데, 이후 궁방전의 시초가 되었다. 1604년 호성(扈聖)· 선무(宣武)·정난(靖難) 공신 등을 녹훈함으로써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 을 표창했다. 그리고 유정(惟政)을 일본에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 康]와 강화를 맺었으며, 왜관(倭館)을 열어 개시(開市)하는 것을 허락하고 포 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서 화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소경(昭敬)이며, 전(殿)은 영모전(永慕殿)이다.

능호(陵號)는 목릉(穆陵)이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東九 陵) 내에 왼쪽이 선조릉, 중간이 의인왕후릉, 우측이 인목왕후릉 등 3개의 언덕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菬) ... 1530(중종 25)~ 1559(명종 14).

조선 제14대 선조(1567~1608 재위)의 아버지.

본관은 전주. 이름은 초(菬), 자는 경패(景伂).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 니는 창빈안씨(昌嬪安氏)이다. 부인은 정인지의 손자인 판중추부사 정세호(鄭 世虎)의 딸이다. 1567년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균(鈞)이 즉위한 뒤 1570년 대원군에 추존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 5-13 덕릉(德陵)고개에 있다.

.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潘南朴氏) ... 1555년(명종 10년) ~ 1600년(선조

33년) (46세) 선조의 정비(正妃)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5위도총부의 수장 인 도총관과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하며 후일 영의정에 추증된 반성부원군 (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서, 소생 없이 승하했다. 시호는 장성휘 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延安金氏) ...1584(선조 17)~1632(인조 10)(49세)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의 계비(繼妃) 영돈녕부사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1600년(선조 33)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1602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다.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小北)은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 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당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정권을 잡았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 등이 반역죄를 씌워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죽였으며 김제남도 사사시켰다. 1617년 삭호(削號)당하고 서 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호(復號)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직접 쓴 〈보문경 普門經〉 일부가 금강산 유점사(楡 岾寺)에 전한다. 1604년에 소성(昭聖), 1610년 정의(貞懿), 1624년(인조 2) 명렬(明烈)의 존호가 올려졌다. 휘호는 광숙장정(光淑莊定)이다.

. 영창대군(永昌大君) ... 1606(선조 39)~ 1614(광해군 6) (9세)

선조의 적자(嫡子)광해군의 이복 동생이다. 어머니는 인목 대비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은 적장자가 아닐 뿐더러 명(明) 의 책봉도 받지 못했다는 명분상의 약점이 있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유 영경(柳永慶) 등의 척신과 소북(小北) 세력이 세자의 개봉(改封)을 건의했으 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임종 전에 유영경· 한흥인(韓興寅)·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 등 7대신에게 영창대군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정권 (大北政權)은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고 유영경 등을 파면시켰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첫 번째 인물로 영창대군을 지목했다. 1613년(광해군 5) 강변칠 우(江邊七友)의 은상(銀商)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이이첨은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하여 강변칠우들이 은을 모아 김제남을 영입하고 영창대군을 추대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하게 했다. 이 일로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7 대신들도 처벌당했으며,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곽재우(郭再祐) 등이 혈육 간의 정분과 연소함을 들어 '전은'(全恩)의 논리를 폈으나, 대북세력의 다수 는 '토역'(討逆)의 논리를 내세워 죽일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항복 등이 유 배를 당하고, 그는 이듬해 대북정권의 명령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 임해군(臨海君) 진(珒) ... 1574(선조 7)~ 1609(광해군 1) (26세)

이름은 진(珒), 초명은 진국(鎭國). 선조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공빈 김씨 (恭嬪金氏)이고, 부인은 참의 허명(許銘)의 딸이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懿仁王后)가 아들이 없어 세자의 물망에 올랐으나 성질이 난폭하고 인심을 얻지 못해 1592년(선조 25) 동생인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 어나자 순화군(順和君)·김귀영(金貴榮)·윤탁연(尹卓然) 등과 함께 함경도로 피 난했으나,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어 부산으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석 방되었다. 선조는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광해군의 책봉을 청했으 나 형을 두고 동생을 세울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 자 명나라에서 그를 즉위시키려 했으며, 유영경(柳永慶) 등 일부 대신들도 그를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에 의해 진도로 유배된 후 강화 의 교동에 옮겨져서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복작(復爵),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 인빈(仁嬪) 김씨(水原金氏) ... 1555년 ~ 1613년(59세)

선조의 후궁이다. 추존왕 원종(元宗)의 생모이자 인조(仁祖)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1555년(명종 10년)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 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효성(李孝性)의 딸 이씨이다. 그녀의 외조부 인 이효성은 왕실의 일원으로,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증손자이다. 또 그녀의 언니가 신경과 결혼하여 낳은 딸은 광해군의 후궁으로 책봉된 숙원 신씨이다.

. 신성군(信城君) ... 인빈 김씨는 선조가 가장 총애하였던 후궁으로 선조는 임 진왜란으로 피난을 갈 때도 정비 의인왕후 박씨를 제치고 인빈 김씨를 대동 할 정도였다. 인빈 김씨는 1555년 수원김씨 김한우의 딸로 태어났다. 본래 명종의 후궁 숙의 이씨와 내외종간으로 숙의 이씨가 빈을 데려다 궁중에서 길렀다. 명종 승하 후 이씨가 비구니가 되자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가 빈 을 보고 기특하게 여기셔서 선조대왕(宣祖大王)의 후궁으로 삼도록 하여 후 궁이 되었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들은 어 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미 공빈 김씨 소생의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는 상태에서 세자가 될 가능성은 광해군이 가장 높았으나 인빈 김씨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공빈 김씨가 죽은 후 왕의 총애를 독 점한 인빈(仁嬪) 김씨는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추존 왕 원종 元宗), 의창군 등 네 왕자와, 다섯 명의 옹주를 낳았다.

. 정원군(定遠君) ...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로,

1604년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지기도 했다. 왕을 뜻하는 ‘종’이란 묘호를 갖고 있음에도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사후 추존됐기 때문이다.

원종은 사망할 때 정원군(定遠君)인 ‘군(君)’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경기도 양 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혔다. 그런데 ‘인 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綾陽君) 종(倧)이 후에 왕(인조 仁祖)이 되자, 이미 고인이 된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으로 높여졌고, 10년 후에는 원종 으로 추존되고, 묘도 원으로 추승되어 흥경원이라 불리게 됐다.

한마디로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남다른 대접을 받은 셈이다. 인헌왕후 는 아들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이라 했다. 1626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김포 성산 언덕에 예장했다가, 이후 원종의 능 인 현재의 자리로 다시 천장했다. 능호(陵號)는 장릉(章陵)으로 경기도 김포 시 풍무리 산 141-1 번지에 추존된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와 함께 쌍릉(雙陵) 형태이다.

정원군은 살아서는 상당히 불우했다. 선조가 사망하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왕 이 되자 정원군은 ‘잠재적인 정적’으로 광해군의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 았다. 특히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 김씨의 무덤과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기 가 서렸다는 소문이 돌아 광해군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더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은 성품이 호탕하고 인물이 훤칠하며 무 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광해군에게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는 데, 때마침 능창군이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는 상소가 들어왔다. 정원군에 대해 견제하고 있던 광해군은 곧바로 능 창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죽였다. 광해군 7년(1615)에 생긴 ‘신경희 옥 사’다.

정원군을 낙담하게 한 것은 아들을 잃은 지 2년 후이다. 지관 김일룡이 ‘새 문동에 왕기가 서려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자’고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왕 기가 서렸다는 새문동터가 바로 정원군이 살던 집터로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 경덕궁(현재의 경희궁)을 짓게 한다.

사랑하던 셋째 아들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자 신이 살던 집터까지 광해군에게 빼앗기자 정원군은 광해군이 무슨 죄목을 들어 나머지 아들들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술로 화병을 달래다가 40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 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 임진왜란(壬辰倭亂) ... 1592(선조 25)~98년에 2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난리(→ 한국사).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합하여 물리친 전 면적 국제전쟁으로 임진년에 발생했다 하여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 전 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말할 때는 '정유재란'(丁 酉再亂)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 중 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최대 사건으로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 향을 끼쳤다. 일본은 전쟁 초기에 한성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 점령하 였으나 조선군의 처절한 저항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개전 1년여 만에 창원 이남으로 퇴각하였으며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 이순신(李舜臣) ... 1545(인종 1)~ 1598(선조 31). 조선 선조 때의 명장.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 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 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 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출생과 가족관계)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7대손 변(邊)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 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貞)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도 기울어져 있었다.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 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오른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 씨(尙州方氏)와의 사이에 회(薈)·열·면(葂)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다.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또한 조카들을 친자 식과 같이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무과급제와 초사(初仕)시절)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는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訓 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다리가 부러지 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했다. 그 뒤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 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 했다.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병사 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7월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 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 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 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이 되었으 나 15일에 아버지가 죽자 휴관했다.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 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鹿屯 島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사 이일(李鎰)은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패한 죄로 하옥되었다.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助防將)을, 이어 11월에는 선전관도 겸직하게 되 었으며 12월에는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듬해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高沙里鎭 兵馬僉節制使)·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했으 나, 모두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 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이미 이이(李珥) 가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한 바 있었으나, 이순신은 이 이가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직 시에 찾아가기를 사양했 다 한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 는 한편, 후일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했다.

전라좌수사의 취임 이듬해인 1592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병력이 도합 20만 명에 달하는 대 규모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 영도에 와 닿았다"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통첩과 "왜선 350여 척이 벌 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공문을 받은 즉 시로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와 병사,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에 게 공문을 보냈다(4.15). 경상좌우도 수군은 왜군의 부산 상륙을 보면서도 전혀 싸우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한 원균은 배와 화포와 군기를 미리 바다에 침몰시켜 버렸다고 한다(〈징비록 懲毖錄〉). 원균은 비장 이영남(李英男)의 책망으로 전라좌도 수군의 구원을 청했으나, 이순신은 맡은 바 경계가 있음 을 이유로 영역을 넘어 경상도로 출동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태가 위급 해지자 그는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만호 정운(鄭運) 등 막하 장령들 의 격렬한 찬반논의와 그들의 소신을 확인한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렸 다. 4월 27일에 올린 〈경상도 구원에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赴援慶尙 道狀)〉에서 '같이 출전하라는 명령'(往偕之命)을 내릴 것을 주청했다. 그로부 터 전라 좌도의 수군, 즉 이순신 함대는 경상도 해역에 전후 4차의 출동을 감행하여 크고 작은 10여 회의 잇따른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제1차 출전으로 5월 4일 새벽 전선(戰船:판옥선) 24척과 협선(挾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 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 夫)에 승서되었고, 제2차 출전인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그대로 독전(督戰), 6월 5일의 당항포해 전(唐項浦海戰) 및 6월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모두 72척의 적선 을 무찔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다. 제3차 출전인 7월 8일의 한산 해전에서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 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의 함대 기동으 로 급선회하여 일제히 포위 공격함으로써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워 이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이어 7월 10일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는 적선 42척을 분파했다(→ 색인 : 한산도대첩). 일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4차 출전 으로, 9월 1일 부산포(釜山浦)를 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서 치명상을 입혔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 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 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1594년 3월 4 일 2번째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하고 9월 29일의 장문포해전(長門 浦海戰)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했으며, 10월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 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했다.

1595년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 내의 분당적 (分黨的)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고 있었다. 1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막하 간첩 요시라(要時羅)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 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 즉……" 하며 간곡히 권유했다. 이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 1597년 1월 21일 도원 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에 와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고 명을 전 했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熊川)에서 알려오기를 "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고 했다. 일 본 측 기록에는 정월 14일(일본력 1.13)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에 상륙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왜장은 도원수 권율이 독전 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 보다 6일 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이다.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 는 비열한 모함으로 파직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 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 정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4월 1일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그는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하고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한편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7월 16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신한 원균은 왜병의 추격을 받 아 살해되었다 한다. 이번에도 김응서 및 권율을 경유한 요시라의 같은 계략 이 적중한 것이었다. 정유재침의 다급한 사태에 엄청난 파탄이 초래되었으 나,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청하여 수군 수습에 나선 그는 8월 3일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고, 칠천량에서 패하고 온 전선들을 거두어 재정비 함으로써 출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대문궤 事大文軌〉 권24의 〈명량 대첩 장계초록〉에 의하면 8월 24일 어란(於蘭) 앞바다로 12척을 이끌고 나 왔는데,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일에는 13척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8 월 29일 명량(속칭 울두목)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이진, 9월 15일에 우수영 앞바다로 함대를 옮긴 후에 각 전선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병법에 이 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 則死)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엄달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200여 척과 사력을 다하여 싸워 일본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다. 일본군은 패전 후 웅천으로 철수했다.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 하여 7년 전쟁에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임진년의 '한산도 대첩'과 정유년의 '명량대첩'은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으나, 명량해전 은 박해와 수난과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의 초인적 실존(實存)으로 치러진 것 이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 명량대첩으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숭정대부(崇政 大夫)로 서훈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0월 14일 셋째 아 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부고가 온 뒤로부터는 심신의 쇠약이 더해지며 자주 병을 앓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 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피난민들의 생업을 진작시켰다. 7월 16 일에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와 조선 수군과 합세했다.

8월 19일(일본력 8. 18),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일제 히 철군을 시작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 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물리쳤다. 조·명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다치바나 도오도라[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였다. 치열한 야간전투가 계속되 는 동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양 력 12월 16일) 새벽, 이순신은 독전 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 사했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이순신의 전사에는 의자살설[擬自殺說]이 남게 되었 다. 즉 그것은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투구를 벗고 선봉에 나섰다'는 전설과 더불어 7년 전란에 위태로운 전투를 몇 십 회나 치르면서도 그 뛰어 난 전략과 전술로 한 번도 패함이 없었던 그가 자기 몸을 보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발단된 것이다). 노량해전의 전과에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나, 태워버린 적선이 200여 척, 적병의 머리 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순신의 상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를 떠나 12월 11일경에 아산에 도 착,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으나, 전사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 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숙종 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 다. 1793년(정조 17) 7월 1일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 1795년에는 역시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가 규장 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난중일기 亂中日記〉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 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 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 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詩歌)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 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 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 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 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 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 일기로서,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난중일기〉는 그 친필원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 원본 〈임진장초 壬辰狀草>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 현재 아산 현충사 에 보존되어 있다.

이순신의 문필은 〈난중일기>와 더불어 몇 편의 시가와 서간문이 남아 있어 그의 문재(文才)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권1에는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작별하는 시〉·〈무제육운 無題六韻〉·〈한산도야음 閑山島 夜吟〉, 그리고 말미에 24자로 한역(漢譯)된 〈한산도가〉가 수록되어 있다.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 亂中雜錄〉에는 한산도의 작품이 20수나 있었 는데 그중에 "바다에 맹세함에 고기와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1937년에 간행된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은 조선 중기의 시조 문 학 발휘시대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이순신을 꼽고 있다.

. 곽재우(郭再祐) ... 1552(명종 7) 경남 의령~ 1617(광해군 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의령·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왜적의 호 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 는 망우당(忘憂堂).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황해 도관찰사 월(越)이며, 조식(趙植)의 외손녀 사위이자 문인이다. 대제학을 지 낸 김우옹(金宇顒)과는 동문이자 동서지간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의 활동)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 이 취소되었다. 그 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1592년 5월 솥 바위나루[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 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 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 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 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올랐고, 10월 에는 절충장군겸 조방장(折衝將軍兼 助防將)이 되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을 쌓았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 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 문(石門)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火旺)산성으로 옮 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죽 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갔다.

(전후활동)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喪中)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 다. 그해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경험이 많은 군 사 2,000명을 수성군(守城軍)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 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 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1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에는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 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 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찰리사(察理使)·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가선대부 용양위상호군 등에 임명되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 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1613년(광해 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 현사(忠賢祠)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禮淵書 院)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 다. 저서에 〈망우당집 忘憂堂集〉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 ...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 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 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 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 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 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 생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 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 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 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 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 되었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 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 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휴암 백인걸의 문인이다.

(출생과 가계[편집])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 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이이가 태어나기 전 신사임당의 꿈에 흑 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 은 몽룡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 (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중종 때의 형제 정승 경재 이기, 용재 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 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각각 지냈다. 또한 종조부 이기와 이행은 당대 의 실권자들이었고, 그들은 외가 쪽으로는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조카이 고, 사육신 성삼문의 외종조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 사 헌부감찰에 이르렀다.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 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인 신사임당의 권고로 그 만두었다. 야사에 의하면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이기의 집에 출입하 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기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 며 벼슬이 의정부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을사사화에 가담한데다 권력을 남 용한 탓에 명종 말엽 관작을 삭탈 당했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시도 잘 짓고, 글도 잘 지었고 그 림도 그렸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은 덕이 매우 높은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 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학 문이 깊고 시와 글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여인으로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런 교육환경 덕에 그는 어려 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조광조 등 과 가까이 지냈으며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 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여럿 두었는데, 딸들에게도 유교, 성리학 을 가르치고, 공자, 맹자, 주자의 도리를 가르쳤다.

어머니 신사임당 외에 이원수는 권씨라는 첩을 한명 더 두었다. 서모 권씨는 주모 출신으로 술주정이 심하였는데, 생전의 신사임당에게 근심이 되었을 뿐 만 아니라 신사임당 사후 이이를 괴롭혔으나 그는 원한을 품지 않고 서모를 극진히 모셨다.

(유년기와 소년기[편집])

이이는 어려서 신동이라 불렸다. 그는 생후 1년도 안 돼 말과 글을 깨우쳐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는데,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 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이이는 4세 때 중 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 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 린 아이의 정성어린 기도에 탄복하였다 한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 이원 수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 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

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

어머니 신사임당이 자주 병환에 눕자, 이이와 형제들은 지극정성으로 어머니 신사임당의 병구완을 하였으나 1551년(명종 6년) 어머니 신사임당은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이이는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는데, 서모 권씨의 술주정과 괴롭힘은 그의 방황을 부추겼다. 그는 외할머니 이씨와 서신을 주 고 받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외할머니에게 의존하였으나 그마저도 곧 세상 을 떠난다.

그는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노씨와 결혼하였고, 첩 김씨와 이씨 두명의 첩을 두었다. 그중 이씨의 서녀에게서 얻은 딸 이씨는, 이이가 죽은 뒤 그의 제자였던 김장생의 아들 김집의 첩으로 출가하였다.

(학문 수학과 친구[편집])

스승 휴암 백인걸(그는 조광조, 김식, 김안국의 학통을 다시 율곡 이이와 우 계 성혼에게 전수하였다.)

1548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서적뿐만 아니 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다가 그는 조광조의 문하생인 휴암 백인걸을 찾 아가 수학하였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우계 성혼을 만나는데, 성혼은 그의 오 랜 친구가 된다. 성혼은 조광조의 다른 문하생인 성수침의 아들이자 성수침 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또한 고향 파주는 친구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의 연고 지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이이와 성혼은 시류의 타락을 논하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 이 죽자"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1567년 선조가 인재를 추천받을 때 사림에 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 떤가?" 라고 우계의 사람됨을 물었다.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 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다." 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 떠받드는 인물이기 이전에, 자신의 오랜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비교적 냉혹 한 평가였다. 그런데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묻 자 이이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자신이 낫긴 하나 수신하고 학문적은 노 력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한다." 라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성혼역시 이이의 그러한 답변에 유감을 갖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모친상과 방황[편집])

1551년(명종 6년)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 이원수가 평양 으로 출장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묘소가 있는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하며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 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자녀들은 서모인 권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 어야 했다.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 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 격이었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빈 독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어댄다든가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이이는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그에게 심적,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사 람이 왜 태어나고 죽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면서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결 국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그가 뒤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뒤에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준 것은 스승 백인걸과 오랜 친구 성혼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입산경력은 그의 생전에도 송응개 등의 동인(東人)들과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의 남인(南人) 당원들에게 이단 학문에 빠졌다는 이유로 사 상공세를 당하는 원인이 된다. 이이가 승려이며 불교도라는 동인, 남인, 북인 계열 유학자(儒學者)들의 사상공세는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 지도 지속된다.

조광조의 직계 제자였던 그의 스승 백인걸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유생들과 청년들을 가르쳤고,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의 스승이자 자신의 사조 (師祖)가 되는 정암 조광조조차 급진적이라며 거침없이 비난을 가하기도 했 다.

(승려 생활과 환속[편집])

금강산 구룡연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 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 마가연 (摩訶衍)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였다.

불도를 닦았는데, 그가 수행하는 중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승려생활 내내 인간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 한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 다고 확신하고 1년 만에 마가연을 떠나 금강산에서 내려와 환속한다. 산에서 하산하며 그는 승려에게 이와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연비어약 (鳶飛魚躍)

연비어약상하동(鳶飛魚躍上下同) /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 위나 아래나 매 한가지

저반비색역비공(這般非色亦非空) / 이는 색도 아니요 또한 공도 아니라네

등한일소간신세(等閑一笑看身世) / 실없이 한번 웃고 내 신세 살피니

독립사양만목중(獨立斜陽萬木中) / 석양에 나무 빽빽한 수풀 속에 홀로 서 있었네

불교의 무념 무욕이 그의 기질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 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때 승려로 있었다는 점은 후일 동인과 남인에 의해 인신공격의 대상이 된다.

(학자 생활과 과거에 급제[편집])

백인걸의 문인이기도 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 며 학문에 관한 질의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 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후생가외라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 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황을 방문하여 담 론 하던 중 이와 기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 드는 것을 목격한 이황 의 문도들은 그를 이인(異人)으로 의아하게 보면서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는 데, 후일 조정에 출사한 이황의 문도들 중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스승 이황을 모욕하려 든 논적으로 규정한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 해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였는데,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또한 친구 성혼과의 인연으로 대곡 성운, 남명 조식 등도 찾아가 그들과도 사물과 이기론, 주자와 육구연 등을 담론하기도 했다.

(관료 생활과 개혁 활동[편집)])

관료 생활 초기[편집]... 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 다. 이때 이이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지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 서 몰아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였으나, 명종대의 외척인 좌의정 심 통원은 대왕대비의 친족이라는 이름으로 축출되지 않고 재상직에 있으면서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을 탄핵하였다. 인순 왕후는 곧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심통원은 삭탈관직 되어 쫓겨났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꾸준히 이황, 조식, 성혼, 정철 등과 서신을 주고 받으 며 학문을 연구하였다. 1568년(선조 1년) 천추사(千秋使)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뒤, 1569년 귀국 후,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곧 홍문관 부교리로 춘추관기사관에 겸임되었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그 해 음력 9월에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 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그 무렵에 가장 관 심 갖고 추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 어를 사용하며, 급선무로 해결해야 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 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이는 계속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 소로도 올리기도 하였다.

심의겸은 율곡 이이가 자신의 종조부 심통원 등을 공격하여 탄핵, 몰락시켰 음에도 이이에게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을 갖지 않고 계속해서 친하게 지 냈다. 심의겸은 이이를 인격적으로 신뢰하였다. 이이는 그런 심의겸의 인품 에 탄복하여 을해당론 이후에도 심의겸을 구원해주려 노력했고, 심의겸은 이 이를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하였다.

(동료들과의 갈등[편집]) ...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 문서를 참고

그는 허례와 허식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와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위선과 형식, 겉치레가 팽배한 사회에서 율곡의 이러한 사물의 본질에 입각한 정직한 자세는 통용되기 어려웠다.

율곡의 이러한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정직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 켜 당시 동료는 물론 선배와 원로대신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오국소인(誤國小 人)이라고까지 지탄을 받았다. 특히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 등은 율곡 을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

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은 이이의 스승 백인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도 있다. 한번은 이준경이 백인걸을 찾아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 " 하고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발언이 이이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이는 이준경을 상당히 부정적 으로 생각했고, 이준경 역시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였다. 그런데 이이의 재종 조부 이기는 그가 공격했던 동고 이준경과 정적관계이기도 했다. 일부에서 는 사사로운 원한관계로 그가 이준경을 싫어한다, 미워한다는 인신공격성 낭 설이 돌기도 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기중심의 설을 공박했고, 이황의 사단칠정인 이기호발설을 비판하여 기는 능동성이 있지만 이는 없기 때문에 사단뿐만 아니라 칠정도 기가 발동하고 리가 그것을 탐으로서 발생된다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했 다. 이는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생, 추종자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허엽과 김효 원, 송응개, 윤승훈, 허봉, 송응형 등은 이이를 줄기차게 비난하고, 공격하게 된다.

(인재 천거[편집]) 그러나 사심 없이 사물을 판단하려는 그의 자세는 선조를 매료시켰고, 선조 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자문하곤 했다. 젊은 나이에 왕의 자문역을 맡게 된 것을 부담스러워하여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계속 그를 불러들 였다.

사림의 천거로 친구 성혼이 중망에 오르자 선조는 율곡을 불러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라고 그에게 성혼의 사람됨을 물었다. 율곡과 우계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 어도 같이 죽자" 는 동심일체의 교우관계를 지닌 사이였다. 하지만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 실한 선비입니다." 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서까지 떠받드는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이 답 변 역시 일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냉혹한 평가다.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묻자, 율곡은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좀 나으나 수신과 학문의 힘씀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답변했다. 율곡다운 정직한 답변이었다.

어느 땐가 선조가 "경은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자, 율곡은 "전하 께서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니 학문에 힘쓰고 노력하면 현주(賢主)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답변했다. 이러한 질문에서 기대되는 답변은 임금을 즐 겁게 하는 과장된 평가일 것이다. 하지만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진실되게 대답했다. 또 선조가 율곡에게 어떠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가를 묻자, 율곡은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 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답변했다.

선조 임금은 우계와 더불어 당시 정승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던 사암 박순, 퇴계 이황, 그리고 스승 백인걸에 대해 인물평을 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 평을 요구 받은 율곡은 한마디로 "기고학황 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 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조광조의 문하생 중 수제자 요, 자신의 스승이자 노상 자신이 가까이 모신 어버이 같은 인물에 대해 보 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냉혹한 평가였다. 그러나 이는 동인에 의 해 이이의 인격을 걸고넘어지는 꼬투리로 작용하게 된다.

(붕당 조절 노력[편집])

(동서 분당 직전[편집]) ... 1570년(선조 3년) 관직을 사퇴하고 황해남도 해 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인 1571년 조정 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을 정하고 백성 들의 자치 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학문 연구를 위하여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의 율곡촌으로 돌아 와 학문에 힘썼다.

1572년 이준경이 병으로 임종하기 직전에 사림들이 당을 나누어서 싸울 것 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당쟁의 중심인물로 이이를 지목하였다. 화가 난 이이 는 이준경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이준경이 당쟁을 예견하 는 글을 쓰자 그는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악하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 러나 일부 사림 인사들은 그의 종조부 이기가 이준경과 원수였던 것과, 관료 생활 초반 그의 솔직함을 비판하고 예의 없는 인간으로 몰은 것에 대한 한 풀이로 해석하였다. 뒤늦게 을해당론으로 동인, 서인 분당이 확실해지자 그 때 당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였다.

한편 윤근수, 윤두수, 정철, 송익필 등이 그와 친해졌고 그는 자연스럽게 서 인으로 기울게 된다.

(정치 활동과 학문 연구[편집])

정치적 동지 송강 정철 ... 그러나 1573년(선조 6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 아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 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 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 선조는 이이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곧 병조참지에 임명 되었다가, 그해 음력 3월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병으로 사퇴하고 다시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촌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 에 전심하였다.

1574년(선조 7년)에는 또 조정의 요구로 황해도 감사로 약 반 년 간 재직하 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을 왕복하면서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 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42세 때인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 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에만 힘을 쓰다가 1580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정계에 진 출하였다. 이듬해 음력 9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를 저 술하였다. 5편으로 구성된 이이의 책을 받아본 선조는 “이 책은 참으로 필요 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 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 려울 뿐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만 9번이나 임명되었고, 선조의 신임은 계속 되 었다. 158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가 곧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대사헌으 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과 홍문관대제 학을 겸임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정쟁 조정 노력과 실패[편집])

율곡 이이 서한 ...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는 동인의 김효원, 서 인의 심의겸과 정철을 동시에 탄핵하여 양당의 강경파들을 일선에서 후퇴시 킴으로써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그가 일찍이 불교에 귀 의하여 승려가 된 것과, 그 승려가 되는 과정에서 서모(庶母) 권씨와 싸웠던 점을 집중 부각시켜 그를 공격하였다. 또한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첩을 거느 리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그가 첩을 두 명 거느린 점 역시 동인(東人)당의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동인들은 그의 재종조부 이기가 장리(탐관 오리)의 사위라서 관직에 제한을 받아야 했으나 이언적의 구제를 받고 출사 했는데도 명종 때 을사사화에 가담하였고, 말년에 권력을 농단하다가 삭탈관 직 당한 것까지 그에게 연결시켜서 공격하였다.

그는 당쟁의 조절과 정쟁 중단을 촉구하였지만, 붕당은 군자의 붕당과 소인 의 붕당이 존재한다고 봤고 서인을 군자의 붕당, 동인은 소인의 붕당으로 생 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쟁을 조절하는데 노력하였지만, 비교적 서인의 입 장에 서서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고, 이는 동인에게 늘 불평불만과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당쟁 조절을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한 정여립은 서 인에서 탈당하여 동인으로 건너간다.

(개혁 방안[편집])

율곡 이이가 말하는 변법경장(變法更張)은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제대로 돌 아가지 않음을 지적한 뒤 주장한 것으로서 다음 내용을 가지고 있다.

1. 문벌이나 출신보다는 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하자.

2. 평민을 포함하여 폭넓게 인재를 양성하자.

3. 중앙에서는 외척의 권력 집중화를 막고, 지방에서는 수령의 자질을 높이 며 이서(吏胥)들에게도 녹봉을 주어 민폐를 막아야 한다.

4. 붕당을 막기 위해서는 사림의 공론을 존중하고 사기를 높여야 한다.

5. 민생을 괴롭히는 방납을 시정해야 한다.

6. 왕실 사유재산을 억제하고 왕실의 경비를 줄여야 한다.

7. 군포에 대한 족징과 인징을 금지해야 한다.

8. 공노비의 선상(選上)을 개선하여 부담을 줄여야 한다.

9. 사창제를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해야 한다.

이는 율곡 이이가 당시 개혁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군제와 공직 개혁[편집])

또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된 그해 음력 2 월에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계진하였는데 내용은

첫째 어진 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봉사’(封事)를 선조에게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 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 한 공 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 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 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랏 일을 맡겨야 한다. 등이었다. 그리고 ‘찬집청’(纂 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각종 서적들의 편찬 사업을 주관해 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여 국가의 경제 문제의 해 결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그는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과하고 병력을 증강할 것을 주청하였다. 군사비용 발생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불필요한 관직자의 수효를 줄이고, 실직에 있지 아니한 자에게는 품계 역시 회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양반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쳐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서얼 허통론[편집]) ... 서얼 허통 문서를 참고

1583년(선조 16년)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병조판서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유언을 빌미삼아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이의 납속 허통 주장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언적의 서 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 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 응시 길을 열었다.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 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다.

서얼 허교 주장 역시 유학자들에 의해 태종 이방원의 유지를 거스르는 행위 라는 비난을 계속하였고, 동인에서는 그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불교에 입문했 던 점을 계속 들먹이며 그가 사회를 어지럽힐 생각으로 서얼의 허통을 주장 한다며 공세를 계속하였다.

그의 서얼 허통은 신분제를 문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동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같은 당인 서인들로부터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동인인 류성룡과 정구가 그의 서얼 허통 주장에 '인재를 가려 쓰 는 데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당색을 초월하여 동의하였다.

(십만 양병설[편집]) ... 십만 양병설 문서를 참고

또한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 다. 그는 일본의 춘추전국시대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을 통일할 무사는 일본 내 세력 내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미구에 명나라나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대 응으로 그는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 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서인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력과 허언이라며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 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 고 한다. 1581년 대제학 재직 중 오랫동안 저술하던 《경연일기》의 완성 을 보았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 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 에 올랐다.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 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십만양병설에 관한 의혹[편집])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십만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 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 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양병'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십만 양병'에 관련된 내 용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 양병설 대신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십만양병설에 관 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임의로 추가하였다고 한다.

(후학 양성[편집])

정여립은 일찍이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이의 다른 제자들은 정여립 을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을 통달하였으며, 의논이 과격하고 드 높아 바람처럼 발하였다."고 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이 역시 정여립의 재주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그의 과격성을 눈여겨보았고 때 로는 그를 경계하게 된다.

훗날 정여립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이의 문하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서인 당을 왜 찾아왔는지 까닭을 묻자, 정여립은 "저는 서인 당을 찾아온 것이 아 니라, 율곡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한때 정여립의 재주를 아껴 총애했다던 이이는 죽기 석 달 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관직(이조판서직)의 사퇴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리면서, "정여립 은 박학하고 재주는 있으나 의논이 과격하여 다듬어지지 못한 병폐가 있다" 고 지적하였을 정도였다. 이에 선조 임금도 "그런 사람을 어찌 쓸 수 있겠는 가? 사람을 쓸 때는 그 이름만 취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이와 선조가 정여립을 이처럼 평하고 배척하였던 데는 다른 사적인 문제 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이는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 었던 것 같다. 즉 그 때는 동인과 서인간의 대립이 점차 양극화되기 시작한 때였고, 선조는 이를 제대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이런 때에 재 주와 출세 의식,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정여립은 자칫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이와 선조는 경계했던 것이다. 정여립이 뛰어난 재질과 대 담한 용기를 가진 인물임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선조와 그 측신들은 정 여립이 이이를 배척했다는 이유로 그를 향리로 추방하고, 결국 반역의 굴레 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생애 후반[편집])

(정여립과의 갈등[편집])

정여립은 총명하고 논변을 잘하여 널리 이치를 탐구하는 데에만 힘썼으며, 특히 시경과 훈고, 물명(物名)에 정통한 것으로 자부하였다. 그는 이이의 문 하만이 아니라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이와 성혼도 정여립의 박 식, 총명함을 좋아하여 그를 조정에 적극 천거하기도 하였다. 1570년(선조 2 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한 정여립은 다시 스승인 이이의 문하에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이 문하에 드나드는 선비들이 오직 서인뿐이고 동인들은 전혀 보이지 않자, 이이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정여립 : 서인만이 이 나라 사대부입니까?

이이 : 동인들은 늘 반대만 하거든.

정여립 : 그래도 그렇지, 동인에도 반드시 인물이 있을 텐데 무조건 백안시 하는 건 좋지 않은데요.

이이 : 뭐야?

정여립 :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동인 서인 나뉘었다고 일부 선비들이 그들을 짐승으로 취급할 것 까지는 없잖습니까?

이이 :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나

이이는 동인들의 공격으로 동인들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한편 다시 찾은 스승 이이가 아직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리라 생각 했던 정여립은 실망하게 된다. 이미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는 이미 틈이 벌어 지기 시작하였고, 서인이 대부분인 이이의 다른 제자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정여립에 대한 이이의 불신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 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공격을 받게 되었고, 끝내 그 보복을 받았던 것이다.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 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 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 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 당이 많고 그 들이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은 이 미 이이가 죽기 전에 서인 당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여립이 이이 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이이를 참다운 성인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

(과로와 병세[편집])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갑자기 과로로 쓰러진 그는 관작을 사퇴하고 요양 하게 된다. 그러나 동인은 계속 그를 탄핵하고 공격하였다. 그는 서인의 영 수인 심의겸을 비판하였고, 정인홍의 심의겸 탄핵 상소에도 동조하였음에도 1583년(선조 17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거듭된 탄핵으로 스스로 사 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에 임명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결 국 당쟁을 조절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동인들에 대한 이이의 미움 과 원망, 인간적인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당쟁 조절 노력에 협조 하지 않는 같은 서인 당원들 일부에게도 인간적인 혐오감과 환멸감을 느끼 게 된다.

1583년 정여립은 예조좌랑이 되었는데, 이어서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 다. 이이는 당시 이조판서직에 있었으며, 아마도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간 파하였던지 그의 임명을 반대하였다. 이이는 자신의 문인이기도 했던 그의 과격성을 보고는 은근히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이이는 병세가 악화되어 결 국 관직 생활을 오래 계속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이가 죽은 두 달 후 정여립은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정여립은 수찬에 오른 뒤 이이를 비난하 고, 동인 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결국 정여립은 이이가 싫어했던 동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선조의 미움을 사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죽음[편집])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조절하 려고 노력하였음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동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 는 성혼, 류성룡, 정구, 우성전, 송익필, 조헌 등의 지기들에게 당쟁을 조절 하려다가 동인의 미움을 산 일을 한탄하며 통곡하였다.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지친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하던 구국의 뜻 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사퇴하고 와병하였다.

병석에 누운 동안에도 동인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그는 1584년(선조 19년) 음력 1월 16일 새벽에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에서 향년 49세를 일기 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재산은 서재에 가득한 책들과 부싯돌 몇 개였다.

문인으로는 조헌, 김장생 등이 있다. 이 중 김장생은 그의 친구인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는데, 송익필이 노비로 환천 되면서 학문 적 연원을 이이와 성혼에게서만 찾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한 탄하며 피난길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 사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동인과 동인의 분파인 북 인, 남인은 이이가 1년간의 입산 경력이 있음을 놓고, 불교와 관계했다 하여 온갖 트집을 잡아 비방을 하였다.

(사후[편집])

제자이자 학문적 계승자인 사계 김장생 서인 예학의 종조였다.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장사되었다. 증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부인 교하 노씨와 하녀 1인이 그의 묘소 주변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묘소를 지켰다. 왜 군이 노씨와 하녀를 겁탈하려 하자 이들은 자결로서 항거하였는데, 임진왜란 이 종결된 뒤 후대에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누가 부인 교하 노씨이고 누가 하녀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의 시신은 율곡 이이의 묘소 앞에 합장하였다. 부인과 하녀의 묘소가 이이의 묘소 앞에 소재한 것은 그 때 문이다.

1615년(광해군 7년)에 율곡의 애제자 김장생 등의 공의로 고향 파주에 그를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가 설립되었다. 문성사는 1649년(효종 즉위년) 효 종왕이 사액을 내려 자운서원(慈雲書院)이라 하였다.

1631년(인조 8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이이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이항복(李恒福)이 글을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 상용(金尙容)이 새겨 넣었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다시 기사환국으로 출향되었다 가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다시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가 죽은 후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으며, 강 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이이의 사상[편집])

(학문관) 그의 학문 즉 성리설의 특징은 논리적이다. 반면에 이황은 체험을 중시한 것이었다. 그는 학문에 대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고결한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 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헛된 공리공담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배인 서인은 그의 실용사상을 사장시키고 관념적이고 교조적으로 나 아가 당쟁을 격화시키게 된다.

(일도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퇴계의 사단칠정 설(四端七情說)로서 이기호발설을 배격하였다. 즉 이황의 설은 호발설이고 이이는 일도설이었다. 하지만 이황의 칠정설인 기발이승설만을 취한 것이다. 반면에 그의 사단설인 이발기수(理發氣隨)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그것은 이 황과 사단칠정설논쟁을 벌인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서경덕에 대해서도 기중심의 설로서 독창적이지만 문제가 있다며 비판한다. 그의 설은 기가 운동하고 이는 그 원인이 된다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 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 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 라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훗날 영남의 유직이 효종 원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이이의 설을 불교와 육왕(육구연과 왕수인)과 같은 주기설로서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이황이야말로 주리설로서 정학이라 는 사상에 근거하여 이이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 후 주리설은 정학이고 주기 설은 이단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상소로 인하여 유직은 조정으로부터 처벌받아 과거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이 역 시 기의 뿌리가 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주리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황과 이이 모두 기의 뿌리가 리라고 했기 때문에 모두 이일원론 또는 이기 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 (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향약과 규례[편집])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 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 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의 실시와 사창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 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 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 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정당관[편집])

그는 정당을 군자의 정당과 소인의 정당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이의 붕당 관은 기존의 성리학적 붕당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소인의 정당을 완전히 배척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군자의 정당을 상대적으로 많이 등용함으 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여성 교육관[편집])

그는 기존의 유교나 성리학의 남녀 차별에 반대하였다. 여성 역시 하나의 인 간이자 인격체로 간주하였고,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 인의예지 와 도덕적 소양을 가르쳐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집안의 여성 들에게 사서삼경을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또한 그는 어머니 신 사임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쳤던 외할 아버지 신명화의 영향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 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독서관[편집])

이이는 그의 저작 자경문(自警文)에서 독서에 대한 생각을 규정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 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 (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

또한 격몽요결의 4장에서 율곡은 독서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보존하여 사물의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치 를 따져보고(窮理), 선(善)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가 눈앞에 드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로 드러내는 데는 이 치를 따지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따지는 데는 독서보다 앞서 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현(聖賢) 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경계 해야 할 선과 악이 모두 책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독서를 세상, 사물의 이치와 진리를 깨우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해석하였다.

(학맥[편집])

이이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서, 친구인 성혼과 함께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성혼은 백인걸 외에도 성수침에게도 사사했는데, 백인걸과 성 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이들의 친구였던 노수신 역시 이연경의 문인으 로, 이연경 역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스승인 백인걸을 자주 찾았는데, 이이가 백인걸과 함 께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인물평을 논하면서 정암과 퇴계의 우열을 놓 고 평을 했는데, 이때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에게 조광조에 대해 타고난 성품 은 훌륭하였지만 학문이 성숙하지 못한 채 관직에 나가서 일을 그르쳤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하생이었다.

조광조는 다시 김종직의 문하생의 한 사람인 김굉필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들 중의 한명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 준길 등이 배출되었고, 이이와 성혼은 후일 서인의 종주로서 추앙되었다.

(평가[편집])

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은 이이의 가장 큰 제 자로 이이의 일대기인 ‘행장’을 지어 이이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김장생은 이 이를 추모한 율곡 행장에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 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 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로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였다.

율곡이 대학자이면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점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어렸을 때 문학,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은 한문 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 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 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 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 된다.

둘째, 퇴계 이황이라는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23세 때 도산서원으 로 직접 퇴계를 방문했고,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 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퇴계를 극구 만류했고, 퇴계가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 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퇴계와 율곡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 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율곡은 그런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 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 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선조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율곡이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 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 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하고 학문적 역량이 있었던 율곡이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 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율곡보다 서른다섯 살 위였던 퇴계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 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율곡을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십만 양 병설' 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 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인과 서인 양쪽으로부터 공격 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율곡은 항 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넷째, 학문적 지식이 있었던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 혼, 송익필, 정철 등 당대의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율곡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부정적 평가[편집]

이준경이 당쟁의 화를 예언했을 때, 그는 뒤에 후회하고 신념을 바꾸기는 했 으나 이준경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여 그에 대한 처벌 여론을 형성하게끔 유 도하기도 했다. 유성룡 등이 이준경을 옹호했는데 이는 후일 이인좌의 난 당 시 경상북도 지역이 집중적으로 호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당쟁의 조절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서인의 입장에서 조절하려 노력한 한계점이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그가 동인 인사들이 유배되도록 사주했다며 비판하 였다. 그에 의하면 “율곡은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았고 또 서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세 차례에 걸쳐 귀양 보낸 일에 손을 쓴 것은 경솔했다”며 “이 일로 조정이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 다.”고 비판했다.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이는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 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 역시 잘못이다. 그는 선조를 착한 개혁군주로 만들어 조선을 재건하려는 정치노선을 신봉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건강하 지 않은 인물에게 성인(聖人)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물 론 의지박약으로 큰 뜻을 세우지 못하는 왕에게 큰 뜻을 품으라고 설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조처럼 좋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기에 이이는 착하지만 세상일에 뜻이 없 는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결과 지나치게 왕에게 집착했 다.

(저서 및 작품[편집])

저서 《격몽요결》《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

《동호문답》(東湖問答)《소학집주》《만언봉사》《기자실기》

《경연일기》(經筵日記)《순언》(醇言)〈인심도심설〉김시습전〉

(작품[편집])《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동거계사(同居戒辭)》《학교모범(學敎模 範)》《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자경문》

. 송강(松江) 정철(鄭澈) ... 1536(중종 31)~ 1593(선조 26) 경기 강화.

조선 중기의 문신.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 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 유침(惟沉)이다.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된 누이를 보러 동궁(東宮) 에 자주 드나들어 명종(明宗)과 친했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명종 6)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양응정·임석천·김인후·송순·기대승 등 에게 수학하고, 이이·성혼·송익필 등과 교유했다.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했 다. 명종으로부터 사헌부 지평을 제수 받았으나 처남을 살해한 경양군(景陽 君)의 처벌문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하여 명종의 뜻을 거슬러 말직에 머무르다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어 곧 북관 어사가 되었으며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수찬·좌랑·종사관·교 리·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1571년 부친상을, 1574년 모친상을 당하고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일로부터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분쟁에서 서인의 편에 가담했다. 분쟁에 휘말려 고향인 전라도 창평에 내려와 있다가 1578년에 조정에 다시 나와 장악원정·직제학·승지 등을 지냈다. 진도군수 이 수(李銖)의 행뢰사건(行賂事件)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탄핵을 입어 고 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 서 〈관동별곡〉과 시조 16 수를 지었다. 1581년에 병조참지·대사성을 지내 다 노수신에의 비답(批答)이 논핵(論劾)에 가깝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으나 곧 전라도관찰사를 제수 받아 1582 년까지 1년간 역임했다. 도승지·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그곳 의 시폐(時幣)를 상소로 올렸다.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기주실의'(嗜酒失儀)하고 강편기극지인'(剛偏忌克之人)이라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가 올려지는 등 논 핵을 당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84년에 대사헌을 제수 받고 총마 (寵馬)를 하사 받아 총마어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1591년 이산해의 배후책동에 빠져 건저(建儲)를 하려 하다가 왕의 뜻을 거 스르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안 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가 빗발쳐 파직된 뒤에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 배 생활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석방논의를 해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관찰사가 되어 강 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주 근처 관동(寬洞)에 산소와 사당 이 있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 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 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 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 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조선시대 사림(士林)과 사색붕당(四色朋黨)

〔조선시대: 1335 – 1926년: 600년 사대부 위주의 사회체제〕

(조선 성리학의 이론 계보)

길재, 정몽주⇒ 김종직(1431-1492)문하, 사림 초기형성.(영남학파 형성) ⇒ 조광조(1482-1519) (기호학파 형성) ⇒ 이황, 이이로 가서 집대성.

이황: 1501~ 1570 이선기후(주리): 플라톤: 정신측면 강조 * 영남학파

물질(氣) 이데아(理) 이분법적 인식과 이(理)의 우위

명분과 실리 중에 명분(名分)에 중점 ... 정치적으로 동인 계열

이이: 1536~ 1584 이기일원론(주기): 아리스토텔레스 * 기호학파

관찰 대상(사물)에서 기와 이는 분리할 수 없는 것, 현상+본질의 관계

명분과 실리를 다 취하는 중용정신.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

... 정치적으로 서인 계열

서경덕: 기일원론: 유물론적 사관.

* 이황 이전의 정치싸움은 사화로 나타 남. 초당적 지지.

이황 이후의 정치싸움은 당쟁으로 나타남, 당파적 지지.

송시열의 심경석의 출간 후 사림 : 노론과 소론 분열

성리학 : 송학, 정주학, 이학, 도학 : 정주계의 이학 발달 : 조선 强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 : 육왕계의 심학 : 조선 弱

사림파 : 성종 시 훈구파(공신, 외척, 인척)에 대응한 개념.

김종직 : 영남학파, 문장, 경술 등 문예 중시

조광조 : 기호학파, 도학 비중

이황, 이이를 거쳐 크게 두 파로 갈라 짐.

(붕당정치의 참모습)

상호 견제, 대립하면서 상호 공존하는 것. 일당 독재를 방지하는 것.

(시기별 정국 주도권 지형)

선초 - 성종 : 150년: 부국강병(현실론), 공리주의

성종 - 명종 : 100년: 사림파 정계진출 및 사화에 의한 훈구파와의 각축

선조 - 250년 : 사람파 권력 완전 장악(선조에게는 외척이 없었음)

의리, 명분, 우주. 자연. 인간본성 탐구

순조 - 철종 년 간 60년 : 외척 세도정치기.

(당파의 분열 - I)

동인, 서인 분파 계기 : 선조 1575년 인사권을 둘러싼 심의겸(서인)과 김효 원의 암투(동인) 이이 사망 후 중도파가 동인에 가세 심의겸 탄핵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 서인 주도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 정철 탄핵 ............... 동인 주도

동인의 북인 남인 분파 계기 : 선조 때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북인(사형주장) 남인(유배 주장)으로 분열

남인(유성룡, 이성전)은 이황 문하 북인(이산해, 이발)은 조식 문하.

1602년 임란 시 화의 주장한 유성룡 탄핵 .......... 북인 주도

북인의 대북, 소북 분파 계기 : 선조 때 홍여순과 남이공 대립 소북과 대북 으로 분열

북인(이산해, 홍여순 노장 중심, 기자헌, 이이첨, 허균): 일본과 전쟁 불사.

광해군 옹위

소북(남이공, 김신국, 유영경, 박이서, 성준구): 인목대비파, 영창대군 지지

대북의 분파 계기 : 광해군 때

골북(이산해),

육북(홍여순) : 영창대군, 인목대비 폐모살제 지지, 중복(유몽인) : 페모살 제 반대

서인의 공서, 청서 분당 계기 : 인조 때

인조반정 주도, 친청, 주화론 주장 - 공서 : 낙당(김자점), 원당(원두표)

인조반정 관망, 배청, 주전론 주장 - 청서 : 산당(송시열, 김집, 송준길)

한당(김육, 신호)로 분열.

산당의 노론, 소론 분열 : 숙종 1680년 경신환국 때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

노론(노장파) 송시열 : 남인을 강력 탄압

소론(소장파) 한태동, 윤증

노론의 분열 : 영조 때

벽파 : 영조지지. 영조의 아들 죽임은 나라의 앞날을 위한 부득이한 조 치라 칭함(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침) 주로 노론 계

시파 : 장현세자 지지. 그의 죽음을 동정(시류에 영합). 남인, 소론, 일부 노론 계

(당파의 분열- II)

선조 ..... 동인과 서인, 그리고 남인 교대 집권

광해군 .... 대북파 집권

대북 : 즉위 후 왕위 계승과 관련한 반대파, 명분론과 대명 사대주의자 제거

소북 : 유영경 유배 후 사사, 인목대비 유폐, 영창대군 제거,

동복형 임해군 제거. 대북파 : 이이첨, 정인홍(정권 장악)

인조 ...... 인조반정으로 서인 집권

서인 : 1당 서인 2당 남인으로 참된 의미의 붕당정치 실현

인조반정의 주역 서인과 인조가 등용한 남인 세력으로 견제.

김자점, 김류, 이귀, 최명길, 이괄이 주역

광해군 시절 권력자(정인홍, 이이첨) 사형. 대북세력 200명 숙청.

서인은 대명 사대주의 노선 지향

효종 ....... 서인-산당계열 집권(송시열: 효종 현종 때 주도)

김자점 역모사건으로 친청 세력 제거.

현종 ....... 서인과 남인의 예론 정쟁

(1) 효종 승하 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조씨)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나?

서인 : 효종은 차남. 왕후(조씨) 장남 소현세자 상시 3년 상 전력 있으므 로 이번에는 1년 상 주장

남인 : 효종은 왕. 장남과 같으므로 3년 상 주장. ⇒ 서인주장이 채택 됨 (2) 효종의 비 인선왕후 사망 시

서인 : 효종이 차남이므로 9개월 상 주장

남인 : 효종이 왕이었고,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지만 중전을 지냈으니

1년설 주장 ⇒ 남인 주장 채택 => 이후 남인이 권력 장악.

숙종 ....... 환국정치로 사색 붕당

(정국 주도권 변천사)

(1) 1680 : 경신환국(노론이 정권 장악)

효종 때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이 숙종 초 정국 주도하자 이의 견제 필요를 느낀 숙종이 ‘허적의 유약 남용사건’을 게기로 노론이 남인 제거

(2) 1689 : 기사환국(남인이 정권 장악)

장희빈을 왕비로 그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남인은 지지하고,

노론 등 서인이 반대(송시열) 하자 남인이 송시열을 사사하고 주도권 쟁 탈

(3) 1694: 갑술환국(소론이 정권 장악)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식고 정실 민씨를 폐위한 것을 후회한다는 정보를 근거로 소론계가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하자 이를 남인이 숙종에 고변하자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을 제거해 버림 소론이 정권 장악

(4) 1701 : 무고의 옥(소론이 정권 장악)

민비가 죽자 장희빈이 민씨의 죽음을 무당굿 등을 하면서 기원한 것을 숙 종이 알게 되어 장희빈을 사사시킴 이를 반대한 소론계가 노론 4대신(김 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을 사사하고 소론이 정권 장악

영조 ....... 노론주도, 벽파주도

정조 ........ 시파주도

순조 ........ 벽파주도

순조, 헌종, 철종 ....... 외척 세도정치기

제15대 광해군(光海君) 혼(琿) 생졸 1575(선조 8)~ 1641(인조 19) (67세)

재위 1608. 2~ 1623. 3(15년 1개월)

부인 2명, 자녀 1남 1녀

문성군부인 박씨 질(폐세자)

숙의 윤씨 女

. 임진왜란 때 세자로서 난의 수습에 힘썼으며, 즉위 후에는 자주적·실리적 외 교로써 명·청 교체의 국제 정세에 대처했다. 또한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 기 위해 경기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 세력의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 왕위 계승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이다. 비 (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아들이 없 었으므로, 당시 조정에서는 공빈김씨 소생의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광패(狂悖)하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 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을 비롯한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올렸으 나, 선조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여 책봉이 지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서울을 떠나게 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 러 세자에 책봉되었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국사권섭(國 事權攝:임시로 나랏일을 맡아봄)의 권한을 받았다. 전쟁 동안 강원도·함경 도·전라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및 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난의 수습에 노력하고, 서울이 수복 된 뒤 설치된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했다.

1594년 조정에서 명나라에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청했으나, 큰 아들인 임해군이 있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1606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 왕후(仁穆王后) 김씨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붕당 간의 파쟁이 확대되었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 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大北)이 크게 대립했다. 1608년 병이 위독해진 선조가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등에게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즉위 후 곧 임해군을 교동(橋洞)에 유폐하고 유영경을 죽이는 한편,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여 초당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 자 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가 아들 백함(白緘), 사위 황보신(皇甫信)과 함께 순화군(順和君의 양아들 진릉군(晉陵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고 하여, 대북파가 100여 명의 소북파를 제거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13년 조령(鳥嶺)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이유로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 했다가 이듬해에 살해했다(→ 계축화옥). 이어 1615년 대북 파의 탄핵으로 능창군 전(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을 제 거하고, 1617년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 대북파가 폐모론을 건의하자 이듬 해 인목대비를 삭호(削號)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 전란의 복구

정권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과는 달리 전란복구 작업에 과감한 조치를 취했 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수취제도의 모순이 심해지자, 재정확보 및 신정(新 政)의 면모 쇄신을 위해 먼저 기존의 공납제의 폐단을 조정하고자 했다. 1608년 5월에 호조참판 한백겸(韓百謙)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시행 안 을 받아들여 우선 경기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할 것을 명하고, 이원익으로 하여금 시행사목을 작성케 했다. 이리하여 선혜법(善惠法)으로 명명된 경기 도의 새로운 대공수미제도, 즉 대동법(大同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대동법 의 시행에 대해 조정의 대신들과 방납(防納)하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반발함 에 따라, 경기 주변민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의 확대 시행은 저지되 었다.

다만 재위 말기에 충청도·전라도 연해읍에 대해 공물(貢物)을 포(布)로 바꾸 어 상납케 하는 임시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또한 수세(收稅) 및 역(役)의 공 평을 위해 호패법(號牌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원확보에 노력했다. 한 편 선조 말에 시작한 창덕궁(昌德宮) 재건공사를 1608년에 끝내고, 이어서 경덕궁(慶德宮)·인덕궁(仁德宮)·자수궁(慈壽宮)을 중건하여 파괴된 수도를 복 구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 전쟁으로 없어진 여러 서적을 다시 간행하고, 무주 적상산성(赤裳山 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 외교정책

그의 재위기간 중 특히 주목해야 할 업적은 당시 명·청 교체기의 국제적 변 동 속 에서 명분보다는 실리적이고 자주적인 외교를 추진해갔던 점이다. 그 는 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강성해지자 국방대비책으로 대포를 주 조하고, 평안감사 박엽(朴燁), 만포첨사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한편으로 명나라가 후금 정벌을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1618년에 강홍립(姜 弘立)·김경서(金景瑞)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도 형세 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고 명령했다. 명군이 패하자, 강홍립은 부차(富 車) 전투에서 후금에게 투항한 뒤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하여 후금의 침략 을 모면하게 되었다. 이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명분에 치우치지 않은 채 실리를 택한 뛰어난 외교정책이었다. 또한 1609년 일본과 을유약조(己酉約 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다.

. 폐위 및 평가

그는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유(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 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悰)을 받들어 반정을 일으킴에 따라 폐위, 광해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제주도 등에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재위기간 중 영 창대군 등의 형제를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등 패륜의 임금으로 간주 되기도 한다. 그러나 광해군 재위 15년간의 대북정권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 를 복구하고 재정기반의 재건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 하고, 후금과도 탄력 있는 외교관계를 추구하여 내치와 외교 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 59번지에 군부인 유씨와 함께 쌍분이다. 유배기간 : 18년

.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폐비 유씨(文河柳氏) 생졸 1576년 ~ 1623년(47세)

판윤(判尹) 유자신(柳自新)의 딸로,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정원 군의 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인조반정) 유씨도 남 편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 해 6월 아들 질과 며느 리 박씨가 탈출기도 실패 후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결국 같은 해 10월 31일(음력 10월 8일) 폐위된 지 7개월여 만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 김직재(金直哉)의 옥 ...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 해서 꾸민 그 첫 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 " 이다. 이 사 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 립을 체포하며 시작되었다. 신율은 그를 체포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 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 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인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 라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 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의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 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 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 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정언, 정호 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 려고 했다고 허위 자백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한 명이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 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들은 모두 숙청되었 다. 이 옥사로 인하여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였으며, 김 제와 유 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 계축옥사(癸丑獄事) ...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대북은 영창대군 (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를 꾀하였다는 이유로 소북의 영수(領首) 류영경 (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대북은 또 계속해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그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 사건이 계축옥사(癸丑獄事)이다.

1613년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이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범인 일당 은 모두 서얼(庶孼) 출신들로, 자신들을 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컫는 무리였 다. 그들은 적서의 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 을 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적질 등 악행을 일삼던 중 그런 사건을 일으 킨 것이었다.

대북은 그들에게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허위자백 을 시켰고, 결국 그들로부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한, 사건을 취조하는 동안 김제남과 인목왕후 부녀가 의인왕후(懿仁王后) 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 사(賜死)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 화도에 유배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 었다. 이 사건이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옥사라고 한 다.

. 신경희(申景禧)의 옥 ... 신경희(申景禧)는 1561(명종 16) ∼ 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신경희의 옥사로 사형 당했다. 신집의 아들이자 신립의 조카이며, 신경진, 신경인의 사촌 형이다. 해공 신익희에게는 12대 방조가 된다. 본관은 평산.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1615년(광해군 7) 정원 군의 차남 능창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 던 중 장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신원, 복권되었다.

. 허균(許筠) ... 1569(선조 2)~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학자· 문인· 정치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 叟).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 그리고 누이인 허난설헌(許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 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 원 사관(史官)으로 벼슬 길에 오른 후 삼척부사·공주목사 등 관직을 제수 받 았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 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 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 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 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부 부고 惺所覆藁〉 등 일부만이 남아 전한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 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 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문인으로서 그는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 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 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 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등은 그 가 지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서는 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남다른 삶의 모습과 사상을 기술했다.

. 홍길동전(洪吉童傳) ...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이며 정치가이며 문신인 허균 (許筠:1569~1618)이 지은 국문소설로, 경판본 3종, 완판본 1종, 사본 〈김 길동전〉이 있다. 조선 인조 때를 배경으로 적서차별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면서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홍판서의 몸종 춘섬의 몸에서 태어난 길동은 서자라는 이유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자 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온갖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 이를 견디다 못한 길동 은 집을 나가 산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되고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면서 전국 을 누비고 다닌다. 조정에서는 그가 저지르는 폐단을 견디다 못해 그를 잡으 려 하지만 끝내 잡지 못하고, 그의 소원대로 병조판서의 직책을 내린다. 그 러나 길동은 즉시 그 자리를 버리고 해외로 나가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를 건설한다. 거기서 왕이 된 길동은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정치를 실현 하다가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이 작품은 이식(李植)의〈택당잡저 澤堂雜著〉를 바탕으로 해서 허균이 지은 것으로 믿어왔으나 근래에 와서 작자와 국문 원작설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제기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허균의 국문 원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허균의 작품으로 볼 경우에도 현재 전하는 작품이 그의 원작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홍 길동전〉에는 현재 30종 가까운 국문본과 후대의 번역으로 보이는 한문본이 하나 있다. 이들 이본들의 내용은 부분적으로는 약간씩의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다. 〈홍길동전〉은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이며, 고소설 가운데 작자를 알 수 있는 극소수의 작품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소설의 발생과 작자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 작품은 당대 의 사회현실을 절실하게 반영하면서 탐관오리를 힘으로 응징하고, 억압받는 서민들의 한을 대변함으로써 서민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 허준(許浚) ... 1546(명종 1) 서울~ 1615(광해군 7)

선조·광해군 때의 명 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 巖). 허준은 1546년(명종 1)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 사를 지냈고 아버지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 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 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 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 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내의원 생활)

허준이 내의원 취재에 등과한 것은 1574년(선조 7) 그의 나이 29세 때로 상 당히 늦은 나이에 궁중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 해부터 어의로 선임되어 안광익(安光翼)과 더불어 임금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1578년 9월 내의 원 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 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587년에는 임금의 건 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는데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안덕수(安德秀) 등과 더불어 녹피(鹿皮) 1영(令) 을 하사받았다. 1590년에는 허준이 왕자를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 대부 이상을 말함)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그러자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에서 일제히 나서서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가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 리쳤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 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5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의관 인 허준 등으로부터 침 치료를 받는데 약방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 조 오억령 등이 입시했다. 1596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허준 은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직(陞職)되었다. 이에 허준은 그 벼슬이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즉시 간원들이 나서서 의관들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 지 않았다. 같은 해에 선조가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고 일렀다. 허준이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 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 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 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지사:정2 품)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금이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발급하여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李延祿)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 었다. 1606년에는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보국숭록대부로 승급했다. 이것은 벼슬로서는 최고의 품계인 만큼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수십 차례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선조도 결국 허준의 가자를 보류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 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 는 일로 논의가 복잡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 고 막아섰다. 1608년에 마침내 선조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히 사망했다. 선조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가만 있 을 리 없었다. 광해군 즉위 초부터 연일 계속되는 계청에 허준을 보호하던 광해군도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허준의 직책을 좌면하고 거처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허준에게 내린 벌을 해제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동의보감 東醫寶鑑〉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 마침내 완성했다. 이후 어의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그 의 사후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승록대부를 추증했다.

추존왕 원종(元宗) ... 정원군(定遠君)

생졸 1580(선조 13)~ 1619(인조 27) (40세)

원종은 1580년(선조 13) 6월 22일 경복궁 별전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 11세에 가례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남다르고 태도가 신중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올라 험난한 시기를 겪고 1595년(선조 28) 겨울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608년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부터 7년 후 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원종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 후 원종은 몸져누워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종은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2월에 양주군 곡촌리에 장사지냈는데, 그로부터 3년 뒤 큰 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대원군에 봉해졌으며,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1626년(인조 4) 1월 14일에는 경희궁 회상전에서 원종의 부인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같은 해 5월 18일 김포 성산의 언덕에 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흥경원을 이곳 성산으로 천장하여 쌍릉을 조영하면서 원호를 흥경원이라 합칭하게 되었다. 1632년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다시 원종으로 추존하였다.

능호(陵號)는 장릉(章陵)으로, 경기도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 산141-1번지에 인헌왕후와 함께 쌍릉(雙陵)이다.

.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綾城具氏) ... 1578(선조 11)~1626(인조 4).(49세)

조선 원종(元宗:추존)의 비이며, 인조의 어머니이다.

능성구씨(綾城具氏) 좌찬성 구사맹(具思孟)딸로, 1590년(선조 23)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과 결혼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으로 책봉되었다. 1619년 정원군이 죽은 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으로 올려 책봉되고 궁의 칭호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했다. 1632년(인조 10) 이조판서 이귀(李貴)의 청으로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인조, 능원대군(綾原大君), 능창대군(綾昌大君)을 낳았다. 능은 육경원(毓慶園)이라 했다가 원종을 이장한 후 합하여 흥경원(興慶園)이라 했고 추숭(追崇)한 이후에 장릉(章陵)이라 했다.

능호(陵號)는 장릉(章陵)으로, 경기도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 산141-1번지에 추존왕 원종과 함께 쌍릉(雙陵)이다.

제16대 인조(仁祖) 종(倧) ... 능양군(綾陽君)

생졸 1595(선조 28)~ 1649(인조 27) (55세)

재위 1623. 3~ 1649. 5(26년 2개월)

부인 3명, 자녀 6남 1녀

인렬왕후 한씨 소현세자, 봉림대군(제17대 효종 孝宗), 인평대군, 용성대군

장렬왕후 조씨 자식 없음

귀인 조씨(폐출) 숭선군, 악성군, 효명옹주

. 인조반정(서인이 주도)으로 왕위에 올라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실시 하는 가운데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었다. 재위기간 동안 5군영(五軍營)의 기초가 마련되고 양전(量田)·대동법 등이 시행되었으며, 각 학파·정파 간의 국가 질서 재건을 위한 이념적 모색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이름은 종(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 반정과 즉위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 어머니는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 후(仁烈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 (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 군(綾陽君)에 봉해졌다. 1623년 서인 김유(金瑬)·이귀(李貴)·이괄(李适)·최명 길(崔鳴吉) 등이 일으킨 정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 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을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박해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한 반인륜적 인 행위와 후금(後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로, 반정은 이러한 광해군 의 폭정을 중단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인 것으로 합리화되었다.

따라서 광해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광해군대 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 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 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 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士林)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鄭曄)·오윤겸(吳允謙)·이정구(李廷龜)·김상 헌(金尙憲)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이수광(李睟光) 등 이 그들이었다.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奇自獻)·유몽인(柳夢寅) 등 의 역모가 있었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 는 황현(黃玹)·이유림(李有林) 등의 역모가 있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 신이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 다(→ 색인 : 이괄의 난).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都監大將) 이수일(李守一)이 내 응(內應)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 가받고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 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인조는 이러한 반 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 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년(광해군 15) 이서(李曙)·이귀(李貴)·김유(金瑬)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 君) 종(倧)을 왕으로 세운 정변.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들이 1623년 3월 12일 무력으로 궁을 점령하고,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 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인조)을 왕위에 추대했다. 당시 광해군은 반정 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에야 이 사실을 알고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숨었으나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 보내졌다.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

다. 내정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 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 하기 위해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 (永昌大君)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 宮:西宮)에 유폐(幽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 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 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세력들이 그러한 사류(士類)들의 불만을 이 용하여 정변을 계획했다.

.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 후(具仁垕)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攽)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 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 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 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 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 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

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 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 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 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 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 臣)으로 책봉되었다.

.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광해조 대북정권 몰락의 원인을 정책의 패륜성에서도 찾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당시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의견을 무시함으로써 야기된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인정권은 북인을 도태시키면서도, 남인 이

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명분상 하자가 없는 남인을 크게 등용함으로써 반대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친명배금정책과 호란

인조정권은 광해군 때의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반인륜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했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색인 : 정묘호란).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인조 정권은 이를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斥和派)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主和派)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즉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金集)·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姜嬪)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국방정책과 경제정책

.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扈衛廳)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 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御營軍)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京畿軍)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摠戎軍)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號牌廳)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守禦廳)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 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供物)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 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三南)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稅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減下)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永定法)과 군역의 세납화(稅納化)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 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北關)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慶源開市), 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中江開市)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유왕일수(留往日數), 매매총수(買賣總數)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능호(陵號)는 장릉(長陵)으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번지에 인열왕후와 합장 형태이다.

인렬왕후(仁烈王后) 한씨(淸州韓氏) ... 1594년~ 1636년(43세)

인조의 정비(正妃)로, 소현세자와 제17대 왕 효종의 모후이다. 시호는 정유명덕정순인렬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이며,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의 넷째 딸로,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 제17대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4남을 낳았다.

선조가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한 유교7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며 홍문관 부제학,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넷째 딸이다. 1594년 8월 16일(음력 7월 1일), 원주읍내 우소에서 탄생하였으며, 1610년에 17세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능양군(綾陽君)과 가례를 올리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해졌다. 이후 1623년 4월 11일,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636년 1월 12일(1635년 음력 12월 5일), 용성대군을 낳았으나 곧 숨졌고, 나흘 뒤인 1636년 1월 16일(1635년 음력 12월 9일) 왕후 자신도 산후증으로 창경궁 여휘당(麗輝堂)에서 향년 4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여 인열(仁烈)의 시호를 받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의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 하여 바꾼 것이다. 전호는 숙녕(肅寧), 능호는 장릉(長陵)이다. 후일 정유(正裕)의 휘호를 받았으며, 아들인 효종이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를 더 추상하였다.

인조는 왕후의 장릉(長陵)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으며, 인조 승하 후에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냈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묘 주위에 뱀과 전갈이 살기 시작하자 영조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하였다.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楊州趙氏) ...1624(인조 2)~1688(숙종 14) (65세)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계비(繼妃).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조창원(趙昌遠)이며, 어머니는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의 딸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1638년(인조 16)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고, 1651년(효종 2) 자의(慈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었는데 그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당시 집권파인 서인(西人)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과, 남인(南人)이 주장한 3년설이 서로 대립하여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고, 결국 송시열(宋時烈)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복이 채택되어 서인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그 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 장씨(仁宣大妃 張氏)가 죽자 그의 복상문제가 또다시 일어나, 서인은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고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여 당쟁이 일어났으나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정권이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능호(陵號)는 휘릉(徽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東九陵)내에 단릉(單陵) 형태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 ... 1612(광해군 4)~ 1645(인조 23) (34세)

인조의 맏아들.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빈(嬪)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이다. 1625년(인조 3) 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주에 내려가 남도(南道)의 민심을 수습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뒤에 효종)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선양[瀋陽]에 갔다. 그는 9년간 선양에 머무르는 동안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양국 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1644년 9월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J. 아담 샬(일명 湯若望)에게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 등을 가지고 왔다. 1645년 2월 18일 서울로 돌아왔으나, 조정은 서인들이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세자의 태도에 부정적이었고, 인조도 세자의 선양에서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또한 세자빈과 관계가 좋지 않던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이 여러 가지로 세자를 모함했다. 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急死)하자 세자빈과 여러 대신들이 사인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서둘러 입관을 마쳤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세자빈은 역모를 꾸몄다 하여 그의 가족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했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 1622(광해군 14)~ 1658(효종 9).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셋째 아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 1630년(인조 8) 인평대군(麟坪大君)으로 봉해졌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扈從)했다. 먼저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 두 형을 이어 1640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다음해 귀국했다. 그 뒤 1650년부터 4차례 사은사(謝恩使)로 청에 다녀왔다. 시·서에 뛰어나 볼모로 있을 때 울분에 찬 시나 윤선도(尹善道) 등과 주고받은 시 등이 전한다. 글씨·그림에도 뛰어나 청의 화가 맹영광(孟永光)과 가깝게 지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작품으로 〈산수도〉· 〈노승하관도 老僧遐觀圖〉·〈고백도 古栢圖〉 등이 있다. 저서로는 〈송계집〉·〈연행록 燕行錄〉·〈산행록〉 등이 있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이괄(李适)의 난 ... 1624년(인조 2) 이괄이 일으킨 반란.

임진왜란 때 붕당간의 본격적인 쟁권(爭權)은 가장 주전론적 입장에 섰던 북인들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이들은 다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이후 광해군대에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북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며,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서인계열의 사림세력들은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대북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1623년(광해군 15) 서인계의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은 반정을 위해 사모군(私募軍)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그런데 총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유(金瑬)가 사전 계획 누설을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이괄은 이를 비난했다. 따라서 반정에 성공한 후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인조 즉위 후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功西派)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갈려졌고, 공신들의 사적 군사력이 그대로 유지되자 '훈신군관'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소북 인사의 처형과 반역음모 적발에 힘을 기울였고,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비 서인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후금(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 괄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영변으로 출진했다. 그런데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에 기자헌·현집 등을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 했다. 이에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역시 서울로 잡혀가는 한명련을 구해내어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 자산(慈山)-상원(祥原)-평산(平山)-개성의 진격로를 택했다. 이괄군은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정충신과 남이흥(南以興)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平山)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하여 마탄(馬灘:예성강 상류)에서 또 관군을 대파했다. 이괄군이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 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 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여 새 로운 행정체제를 세웠다.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都民)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길마재[鞍峴]에서 진을 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했다. 2월 11일 이괄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水口門:지금의 광희문)을 나와 광주(廣州)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이후 이괄·한명련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 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 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인조 5)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약 2개월간 지속되었던 후금과 조선 사이의 전쟁.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표방하던 조선에 후금(後金:淸)이 3만 명의 대군을 파견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으며,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함에 따라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가 '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명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 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권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 쪽 후금 군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 따라서 조선과 후금의 충돌은 예상되는 것이었다. 또한 후금은 명과의 교전(交戰) 때문에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야기된 심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잔당이 조선의 병력이 약하고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이라며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것 등을 구실로 1627년 1월 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평양을 거쳐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했는데,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講和)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國)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 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조약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비록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 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이후 조선은 친명 배금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에 주력하여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의 증액 등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1632년에는 ' 형제의 맹'에서 '군신(君臣)의 의(義)'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 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태종의 존호(尊號)를 알리고 신사(臣事)를 강조했다. 조선이 청과의 싸움을 결정한 후 같은 해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병조호란(丙子胡亂)

. 청 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 태종은 명나라가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을 못하게 하기 위해 별군(別軍)으로 랴오허[遼河] 방면을 지키게 하고, 12월 2일에 만주족·몽골족·한인(漢人)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때 청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 침략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했다.

.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 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만 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만 4,000여 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 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감에 따라,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 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청태종은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청의 진영에 보냈는데,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 그 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항복과 강화) :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椵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전후의 대청관계) :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 가 심각했다(→ 속환문제).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 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북벌론

임경업(林慶業) ... 1594(선조 27)~ 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무신.

친명반청(親明反淸)에 투철한 무장으로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활약했으며,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도 명나라와 협력하여 청을 공격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판서 정(整)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황(葟)이다.

1618년(광해군 10) 아우 사업(嗣業)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다. 1620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을 지내고, 1622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정충신(鄭忠信) 밑에서 세운 공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뒤 우림위장(羽林衛將)·방답첨사(防踏僉使)·낙안군수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의 좌영장으로 출전, 강화도로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뒤여서 후금군과의 전투는 없었다. 이듬해 체찰부 별장, 1629년 용양위부호군, 1631년 검산산성방어사· 정주목사 등을 거쳐,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안변부사에 기용되어 백마산성(白馬山城)·의주성(義州城)을 수축했다. 같은 해 명나라의 공유덕(孔有德)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군과 합세하려 하자, 명군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명나라의 왕으로부터 총병(摠兵) 벼슬을 받았다. 1634년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중국무역과 둔전(屯田) 개설의 공로로 이듬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무역거래에서 폭리를 취했다는 탄핵으로 한때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하여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松鶻山)·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경경비를 강화했다.

.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군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청군이 우회하여 남하했으므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인조로부터 굴욕적인 강화를 받아내고 돌아가던 일부 청군을 쳐서 무찔렀다. 1637년 청나라가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병력을 요청하자 수군장(水軍將)으로 출전했으나,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을 기회를 노리던 그는 명의 심세괴(沈世魁)에게 연락하여 몰래 명군을 도왔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40년 다시 청나라의 요청으로 주사상장(舟師上將)으로 발탁되어 금주위(錦州衛)의 명군을 공격했지만 이때도 마찬가지로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 명군과 연락을 취하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1641년 서울로 돌아왔으나, 그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있던 청의 압력으로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곧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복귀했다. 그러나 1642년 명장(明將) 홍승주(洪承疇)가 청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명과의 관계가 발각됨에 따라 체포되었다. 청나라로 압송되던 도중에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가 1643년 명나라에 망명했다. 그 뒤 명나라 장군 마등고(馬騰高)와 함께 석성(石城)에서 청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마등고가 곧 항복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탈출을 기도하다가 그의 부하였던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잡혀 1645년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무렵 조선에서 심기원(沈器遠)의 옥사가 일어나 그의 관련설이 대두되자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역모사실을 부인했으나,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가 강력히 처벌을 주장, 심문을 받던 중 형리(刑吏)에게 장살(杖殺)되었다. 사후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임경업전 林慶業傳〉을 비롯하여 많은 소설·설화가 전해지고,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되었다. 충주 충렬사(忠烈祠), 선천 충민사(忠愍祠)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삼학사(三學士)

.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和議)를 반대하고 척화(斥和)를 주장 한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이르는 말.

척화삼학사, 병자삼학사라고도 한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後金:뒤의 청)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으나, 후금은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兵船)을 요구했고,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고치고 세폐(歲幣)를 늘일 것을 요구했다. 또한 후금은 내몽골을 평정하는 등 세력이 날로 커지자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을 보내어 조선을 속국시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최명길(崔鳴吉)과 같은 주화론자(主和論者)도 있었지만 조선의 분위기는 척화로 기울 어져갔고, 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은 소를 올려 청나라 사신들을 죽여 모독을 씻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 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오달제와 윤집은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섰고, 홍익한은 1637년 2월초 평양에서 회군하는 청군에 잡혀 선양[瀋陽]에 끌려 갔다. 이들은 청나라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척화의 대의를 끝까지 밝히다가 모두 선양 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 윤집에게는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모두를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1671년(현종 12)에는 송시열(宋時烈)이 3학사의 행적과 언론을 기록한 〈삼학사전〉을 지었다.

삼전도(三田渡) ... [정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

[내용]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과 부리도(浮里島, 또는 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삼전도는 1439년(세종 21) 신설되었는데 이는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나루터 중 하나였다.

. 삼전도는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고, 영남로(嶺南路)를 지나는 사람 중에서 특히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주로 사람과 말이 건너던 곳이었고 우마(牛馬)의 집결지였으며, 판교(板橋)와 연결되는 상업도로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 처음은 도승(渡丞)이 한명 배치되었으나 뒤에 별장(別將)으로 고쳤으며 어영청(御營廳)의 관할이었다. 한말에 이르러 도진회사(渡津會社)가 설립되어 관할하게 되었다. 이에 속하였던 선박은 최고 여섯 척까지 운영되었으나 보통 세 척의 관선(官船)이 배치되었으며, 도진회사가 관할할 때는 두 척으로 감소하였다.

. 이 지역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함락으로 인조가 청군(淸軍)에게 항복을 한 곳으로, 청나라의 전승비(戰勝碑)인 삼전도비(三田渡碑, 사적 제101호)가 있다. 또한, 이곳은 강물이 많아서 1950년대 말경까지는 나룻배가 다녔으나 지금은 잠실교가 놓여지고, 주변의 농촌경관이 주거지화 되면서 나루터로서의, 상업도로의 요충지로서의 기능은 완전 상실되었고 현재는 주거지와 시가지로 되었다.

제17대 효종(孝宗) 호(淏) ... 봉림대군(鳳林大君)

생졸 1619(광해군 11)~ 1659(효종 10) (41세)

재위 1649. 5~ 1659. 5(10년)

부인 2명, 자녀 1남 7녀

인선왕후 장씨 현종(제18대 顯宗 이름 연(棩)

숙신공주, 숙안공주, 숙명공주, 숙휘공주, 숙정공주, 숙경공 주

안빈 이씨 숙녕공주

.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군비를 강화했으며, 임진왜과 병자호란 이후 붕괴위기에 처한 경제의 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

즉위

.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비(妃)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왕족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꾀했으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인조가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및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강경 주전론자(主戰論者)들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선양[瀋陽]에 8년 동안 머물렀다.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했던 소현세자가 그해 4월 갑자기 죽자 5월에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당시 대다수의 중신들은 원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국유장군론(國有長君論)을 내세운 인조의 강한 의지에 따라 윤6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5월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북벌계획

.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효종은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親淸派)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계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것은 군부국(君父國)인 명에 대한 신자국(臣子國)의 당연한 의무라는 복수설치(復讐설恥)의 논리로 효종의 북벌을 이념적으로 지원했다. 아울러 이러한 북벌론은 양란 이후 체제붕괴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층의 내실자강책(內實自强策), 즉 '국가재조'(國家再造)라고 하는 대내적인 지배안정책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김자점 등의 친청세력이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일련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알려 청의 간섭을 유도함에 따라 즉위 초기에는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 1651년(효종 2)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의 죽음은 북벌계획을 추진시켜나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그해 12월에는 조귀인옥사(趙貴人獄事)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군비강화가 추진되기 시작했는데 효종은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등 무신을 특채하여 군사양성의 실제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군인사정책은 이전에 훈신·종척(宗戚) 등을 임명하던 예와는 다른 파격적인 것으로 효종의 북벌 군사강화책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御營廳)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했으며, 금군(禁軍)의 기병으로의 전환, 모든 금군의 내삼청(內三廳) 통합, 수어청(守御廳)의 재강화 등 제반 군제개혁을 통해 군사강화책을 모색했다. 이와 함께 금군의 군액을 1,000,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시키고자 했다. 어영군은 많은 군사를 확보하고 3명의 보인제(保人制)를 통하여 재정적인 난점을 극복함으로써 군사 증강에 성공했으나, 훈련도감은 재정이 뒷받침 되지 못하여 실패했다.

. 한편 1654년 3월 유명무실했던 영장제(營將制)를 강화,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의 약화를 시정하는 한편,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1655년에는 능마아청(能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며, 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의 제작,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 제작 등 무기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비강화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은데다가 효종도 일찍 죽어 북벌을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으며 다만 청의 요청에 따른 2차례의 나선(羅禪 : 러시아) 정벌에서 군비 강화의 성과가 나타났다.

사회경제정책

. 효종은 경제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진전(陳田)이 증가하고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한편, 농민들은 파산하여 유리(流離)하는 등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질서·사회질서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었다. 효종은 이러한 위기를 부세제도의 개혁, 농업생산력의 증대, 사회윤리의 강화로 극복하려고 했다. 우선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지역을 확대해 1652년에는 충청도, 1653년에는 전라도 산군(山郡) 지역,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전세(田稅)도 1결(結)당 4두(斗)로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한편 1655년에는 신속(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간행·보급하여 농업생산에 이용하도록 했다. 한때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전의 유통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유통시키도록 했다. 1656년에는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 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경민편警民編〉을 간행· 보급하여 전란으로 흐트러진 사회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 문화면에서는 1653년 역법(曆法)을 개정,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간행했으며, 1657년에는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했다. 죽은 뒤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의 존호(尊號)가 올려지고 묘호(廟號)를 효종이라 했다.

능호(陵號)는 영릉(寧陵)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번지에 있으며, 인선왕후와 함께 쌍릉(雙陵) 형태이다.

인선왕우(仁宣王后) 장씨(德水張氏) ... 1618(광해군 10)~ 1674(현종 15).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정비. 현종의 어머니이다. 덕수장씨(德水張氏)로 아버지는 우의정(右議政) 장유(張維)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부인으로 간택되었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갈 때 같이 가 8년간 머물렀다. 처음에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책봉되었다가, 1645년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자 세자 빈으로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1662년(현종 2)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았다. 그녀가 죽은 뒤 시어머니인 인조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예송(禮訟)이 일어나,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는 송시열(宋時烈)과 대공복(大功服)을 주장하는 윤휴(尹鑴) 간의 대립으로 당쟁이 크게 격화되었다. 많은 한글편지를 남겼으며 특히 5명의 공주에게 보낸 궁체로 씌어진 〈언간 諺簡〉이 유명하다. 휘호는 경렬명헌(敬烈明獻)이다.

제18대 현종(顯宗) 연(棩) ... 생졸 1641(인조 19)~ 1674(현종 15) (34세)

재위 1659. 5~ 1674. 8(15년 3개월)

부인 1명, 자녀 1남 3녀

명성왕후 김씨 숙종(제19대 肅宗),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 이름은 연(棩). 자는 경직(景直). 효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이 볼모가 되어 선양[瀋陽]에 끌려가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태어났다. 현종은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한 후 왕세자로 진봉(進封)되고 1659년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를 놓고 예송(禮訟)이 일어났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맏아들에 대한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효종의 상에는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 색인 : 기해예송). 서인 측에서는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축이 되어 왕가(王家)의 예도 원칙적으로 사서인(士庶人)의 예와 다를 바 없다는 입장에서 기년복(朞年服:만1년복)을 주장한 반면, 남인 측에서는 윤휴(尹鑴)·허목(許穆)을 중심으로 출생순서보다는 대통의 계승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입장에서 효종을 적장자로 간주하여 3년상을 주장했다. 결국 정태화(鄭太和)가 국제기년복(國制朞年服)을 건의하고 현종이 이를 지지함으로써 1차 예송에서는 서인들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1674년 왕대비가 죽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둘러싸고 다시 예송이 일어났다. 당초 예조에서는 국제에 의거하여 기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大功服:9개월 복)으로 수정했다. 이에 남인은 대공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기년복을 주장했다. 이때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복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색인 : 갑인예송).

현종은 재위 기간 중 양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왕조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선왕인 효종이 추진해오던 명분론적 북벌은 중단했으나 군비강화에 힘써 1665년 통제영(統制營)에서 불랑기(佛狼機) 50정, 정찰자포 200문을 만들어 강화도에 배치했으며, 1669년에는 어영병제(御營兵制)에 의한 훈련별대(訓練別隊)를 창설했다.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서는 호구수의 증가와 농업의 발전, 조세징수체계의 확립에 노력했다. 우선 호구의 증가를 위해 1660년 양민의 삭발과 입승(入僧)을 금했으며, 이듬해 도성 내의 자수(慈壽)·인수(仁壽)의 두 사찰을 폐지하고 어린 승려는 환속하게 했다. 1670년 산간지방의 유민을 단속하여 호적에 편성하고, 1672년 국경지대의 범월인(犯越人)을 처벌하는 법을 정했으며, 호구 장악을 위해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을 제정했다. 농업의 발전을 위해 1662년 전주·익산 등지에 관개시설을 만들어 수리면적을 늘렸고, 이듬해에는 양관(量官)을 각 도에 보내 관개시설을 점검하게 했다. 아울러 조세체계의 정비를 위해 1660년 호남의 산군(山郡)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63년에는 호남대동청을 설치했으며, 1662년 경기도에 균전사를 임명하여 양전을 실시했다. 1669년에는 조운선의 파선 사고를 막기 위해 충청도 안흥에 남창(南倉)과 북창(北倉)을 설치하고 이 구간은 육로로 운반하게 했다. 1660년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영직첩(影職帖)과 공명첩(空名帖)을 대량으로 발급했는데, 이것은 이후 정부의 재정 보충책으로 보편화되어 신분제의 해체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669년에는 양인확보책의 일환으로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서 양처(良妻)의 소생은 모역(母役)을 따르게 하여 합법적으로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밖에 1660년 강화도의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새로이 사고(史庫)를 마련해 1665년에 등서(謄書)한 역대 실록을 보관하게 했으며, 1668년 교서관(校書館)에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1672년 대자(大字) 6만 6,000 여 자, 소자(小字) 4만 6,000여 자에 이르는 동활자(銅活字)의 주조를 완성했다. 1669년에는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姓)이 같으면 본관이 다르더라도 혼인을 못하게 했으며, 문묘(文廟) 안에 계성묘(啓聖廟)를 세웠다. 시호는 소휴(昭休)이며,

능호(陵號)는 숭릉(崇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東九陵) 내에 명성왕후와 함께 상릉(雙陵) 형태이다.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淸風金氏) ... 1642(인조 20)~ 1683(숙종 9).

현종의 비. 본관은 청풍. 청풍부원군(靑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659년(현종 즉위) 왕비에 책립되었다. 슬하에 숙종과 명선· 명혜· 명안 공주를 두었다.

예송논쟁(禮訟論爭)

. 예송(禮訟) 또는 예송논쟁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효종과 효종 비 인선왕후에 대한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 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이다.

.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 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 설과 9개월 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 설과 1년 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당초 허목, 윤휴와 송시열의 예론대결로 흘러가던 중 윤선도가 송시열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지적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예송은 토론에서 이념 대립으로 격화된다. 효종상인 기해예송(1차)과 인선왕후상인 갑인예송(2차)으로 두 차례 전개되었다.

(배경[편집])

. 인조 이래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있던 남인은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은 서인의 뜻을 따라 기년(朞年 : 만 1년)으로 정하고, 곧 이어서 현종이 즉위 하였다.

. 성리학의 도입 이후 고려후기부터 일반 사대부와 평민들은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에 따라 관혼상제의 사례를 따르고 있었고, 왕가는 성종 초반까지도 주자가례를 따르다가 성종 대에 제정된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효종처럼 차자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해예송(己亥禮訟)[편집] ... 서인 승리

.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 채택 : 만 1년) 제1차 예송이라고도 하는 기해예송(己亥禮訟)은 1659년 효종이 죽자 계모후 자의 대비의 복상 기간을 중자에 따라 기년복(1년)으로 할 것인가 장남의 예로서 3년 복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었다. 1660년(현종 1년) 음력 3월 남인 허목(許穆) 등이 상소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면서 들고 일어나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여 잠잠하던 정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 송시열, 송준길 등은, 효종은 인조의 제2왕자이므로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의 복상에 대해서는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이 옳다고 대항하였고, 남인 허목과 윤휴 등은 또다시 이를 반박하여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적장자(嫡長子)나 다름없으니 3년 설이 옳은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 복제를 몇 년을 입느냐를 놓고 논란이 진행되면서 남인 허목은 효종이 일단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왕통과 국통을 이은 장자라고 해석했고, 소북계의 윤휴는 장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 제2자를 장자로 세운다고 한 의례의 경구를 인용하여 효종은 비록 둘째 아들이나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차장자이고 3년 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의례>의 사종지설(왕위를 계승했어도 3년 상을 치를 수 없는 이유) 중 체이부정(적자이지만 장자가 아닌 경우)에 입각하여 효종은 인조의 차자이므로 1년 상이 옳다고 반박했다.

.송시열은 오히려 문종, 세조, 광평, 금성, 임영대군을 차례로 잃으면 세종대왕은 3년씩 열 번을 상복을 입느냐고 반박하였다. 허목과 윤휴는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일단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송시열, 송준길은 효종이 자의대비를 지존(왕후)으로 받들었을 뿐더러 아들이 되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하자, 윤휴는 왕자의 예는 일반 사서와는 다르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 영의정 정태화 등의 대신들은 송시열 시왕지제(<국조오례의>에 있는 모자간의 복식)에 따라 기년복을 채택했지만, 1660년 허목이 상소를 올려 예송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허목은 윤휴의 차장자설에 입각한 3년상을 찬성하면서 첩의 자식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만 체이부정에 해당된다며, 효종은 정실이 낳은 차자이니 서자가 아니라고 했고, 송시열과 송준길은 주자가례에 적장자 외의 중자는 모두 서자로 본다고 했다. 허목은 송시열, 송준길이 효종을 첩의 자식으로 둔갑시켰다며 문제 삼았고, 결국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복도까지 첨부시켜 현종의 앞에서 송시열과 송준길을 공격했다.

.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기년설이 그대로 채택되고 서인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허목, 윤휴와 송시열의 예론대결로 흘러가던 중 윤선도가 송시열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지적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송은 토론에서 이념 대립으로 격화된다.

(윤선도의 상소[편집])

. 서인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 그룹과 산림계열 그룹이 있었다. 이 중 김장생, 김집, 원두표,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 서인 산림세력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인조의 손에 죽었다고 확신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을 당론으로 삼았다. 그 뒤 이괄의 난과 이귀, 김류, 이서의 죽음과 김자점 일파의 역모 적발로 서인 공신세력이 몰락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서인 산림은 이를 공론화시켰다.

. 황해도관찰사인 김홍욱은 소현세자 빈 강씨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이후 서인 산림은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을 당론으로 정하고 틈틈이 이를 상소하여 관철시키려 했다.

남인 윤선도는 자의대비의 복제를 효종의 종통과 연결시켜 효종은 적통을 이은 왕인데 송시열 등의 기년복을 따른다면 효종의 종통은 애매하게 되고, 소현세자와 그의 자손들에게 적통을 주는 것이 된다, 그러면 효종은 가짜 왕이냐 섭정 황제냐 라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을 당론으로 정한 것도 문제 삼았다. 서인들은 이를 정치공세로 해석하고 격분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서인들은 일제히 윤선도가 이종비주(종통을 둘로 나누고, 임금을 비천하게 함)를 내세워 송시열과 송준길을 공격한 것은 예론을 빙자한 흉악한 모함이라고 성토하여 윤선도를 삼수로 유배 보냈다. 서인 부제학 유계는 윤선도의 상소를 불태울 것을 주장하여, 현종이 상소를 돌려주었는데도 결국 불살르게 한다. 그리고 윤선거, 김수홍 등 허목, 윤휴의 원론이 맞다고 주장한 서인 내부를 당론통일에 협조하라며 단속하기에 이른다.

. 송시열의 사돈이며 윤선거의 사돈인 탄옹 권시는 송시열과 송준길이 장악한 조정에서 바른말을 하는 것이 무슨 죄냐며 옹호했다가 서인언관들의 성토로 관직을 잃고 낙향했고, 조경은 윤선도를 구원하면서 송시열을 공격하다가 좌천되었다. 남인 홍우원은 윤선도의 유배지가 너무 멀다고 선처를 호소했다가 파직 당한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1666년(현종 7) 영남 남인 선비 1700여 명이 송시열에 대한 비난상소를 올리고, 성균관 유생 등의 반박상소로 절정에 이르렀다.

. 결국 현종이 직접 중재에 나서 기해년 복제는 사실상 <국조오례의>에 따른 것이지 고례를 채택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시 복제를 가지고 서로 공격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기해예송을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여 1차 예송은 일단락되었다. 그 뒤에도 예에 관한 논란이 약간 있었으나 이를 뒤집지는 못한다.

갑인예송(甲寅禮訟)[편집] ... 남인 승리

. 그 후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비(妃)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 인선왕후)가 돌아가자, 금지되었던 예송이 재연되었는데, 이 사건이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하는 갑인예송이다. 이때는 송시열과 김수항은 기해예송 때처럼 효종 비는 차자의 부인이므로 자의대비는 대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갑인예송에서는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과 처사촌 김석주가 서인이면서도 송시열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인과 연계하여 효종 비를 장자부로 보고 기년 설을 찬성했다.

. 1674년 효종비가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를 에워싸고 또다시 서인·남인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가례>에 의하면 효종 비를 장자부로 보면 기년, 차자부로 보면 9개월 대공복이고,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장자부든 차자부든 모두 기년이었다. 이때 남인은 대공설(大功說 : 자의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주장대로 기년(朞年)으로 정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서인의 주장대로 대공(大功)으로 고친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부당한 일이라고 들고 일어나며, 전번에 정한 대로 기년(朞年)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종은 기해년의 복제는 고례를 쓴 것이 아니라 국제를 쓴 것인데 선왕의 은혜를 입고도 체이부정이란 말을 할 수 있느냐며 기년복을 찬성했다.

. 결국 남인이 예송에서 승리하게 되어 대공복 설을 주장한 영의정 김수홍 등 서인들이 정계에서 축출되고, 영의정 허적을 제외하고 축출되어 있던 남인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번에는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설이 채용되어 남인이 다시 득세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 1674년 현종이 갑자기 죽고, 13세의 소년 숙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1차 예송 때부터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인용하여 효종과 현종의 적통을 그르쳤다는 진주 유생 곽세건 의 상소가 올라온다. 서인들은 곽세건의 처벌을 말했으나 숙종은 곽세건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종의 묘지명에 그 사실을 기록하려 했으나 송시열이 이를 거부했다. 결국 그의 제자 이단상에게 묘지문을 맡겼으나 거절했고, 격분한 숙종은 스승만 알지 임금은 모른다며 이단상을 파직시키고 송시열을 덕원부로 귀양 보냈다.

. 서인들은 송시열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고, 허목과 윤휴는 송시열과 그를 옹호하는 서인 세력들까지 처벌하려 하여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다시 격화되었다. 그러나 복제문제로 인한 당쟁은 끊이지 않았다. 숙종은 1679년 3월 앞으로 예론을 가지고 문제 삼거나 상소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역률로서 다스리겠다고 하여 논쟁을 금지시킴으로써 2차 예송이 종결되었다.

(영향[편집])

. 두 차례의 예송은 표면상으로는 예학과 관혼상제의 문제였지만, 사실은 왕위 계승의 정당성 문제와 왕위계승 원칙인 종법의 이해 차이가 얽힌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이었다. 처음에 예론을 이견으로 접수했던 송시열과 송준길, 김수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남인을 대하는 태도가 경직된다.

. 예송논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서인과 남인이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이러한 건전한 공존의 붕당 정치는 예송논쟁을 기점으로 무너지고,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은 격화된다. 이러한 대립의 격화는 훗날, 숙종 때에 환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기타[편집]

예송은 주자학의 핵심내용인 종법과 예의 불변성을 강조하여 왕, 사대부, 평민 모두에게 예외 없이 적용하려던 송시열, 송준길 등 주자정통주의와 국왕만은 예외라며 예의 가변성을 인정하려는 윤휴, 허목의 주자비판론자, 탈주자주의자, 탈유교주의자의 사상적 대립이었다.

제19대 숙종(肅宗) 순(焞) ... 생졸 1661(현종 2)~ 1720(숙종 46).

재위 1674. 8~ 1720. 6(45년 10개월)

부인 6명, 자녀 3남 6녀

인경왕후 김씨 3녀(모두 일찍 죽음)

인현왕후 민씨 자식 없음

인원왕후 김씨 자식 없음

희빈 장씨 1남 경종(제20대 景宗), 성수(女)

숙빈 최씨 1남 숙종(제21대 英祖), 영수(女), 女

명빈 박씨 1남 연령군

. 재위기간(45년) 동안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한편으로는 대동법의 확대 실시, 양전의 시행, 호패법의 실시, 군제의 정비 등을 통해 양난 이후 무너져가는 봉건체제를 재정립해나가려는 정책을 시도했다. 이름은 순(焞). 자는 명보(明普).

즉위 및 정국동향

. 현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초비(初妃)는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8월 즉위했다.

. 숙종 초기 집권층이었던 남인은 병권의 장악과 서인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어,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숙종은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외척을 기용하는 한편 서인을 재등용하고자 했다. 1680년(숙종 6) 복선군(福善君)과 탁남의 영수인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 등이 역모했다는 고변이 있자 이를 계기로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그러나 서인계열은 남인의 숙청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1689년 희빈 장씨(禧嬪 張氏) 소생 왕자(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에 반대하다가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넘겨 주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남인은 이후 정국을 이끌면서 1694년에는 서인이 인 현왕후 복위를 도모하려 했다는 고변을 하고 옥사를 일으켰다.(갑술옥사[甲戌獄事] = (갑술환국[甲戌換局]).

.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비한 것을 후회한다는 전지(傳旨)를 내려 소론 정권을 성립하게 하고 남인의 다수를 명의죄인(名儀罪人)이라 하여 중앙정계에서 몰아냈다(甲戌換局). 그 뒤 정국은 서인 내의 노론·소론 사이에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벌어지면서 노론 일당전제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노론·소론 당쟁의 핵심은 희빈 장씨의 처벌문제 및 장씨 소생의 세자와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였다. 숙종은 노론의 주장을 받아들여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한편 1717년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숙종 재위기간 중의 남인·서인, 노론·소론의 당쟁은 조선 중기 이래 붕당정치의 과정에서 쌓여온 모순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당파간의 견제와 대립을 이용하여 양 난 이래 손상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숙종의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쟁의 밑바탕에는 양 난 이후의 국가재조(國家再造) 방향을 둘러싼 대립이 가로놓여 있었다. 즉 정통주자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정치운영의 주체를 양반 사대부에 두며 당시의 지배적 경제제도인 지주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부세 제도의 부분적인 개선을 통해 봉건체제의 모순을 수습하려는 입장과, 고전유학의 범주에서 주자학 비판의 근거를 찾고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소농경제를 안정시키려는 입장 사이의 대립이었다. 숙종 때의 당쟁은 전자의 주장을 전개한 노론 계열이 정국을 점차 장악해가는 과정이었다.

사회경제 정책

. 먼저 방납(放納 : 토산물의 貢出)의 폐단을 막고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 1608년(선조 41)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실시된 이래 강원도와 충청도·전라도로 확대된 대동법의 적용범위를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에까지 확대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전정(田政) 부문에서는 광해군 때부터 시작된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계속해서 강원도와 삼남지방에까지 확대하여 서북지방 일부를 제외한 전국에 걸쳐 양전을 마무리 지음으로써 국가재정 수입의 안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리고 당시 민폐의 대상이었던 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강구했으나 양반층의 반대로 벽에 부딪히자 그 대신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여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함으로써 1필에서 3~4필의 심한 차이를 보이던 양정(良丁) 1명의 군포 부담을 2필로 균일화 했다. 또한 호패법(戶牌法)의 실시를 강행하여 유민(流民)과 도피자를 방지함과 동시에 전국의 양정 수를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봉건질서의 안정·강화를 도모했다. 아울러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맞추어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주전(鑄錢)을 본격화하여 6차례에 걸쳐 상평청·호조·공조 및 훈련도감·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전라·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통용하게 했다. 이와 같이 숙종 대에 이루어진 제반 제도의 정비와 운영상의 개선은 양 난 이후 문란해진 국가 재정구조를 개선하고 일반농민층의 부담을 부세제도의 면에서 경감시킴으로써 심화되어가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봉건지배체제를 안정화하려는 것이었다.

국방·외교 정책 및 기타 치적

. 숙종은 즉위한 다음해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완공하고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하여 변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1712년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종래의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군제의 개편을 마무리 지었다. 한편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자성(慈城)의 2진을 개척하여 옛 영토의 회복운동을 벌였으며, 청과의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에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청과 협상하여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함으로써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일본과는 1682, 1711년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왜은(倭銀) 사용조례를 확정지어 왜관무역(倭館貿易)을 정비하는 한편, 막부(幕府)로부터 왜인의 울릉도 출입금지를 보장받기도 했다.

. 이밖에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端宗)으로 묘호를 올렸으며,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던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왕실의 충역관계(忠逆關係)를 재정립했다. 그리고 명분의 리론이 크게 성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명의 은공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존명의리와 북벌론의 기치 아래 사회기강을 단속하는 작업이 행해지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선원록 璿源錄〉·〈대명집례 大明集禮〉 등이 간행되고, 〈대전속록 大典續錄〉·〈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이다. 능호(陵號)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서오릉(西五陵)에 숙종 및 계비 인현왕후는 쌍릉(雙陵)으로, 계비 인원왕후는 단릉(單陵)으로 있다.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光州金氏) ... 1661(현종 2)~1680(숙종 6) (20세)

.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이다. 1670년(현종 11)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행하고 의동(義洞) 별궁(別宮)에 들어갔고, 다음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 8월에 왕비로 진봉되었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天然痘)로 죽었다. 소생으로 3명의 공주가 있었다. 1713년 광렬(光烈)이라는 존호(尊號)가 올려졌고, 1722년(경종 2) 효장명현(孝莊明顯)이 휘호(徽號)로 올려졌다. 1753년(영조 29)에는 존호 선목(宣穆)이, 1776년 존호 혜성(惠聖)이 각 각 올려졌다. 능호(陵號)는 서오릉 내 있는 익릉(翼陵)으로 단릉(單陵)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驪興閔氏) ... 1667(현종 8)~1701(숙종 27)(35년)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繼妃).

. 서인과 남인 간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와 함께 희생양이 되어 요절했다. 아버지는 노론(老論)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0년(숙종 6)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죽고, 5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한 뒤, 1681년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1688년 숙원 장씨(淑媛張氏)가 왕자 윤(昀 : 뒤의 경종)을 낳았다. 1689년 2월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이 윤을 원자로 봉하는 데 반대하면서 숙종과 대립한 결과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장씨는 희빈이 되었다. 민씨는 그해 5월 남인들의 주장으로 폐위되었고, 다음해 10월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 그러나 1694년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의 폐비복위 운동을 계기로 갑술환국이 일어나 다시 남인이 밀려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장씨는 희빈으로 내려지고 민씨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1701년 8월 원인 모를 질병으로 죽었고, 이와 관련되어 희빈 장씨도 무고사(巫蠱事)로 사사(賜死)되었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陵號)는 명릉(明陵)이다.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희빈(禧嬪 장씨(仁東張氏) ... ?~ 1701(숙종 27).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빈.

. 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는 장형(張炯)이며,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어려서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88년 소의(昭儀)로 있을 때 왕자 윤(昀 : 뒤의 경종 景宗)을 낳았다. 이듬해 1월 숙종이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禧嬪)으로 승격되었다.

. 그해 2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권하고 남인이 집권했으며, 7월에는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가 폐위되었다. 1690년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립되었다. 1694년 서인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의 민비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4월 민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고,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복위를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궁인·무녀 등과 함께 민비를 무고(巫蠱)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희빈 장씨 및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 등 소론도 몰락하게 되고,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嬪)을 비(妃)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 1680년(숙종 6)에 남인세력이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 숙종 초기에는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1659년에 벌어진 첫 번째 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여 남인이 실각하였으나, 1674년의 2번째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숙종 초년에는 이들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은 서인에 속하는 모후인 명성왕후의 족질 김석주에게 군권(軍權)을 맡겨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군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의해 앞으로의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군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세력 간에 각축이 계속 되었다. 따라서 김석주 등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윤휴는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설치를 주장하여 도체찰사부가 설치되고, 남인 허적이 체찰사에 임명되었다.

.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팔도의 모든 군사력이 그 통제를 받게 되었다. 총융사와 수어사도 경기도의 군사력으로 간주되어 도체찰사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도체찰사가 된 허적은 훈련도감과 어영청마저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하나로 합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김석주 등이 강력히 반발하여 도체찰사부는 일시 혁파되었으나, 1678년 영의정 허적의 건의로 복설되었다. 군권을 비롯한 권력이 남인, 그 가운데서도 탁남(濁南)에 편중되자 숙종은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서인들을 유배에서 방면해주었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에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이 조부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에 궁중의 천막을 가져다 쓴 사건이 발생하였다.

. 숙종은 이날 비가 내리자 허적에게 궁정의 기름먹인 천막을 가져다 쓰라고 명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군권을 서인에게 넘기는 전격 조치를 취하였다. 훈련대장을 남인계인 유혁연에서 총융사 김만기로 바꾸고 김만기의 후임에는 신여철을, 수어사에는 김익훈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인들이었다. 한 달 뒤에 재등장한 서인들로 구성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남인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종실 복창군·복선군·복평군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는 계를 올렸다. 거기다가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이들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있었다. 이 역모사건으로 허견이 능지처사(凌遲處死)되고 복선군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역모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판명된 허적·오정창·윤휴·이원정·민희·유혁연 등 남인의 실권자 들은 관직에서 쫓겨나 유배를 당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인이 중앙 정계에서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재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기사환국(己巳換局)

. 1689년(숙종 15) 숙종이 후궁 소의(昭儀) 장씨(張氏:장희빈)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려는 문제를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정권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

인현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한 가운데 1688년에 소의 장씨가 아들 균을 낳자, 숙종은 균을 원자로 삼아 명호(名號)를 정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려고 했다. 이때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노론 계는 중전이 아직 젊은데 후궁 소생을 낳은 지 두 달 만에 원자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숙종은 1689년 5월에 이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를 정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삼았다. 이에 노론 측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이 2번이나 상소하여,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했다가 적자가 없이 죽자 그때야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는 예를 들면서 다시 반대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원자의 명호를 결정한 이상 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분노했다. 이때 남인계인 승지 이현기(李玄紀)· 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이익수(李益壽)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했다. 숙종은 이들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여 제주도로 유배하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다.

. 그밖에 송시열의 주장을 따른 많은 노론계 인사를 파직·유배했다. 결국 송시열의 상소는 노론이 권력에서 쫓겨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권대운(權大運) 이 영의정에, 목내선(睦來善)이 좌의정에, 김덕원(金德遠)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남인계가 대거 등용되었다. 그 뒤 남인들은 서인의 죄를 계속 추궁하여,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정읍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중 사약을 받았고, 김만중(金萬重)·김익훈(金益勳)·김석주(金錫胄) 등은 보사공신(保社功臣)의 호를 삭탈당하거나 유배당했다. 이어 숙종이 중전 민씨가 원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중전을 폐비하려고 하자, 이에 재야의 서인이던 오두인(吳斗寅) 등 86명이 이를 저지하려고 상소했다. 숙종은 상소의 주동자인 전 응교 박태보(朴泰輔), 전 참판 이세화(李世華), 오두인 등을 밤낮으로 신문한 뒤 유배했다. 마침내 숙종은 이듬해(숙종 16) 5월 2일 중전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6월에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 뒤 10월에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립(冊立)했다. 이렇게 서인이 집권 10년 만에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긴 국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 붕당정치

갑술옥사(甲戌獄事) ... 〔갑술환국(甲戌換局〕

. 1694년(숙종 20) 숙종의 폐비(廢妃) 민씨(閔氏) 복위운동을 둘러싸고 소론이 남인을 몰락시킨 사건.

숙종이 폐비사건을 후회하고 이에 앞장섰던 남인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의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인을 대상으로 필요한 기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주로 노론이 가담하였으나 점차 소론 측의 찬동자도 많아졌다. 이 소식에 접한 남인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 등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을 통해 집권한 남인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반대파의 세력을 일제히 타도하기 위하여 1694년 3월에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한 후 국문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폐비 민씨를 두둔한 나머지 국문을 주도한 남인의 행동을 미워하여 국문을 주관한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柳命賢) 등을 귀양 보냈다.

. 당시 민씨복위운동을 주도했던 서인들은 기사환국 이래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숙빈 최씨(淑嬪崔氏)와의 연결을 통해 궁중과의 연결을 도모하였고, 이를 매개로 왕비 장씨와 남인계의 잘못된 점을 숙종에게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남인을 배척하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 박세채(朴世采)를 좌의정, 윤지완(尹趾完)을 우의정에 기용함으로써 소론 정권을 성립시켰다. 숙종은 기사환국 때 왕비가 되었던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복귀시키는 한편 노론계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 민씨를 6년 만에 복귀시켜 궁중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한편 송시열(宋時烈)· 김익훈(金益勳)· 조사석(趙師錫)·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등 1689년에 화를 당하였던 노론 계 인물들에게 다시 작위를 주었다.

. 반면 남인측은 민암·이의징 등이 사약을 받았고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 등이 유배당하였다. 그 뒤 남인은 다시는 정권을 잡을 수 없었다. 이후 정계에서는 서인 내부의 소론과 노론과의 쟁론(爭論)이 시작되었다.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인 환국 과정에서는 전 단계의 붕당정치에서 보이던 여러 정치집단 사이의 상호 비판과 그 바탕 위에서 유지되는 균형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승리한 집단이 주축이 되어 주요 행정체계와 밀접하게 연결된 관료직을 독점하며 우위를 다져갔고, 주요 병권을 장악하는 일이 많았다. 가령 1694년 당시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양대장에 신여철(申汝哲)·윤지완 등 소론 계를 등용시켜 소론 정권을 공고히 뒷받침하였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20대 경종(景宗) 윤(昀) ... 생졸 1688(숙종 14)~ 1724(경종 4) (37세)

재위 1720. 6~ 1724. 8(4년 2개월) 부인 2명, 자녀 없음

단경왕후 심씨 자녀 없음

선의왕후 어씨 자녀 없음

.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희빈장씨(嬉嬪張氏)이다. 비는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 계비는 어유구(魚有龜)의 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1689년(숙종 15) 원자(元子)로 정호 된 뒤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이듬해 소론의 지지를 받아 세자에 책봉되었다. 1717년(숙종 43)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했으나, 숙종이 이이명(李頤命)을 몰래 불러 세자가 병약하고 자식이 없으니 그의 즉위 뒤의 후사(後嗣)는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으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 즉위 다음 해인 1721년(경종 1) 후계자를 세우자는 노론의 건의로 연잉군을 세제(世弟)에 책봉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에 크게 반발한 소론 이광좌(李光佐)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시 친정을 하고, 김일경(金一鏡)의 탄핵을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의 발설자인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을 유배 보냈다.

. 1722년에는 노론 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이 있자, 노론 4대신을 사사(賜死)한 뒤 노론을 모두 숙청했다. 두 해에 걸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소론이 그의 재위기간에 전권을 장악했다. 1722년 흉작이 들자 각도의 연분사목(年分事目)을 개정하여 전 세율을 낮추었으며, 삼남지방의 양전(量田)에 대한 민원(民怨)도 시정했다. 1723년에는 서양의 수총기(水銃器:소화기)를 모방하여 이를 제작하게 했고, 관상감에 명하여 서양의 문신종(問辰鍾)을 제작하게 했다. → 신임사화

능호(陵號)는 의릉(懿陵)으로 성북구 석관동 1-5번지에 계비 선의왕후와 함께 쌍릉(雙陵) 형태이다.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咸從魚氏) ... 1705년~1730년(26세)

.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는 조선 경종의 계비이며 시호는 경순효인혜목선의왕후(敬純孝仁惠睦宣懿王后)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어유구(魚有龜)의 딸로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의 제자이며, 일가가 모두 노론계이다.

1718년 14세(만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같은 해에 왕세자(경종)과 가례를 올렸고 다음 해인 1719년 9월에 관례를 올렸다.

. 1720년 숙종이 서거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의 초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왕비 추봉과 그녀의 왕비 책봉을 동시에 주청한 것이 청나라에 트집 잡혀 1721년에야 고명을 받을 수 있었다. 경종 1년, 경종 부부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하여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와 왕대비(인원왕후)의 강력한 추진으로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갓 17세에 불과했다. 일설에 따르면 연잉군을 반대하여 종실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혹은 밀풍군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하였으나 경종의 급서로 실패하였다고 한다.

. 1724년 경종이 서거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20세에 불과한 나이로 왕대비가 되었다. 영조 2년에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에서 지냈으며 1730년 창경궁 어조당에서 1730년 8월 12일(음력 6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거처하던 저승전은 후에 세자궁으로 개조되어 사도세자의 처소가 되었으며 저승전 건너편에 위치했던 취선당은 세자궁의 소주방으로 개조되었는데,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밥을 먹은 탓이라 하였다.

.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靑松沈氏)... 1686(숙종12)~1718(숙종44) (35세)

. 경종(1720~24 재위)의 비. 성은 심(沈). 본관은 청송.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이다. 1696년(숙종 22)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자식 없이 병으로 죽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에 추봉되어 전호(殿號)는 영휘(永徽)라 했으며, 1726년(영조 2)에 공효정목(恭孝定穆)이라는 휘호(徽號)가 추상(追上)되었다. 시호는 단의(端懿)이다. 능호(陵號)는 혜릉(惠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東九陵) 내에 단릉(單陵) 형태이다.

정유독대(丁酉獨對)

. 조선 숙종 43년 정유년(丁酉年) 7월19일 밤 왕은 당시 집권당 노론의 우두머리격인 좌의정 이이명을 불러 단 둘이만 만났다.

숙종은 이 만남에서 임금이 침실에 들 때만 빼고 반드시 동석시켜야 하는 입직 승지와 임금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기록하는 사관(사관(史官))을 들이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 간 독대가 이뤄진 것이다. 역사는 이 만남을 정유년에 일어났다 해서 <정유독대> 라 부르고 있다.

. 숙종과 이이명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다가 수십년이나 지난 영조 때에야 밟혀졌는데 당시 병이 깊던 숙종은 이 자리에서 “연잉군과 연령군 두 왕자를 잘 부탁한다.”는 고명(고명(顧命))을 이이명에게 남겼다.

. 이는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장남인 세자를 갈아치우고 세자의 이복동생들인 연잉군(훗날 영조)이나 연령군 중에서 골라 세자로 세우라는 뜻이었다. 임금이 독대라는 형식으로 사사로이 신하와 단둘이 만나 행한 이 `밀실야합'은 결국 숙종 말년부터 경종,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잦은 당쟁으로 수많은 인명을 앗아 갔으며 심지어 경종이 노론과 연잉군에게 독살됐다는 무성한 소문을 낳는 빌미가 됐다. 숙종과 이이명이 사관이나 입직승지를 물리치고 독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꾀하고자 하는 바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독대는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지고지존이라는 왕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 조선에서 임금은 특정 신하의 임금이 아니며 신하 또한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가 아니라 온 나라와 국민의 임금이며 신하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때문에 임금과 신하의 만남에는 반드시 사관과 승지가 지켜보고 감시하도록 함으로써 공개적이고 투명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 독대의 폐해에 대한 경계는 숙종과 이이명 간 독대 사실이 공개된 직후 영중추부사 윤지완이 여든 두 살의 노구를 이끌고 병중임에도 널을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와 올린 다음과 같은 상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하가 어찌 상신(상신(相臣). 3정승 총칭)을 사사로운 사람으로 삼을 수 있으며 상신 역시 어찌 감히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

신임사화(辛壬士禍)

. 조선 후기 1721년(경종 1)과 1722년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옥사. 신축(辛丑)· 임인(壬寅) 두 해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하며, 일명 임인옥이라고도 한다.

.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죽고 소론(少論)의 지지를 받은 경종(景宗)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후사가 없었으며 병이 많았다. 그러자 당시의 노론4대신(老論四大臣)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가 중심이 되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소론측은 반대했지만, 경종은 1721년 8월에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실현시켰다. 노론측은 더 나아가 10월에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통해 세제 청정(聽政)을 주장했다. 이에 경종은 청정을 명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환수했으며, 뒤에 여러 번 번의를 거듭했다. 그동안 노론·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 결국 그해 12월에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 등이 소를 올려 세제 청정을 상소한 조성복과 이를 행하게 한 노론4대신을 파직시켜 유배 보냈다. 이외에도 다수의 노론측 인물들이 삭직되었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뒤에도 소론의 강경파들이 노론숙청을 요구했는데, 마침내 1722년 3월 노론측이 세자 시절의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있자, 소론측은 이를 기화로 노론4대신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수백 명의 노론을 제거했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노론의 추대를 받았던 영조가 즉위하자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당쟁으로 일어난 신임사화를 생각하고, 노론·소론을 함께 등 용하여 당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신임사화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하는 등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불러들이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일으켰다.→ 정미환국

제21대 영조(英祖) 금(昑) ... 연잉군(延礽君)

생졸 1694(숙종 20)~ 1776(영조 52) (83세)

재위 1724. 8~ 1776. 3(51년 7개월 * 최장기) 부인 6명, 2남 7녀

정성왕후 서씨 자식 없음

정순왕후 김씨 자식 없음

정빈 이씨 진종(효장세자), 화순옹주

영빈 이씨 장조(장헌(사도)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안옹주

귀인 조씨 화유옹주

숙위 문씨(폐) 화령옹주, 화길옹주

. 조선 후기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해 당쟁의 조정에 힘썼고,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해 양역(良役)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사회변화에 대응해 실학(實學)의 진작 및 문화 창달에 노력했다.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즉위와 탕평책

.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며,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다.

1720년(경종 즉위)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아들인 경종이 33세로 즉위했으나 자식이 없었고, 왕자가 태어날 가망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노론측이 경종의 동생인 그를 세제(世弟)로 책봉하자는 논의를 일으킨 결과, 소론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제2 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의 후원 하에 1721년 왕세제로 책봉 되었다. 노론은 더 나아가 경종이 병이 많음을 들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킬 것을 주장했다. 경종의 비망기(備忘記)를 얻어 대리청정이 일단 허락되었으나 찬성 최석항(崔錫恒),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등의 강력한 반대와 각지 수령, 성균관 학생, 각 도 유생들의 반대상소로 대리청정이 취소되었으며, 이 일을 추진했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 采),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이 경종에 대한 반역으로 치죄되어 귀양 가고(신축옥사), 이듬해 이들을 비롯한 60여 명이 처형되었다.(임인옥사). 이 과정에서 그는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으나 노론편인 인원왕후의 강력한 비호로 위기를 넘기고, 1724년 경종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 영조는 즉위 직후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고 조태억(趙泰億) 등 소론대신을 파직시켰으며,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을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수립하고, 노론 4대신을 신원해 복관시켰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노론의 집권은 당연하지만 신임사화와 같은 살륙의 보복은 피하고, 노론의 전제를 막아야만 불안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노론이 유봉휘(柳鳳輝) 등 소론 4대신을 비롯해 신임사화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죽일 것을 주장하자 정미환국을 단행하여 노론대신들을 파직시키고 일시 소론정국을 만드는 등 몇 차례에 걸쳐 정국의 변동을 단행하고, 탕평파를 키우는 등 노력을 했으나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더욱이 1728년에는 실각한 준론파(峻論派) 소론과 남인을 중심으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영조는 신임사화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완론파(緩論派) 소론 계열을 노론과 아울러 기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당쟁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탕평책을 펴게 되었다.

. 1729년에는 이른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 ․ 소론 내의 탕평세력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정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때 영조가 취한 정책(인사)은 상호 견제되는 권한을 갖는 자리에 다른 당색의 사람을 배치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했다. 즉,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고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 등으로 상대하게 헸던 것이다.

. 그 뒤 어느 정도 국면이 수습되자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여 노론 외의 당색도 기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신임사화를 겪었던 노론은 이에 불만일 뿐 아니라 소론의 재등장을 꺼려하여 노·소론의 파당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아가 노론은 경종대의 소론의 집권명분을 일체 반역으로 규정하고 집권기반을 굳혀나갔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1755년 〈천의소감 闡義昭鑑〉을 간행하여, 소론이 경종과 관련되어 있었던 일체의 정치적인 명분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그 대신 노론이 영조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을 충의로 정립해 소론의 의리론 상의 근거를 완전히 박탈했다.

. 영조가 말년에 자신의 아들을 죽이게 되는 비극적 사건도 근본적으로는 정쟁에 그 원인이 있었다. 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맡았던 장헌세자(莊獻世子)는 노론전제에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겉으로는 노론집권의 의리를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소론이나 그 밖의 반대세력의 정견을 옳다고 보고 있었다. 이에 노론은 장헌세자가 장차 왕위에 오르면 노론을 몰락시킬 수 있다고 보아 온갖 수단으로 그를 제거 하려했다. 또한 노론의 의리와 명분론에 근거하여 왕위에 오른 영조로서도 정통성을 고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론의 입장을 따라야만 했다. 그 결과 1762년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을 계기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였다(→ 색인 : 사도 세자사건). 영조는 곧 이를 후회하고 위호(位號)를 복구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장헌세자의 아들인 세손(뒤의 정조 正租)을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했다.

정미환국(丁未換局)

. 1727년(영조 3)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노론(老論) 강경파를 파면하고 소론(少論)을 정권에 참여시킨 일.

. 영조가 즉위할 때에는 소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곧 이전에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신임사화를 일으켰던 소론의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단하고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을 유배시킴으로써 민진원·정호 등의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노론의 요청에 따라 신임사화를 무옥(誣獄)으로 판정하고, 신임사화 때 처벌된 노론 피화자(被禍者)를 신원하는 을사처분(乙巳處分)을 단행했다. 이 상황에서 영조는 노·소 양파의 당쟁을 조정하고자 탕평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노론정권이 왕의 탕평책에는 잘 따르지 않고 소론 공격에만 급급하자 영조는 정미년인 1727년에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고집하던 민진원과 정호 등을 파면하고 이광좌·조태억 등을 비롯한 소론을 다시 정권에 참여시켰는데 이를 정미환국이라고 한다.

. 이로써 다시 성립하게 된 소론정권은 그 집권의 합리화를 위해서 2년 전에 노론에 의해 확정되었던 을사처분을 뒤집어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 등의 노론 4대신을 다시 죄안(罪案)에 들게 하고, 신임사화를 역옥(逆獄)으로 규정했다. 즉 정미환국은 당국자의 노론·소론 간의 인적 구성만 바뀌게 한 것이 아니라 충역시비(忠逆是非)를 완전히 뒤집은 것으로서 소론에게 어느 정도의 우세를 안겨다주었다.

. 이때 정계에 등장한 소론정권에는 영조 즉위 초에 제거되었던 준소(峻少)는 제외 되어 있었고, 이광좌로 대표되는 완소(緩少)와 조문명을 대표로 하는 청류(淸流)가 집권했다. 그러자 정계에서 추방당했던 소론과 남인의 강경파들이 영조와 노론의 제거만이 정치진출의 기회라 보고, 이듬해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교체를 기도한 이인좌의 난 (李麟佐)을 일으켰다. 영조는 이 난을 진압한 뒤 노소를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자를 제거함으로써 탕평책을 펴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난의 발생 직후 탕평파의 활동이 다른 어느 정치세력보다도 적극적이 되고 왕이 그들을 극력 지지했다. 그러나 끝내 탕평책은 당쟁을 근절하지 못했고 이후 외척세력과 결부되면서 세도정치로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색인 :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李麟佐- 亂)

. 1728년(영조 4) 소인과 남인의 일부세력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자 했던 반정. 이인좌가 거병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발생했으므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 16,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과 상공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농민층 분해와 신분제 해체가 진행되었다. 정부는 수취체계 개편 및 운영개선을 논의·시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해 농민들의 부세저항이 심해지고 유민(流民)이 증가했다. 이러한 피지배층의 저항은 지배세력의 물 적·인적 지배기반까지 동요시켰다. 지배세력 간에는 사회변동에 대한 관점에 따라 갈등이 심화되었고, 국왕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1720년에는 왕세자(뒤의 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해 경종의 즉위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이어 세제청정(世弟聽政)까지 실현하려다가 축출 당했으며, 잇달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철저히 축출되었다. 이때 소론 내에는 노론에 대한 처벌방법을 두고 과격파인 준소(峻少)와 온건파인 완소(緩少)로 분열되었다.

. 1724년 경종의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정권이 성립하자 김일경파의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 등은 비밀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여, 궁중에서는 이하(李河)·민관효(閔觀孝)·윤덕유(尹德裕)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鄭遵儒)·나만치(羅晩致)·조덕규(趙德奎)·조상(趙鏛)·임서호(任瑞虎)·정세윤(鄭世胤)·권서린(權瑞麟)·이호(李昈)·민원보(閔元普)·민백효(閔百孝)·김홍수(金弘壽)·이일좌(李日佐) 등이, 그리고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과 중군별장 남태징(南泰徵)이 가담했다. 이들은 김홍수·정세윤 등 재지사족 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세가명족의 후예이지만 현실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통해 정치에 진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등 영조의 왕위계승 부당성을 선전하며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밀풍군 탄을 추대하기로 하고, 정변의 기본전략을 외방(外方)에서 먼저 일으키면 경 중(京中)에서 이에 내응하는 외기내응(外起內應)으로 확정했다. 경중 내응은 준소· 탁남·소북계 세력이, 외방기병은 정세윤·이인좌의 지도 아래 외방 토호와 재지사족 층이 하기로 했다. 외방기병의 지휘권을 맡게 된 이인좌는 감사를 지낸 이운징(李雲徵)의 손자로 남인명가의 출신이었지만 관직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그는 경기· 호서·영남 세력의 중개역할을 하는 한편 남인명가의 후광을 업고 영남의 사족과 접촉했다.

. 또한 정세윤은 정인지(鄭麟祉)의 후손이지만 몰락양반으로 600~700명 의 세력을 포섭했다. 그런데 이때 영조와 탕평파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일으켜, 노론의 일부를 후퇴시키고 청남(淸南)과 완소를 정계에 기용함으로써 소론·남인을 무마하여, 삼남흉황과 유민의 속출, 노론의 민정실패에 따른 외방의 동요에 대처하고자 했다. 이로써 반남인·반소론적인 영조와 노론을 제거한다는 명분이 약화됨에 따라 일단 서울의 주도층은 거사준비를 중지하고 사태추이를 관망했으나, 이인좌· 정세윤·한세홍(韓世弘) 등의 재지사족들은 준비를 계속했다. 이인좌는 영남 기병을 정희량(鄭希亮)·김홍수에게 맡기고, 호남 기병은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에 맡겼으며, 자신은 정세윤과 경기기병을 추진하여 중도에서 영남병·호남병과 합세하기로 했다. 한편 정세윤은 호남사족층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금영(禁營)의 조총을 사들여 무장하고, 평안병사 이사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 이때 경중주도층은 한세홍을 통하여 거사강행의 소식을 전달받고 군사·자금을 모집했으나, 실천의지가 약했다. 한편 정미환국으로 재기용된 온건소론에 의해 정변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 등이 각지의 취군상황에 대해 고변하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했다.

. 1728년 3월초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란군은 안성·양성에서 거병하여, 3월 15일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했다. 반군은 각 창고의 전곡·미·포를 민간에 분급하고 '불살인 불약민재'(不殺人 不掠民財) 및 '제역감역'(除役減役)의 민정강령을 내세움으로써 민의 참여를 유도하여, 청주의 군관·향임층·일반행려·상인 등으로 반군세력이 확대되었다. 반군은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 등지를 점령하고, 수령을 파견하여 환곡을 분급하며 관노비에게 상급을 주고, 장정을 선발했다. 그런데 영남병·호남병의 합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남에서는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李熊輔)가 3월 20일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거했으나, 안동·상주입거에 실패하고 결국은 관군에게 패했다. 호남에서는 박필몽과 박필현이 각각 괘서를 살포하는 등 취병을 했으나 태인 거병이 좌절당한 뒤 잡혀 처형당했다. 한편 정부는 관문·성문의 파수를 강화하고, 금위영·어영청의 군사를 각 진에 파견하여 내성유입을 통제하는 한편, 탁남세력과 윤휴(尹鑴)· 이의징(李義徵) 등의 자손, 김일경·목호룡의 가속(家屬)을 체포했다. 또한 민심동요를 막고자 강창세곡(江倉稅穀)을 성내로 운반했고, 체불했던 공가(貢價)와 삭료(朔料)를 지급했으며, 아울러 도성사수론을 내리고 황해·강원의 향병징발과 한강수비령을 하달했다.

. 경중내응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뒤 오명항(吳命恒) 지휘의 도순무군(都巡撫軍)을 남파했다. 이에 반군은 경중내응과 영남병·호남병 북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각 처의 유민·소상인·화전민을 포섭하면서 도성을 향해 진천을 지나 안성·죽산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3월 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권서봉·목함경(睦涵敬)이 잡혔으며, 청주에 남아 있던 반군세력인 신천영과 이기좌(李騏佐)는 창의사인 박민웅(朴敏雄)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은 영남·호남 지방에도 알려져 잔존했던 반군세력은 소멸되었다.

. 무신 난은 당시 영조와 집권 노론 층의 패쇄적 인사정책과 정치보복의 강화, 형정·민정의 실패에 따라서 발생한 사족 층·잔반·향임 층·하층민의 연대투쟁이었으나, 정미환국 이후의 결속력 약화, 경중세력의 취약성, 지도세력 부재와 이중거사계획의 판단착오, 주도층의 오판, 분리적 탈퇴 등으로 실패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정미환국 때 재기용되었던 완소가 약화되었고, 노론은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무신 난의 발생 원인을 노론 세력만으로 구성했던 폐쇄적 인사정책 때문인 것으로 보고, 노론강경파보다는 노·소 간의 조정과 병용책을 주장한 노론 온건파 중심의 탕평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 을해옥사(乙亥獄事) = 나주괘서사건 [羅州掛書事件]

1755년(영조 31)에 소론 일파가 역모를 꾀한 사건.

. 을해옥사(乙亥獄事) 또는 윤지(尹志)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이후 노·소론의 대립은 경종 재위 기간과 영조 초년에 절정에 달했다. 1728년의 이인좌의 난은 영조 즉위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노론과, 노론의 후원을 받았던 영조에게 반발한 무장반란 사건이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약화된 소론을 제치고 노론이 권력을 확고하게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 바로 나주괘서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소론인 윤지가 주모하여 일으킨 역모사건이다. 윤지는 숙종 때 과거에 올랐으나, 영조가 즉위한 1724년에 발생한 김일경(金一鏡)의 옥사에 관계되어 아버지 취상(就商)은 고문 끝에 숨지고, 자신은 제주도를 거쳐 나주에 귀양 갔다.

. 그는 20여 년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아들 광철(光哲),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및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한 뒤 푸닥거리를 구실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윤지는 이어 민심을 동요시킬 목적으로 1755년 1월에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나주 객사에 붙였다. 이것이 그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져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영조에게 신문을 받고 2월에 박찬신(朴纘新)·김윤(金潤)·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 등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그 후 5월에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가 있을 때 윤지의 일파인 심정연(沈鼎衍)이 또 조정을 비난하는 글을 써서 체포되었다. 이어 춘천거병(春川擧兵)의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심정연은 주모자 윤혜(尹惠)·김도성(金道成)·신치운(申致雲), 공모자 김인제(金寅濟)·이전(李佺)·이준(李埈) 등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당시 소론 파 이종성(李宗城)·이보(李輔) 등도 불려나가 문초를 받았으나, 영조는 불문에 붙였다. 이 사건으로 소론 명문은 거의 몰락했다. 이후 그동안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변란의 시말을 기록한 〈천의소감 闡義昭鑑〉이 편찬되었다.

사도세자사건 [思悼世子事件]

. 1762년(영조 38) 5월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

영조에게는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와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영빈이씨(瑛嬪李氏) 소생으로 효장세자(孝章世子)와 사도세자가 있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40세가 넘어서 태어났는데 효장세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2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 때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와 혼인했다. 그는 10세 때 노론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신임사화를 비판했는데, 이는 사도세자를 모시는 대부분의 궁녀와 내시들이 경종을 모시던 사람들로서 이들에게서 경종의 억울한 사정을 들은 까닭이었다. (→ 색인 : 신임사화).

. 1749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자, 그를 반대하는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와 숙의 문씨(淑儀 文氏) 등이 영조에게 무고를 했다. 이에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꾸짖음으로써 세자는 격간도동(膈間挑動)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렸다. 사도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1761년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金漢耉)와 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자 영조는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자결을 하지 않자, 영조는 세자를 서인(庶人)으로 폐한 뒤 뒤주 속에 가두어 죽였다. 그 뒤 영조는 이를 후회하여 세자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 한편 영조 때는 신임사화에 대한 시비가 계속되어 소론과 남인은 노론을 경종에 대한 역적이라 하고, 노론은 소론을 영조에 대한 역적이라고 했다. 영조는 자신을 즉위시킨 노론의 주장을 지지했는데, 세자가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은 이후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정당성과, 사도세자와 정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나누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벽파, 시파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達城徐氏) ... 1692(숙종 18)~1757(영조 33)(66세) . 영조의 비. 아버지는 달성부원군(達成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이다. 1704년(숙종 30) 숙종의 넷째 아들인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과 혼인했다. 1721년(경종 1) 경종이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 빈이 되었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되었다. 1740년(영조 16) 혜경(惠敬)이라는 존호(尊號)가 붙었으며, 죽은 뒤에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惠敬章愼康宣恭翼仁徽昭獻)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휘호는 단목장화(端穆章和)이다. 소생은 없으며 능호(陵號)는 홍릉(弘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번지 서오릉(西五陵) 내 단릉(單陵) 형태이다.

정순왕후(純王后) 김씨(慶州金氏) 1745년(영조 21)~ 1805년(순조 5) (61세)

. 영조(英祖)의 계비. 시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강빈(姜嬪)의 신원을 주청하다 장살당한 김홍욱(金弘郁)의 현손인 오흥부원군 김한구(金漢耉)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고 1759년 6월 9일, 김한구의 딸인 정순왕후를 왕비로 간택하여 같은 해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고 그가 왕비에 책봉될 때 부모 내외는 물론 조부 김선경도 생존하고 있었다. 심지어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어렸다.

. 간택 당시의 일화로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는 답을 했지만 유독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답하여 영조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화 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로 영조를 감탄시켰다고 한다. 왕비 책봉 이후에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답하여 어린 나이에도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소생 없이 1805년 66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능호(陵號)는 원릉(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東九陵) 내에 영조와 함께 쌍릉(雙陵) 형태이다.

추존왕 진종(眞宗) = 효장세자(孝章世子) ... 1719~ 1728년(10세)

. 영조의 첫째 아들로, 생모는 정빈 이씨다. 당시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상중이었기 때문인지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에는 기록 자체가 없다. 영조가 즉위한 1724년에는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그 다음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27년 조문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 하지만 1728년, 영조가 35살이던 해에 병이 걸려 10세의 어린 나이에 단명했다. 영조는 친히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효장세자는 효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4살의 나이에 졸지에 과부가 된 현빈 조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영조의 병수발을 들면서 홀로 살아야 했는데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불쌍히 여긴 영조가 현빈 조씨에게는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후에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자식뻘인 사도세자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 자식에게도 애정을 보였다 한다. 그러나 현빈 조씨도 남편처럼 병을 얻어서 37살의 나이로 일찍 남편 곁으로 갔다. 영조는 그녀가 삶아주는 밤을 좋아해서 자주 그녀의 처소에 찾아가 밤을 얻어 먹었고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에도 '나를 위해 준비한 밤이 아직 소반 위에 있다' 는 대목이 나온다. 피가 섞이지 않은 후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효순왕후(孝純王后) 현빈(賢嬪) 조씨(豊壤趙氏) ... 1715~1751년(37세)

.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이다. 1727년(영조 3) 세자빈에 간택되어 효장세자(孝章世子)와 가례(嘉禮)를 올리고, 1735년 현빈(賢嬪)에 봉해졌다. 남편이 10 살에 죽어 소생은 없으며 1751년(영조27) 창덕궁 건국당에서 37세로 승하했다. 죽은 뒤 1752년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76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장남(정조)을 입양 받아 승통세자빈(承統世子嬪)의 호를 받고, 정조의 즉위로 왕비로 추존되었다. 능호(陵號)는 영릉(永陵)으로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 산 15-1번지에 진종과 효순왕후의 쌍릉(雙陵) 형태이다.

추존왕 장조(莊祖) = 사도세자(思悼世子) 선(愃)

생졸 1735년(영조 11)~ 1762년(영조 38년) (28세)

. 정식명칭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莊獻世子). 사도세자는 영조가 내린 시호이며, 정조는 후에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고종은 즉위한 뒤에 사도세자를 장종(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으로 추존했고, 대한제국이 설립된 후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하였다.

.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효장세자의 이복동생이며, 정조(正祖)의 생부이다. 이름은 선(愃 )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효장세자(추존황제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40세가 넘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2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5세 때인 1749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28세를 일기로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 남쪽 중량포(中梁浦) 배봉산(拜峰山 ;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안장되었다. 묘호(墓號)를 수은묘(垂恩墓)로 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 정조 즉위년(1776년) 존호가 장헌(莊獻)으로 추상되었고, 수은묘도 영우원(永祐園)으로 바뀌었고, 다시 현륭원(顯隆園)으로 바뀌었다가, 1899년(고종 광무 3) 묘호가 장종(莊宗)으로 추상되면서 원호(園號)에서 능호(陵號)인 융릉(隆陵)으로 올렸다. 묘호가 다시 장종(莊宗)에서 장조(莊祖)로 바뀌고 현재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번지 융릉(隆陵)에 안장되었다. 용주사(龍珠寺)는 융릉의 원찰이다.

헌경왕후(獻敬王后) 혜빈(惠嬪) 홍씨(豊山洪氏) ... 1735년~ 1816년(81세)

.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영조의 차남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이었으나 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의 호를 내렸다.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 아버지 홍봉한(洪鳳漢)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첫째 딸로 태어나, 영조 20년인 1744년에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로는 의소 세손과 정조가 있다.

.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 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년)에는 무덤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여,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 칭하였다. 그러므로 혜경궁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존되었다.

. 능은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1789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능호(陵號)는 육릉(隆陵)으로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 번지에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의 합장(合葬) 형태이다.

홍대용(洪大容) ... 1731(영조 7) 서울~ 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의 한 사람이며,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는 등 조선 후기 과학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홍지(弘之).

할아버지는 대사간 용조(龍祚)이며, 아버지는 목사 역(櫟)이다. 일찍이 당대의 석학이자 노론학파의 중심적 인물인 김원행(金元行)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가운데 박학다식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나갔다.

. 1765년(영조 41)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숙부 억(檍)을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 3개월 동안 베이징[北京]에 체류했다. 이때 중국인 학자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고, 독일계 선교사로 흠천감정(欽天監正)인 A. 폰 할러슈타인(중국식 이름 劉松齡)과 부정(副正)인 A. 고가이슬(鮑友管) 등과 면담하면서 청나라 고증학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사상체계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의 베이징 행은 북학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당시 교우관계에 있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에게 영향을 주어 북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와 3년간 중병을 앓은 후, 1774년 음보(蔭補)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곧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다. 1777년(정조 1)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1778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780년 영천군수(榮川郡守)가 되었다.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곧바로 중풍에 걸려 죽었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 1712(숙종 38)~ 1791(정조 15).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켜 다루는 것을 반대하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서술했으며, 봉건사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할아버지는 울산부사 서우(瑞雨)이고, 아버지는 극(極)이며, 어머니는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로 아버지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벼슬이 주로 외직이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제천·울산·영광·무주·한양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736년(영조 12)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했다. 그 뒤 이곳에 거주하면서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분석하고 〈치통도 治統圖〉·〈도통도 道統圖〉 등을 저술하는 등 주자학 연구에 몰두했다.

. 1746년 이웃 고을인 안산에 살던 이익(李瀷)을 만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748년 이익이 동몽교관으로 추천했으며, 이듬해 만녕전참봉으로 첫 벼슬에 올랐다. 1751년 의영고참사, 이어 정릉직장·귀후 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45세 되던 해 〈동사강목 東史綱目〉을 쓰기 시작해 1759년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20여 년 간 이익·윤동규(尹東 奎) 등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수정·보완 작업을 계속했다.

. 1772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는 익위사익찬이 되었고, 4년 뒤 정조가 즉위하자 목천현감을 지냈다. 그뒤 돈녕부주부·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1790년(정조 14) 동지중추부사에 오 르고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으나, 그가 맡은 직위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령에 따른 예우로 받은 산직(散職)이었다.

제22대 정조(正祖) 산(祘) ... 생졸 1752(영조 28)~ 1800(정조 24). (49세)

재위 1776. 3~ 1800. 6(24년 3개월)

부인 3명, 2남 1녀

효의왕후 김씨 자식 없음

선빈 성씨 문효세자(일찍 죽음)

수빈 박씨 제23대 순조, 숙선옹주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즉위

.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년 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洪麟漢)이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에 따라 즉위 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 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로 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 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 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규장각 설치와 문운의 융성

.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1777년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외각(奎章外閣)이라 하고, 1782년 2월 강화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신축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閣臣)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각신의 양성은 당파의 인물을 멀리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길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 1779년에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 서얼출신으로 재주 있는 인사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1772년 임진자(壬辰字), 1777년 정유자(丁酉字), 1782년 한구자(韓構字), 1792년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1795년 구리로 정리자(整理字), 1797년 쇠로 춘추관자(春秋館字) 등 도합 80여 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했다. 금원(禁苑) 안에는 규장각의 부설기관으 로 봉모당(奉謨堂)·열고관(閱古觀)·개유와(皆有窩)·서고(西庫)·이안각(移安閣) 등을 두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활발한 서적편찬 작업이 이루어져 1781년 〈어정성학집략 御定聖學輯略〉·〈어정팔자백선 御定八子百選〉, 규장각 소장 3만 여 권의 분류 목록인 〈규장총목 奎章總目〉, 1782년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한 〈증보 동국문헌비고〉(146권), 〈국조보감 國朝寶鑑〉, 1784년 〈규장각지 奎章閣志〉·〈홍문관지 弘文館志〉, 1785년 〈대전통편〉·〈태학지 太學志〉, 1786년 〈갱장록 羹墻錄〉, 1787년 〈문원보불 文苑黼黻〉·〈어제춘저록 御製春邸錄〉·〈전율통보 典律通補〉, 1788년 〈동문휘고 同文彙考〉, 1789년 〈해동읍지 海東邑誌〉, 1790년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1794년 〈주서백선 朱書百選〉, 1796년 〈규장전운 奎章全韻〉·〈어정사기영선 御定史記英選〉, 1797년 〈오륜행실 五倫行實〉, 1798년 〈오경백편 五經百編〉, 1799년 정조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 弘齋全書〉 등이 편찬·간행되었다.

탕평책의 실시

.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 하는 등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이었다. 영조대의 탕평책인 완론탕평(緩論蕩平)은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남을 억누르는 방편이 되었으며, 왕권에만 영합하여 권력유지에 부심하여 '세상에서는 탕평당이 옛날의 붕당보다도 심하다고 하는 말이 퍼지는' 정 도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초기부터 홍국영·유언호(兪彦鎬)·김종수(金種秀) 등 노론 중에서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준론탕평은 완론탕평과는 달리 충역(忠逆)·시비(是非)·의리(義理)를 분명히 하는 탕평으로서, 임금의 은혜를 강조하고 각 당에서 군자를 뽑아서 쓰는 '붕당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의 화합에 우선하고 사대부의 화합에는 소극적이었던 데 대한 반성에서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고, 산림(山林)·궁중 세력과의 연결을 끊음으로써 청명(淸名)을 지킬 것을 요구했 다. 이를 위해 즉위 초 김귀주(金龜柱)와 홍인한의 외척당을 와해시켰으며, 홍국영도 제거했다. 1788년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정승으로 등용하여 노론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 정조의 준론탕평은 결국 사림세력에 의한 공론정치의 방향보다는 관료제의 정점이 되는 재상권의 강화를 통한 사림정치 이념의 실현이라는 방향에서 왕권강화를 지향했다. 탕평의 강화를 위해 문풍(文風) 진작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규장각은 이제까지의 여러 관각(館閣)들의 기능을 병합(倂合)하여 권력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기(士氣)·명절을 존중하는 청론을 강조함으로써 준론탕평을 달성할 수 있는 청류(淸流)의 인재를 키우겠다는 또 하나의 청요직(淸要職)으로서 기능했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개혁정치의 지향

. 정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정조가 의도했던 개혁은 1777년 반포된 대고(大誥)에 "민산(民産)을 만든다, 인재를 무성하게 한다, 군사를 다스린다, 재정을 풍족하게 한다."는 4개 항목으로 집약되어 있다. 민산의 문제는 경계(經界)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전제(田制)의 개혁으로 파악하고, 조선 초기의 제도였던 직전법(職田法)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이는 정조 치세 동안에 실시되지는 못했다. 상공업은 말업(末業)으로 파악했으나, 농민의 이농현상에 따른 도시 소상인의 증가에 대해서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실시함으로써 해결을 기도했다. 군사문제는 군문(軍門)의 혼란을 지적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모든 군문의 기능을 병합,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다. 재정의 문제는 축적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전통적인 주자 학자들의 주장인 절약과 검소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고 보았다. 재화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생산력 발달을 강조하는 북학파를 중시하고,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를 받는 등 농업생산력 발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재정확립을 위한 기초 조사로서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양곡 수를 조사한 〈곡부합록 穀簿合錄〉, 전국에 걸친 환곡의 현황을 조사한 〈곡총편고 穀總便攷〉,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한 〈탁지전부고 度支田賦考〉 등을 간행했으나, 구체적 방안을 세우지는 못했다.

. 그밖에 1776년 궁방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던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 을 금지했다. 1777년 서얼들의 허통요청으로 〈서류허통절목 庶類許通節目〉을 정했다. 1778년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기 위해 형구(刑具)의 규격과 품제를 정한 〈흠휼전칙 欽恤典則〉을 발포하고, 도망노비를 추쇄(推刷)하는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1782년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역(曆)을 미리 계산하여 〈천세력 千歲曆〉을 편찬·간행했다. 1783년에는 〈자휼전칙 字恤典則〉을 반포하여 흉년에 버려지거나 굶주린 아이들을 구하는 법을 정했다. 재위 중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사회문제가 되었으나, 서학의 발흥은 정학(正學)인 주자학이 융성하면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보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리하여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지르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으나,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을 처형함으로써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또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장헌세자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 묘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으며, 묘호(廟號)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하고, 1789년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이듬해 용 주사(龍珠寺)를 개수·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능호(陵號)는 건릉(健陵)으로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반지에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 형태이다.

신해박해(辛亥迫害)

. 천주교가 조선의 해서(海西)·관동(關東) 지방의 일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1790년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가 조선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 바오로와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는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교식 상장(喪葬)의 예를 쓰지 않고 조문을 받지 않았으며,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치러 종친들을 분노케 했다.

. 그의 외사촌이자 같은 천주교인인 권상연이 윤지충을 옹호하고 나서고, 이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 전해짐으로써 이 문제는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서학 탄압에 앞장서온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2]에게 보낸 글에서 "저들 지충의 무리는 제사를 폐한 것도 부족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고서도 혼백을 세우지 않았고 부 모가 죽 었음에도 조문을 받지 않으니 천지가 생겨난 이래 어찌 이와 같은 변괴하고도 사 악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죄는 살인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지충의 체포와 사형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노론 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두 사람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을 받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고 난행(亂行)하였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영향[편집])

. 정조는 한편으로는 천주교 탄압을 반대하는 노론 시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주교 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 같은 인물은 귀양 보내는 데 그치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 면서 당시의 상국(相國)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소위 공서파가 대립,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암투가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파견을 보류하였다가, 1794년 주문모 신부를 선교사로 보냈다.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靑風金氏) ...1753(영조 29)~1821(순조 21)(69세)

. 본관은 청풍(淸風). 아버지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이며, 어머니는 홍상언(洪商彦)의 딸이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本宮)에서 가례를 올렸고, 장조(莊祖 :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를 잘 섬겨 영조에게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자식을 얻지 못했다. 궁중 내의 우애를 중시하여 실천했으며, 사정(私情)에 흐르지 않아 수진궁(壽進宮)· 어의궁(於義宮)에서 쓰고 남은 재물이 있어도 공물(公物)로 분류, 손대지 않았다. 검소한 생활로 명망이 높았고, 1820년(순조 20)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했다. 휘호는 예경자수(睿敬慈粹), 시호는 효의이다.

능호(陵號)는 건릉(健陵)으로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1-1에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 박지원(朴趾源, 1737년 3월 5일(음력 2월 5일) ~ 1805년 12월 10일(음력 10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했으며,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후 학문 연구와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 정조 즉위 후 여러 번 학문과 문장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된다.

.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역임했다.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안설 (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며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

(출생과 어린이 시절[편집])

.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축시에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중진 장간공 박필균(朴弼均)의 손자이며, 열상외사(洌上外史) 박사유(朴師愈)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그의 형제들 중에는 2남 2녀가 전하는데 위로 형 박희원과 누나 두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 5대조 박미(朴瀰)의 동생 박의(朴漪)의 아들은 현석 박세채로 소론의 거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인 당원이었으나 숙종 때 노론과 소론이 갈리면서 그의 가문도 노론과 소론으로 당론이 나뉘었고, 박세채는 소론을 선택하였다. 당대인 영조 때의 거유 성리학자인 여호 박필주(黎湖朴弼周)는 그의 재종조부로, 증조할아버지 박태길의 형 박태두의 아들이자 할아버지인 박필균의 사촌이었다. 할아버지 박필주는 지중추부사와 지돈녕부사를 역임한 노론 거물이었지만 당쟁에 뜻을 두지 않고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당쟁에 초연했고 연암 역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쟁에서 거리를 두었다.

1739년 형 박희원이 장가 들었다. 형수 이씨는 16세에 시집와서 어린 시동생인 박지원을 돌보았다. 어려서 그는 옛 사람의 편침(扁枕) 온피(溫被) 같은 것을 흉내 내었다 한다. 1741년 4세 때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박필균의 임지에 따라갔다가 되돌아왔는데, 한번 본 감영의 모양과 칸수를 모두 말하여 신동이라 칭찬을 들었다.

(소년 시절[편집])

. 그는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암기에 능하였다. 그의 가문은 서인과 노론의 명문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박사유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이렇다 할 직업이 없는 포의(布衣)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에게서 양육되었다. 아버지 박사유는 포의로 살다가 늦게 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通德郎)에 오르지만 곧 사망한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에 이르렀지만 당색에는 관심이 없어서 적을 만들지 않았다.

. 1752년(영조 28)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8촌 형 박명원의 영향을 받아 외부의 문물에도 관심을 두었다. 박명원은 자신 외에도 청나라를 견문하고 온 사실들에게서 접한 새로운 사실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1754년(영조 30년) 우울증과 불면증이 나타나 고생하였다. 처음에는 동정적으로 보던 이들은 나중에 그를 미쳤다고 하며 꺼리거나 피하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스스로 극복하려 했고,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울증을 고쳐 보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이때 만난 말동무 민유신은 그의 오랜 지기가 되었는데, 자신의 소설 민옹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해, 거지 광문의 입을 빌려 사회를 풍자한 단편소설 광문자전을 썼다.

(청년기[편집])

. 그는 장인인 이보천과 처삼촌인 이양천의 문하에서 학문과 글을 배웠다. 장인인 이보천에게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이보천의 아우 이양천(李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를 비롯하여 주로 역사서적을 교육 받고, 시 짓는 법, 글과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 고전을 습작하였다. 수려한 글재주를 본 처삼촌인 이양천은 그가 문장가가 되리라고 예견하였다. 수년 간 이보천과 이양천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였다. 처남 이재성(李在誠)은 평생의 친구로 지냈고 동시에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 1755년 연암의 학문을 지도했던 처삼촌 영목당 이양천이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연암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제영목당이공문(祭榮木堂李公文)'을 지었다. 1756년 <마장전>과 <예덕선생전>을 지었다. 이 무렵, 김이소, 황승원, 홍문영, 이희천, 한문홍 들과 북한산 봉원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 그로부터 허생과 변승업 등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는 후일 허생전의 소재가 된다.

(방랑 생활[편집])

.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 때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 때,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이후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과거 공부에 힘썼다. 1760년 할아버지 박필균이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 1761년 초, 요양 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 일본의 서적 등을 새벽까지 보거나 밤새워 탐독하느라 새치가 돋아나고, 수염이 은백이 되었다고 한다.

. 1761년 봄, 단릉 처사 이윤영(李胤永)을 찾아가 주역을 배웠고 이 해에 홍대용(洪大容)을 만났다. 그 뒤 과거 시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해 성균관에 사마시험을 치러 들어가서는 답안지에 답 대신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놓고, 나와 시중의 비웃음을 샀다. 할아버지의 사후 가세는 점점 어려워졌고 집안에서는 그가 과거에 나가기를 원하였다. 이후 각지를 방랑하며 여행하였다. 1754년 충청도에서 효종이 북벌 때 쓰라고 송시열에게 하사했다는 초구를 구경하고 '초구기(貂汨記)'를 썼다.

(과거 낙방과 단념[편집])

. 그 뒤 1765년 집안의 염원을 받아들여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한다. 그해 가을 친구 김이중(金履中)이 나귀를 팔아 마련해준 돈으로 가을에 유언호, 신광온 등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삼일포, 사선정 등 금강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고, '총석정 해돋이(叢石亭觀日出)'를 썼다. 이 글은 후일 《열하일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병조판서를 지낸 홍상한이 이 작품을 격찬했다고 한다. 되돌아와서 <김신선전>을 지었다. 이듬해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했고, 여러 번 과거에서 낙방한 이후 과거 시험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그림 재주도 뛰어나 동리 청년들을 모아 놓고 글과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색으로는 노론 명가였지만 사회의 부조리와 폐단을 계속 지적한 탓에 그의 답안지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그리고 청나라에 존재한다는 신문물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학문 연구와 정치 활동[편집])

(정치 활동과 낙향[편집])

.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 그는 일찍이 양반 사대부가 하는 것 없이 무위도식하는 것과 북벌론을 호언장담하면서 폭이 깊고 소매가 긴 옷을 입는 것과 무예연습을 하지 않는 점을 풍자했다. 그러나 평민들과 하층민조차 양반관료나 재력가에게는 비굴하게 행동하면서 자신보다 지체가 낮거나 미약한 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평민과 하천에 대한 동정심도 거두게 된다.

1767년 아버지 박사유가 사망했다. 백면서생으로 관직에 나가지 못했던 아버지 박사유는 늦은 나이에 음서로 관직에 올랐지만 통덕랑에 머물렀다. 아버지가 죽자 유산을 가난하게 살던 형에게 모두 넘기고 근처 반송방 내에 분가하였다.

.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그들과 교류하였고, 이후 그들과도 깊은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후일 박제가, 유득공 등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도 만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으며 이무렵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1770년 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지만, 회시에 백지 답안지를 내고 나왔다.

.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정조의 측근의 근신인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으면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僻派)를 공격하면서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777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5]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린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영조 38) 경기 광주~ 1836(헌종 2).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 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 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 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 1799년에 저술한 〈전론 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이같은 논리가 가장 강렬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여전제의 내용은 토지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향촌을 30가구의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여장(閭長)의 통솔하에 공동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농민의 투하노동력을 기준 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된 조세제도 개혁책으로서 정액제(定額制)를 취하고, 역제(役制)의 경우 재편성된 향촌제도와 관련시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면서 호포제(戶布制)로의 개혁을 고려했다. 이러한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처럼 여전제는 농민경제의 균산화(均産化)와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통한 사회적 부의 증대를 위해 노동력의 기능을 강조한 공동농장·협동농장적 경영론이다. 이는 종전의 한전론(限田論)·균전론(均田論) 등 토지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개혁론에 비해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 등 농업생산이나 농업경영 전반의 변혁까지도 포괄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특히 〈전론〉에서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상(工商)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견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 생산에 주력하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이 견지되어 사족의 상업·공업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의 사회개혁론과 궤를 같이하여 혁신적 정치 개혁론으로 제시된 것이 〈원정 原政〉·〈원목 原牧〉이다. 여기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원정〉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왕정의 제일책으로 삼고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하며 지방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을 완화하고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파격적인 체제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년에 저술한 정치권력론·역성혁명론으로서의 〈탕론 湯論〉과 이념적 기초를 같이한다. 그는 〈원목〉에서 태고 이래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해 이장(里長)·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약 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민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써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발생에 관한 학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 발생 초기 유럽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한 논리가 되며 해석에 따라서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당시의 역사발전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다만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 같은 정치개혁론은 그의 사회 경제개혁론과 함께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배 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 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 를 연계하여 현실성 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 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 먼저 〈경세유표 經世遺表〉는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하여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 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목민심서 牧民心書〉는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 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제도개혁에 있어서 〈경세유표〉가 전국적 범위에서 국왕·국가가 집행할 것을 모색한 데 비해 〈목민심서〉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사상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정약용은 〈주례〉 속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의 개념을 원용한 상제관(上帝觀)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매개로 이를 군주와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천명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어 항상 유덕(有德)한 사람에게 옮겨진다는 것이다.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군주권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천명 그 자체가 통치권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상제와 직결된 왕권과 상제와 직결된 민의 자주권 회복에 의해 하나의 통일된 통치체계를 수립하려 할 때 그 모습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나타나며 사적 중간지배층의 배제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표이서에서 표방되는 개혁론은 전기에 비해 훨씬 온건한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현실을 크게 고려하면서 실현 가능한 점진적인 방안, 단계론적 시행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의 〈전제 田制〉에서는 우선 토지국유제하 농민의 개별적 점유를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토지국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여 차선책으로 정전제에서 동시에 시행되었던 구일세제법(九一稅制法)만이라도 원용하려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는 토지제도의 개혁보다는 국가재정과 밀접한 조세제도의 개혁, 일체의 중간수탈 배제를 목적으로 한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개혁방안이라 할 수 있다.

. 이 단계에서 다산은 사민구직(四民九職)의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 색인 : 이용후생학파).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에서는 토목공사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도입의 주체인 국가기구가 강력하게 민간산업을 보호·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광산론 역시 천연의 부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배제하여 국가 통제하에 두며 그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화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이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 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둔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 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 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성의 축조 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 1750(영조 26)~ ?

. 북학파 실학자.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이라는 현실을 인정한 기반 위에서 상업·수공업·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체제를 재조 (再造)할 것을 주장했다.

.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 위항도인(葦杭道人). 승지 평(坪)의 서자이다. 11세에 아버지를 잃은 뒤 거처를 자주 옮겨 다니며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 북학파들과 사귀면서 학문의 본령을 경제지지(經濟之志)에 두고 활동했다. 이러한 뜻은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당시 중국은 건륭제(乾隆帝)가 통치하던 문화의 전성기였을 뿐 아니라 〈사고전서 四庫全書〉 등의 편찬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때였다. 여기서 그는 기균(紀畇)·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이정원(李鼎元)·포자경(鮑紫卿) 등 청을 대표하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문물에 감명을 받아 여러 가지 선진기술과 도구를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앞으로의 학문적 기초를 세웠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 北學議〉 내편·외편을 썼다.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이무렵 정조가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자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때 박제가는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뒤 13년간 규장각의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간행하는 한편 국내외의 서적과 저명한 학자들을 접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 1786년 정조가 왕명으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구폐책 救弊策〉을 올리게 했을 때, 전설서(典設署) 별제(別提)의 직에 있으면서 〈병오소회 丙午所懷를 제출했다. 여기서 그는 상공업 장려, 신분차별 타파, 해외통상, 서양인 선교사의 초청, 과학기술교육의 진흥 등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당시 지배층의 이해와는 상반된 것이었으므로 묵살되었으며, 오히려 당시의 심한 당쟁에 휘말려 비판을 받고 급기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상정화운동에 걸려 규제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외국학자와의 교류를 제한받았으며 서적반입도 금지 당했다. 1793년에는 승정원으로부터 내각관문(內閣關文)을 받고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자송문(自訟文)을 제출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조의 후원 아래 1790년 5월 건륭제의 팔순절에 정사(正使) 황인점(黃仁點), 부사 서호수(徐浩修) 등을 따라 유득공과 함께 2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도중 원자(元子: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해준 청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한 정조의 명으로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되어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 1798년 부여현감이 되었으며, 1794년 2월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해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영평현령으로 옮겼다. 1798년 영조가 적전(籍田)에 친경(親耕)한 지 60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가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의 내용을 골자로 한 〈응지농정소 應旨農政疏〉를 올렸다. 〈소진본북학의 疏進本北學議〉는 이때 작성된 것이다. 1801년(순조 1)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4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동남성문 흉서 사건의 주모자인 사돈 윤가기(尹可基) 사건에 휘말려 종성에 유배되었다.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그가 죽은 연대에 관해서는 1805년과 1815년 설이 있다.

※ 조선 말기 실학파는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로 구분될 수 있다

성호학파 [星湖學派]

. 조선 후기 근기(近畿)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성호 이익(李瀷)과 그의 문도들과 멀리는 이황(李滉)의 학통에 연결되며, 가까이는 17세기 허목(許穆)·유형원(柳馨遠) 등 근기남인(近畿南人)의 학문경향을 계승했다. 이들은 이기심성론의 사변적 학문에 치우쳤던 영남남인과는 달리,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문제를 새로 해석하고 실증·실용의 새로운 학풍을 일으켜 한국 유학사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이익은 이황의 성리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는 한편 유형원의 실학정신을 계승하여 방대한 학문체계를 수립했다. 그의 학문적 입장은 당시의 지주전호제를 중심으로 한 경제체제와 노론 전제정치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형성되었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대안 모색이 주된 과제였다. 이에 따라 그의 학문은 현실 개혁적인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 당시의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풍토를 벗어나 훈고학이나 고증학적인 방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서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천주학에 대해서는 천주(天主)·천당·지옥 등의 주요논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면서도 유교의 이념과 일치하는 부분은 긍정하기도 했다.

. 한편 현실개혁의 논리를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에서 구했던 그는 법제(法制)의 완비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지주전호제의 혁파와 한전제(限田制) 실시, 과거제 혁파 등을 주장했다. 아울러 양반까지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도 주장했다. 역사이해에서도 종래의 명분론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비판적·고증적인 파악과 주체적 역사의식을 중시하여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제시했다. 이익의 이러한 학문과 이념은 온건과 급진의 좌·우 양파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즉 경전의 해석과 서양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서, 안정복을 대표로 하는 노장층의 온건주의자들과 권철신(權哲身)을 대표로 하는 소장 층의 급진주의자들로 나누어졌는데 우파는 안정복·황덕길·허전(許傳)으로 이어지며, 좌파는 권철신·정약전·정약용으로 이어진다. 성호학파는 이익으로부터 비롯하여 18세기 한국사상계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고 실학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그 학파 내부에 진보적 측면과 보수적 측면의 양면성을 포함하고 있었다.안정복 계열의 우파는 옛 성현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성실히 실천하겠다고 한 데 대해, 좌파는 권철신을 선두로 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 주자학에 대한 회의와 비판, 서양문화에 대한 급진적 수용 등 성호 학문의 진보적 측면을 발전·확대시켰다. 이와 같은 성호 좌파의 진보적인 사조는 당시의 조선 봉건지배체제에 대한 민중저항의 한 반영이었다.

북학파 [北學派]

. 조선 후기 실학의 한 조류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입각하여 상공업 발전을 중시 한 학파.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한다. 전통적인 주자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명분론에서 벗어나 청조의 선진문명과 우수한 기술을 적극 수용하여 조선 후기 사회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학자들은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이었다. 이들은 인맥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연행사(燕行使)를 수행하여,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의 선진문명을 직접 보고 배웠다. 홍대용은 북학의 토대가 되는 북경행(北京行)을 제일 먼저 주장하여 북학파의 선구자로 간주되며, 그의 북경기행기인 〈연기 燕記〉에 실린 청나라 문명에 대한 입장은 이후 북학파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북학이라는 말은 박제가의 〈북학의 北學議〉 자서(自序)에서 비롯되었는데, 박제가는 청조문명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배우자는 뜻으로 북학을 주장했던 것이다. 북학파가 주장하는 '학중국'(學中國)의 실체는 청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서구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상공업의 유통과 생산기구, 일반 기술 방면의 발전을 바탕으로 사회모순을 개혁하고 국가발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었다. 북학에 의한 이용후생의 논리는 생산과 생활에 있어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을통한 경제의 활성화, 국부(國富)의 증진과 이를 위한 사회제도의 개혁에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반청숭명(反淸崇明)이라는 전통적 화이관, 주자학적의리관, 명분론에 입각한 북벌론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 병자호란 이후 조선왕조 지배계층의 북벌론적인 사고방식이 지속됨에 따라 현실적으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청나라의 문화를 선진문화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중국 문화의 수입을 거의 봉쇄하다시피 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선진문화 수입의 유일한 통로를 막아놓은 채 주자도통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문화적·사상적 폐쇄주의를 지켜나갔다. 북학파의 학중국이라는 대외인식은 이러한 폐쇄적 소중화 의식 및 화이관에 대한 정면도전 이었다. 북학론에 의한 숭청(崇淸)은 북벌론의 숭명(崇明)과 동일한 사대사상이 아니라,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불평등한 화이관적 세계의식을 극복한 자립사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종래 화이관에 의한 수직적 세계관은 '화이일야'(華夷一也)라는 수평적 관계로 전개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뿐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유럽의 자연과학·서양사상·천주교 등을 의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우수한 서유럽 자연과학을 도입하자고 주장함과 동시에 이를 배우고 연구하여 실용적인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노력했다.

. 북학파는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상인·수공업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유통경제의 확대와 생산의 기술적 혁신으로

국부증진을 도모하고자 했다. 즉 상업의 진흥이 국부의 요체라고 인식했다.

사회빈곤의 원인을 낮은 생산력에 따른 절대적 빈곤과 물자의 지역적 편재에

따른 상대적 빈곤의 2가지 측면으로 파악하면서, 유통경제의 지역적 편중성과

고립화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적인 시장 망 형성, 국내시장의 단일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고립분산적인 자연경제의 낮은 생산력을 극복하는 한 방안이

었으며, 전국적 시장권 형성을 위해 수레의 사용과 도로정비를 통해 육상유통

망을 강화하고, 강상(江上)과 해상 유통망의 개선을 주장했다. 당시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이 지주경제와 결합되면서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하고 있는 상황

에서, 이들의 상공업 진흥론은 특권층과 결탁된 서울의 육의전과 같은 어용상

인들이나 개성상인을 위시한 도고상인, 대상인 층의 독점적 이익을 반대하고

대중의 소비생활에 직결된 일반 소경영·소생산자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성장을

옹호·대변했으며, 반도고론(反都賈論) 및 통공발매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 시장권의 통일과 더불어 중국 및 연안 제국과의 해로교역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박제가는 '수로통상'(水路通商)을 통하여 중국과 교역함으로써 조선

의 면(綿)·저(苧)·마포(麻布)·해산물 등과 중국의 면단(綿緞)·모직물·약재·무기

등을 교환할 수 있는 경제적 이득뿐 아니라, 중국의 여러 기용제도(器用制度)

를 배울 수 있으며 천하의 도서를 수입하여 지견(知見)을 넓혀 속된 선비의

굳어 있는 식견을 타파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북학파의 상공업 진흥론은 직업의 귀천관계를 긍정하고 상업 활동을

천시하는 사회적 인식과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었다. 이들은 이용

후생을 위한 상공업진흥론의 관점에서 중본억말(重本抑末)의 본말사상을 비판

하여 본(本)=농(農)과 말(末)=상(商)과의 수평적 상호 보완관계를 강조하고,

사민개로(四民皆勞)의 원칙에 입각하여 양반제도의 허구성 및 사농공상(士農

工商)이라는 지배와 피지배의 수직적 신분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결과

국부를 낭비하는 양반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문학작품(박지원의 〈호질 虎

叱〉·〈양반전 兩班傳〉)에 반영되었다. 그들은 말리(末利)로서의 상업을 사농

공과 동일한 수준에 올려놓으면서, 사족이 상업에 종사할 것을 주장했다. 또

한 사민개로의 원칙에 따라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장정은 노동해야 하며,

반이라도 노동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 그들은 상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들의 농업상공업 진흥과 더불어 대토지소유제를 개혁하는 동시에, 농업경영을 개선하고 농업생산을 유통경제에 긴밀히 연결시켜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함으로써 농업경제의 안정과 농업생산력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박제가는 농기구·비료·파종·채종기술·영농기술·구전·농우·농지개량·구황·잠사·목축 등 농업 전분야에 걸친 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중국의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낙후를 비교하면서 농업기술의 도입을 주장했다. 박지원은 〈과농소초 課農少抄〉에서 한전론(限田論)을 전개하여 대토지소유제를 비판하고, 농구개량, 수법개량, 수차의 사용 등을 통해 농업생산력 확대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공업 발전과 상품유통의 원활화, 기술혁신과 생산의 촉진, 해외통상의 장려 등을 통해 국부(國富)를 증대하고자 한 해외통상론·기술도입론은 19세기 중·후반 개화파의 개항통상론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제23대 순조(純祖) ... 생졸 1790(정조 14)~ 1834(순조 34) (45세)

재위 1800. 7~ 1834. 11(34년 4개월)

부인 2명 자녀 1남 5녀

순원왕후 김씨 익종(효명세자), 女 ?(일찍 죽음), 명온 공주, 복온 공주

덕온 공주 등 1남 4녀

숙의 박씨 영온 옹주

. 재위기간 동안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확립으로 국정을 주도하지 못했으며, 봉건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대규모의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즉위와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수렴청정

.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4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동생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세도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 순조는 1804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 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洪景來) 등이 부농(富農)·사상(私商)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 항쟁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세도정치 견제 시도

.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세자는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김노(金潞)·홍기섭(洪起燮)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김조순을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안동김씨를 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안동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대리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은 유배되었으며, 순조의 안동김씨 견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안동김씨 일문은 풍양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능호(陵號)는 인릉(仁陵)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 산 13- 1에 순원왕후와 합장(合葬) 형태이다.

을해박해(乙亥迫害) ... 을해박해는 을해년(1815. 순조15년)

.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일어난 조선정부의 천주교 박해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종결된 후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우들은 경상도와 강원도의 산골로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며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14년 전국에 기근이 들었다. 이 때 교우촌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과 지방관이 중앙 정부의 지시없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 1815년 4월, 청송의 노래산(老萊山)에서 고성운(高聖云)·고성대(高聖大) 형제 등 35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경주 진영으로 압송되고, 이 중 19명은 배교, 2명은 옥사하여 14명이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같은 시기 진보(현 영양)의 머루산에서는 김시우(金時佑)를 포함한 33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안동진영에서 20명이 배교하고 나머지 13명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같은 지역 타 교우촌에서도 김종한(金宗漢),김희성(金稀成) 등 6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대구감영에는 33명의 교우가 갇히게 되어 경상감사 이존수(李存秀)가 조정에 이들의 처형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처형은 1년 6개월 후에야 결정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35명의 교우 중에 26명이 옥사, 병사하고 1916년 12월 16일(음 11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는 고성운, 고성대, 김종한, 김희성, 김화춘, 최성열(崔性悅), 이시임(李時任) 등 7명의 교우들만 남아 있었다.

. 1815년 초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원주감영에 갇혔으나 대개는 배교하교 석방되거나 유배되었고 김강이(金綱伊)만이 12월 5일(음 11월 5일) 옥사하였다. 을해박해는 이것으로 형식상 종결되었다.

(결과[편집])

. 경상도와 강원도에 새로 형성된 많은 교우촌들이 파괴되었고, 100여 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30여 명의 교우가 순교했을 뿐 아니라, 체포되지 않은 교우들도 재산을 약탈당하고 쫓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어 이 지역에서 천주교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서얼허통(庶孼許通)

. 서얼은 정처(正妻)가 아닌 첩에게서 난 자손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시대 서얼은 하나의 특수한 신분층으로서 법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정처의 자식과 달리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 당했으며, 재산상속과 가족 내의 위치에 있어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예컨대 그 차별은 허균(許筠)이 쓴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양반인 아버지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호부호형(呼父呼兄)을 못해 결국 이를 핑계로 집을 떠나게 되는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 서얼은 이처럼 조선시대 전시기를 통해 차별받았고, 중기와 후기에는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 같은 서얼차별은 중국에는 없는 우리의 독특한 풍습이었다. 이를 시행한 이유는 양반층을 지배계급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를 보다 철저하게 강화·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신분적으로 서얼이 문제되는 것은 같은 지배층인 사족(士族)의 혈통이면서도 어머니가 첩이거나, 양인이 아닌 천인 출신일 경우에 더 큰 차이가 있다.

. 서얼문제는 조선의 성립과 함께 대두했다. 그 원인은 고려말의 병축(幷畜:처나 첩을 여러 명 두는 일)에 따른 정처 구별 문제(처첩 분별 妻妾分別)에서 비롯된다(→ 색인 : 처첩구별). 정부가 수여해야 할 정처에 대한 봉작과 제사권을 둘러싼 적서(嫡庶)의 차이, 특히 재산상속에 대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국가로부터 수조권을 부여받은 토지를 승계하는 문제는 정부의 입장에서도 큰 문제였다. 1412년(태종 12)에 정부는 우선 병축 문제를 법적으로 규정했으며, 〈대명률〉에 의거해 여러 명의 처를 두는 일을 금지시키고, 어길 경우 장형(杖刑)을 가하도록 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까지도 다처제의 풍속은 없어지지 않았고, 그만큼 처첩분별의 문제도 계속 분쟁화 되었다. 처첩 분별의 조치와 함께 태종 때는 서얼차별도 점차 법으로 정해졌다. 법적인 서얼차별의 방향은 서얼의 관직 등용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입안되었다.

. 1415년에 우부대언 서선(徐選) 등 6명은 종친과 각 관리의 서얼 자손을 현관(顯官)으로 등용되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 논의는 결국 법으로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법전에 실린 내용은 "재가(再嫁)하거나 실행(失行:정조를 잃는 행위)한 부녀의 자손과 서얼 자손은 문과의 생원시·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법전 안에 서얼에 대한 한품서용(限品敍用:제한된 품계로 등용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 나와 앞의 내용과 모순된다. 같은 법전 안에 모순된 조항이 실리게 된 이유는 양 법조문 성립의 시기 차이와 서얼 차별을 둘러싼 정치세력간의 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55년(명종 10)에 서얼차별 문제가 확실시되는데, 그해 〈경국대전〉을 주해(註解)하면서 앞 조문의 '자손'(子孫)이란 말을 아들과 손자만이 아닌 '자자손손'으로 해석했다. 서얼 차별은 계속 정치적으로 문제되었고, 차별을 철폐하자는 서얼허통 논의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색인 : 서얼허통론).

. 허통 논의는 서얼금고가 굳어지는 시기인 1553년(명종 8) 당시에도 영의정 심연원, 좌찬성 윤형원 이하 여러 대신들이 제기했다. 허통논리는 사람의 재능과 품성이 출생처의 귀천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등용하되, 청요직(淸要職)은 주지 말자는 제한적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들은 신분질서와 관련하여 반대했다. 그 요지는 첫째, 존비(尊卑)의 등급을 엄격히 해야 하고, 둘째, 선왕의 법을 지켜야 하며, 셋째, 이들을 등용하면 명분이 문란해진다는 것이다. 이후 두 주장은 서얼허통론 찬반의 기본논리로 자리 잡았다. 선조 대에 이르러 이이(李珥)에 의해 다시 서얼허통론이 제기되었다. 그 목적은 군량과 군마조달을 위한 것으로, 쌀 80석(石)을 납부하면 허통을 허락했다. 허통은 또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반적인 납속책(納粟策:일정액을 정부에 내고 벼슬을 받는 것)의 확대를 통해 더욱 큰 범위로 확장되었다. 이후 허통 논의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의 해체라는 사회변화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예컨대 대표적인 정통 주자학자였던 송시열(宋時烈:1607~89)도 제한적이나마 허통을 긍정할 정도였다. 또 논의가 활발해지는 1680년(숙종 6)에는 돈령도정(敦寧都正) 김수홍(金壽弘)이 허통을 상소하자 남인 계열의 윤휴(尹鐫)도 이에 찬동했는데, 그는 양첩(良妾) 소생인 경우 허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때가 되면, 서얼들이 집단적으로 상소하여 허통을 청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1694년 이후 정권을 잡은 소론은 납미허통책(納米許通策:일정 액수의 쌀을 내고 허통하는 것)을 폐지해 금고법을 폐기하려고도 했다.

. 1708년에 정부는 서얼 자신의 일대(一代)만 업유(業儒)·업무(業武)라 하고, 아들 대부터는 유학(幼學:士族으로 아직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 부르게 했다. 이 조치는 1745년(영조 21)에 나온 〈속대전〉에 그대로 실렸는데, 그 뜻은 아들 대부터는 양반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후 실제로 서얼에 대한 차별은 아직 법적으로 존속했지만, 1772년 정부는 끈질기게 반대해온 서얼의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합칭, 사대부의 상징적 관사를 의미) 청요직 임명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 서얼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규사 葵史〉와 〈순조실록〉에 한 나라의 반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그 숫자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정조의 등장은 서얼허통정책에 더 큰 진전을 가져왔다. 정유절목(丁酉節目:1777년에 내린 정치지침서)이라는 조치를 내려 서얼 차별에 대한 명분은 인정하면서도 허통의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또 실제로도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북학파의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의 서얼 출신을 임명했다. 서얼 출신의 등용금지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그들이 대거 고위직에 진출한 것으로 보아 한말(韓末)에는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삼정(三政)의 문란

.조선 후기 전정, 군정, 환곡의 조세 제도 운영이 문란해져 사회에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된 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많은 농민들이 경작지와 가족을 잃어 생산력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토지를 결수로 정리한 양안과 군역 대상자를 호별로 정리한 군안에는 이런 사회적 변화가 반영되지 않았고, 군현별로 할당된 세금 총액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결과적으로 한 사람이 지는 조세의 부담이 크게 늘었다. 경제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빈농이 부농과 같은 대동, 토지세, 군역세, 환곡 이자 등을 부담하면서 더 큰 고통에 시달렸다. 지방 수령이 부정부패와 탐욕으로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에게 군역을 징수하거나 부농이 뇌물로 군역에서 빠지면 빈농이 대신 채우는 모순이 발생하였다. 원래 10%였던 환곡의 이자도 30%까지 늘어 농민들을 괴롭혔다. 삼정의 문란은 신분제의 해체와 맞물리며 사회 혼란과 19세기 농민 항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중세 조선의 해체를 앞당기게 하였다.

삼정(三政) ... 조선시대 조세인 삼정 [三政]이란

. 조선 후기에 국가 또는 공공기관에서 백성으로부터 수취한 전결세·군역·환곡을 중심으로 한 조세운영 과정의 일반을 일컫는 말.

조선왕조는 삼정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제 수취를 통해서 일체의 재정을 마련하여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세는 국가가 일반농민의 잉여생산물을 취득하여 경제적 지배를 실현하고 있다는 표현이며, 부세 수취가 이루어지는 향촌사회의 운영에 국가가 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었다.

. 조선 전기 조용조(租庸調)체제로 상징되는 부세제도는 16세기 이래의 사회적·경제적 변동에 기인하여 크게 변화했다. 우선 17세기 초부터 대동법이 실시되어 공물 수취가 호역(戶役)에서 토지세로 바뀌었으며,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구성되어 실제 상번입역(上番立役)함으로써 인신적 지배가 이루어졌던 군역체제도 점차 인신적 속박이 약화되는 방군수포(放軍收布)제도로 변질되었다. 1750년에는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양인농민의 군포부담이 경감되고 그중의 일부가 결전(結錢)·결작(結作)이라는 형태로 토지에 부과되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도 진상제도나 군역의 일부에는 인신(人身)이나 호(戶)에 대한 부담이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의 조세는 토지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토지의 생산성 향상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조세 수취의 원칙이 토지와 민을 통일적으로 지배하던 형태에서 토지를 매개로 민을 지배하는 형태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춘궁기에 절량(絶糧) 농가에 양곡을 대여해줌으로써 농민들의 재생산 기반이 되었던 환곡(還穀)제도가 점차 중앙 각 아문 및 지방관청의 주요 재정원으로 변하면서 부세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부세 제도는 18세기 중엽 이래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이라는 삼정체제로 확립되었다. 삼정체제하에서 부세 제도의 운영은 총액제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총액제는 국가가 군현 단위의 수취 총액을 미리 규정하고 담세자의 증감에 관계없이 공동부담하게 하는 방법으로 전정의 비총법, 군정의 군총제, 환곡의 환총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삼정체제 역시 제도 성립의 전제가 되는 사회적·경제적 변화 및 이에 대응하는 국가 정책에 따라 그 운영의 원리와 방식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 전결세를 징수하기 위해서는 우선 양전 사업을 행했다. 즉 결부제를 바탕으로 전품을 6등으로 구분하고 매 20년마다 1번씩 개량하여 양안(量案)을 작성하게 한 후, 이를 통해 각 군현의 결총(結總)·결세가 확정되면 민에 대한 배정작업을 진행했다. 전결세의 수취는 작부제(作夫制)에 의거하여 현물로 거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작부제는 납세조직을 만드는 과정으로 다음과 같다. 먼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 중 수세 대상이 되는 토지의 결수를 작성하고, 그 다음으로 개별 농민의 수세대상의 토지를 모아서 4결 또는 8결 등 일정한 면적단위로 납세조직을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군현에서 당해년도 조세량의 대략을 의논하여 1결당 조세총액을 최종 확정하여 그 내용을 문서(계판)로 완성했다. 이와 같이 1결당 조세 총액이 확정된 후 관에서는 대동·전세·군포 등의 상납시기에 따라 해당 색리(色吏)가 각 납세조직의 조세수납을 대행하는 호수(戶首)들로부터 각 조직의 조세를 수납하여 서울에 상납했다. 1결당 납부 총액인 결가에는 전세(6두)·대동(12두)·삼수미(1두 2승)·결전(5전) 외에 각종 시치(柴雉)미, 선가(船價)미, 가승(加升)미, 인정미, 가급(加給)미 등 운송과 징수과정에서 소요되는 각종 부과세 외에 읍용(邑用)분으로서 민고미, 경주인·영주인 역가미, 진상첨가미, 전관(轉關)미, 간색(看色)미 등 수많은 잡세가 부과되었다. 결가는 현물인 쌀로 산정되었으나 화폐납의 진전에 따라 결가 몇 냥으로 산출되기도 했다. 결가는 지역과 부과 토지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으며, 특히 19세기에는 각종 군역·환곡·잡역세 등이 토지에 부과되었기 때문에 계판 내의 액수와 함께 계판 외에서 결렴화 되는 액수가 많았다.

. 군정은 호적을 근거로 작성되는 경안(京案)·외안(外案)의 군총에 따라 시행되며, 첨정(簽丁)한 후 해당 응역자로 하여금 자신의 군역에 따라 군포를 납부하게 하거나 입역하게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군포의 징수방법은 화폐와 면포를 반반씩 바치거나 일률적으로 토지에 부과시켜 화폐로 징수한 후 해당 군문에 납부할 때 비로소 면포를 구입하는 경우가 있었다. 군역은 중세 신분사회에서 특히 일반농민의 사회적 지위를 강력히 규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담을 져야 하는 농민들의 피역 저항이 두드러졌다. 각급 관청의 재정수요에 따라 군액은 증가하는 데 비해서 신분제 변동과 피역으로 인해 양역농민의 수는 감소되고 있었던 것이다. 요호·부민 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피역해갔고 군안(軍案)에 그대로 등록되어 있는 이들은 대부분 빈농들이었는데, 이러한 빈농들이 피역으로 인해 일탈된 궐액 분까지 부담해야 했다. 따라서 이 군역세는 다른 조세에 비해 총액제로 인한 폐해가 가장 컸던 것으로, 총액제의 시행에 따른 모순으로 인해 허액 첩역 유망번전(流亡番錢)의 납부를 둘러싼 폐해가 크게 나타났다. 당시 각 군현에서는 군역세를 보충하기 위해 군포계(軍布契)나 역근전(役根田)처럼 공동납적인 군포납부 방안을 모색했다. 군포계는 상 하민을 막론하고 일률적으로 일정 자금을 내어 고리대를 한 후 그 이자로서 군포와 군미를 납부하는 방안이었으며, 역근전은 군역부담자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 그의 토지를 마을에 소속시켜 소출로써 해당 군역을 마련하는 방안이었다. 이보다 발전된 방안으로 동포제(洞布制)가 시행되었는데, 동포는 허구화된 군액보충을 위해 각 동리별로 할당하고 각 동리는 호구 및 군정의 다소를 참작하여 양반·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가호마다 일정량의 전 또는 포를 내게 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서는 동포·이포(里布)의 방안을 넘어서서 모자라는 군역을 토지에서 마련하고자 하는 군포의 결렴화현상이 나타났다. 즉 종전에 개인 단위로 포를 거두어들이던 것 대신 토지를 단위로 해서 포를 거두는 결포를 채택했다. 이러한 결포는 토지를 소유한 양반관료들에게도 포를 부과하는 것으로, 신분제에 입각했던 전통적인 군역운영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결포가 정부에서 용인되지는 않았으나 사정이 다급한 고을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결국 군정에 있어서의 변화는 신분제의 붕괴로 인한 군역의 지세화(地稅化) 경향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 환곡 18세기말 이후 은 빈민구휼의 성격에서 벗어나 하나의 부세로 정착되었다. 이는 이자 곡의 일부나 전부를 중앙에 상납하여 중앙 아문의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회록(會錄)제도가 창설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세도 정권기에 중앙 재정의 파탄이 만성화되면서 중앙의 각 아문은 물론 지방의 감영·병영·진영, 그리고 군현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환곡을 설치·운영하여 주요 재정원으로 삼았다.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 권9 환향의(還餉議)조에서 "나라 재용의 반은 부세에 의존하고 반은 환곡에 의지한다."라고 하여 환곡의 부세적 성격을 비판했으며, 나아가 "(환곡이) 부렴(賦斂)이지 어찌 진대(賑貸)라 할 수 있는가? 늑탈이지 어찌 부세라 할 수 있는가?"라 하여 그 수탈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환곡의 운영을 보면 12월 이후에는 빈민 중 원하는 사람에게 분급하고 대부분의 민호가 분급을 원하는 시기인 2월부터 보리추수 이전까지는 통차(統次)에 따라 지급해 주었다. 특히 흉년 시 지급을 위해 매년 환호의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환곡의 분급량을 결정했다. 환호의 등급 결정과 운영은 군현의 이서, 창감색, 면 리임이 담당했다. 그런데 환곡의 부세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분급 대상의 확보와 안정적인 징수방법이 적극 모색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수환호(受還戶)와 불수환호(不受還戶)를 구별하지 않고 인구수에 따라 등급을 정하여 모든 호에 환곡을 분급하는 호환제(戶還制)였다. 아울러 환곡의 분급과 수봉을 각 면리에 맡긴 이환(里還) 및 환곡 운영을 위한 별도의 통조직을 이용한 통환(統還)이 있었고 노골적인 결환(結還)조차 시행하고 있었다. 특히 환곡의 경우 그 운영과정이 전적으로 지방 수령과 이서들에게 일임되었기 때문에 지역 내 농민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어 이미 빈민 구휼제도로서의 성격은 물론 선별 환호에 대한 부과의 원칙도 상실된 채 농민을 착취하는 부세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 이처럼 19세기에 들어와 군포와 환곡은 물론 잡세의 대부분이 토지에 집중되는 현상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조세의 토지 집중현상은 농민층 분해에 따라 몰락하고 있었던 빈농들의 담세능력의 결여를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 신분제의 붕괴와 사회변동에 의한 봉건적 수취방식의 전변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중·후반에 나타나는 도결세·호포제의 존재는 새로운 경제 질서에 조응하는 것이자 중세적 조세제도에서 근대적 조세제도로 나아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색인 : 삼정문란)

홍경래(洪景來)의 난

. 1811년(순조 11)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약 5개월에 걸쳐 평안도지역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봉기로, 평안도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1862년(철종 13)의 임술 농민항쟁, 1894년(고종 31) 갑오 농민전쟁과 함께 19세기에 일어난 대표적 농민항쟁이다.

(홍경래의 난 원인 배경)

. 세도정치 이래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 것은 삼정이 문란해진 것뿐만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에는 흉년이 잦고 전염병이 만연해 민심이 흉흉해져갔다. 이에 따라 유언비어나 도참설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순조 4년 4대문에 <정감록>등이 나붙고 정부를 비방하는 쾌서, 벽보가 사방에 나붙어 민심을 더욱 혼란하게 했다. 세도정권하에서의 가혹한 착취가 민심의 이반을 일으켰고, 순조 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터졌다.

.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의 다복동에서 대규모로 조직적인 반란을 주도했다.

그는 몰락 양반으로서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과 공모해 지도층을 형성하고, 영세농민 광산촌민, 중소상인 등 3,000여 명을 규합했다. 그리고 서북지방민에 대한 차별 대우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세도정권에 항거하는 대규모의 민란을 일으켰다.

. 봉기군은 10여 일만에 일근 일곱 고을을 장악하고 농민의 호응을 받아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패퇴해 정주성으로 들어가 3개월 동안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다. 정주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요헌 등이 이끄는 조선 정부군은 성 밑으로 땅굴을 파고 폭약으로 성벽을 폭파하고 진입했다. 마침내 홍경래는 전사하고 2,000여 명이 처형되면서 4개월 만에 홍경래의 난은 평정되었다.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安東金氏)

.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1789년 6월 8일/음력 5월 15일 ~ 1857년 9월 21일/음력 8월 4일)는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정비(正妃)이자 문조(효명세자, 文祖)의 어머니이며 헌종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정식 시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순원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王后)이며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씨(靑陽府夫人 沈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애[편집])

. 1789년 6월 8일(음력 5월 15일)에 태어났다. 시파 계열이자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아버지 김조순의 영향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순조의 유력한 세자빈으로 떠올랐고 초간택과 재간택을 거쳐 사실상 세자빈으로 확정되었으나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최종적인 삼간택이 미루어졌고 결국 순조의 즉위 2년 뒤인 180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 1805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순조의 장인이자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은 김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등의 안동 김씨 시파를 등용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대규모 숙청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 이후 순원왕후는 1809년에 맏아들인 효명세자를 낳았는데 효명세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순조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당시 순조는 안동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19년, 풍양조씨인 조만영의 딸을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는데 훗날의 신정왕후이다.

.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는데 이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세자는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으나 1830년, 대리청정 4년 만에 갑작스럽게 급서하였고 1834년에는 순조마저 승하하자 당시 8세였던 왕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순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헌종의 왕비를 자신의 친척인 김조근의 딸로 맞아들였으니, 이가 헌종의 정비인 효현왕후이다.

(순원왕후의 한글편지)

. 그러나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녀는 친가인 안동김씨 세력과 결탁하여 장헌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원범(元範)을 강화도에서 궁으로 데려와 덕완군(德完君)으로 책봉하고 자신과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니 조선의 제25대 왕인 철종이다. 철종을 즉위시킨 뒤에도 그녀는 철종의 왕비를 다시금 안동김씨인 김문근의 딸(철인왕후)로 맞아들여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이어나갔으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1857년 9월 21일(음력 8월 4일), 창덕궁 양심각(養心閣)에서 69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호(陵號)는 인릉(仁陵)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 산 13-1번지에 순조와 합장(合葬)되어 있다.

. 이후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년)에 남편 순조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존되자 그녀도 함께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고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에는 '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祔左)'라는 묘비가 새로 세워졌다.

.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33통의 편지로 구성된 《순원왕후어필봉서》(純元王后御筆封書)가 있는데 가문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당대 정치에 대한 관심 등을 표현하였고 글씨도 우아한 궁체(宮體)로 되어 19세기 한글 편지의 특징과 언어, 서체 이해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세도정치(世道政治)

. 세도 정치(勢道政治)는 조선시대 왕의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委任)을 받는 형식으로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일이다. 세도 정치는 그 형태에 따라 정조 이전과 이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반정치의 파탄과 세도[편집])

. 영조·정조와 같은 뛰어난 군주가 탕평책을 쓰고 있는 동안은 어느 정도 정치의 안정을 기할 수가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정조 초년에는 정조를 보호한 공이 있는 홍국영이 도승지로 있으면서 정권을 농단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아 정권에서 배제되었다

.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척세력은 왕권을 압도하고, 이른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즉 순조 초에 정조의 유명(遺命)으로 안동김씨 김조순이 국구(國舅)로서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는데, 이에 따라 그의 일족은 모두 영달하여 노론인 안동김씨는 많은 관직을 차지했다.

. 이렇게 권력을 독점하던 안동김씨의 전권시대는 풍양조씨라는 강적을 만나 일시 후퇴하였다. 그것은 익종(翼宗)의 비(妃)가 조만영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헌종 때에는 조씨 일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조씨는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비가 김문근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세도가 안동 김씨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 이러한 형세였으므로 종실(宗室)이라하더라도 김씨 일문의 세력에 억눌려 살아야 했으며, 다른 세력이 안동김씨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 또한 희박해졌다. 따라서 정치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유교적인 관료 정치라는 무너지고, 붕당 사이의 세력투쟁 시대로부터 척족(戚族)이 정권을 농단하는 시대로 변화한 것이다.

. 왕실의 외척이 정권을 독차지함으로써 척족의 가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여 정치 기강이 더욱 문란해졌다. 그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으며, 많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 대가를 농민에게서 짜 내어 자신의 이익만을 얻어 갔다.

. 당시 재정을 확충하는 제도는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이었으며, 통틀어 삼정(三政)이라 한다. 세도 정치와 맞물려, 삼정은 날로 문란해졌다. 전정에서는 삼수미·대동미·결작·도결 등의 폐해가 극심했고, 군정에서는 황구첨정·백골징포·족징·인징 등의 각종 편법이 생겨서 농민을 괴롭혔다. 환곡 또한 고리(高利)로 이익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반작·허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민을 괴롭혔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 위협했고,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정조 이전[편집])

. 정조 때 홍국영이 세도 정치를 하기 전의 세도(世道)는 단순한 정치권력보다는 어떤 지도이념과 공정한 언론을 주체로 하여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잡으려는 사상적·도의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학식이나 덕망을 가져야만 되었고, 따라서 왕도 높은 관직을 주어 우대하였다.

. 예를 들면 중종 때의 조광조는 교학(敎學)의 최고위 직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효종·헌종 때의 송시열은 예조참판에서 신임을 받기 시작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뒤에 우의정·좌의정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세도의 신임과 위임을 받았다.

(정조 이후[편집])

. 그러나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치세(治世)의 도리를 주장하여 정신적으로 왕을 보좌하기보다는 실지로 정치권력의 행사를 위임받아 권세를 부리는 정치 형태로 변질되면서 세도(世道)는 흔히 세도(勢道)로 일컫게 되었다.

홍국영의 세도[편집]

. 정조 때의 홍국영은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공으로 도승지 겸 금위대장에 임명되어 왕의 신변 보호를 맡는 한편 모든 정사도 그를 거쳐 상주(上奏)하고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래서 요즘 흔히 쓰이는 뜻으로서의 세도 정치는 홍국영에서 시작된다.

. 홍국영 이후 세도 정치의 특색은 대개 척신(戚臣)으로서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면 관직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지명되었으며, 치세의 도리보다는 상하의 민정과 신임의 동향을 조사 보고하고 인사 행정에까지 직접 참여하여 권력의 남용을 초래함으로써 외척(外戚)의 발호를 보게 된 데 있다.

홍국영 이후의 세도[편집]

. 홍국영의 세도는 그의 부정과 부패 때문에 1780년(정조 4년)에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가 불과 12세에 즉위하게 되자, 대왕대비였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통하여 경주김씨 중심의 세도정치를 시작하였으나 수렴청정을 거둔 이후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아 김조순이 정권을 잡아 경주김씨 세력을 숙청하고 이듬해에 그의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비가 되면서부터 외척 안동김씨가 행하는 세도 정치의 기틀이 잡히게 되어서 중앙의 요직은 그의 일족(一族)이 모조리 독점하였다. 그 뒤 익종의 비(妃)로서 조만영의 딸(신정왕후)이 들어서면서 헌종 때에는 할머니 순원황후 김씨가 실권을 갖게 되어 친정인 안동김씨와 그의 외가인 풍양 조씨간에 암투가 벌어졌다.

. 철종이 즉위하고는 그 비(妃)인 철인왕후가 김문근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안동김씨가 세도를 잡게 되었다. 비록 왕족이라 하더라도 김씨의 세도에 억눌려 살아야 되었으니, 가령 왕족인 이하전이 과거 시험장에서 김씨의 자제와 싸워 패하고는 뒤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온갖 협잡이 성행하여 정치의 기강은 문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잡고 안동김씨의 세력을 꺾어, 한때 독재적인 세도정치를 이룩하여 외척이 발흥하는 세도정치의 폐단이 없어지는 듯하였으나 얼마 뒤에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축출되고부터는 다시 한말까지 여흥민씨 일족이 외척의 세도정치가 그대로 지속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뒤에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민씨가 1천 명을 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비록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갑오개혁, 독립협회 등 민씨 이외의 세력들이 활동하기는 했지만, 이전 민씨의 세도정치와 그로 인한 개혁의 미비함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요인 중 하나임은 부인 할 수 없다.

(주요 가문[편집])

신 안동김씨[편집]... 신 안동김씨는 조선 후기 순조·헌종·철종의 3대에 걸친 왕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세도정치를 행하였다.

정조 때 홍국영이 세도정치를 행한 이래 역대 제왕은 나이가 어려 세도정치가 더욱 본격화되었다. 순조가 11살에 즉위하자 김조순이 자기 딸을 왕비로 삼아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많은 안동김씨 일파가 요직에 앉았는데, 1827년(순조 27년) 세자가 정치를 대리하고 풍양조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한 때 정권을 빼앗기기도 했다.

철종이 즉위하여 김문근의 딸이 왕비가 되자 김씨는 또 다시 정권을 잡게 되어 김좌근(金左根) · 김재근(金在根) · 김수근(金洙根) · 김병익(金炳翼) · 김병국(金炳國) 등이 국정을 좌우하는 중심인물이 됨으로써 김씨의 세력은 절정에 달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김씨 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풍양 조씨[편집] ... 풍양조씨는 조선 후기 헌종 대를 통해 왕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아 세도 정치를 행하였다. 1827년(순조 27년)에 왕세자가 부왕의 신병 요양으로 인하여 정치를 대리하게 되자 조만영의 딸을 비(妃)로 삼아 조씨 일파는 김씨 일파와 세력 다툼을 벌여 한동안 세도를 잡았으나, 그들 간의 불화 반목으로 세도가 무너지게 되었고, 철종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추존 황제 문조(文祖) = 효명세자

생졸 1809년(순조 9)~ 1830년 (22세)

. 효명세자 문조(文祖)는 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의 큰 아들이자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로, 1809년(순조 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나 1812년(순조 12) 4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1살 때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과 가례를 올려 19세 때 아들(24대 헌종)을 낳았다. 같은 해에 부왕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대리청정 4년만인 22살에 아버지 순조보다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1809~1830년) 아버지 순조는 석관동 의릉(20대 경종)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園)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그 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즉위(1835년)하여 익종으로 추존하였고, 고종은 1899년(광무 3년)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하였다. 능호(陵號)는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東九陵)내에 추존 비(妃)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와 함께 합장(合葬) 형태이다.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豊壤趙氏)

생졸 1808년(순조 8)~ 1890년(고종 27) (83세)

.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 풍양조씨로 아버지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이다. 1819년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827년 헌종(憲宗)을 낳았다. (<→ 헌종 대 참조)

.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으로 추대되자 왕대비에 올랐고, 1857년(철종 8)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대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안동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그가 고종이다.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 1866년까지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흥선대원군에게 넘겨주었다. 능호(陵號)는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東九陵)내에 추존왕 문조(文祖와) 함께 합장(合葬)되었다.

제24대 헌종(憲宗) ... 생졸 1827(순조 27)~ 1849(헌종 15) (23세)

재위 1834. 11~ 1849. 6(14년 7개월)

부인 3명 자녀 1녀

효현왕후 김씨 자식 없음

효정왕후 홍씨 1녀(일찍 죽음)

궁인 김씨

. 외척들의 세도정치 속에서 왕권강화를 이루지 못하고 요절했다.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 할아버지는 순조이고, 아버지는 익종(翼宗)이며, 어머니는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이다. 비는 김조근(金祖根)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이며, 계비는 홍재룡(洪在龍)의 딸 효정왕후(孝貞王后)이다. 1830년(순조 30)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익종이 병사한 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 1839년(헌종 5) P. 모방 등 프랑스 신부 및 천주교도들을 처형했고, 9월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또한 내영(內營)·총위영(摠衛營)의 설치로 세력기반이 되는 군사력을 양성하기도 했으나 국정운영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 재위 년 간 전국에 전염병·홍수 등 재해가 빈번했고, 삼정문란으로 죽산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말년에는 영국·미국·프랑스 군함들이 출몰하여 통상 및 천주교탄압중지 등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23세의 나이로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죽었다. 능호(陵號)는 경릉(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東九陵) 내에 헌종,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가 나란히 삼련릉(三連陵 : 유일한 왕릉 형태)이다.

수렴첨정 [垂簾聽政] ... 국왕을 대리(代理)해서 행하는 정치.

.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신 나라 일을 보던 것을 말한다. 남녀가 엄히 구별되던 때이므로, 국왕 대신 일을 보던 여성들은 발[簾]을 내리고 그 뒤에서 정치를 행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53년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이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태후(太后)가 수렴청정한 것이 처음이다. 대무신왕도 11세의 나이에 즉위했으므로 대리정치를 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뒤에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 특히 조선 후기인 순조 이후에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아 수렴청정이 많아졌다. 이 때문에 외척(外戚)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연이어 계속되면서 왕권이 약해지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지는 폐단이 생겼다.→ 섭정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대왕대비로서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1841년)까지 7년간 수렴청정(섭정)하였다.

섭정[攝政]

. 군주국가에서 새로 즉위한 왕이 어리거나 국가가 어려울 때, 왕 대신 국정을 처리하던 일이나 사람을 일컫는 말.

왕세자에 의한 섭정은 대리청정(代理聽政), 대비(大妃) 등과 같은 여자일 경우는 수렴청정(垂簾聽政), 신하일 경우는 섭정승(攝政丞)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백제 전지왕(腆支王)의 경우가 처음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시대에도 있었던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섭정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몽고 간섭기 등 전시대에 걸쳐 왕의 자리가 비었을 때 섭정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섭정이 시행되었는데, 특히 대비에 의한 수렴청정이 많았으며, 말기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10년 동안 섭정해 권력을 독점하기도 했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豊壤趙氏) ... 1808년~ 1890년(83세)

.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1808년(순조 8년)에 태어나 12세 때인 1819년 왕세자(효명세자) 빈으로 책봉되어 1827년(순조 27년)에 헌종을 낳았다. 헌종이 왕통을 이어받고 남편이 문조(文祖)로 추존되자 왕대비에 올랐으며, 순원왕후(순조의 비)가 승하하고, 철종도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의 권한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수렴청정 결재 때 구중궁궐의 안채에서 대비가 내시를 시켜 결재하나, 조선 왕실에서는 발 뒤에서 직접 결재를 해 번거로움과 전달상의 오류를 막았다. 수렴 청대(請對·뵙기를 청함)는 한 달에 6회씩이었고, 병관(兵官)과 같은 중요한 결재는 왕에게 직접 고하고 대비가 재결했다. 순조가 수렴청정을 받을 때는 서증조모 정순왕후, 조모 사도세자 비 혜경궁 홍씨, 서모 효의왕후, 친모 수빈박씨 등 4대의 왕실 웃어른이 있었으나 정치 세도가들의 위력에는 속수무책이었다.

. 수렴청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경주김씨로 영조의 사랑을 받으며 아들 뻘인 사도세자, 손주 뻘인 정조와 정치적 경쟁관계를 이뤘던 서증조모 정순왕후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순조의 나이 16세 때였다. 일반적으로 수렴청정은 20세까지지만 대비인 정조비 효의왕후는 세도가들의 압력으로 순조가 친정에 들어가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등 순조비 순원왕후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다. 원래 세도(世道)는 말 그대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의미하지만 정조 때 홍국영 등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한 데다, 노론 중심의 몇몇 가문에 권력이 집중돼 삼정의 문란이 생기면서는 한자어가 세도(勢道)로 변질됐다.

.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때문일까.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정치와 사회 기강은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각종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됐는데 오가작통법이 그것이다. 34년 4개월을 재위한 순조는 수렴청정과 세도정치로 많은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그 때문인지 한창 일할 나이인 45세에 생을 마감했다.

. 순조의 부인 순원왕후는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실세였던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그는 정조 24년 세자빈 삼간택 중에 갑자기 정조가 승하한 뒤 정순왕후의 오빠인 경주김씨 김관주 등의 방해로 간택에 어려움을 겪다가 순조 2년에 이르러서야 왕비로 채택됐다. 한때 자신의 며느리(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인 풍양조씨(후에 추존 익종비 신정왕후)가 헌종의 대리청정을 빌미로 세력을 확장해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효명세자가 죽자 헌종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세도정치는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김씨와 신정왕후의 친정인 풍양조씨의 세력싸움으로 난국을 맞았다.

헌종이 자식 없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자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된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정세력 안동김씨를 원상(院相·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사를 다스리던 것) 정치세력으로 만들었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강화에서 농사를 짓던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해 왕위를 잇게 하고 그의 비를 자신의 친가인 김문근의 딸로 간택해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누렸다.

.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김씨의 세도 정권을 못마땅해 하던 흥선군 이하응과 조카 조성하와 손잡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고종)를 잇게 한다. 1866년 2월까지 수렴첨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고 있었다. 그 후 조대비가 기용한 친정 세력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 가문은 쇄락하게 되고, 18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安東金氏) ... 1828(순조 28)~1843(헌종 9) (16세)

.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김조근(金祖根)이다.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친정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하기로 함에 따라 1837년(헌종 3) 왕비에 책봉되었다. 1841년 가례(嘉禮)를 올렸으나 2년 만에 요절했다. 휘호는 경혜(敬惠)·정순(靖順)이며, 그 뒤 단성(端聖)·수원(粹元)의 존호가 더해졌다.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동구릉 내에 있다. 삼련릉(三連陵) 형태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南陽洪氏) ... 1831년 ~ 1904년 (73세)

. 헌종(憲宗)의 계비(繼妃)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정식시호는 명헌숙경예인정목홍성장순정휘장소단희수현의헌강수유령자온공안효정왕후(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徽莊昭端禧粹顯懿獻康綏裕寧慈溫恭安孝定王后)이며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홍재룡(洪在龍)의 딸이다.

. 1831년 3월 6일(음력 1월 22일) 태어나 1844년, 헌종의 정비(正妃)인 효현왕후가 승하하자 헌종의 계비로써 중궁에 책봉되었으나 5년 뒤인 1849년에 남편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19세의 어린 나이로 대비가 되었다. 1857년 시조모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왕대비가 된 뒤 소생 없이 생활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대비인 철인왕후와 함께 어린 궁녀를 대비 전에서 돌보았었는데 이 아이가 조선의 마지막 궁녀인 천일청(千一淸) 상궁이다.

.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홍성(弘聖)의 존호가 가상되었고 1890년,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승하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개국하면서 왕태후에 책봉되었다. 1904년 1월 2일(음력 1903년 11월 15일) (광무 7), 경운궁(慶運宮) 수인당(壽仁堂)에서 73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능호(陵號)는 경릉(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다. 남편인 헌종과 정비인 효현왕후와 함께 안장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의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삼연릉(三連陵)의 방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 대왕대비, 왕대비에 이어 세 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대비(大妃)시절에 받은 명헌(明憲)이란 존호 때문에 일부 자료에서는[출처 필요] 그녀를 명헌왕후(明憲王后)로 부르기도 하나, 그녀의 왕후로서의 정확한 시호는 효정왕후(孝定王后)이다. 다만 실제로 대한제국 개창 후 명헌태후(明憲太后)로 불린 적이 있다. 헌종과 사이에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제25대 철종(哲宗) ... 생졸 1831(순조 31)~ 1863(철종 14) (33세)

재위 1849. 6~ 1863. 12(14년 6개월)

부인 8명 자녀 1녀

철인왕후 김씨, 귀인 박씨, 귀인 조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영혜옹주, 궁인 이씨, 궁인 김씨, 궁인 박씨.

.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 인(裀)의 손자로 아버지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이며, 어머니는 용성대부인(龍城大夫人) 염씨(廉氏)이다. 1831년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교동(喬洞)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江華)로 옮겨져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그는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년(철종 2)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哲仁王后)로 맞아들인 뒤로는 국구(國舅)가 된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는데 점차 나이가 들고 친정의 경험도 쌓이면서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1861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1862년 진주 단성지방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철종은 봉기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봉건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농민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립해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 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했다. 이때 마련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운영의 개선에 초점을 두었으며, 법정 세액 이외의 각종 부가세를 일체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고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한편 당시 사회의 혼란을 종교적으로 구제하려는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를 씌워 체포했다.

. 철종은 대왕대비의 선택에 의하여 불시에 왕위에 올랐으며, 대왕대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이 경쟁세력을 도태시키면서 전보다 강화된 독점 권력을 누리는 시기에 재위하여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했다. 능호(陵號)는 예릉(睿陵)으로 경기 고양시 원당동 산 37-1번지 서삼릉(西三陵)에 쌍릉(雙陵) 형태이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

삼정이정청 [三正釐整廳]

. 1862년(철종 13) 임술 농민항쟁의 수습책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관청. 1862년 2월 4일 경상도 단성에서 발생한 민란이 진주로 비화하여 2월 18~23일에 이르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으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광주(廣州)·함흥·황주 등에서도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 각 지방관들은 사태 발생을 보고하고, 정부는 안핵사(按覈使)·선무사(宣撫使)·암행어사 등을 파견하여 진압하는 한편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농민항쟁이 계속 확산되자 정부는 보다 근본적인 수습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진주안핵사 박규수(朴珪壽)의 건의에 따라 특별 기구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월 25일 철종은 삼정 개혁을 위한 기구를 만들 것을 지시했고, 26일에는 비변사에서 삼정이정청 설치를 결정했다. 위원으로 총재관(總裁官)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 판부사(判府事) 김흥근(金興根)·김좌근(金左根), 좌의정 조두순(趙斗淳) 등을 임명하고, 당상관으로 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 등이 임명되었다. 이정청의 처소는 관상감에 두기로 했다. 널리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6월 12일 철종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직접 삼정책문(三政策問)을 내려, 삼정을 유지한다는 전제하에서 개선방안과 그 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응시 인들은 시험장에서는 제목만 받아 가지고 가 10일 내에 글을 지어 태학(太學)에 내게 했다. 시험장에 나오지 못한 지방 사람들에게는 삼정책문을 전국 각 도에 보내, 각 군현에서 상소문을 모아 감영을 통해 서울로 보내게 했다. 전국 각지에서 수백 통의 응지삼정소(應旨三政疏)가 도착하자, 이정청에서 이를 수합·검토하여 조두순이 윤 8월 7일 이정책의 초안을 완성하고, 여러 대신의 의견들을 듣고 수정해, 17일에 〈삼정이정절목〉을 왕에게 올렸다. 19일 응시자에 대한 석차를 발표하고 시상한 뒤 이정청은 철파되었고, 남은 문제들은 비변사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삼정이정청에서 마련된 개혁방안은 지방수령과 양반지배층의 반발, 그해 가을의 흉작 등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삼정이정절목 , 삼정이정책

동학 농민 운동 [東學農民運動]

. 1894년(고종 31) 반봉건·반침략의 기치 하에 조선 봉건 사회 해체기의 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들의 사회 개혁 운동을 말한다. 동학의 종교 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 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도시민·소상인·몰락양반·이서 등 봉건 사회 해체 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제·반봉건 근대화 운동이었다. 갑오 농민 전쟁이라고도 한다. 1894년 1월 11일 고부민란을 시작으로,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둑을 허물고 거둬들인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정부는 민란 수습책으로 고부군수를 새로 임명하여 유화책을 쓰는 한편,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여 조사토록 했다. 하지만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 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후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군을 조직해 정부와 전쟁을 벌이게 되고, 이 농민전쟁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농민 봉기가 확산되게 된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 동학(東學)의 창시자

. 수운 최제우는 동학(東學)을 창조한 근대적 민족 종교의 창시자이다. 그는 유교·불교 등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성 종교가 쇠퇴하게 되고 조선왕조 사회가 무너진다는 역사 예언을 통해 새로운 민족 사회의 혁신을 위한 새로운 종교 원리로 '시천주(侍天主) 신앙' 을 제창했다.

. (시천주 평등사상) ... 그의 시천주 신앙을 동아 문화(東亞文化)의 가치원리인 천도(天道)·천명(天命)·천리(天理) 등의 '천(天)'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한울님(天主)에 대한 경천(敬天) 사상의 회복이 시급하다고 깊이 깨닫고 이 한울님이 바로 양반, 상민, 천민 등의 신분차등 없이 모든 사람이 자기 몸 안에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인간 존엄의 신분평등 사상을 설파했다.

. (민족주의) ... 그의 동학사상은 1860년에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소식을 전해 듣고 '요망한 서양적'에 대한 척사주의(斥邪主義, 사악한 무리를 물리친다.)로 '아국(我國)' 즉 우리 민족의 민족 자주적 '보국안민(保國安民)' 정신을 크게 진작시켰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의 선구적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 동학(東學) ... 그의 동학사상은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과제가 위로 군왕이나 양반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민족 성윈이 보국안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민족의 발견자이다. 그의 동학사상이 양반층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서민들의 민속 신앙적 주술적 강령이나 영부, 선약 등의 주술적 방편을 통해 오히려 유교·불교·도교의 새로운 종합이라는 대담한 사상적 재창조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고 서학(西學)에 대한 대항 의식으로 동학을 창조하는 근대적 민족 종교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성 왕조사회에서 금기되던 도교적 신선사상이나 왕조 성쇠의 참위설적 예언 등 풍수 도참설을 수용하여 조선 왕조가 쇠운에 직면했다는 역사 예언을 통해 억압받던 민중의 새 역사의식을 만들어 주었다.

. 1860년 이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 동학농민혁명, 3.1독립운동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근대적 민족사 전개의 사상적 토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최제우의 동학은 가장 기본적인 정신사적 문화유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26대 고종(高宗) ... 생졸 1852(철종 3)~ 1919. 1. 21. (58세)

재위 1863. 12 ~ 1907. 7(43년 7개월)

부인 7명 자녀 6남 1녀

명성황후 민씨 순종(제27대 마지막 왕)

귀인 엄씨 영친왕, 귀인 이씨 완친왕, 육, 귀인 장씨 의친왕

소의 이씨, 귀인 정씨 우, 귀인 양씨 덕혜옹주

대한제국 초대 황제

. 자본주의 열강이 침입하는 중에 재위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뒤 황제라 칭했고,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으로 폐위되었다. 1919년에 죽었는데 그의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집권기)

.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 호는 성헌(誠軒)·주연(珠淵). 아버지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며, 어머니는 부대부인 민씨이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1863년 철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즉위 후 10년 동안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섭정했다. 1865년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 징수했다. 1866년 프랑스인 신부와 많은 천주교도들을 처벌한 사건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같은 해 7월에는 대동강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평양인들이 불태워버렸다. 1871년 지방의 농민수탈 근거지였던 서원을 47개를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이해 4월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정권은 대내적으로 봉건적 개혁정책을, 대외적으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왕권안정 및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꾀했다.

(민씨집권기)

.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으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정권은 왕비의 척족세력이 장악했다(→ 명성황후).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 운양호 포격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듬해인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탈피, 대외개방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한편 안으로는 개화정책을 실시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정책을 관장케 하고,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는 한편,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런 개화정책은 1882년 구식군인과 도시빈민들의 무장봉기를 낳게 하고, 대원군의 재등장을 초래했다.

민씨 정권은 청 세력을 개입시켜 봉기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했다.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의 체결과 청군의 주둔으로 청에 더욱 예속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민씨 정권 타도, 청과의 관계 단절, 근대 자본주의국가 수립 등을 내걸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그 뒤 1894년 반제반봉건을 내세운 갑오농민전쟁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친일개화파·보수 유생층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 이에 집권 개화파정권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홍범14조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했지만,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채 일본에 의존한 개혁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1895년 삼국 개입에 따른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의 의병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은 붕괴되었다.

(대한제국기)

.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했다. 고종은 보수 세력과 일부 개화파들을 끌어들여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하에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은 각종 제도개혁,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 등을 실시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자주적 개혁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의 식민지화를 승인받았다. 또한 일본은 이해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박탈과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 이에 고종은 1907년(광무 1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에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1910년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죽었다. 독살설 속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저서에 〈주연집 珠淵集〉이 있다.

능호(陵號)는 홍릉(洪陵)으로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141-1번지에 명성황후와

합장(合葬)되어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순조 20)~ 1898(광무 2).

(79세) 조선의 왕족·정치가. 대원위 대감이라고도 불렸다. 1841년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흥선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었다. 10년 동안의 집권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의 개혁 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1907년 대원왕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구(球)이며, 아들이 조선 제26대 왕 고종이다.

(집권)

.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 유사당상·사복시제조·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 후사(後嗣)가 없는 철종의 유고시에 대비하여 조대비(趙大妃)와 가까이 지냈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흥선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조대비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었다.

(왕권강화와 체제정비)

.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안동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권 후 김병기(金炳冀)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포섭하면서 양반지배층 내부에 존재하는 각 당파에 관직을 안배하여 세력균형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나갔다. 이와 함께 세도 정권기를 거치면서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종친(宗親)과 선파인(璿派人) 등 왕족을 집중적으로 발탁하여 재정·군사·경찰 등 권력의 핵심부분에 등용했다. 총명하고 재주 있는 중인계층을 선발하여 각 조(曹)에 집리(執吏)로 배치하고, 의정부에는 팔도도집리(八道都執吏)를 배속시켰다.

제도면에서는 권력체제의 골간인 중앙정치기구 개편에 착수했다. 1864년 1월 세도문벌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는 장으로 활용되던 비변사의 기구를 축소하여 중외(中外)의 군국사무(軍國事務)만을 관장하게 했다. 대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조두순(趙斗淳)과 같이 삼정문란(三政紊亂)을 수습해갈 수 있는 인물과 홍순목(洪淳穆) 같은 친대원군계 인물로 의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 3월에는 정부와 비변사를 합치고 비국(備局)을 정부의 한 부서로 만들었으며, 1868년 축소된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사무를 전담할 군령기관으로 삼군부(三軍府)를 복설(復設)했다.

. 또한 훈련도감을 정비하여 세도문벌의 군사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정지시키고 실질적인 군영으로 재건했으며, 국왕의 친위병인 용호영(龍虎營)도 정비하여 병조판서가 통할하게 했다. 또한 〈대전회통 大典會通〉·〈양전편고 兩銓便攷〉·〈육전조례 六典條例〉를 편찬 간행하는 등 법전 및 운영규칙을 정비했다. 한편, 유교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이단사상을 탄압하여,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를 처형하고 천주교도를 박해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사업을 했으며,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하는 한편 재원 마련을 위해 원납전(願納錢) 징수, 결두전(結頭錢) 부가, 성문세(城門稅) 부과, 당백전(當百錢) 주조 등을 했다. 이어 종묘·종친부·6조 이하의 각 관서와 도성까지 수축함으로써 한양의 면모를 일신했다.

. 그리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 양반들의 세력 확장의 기반이자 각종 경제적 폐단의 온상이었던 서원 정리에 나섰다. 1864년 8월 서원 보유 토지의 면세를 축소하고 소속노비의 신분을 변정(辨正)하여 군포 수입을 늘렸으며, 이듬해 3월에는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1868년 서원에 정원 이외로 끼어든 자를 골라내고 서원 전결에 세금을 내도록 했으며, 수령이 서원의 장이 되어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이어 1871년 3월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하더라도 1인 1원(院) 이외로 첩설(疊設)한 것은 모두 철폐하게 하여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버렸다. 서원의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후일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회경제정책)

. 대원군은 1862년(철종 13)에 발생한 임술 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하고 삼정을 개혁함으로써 농민의 불만을 수습하려 했다. 우선 전정(田政)에서는 조세지의 확보를 위해 진전(陳田)이나 누세결(漏稅結)을 색출했으며, 문제가 많은 일부 지역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여 새로운 양안(量案)을 만들고 수세결도 늘렸다. 군정(軍政)에서는 전 주민에게 균일하게 세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했다. 호포제는 양반도 호포세를 내는 것으로 양반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시행됨으로써 상민은 부담액이 줄었고 신분적 평등의식도 고취되었다.

. 환곡 문제는 1862년 삼정이정책에서 결정되었던 파환귀결(罷還歸結)이라는 근본적 개혁안을 채택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허류곡(虛留穀) 120여 만 석을 탕감하고 재정확보의 차원에서 호조별비곡(戶曹別備穀)·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 등 새로운 환곡을 마련했다. 환곡의 운영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일부 사창제(社倉制)를 도입하여 관리들의 간여를 금지하고 민간에게 운영을 맡겼으나, 고리대화한 환곡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될 수 없었다. 그밖에 국가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포량미(砲粮米)를 신설하고, 도성의 문세(門稅)를 징수했으며, 궁방(宮房)이나 포구 주위의 유력자들이 불법으로 부과하던 각종 사세(私稅)를 혁파하고 이를 중앙정부의 재정에 편입시켰다. 또한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에 소요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고 청나라 화폐인 청국소전(淸國小錢)을 강제로 유통시켰는데, 이는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상민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호의 무단(武斷)을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궁방전(宮房田)도 세금을 내게 했다. 또 민폐가 많던 도장 (導掌)·궁차(宮差)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는 등 궁방에 대한 억제정책도 시행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는 한편,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 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철저하게 했다. 또한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조세 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대외정책)

. 1866년 8월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병인양요를 겪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외국인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1868년 4월 E.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침입하여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이어 가동(伽洞)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 이로써 대원군의 외국인 배척사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 조선정부가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그해 5월 철수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더욱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사에 자주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하야와 재기 기도)

.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도를 봉쇄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하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대원군 축출을 추진했다. 이에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를 계기로 11월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되었는데,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 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즉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는 등 반개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은 민씨 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이어 바오딩부[保定府]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홍장(李鴻章)의 밀의에 의해 1885년 8월 서울로 돌아왔는데, 운현궁에 반 감금상태로 있었다.

. 1894년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민씨 정권을 무너뜨린 후, 그를 앞세우고 개화파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만들어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그때 그는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주장을 펴다가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그 후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주도한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함께 궁성으로 들어가 고종을 만나고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이 궁성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친러파 정권이 들어서자 대원군은 다시 양주로 은거했다. 대원군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명성황후(明成太皇后) 민씨(驪興閔氏)

생 1851년 음력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

졸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향년 57세)

.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閔致祿)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녀는 급진개화파에게 고용된 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 아버지 민치록의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사첨정에 이르렀고 만년에 낙향하여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며 소일하고 있었다. 뒤에 대를 잇기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였다.

.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대고모뻘로, 5대조 민진원의 누이였다. 생가 감고당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나가기에 앞서 감고당에 거주하며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했다.

숙종 비 인현왕후의 친정이라 했으나 그녀의 집안은 빈곤하였고, 여주군의 산골 민유중의 묘지 근처에서 지냈다. 그녀의 생가 근처 200m 즈음에는 조선전기의 문신인 임원준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유년기[편집])

. 명성황후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효경》(孝經)·《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황후는 부친 민치록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 형제와 부모를 여읜 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흥선대원군 (왕비 간택[편집])

. 1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왕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 한편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왕비는 그 점을 이용하여, 후에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때 안동 김씨 일가와 힘을 모은다.

(왕비 시절[편집]) ... 입궐과 그리고 흥선대원군과의 대립[편집]

.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다.

. 명성황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고종의 형인 흥인군 이재면(李載冕),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엔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어버렸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 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은 일을 의심하였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 간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럴 무렵 세 돌 된 완화군이 갑자기 죽자, 명성황후는 완화군의 생모 귀인 이씨를 궁궐에서 쫓아냈다.

(고종의 친정 유도[편집])

.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 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입을 모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해왔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 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단체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려주었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의 논의 끝에, 1873년 11월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간의 간섭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끊임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흥선대원군 퇴진과 권력 투쟁[편집])

. 1873년에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했다. 22세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흥선대원군 세력의 최익현 공격을 우려하여 일시적으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등용할 것을 고종에게 상주하였다.

.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 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일가친척과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이런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그녀가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를 꾸미다가 대원군 즉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고 한다.

.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민씨 세력을 등용하여 보호 세력을 양성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 보냈다. 한편 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탄핵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 그러나 1874년 폭탄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어머니 등 3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애달파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유배 보내려 파면하였다. 1882년 2월에는 친척 민태호(民台鎬)의 딸인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임오군란과 대원군의 정변 시도[편집])

.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허욱의 임오군란 때에 죽을 위험에 달하였으나, 미리 변장을 해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했다. 이때 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누이로 연기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임오군란 동안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은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은 임오군란 때 군인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비는 경복궁에 그들이 다다랐을 때에 빠져나가고 없었다.

. 명성황후가 궁으로부터 도망 다니며 빠져나와있는 동안,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임오군란의 6월 10일의 난군들에게 피습 당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한 그는 흥선대원군을 바라보고, "대감 내를 부디 목숨만은 지켜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웃으며 "내 어찌 대감을 그대로 둘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계단으로 내던져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아래서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주검을 총검으로 마구 베어 잘라놓았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매우 외치며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잔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이때 어떤 궁인이 이를 보고는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잘라내어 땅에 내던졌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훈이 '그 여인은 내 누이로, 상궁으로 있는 이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고 외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 이 와중에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長湖院) 민응식의 집으로 은신했으며, 궁에 남은 흥인군 이최응(李最應)과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피습당했다. 한편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재정과 병권을 맏아들 이재면에게 위임하고, 김윤식에게 청나라 천진(天津)으로부터의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의 개입요청과 임오민병 진압[편집])

. 명성황후는 궁궐에 있는 동안 고종을 움직여 하여금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을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여 공업·무기제조법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전래되면서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을 접한 그녀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호출하여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 한·미수교를 주선, 후원해 줄 것을 부탁했고, 동시에 사람을 보내 개화승려 이동인(李東仁)을 불러들인 뒤 그에게 밀명을 내린 뒤 일본에 파견,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수교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 이런 한편,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개화파 김홍집은 1881년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을 문제 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斥邪)상소 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역모를 계획했다. 그 해 8월에는 대원군의 주변 인물인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이재선(李載先) 즉 대원군의 서자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종 폐위를 위한 역모를 은밀히 전개했으나, 고변으로 인해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영 등 주동자들이 옥에 갇히고 사형 당했다. 1882년에는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명성황후와 그녀의 인물들은 대원군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의 위협을 받고, 명성황후는 은신한 반면 많은 인물들이 피습 당했다. 일본 공사관도 피습됐다.

일본은 중국(청)의 군대 파병에 대한 "일본인 보호"의 명목으로, 도주했던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 義質)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군은 일단 협의를 먼저 요청하는 대원군을 무시한 채 한양으로 들어왔다가, 이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대원군의 표명으로 일단 인천으로 후퇴했다. 중국인 제독 오장경(吳長慶)은 7월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날 밤엔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는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 이 일 이후 명성황후는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키며 외교적으론 친청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개화파와의 대립[편집])

. 임오군란이 가라앉은 이후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 등을 필두로 한 친청 세력에 의한 개화파에 대한 공공연한 탄압에 위협과 불안을 느끼며 난과 거사를 꿈꾼다. 이에 민태호와 민영목 등은 결국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의 표적이 되어,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의 군인 난입 때에 피습 당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들의 주위에 일본군인 1개 중대가 보초로 둘러진다.

개화파 유길준. 명성왕후 암살과 피습의 과정에서 그는 일본 낭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 협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 정권을 장악한 급진 개화파들은 즉시 자신들의 정강과 개혁안을 공포하고, 각국 공사관에 이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렸다. 이에 명성황후는 민영익과 경기 감사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군의 원조를 청하도록 했다. 명성황후와 고종이 연금되어 있던 경우궁의 보초를 맡았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에겐 우리들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부탁했고, 다케조에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명성황후와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바꾸도록 했다. 그 해 고종은 10월 18일 청나라 공사 원세개(袁世凱)와 6백 명의 군인들의 면회 요구를 받았고, 김옥균은 이를 저지하려하여 그들간에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중국 군인들이 배로 늘어났고, 일본인 군인들은 혼란 와중에 민심의 표적이 되어 공격받았다. 일본인 군인 2백 명은 일단 후퇴하였으며, 정부군 8백 명도 열세로 인해 패배했다. 이런 때에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홍영식, 박영교, 몇 명의 사관생도의 호위를 받으며 이탈하여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 유혁로와 함께 다케조에 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문을 통해 삼각산과 양화나루,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했다. 명성황후는 이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의존하게 된 반면, 일본은 공사관의 화재와 군중들에게 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을 조선에게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일본에게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로 한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혼란으로 더욱 약화되어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는데, 남하 정책으로 얼지 않는 항구를 얻으려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러시아와 청나라와 일본 등 열강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다. 명성황후는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개로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밀약은 먼저 중국에 발각되어, 1885년 2월엔 묄렌도르프에게 영장이 발부되고 대원군은 원세개를 대동하여 귀국되었다. 1885년 3월에는 거문도가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1887년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와의 합의 끝에 철수했다. 이런 한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르는 명성황후와 밀약을 또 맺으려 했으나 원세개가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 조정의 실력자였던 조정 내의 민씨 일가 척족의 대다수가 1884년 10월의 갑신정변의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 내관 유재현은 명성황후의 개인 비서였으나, 그 조차도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한다. 그 때 미국인 의원인 호러스 뉴턴 앨런(한국이름 안련)은 양조카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해주어 생명을 건져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매우 경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 갈등[편집])

. 명성황후에게 이준용은 정적인 시조카였다. 명성황후는 이준용의 명성황후 폐출의 기도에 위협을 받았다. 명성황후의 남편 고종은 이준용의 아저씨였다. 1892년 봄엔, 운현궁으로부터 화약이 터지고 또 화약이 여러 건물에 장치된 것이 발견됐다. 명성황후는 황현에 의해 운현궁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운현궁의 폭탄 테러는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이야기가 황현의 주장이었다.

. 이런 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채로 발견됐다. 명성황후는 이 일에 대한 음모론의 표적이 되어, 명성황후가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대원군이 폭약을 보내 일가를 죽게 만든 일에 대한 정치적 보복 극을 꿈꾸지 않았겠느냐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 윤효정은 이 사건이 이준용이 통위사에 오른 것을 기념한 1894년 7월 중순 경에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민승호일가의 폭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대원군은 그 뒤 무명의 자객에 의한 암살과 폭탄 테러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그는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명성황후와 고종을 내쫓을 계획을 꾸민다.

(동학 농민군과의 대립[편집]) ... 전봉준

. 이와 같이 조선을 둘러싸고 러시아, 일본, 청나라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속에서 명성황후는 정부와 권력의 안정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왕가의 정적인 대원군은 몰락했고, 정부 요직을 장악한 명성황후의 민씨 일가의 뒷받침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관직을 민씨 일가의 매관매직이 좀먹고, 농민들은 여위어가며 지방관들의 착취에 피폐해졌다. 이 와중에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은 비록 민중을 거짓말로 홀렸다는 죄목을 받은 최제우가 처형되었으나 제 2대 교주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정부와 대등한 힘의 조직으로 단합되어 있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동학 농민들이 2만여 명 모여 농민을 괴롭히는 지방관들의 퇴출과 민생고를 탕감하고,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 등을 요구하였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명성왕후는 온건 개화파 및 친척 척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이 동학 농민군을 동비(東匪. 동학의 불한당들.)로 보고한 것을 그대로 믿고 지냈다.

. 같은 해 4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명성황후는 지원을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군인들이 청나라에 의해 파병되자 이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농민군과 관군은 조선에 일본군과 청군이 당도하자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처리키로 하고 휴전했다. 그러나 조선에 온 이들 오랑캐들은 주둔하며 군대를 증파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빌미로 일본은 청나라와의 협력을 제의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민씨 일가는 일본이 궁궐에 보낸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일본어: 大鳥 圭介 오오토리 케이스케)와 휘하의 군인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대원군은 또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됐으며, 일본은 김홍집을 총리대신에 앉히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명성황후 폐위 음모와 실패[편집])

. 갑오경장 초기에 명성황후와 고종 폐위 음모를 꾸미던 대원군과 이준용은 먼저 명성황후 폐위를 전초작업으로써 착수하였다.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이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일본 측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재조선 일본 공사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스기무라 일본 공사관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에 대한 감찰과 간섭을 강화하려 흥선대원군은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였다. 고종은 7월 초 갑오경장을 단행한다. 이때에도 명성황후 폐위의 정당성을 믿는 이준용은 꾸준히 일본 공사관을 방문하여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는 음모는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주업이었으나 일본 영사관에선 호응하지 않아 좌절된다.

.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이 일본군 혼성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대원군은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했으며,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일가의 세도는 무너졌다. 대원군 일가는 그러나 달포 만에 일본의 의도로 끌어내려진다. 대원군의 대신으로 김홍집 내각이 일본군의 괴뢰정부로 만들어지며, 이 정부는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민씨 일족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徽)로 개명)을 필두로 은 모두 유배되었고, 명성황후도 위기 중에 폐위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겨 홍순형(洪淳馨) 경기도 감사의 집에 은신한다.

(동학 농민군 진압[편집])

.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자 동학농민군이 다시금 모여 대일 농민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12월의 패배로 봉기는 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마지막을 맞으며, 녹두장군으로도 불리는 전봉준도 순창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에 처형되었다.

동학의 농민 무리들에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 초기의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단순 비적인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는 동학 농민군을 부정적으로 볼만한 이유와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녹두장군 즉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운현궁에 전봉준은 1890년에 찾아갔다. 운현궁에서 전봉준은 1890년대 초반부터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간 전봉준은 또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봉준은 1893년 2월 흥선대원군을 방문하려 한성부로 올라가기도 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잠깐 손님으로 와 있던 것뿐이나 전봉준에게 대원군은 매우 후한 대접을 했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밀접한 관계로부터 전봉준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세간엔 돌았다. 이런 한편 조선의 내정은 또 한 번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동원된 청나라 군대의 간섭을 받는다.

(개화당 제거 미수와 흥선대원군의 암살 공작[편집])

. 1894년 가을, 명성황후는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명성황후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와 협의하며 일본에게 약간의 도움을 부탁하였다. 명성황후 즉 그녀가 죽음을 맞게 되기로 음모가 꾸며지는 때였다. 명성황후의 제거에 대원군은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으리라는 일본 공사 오카모토의 언약을 받았다.

. 1895년 9월, 일본 공사에 미우라 고로와 명성황후 제거의 모의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려는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등이 대원군의 도움을 받으려 대원군에게 다가왔으나 대원군은 일단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교동에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일에 불만을 품고 집 안에만 지내고 있었다. 운현궁에 대원군이 있을 적에 대원군을 오카모도는 설득했다. 이런데 흥선대원군은 이때 일본 공사관을 비밀리에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기를 수시로 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길준은 왕비 제거에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의 지원을 얻은 것은 매우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래도 왕비 제거 계획에 관해 유길준은 대원군에 협력했는데, 이준용을 두고 박영효와 서광범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위장된 의도적인 고문치사를 계획하는 중에 유길준의 갑작스런 왕비 제거 계획 가담 소식에 당황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박영효의 암살 미수[편집])

. 조선은 1895년 4월 일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한편 의정부의 명칭을 내각으로 바꾸고 물러나있던 김홍집을 7월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앞세워 연립 내각을 구성했고, 내정의 내각엔 일본인 고문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이에 명성황후는 프랑스, 러시아, 독일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 명성황후는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김홍집 내각을 퇴출했다.

. 1895년(고종 32년) 7월 왕비를 암살할 계획이 박영효에 의해 꾸며진다. 조선의 개화 이후로 고종은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고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아 고종은 단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이에 명성황후는 이를 못마땅하고 분하게 여겨 러시아와의 제휴를 통해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기원했으나, 박영효는 이를 우려했다.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우려했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명성황후를 암살할 음모가 박영효의 단독에 의해 계획됐다.

박영효는 왕후의 능력과 권모를 두려워해 왕후가 암살되어 화근을 뿌리 뽑아야 된다고 여겨, 1895년 7월로 날짜를 정하고 일본에 병력 을 요청하였다. 유길준을 박영효는 제 조력자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이에 유길준은 매우 놀라워하며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바로 임금에게 알렸다. 유길준의 밀고를 박영효는 알아채어 양복으로 바꿔 입고 변장하며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 을 빠져 나와 한강 자락의 용산에서 증기선 을 타고 달아났다. 그의 일당인 이규완, 신응희(申應熙) 등도 따라 달아났다. 이러나 왕비 암살 모의는 유길준에 의해 대원군과 이준용이 또 꾸미어지고 있었다.

(을미사변) ... 민비 시해

. 1895년 8월에 명성황후는 죽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음모가 일본 공사 겸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일본어: 三浦 梧楼)와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幸彦), 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과 함께 꾸미어졌는데, 명성황후의 죽음은 일본인 군인들과 로닌들이 맡고, 대외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발표하는 것이 골자였다. 8월 16일 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맹세에 자필로 서명했다. 그 내용은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언약을 받아 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은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필로 각서에 서명했다.

.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명성황후 암살 작전이 그들에 의해 결행에 들어갔다. 대원군이 은거했던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일본군은 로닌과 일본군인, 명성황후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 300명가량을 모았다. 대원군은 미우라와 결탁하고 합의하여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나아갔다. 대원군은 먼저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주장의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내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이 고유문의 내용은 '민씨 일가의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대원군은 자필로, 일본의 강요도 없이 적어놓았다. 대원군이 이런 글을 적는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 글을 미리 들은 조선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원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그러했는지 본인의 의지로 그러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 유길준에 의하면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고, 명성황후의 죽음과 암살을 위해 대원군은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내기로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했다.'고 한다. 일본 낭인들은 이두황, 이진호, 우범선, 구연수, 이주회 등이 이끄는 조선인 궁궐수비대 예하 각 대대 병력의 길안내를 받으며 반나절도 안 돼 도성에 인천으로부터 잠입했다.

(암살[편집])

. 옥호루. 명성황후가 암살당한 곳이다.

경복궁에서 이들을 마주친 홍계훈 경비 대장이 이들을 가로막았으나, 홍계훈과 경비대원들은 일본 낭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 군인들의 발포에 맞아 죽는다. 명성황후가 있던 궁궐에는 홍계훈을 죽인 낭인들이 들어와 명성황후를 찾아다녔다. 외침을 들은 명성황후는 궁녀 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로 은신했는데, 궁녀와 내관들은 낭인들에 의해 피습당하고 있었다. 이경직 내부대신이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와 궁녀들 앞을 가로막아 가리니 두 팔이 잘려 죽음을 맞는다. 궁녀들과 함께 있던 명성황후는 대궐에 다다른 낭인들을 만난다.

. 명성왕후는 방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고 있다가,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에 띄어 그 머리를 붙잡혔다 한다. 명성황후는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네가 명성왕후냐'라는 질문에 부인한 뒤, 몸을 빼내어 마루 아래로 달아나려다가 발을 걸려 넘어진 뒤 젖가슴을 발로 밟히고 검에 베어 잘려져 죽었다 한다. 명성황후는 '목숨을 그대로 두어 달라고 애걸했으나 일본인들은 검을 던졌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죽은 몸은 그 뒤 기름 부어져 불태워졌다. 이 때 명성황후의 나이는 45세였다.

. 명성황후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경복궁내 강령전에 머물던 대원군이 휴식을 취하던 중에 보고됐다. 놀라고 두려운 고종은 대원군을 불러 이 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버지와 대면한다. 이런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발길을 옮기던 때에, 명성황후의 주검은 대궐 홑이불에 둘러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기름이 부어진 가운데 가을의 바람에 한줄기 연기가 되어 날려가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유골의 일부만이 누군가에 의해 주워져 닦이운 뒤에 고종에게 전달된다. 고종을 대면한 자리의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그의 장남인 완흥군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또 정권을 장악한다.

(사후[편집]) ... 명성황후 옥보

.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 1895년 10월 문석봉은 김해로부터 나와 충청북도 보은 등지에서 많은 이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외쳤다. 이에 이곳과 인접한 읍의 유생, 선비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뒤 공주부에서 보낸 군인들에 의해 모두 잡혔다.

. 명성황후의 직위는 고종의 받은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죽음 이틀 뒤 폐인으로 강등했으나, 바로 다음 날 그녀의 직위는 고종의 명으로 "빈"(嬪)으로 올라갔다. 나라의 어머니에게 저질러진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했으며, 명성황후의 지위도 완전히 복원되어 암살 이전과 같아졌다. 1896년 고종은 은신했던 러시아 공사로부터 1897년 2월에 돌아와 8월에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대한제국정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1897년 음력 1월 6일 문성황후의 시호를 받고, 능호는 홍릉으로 고쳤다. 그러나 뒤에 명성황후의 시호의 문성(文成)이 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음력 3월 2일 명성황후는 오늘날의 시호인 명성황후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명성황후는 황후에 추존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또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다.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지자 그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의 시호가 올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라 불리기도 한다.

. 이런 한편, 명성황후의 암살은 조선 민중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암살에 관련된 조선인 장교들과 군인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이때에 백범 김구(이 때의 이름은 김창수, 金昌洙)는 의병으로 만주에 있다가 1895년 초 귀국하며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낭인으로 오인하며 치하포에서 만나 그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김구는 이에 대해 뒷날 그가 일본 낭인이거나 왕비 암살에 가담한 자라고 주장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일본인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그 일본인이 육군 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그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배 교수는 백범도 그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7년 도진순 창원대학교 교수는 일본의 자료로부터 그가 계림장업단의 상인이며 민간인이었다고 밝혔다.

. 이런 한편 윤치호는 왕비가 암살당한 뒤 민중들이 별로 애달파하진 않더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대해 윤치호는 '민씨의 집권은 바로는 압제와 잔인과 부패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따라서 민중들이 민비의 죽음에 애도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일본 낭인[편집]) ... 을미사변

. 일본 낭인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 또한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 2006년에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통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이 길 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의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이 일본 낭인에 협력했다. 그 밖에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도 포섭하였다. 이 중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죽음을 당했다.

(조선인 협력자들[편집]) ... 을미사변

. 명성황후 암살의 국내 고위급 협력자로 유길준과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왕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즈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의 조선 측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거물 협력자로 지목했다. 미국인 교수 에드워드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왕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 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 1897(광무 1)~1970년 (74세)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은(垠). 고종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 엄씨(貴妃嚴氏)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년(광무 4) 8월 영왕(英王)에, 1907년(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1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隆熙皇帝:뒤의 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王世弟)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흡수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李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고 불렸다.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 뒤 1963년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했으나 귀국 당시 이미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에 있다. 진, 구(玖) 두 아들을 두었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 1877~1955년 (79세)

. 호는 만오(晩悟)이고 초명은 평길(平吉)이며 이름은 강(堈)으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귀인(貴人) 장씨(張氏). 1891년(고종 28)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0년 미국에 유학하였고, 1905년 4월에 귀국 후 그해 6월에 적십자사총재가 되었다.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전협, 최익환(崔益煥) 등과 협의하여 상해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했으나 그 해 11월에 만주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 되었다.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우(鍝), 건(鍵) 두 아들을 두었다.

그의 부인은 여러 명으로 알려져 있고 가수 이석(李錫)도 이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 1866년(고종 3)

. 프랑스가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1866년 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1846, 1847년 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었다. 리델의 보고와 보복요청을 받은 주중 공사 벨로네는 "조선 국왕이 우리 불행한 동포에게 박해를 가한 그날은 조선 왕조의 최후의 날이다"라고 단언하면서 로즈 제독에게 조선 침략을 명령했다.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서울까지의 뱃길을 탐사할 목적으로 3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6년 8월 10~22일에 제1차 원정을 단행했다. 프랑스 군함은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 수로탐사를 한 뒤 물러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강 연안의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해안 방어대책을 강화했다.

.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때 길잡이는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이었다. 침략군은 16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 사건은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고종 8)

미국 함대가 조선에게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 6), 1865(고종 2), 1866년에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경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국정부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또한 1866년에는 병인양요 (丙寅洋擾)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공동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전야에 있었으므로 거절했다. 1867년 미국은 슈펠트 중령으로 하여금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의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대해 손해보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배회하며 지방관과 회담하다가 성과 없이 돌아갔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 1871년 조선 측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상하이[上海]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 미국 함대는 그해 4월 3일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면서 4월 8일에는 물류도(勿溜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정부는 남양부사로부터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이창회(李昌會)를 강화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영(營)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그해 4월 14일 조선정부에서 한학역관(漢學譯官)을 파견하자 로는 미관(微官)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상대하지 않고 고관(高官)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 결과 미국 측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해 4월 15일 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鄭岐源)을 시켜 미국의 불법침략을 문책하고 통상조약교섭을 거절하게 했다. 로는 무단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 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해 4월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 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 이러한 조선 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 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 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5일 조선 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 1875년(고종 12)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의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하여 포격을 가하고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사건.

(국내외 정세)

. 1873년경부터 일본에서는 조선 문제를 둘러싸고 정한론 (征韓論)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대외적으로는 '탈아외교'(脫亞外交)의 일환이었던 서구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면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에서, 대내적으로는 당시 일본 전국에 충만하고 있던 유신과 개혁에 대한 불평·불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이끄는 정한론자들은 이와쿠라[岩倉]·오쿠보[大久保] 등 내치(內治)의 우선을 주장하는 점진적 정한론자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규모 정치 분쟁 이후 정부에서 총 퇴진했다. 이후 메이지[明治]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퇴진으로 야기된 무사계급과 국민의 감정을 무마하고 그 관심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1874년 타이완 침략을 단행했다. 한편 이 시기 조선에서도 강경한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과 이어 민씨 척족 정권의 집정이 시작되는 등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한반도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구나 조선정부는 1874년 청(淸)나라로부터 일본이 장차 타이완을 침략한 것과 같이 한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자문(咨文)을 받고, 대원군의 심복으로 대일교섭을 담당한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 등을 처벌하고 양국 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우호적인 태도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한편 교섭재개를 위하여 이미 부산에 파견되었던 모리야마[森山茂]는 이러한 조선의 우호적 태도가 대원군의 실각에 수반한 정국의 혼란과 정부의 약화에서 유래했다고 파악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조선에 대하여 약간의 힘과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외무성에 보고했다. 또한 그는 1875년 부산에 거듭 파견되어, 4월 15일 강경한 대한포함외교(對韓砲艦外交)를 주장하는 건의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 결국 이러한 모리야마의 강경책은 일본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경과)

. 군함파견 결정에 의해 운요호와 제이정묘호(第二丁卯號)가 각각 5월 25일, 6월 12일에 부산에 입항했다. 그들은 조선의 항의를 무시하고 연안을 탐측하면서 무력적 포함시위를 단행했고, 6월 14일에는 부산훈도(釜山訓導) 현석운(玄昔運) 등 조선관리가 관람 차 승선하자 불시에 발포연습을 감행함으로써 일본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을 강행할 것임을 과시했다. 이후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던 운요호는 9월 20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했고, 함장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하 수십 명의 해병은 보트에 나누어 타고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했다.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침입해오는 일본 보트에 포격을 가했고, 이에 이노우에는 운요호로 철수하여 즉각 초지진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이어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永宗鎭)에 포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을 벌여 일대 격전이 벌어졌는데, 조선수비병은 근대식 무기를 휴대한 일본군을 대적할 수 없어서 첨사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이 패주했다. 일본군은 무기를 약탈하고 영종진에 대해 방화·살륙·약탈을 자행한 뒤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갔다.

(역사적 의의)

. 이 사건으로 조선은 일본의 무력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이 대두하여 운요호사건에 대한 조선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곧이어 일본정부는 6척의 군함과 800명의 군대에 호위된 전권(全權)대표단을 파견하고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조선과 전문 12조로 된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일본의 강압적 위협에 의하여 맺어진 불평등조약이었다. 결국 운요호사건은 일본의 한반도침략의 일환으로 계획되었으며, 일본은 불평등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 1876년 2월 27일

.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 강화도조약 =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불과 130여 년 전 벌어졌던 열강들의 침입사건을 살펴보면 먼저 1866년 프랑스 극동함대의 강화도 침공사건인 병인양요를 먼저 들 수 있다. 그때 프랑스 제국의 조선원정은 나폴레옹 3세의 식민지정책과 대아시아 로마 가톨릭 포교정책이 결부되어 단행된 제국주의적 침략이었다.

그러고 난 5년 뒤인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침공사건인 신미양요는 병인양요가 있던 해 8월 평양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은 두 차례 진상탐문조사를 하면서 그 사건에 대한 응징과 통상관계 수림을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 그 4년 뒤에 벌어진 운유호사건과 관련한 강화도조약을 살펴보고자 한다. 운유호 사건은 말 그대로 1875년 9월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불법으로 접근하다가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충돌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과 외교 교섭이 난항에 빠지자, 조선정벌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다. 앞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적이 있는 모리야마는 일본의 군함 1~2척을 조선에 파견하여 해로를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 조선과의 교섭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그 건의서를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은 열강 세력에 앞서 무력시위로 조선을 침략하고자, 중무장한 일본군함 운유호를 침투시켰다. 조선의 동해안을 측량하여 무력시위를 마친 운유호는 이어서 서해안 해로를 측량하는 척하며 북상하였다. 이리하여 운유호는 앞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 등 어떤 외국 함선도 접근할 수 없었던 한강 하류 강화 근해의 요새지인 초지진(草芝鎭) 포대로 접근하였다.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겪은 조선군 포대의 수비병들은 수차례 경고했지만, 말을 듣지 않자 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포의 성능이나 기술이 일본군보다 떨어진 조선의 수비들은 근대식 포와 소총으로 장비를 갖춘 일본군을 대적할 수 없어서 결국 패주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대포와 화승총 등을 약탈하고 영종진에 방화와 살육과 약탈을 감행하여 관가와 민가가 모두 분탕되고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일본군의 엄연한 침략 행위였음에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뒤집어 씌워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항의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빌미로 일본 내의 반한감정을 고취시켜 대규모의 군대 파견을 준비하면서 조선에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 이때 일본은 8척의 군함과 600명의 군대를 부산에 따로 상륙시켜 무력적 위협과 함대 시위를 하는 가운데, 1876년 2월 한일수호조규 韓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어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조약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1876)

.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며, 강화조약(江華條約)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1876년 2월3일(음력) 강화유수부 서문안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 측 판중추부사 신헌(申櫶),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尹滋承)과 일본 측 구로다(黑田靑隆)大臣, 이노우에(井上良馨)大臣간에 조선 근대사의 기점이라 할 수 있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가 조인됐다.

. 정한(征韓)위협 속에 일본 측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이 조약은 치외법권 조차지(租借地)의 설정, 해안 측량의 자유무역에서의 간섭 배재 등 우리 측으로서는 극히 불리했던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사절의 상주 등 근대적 외교 관계의 성립을 가져왔고 그들이 세력 확장의 전초지를 삼기 위한 것이었지만 부산, 인천, 원산 등 세 곳을 개항케 하여 쇄국의 이 나라가 최초로 문호를 개방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 1882년 6월 5일

. 서울의 하급군병과 빈민층이 일으킨 폭동.

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선혜청 도봉소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하급군병과 서울 빈민층의 민씨 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도봉소 사건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보고되자 그는 즉시 훈련도감 군병들 가운데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 4명을 주동자로 잡아들여 포도청에 가두었다. 이들이 사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훈련도감 하급군병이 많이 살고 있던 왕십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왕십리는 하급군병·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으로, 잡혀간 군병 4명 가운데 3명이 왕십리 거주자였다. 하급군병과 빈민들은 계층적으로 일치했는데 서울의 하급군병은 대부분 서울의 빈민층 가운데서 충당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빈민층과 마찬가지로 낮은 급료 때문에 대부분 적은 자본으로 수공업·상업을 하거나 도시근교에 야채를 재배해서 팔거나 막노동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서울의 빈민층은 도성 내의 빈촌이나 교외, 한강 연안 지역의 변두리 마을 등에 촌락을 형성하고 집단적으로 거주했는데 왕십리도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이들 빈민은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항 이후 영세 수공업의 몰락, 미곡수출로 말미암은 곡가 앙등 등으로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하급군병들은 5군영의 폐지로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군병들도 별기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에 불만을 품었으며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자 불만은 한층 고조되었다. 결국 군병들의 거주지인 빈민촌락에 통문이 돌려졌다. 통문의 내용은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 군병들은 6월 9일 아침 동별영에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통문에 호응하여 모인 군병들은 먼저 무위대장 이경하와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붙잡아간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등소(等疏)를 올렸다. 등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모인 군병들은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무력행사에 돌입했다. 동별영 창고를 열어 각종 무기를 꺼내 무장하고 무위영과 장어영의 다른 군병들을 소집했으며, 영세상인·수공업자 등도 군병에 가세했다. 이들은 포도청을 습격해 붙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고 의금부로 가서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하고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시간이 갈수록 하급군병·빈민 들이 가세해 대규모의 세력을 형성했다. 10일에는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살해하고, 민비를 공격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김보현 등을 살해하고 민비를 찾기 위해 사방을 수색했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폐지했으며 5군영 체제를 복구시키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후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는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개 조항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에 무력으로 대응할 방침을 세우고 마산포에 상륙중인 청국 군에게 일본군을 견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 정권과 일본 측을 중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대원군 정권이 민씨 정권의 폭압과 외세의 침략을 막아줄 것을 기대했던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전개했다. 청군은 대원군 세력을 체포·투옥하여 대원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한편, 군병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공격하여 저항 세력을 진압했다.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대규모로 전개된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 1884년 12월 4일

.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의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자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으로 국민주권국가 건설을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서 근대적 개혁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개화파였다. 실학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이들은 문호개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을 중심으로 그 움직임이 보다 적극화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젊은 양반계급 지식인들을 핵심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가며 정부의 개화정책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민씨 정권의 친청수구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획책함에 따라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는 높아져갔다.

. 이에 따라 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정했다. 마침 월남문제를 둘러싸고 청-프랑스 전쟁이 터져 청국이 패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간섭이 약화되고 또 임오군란 이후 냉담했던 일본공사가 다시 접근해왔다. 개화파는 일본공사관의 후원을 확인하고 계획대로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우선 축하연에 참석한 민영익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국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겨 50여 명의 개화파 군사력과 200여 명의 일본군으로 호위케 하고 수구파 우두머리를 처단했다. 이어서 개화파들은 홍영식이 우의정, 박영효가 좌포도대장, 서광범이 우포도대장, 김옥균이 호조참판이 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정강을 제정 발표 했다. 정변의 실패로 이 정강·정책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중 14개 조가 뒷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여 저술한 〈갑신일록〉에 실려 있다.

. 그 주요 내용은 청국에 대한 종속관계의 청산,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의 제정 및 능력에 따르는 인재의 등용, 지조법(地租法) 개혁, 탐관오리 처벌, 백성들이 빚진 환자미[還上米]의 영원한 면제, 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경찰제도의 실시, 혜상공국(惠商工局)의 혁파 등이었다. 청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지향했고, 아직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양반지배체제를 청산하려 했으며, 또 뒷날의 갑오농민전쟁에서 요구된 농민적 토지소유가 제기되지는 않았으나 지조법의 개혁이 제시되었고, 왕실경비와 정부재정을 구분하고 호조가 국가재정을 전담케 하며 특권상인의 존재를 부인한 것 등은 개화파의 국정개혁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 그러나 국왕의 정치혁신 조서가 내려짐과 동시에 청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개화파들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사).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 측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와 1885년 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본에 사의를 표명하고 10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반도를 둘러싼 청국과의 경쟁관계에서 다시 불리한 처지에 빠진 일본은 정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한 결과,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의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 조약을 체결했다(1885. 4. 18). 이로써 갑신정변의 뒷마무리는 일단 끝났지만,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 문제에 있어서 청국과 같은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0년 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우선 개화파 자체가 민중세계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이 지향할 수 있었던 경제체제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은 부르주아적인 정치변혁을 담당할 주체가 아직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는 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외세의 압력이라는 데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들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하려 했으면서도 대다수가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민중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러한 한계에서 정변이라는 방식을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은 외세의 개입 아래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갑신정변이 민중세계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정변이 외세, 특히 일본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갑신정변은 이렇듯 한계를 지니는 것이며, 비록 삼일천하로 끝나 버렸지만 한국사에서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성조약(漢城條約) ... 1885년 1월 9일

. 갑신정변의 처리를 위해 서울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청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민씨 정권은 예조참판 서상우(徐相雨)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일본 측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을 문책하는 한편 망명한 김옥균(金玉均)의 소환을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청을 압도하고 새로운 침략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공사관이 불타고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는 한편, 조선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요구하는 교섭을 강경하게 진행시켜갔다. 그 뒤 일본은 갑신정변 직후 일본으로 피신했던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를 조선에 파견해, 조선 측 회담대표인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접촉했으나 타결책을 찾지 못하자 외무경 이노우에[井上聲]가 육군 2개 대대, 군함 7척을 이끌고 인천에 도착했다. 1885년 1월 2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는 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와, 좌의정 김홍집(金弘集)과 협상해 1885년 1월 9일 김홍집과 이노우에 사이에 전문 5조의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내용은 ① 조선국은 국서를 보내 일본국에 사의를 표명할 것, ② 이번에 해를 입은 일본인의 유족과 부상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또 상인의 재물이 훼손되고 약탈된 것을 변상하기 위해 조선국은 11만 원을 지불할 것, ③ 이소바야시[磯林] 대위를 죽인 범인을 조사·체포하여 엄중하게 처벌할 것, ④ 일본공사관은 새로운 장소에 옮겨지어야 하므로 조선국은 마땅히 그 집터를 제공해 공사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할 것이며, 그 건축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다시 2만 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당할 것, ⑤ 일본 호위병의 병영은 공사관의 부지로 선정하고, 제물포조약 제5조에 따라 시행할 것 등이었다. 이때 조선은 김옥균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인도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한성조약으로 갑신정변에 대한 모든 책임은 조선에게 돌아왔고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조선에 대한 침략을 한층 더 강화시켜갔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정부는 12월 13일 이소바야시 대위 살해범으로 김대흥(金大興)·원한갑(元漢甲)을 처형하고, 20일 서상우를 전권대신, 묄렌도르프를 부대신에 임명하여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함으로써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둘러싼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표면상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일본 공사관 호위라는 핑계로 그가 데리고 온 병력 중 1개 대대를 조선에 주둔시킴으로써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천진조약(천진조약) ... 1885년(고종 22년) 4월 18일

. 톈진 조약(天津條約)은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 제국의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조선 내에서의 세력 균형을 위해 맺어진 조약이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정부는 청·일 양국 간의 교섭을 통해서, 조선에서의 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일본의 입장을 더욱 유리하게 전개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청·일 양국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신으로 하여 톈진에서 회담, 이른바 톈진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

. 청과 일본은 4개월을 기한으로 조선에서 동시에 군대를 철수한다.

조선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훈련 교관을 보내지 않고, 조선에 제3국인 무관을 고용하도록 권고한다.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 청나라나 일본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리고, 그 사변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한다.

이 조약에 따라 청국은 조선에 더욱 강력한 세력을 침투시키게 되며, 그에 따라 나중에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되게 된다.

갑오개혁(甲午改革) ...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민씨 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톈진[天津]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 양군이 주둔한 가운데 양국간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 민씨 정권이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7월 23일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흥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하는 한편,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 인사들로 신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7일에는 내정개혁 추진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회의총재(會議總裁) 김홍집을 비롯한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유길준(兪吉濬) 등 주로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17명의 의원이 참여하여 개혁사업을 총괄 지휘하였다.

.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진행된 개혁사업은 일본의 간섭 정도와 개혁주체의 성격변화에 따라 3단계로 나누어진다. 제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가 설치된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약 210건 개혁안을 제정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제1차 개혁기간 동안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과정에 집중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 시기 개혁에는 갑신정변 이래 개화파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개혁구상이 비교적 충실히 반영되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제기한 요구도 부분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또한 개화파 자신이 친일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혁도 상당 부분 존재했다.

. 먼저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7월 30일의 의정부관제안과 8월 22일의 궁내부관제안에 따라 정부와 왕실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었고, 의정부관제안에 따라 국왕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조선 후기 이래 유명무실화되었던 의정부가 정치의 중추기구로 자리 잡았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사무분장 기구였던 6조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의 8아문으로 개편되었으며, 관료선발 장치로서의 과거제가 폐지되는 대신에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이 부여되었고, 18등급의 품계를 12등급으로 축소하여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으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청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의 사용을 의무화하여 청국과의 사대관계를 단절하였다.

. 이러한 조치는 과거의 봉건적 정치제도를 근대적인 것으로 일신시켰을 뿐 아니라, 군국기무처를 장악한 개화파로 하여금 국왕의 간섭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혁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다음 사회개혁의 측면에서는 문벌제도와 반상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 죄인 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 조처는 갑오농민전쟁에서 제기된 요구와 대부분 일치되는 것들이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봉건적 관습이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 마지막으로 경제부문의 개혁은 재정개혁과 화폐개혁 중심이었다. 재정부문에서는 그동안 각 궁방과 관청에서 자체 경비를 조달하던 방식을 지양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에서 전관하도록 하였으며, 조세의 금납화를 의결하였다. 화폐 제도 면에서는 12월에 신식화폐장정을 제정하여 은본위제를 채택하였으며, 일본화폐의 조선 내 통용권을 허용하였다.

. 제2차 개혁은 1894년 12월 17일 청일전쟁의 승리를 눈앞에 둔 일본이 대원군을 퇴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는 한편,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朴泳孝)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고, 농민군이 패배함에 따라 사회개혁의 추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개혁과정에서 개화파의 주도성은 거의 상실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은 고종으로 하여금 청국과의 전통적인 사대관계 단절, 종친과 척족의 정치 간여 금지, 정부 각 기관의 사무분장, 재정제도의 정비 등을 주 내용으로 한 홍범(洪範)14조를 발표하게 하였다.

. 이 홍범14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새 내각은 총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 실시하였다. 먼저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과 부(部)로 변경하고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 7부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궁내부 관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지방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종래의 도·부·목·군·현 등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23부(部) 337군(郡)으로 개편하였다. 재정제도에서는 전국에 9개소의 관세사(管稅司)와 220개소의 징세서(徵稅署)를 설치하여 조세사무를 전관하도록 하였다.

. 이밖에 군부관제·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경무청관제 등을 제정하여 근대적인 군사·경찰 제도를 확립하였고, 재판소구성법·법관양성소규정 등을 제정하여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기하였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은 개혁방향에 불만을 품은 일본 측과 고종, 왕비 민씨(명성황후) 등의 공격에 의해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함에 따라 끝나고 말았다.

. 박영효가 망명한 이후 다시 김홍집이 내각수반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2일까지 추진된 제3차 개혁이다. 박영효를 몰아낸 민씨 세력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3차 김홍집 내각 발족 초기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히 퇴색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개혁은 오로지 일본의 뜻대로만 진행되다시피 하였다. 이 시기에도 연호의 제정, 태양력의 채택, 소학교령의 발포 등 총 140여 건의 개혁안이 심의·의결되었다.

. 그러나 이때 공포된 단발령(斷髮令)은 전국 각지에서 보수적인 유생들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홍집 내각의 친일적 성격에 대한 민중의 불만에 불을 붙여 급기야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김홍집을 비롯한 내각 요인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을 빚어내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2년 가까이 지속된 갑오개혁은 끝을 맺었다.

. 갑오개혁은 19세기 이래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내재적 개혁의 흐름이면서도, 청일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형성된 일본 중심의 근대적 제국주의 질서 속에 조선이 편입된 과정을 법제화한 양면성을 띤 개혁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대내적으로 반봉건 근대화의 이념에 의한 부국강병의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대외적으로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예속적 개혁운동으로, 일제 식민지화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군국기무처 , 홍범14조

을미사변(乙未事變) ... 1895년(고종 32) 8월 20일

.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지휘하는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당시에는 왕비)를 시해한 사건.

1895년 3국 간섭 이후 한국정부 내에서 이완용(李完用)·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 등 소위 '정동파'들은 왕비 민씨의 세력을 앞세워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세력 만회를 위해 7월 13일 이노우에[井上馨] 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한국정부는 10월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일본군 장교가 훈련시키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미군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했다. 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 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더욱 추진했다. 일본은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왕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고 방책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미우라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金弘集)·어윤중·김윤식(金允植)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李載冕)과 이준용(李埈鎔)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 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이와는 별도로 미우라는 일본인 아다치[安達謙藏]가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수십 명의 일인 낭인, 일본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친일파들도 포섭했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왕비 시해 예정일이었던 8월 22일을 앞당겨 8월 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했다. 일인들은 우선 대원군에게 가서 고유문(告諭文)을 결재 받고, 서대문에서 훈련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폭도들은 훈련대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죽이고,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중전의 침소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옥호루(玉壺樓)에서 왕비를 무참하게 시해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다. 이후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왕비 시해를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왕비 시해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왕비 민씨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그러나 고종,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일본이 뒷받침하고 있는 김홍집 내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난처해진 일본은 사건관련자를 형식적으로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일본인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廣島]로 압송하는 한편, 미우라 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철수와 대한불간섭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이노우에를 왕실위문사로 파견하여 사건에 관련된 훈련대를 해산하고 왕비 민씨를 복위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10월 12일 정동파들이 러시아와 미국인의 협조를 얻어 고종을 궁 밖으로 빼돌리려 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이 일어나자, 일본은 사건에 외국인들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자신들의 만행을 희석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만행을 자행한 미우라 이하 폭도 48명을 증거불충분이란 명목으로 석방했다. 한편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왕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으나 일본인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여 이주회(李周會)·윤석우(尹錫禹)를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후 이준용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데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다. 또 내외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추진, 단발령과 건양(建陽)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으로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왕비 시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친일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의병).

아관파천(俄館播遷) ... 1896년 2월 11일

. 친러 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공모 하에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지금의 서울특별시 정동(貞洞)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사건.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핑계로 1896년 2월 11일 친러 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공모 하에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내각을 장악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遼東]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 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 그동안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왕비 중전 민씨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 공사 K. 베베르[韋貝]는 미국공사와 함께 중전 민씨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 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중전 민씨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다. 그리고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의 실시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중전 민씨 시해와 단발령은 조선 백성의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중전 민씨가 경복궁에서 시해되고 난 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내각을 세우고자 했다.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은 친러 세력이었던 이범진(李範晋) 등이 춘생문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데려오려는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또다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 당시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 접근,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고종은 마침내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으로 개화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참형되었고,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망가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 내각이 무너지자 은신 중이던 친미·친러파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어 새 내각을 구성했다. 친러 내각은 친일내각이 실시한 갑오·을미 개혁사업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어 한동안 약화되었던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대한제국(大韓帝國) ... 1897년 10월부터 1910년 8월 22일까지 존속

조선왕조의 국가.

. 1897년 고종은 아관파천 후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했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자주독립 국가임을 밝히고 국방력을 강화시켰다. 또 근대적 회사들의 설립을 지원하고 실업 교육을 강조했다. 내각은 보수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왕권 강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이런 움직임은 독립협회의 저항을 받았다. 독립협회는 의회 개설을 주장했으나 정부에 의해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됨으로써 전제 왕권 경향은 더 커졌다. 1904년 일본은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의 위협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이듬해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1910년 강제로 대한 제국을 일본에 병합했다.

(대한제국의 성립)

. 청일전쟁(1894~95)의 결과 임오군란(1882) 이래 조선에서 강력한 지위를 유지해오던 청국이 후퇴했다. 대신 일본이 그 지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요동반도를 획득함으로써 만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틀까지 마련했다. 일본은 러시아·프랑스·독일의 간섭을 받아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했다(삼국간섭, 1895. 5)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일본의 지원 하에 개혁(갑오·을미 개혁)을 추진해오던 온건개화파 내각이 동요하는 반면, 왕비 민씨의 지지를 받는 보수파 인물들이 입각함으로써 정부는 배일·친러적 경향을 띠어갔다. 일본은 퇴세(退勢)를 만회하기 위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을미사변, 1895. 8), 내각은 다시 온건개화파로 개편되었다.

. 이 새 내각은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중요한 사건을 호도하는 대신 단발령(斷髮令:1895. 11. 17)과 같은 과격한 시책을 펴나갔다.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와 친일내각의 단발령은 민심을 동요시켰으며,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의 반대를 표방한 의병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아관파천, 1896. 2). 그 결과 친일 온건개화파 내각은 실각하고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어 대한제국에서는 일본 세력이 약화되는 반면 러시아의 진출이 현저해졌다.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 이처럼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으로부터,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극심한 내정간섭을 받아 심지어 왕비가 학살되기까지 했다. 아관파천 이후에는 다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받기 시작했으며, 중요한 이권이 차례로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조선 내부에서는 국민적 자각이 일기 시작하여 당시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자주 독립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독립문 건설운동(1896)은 이러한 국민적 자각을 반영하는 것이며,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慶運宮:德壽宮)으로 환어(還御)한 것(1897. 2)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청국의 후퇴와 아관파천 이후 열강 간의 세력균형이 대한제국 성립의 외적 요인이었다고 한다면, 아관파천은 그 전후하여 일기 시작한 자주 독립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내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한편 국왕을 황제로 존칭하여야 한다는 논의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칭제(稱帝) 논의도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 뒤 을미사변 직후 친일적 각료를 중심으로 다시 칭제논의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국왕을 황제로 존칭하고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 고치며 10월 26일 즉위식을 거행한다는 각의의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명성황후 시해 등 당면문제를 호도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러시아·프랑스·미국의 반대를 받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칭제논의는 1896년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재개되었다. 제일 먼저 국왕에게 칭제를 건의한 사람은 상하이[上海]에서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로 전해지고 있다. 국왕도 일찍부터 칭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홍종우의 건의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열강의 반대를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밀지(密旨)를 내려 제위(帝位)에 오르도록 진정하게 하는 우회적 방법으로 이를 추진하였다. 1897년 5월 이후 정부관원, 각도 유생, 시전상인과 일부(개신유학 계열) 독립협회 회원 등 각계각층의 잇따른 칭제 요청은 그 대부분이 국왕의 밀지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열강도 이당시 이미 러시아·프랑스·일본·영국을 주축으로 하여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일본·미국·영국 등이 냉담한 편이었지만,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칭제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은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주도하에 제위에 오르는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어 갔다. 이해 8월 1일부터 사용한 연호가 광무(光武)로 정해지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원구단(圓丘壇) 자리가 남서(南署) 회현방(會賢坊) 소공동(小公洞:지금의 조선 호텔)으로 정해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어 의정대신 심순택(沈舜澤),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등의 의례적인 황제요청이 계속되는 가운데 즉위식 거행 일자가 10월 12일로 결정되었다. 예정대로 이 날 원구단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13일에는 국왕이 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였음을 선포하였고, 14일에는 이러한 사실을 외부를 통하여 각국 공사관·영사관에 통보하였다. '대한'(大韓)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다는 뜻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의 시책)

. 아관파천 이후 내각은 국왕 측근의 보수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점은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더욱 그러했다. 자연 정부의 시책도 국왕이 "구규(舊規)로 본(本)을 삼고 (여기에) 신식(新式)을 참고한다."고 천명한 데서 보이듯, 갑오·을미개혁을 반성해 전통적인 제도와 연결·타협하려는 복고적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시책의 복고적 경향은 왕권의 강화·전제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갑오·을미개혁 당시 왕권은 매우 위축되어 국왕이 제한군주적 지위로 격하되는 반면, 내각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런 만큼 아관파천 직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1896년 내각제를 다시 의정부제로 개편하면서 그 권한을 대폭 약화시킨 것, 1899년 군의 지휘 감독권을 갖는 원수부(元帥府)를 창설하면서 황제가 대원수로 취임한 것도 그러한 노력이었다.

. 왕권의 강화·전제화의 움직임은 독립협회(1896~98)의 저항을 받았다. 그동안 독립협회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이권양여 등 정부가 시정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 개선책을 정부에 건의해왔다. 그런데 독립협회에서는 이러한 비정(秕政)의 궁극적인 원인이 왕권의 전제화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갑오개혁 당시 내각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中樞院)을 의회로 개편해 왕권의 전제화를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의회개설 운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아 좌절되었고, 독립협회도 해산당하고 말았다.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왕권의 전제화 경향은 더욱 촉진되었다. 그것을 잘 말해 주는 것이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제(大韓國制)의 선포(1899)였다. 대한국제에 의하면, 황제는 무한 불가침의 군권(君權)을 향유할 뿐 아니라 입법·사법·행정·선전강화·계엄·해엄의 권한까지도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갑오·을미개혁 당시 위축되었던 국권을 복구시켰을 뿐 아니라 여기에 서구의 절대왕정 체제를 도입해 대한국제 제2조에 규정한 바와 같이 완전한 전제정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시책의 복고적 경향은 황실재정의 강화에서도 나타나 있다. 갑오·을미개혁 당시에는 왕권을 뒷받침해 주는 왕실재정도 정부의 통제를 받아 대단히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아관파천 이후 왕권을 강화해가는 과정에서 왕실 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왕실예산이 정부예산에서 독립되고 궁내부에서 징수하던 각종 명목의 잡세(雜稅)가 부활되었으며, 궁내부도 홍삼제조, 백동화(白銅貨) 주조의 특허, 관개·수리·광산·역둔토·철도사업 등에 관한 권한을 이관시켰으며 매관매직까지 자행했다. 그리하여 황실재정은 현저히 개선되어갔다.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의 시책은 왕권의 강화·전제화, 황실재정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확실히 복고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밖의 시책에 있어서는 갑오·을미개혁을 이으면서도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개혁 작업을 추진해갔다. 대한제국 정부의 시책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대한제국 정부는 대한국제 제1조에서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어 온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고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국가의 자주독립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국방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먼저 1902년 경군(京軍)은 을미개혁 당시 3개 대대에 지나지 않았던 친위대(親衛隊)를 2개 연대로 증강하고, 2개 연대의 시위대(侍衛隊)를 창설했으며, 호위군(扈衛軍)도 호위대(扈衛隊)로 증강·개편했다. 지방군도 을미개혁 당시 2개 대대의 진위대(鎭衛隊)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를 6개 연대로 증강시켜 경기도·경상북도·평양과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자주독립을 하기 위한 여러 조치도 취해졌다.

.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1902년 국가(國歌)가 제정되고, 1903년 국민개병을 원칙으로 하는 징병제도에 관한 조칙이 내렸다. 해삼위(海蔘威)·간도(間島) 교민을 보호하기 위해 해삼위통상사무(海蔘威通商事務)·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가 설치·임명되었고, 북간도의 영토편입이 추진되었으며, 1899년 오랫동안 종주권을 주장해 오던 청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해 공사를 교환했다.

갑오개혁 당시부터의 과제였던,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튼튼히 할 양전(量田)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899~1903년 2차례에 걸쳐 전국 토지의 2/3에 해당하는 218군에 대한 양전을 마쳤다. 양전 사업이 진행되면서 근대적 소유권제도로의 발전을 뜻하는 지계(地契)의 발급도 촉진되었다. 그러나 양전 사업이 중단되면서 지계발급 사무도 중단되었다. 상공업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섬유·철도·농업·운수·광업·상사·금융 부문에 이미 특권적 성격을 벗어난 근대적 회사들이 설립되었으며, 근대 과학기술을 응용한 방직·정미·측량기계와 윤선(輪船) 등이 제조되었다. 또 1902년 경제생활의 기준이 되는 도량형에 관한 규칙이 제정되어, 1903년 전국적인 실시를 보게 되었다.

. 교육정책은 근대적 상인, 기술자의 양성을 목표로 한 실업교육이 강조되었다. 이를 위해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상공학교·광무학교 등 많은 공립실업학교가 세워졌다. 각지에 세워진 많은 사립학교들도 대부분이 실업교육을 표방하고 있었다. 정부의 실업교육 강화정책이 민간에도 반영되었고, 또 그것이 절실한 과제로 여겨졌다. 통신·교통 시설도 개선되어 우편·전보망이 정부 자력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충되어갔으며, 서울·인천·개성·평양 등지에 전화가 개설되었다. 그러나 철도는 처음부터 외국인에게 특허되어 외국기술과 자본에 의해 부설되었다. 1902년 정부에서는 철도 자영책을 시도해 경의철도 부설에 착수했지만, 기술과 자본의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시책이 추진되었다. 1899년 종합병원인 광제원(廣濟院)이 설립되었고, 1900년 순회재판소가 설치되었으며, 1901년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총혜민사(總惠民社)·분혜민사(分惠民社) 등이 설립되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1900년부터 관원들이 관복으로 양복을 입게 되고, 1902년 단발령이 다시 내려 관원들이 상투를 자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의 시책(개혁)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개혁에 소요되는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다고 하는 점이다. 제도의 창설·증설·개편은 재정 수요를 증대시켰지만, 세원(稅源)은 증대되지 않았고, 그 세원마저 황실에 의하여 잠식당하고 있었다. 양전사업도 재정수입의 증대를 위한 것이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러시아·미국·영국 등으로부터의 차관교섭도 여의치 않았다. 미봉책으로 실질가치보다 명목가치가 높은 백동화를 많이 만들어내어 급증하는 재정수요에 충당했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재정형편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국민들의 경제생활을 위협했다.

. 황실재정의 개선책에도 문제가 있었다. 각종 명목의 잡세의 부활은 민중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역둔토·광산·홍삼사업 등의 궁내부 이관은 그만큼 정부재정을 위축시켰으며, 매관매직은 관원들의 부정부패를 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황실재정 개선책은 민중의 경제생활과 정부재정을 희생시키고 부정부패를 조장시키는 가운데 추진된 것이었다. 철도부설권이나 광산채굴권과 같은 이권이 외국인에게 양여된 것도 문제점이었다. 외국인에게 이러한 이권을 양여한 것은 아관파천을 도운 대가의 지불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오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뒤에도 열강의 압력을 받아 이권은 계속 양여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해체)

. 일본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의 산업발전을 배경으로 한국에서 경제적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일본의 경제적 진출은 러시아와 제3차 러일협정(니시-로젠 협정:1898) 체결로 보장받았다. 그리하여 일본은 정치적 측면에서의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해 갔다. 그것은 정치적 재진출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다. 1896년 이래 유지되어 오던 조선에서의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은 1902년 영일동맹이 성립됨으로써 파탄이 일기 시작했다.

. 1900년 청국에서 의화단(義和團) 봉기가 일어나자, 열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공동 출병했는데, 이때 만주에 파견했던 러시아는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음으로써 만주를 영구히 점령할 태세를 보였다. 이는 러시아와 대립관계에 있는 영국과 일본에 대한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하는 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에서 영국은 청국에서의 이권을 일본으로부터 승인받고, 일본은 조선에서의 특수권을 영국으로부터 승인받았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만주에서 철병할 것과 조선에서의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1904년 2월 무력으로 문제 해결을 결정한 일본이 뤼순[旅順]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은 시작되었다.

. 이미 경제적으로 조선에 깊숙이 진출한 일본은 이제 정치적으로도 재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러·일간에 전운이 감돌자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시정개선충고를 조선 정부에 강요하여 수용하게 하고, 조선에서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1904년 2월에 성립시켰다. 이와 함께 일본은 조선 정부에 강요하여 한·러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을 폐기시켰고 통상만을 접수했으며, 조선의 해안과 하천의 항해권도 획득했다. 이어서 동년 8월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고문·외교고문 각 1명을 초빙하는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제1차 한일협약)를 조선정부에 강요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재정고문·외교고문뿐 아니라, 군부·경찰·궁내부고문 및 학부참여관의 초빙까지 강요함으로써 정치의 실권이 일본인 고문에게 들어가는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전세는 일본의 승리로 굳혀갔다. 1905년 7월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다. 영국도 동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9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러일 간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중요한 내용은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에 관한 특수이익을 가지며, 조선에 대하여 지도·보호·감리 등의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조선침략(식민지화)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것이다.

. 조선침략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일본은 식민지화 작업을 예정된 계획대로 추진해 갔다. 1905년 11월, 조선 정부에 강요하여 일본이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인 통감을 조선 황제 밑에 두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한국민들은 이 조약에 맹렬히 반대했다. 1907년 6월 황제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 일본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켰으며,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통감이 조선의 내정 전반에 간섭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뿐만 아니라 이 조약에서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 관리를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각 부의 차관 이하 관리에 많은 일본인들이 임명되었다. 고문정치에 이어 차관정치가 실시된 것이다. 또 이 조약이 체결된 직후 조선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제 형태만 남게 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한일합병조약을 강요당함으로써 멸망했다.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성립된 대한제국은 그 세력균형이 깨어짐에 따라, 한민족의 구국투쟁에도 불구하고 붕괴되었던 것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 1905년

.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며,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조약체결의 배경)

.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桂太郞]-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英日同盟條約)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러시아로부터도 마침내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열강들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保護國化)에 대한 승인을 얻어낸 일제는 이어서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한국의 보호국화에 관한 기본방침을 확정한 것은 1904년 5월 31일의 내각회의에서였다. 내각회의에서 한국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 장악, 그리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 등을 통한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 앞서 이미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2월 23일 일본군 1개 사단이 서울에 진주하며 위협을 가하는 가운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施政改善)에 대해 일제의 충고를 허용한다.'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의 길을 열었다. 그후 한일의정서 시행세칙을 내세워 군사행동과 토지의 점령·수용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며, 8월 22일 '한일 외국인 고문초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체결하게 하고, 군사·재정·외교 고문을 파견했다. 1905년 2월에는 협정에도 없는 경무고문과 학부참여관을 파견하여 한국의 내정을 장악해나갔다. 이 같은 정지작업을 거쳐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조약체결과 그 내용)

. 일제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 체결은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고,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고종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이토는 11월 17일 한국정부의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보호조약을 승인하게 했다. 일본 군인들이 무력시위를 벌이는 공포분위기 속에 열린 이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다시 궁중으로 회의장소를 옮겼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하야시[林權助] 공사는 이토를 불렀다. 헌병사령관까지 대동하고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성여부를 물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등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동한 5대신(五大臣: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을 강제 체결했다(→ 색인 : 을사오적).

. 그 내용은 제1조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영사는 외국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 통감(統監)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지고,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해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조약체결의 여파)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었다. 11월 20일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성과 조약에 조인한 매국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 등도 조약의 무효와 각 지방의 조약반대운동을 알리는 글들을 싣고 반일여론을 확산시켜나갔다. 그리고 유생들과 전직·현직 관료들의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파기를 주청하는 상소가 연이어지는 가운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하여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趙秉世), 전 참정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김봉학(金奉學), 송병선(宋秉璿) 등은 자결로써 국권침탈의 울분을 토했다. 서울 시내의 모든 상가는 철시를 단행하여 조약체결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각급 학교의 뜻있는 교사와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결행하고 조약반대운동에 동참했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밖에 수원 정거장에서 이토에게 돌을 던진 농민 김태근(金台根)과 을사5적의 암살을 기도하다 체포된 기산도(奇山度)·이종대(李鍾大)·김석항(金錫恒) 등 개별적인 의열 투쟁의 사례도 있었다. 교육과 실업 등에 걸친 실력의 양성을 통해 국권의 회복을 꾀하려는 자강운동(自强運動) 역시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층 활발해져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들과 학교의 설립이 잇따르게 되었다.

.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2월 21일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를 공포하고, 초대 통감에 이토를 임명한 데 이어, 1906년 1월 31일 주한일본공사관을 비롯한 각국의 영사관을 철수하고, 전국 13개소에 이사청을 설치하는 등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공사에 착수했다. 또한 조약에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하기 위해 경성에 주재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1906년 3월 2일 통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한국의 유신을 위한 시정개선의 자문에 관한 고종의 의례적 부탁을 들어 자신이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한 주요급무들에 관해 각 대신들과 협의 결정하여 국왕의 재가를 거쳐 시행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906년 3월 13일부터 통감관사에서 한국정부의 참정대신 이하 각부 대신이 참여하는 '한국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수시로 열어 이를 주재하면서 사실상 한국의 내정을 총지휘하기 시작했다.

헤이그 밀사사건(密使事件) ... 1907년(융희 1)

.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호소하여 한국의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한 활동

. 이 활동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고 국민의 반일감정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간의 이해관계를 상호 조정하는 국제회의에서 약소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고종 폐위의 계기가 되어버렸다.

(배경)

.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보호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또한 고종은 서울의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은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 박제순(朴齊純) 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라고 했다. 이에 고종은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것인데, 주로 중재재판·육해전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사실상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 였다.

(파견과정)

. 고종은 전(前) 의정부참판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 이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을 평화회의에 파견하여 러일전쟁 이후의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07년 4월 극비리에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6월 4일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전 주(駐)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과 이위종을 만났다. 먼저 이준·이상설·이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 주최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하고 보름이 넘도록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6월 19일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뒤 '장서'와 그 부속 문서인 '일인불법행위' 1권을 프랑스어로 인쇄했다. 같은 달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28일 장서와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7월 9일 밀사들은 우선 만국평화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을 권하여 곧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들은 네덜란드 외무대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 그러나 이를 전후하여 이 같은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에게 널리 알려져 매일 각국 기자와 답지했는데, 특히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회장인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의의 회보인 〈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 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특히 7월 9일에는 협회의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연설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같이 한국의 사정을 논해서 '억일부한'(抑日扶韓)의 여론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행된 잔인한 재앙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 근심이 분통이 되어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했다. 한편 이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스부르크에 돌아갔으나, 이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에 돌아왔다.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헤이그 사행 전에 이미 계획된 여정인 각국 순방외교에 나서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이후 이들은 궐석재판에서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종신형을 받음으로써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결과)

.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3일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일본 장교단을 거느리고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8일 일제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일 이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했다. 마침내 7월 20일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 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함으로써 합병의 형식만 남겨놓게 되었다.

제27대 순종(純宗) 척(坧) ... 생졸 1874(고종 11)~ 1926. (53세)

재위 1907. 7~ 1910. 8(3년 1개월)

부인 2명, 자녀 없음

순명호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기간 동안 통치권을 통감부에 빼앗기고, 일제의 강요로 한일신협약·기유각서·한일합병조약 등을 체결했다.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 1874년 2월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7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고, 1904년에는 윤씨를 황태자비로 새로 맞이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했다. 즉위 후 일본의 강요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 차관이 국정 전반을 간섭하는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어 일제는 재정부족의 이유를 들어 군대를 강제 해산했으며,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마저 빼앗았다. 정치·외교·군사·경제·사법권 등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이용구·송병준 등이 중심이 된 일진회를 앞세워 합병을 추진하여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무너지게 되었다. 대한제국 붕괴 후 순종은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서 거처하다 1926년 죽었다. 순종의 장례 때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능호(陵號)는 유릉(裕陵)으로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141-1번지에 순종, 순명황후, 순정황후 삼합장(三合葬) 형태이다.

순명호황후(純明孝皇后) 민씨(驪興閔氏) ... 1872년(고종 9)~ 1904년(33세)

.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1세 때인 1882년(고종 19년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4년(고종 31)부터 왕태자빈으로 불리었으며, 1897년 10월 14일(光武 원년) 황태자비에 책봉되었다. 슬하에 자녀는 없이 1904년(광무 8년) 11월 5일 경운궁에서 33세로 승하하였다.

순명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海平尹氏) ... 1872년(고종 9)~ 1904년(33세)

. 해풍부원군(府海豊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로, 1906년(광무 10년) 동궁(東宮) 계비(繼妃)가 되었다가 다음해인 1907년 11월 1일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순종(純宗)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슬하에 자녀는 없이 1966년 1월 13일 춘추 72세로 승하하여 유릉에 합장되었다.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 1907년 7월 24일

.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일본어: 第三次日韓協約)은 1907(융희 1)년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또는 제3차 한일협약(第三次韓日協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高宗, 1864~1907)을 퇴위시키고 병약한 순종(純宗, 1907~1910)을 즉위시킨 일본은 곧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즉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의 체결을 강요했다. 이 조약의 결과 일본은 제 1차 한일협약 이래의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차관정치(次官政治)’로 바꾸고 식민지화의 제4단계 공작을 실현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 고등 관리의 임면(任免)에 대한 통감의 동의권, 한국 관리의 일본인 임명, 한국 사법권의 통감부 장악 등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부수각서(附隨覺書)에서 한국군대의 해산을 결정했다. 이 조약으로 궁내부·내부·농상공부·학부·탁지부·법부 등 내각의 차관이 모두 일본인으로 바뀌었고 경무국장·총세무사 등에도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친위대·시위대를 통틀어 8,800여 명 정도에 불과했던 한국군대가 해산되었고, ‘한국 사법 및 감옥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에 따라 사법권이 통감부에 의해 강탈되었다. 대한 제국은 허울뿐이고 이제 ‘합방’의 절차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기유각서(己酉覺書) ... 1909년 7월 12일

.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한 이후 1907년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세부사항을 시행하기 위한 각서.

<한국사법 및 통감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라고도 불린다. 한일신협약의 3항인 사법사무에 관한 조항을 이행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후임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 통감 시대인 1909년 7월 12일에 소네와 이완용 사이에 각서 교환이 이루어졌다. 모두 5조항으로 ① 한국의 사법 및 감옥사무가 완비되었다고 인정할 때까지 한국정부는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정부에게 위탁할 것, ② 일본정부는 일정한 자격을 가진 일본인 및 한국인을 재 한국 일본재판소 및 감옥의 관리로 임용할 것, ③ 재 한국일본재판소는 협약 또는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이외에 한국 신민에 대해서는 한국법규를 적용할 것, ④ 한국지방관청 및 관공리는 직무에 부응하여 사법 및 감옥의 사무에 대해 재 한국 일본 당해관리의 지휘명령을 받고 또 그를 보조할 것, ⑤ 일본정부는 한국의 사법 및 감옥에 관한 일체의 경비를 부담할 것 등이다.

이 협정에 기초하여 종래의 사법부 및 재판소는 폐지되고, 통감부에 사법청을 두고 그 관할 하에 각급 재판소를 두게 되었으며 그 직원도 일본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 각서로 인해 일본은 조선의 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의병전쟁과 민중들의 반일투쟁을 탄압할 수 있는 합법적이고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 한일신협약>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 ... 1910년 8월 22일 조인, 8월 29일 발효

.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 일본어: 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 かんこくへいごうにかんするじょうやく) 한일 병탄 조약(韓日倂呑條約)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친일파들 사이에서는 한일 합방 조약(韓日合邦条約)이라고도 불린다. [1]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도 호칭한다.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탄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병탄 조약 직후 황현, 민영환, 한규설, 이상설 등 일부 지식인과 관료층은 자결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일 강제 병탄 전후 14만 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2]

한일 병탄[편집]

. 한일 병탄 조약시 전권위임장. 관례와는 다르게 순종의 이름(坧)이 서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척(坧)은 순종의 친필이 아니다.

. 일본 제국은 병탄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에게 ‘병합청원’의 시나리오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년 2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매국흥정을 벌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합병’을 역설한바 있었으나 일본 제국 측의 병탄 계획 때문에 일이 늦어지게 되자 직접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등 일본 제국의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 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고마쓰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다.

.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 이런 시나리오를 연출하면서 일본 제국은 점차 ‘병합’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판단,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다.

. 또한 일본 제국은 조약이 누출되어 조약에 반대하는 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군을 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조약 체결일인 8월 22일 응원병력과 용산에 주둔한 제2사단이 경비를 섰다.

. 불려온 대신들 중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이후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 친일파 대신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다. 이 8명은 한일 병탄 조약 체결 이후 공을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았다.

병합 조약 전문[편집]

.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함.

3.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 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7. 일본국 정부는 성의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

이로써 조선(朝鮮)은

1392년 7월(제1대 太祖)부터 1910년 8월22일(제27대 純宗)까지

27왕 519년 간 왕조 통치의 막을 내린다. the end

 

※ 부록 ∊조선시대의 주요 관청들∋

의정부〔議政府〕

조선시대에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괄하던 최고의 정치기관.

정1품 아문으로 낭묘(廊廟)·도당(都堂)·묘당(廟堂)·정부(政府)·황각(黃閣)이라고도 한다. 1400년(정종 2) 이방원(李芳遠)의 주도하에 왕권강화를 위해 정치를 주도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개편하면서 성립되었다. 성립 때의 의정부는 도평의사사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1405년(태종 5)에 도평의사사를 탈피하여 정치만을 관장하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구성된 체제로 정비되어 그대로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의정부는 왕권, 6조 중심의 국정운영, 직제정비, 비변사의 대두 등과 관련되어 기능이 신축되고 직제가 부분적으로 개편되면서 한말까지 계승되었다. 1895년(고종 32) 근대식 관제개혁에 수반되어 내각(內閣)으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가, 1896년 내각을 의정부로 개칭하면서 다시 부활되었다. 이후 1907년(순종 1) 내각제로 개편하면서 소멸했다.

의정부의 실제기능은 조선 전시기를 통하여 법제적 기능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왕권의 강약과 왕의 자질, 의정부대신의 자질, 의정부와 6조·비변사·승정원·삼사 등과의 국정운영을 둘러싼 상호관계, 원상제(院相制), 당파·세도대신·외척의 정치주도 등과 관련하여 수시로 변천되었다. 1592년(선조 25) 이후 극단적인 비변사 중심의 국정운영으로 의정부는 형식적인 기능만 담당하고 정치·군사 기능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의정은 비변사도제조를 당연직(예겸)으로 겸대하면서 비변사의 운영을 지휘했고, 일부 당파·외척의 지도자인 의정은 더욱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제조로서의 기능발휘는 의정부 기능의 연장으로서보다는 각 개인의 자질이나 정치적 지위와 관련된 것이었다. 1864년 이후 비변사가 폐지되고 그 기능이 의정부로 귀속됨에 따라 의정부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즉 비변사 기능 가운데 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의정부에 귀속시킴으로써 의정부의 옛 기능을 거의 회복했다. 그러나 1894년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에 따라 유명무실해졌다.

의정부는 각 시기에 따라 영향력·빈도수에 있어서 신축성이 있기는 하나 조선 전시기에 형정·노비·경제·군사·의례·복제·입법·인사·교육·과거·풍속·부역·축성·진휼·구료(救療)·사행·통교·불교·국도경영·진봉(進封)·공신책록·역사편찬 등의 모든 국정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크게 국왕으로부터 명을 받아 행하는 수명(受命) 활동, 상언·상소 등을 통한 계문(啓聞) 활동, 국왕의 지시를 받아 정사를 논의하는 의의(擬議) 활동의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그리고 이 활동은 왕권이나 의정부, 6조의 기능과 관련되면서 의정부의 기능이 강력한 시기에는 계문 활동이 중심이 되고, 6조의 기능이 강력한 시기에는 의의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의정부의 직제는 정1품 영의정·좌의정·우의정 각 1명, 종1품 좌찬성·우찬성 각 1명, 정2품 좌참찬·우참찬 각 1명, 정4품 사인(舍人) 2명, 정5품 검상(檢詳) 1명, 정8품 사록(司錄) 2명을 두었다. 이후 〈대전통편〉 편찬 이전에 사록 1명이 감소되고, 1865년(고종 2)에 비변사의 혁파와 관련되어 공사관(公事官) 11명(참상 7명, 참하 4명)이 증치되면서 계승되었다.

한말에는 1894년 7월 관제개혁에 따라 의정부 아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도찰원(都察院)·중추원(中樞院)·기록국(記錄局) 등을 두었고, 아울러 의정 이하가 총리대신 1명, 좌찬성·우찬성 각 1명, 도헌(都憲) 5명, 참의 5명, 주사 31명 등으로 개편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내각으로 개칭되면서 폐지되었다가 이듬해에 내각이 의정부로 개칭되면서 의정 1명, 내부·외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대신 각각 1명, 찬성 5명, 참찬 1명 등으로 편제되었고, 1907년(순종 1) 다시 내각제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이속(吏屬)은 〈경국대전〉을 보면 의정부에는 아전 12명, 서리 14명, 조례(皁隸) 20명, 차비노(差備奴) 24명, 근수노(根隨奴) 36명이 편속 되었고, 구성원인 의정에게는 각각 아전 1명, 서리 1명, 조례 4명, 근수 5명, 반당(伴倘) 9명을, 찬성에게는 아전 1명, 조례 2명, 근수 5명, 반당 9명을, 참찬에게는 아전 1명, 서리 1명, 조례 1명, 근수 1명, 반당 6명을, 사인·검상에게는 조례·근수 각 1명을, 사록에게는 조례 1명을 각각 배속했고, 이것이 후대에도 계승되었다.

의정부 성립 초기에는 의정부관원 가운데 의정·찬성·참찬은 판육조사(判六曹事)·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판의흥부사·도통사(都統使)·훈련관도제조·삼군도총제·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지의흥부사·총제·판사복시사·판군기감사 등을 수시로 겸대하면서 인사·군사 분야에 광범하게 참여했다. 1423년(세종 5)에 국가의 모든 일을 당상관을 통하여 국왕에게 직결시키려는 예겸(例兼:관직에 따른 겸직) 제조제의 정립과 함께 영의정은 종묘서·봉상시 도제조, 좌의정은 문소전·인수부·승문원·사재감·도화원 도제조, 우의정은 광효전·승문원·군자감·성문도감 도제조, 좌찬성은 예빈시제조, 좌참찬은 내섬시제조, 우참찬은 인순부제조를 각각 겸하면서 그 관사의 일을 지휘·감독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변천되다가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고, 그 뒤 관아의 증설 등에 따라 삼의정이 비변사도제조를 예겸하는 등 확대·계승되었다. 대개 일들은 삼의정이 찬성 이하를 지휘하면서 합의하여 처리했는데, 의정은 최고위관직이며 의정부의 장관으로서 백관과 국정을 총괄했고, 또 간헐적으로 운영된 판이조사·판병조사제 및 원상제와 관련하여 동직을 겸대하면서 이조·병조나 국정을 지휘했다. 찬성·참찬은 대개 의정을 보필하면서 의정부의 일에 참여했고, 때때로 의정을 대신하여 서사(署事)를 행하는가 하면 부의 업무에 관한 논의에도 광범히 참여했다. 사인·검상·사록은 가문이 좋은 문과출신 중에서 엄선했는데, 대개 사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을 토대로 검상이 승자되면서 제수되었고, 검상에는 같은 품직인 삼사관·정랑이 제수되었다. 의정뿐만 아니라 찬성·참찬·사인·검상·사록도 정랑·좌랑·주서와 함께 재직기관이 만료되면 승자·체직되는 관직이었다. 특히 검상은 정5품관이나 정4품관인 사인에 결원이 생기면 재직기간을 따지지 않고 사인으로 승직되었다. 사인·검상직은 최단기간에 참상관에서 당상관에 진출하는 지름길이 되어 정랑·좌랑과 함께 관인 모두가 선망하는 주요직이었다. 조선시대 정치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의정부나 비변사와 6조·승정원·삼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중 의정부의 기능은 대개 조선 전기에는 왕권과 관련되었는데, 왕권이 강화되면 6조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육조직계제)되고, 왕권이 약화되면 의정부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의정부서사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의 대두와 함께 유명무실해졌다.

육조〔六曹〕

육조(六曹)는 고려와 조선에서 행정을 각각 분담하여 집행하였던 여섯 개의 중앙 관서를 가리킨다. 육조에는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가 있다. 각 조의 수장은 판서라 칭하며, 고려에서는 정삼품, 조선에서는 정이품 벼슬에 해당하였다. 조선에서는 각 조마다 종2품 참판과 정3품 참의를 두어 판서를 보좌하게 하였다.

역사[편집]

고려 초에는 선관(選官), 민관(民官), 병관(兵官), 형관(刑官), 예관(禮官), 공관(工官)의 육관이었다가 성종 때 이부, 호부, 병부, 형부, 예부, 공부의 육부(六部)로 개편하여 상서성 밑에 두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중국의 행정기관 이름을 일개 왕국에서 쓸 수 없다 하여 다시 전리사, 판도사, 군부사, 전법사의 사사(四司)로 통합 개편하였다. 이후로도 이름의 많은 개편이 있다가 마지막 대인 공양왕 때 비로소 이조, 호조, 병조, 형조, 예조, 공조의 육조(六曹)가 되었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이 이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육조를 설치하고(1392년) 의정부 밑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태종 때 육조를 따로 독립시켜 그 수장인 전서(典書)를 당상관인 판서로 승격시켰다. 또한 회계권, 병권, 문무관의 인사권을 육조에 주어 정책 결정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무와 관직을 6관 및 6부로 분류하는 6분법(六分法)은 중앙관제의 6조 편제는 물론 승정원(承政院)과 지방관아의 부서(部署) 편제에까지 6방제(六房制)로서 널리 응용되었다. 1894년(고종 31년)에 폐지되었다.

구성[편집]

6조에는 각각 판서(判書)·참판(參判)·참의(參議) 각 한 사람씩이 있어 이를 3당상(三堂上)이라고 하고, 속료(屬僚)로는 정랑(正郞)·좌랑(佐郞) 각 3원(三員)이 있어 이를 낭관(郎官)이라고 했다. 6조는 그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각 조 내에서 사(司:행정 각 부의 局에 해당)를 두어 각각 소정의 사무를 분장(分掌)케 하였는바, 각 사는 당하관(堂下官)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낭관이 이들을 주관하였다. 각 조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1.이조-문선(文選:관리의 채용·임용·봉급 등에 관한 일), 훈봉(勳封:봉군·봉작 등에 관한 일) 및 고과(考課)의 인사행정을 장리(掌理)했다.

2.호조-호구·공부(貢賦:공물과 부세)·전량(田糧:전지와 양곡) 및 식화(食貨:식료와 재화) 등의 재정을 장리했다.

3.예조-예악(禮樂)·제사·연향(宴享:국빈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조빙(朝聘:조견과 나라끼리의 사신 교환)·학교·과거 등의 교화(敎化)를 장리했다.

4.병조-무선(武選:무관의 선발·임명 및 봉급)·군무(軍務)·의위(儀衛:의식에 참렬시키는 호위)·우역(郵驛)·병갑(兵甲)·기장(器仗)·문호·관약 등의 군사를 장리했다.

5.형조-법률·상언(형벌의 상심 결정)·사송(詞訟) 노예 등의 법률을 장리했다.

6.공조-산택(山澤)·공장(工匠)·영선(營繕)·도야(陶冶) 등의 공영(工營)을 장리했다.

의의[편집]

6조가 각기 맡은 임무는 고려의 6부와 별 차이가 없었는데, 다만 조선의 6조는 고려의 6부보다 정치적 중요성이 훨씬 커졌던 것이다. 이는 조선의 정치기구가 고려의 그것보다 관료적이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삼사〔三司〕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으로서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도 하였다.

3사의 하나인 사헌부(司憲府)는 백관에 대한 감찰·탄핵 및 정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언관(言官)의 기능을 하였으며, 홍문관(弘文館)은 집현전의 기능을 계승하여 언관의 기능과 함께 궁중의 서적과 문한(文翰)을 관장하면서 경연관(經筵官)으로서 국왕의 학문적·정치적 고문에 응하는 학술적인 직무를 담당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하여 언론양사(言論兩司) 또는 양사라고 하고, 이 두 기관의 관원을 대간(臺諫)이라 하였으며, 홍문관을 합하여 언론삼사라고 하였다. 이 기관들은 독자적으로 언관(言官)의 기능을 수행하였지만, 국정의 중요한 문제에서 양사가 합의하여 언론을 펴는 양사합계(兩司合啓)를 하기도 하고, 양사합계에 홍문관도 합세하는 것을 삼사합계라고 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언론을 펴기도 하였다. 3사의 언론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3사의 모든 관원들이 일제히 대궐 문 앞에 부복하여 국왕의 허락을 강청하는 연좌데모인 합사복합(合司伏閤)을 하였다. 이러한 언론의 기능은 왕권이나 신권의 전제(專制)를 막을 수 있었으나, 3사의 기능이 일정한 세력에 의하여 이용될 때는 국정의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1) 사헌부〔司憲府〕 ... 고려와 조선시대 언론과 감찰을 관장하던 관청.

상대(霜臺)·오대(烏臺)·백부(栢府)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이러한 기능을 담당한 것은 어사대 (御史臺)였다. 어사대는 995년(성종 14) 중국 당(唐)·송(宋)의 관제를 받아들여 국초에 설치되었던 사헌대(司憲臺)를 개칭한 것이다. 1298년(충렬왕 24) 원(元)에 복속되어 관제의 명칭을 전반적으로 격하시키면서 이름을 어사대에서 사헌부로 바꾸었다. 이후 빈번한 관제변동에 따라 감찰사(監察司)·어사대·사헌부의 명칭이 반복되다가 1369년(공민왕 18) 사헌부로 정착되어 조선으로 이어졌다. 특히 1298, 1308년 장관인 대부와 대사헌이 각각 정2품과 종2품으로 승격한 것은 충선왕의 개혁정치와 관련된 사헌부의 기능강화와 지위 상승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후 고려의 사헌부 제도를 계승했다. 그 후 일부 관직명이 개칭되면서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명문화되었다. 사간원의 관원이 계속 감소된 것과 달리 사헌부 관원은 고려 이래의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는 왕권강화를 위해 신권(臣權)을 계속 견제·제약하려는 국왕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제적으로 규정된 사헌부의 기능은 처음 성립할 때는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관리의 공과(功過) 고찰, 포거(褒擧)·탄핵하는 일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여기에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며, 남위(濫僞)를 금하는 일 등이 추가되었다. 사헌부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언론 기능, ② 정치참여 기능, ③ 시종 기능, ④ 서경 기능, ⑤ 사법 기능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중 언론 기능은 사헌부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목적은 유교적 이상정치의 구현에 있었다. 여기에는 간쟁·탄핵·시정·인사활동이 있다.

간쟁(諫爭)은 왕의 언행에 잘못이 있을 때 바로잡는 것이다. 제도적으로는 사간원의 임무이나 사헌부에서도 담당했다.

탄핵(彈劾)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는 것으로서 잘못을 저지른 관원을 탄핵하여 직위에서 축출하는 활동이다.

시정은 당시 정치의 시비를 논하는 것이다.

인사는 부정한 인사에 대해 탄핵하는 것이다.

이런 언론활동은 사간원·홍문관도 함께 수행했으므로 이들 3개의 관청을 대간(臺諫)이나 3사(三司)라고 불렀다. 언론기능에는 대사헌·집의·장령·지평이 참여하고 감찰은 관여할 수 없었다. 감찰은 중앙의 각 관서나 지방에 파견되어 감독기능만 수행했다. 이 때문에 감찰은 감찰방(監察房)이라는 독자적인 집무실에서 방주감찰(房主監察)의 통솔 하에 근무했다. 정치참여 기능은 왕이 의정부·6조 대신들과 함께 신하를 접견하여 보고와 자문을 받는 조계(朝啓)·상참(常參) 등에 참여하고, 여기에서 논의되는 정사에 의견을 개진하는 활동이다. 시종기능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여하고, 왕의 궁외행차를 호종하는 활동이다.

서경기능은 고신(告身:사령장)·의첩(依牒)을 심사·동의하는 활동이다. 고신서경은 사간원도 수행했는데, 그 범위가 고려시대에는 1품 이하의 모든 관원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 변동되다가 5품 이하로 고정되었다. 법사기능은 법령의 집행, 백관에 대한 규찰, 죄인에 대한 국문, 결송(決訟) 등을 행하는 활동이다. 법령집행은 왕명에 따라 주로 금령을 단속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음주·수렵(狩獵)·음사(淫祀)·분경(奔競)·인신위조(印信僞造)·벌송(伐松)·천예기마(賤隸騎馬) 금지 등이 있다. 백관에 대한 규찰은 서울·지방의 모든 관원을 대상으로 공·사간의 부정·비위 여부를 살펴 탄핵·정정하는 것이다. 지방에는 분대 (分臺:분사헌부)로서 감찰이 파견되어 이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다. 결송은 민사·형사 소송을 재판하는 것인데, 이 또한 형조·사헌부·장례원 등과 함께 수행했다. 사헌부는 이러한 결송기능 때문에 형조·한성부(또는 의금부)와 함께 3법사(三法司)로 불렀다.

이처럼 사헌부는 의정부·6조·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과 함께 정치의 핵심기관으로서, 그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이나 신권의 독주를 막고 균형 있는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지만, 비대해지거나 국왕·대신 또는 당파에 이용되면 큰 폐단을 낳을 수 있는 기관이었다. 탄핵은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는 물론, 풍문(風聞)에 의해서도 행할 수 있었다. 이때 대상관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임무수행이 정지되며, 다시 직무를 보기 위해서는 제수(除授)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3사는 모두 중심활동인 언론(탄핵)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면책의 특권을 누렸다. 성종 대 말부터 선조 전기에는 이들이 의정부·6조의 권한을 제한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당쟁이나 세도·외척정치의 운영과 관련되어 당파나 세도·외척정치를 지속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또 조선시대 동안 간헐적으로 대간이나 3사 상호간에 탄핵이 행해졌다.

사헌부 관원은 재주가 뛰어나고 가계가 좋은 자를 임명했다. 또 홍문관·사간원 관원과 함께 승자(陞資)·체직(遞職)에서 의정부·6조 관원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외의 관원보다는 우대를 받았고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이중 정5품 지평과 정6품 감찰은 대개가 의정부·6조의 같은 품계의 관직에 체직되었고, 여기서 다시 2년 6개월 미만의 재직 후에 정4품과 정5품직에 승자·승직되었다. 사헌부 관원은 사간원 관원과 함께 고과(考課)를 받지 않았고,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를 받으면 정중하게 답례하도록 규정하는 등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사간원에는 언론의 대상이 국왕인 점과 관련해 문과 출신자만 제수하고 근무 시에도 상하관 사이에 격의가 없으면서 음주를 허용하는 등 분방했던 것과는 달리, 사헌부에는 음서 출신도 임명할 수 있었고, 근무할 때는 상하관 사이에 위계와 질서가 엄격했다.

또 사간원의 정언(正言)과 사헌부 감찰은 모두 정6품관으로 이들 간의 위치는 관사의 격에 따라 감찰이 앞섰으나, 1471년(성종 2) 이후에는 언론대상과 관련되어 정언이 앞서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사헌부는 감찰 1명이 감소되는 변화를 겪으면서 한말까지 계속 존속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사간원과 함께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都察院)으로 개편되면서 소멸되었다.→ 대간 , 대사헌 , 분대 , 사간원 , 3사

2) 사간원〔司諫院〕 ... 사간원은 조선시대 간쟁과 논박을 담당한 관청.

간원(諫院), 미원(薇院)이라고도 한다. 사헌부·홍문관과 함께 대간 또는 3사로 통칭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의정부제의 정비에 따라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키면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기능상으로는 문하부낭사의 직장에서 연원된 것이었다. 문하부낭사는 고려 성종 대에 문하부를 설치하고, 정3품 산기상시(散騎常侍 : 또는 상시) 이하의 관원을 편제시키고 간쟁(諫諍)·봉박(封駁)을 관장하게 하면서 성립되었다. 이후 문하부낭사는 고려 정치체제의 변동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개창과 함께 고려의 문하부낭사제를 계승했다. 그러나 1401년에 문하부의 혁파와 함께 사간원으로 계승되면서 독립관아가 되었다. 이당시 사간원의 직장과 관원을 보면 직장은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관원은 대폭 감축되고 간소화되었다. 즉 좌·우 산기상시, 내사사인, 기거주가 혁거되었고, 좌·우 간의대부가 좌·우 사간대부(司諫大夫)로, 직문하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좌·우 보궐이 좌·우 헌납(獻納)으로, 좌·우 습유가 좌·우 정언(正言)으로 각각 개칭되는 등 7관직 11명이 4관직 7명으로 조정되었다. 이와 같이 사간원관이 대폭 감소된 것은 태종의 왕권강화 도모와 관련된 사간원의 약화책에서 기인되었다.

사간원의 법제적인 기능을 보면, 성립 때는 간관으로서의 기능만이 계승되어 간쟁을 담당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왕명·문서의 출납업무는 승정원으로 이관되면서 폐지되었다. 이 기능이 1466년(세조 12)에 간쟁·봉박으로 정리되면서 개정되었고, 이것이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명문화되면서 후기까지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간쟁(諫爭)은 왕에 대한 언론으로서 왕의 언행과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언론이고, 봉박(封駁)은 일반정치에 대한 언론으로 그 대상은 그릇된 정치와 부당·부적합한 인사 등이었다. 즉 사간원의 제도상 직무는 왕과 정치에 대한 언론이었으나 실제 기능은 법제적인 언론활동은 물론,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으로 확대되면서 전개되었다. 언론활동은 크게 간쟁·탄핵·시정·인사 등으로 구분되었다. 국왕을 대상으로 한 언론인 간쟁은 제도상으로는 사간원 고유의 기능이지만 사헌부·홍문관에서도 행했다. 탄핵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언론으로 부정·비위·범법한 관원을 논란·책망하여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시정은 그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의 시비를 논하여 바른 정치로 이끌어가는 언론이었다. 인사는 부정·부당·부적합한 인사를 막아 합리적·능동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언론이었다. 또한 사간원관은 왕이 중신을 접견하여 정치적 보고와 자문을 받는 조계(朝啓)·상참(常參)에 참여했고, 의정부·6조와 함께 정치와 입법에 관한 논의에 참가했다. 왕을 모시고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과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에 입시했고, 왕의 행행에 호종했다. 또 사헌부관원과 함께 5품 이하 관인의 제수와 관련된 고신(告身)과 법령의 제정·개정과 관련된 의첩(依牒)을 심사하고 동의했다.

이러한 사간원의 기능은 대개 사간원 단독으로 전개했지만, 사안이 중요하거나 사헌부·홍문관의 협조가 필요할 경우에는 대간합사나 3사합사로도 전개했다. 사간원의 기능발휘는 조선 일대를 통하여 국왕의 대간에 대한 인식·대우, 의정부나 비변사의 대두, 당쟁, 세도·외척정치의 운영, 정치 분위기 등과 관련되는 가운데 시기적으로 신축이 반복되면서 대체로 본래의 정신·기능에 부합되어 전개되었다. 사간원의 직제는 성립 때는 좌·우 사간대부(각 1명, 정3품 당상), 지사간원사(1명, 종3품), 좌·우 헌납(각 1명, 정5품), 좌·우 정언(각 1명, 정6품)이 있었다. 이 직제는 그 후 정치적 변동에 따라 관원의 수가 축소되고 명칭이 개변되었다.

사간원을 포함한 3사 활동의 중심이 된 탄핵활동은 그 직무의 보장·장려와 관련되어 면책의 특권을 누리면서 사실이 확인된 경우에는 물론 풍문에 의해서도 행했는데, 이때 탄핵을 받은 관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직무수행이 중지되고 다시 직무를 보기 위해서는 제수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사간원의 관원은 가계가 좋고 재행이 뛰어난 인물을 제수했다. 사간원관은 홍문관·사헌부관과 함께 체직·승자에서 의정부·6조 관원에는 뒤떨어지나, 그 외의 같은 품직보다는 우대되고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그중 정5품의 헌납과 정6품의 정언은 대개 같은 품직인 의정부·6조 직에 체직되었다가 같은 직에서 2년 6개월 미만의 근무 후 정4품과 정5품에 승자·승직되었다. 사간원관은 사헌부관과 함께 대간이라 통칭되면서 모두 고과(考課)를 받지 않았고,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에는 정중히 답례할 것이 규정되는 등 우대를 받았다. 특히 사간원관은 언론의 대상이 국왕이었음과 관련되어 사헌부관이 제수되지 못했고, 정6품 정언은 처음 소속된 관아의 지위에 따라 사헌부감찰의 하위에 놓였지만 1471년(성종 2) 이후에는 상위로 개선되었다. 또 사간원관은 사헌부관이 부 내에서의 근무 시에 상관·하관의 위계와 질서가 엄격했음과는 달리, 상관·하관 사이에 격의가 없었고 직무 중에도 음주가 허용되는 등 분방했다. 사간원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으로 개편되면서 소멸했다.→ 문하부 , 3사

3) 홍문관〔弘文館〕 ... 조선시대의 학문연구·시강·언론 기관.

옥당(玉堂)·옥서(玉署)·영각(瀛閣)이라고도 한다.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3사(三司)라고 통칭되었다. 1456년(세조 2) 사육신 사건을 기화로 집현전이 혁파된 뒤 집현전이 담당했던 문풍의 진흥, 인재의 양성을 예문관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예문관은 본연의 업무는 물론 구 집현전의 업무까지도 포괄한 이중적인 성격의 관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본래의 업무와 관원보다는 집현전계의 업무와 관원이 중심이 되는 불합리한 면이 노출되었고, 동시에 그 관원의 자질이 낮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1478년(성종 9)에 예문관을 예문관과 홍문관으로 분리·독립시켰다. 이에 홍문관은 유학의 진흥 및 인재의 양성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구로 발전했다. 이후 홍문관은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의 언론기피정책으로 사간원과 함께 혁파되었으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과 함께 복구되었고 한말까지 계승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관제개혁에 따라 궁내부 경연청, 궁내부 경연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896년에 궁내부 홍문관으로 복칭 되었고 조선 멸망 때까지 이어졌다. 홍문관의 법제적인 기능은 성립 때에는 궁중의 경서·서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는 것이었는데 한말까지 계승되었다. 실제기능은 위의 법제적인 업무는 물론, 국왕의 호학, 정치 분위기 등과 관련되어 성종 이후에는 감찰·언론 기능도 행사했다. 그리하여 홍문관은 1489년 이후에는 장내부경적(掌內府經籍)·치문한(治文翰)·비고문(備顧問)의 기능과 감찰기능, 언론기능을 행사하는 장서·문한·시종·감찰·언론 기관으로 확대 강화되었다.

홍문관의 직제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1품 영사(領事) 1명(의정겸), 정2품 대제학 1명, 종2품 제학 1명, 정3품 당상 부제학 1명, 정3품 당하 직제학 1명, 종3품 전한(典翰) 1명, 정4품 응교 1명, 종4품 부응교 1명, 정5품 교리 2명, 종5품 부교리 2명, 정6품 수찬 2명, 종6품 부수찬 2명, 정7품 박사 1명, 정8품 저작 1명, 정9품 정자 2명을 두었다. 그 후 1746년(영조 22) 〈속대전〉 편찬 이전에 직제학은 도승지가 예겸(例兼)하고, 1785년(정조 9) 〈대전통편〉 편찬 이전에 영사는 영의정의 겸직으로 각각 보완되면서 한말까지 계속되었다. 아울러 홍문관부제학 이하는 해당관아의 문한을 다스리고, 고문(顧問)을 대비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지제교(知製敎)와 사관(史官)을 겸대했다. 홍문관 관원은 대간원처럼 그 업무와 관련하여 능력이 있고 가문이 좋은 인물을 제수했고, 승자·체직에서 의정부·6조 관원에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다. 특히 홍문관관원은 시종기능의 수행과 관련되어 홍문록에 의하여 제수되었고, 국왕의 총애와 신간서적의 사급, 사가독서(賜暇讀書), 음식물을 하사받는 등 대간보다 우월한 지위와 대우를 누렸다. 홍문관은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학문연구·시강 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언론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다. 또한 유학의 진흥, 인재의 양성에 기여했다.

승정원〔承政院〕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

일명 정원(政院)·후원(喉院)·은대(銀臺)·대언사(代言司)라고도 한다. 고려시대까지는 중추원(中樞院)에서 왕명출납을 관장했으나,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와 중추원을 의정부와 삼군부로 개칭하면서 승정원을 독립시켰다. 이는 태종이 주도한 것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제도개편이었다. 1401년(태종 1) 의흥삼군부와 합쳐 승추부가 되었으나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흡수시키고 승정원을 다시 독립시켰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승선원(承宣院)으로 개칭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승정원의 기능은 왕명출납·시종·정부기능·외방출사기능이 있다. 왕명출납은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국왕으로부터 하달되는 모든 명령과 정교(政敎)는 반드시 승정원이 살펴 국왕에게 다시 허락을 받은 뒤에 하달했다. 의정부 대신도 승정원을 경유하여 왕을 면대해야 했다. 왕에게 올리는 모든 부주(敷奏)와 복역(復逆)의 일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왕에게 보고·전달되었다. 모든 상소도 승정원을 경유했다. 또 승지는 6방(房)으로 나누어 6조의 업무를 분장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국정전반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고, 지조사(知曹事)로서 해당하는 조의 대신과 조의 일을 의논하며, 의정부·6조 대신과 대소정사에 참여했다. 승지는 중국사신의 영접·환송·위연·문안·기념품증정 등 사신접대사를 수행하고, 지방에 파견되어 민정시찰도 했다. 이외에 일과 때는 물론 일과 후에도 국왕의 명령전달이나 자문,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승정원에서 숙직했다. 경연참찬관으로서 경연에 참가하고 부묘(祔廟)·친사(親祠)에 집사관으로 참여했다. 승정원의 관원은 초기에는 정3품 당상관인 지신사(知申事)·좌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 각 1명, 정7품 당후관(堂後官) 2명과 이속으로 연리(椽吏)가 있었다. 이들이 15~16세기 동안 변천되면서 정3품인 도승지·좌승지·우승지·부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동부승지 각 1명, 정7품 주서(注書)와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각 1명 체제로 정립되었다. 좌차(坐次)에 따라 도승지·좌승지·우승지를 동벽(東壁), 좌부·우부·동부승지는 서벽(西壁)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겸승지·색승지(色承旨)·가승지와 가주서(임진왜란을 계기로 변사의 기록을 관장하는 사변가주서로 계승됨)가 수시로 두어졌다. 승지의 6조사 분장은 도승지·좌대언·우대언·부대언·좌부대언·우부대언·동부대언(승지)이 차례로 이방·병방·호방·예방·형방·공방을 분장했다. 도승지는 이방을 분장하고 좌승지 이하는 나머지 5방을 분장했다. 그러나 도승지는 승정원의 장관으로 나머지 5방의 일에도 관여했다. 신임 승지의 임명은 도승지 이하에 결원이 생기면 좌승지 이하가 차례로 승진하고 공석이 된 자리에 신임 승지를 임명했다. 승지 역임자는 대개 종2품 이상으로 승진하게 되어 있어 같은 품계의 어떤 관원보다도 우월한 혜택을 받았다. 주서는 〈승정원일기〉의 작성, 서적과 문서관리, 타사와의 연락 등 원내 행정사무를 담당했다. 1525년(중종 20) 이후에는 대간 계사(啓辭:論罪에 관해 왕에게 올리는 글)의 유루(遺漏)를 방지하기 위해 계사의 초기(草記)를 작성하는 일도 맡았다. 춘추관 기사관이 예겸(例兼)한다. 가계가 좋은 인물이 제수되었고 임기가 끝나면 종6품 이상으로 진급했다. 1425년(세종 7) 주서의 임무가 중요하므로 자주 교체되는 것은 곤란하다 하여 임기를 2년으로 했다. 이들도 상위의 주서가 체직하면 하위의 주서가 오르고, 상위의 주서가 승자되면 하위의 주서도 함께 승자되는 등 위차가 엄격했다. 한편 원상제(院相制)를 시행할 때는 전임 의정이나 현임 의정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정무를 처리했다. 이때 원상은 때때로 의정부를 제치고 6조·승정원을 지휘하면서 국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승지 , 중추원

예문관〔藝文館〕 문원(文苑)이라고도 한다.

정3품 아문으로 왕의 사령서(辭令書 : 詞命)를 찬술하는 일을 맡았다. 고려 초기에 제찬사명(制撰詞命)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된 학사원이 뒤에 한림원으로 개편되고, 고려 말기 춘추관과 합쳐져 예문춘추관으로 되었던 것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5년(태조 4) 2월에 그대로 예문춘추관을 두었다. 그러나 1401년(태종 1) 7월 관제개편 때 예문춘추관을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나누어 설치하고, 예문관원은 녹관(祿官)으로, 춘추관 관원은 겸관(兼官)으로 충원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모두 문관으로 제학 이상은 다른 관사의 관원이 겸임했으며, 대제학이 문한을 맡아보았다. 봉교 이하의 관원을 처음 제수할 때는 의정부가 이조·홍문관·춘추관·예문관과 함께 통감(通鑑)·좌전(左傳) 등 중국의 여러 사서 가운데 강(講)하게 해서 합격된 자를 채용했다. 1년에 양도목으로 해서 2명씩 거관(去官)시켰다. 품계가 낮은 자는 그 직위에 준하여 품계를 올려주고 차례차례 전임시켰다. 소속관원으로 정1품 영사 1명, 정2품 대제학 1명, 종2품 제학 1명, 정3품 당하관직제학 1명, 정4품 응교 1명, 정7품 봉교 2명, 정8품 대교 2명, 정9품 검열 4명을 두었다.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했으며, 응교는 홍문관직제학부터 교리에 이르는 관원 가운데 택하여 겸임하게 했다. 원래 예문관직제학과 직관(直館) 2명은 별다른 업무가 없으므로 사관(史官)이 겸직하여 매일 출근하게 했다. 또 각 아문에서 예문관에 제공·보고한 문서를 점검하고, 예악형정(禮樂刑政)에 관계되는 현행사무로서 관계되는 것을 실수 없이 기록하여, 춘추관에서 해마다 수찬(修撰)한 것을 〈시정기 時政記〉라고 이름 붙인 뒤 실록편찬의 자료로 삼게 했다. 이 때문에 예문관 전임관원인 봉교 이하는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게 했다. 그리하여 예문관의 전임관 8명인 봉교·대교·검열을 모두 합쳐 한림(翰林)이라고 했으며, 예문관에서 관외로부터 실록편찬 자료를 운반해오는 데 사용하는 궤(櫃)를 한림궤(翰林櫃)라고 했다. 사고에 보관된 실록이나 사초의 포쇄(曝曬 : 젖거나 습기 찬 것을 바람에 쏘이고 햇볕에 말리는 것)를 위해 예문관원이나 홍문관원에서 포쇄관을 차출하는 것이 상례였다. 예문관도 홍문관처럼 관원을 뽑기 위한 예문록(藝文錄)이 있어 권점(圈點)이 3개 이상인 자는 예문록에 수록하게 했다. 〈대전통편〉에는 의정(議政)이 겸임하던 영사를 영의정이 겸임하도록 했으며, 〈대전회통〉에서 직제학이 없어졌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경연청(經筵廳)에 합쳐졌다.→ 춘추관

춘추관〔春秋館〕

조선시대 시정(時政)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청.

고려 초에는 사관(史館)이라 칭했는데 시중이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겸하고 수국사(修國史)와 동수국사(同修國史)는 2품 이상의 관원이 겸하도록 했으며, 수찬관(修撰官)은 한림원(翰林院)의 3품 이하가 겸하고 직사관(直史館)의 4명 중 2명은 권무(權務) 관직이었다. 뒤에 직사관은 직관(直館)으로 올려 8품으로 했으나 고종 때 다시 권무관으로 했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문한서(文翰署)에 병합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 했다. 1325년(충숙왕 12) 예문춘추관을 예문관·춘추관으로 나누었다. 그때 춘추관에는 수찬(修撰)·주부(注簿) 각 1명과 검열(檢閱) 2명을 두었는데, 뒤에 검열이 공봉(供奉)으로 고쳐져 정7품으로, 수찬은 정8품으로, 검열은 정9품으로 정해졌다. 또 영관사(領館事)·감관사(監館事)는 수상이 겸하고 지관사(知館事)·동지관사(同知館事)는 2품 이상이 겸하고 충수찬관(充修撰官)·충편수관(充編修官)·겸편수관(兼編修官)은 3품 이하가 맡도록 했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사관으로 고치고 편수관(정7품) 1명, 검열(정8품) 1명, 직관(정9품) 2명을 두었다. 1362년 다시 춘추관으로 고쳤는데, 이전처럼 공봉(정7품)·수찬(정8품)·검열(정9품)을 두었다. 1389년 예문관·춘추관을 합해 예문춘추관이라 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교명(敎命)·국사(國史)의 일을 담당하는 예문춘추관을 설치했다. 관원으로 시중 이상이 겸하는 감관사 1명, 대학사(大學士:정2품) 2명, 자헌(資憲) 이상이 겸하는 지관사 2명, 학사(종2품) 2명, 가선(嘉善) 이상이 겸하는 동지관사 2명, 충편수관(4품 이상) 2명, 겸편수관(4품 이상) 2명, 5품 이상이 겸하는 응교 1명, 공봉관(供奉官:정7품) 2명, 수찬관(정8품) 2명, 직관(정9품) 4명을 두었으며 서리(書吏) 4명을 두었다. 그 뒤 1401년(태종 1)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하여 예문관원은 녹관(祿官)으로 하고 춘추관원은 겸관(兼官)으로 했다. 그 뒤 편찬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춘추관의 관원으로 영의정(정1품)이 겸임하는 영사(領事) 1명, 좌의정·우의정이 겸임하는 감사(監事) 2명, 지사(知事) 2명, 동지사(同知事) 2명, 수찬관·편수관·기주관(記注官)·기사관(記事官) 등을 두었다. 〈원육전 元六典〉에는 경외대소아문(京外大小衙門)으로 하여금 시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권면하고 경계 삼을 만한 것을 춘추관에 보내게 하여 기사(記事)의 근거로 삼게 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춘추관의 관원을 모두 다른 관사의 관원이 겸하는 것은 그들이 각기 소속 아문의 일들을 송부하는 임무를 띠게 하기 위해서였다. 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춘추관의 수찬관이 경중(京中)과 지방의 사초(史草)를 보내오게 했으며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편찬 일을 맡겼다.

중추부 [中樞府]

조선시대 서반(西班) 소속 정1품 아문(衙門).

특정한 관장 사항 없이 문·무의 당상관(堂上官)으로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소속시켜 대우하던 기관이다. 조선은 건국 초에 고려의 관제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왕명출납·병기(兵機:군사기밀)·군정·숙위·경비(警備)·차섭(差攝:행정사무 분담) 등의 일을 맡는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했다. 관원으로는 정2품의 판사(判事) 1명을 장관으로 하여 종2품인 사(使) 1명, 동지사(同知事) 4명, 첨지사(僉知事) 1명, 부사(副使) 6명, 학사(學士) 1명, 상의원사(商議院事) 3명과 정3품인 도승지(都承旨) 이하 승지(承旨) 6명을 두었고, 실무 인원으로 정7품의 당후관(堂後官) 2명, 이속으로 연리(掾吏) 6명을 두었다. 그러나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어 군사 권한을 장악하도록 함으로써 크게 약화되었다. 이어서 1400년(정종 2) 사병(私兵)이 혁파되고 관제 개혁이 이루어질 때 군사 권한을 나누어 장악하던 중추원과 의흥삼군부를 합하여 삼군부(三軍府)로 하고 왕명출납 기능을 분리하여 승정원(承政院)을 설치했다. 1401년(태종 1) 삼군부와 승정원을 통합하여 승추부(承樞府)를 설치했는데, 기존의 삼군부와 승추부의 기능도 모두 계승함으로써 강력한 군사 권한과 왕명출납 기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405년(태종 5)의 관제개혁으로 승추부를 병조에 병합하여 군사 권한을 병조에 귀속시키고, 왕명출납의 임무는 다시 승정원을 설치하여 장악하게 했다. 이로써 중추원 계열의 관서는 27년 동안 존재하지 않다가 1432년(세종 14)에 새로 중추원을 설치했다. 관원으로는 장관인 종1품의 판사(判事) 3명을 두고 그 아래에 사(정2품)·지사(知事:정2품) 각 3명, 동지사(종2품) 6명, 부사(종2품) 8명, 첨지사(정3품 이상) 6명 등의 당상관 관원과 경력(經歷)·도사(都事) 등의 수령관(首領官) 1명씩을 두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녹사(錄事)와 전리(典吏)·조예(皂隸) 등을 중추원으로 이속하여 근무하도록 했다. 이때의 중추원은 병조와 삼군도진무소(三軍都鎭撫所) 아래에서 군사 지휘를 담당하던 삼군도총제부를 폐지하고 그대신 군정(軍政)을 맡도록 했기 때문에 판사 등을 3명 또는 6명씩 두었지만, 실제로는 당상관 관원들에게는 특별한 직무가 없었다. 다만 사 이하 26명의 당상관이 2명씩 번갈아 궁궐 숙위(宿衛) 등의 일을 맡았을 뿐이었는데, 이로써 중추부의 원형이 갖추어졌다.

중추원이 1466년(세조 12)에 중추부로 개칭되어 마침내 〈경국대전〉에는 관할 업무가 없는 기관으로 실리게 되었다. 중추부의 장관은 정1품인 영사(領事)로 승격되어 1명 두었고, 그 아래에 판사(종1품) 2명, 지사(정2품) 6명, 동지사(종2품) 8명, 첨지사(정3품) 8명 등의 당상관과 경력(종4품)·도사(종5품)가 각 1명씩이 있었다. 당상관은 관할 직무가 없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순장(巡將)으로서 행순(行巡)의 임무를 맡는다든가, 관찰사(觀察使)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겸임 발령되는 등 상당한 융통성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중추부의 제도적 틀은 조선 후기에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으나, 당상관 관원으로 임명하는 규정은 차츰 상세하게 정해졌다. 의정(議政)에서 물러난 이들은 서열에 따라 중추부의 영사와 판사에 임명되도록 정해졌다. 이에 비하여 지사·동지사·첨지사 등에는 고위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이 임명되기도 했는데, 이들에게는 임기를 30개월로 제한했다. 지사 이하의 당상관직은 노인에 대한 우대직으로도 활용되었다.

한편 지사 1자리를 오위(五衛)의 위장(衛將) 체아직(遞兒職)으로 증설하고, 첨지사 3자리를 또한 고정적으로 위장의 체아직으로 삼은 것도 조선 후기의 중요한 변화였다. 아울러 경기관찰사를 제외하고는 중추부의 당상관으로 관찰사·병마절도사에 겸임 발령되는 일은 중단되고 그 대신 강화·개성·수원·광주 등의 유수(留守)로 임명될 때 겸임·발령하도록 되었다. 또한 관찰사가 임기를 마치면 동지사 이하의 당상관직을 주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대체로 중추부의 영사와 판사는 퇴임 의정으로서 비변사(備邊司)의 도제조(都提調)를 맡고, 지사 이하의 당상관도 상당수가 비변사의 제조를 맡아서, 당상관 관원 자체로는 국정 운영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관서였다. 중추부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다시 중추원으로 이름을 고쳐 의정부 소속 관청이 된 뒤 이듬해에는 의장(議長)·부의장 아래 의관(議官) 50명 이하를 둔 대의기구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한일합병 뒤에도 형식상의 대의기구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성균관〔成均館〕...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

〈주례 周禮〉에는 국가 교육기관으로 오학(五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학(南學)을 성균이라 하여 음악을 통한 교육을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했다. 성균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성균관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이 1298년(충렬왕 24)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바뀌었고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쳤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태학(太學)·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조 대에 새 도읍인 한양을 건설하면서 1398년(태조 7)에 숭교방(崇敎坊 :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성균관의 건물을 세웠다.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문묘(文廟), 강의 장소인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서재(東西齋)가 이때 세워졌고, 그 후 성종 대에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尊經閣)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선조 대와 그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성균관의 직제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으나,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겸관(兼官)으로 정2품 지사(知事) 1명과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이 있으며, 실제 교수직은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종4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 정9품 학록(學錄) 3명, 종9품 학유(學諭) 3명으로 구성되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초기에는 200명이었으나 말기에는 100명으로 줄었다. 입학자격은 소과 급제자인 생원·진사에 한했으나 결원이 있을 경우 사학(四學) 생도나 문음자제(門蔭子第)들이 승보시(升補試)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 신분의 학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고 승보시 출신은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여 구별했다. 그러나 이들 하재생도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에 달하면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교과과정은 경사(經史)의 강의와 과문(科文)의 제술로 이루어졌으며, 사서오경은 주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르쳤다. 1466년(세조 12)에는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사서오경을 차례에 따라 가르치도록 했으나 이 구재법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학생들의 수업 성적은 강경(講經)과 제술을 통해 평가했으며,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의 관내 생활은 유교적 의례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자치적으로 질서를 잡도록 이루어져 있었다. 학생들의 자치기구로는 재회(齋會)가 있는데, 그 임원으로는 장의(掌議)·색장(色掌)·조사(曹司)·당장(堂長) 등이 있었다. 또 유생들은 국정에 관해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권당(捲堂)을 행하기도 했다.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학전의 수조(收租)와 성균관의 외거노비 신공으로 충당했으며, 그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다.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성균관을 가리켜 인륜을 밝히고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 성균관은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배이념을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유지에 기여했다. 성균관의 이러한 기능은 성균관과 과거제를 밀접하게 연결시킨 데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과의 경우 소과와 대과의 2단계가 있었다. 예비시험으로서의 소과는 내용적으로 성균관의 입학자격자를 뽑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발된 이들에게는 성균관 과정의 교육을 거친 다음에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성균관이 대과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받아들여졌다. 성균관의 이러한 성격은 조선 후기에 유교 학풍이 과거를 위한 학문보다 심성 수양과 의리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고, 서원을 통해 그러한 학풍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성균관 교육의 부진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성균관이 여전히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존속했다. 조선 말기에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의 성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성균관에 경학과(經學科)가 신설되고 역사·지리·세계사·세계지리·수학 등을 교육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균관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병에 의해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밖의 주요 관청들∋

의금부〔義禁府〕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맡아 하던 사법기관.

일명 순군(巡軍), 의용(義勇)이라고 불리었다. 금부(禁府)·금오(金吾)·왕부(王府)라고도 한다.

포도청〔捕盜廳〕

조선 중기 이후(1540년(중종 35) 포도장·포도대장 제도를 계승하여 상설적인 치안전담기구인 포도청을 설치했다. 도둑이나 기타 범죄자를 잡기 위하여 만들어진 경찰기관이며, 좌, 우청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조선시대 오위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기관(軍令機關). 고려시대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를 1393년(태조 2)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하고 병권의 통제를 꾀하였다. 오위(五衛) : 의흥휘,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

훈련원〔訓練院〕

1466년(세조 12)에 훈련원으로 개칭되면서 제도적 기틀을 완전히 갖추었다. 훈련원의 관원으로는 정2품 지사(知事) 1명(타관겸)과 정3품 당상관인 도정(都正) 2명(1원은 타관겸), 정3품 당하관인 정(正) 1명과 종3품인 부정(副正) 2명, 종4품 첨정(僉正), 종5품 판관(判官), 종6품 주부(主簿), 정7품 참군, 종8품 봉사(奉事)가 각각 2명씩 있었으며, 그밖에 습독관(習讀官) 30명에게 병서를 습독하고 활쏘기·말타기 등을 익혔다. 이들 관직에는 모두 무신이 임명되었으나, 부정 이하 참군까지의

상서원〔尙瑞院〕

1392년(태조 1) 관제를 개정할 때 고려 말 창왕(昌王) 때 설치되었던 상 서사(尙瑞司)를 그대로 두고, 부인(符印)과 제수(除授)에 관한 일을 담당하게 했다. (세조 12) 1월 관제개정 때 상서원으로 개편 되면서 관직도 바뀌었다. 〈경국대전〉에는 관원으로 도승지(都承旨)가 겸임하는 정3품 정(正) 1명, 종5품 판관(判官) 1명, 종7품 직장(直長) 1명, 정8품 부직장(副直長) 2명을 두었다.

주(註) 위의 자료는『조선왕조실록』(지은이/박영규, 도서출판 들녘 1996) 문화유산『왕릉』(펴낸이/이상용, (주)한국문원 1995) 및 daum. net naver. com 등의 각종 자료를 참고로 편집한 내용임. 201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