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묵 2011. 5. 1. 04:49

 

                                           안성 문학기행

 

 

일시: 2011년 4월 30일

 

 

 

 

                                               조병화 시인 기념관

 

장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337번지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부친 조두원(蘭 趙斗元)과 모친 진 종(陳 鍾) 사이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조병화 시인. 1943년 3월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9월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수로 재직하면서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을 출간하여 시인의 길로 들어선다.

 

1959년 경희대학교 교수(시학 교수, 문리대학장, 교육대학원원장 등 역임)를 시작으로 1986년 8월 31일 정년퇴임을 한다. 이와 같은 교육과 문학의 업적을 인정받아 중화학술원(中華學術院)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카나다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창작시집 53권이 증명하듯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일본, 중국,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네덜랜드)에서 25권이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문단에서도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하면서 그동안에 세계시인대회 국제이사, 제4차 세계 시인대회(서울, 1979) 대회장을 겸임했다.

 

그는 아세아문학상(1957), 한국시인협회상(1974), 서울시문화상(1981), 대한민국예술원상(1985), 31문화상(1990), 대한민국문학대상(1992),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1996), 516민족상(1997)을 받았다. 1991년 편운문학상(片雲文學賞)을 제정하여 상을 수여하고,  2003년 3월 8일 작고한 이후로 유족들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지속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제1전시실에는 기획전시물과 그가 남긴 53권의 창작시집, 수필집, 화집 등 160여 권의 서적이 전시되고 늘 즐겨 쓰던 베레모, 입에 물었던 파이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펜, 많은 여행에서 모은 소품에서 조 시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제2전시실에서는 그의 럭비 관련 유물과 학창시절 성적표, 그가 위안으로 그렸던 그림을 비롯하여 화려했던 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등 상패와 기념패, 명예박사학위증이 있다.

 

 

 

 

 

 

                                              - 나의 생애 -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니는 나의 고향

                                                         나의 종교

 

 

                                               나는 어머니에서 태어나와

                                               어머니로 돌아가는 그 길을

                                                한 결 같이 살아 왔을 뿐,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웠습니다.

 

 

                                                       1996. 가을

                                                         조 병 화

 

 

 

미리내 성지

장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 교우촌의 유래

미리내 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時宮山 515m)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 잡고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로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고, 그것이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우리말 ‘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우리의 옛 지명이다.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양평, 용인, 안성, 화성, 시흥 일대와, 충청도 천안 목천, 진천 배티, 동골 등, 교회 초기에 신앙선조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 중에서, 중부내륙 용인과 안성에 깊숙이 위치한 초기 비밀교회 이었다.

 

기록상으로는 1827년 정해박해 때에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 되어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일찍이 일가를 이끌고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살았던 곳이 용인 교우촌 이었으며, 또한 여섯 살 소년 김대건이 1827년에 할아버지 김택현, 아버지 김제준을 따라 충청도 당진 솔뫼에서 박해를 피해 들어온 곳이 한덕골(묵리 한덕동 광파리골) 교우촌이다. 김대건 신부 묘역이 있는 미리내 고개 너머에 바로 인접한 골짜기 교우 촌이다.

 

 

 

 

 

 

 

미리내 성지

미리내 성지(안성시 양성면 미산리)는,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소와,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 그리고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이 있는 거룩한 성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묘역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高주교, 미리내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29년까지 33년간 본당을 지킨 초대주임 강도영(姜道永) 신부와, 간도지방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미리내 본당 3대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묘소가 함께하고 있다.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만25세의 나이로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한 점 흠결 없이 순교하였다.17세의 청년 이민식(빈첸시오)이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이 치명한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데 성공하여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 시킬 수 있었다.

 

남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 1984년 성인위에 오름)와 대역죄인 아들신부를 천주께 보내고, 이집 저집 문전걸식을 하는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 어머니도 김대건 신부의 묘소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모자간의 한을 위로하였다.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빈첸시오 자신도 92세에 세상을 뜨니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묘역 곁에 묻히게 되었다.

 

 

 

 

 

 

미리내 성지의 성역화와 성지순례

미리내의 성역화 작업은 지난 1972년부터 시작되어 초대 주임 강도영 마르코 신부와 본당신자들에 의해 1906년에 건립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과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신자들 자녀에게 천주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던 미리내 교우촌의 <해성학원 교사> 건물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성당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 하악골(아래 턱 뼈)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종각에 올려진 <미리내 종>은, 1917년 강도영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로부터 들여왔으며,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포탄제작을 위한 징발을 당할 뻔하였다. 이 종은 현재도 미리내 본당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요셉성당 옆에 있는 깊은 우물은, 강도영신부와 본당 신자들이 목을 축이던 유서 깊은 우물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옛 무덤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들이 지닌 아름다운 신앙의 넋이 깊이 스며 배어진 진토(塵土)로서 빛나는 순교영성의 향기가 가득히 머문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스승과 동료 신부에게 보낸 옥중 서한에서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님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히 (이를)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여! 잘 있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믿음, 겸손, 사랑, 순명으로 <십자가의 비결>을 살아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청류 재수목 문학관

김유신 관장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시인들의 고향이요. 안성이 자랑하는 수목원이다.

예향의 고장 안성을 찾는 문인들에게 안식처가 될수있도록  청류재수목문학관을 개설하여 문단의

역사를 한눈에 보고 갈 수 있도록 전시장을 만들고 오래 묵은 책들과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강선영 태평무 전수관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안성3동 사곡동 31

 

태평무 전수관은 평생을 전통무용에 몸 담아온 강선영 선생에 의해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전승과 보존을 꾀하고 재능 있는 춤꾼들의 발굴양성과 개방화된 무대를 제공하기 위해 지난 1998년 그의 고향인 안성에 사재를 털어 완성한 문화공간이다.

 

대지 1,200평, 건평 430평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태평무 전수관은 400여명의 관람 및 연습이 가능한 130평 규모의 대 공연장, 세계풍물과 태평무 관련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 연습실, 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각종 무대공연과 세미나 등에 이용되고 있다.

 

태평무 전수관에서는 무용예술의 저변 확대와 전통예술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 분기별로 무용인들을 대상으로 태평무 강습회와 매주 토요전통 무용 상설무대를 통하여 관광객과 수도권 시민들을 대상으로 우리 전통예술의 대중화를 꾀하고 있으며 매년 우리 고유의 춤사위를 보존하고 우수한 인재발굴을 위한 전통무용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통무용의 종류

 

태평무 -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우리의 춤사위

검무 -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무사의 춤

장고춤 - 가장 널리 알려지 신명나는 우리의 춤

한량무 - 높은 문화적 가치의 종합형식의 무용극

무당춤 - 인간의 생로병사를 축원하는 춤사위

향발무 - 아름다운 절제미, 향악정재의 정수

광작과 학 - 신선이 된 듯 구름 위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