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2
수안보온천 - 문경읍(25km)
일 시; 2012년 3월 15일
경유지: 수안보 - 돌고개 - 대안보 - 은행정 - 사시동 - 소조령 - 고사리 - 제3관문 - 이진터 - 제2관문 - 교귀정 - 제1관문 -
관리 사무소 - 문경시외버스 터미널(25km)
2 . 문경새재(25km)
한 달 만에 찾아온 수안보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56년 만에 찾아온 한파에 20여cm나 쌓인 폭설로 수안보가 온통 눈 속에 고립된 동화속의 별천지를 이루었는데, 그사이 눈이 모두 녹아내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오늘 진행할 구간이 4대강 국토대행진에서 가장 험난한 이화령(580m)을 넘는 곳이라, 폭설이 쌓인 한겨울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눈이 녹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동서울에서 6시40분차로 달려온 탓인가? 생각보다 빠른 8시 45분에 도착한다. 화창한 봄 날씨에 하늘까지 맑게 개였으니 워킹하기에는 가장 좋은 날씨다. 온천비각이 있는 공원에서 시작된 자전거 길은 3번 국도를 따라 돌고개를 넘으면, 제주목사 조정철과 홍랑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조감사묘를 지나 옛날 영남과 충청도를 넘나드는 나그네의 쉼터와 공문서 전달역할을 했던 안보삼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석문동천이 흐르는 계곡을 따르면 미륵사지와 국립공원 월악산 가는 길이고, 남쪽은 은행정마을과 냉천동을 지나 소조령으로 향한다. 소조령에서 자전거 길은 연풍으로 향하고, 고사리마을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는 갈림길이 나온다. 문경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문경새재는 영남과 충청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와 문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문경새재 쪽으로 자전거 길이 연결되는 것이 순리겠지만. 이곳은 도립공원의 경내를 지나는 곳이라 자전거 통행을 통제하는 곳이라 부득이 이화령으로 자전거길이 조성된 것이다. 걸어서 넘는 데는 문경새재 쪽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으로 소조령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화여대 생활관이 있는 고사리 마을에 들어서면, 신선봉(968m)과 마패봉(927m)이 날카로운 암봉을 드러내고 낙엽송이 무성한 계곡으로 그림 같은 조령산 자연 휴양림이 펼쳐진다. 심신이 피로한 도시인들이 잠시나마 자연을 벗 삼아 문경새재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더 없이 좋은 안식처이다.
드디어 영남 제3관으로 부르는 조령관(650m)에 도착한다.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부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領)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산이 높고 험준하여 새들도 넘기 힘들고 억새가 많아서 또는 새로 닦은 길이라 해서 새(新)재로, 하늘재(麻骨領)와 이우리재(伊火峴)사이에 있는 고개라 하여 새재로 부른다.
조선 초부터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는 가장 큰 대로였던 새재는 영남과 충청도를 구분하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으로 부봉과 조령산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적을 막기 위해 선조 초에 성을 쌓고 숙종(숙종 34년:1708)때 중창하였다. 1907년 육축(陸築)만 남고 불에 탄 것을 1976년 홍예문 및 석성135m와 누각을 복원하여 성벽과 관문이 위엄을 갖추고 있는데, 우리 역사의 숨결이 거칠고 고단할 때 마다 주 무대로 등장하는 요충지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科擧 길”은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넘는 길이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새재를 즐겨 넘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령관을 넘어서면 수백 명의 장졸들이 주둔할 수 있는 너른 공터가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히 일품이다. 이제 이곳부터 주흘관이 있는 9.6km가 우리 문화와 역사의 숨결이 서려있는 길이다.
科擧에 及第하여 고향으로 錦衣還鄕하는 길목으로 내려서면, 정성스레 쌓아올린 책 바위가 반겨준다. 책 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속설이 있어, 지금도 입시철이 되면 소원성취를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한다. 잠시 후 문경초점(聞慶草岾)에 도착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의하면 낙동강의 발원지를 3곳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이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초점이고, 하나는 소백산 순흥으로, 상주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의 이름을 달고 부산의 을숙도까지 흐른다.
조령산성에는 북암문과 동암문이 있다. 북암문은 미륵리를 지나 충주, 제천쪽으로 3관문, 깃대봉 조령산으로 연결되고, 동암문은 관음리를 지나 단양, 예천쪽으로 탄향봉수와 하늘재로 연결된다. 조선후기 국방상의 요충지로 인식되는 곳에 쌓은 산성으로 “암문이란”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 전시 상황이 되면 군수물자를 조달하거나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시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숲이 우거진 곳이나 성곽 깊숙한 곳에 만들어져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진 터에서 우리의 슬픈 역사를 되돌아본다. 임진년(1592년)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쳤다.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정탐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申砬) 장군이 농민 모병 군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이곳 조령산 능선에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하고 충주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치게 된다.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한편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 장군의 조선 농민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나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문경시 자료 인용)
얼음이 녹아내리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한결 상쾌하고, 산을 찾은 아낙네들의 웃음소리에서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조령산 줄기에 가려 새색시의 수줍은 듯 자태를 감추고, 겨울에는 큰 빙폭으로 장관을 이루는 색시폭포를 지나면 너른 암반에서 청정옥수가 물보라를 일으킨다. 소낙비를 피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깊은 사랑을 맺었다는 바위굴을 자나 제2관문인 조곡관에 도착한다.
영남 제2관으로 부르는 이곳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 이라고도 한다. 숙종 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3관문)과 초곡성(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 또는 주서문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에 훼손된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주흘산 등산로 입구를 지나면 산불됴심 표지석을 만난다. 옛날 주흘산의 산불을 막기 위해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 됴심" 비는 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 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을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로,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 초부터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는 가장 큰 대로였던 새재길 중턱에 경상감사가 교체 할 때 마다 업무와 직인을 인계인수했던 교귀정이 있다. 문경현감 신승명이 1466년에 세웠다고 하지만, 구한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교귀정을 굽어보고 있는 소나무는 오랜 역사와 함께 지나온 세월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 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 등 여러 계층의 백성들이 험준한 새재 길을 오르다 지친 몸을 한 잔술로 달래고, 여독을 풀면서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주막. 산수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주막의 뜨락에서 바라보는 조령산의 자태는 선경이 따로 없다. 左靑龍右白虎의 지세로 주흘산과 조령산이 양립한 문경새재는 정상의 세찬바람도 비껴가는 명당자리다.
조령원 터에 도착한다. 원(院)이란 조선시대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시설이다. 조령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라 조령원터 외에도 동화원, 신혜원 터가 있었다고 한다. 조령원터의 넓이는 1,980㎡ 규모의 직사각형으로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돌담장과 석축, 4개의 건물지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돌담장 한 쪽에는 문을 내어 위에 긴 돌을 가로로 얹어 놓았다. 특히 돌담장의 축조형태를 살펴보면, 바깥쪽은 수직으로 쌓고 안쪽은 계단 형태로 쌓아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일반적인 담장이라기보다는 유사시에 성벽의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된 것을 1995년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문경오픈세트장이 나온다. 2.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경내로 들어서면 반영구적으로 지은 궁궐의 모습이 실제와 흡사하다. 70,000㎥의 부지에 경복궁, 동궁을 비롯하여 사대부집, 저잣거리, 성문 등 130동의 건물이 있다. 2000년 문경시와 KBS가 이곳에 고려시대 사극촬영장을 조성하면서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등을 촬영했고, 2007년 문경시에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오픈세트장을 새롭게 단장하여 대왕세종, 천추태후, 제중원, 명가, 추노를 촬영했다고 한다.
경북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광장을 벗어나면, 제일 관문 주흘관이 반겨준다. 주흘관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다.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하는데,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문경시에서 왕건세트장을 유치하여 후삼국, 고려시대의 왕궁과 양반, 서민들의 가옥을 재현한 세트장을 지어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면서, 주변의 웅장하고 수려한 산의 모습과 잘 어울려 마치 역사 속에 들어선 듯 신비로움까지 든다.
문경새재야 말로 우리역사와 문화 전설에 오픈세트장까지 볼거리가 많아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안성맞춤이다. 문경새재 광장을 벗어나 조령천이 흐르는 개천 옆으로 도로를 따라 읍내로 들어가면, 이화령을 넘어온 자전거 길이 문경도자기전시장이 있는 진안교에서 만난다. 이화령으로 돌아오는 길보다는 5km가 짧았지만, 문경새재의 아름다운 비경을 몸소 체험하는 일정으로 만족한다.
면소재지보다 조금 커 보이는 문경읍은, 세월이 비껴가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잣밭고개에 걸린 청운각에 호기심이 일어 찾아보니, 박정희 전 태통령이 문경 초등학교 선생으로 재직할 때 하숙하던 집을 작은 기념관으로 구며 놓은 곳이다. 문경새재를 넘어오며 견문을 넓이는 것도 4대강 살리기 국토대행진의 보람이 아닌가 싶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해 본다.
드라마 셋트장
이화령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