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 호 - 산꾼의 기도
북한산 둘레길
위로 향하던 우리의 발길이 산자락을 따라 옛 길을 찾게 되었으니, 그 효시는 제주의 올레길이 아닌가 싶다. 입소문을 타고 들불처럼 번지는 올레길 탐방이 지리산에 이어 북한산 국립공원에도 등장했다. 이 얼마나 반가운 희소식인가. 산을 찾아 집을 나서면 정상을 다녀와야만 직성이 풀리던 우리의 사고방식이 언제부터인가 삼림욕장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산책로가 조성되면서 의식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둘레길이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소통의 길이요. 등짐 진 보부상들이 힘겹게 넘어가고 청운의 꿈을 안고 선비들이 넘든 길이다.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신작로가 생기고 철로와 고속도로기 질주하는 문명의 뒤안길로 사라지던 오솔길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으니 세상사 새옹지마가 아닌가 싶다. 입소문을 통해 전해지는 제주나 지리산의 풍광을 마음속에 그리면서도 바쁜 일정에 쫒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요 안타까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우이령 길을 개방한 이래 1차로 북한산 둘레길 44km를 조성하였다.
북한산 국립공원의 대표적인 우이령 길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와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을 잇는 길이 6.8㎞의 비포장 길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분리하는 고개 마루는 수 백 년 간 경기 북부 주민들이 생활의 통로로 이용해 오던 중, 1·21사태(김신조 사건)이후 군 시설과 초소가 들어서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전면통제 돼왔다. 정감이 넘치는 바위고개로 지칭되는 우이령 고개. 울창한 숲속을 지나 전망대로 조성된 테크에 올라서면 백미를 장식하는 오봉의 멋진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사가 절로난다.
한북정맥의 종주 길에서 금단의 벽으로 가로막혀 철저한 보안검색으로 통행이 제한되던 곳. 이제 철 통 같은 장벽도 스스로 족쇄를 풀고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으니 한강물도 춤을 추고, 오봉도 영봉도 우리의 품으로 포근히 안겨온다.
북한산 둘레 길은 접근이 용이하여 어느 곳에서나 연결이 가능하다. 우이령 길을 넘어오면 우이동 솔숲길이 반겨준다. 계곡을 따라 걷는 오솔길. 도선사 오름길과 만나는 둘레 길은 손병희 선생의 묘소를 지나 야산의 숲길을 오르내리며 다리 근육을 풀어준다.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루는 솔밭공원에는 마을 주민들의 쉼터요. 청솔무와 다람쥐의 천국이다.
독립유공자들의 묘소와 4.19묘역을 지나는 순례 길은 선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칼바위로 올라서는 화계사를 지나면 둘레 길에서 유일하게 조성한 12m높이의 전망대가 나온다. 북한산의 아름다운 자태와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구의 도심지와 아파트가 일대 장관을 이루고, 감탄사가 절로난다. 부드러운 흙길을 밟아가노라면 숲 그늘에서 쏟아지는 피톤치드의 진한 향기에 취해 사색의 공간속으로 빠져든다.
청정옥수에 수량도 많아 아낙네들의 낭 낭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빨래 골을 지나 정릉길로 들어선다. 소나무숲속에서 맑은 물이 솟아올라 松泉이라 부르던 솔샘 길을 지나고 우리민족의 혼을 일깨워주는 무궁화동산이 반겨준다. 자연 생태공원으로 조성된 야생화단지를 지나 정릉주차장에 내려서면 종점으로 돌아온 143번 버스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명상의 구간으로 부르는 정릉주차장과 형제봉입구의 2.4km는 둘레 길에서 가장 난코스라고 할 수 있다. 사색은커녕 오르내림이 심한 비알 길에서 진땀을 흘리며 가쁜 숨소리를 토해내는 고통의 구간이다. 북악산 갈림길을 지나며 북악하늘 길과 팔각정. 새로 복원된 성벽을 따라 북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평창동 마을길은 서울의 부자들이 성역을 이루는 곳이다. 5.5km에 이르는 이 구간은 유럽의 어느 부자촌을 찾아온 듯, 고풍스러운 저택들이 깨끗한 공기와 툭 터진 공간 속에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그사이를 이어가는 고샅길은 한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야하는 지루하면서도 따분한 길이다.
구기터널 위를 지나는 탕춘대 성암문은 문수봉과 비봉 향로봉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예로부터 북한산의 빼어난 경관을 찬양하여 중종실록에는 동악에 금강산, 서악에 묘향산, 남악에 지리산, 중악에 삼각산, 북악에 백두산 등으로 5악을 정해 국가의 주요행사 때마다 산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시원하게 이어지는 둘레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가 있다.
장미공원으로 일컬어지는 독박골에서 생태공원으로 올라서는 구름 하늘 길은 굴곡이 심한 구간으로 바위 암벽이 많다. 나무계단으로 등산로를 정비하여 서대문과 은평구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여러 곳에 있고, 관리 공단에서 공을 가장 많이 들인 구간이다. 둘레 길의 특징이라면 새로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길을 정비하여 사용하므로 자연을 보호하고 옛길을 되살린다는 친화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하지만 수도권의 특성에 따라 사유지와 군부대를 지날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을길로 돌아가는 안타까움이 따른다.
마실 길. 진관사 입구에서 200년 된 느티나무를 보고 계곡을 건너 소공원을 지나 삼천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1.5km의 짧은 구간을 이르는 말이다. 너무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르면 고개 너머 이웃마을에 마실 다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지나는 오솔길이다. 내시들의 묘지가 많아, 지어진 내시 묘역 길. 조선시대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연인을 기다리다 연못에 빠져죽은 기생의 넋을 기리는 여기소. 효자 박태성의 전설이 서려있는 효자마을 길로 이어진다.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효자동 공설묘지까지 진행하면 아스팔트 도로가 기다린다. 길옆으로 명산대천을 찾아 모여드는 무속인 들의 굿당도 보이고, 밤나무 유원지를 지나 시원한 계곡과 울창한 수림 속에서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면 충의길이 나온다. 솔 고개 오르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는 연도에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현역시절 행군하던 추억을 떠 올리면, 3km의 고개 길도 거뜬하게 넘어선다. 지루하고 따분한 길옆으로 차량들이 질주하고 매연과 소음으로 매콤해진 코를 킁킁거리며 솔 고개에 올라서면 상장봉에서 노고산으로 연결되는 한북정맥을 만난다.
우이령 입구의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며 44km 둘레 길도 마감을 한다. 그동안 도봉산이나 북한산을 수없이 올랐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숨어 있을 줄이야. 조급함이 없이 여유롭고 느긋하게 사색을 즐기며 걷는 발걸음에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내년에 개통되는 도봉산 둘레길 28km가 완공되고 나면, 명실상부하게 북한산국립공원 둘레 길72km가 우리의 친구가 되어 2천만 수도시민의 포근한 안식처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연재 기회
백두대간에 부는 바람
. 갈령(443 m) - 신의터재(320 m) / 23.5km
갈령은 상주시 화서면에서 화북면을 거쳐 괴산으로 넘어가는 977번 지방도로의 고개 마루다. 갈령 삼거리까지는 백두대간 중에서 유일하게 자동차가 오르지 못하는 곳이라 30여 분간 진입로를 따라 걸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갈령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는 충북알프스의 구병산 줄기가 흐르고, 왼쪽은 갈령에서 분기한 청계산(877m)과 대궐터산(746m)이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로 맥을 이어간다. 대궐터산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하송리에 있는 산으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장군이 이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고 하여 대궐 터 산이라 부르고 있다.
완만한 대간 길에 무명봉을 넘어 안부에 도착하면 생태계의 보고인 습지대가 있다. 비만 오면 물이 고여 천지라 일컬으니 655m 분지위에 펼쳐지는 못제여! 늪지여! 신비한 그대를 영원히 보호 하리. 백두대간에는 지리산의 왕등재 늪지대와 함께 유일한 못인데, 약 오륙백 평 정도의 넓이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이 주변 지방을 장악해 나간다. 이때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 장군과 견훤이 세력 다툼을 하며 싸움을 벌인 족족 황충이 패하고 만다.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부하를 시켜 미행한 끝에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낸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푼다. 그러자 견훤의 힘이 사라지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를 했다고 한다. 이 못제에 얽힌 전설은 대간 마루금 동쪽에 있는 대궐터 산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북암리 견훤산성과 함께 천하를 호령하고 싶었던 견훤의 야망을 대변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무명봉을 넘어서면 척박한 왕 사토에 등이 굽은 소나무들이 뒤틀리고 휘어지고, 만고풍상 설한풍에 모진 고초 다 겪으며 모진생명 이어가는 모습이 우리네 민초들의 삶과 흡사하지 않은가? 암릉을 넘나들며 헬기장에 도착한다.
답답한 수림 속에 간간이 나타나는 암봉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구병산과 봉황산, 대궐터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510봉 오르는 길이 고단한 몸에 무리인지 내딛는 발걸음이 무뎌지고 거친 숨소리가 하늘을 찌르는데, 정상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원기를 되찾는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이 정한 이치라. 곤두박질치며 내려앉는 비알 길에 오금이 저려오고 철 계단 딛고 내려선 2차선 포장도로에 말끔하게 단장된 비재(320m)가 반겨준다. 450m 무명봉이 양 옆으로 솟아오르니 깊고 깊은 협곡이 전략적 요충지라. 백만 대군이 몰려온들 두려울 것이 없겠다.
비재는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동관 마을과 장자동을 오가는 고개로 남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비알 길에서 다리 힘이 쭉 빠지도록 안간힘을 다하지만, 한낮의 열기 속에 물먹은 솜뭉치처럼 천근만근 무너지는 몸을 추 수리기에 여념이 없다.
앙증맞은 암 능 구간을 넘나들며 화남면과 화서면의 경계선을 타고 동쪽으로 흐르는 대간 길. 활등같이 구부러진 주능선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편안하고 여유롭다. 하지만 전면에 보이는 봉화산(740m) 오르는 발걸음이 예사롭지가 않다.
산정을 오르는 비알 길에서 온갖 삭신 녹아나며, 심장의 고동소리에 애간장이 다 녹는다. 고진감래라 하였던가? 고생했던 만큼의 보상도 없이 시원치 않은 조망에 실망하며 앙증맞은 표지석에 판독하기 어려운 삼각점을 바라보며 물 한 모금으로 하산 길을 서두른다.
오르는 고통도 내려서는 즐거움이 있기에 참아내는 것이 아닌가. 암릉을 넘나드는 경쾌한 발걸음에 피로도 풀리고 주위를 조망하는 기쁨 속에 30여 분후 안부에 내려서면 울창한 수 림 속에 속절없이 포로가 되어 피톤치드의 향기 속에 취하고 만다.
주위의 지형지물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힘겨운 보행 끝에 정수리에 오른다. 우뚝 솟은 감시 초소에 올라 바라보는 상주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가을바람에 출렁이는 황금들녘의 끝자락에 윤지미산이 손짓하고 뒤돌아보면 지나온 봉화산이 하늘높이 걸려있다.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비알 길을 내려서면 편안한 길로 이어지고 450봉을 넘고나면 소나무 어우러진 잡목 속으로 빠져든다. 유순한 산등성이에 실바람 산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피곤한 몸에도 생기가 돈다. 잠시 후 25번 국도와 49번 도로가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착하면 효자마을 표방하는 상곡리 표지석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봉화산 4.6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25번 국도를 따라 화령재(320m)에 도착하여 화령정(1990년 6월 건립)에 올라서면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 표지판이 반겨준다. 한줄기 소낙비에 금강과 낙동강으로 운명이 갈리고, 지나는 골골마다 시세풍습 달라지며 말소리와 행동거지 딴판이라. 오대산의 물줄기는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갈렸어도 양수리의 두 물 머리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이 있으니 어찌 부럽지 않으리.
경북 상주시와 충북의 보은군을 연결하는 국도 25번인 화령재에서 추풍령까지 55km를 중화지구대라 일컫는다. 250m에서 500m의 고도를 유지하는 중화지구대는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과수농사가 잘 되는 비교적 높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자연재해가 적은 편이다.
화령재를 출발한 대간 길은 상주-당진을 이어주는 고속도로(2008년 12월 완공예정) 터널 위를 지나 삼백(누에, 쌀, 곶감)의 고장, 상주의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유순한 산길을 따른다. 405봉을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완만한 등로가 이어지고 짤막한 안부를 지나며 시작된 급경사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정상에 올라서면 돌무더기위에 세워진 초라한 윤지미산(538m)이 반겨준다. 이산의 원래 이름은 소머리 산이라고 하지만, 언제부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윤지미산으로 부르고 있다.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서는 길이 급경사를 이루고 판곡 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405봉에서 윤지미산을 경유하는 대간 길은 판곡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가는 형상으로 대간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지만 큰 기복 없이 동남쪽으로 선회하여 무지개산(441m)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간다. 과수원을 지나 서쪽으로 30여분 진행하면 329봉에 이르고, 공동묘지가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선회하여 팔음산 포도 홍보 판이 있는 신의터재(280m)에 도착한다.
20. 신의터재(280m) - 큰재( 320m ) / 24.5km
신의터재의 원래 지명은 임진왜란 전까지 신은현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어산재로 개명되었으나. 1995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준신이 의병을 모아 상주성에서 왜적을 도륙하고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을 기리고자 "신의터재"라고 지명을 바꾸게 되었다는 내용이 표지석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신의터재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내서면 낙서리와 화동면 이소리를 오가는 지방도로인데 2차선으로 포장이 되어있고, 이곳에도 어김없이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 이정표가 서있다. 대간은 동남쪽으로 진행되며 큰 기복이 없는 마루금은 포도밭과 숲속을 드나들며 1시간동안 걷노라면, 슬 랩 지대에 도착하고 남쪽으로 백학산(615m)의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안쑥밭 골에서 남쪽으로 달려가던 대간 길은 화동면과 모서면의 경계지점을 지나며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며 남쪽으로 진행을 하다 지기재에 이른다. 그 옛날 도적의 소굴이었다고 해서 적기재라 부르던 지기재는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이다. 양지바른 언덕의 비알에는 이곳의 명물인 포도밭이 즐비하며 농로에는 시멘트 포장길이 산뜻하고, 금강과 낙동강 분수령의 이정표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기재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묵정밭과 과수원을 지나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400고지에 오른 이후 평탄한 숲길로 연결되고 임도를 만나 포도밭 사이를 빠져 나오면 개머리 재(295m)에 이른다. 지기재 와 개머리 재는 모서면의 마을을 연결하는 지방도로로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있다. 이제는 산간오지의 두메산골도 포장된 도로를 따라 왕래를 할 수 있는 풍요로운 우리의 삶이 펼쳐진다.
햇볕이 따사로운 가을 들녘, 과수원 주위를 둘러보면 까치와 산비둘기로부터 탐스러운 과일들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처 놓은 그물망을 보게 된다. 자연보호도 좋지만 농민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된다. 개머리 재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마루 금을 따라 과수원과 숲길을 따르면 모서면과 모동면의 경계지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면의 경계선을 따라 동쪽으로 대간길이 이어지고 20여 분후 모서면 대곡리와 공성면 효곡리를 이어주는 임도를 만나 백학산(615m)오름길이 시작된다. 모처럼 만나는 오름길에서 땀을 쏟으며 올라선 정상에는 아담한 정상석이 반겨준다. 무성한 잡목으로 조망이 신통치 않지만, 모서면 대포리와 모동면 덕곡리. 공성면 효곡리가 경계를 이루는 3개 면의 꼭 지점이 된다.
백학산 정상에서 면 경계선을 따라 남쪽으로 분기한 줄기에는 성봉산(572m)이 있고 상판 저수지로 연결된다. 하지만 대간 길은 북쪽으로 10여 분간 진행하다 동남쪽으로 구부러지며 477봉까지 이어지고 지그재그로 남진하여 동물 이동통로가 있는 윗 왕실재(400m)에 도착하면 백학산 2.9km 개터재 3.7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왕실임도는 공성면 효곡리에서 외남면 소상으로 연결되는 소로다. 시멘트포장길 중간 중간에 길이 패어 승용차가 다니기에 불편한 곳이다.「국토가 숨 쉬는 곳! -여기는 백두대간」 윗 왕실임도를 가로지르는 육교에 걸린 표어의 글귀다. 동물들은 각기 그 먹이를 취하는 자신의 행동반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로나 임도를 내면서 산줄기가 동강이 나고, 절개지가 생기면서 자신들의 행동반경이 줄어들고 먹이사슬과 개체수가 줄어들어 서서히 멸종이 된다고 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육교를 만들어 끊어진 산줄기를 이어주는 방법으로, 우리의 자연을 지키려는 노력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중화지구대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큰 기복이 없는 개활지대로 광활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리기다소나무가 무성한 숲속에는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오고, 463봉을 지나며 남쪽으로 대간길이 구부러진다. 지루하리만치 평탄한 길을 따라 505봉에서 서쪽으로 진행을 하면 개터재(350m)에 이른다.
개터재는 효곡리 사람들이 인근의 개터골에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공성면 효곡리와 봉산리를 이어주는 개터재 밑으로는 상판저수지 물을 상주 삼남(청리, 공성, 외남)평야의 농업용수로 돌리기 위해 뚫은 지하수로가 지나고 있다. 개터재에서 마루금은 서남쪽으로 이어지고, 460봉 오름길에서 왼쪽으로 우회로를 따라 산허리를 감아 돌아 남쪽으로 30여 분간 진행하면, 공성면 봉산2리 회룡 마을에서 봉산1리 골가실을 넘나드는 회룡재(340m)에 도착한다.
개터재 1.7km 큰재 3.9km의 이정표가 반겨주는 쉼터는 대간 길에 지친 몸을 쉬어가기에 좋은 곳이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30여분을 진행화면 목장지대가 나타난다. 회룡 목장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이어지는 대간 길을 따라 한 동안 진행하다 숲을 빠져나오면 회룡 목장의 이정표가 자리 잡고 있다. 30여 분후에는 우하재로 불리는 큰재(320m)에 도착하며 또 한 구간을 마감한다.
21.큰재( 320m) - 추풍령(221m ) / 17.7km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평한 곳이 공성면 옥산리와 모동면을 오가는 68번 국도와 920번 지방도를 겸하고 있는 표고 320m의 고개 마루다. 하지만 상주 읍내에서 바라보면 제법 높아 보이는 고개라 하여 큰 재로 부른다고 한다.
정상에는 폐교된 인성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인성초등학교는 백두대간 선상에 있는 유일한 학교로 1947. 7. 1 설립 되었으나, 최근 도시화와 산업화에 밀려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노인들만 고향을 지키다보니,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어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나마도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어 5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7년3월1일 폐교가 되어 지금은 부산녹색환경연합에서 임대하여 생태학교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변화무쌍한 세월 따라 격세지감을 느끼며, 언젠가는 학생들이 다시 돌아올 날을 기대하면서 쓸쓸히 대간을 지키고 있다.
국수봉 3km, 회룡재 3.9km, 공성면 5.3km, 모동면 12.5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대간 길은 박례분 할머니의 집 뒤로 이어진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가면 이곳의 지대가 상당히 높은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오른쪽으로 남실마을과 중남마을의 전답이 펼쳐지고 왼쪽으로 능선과 골짜기가 길게 뻗어 내린 경치를 감상하면서 475봉을 지나 완만한 분지에 도착하면 자작나무 군락지가 펼쳐지고, 잠시 후 전망바위에 오른다.
가파른 경사면을 20여 분간 치고 오르면 국수봉(790m) 정상이다.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615m). 서산(509m). 기양산(469m). 갑장산(806m). 묘함산(733m). 황악산(1.111m).민주지산(1.241m)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백두대간 줄기인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이 된다고 한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정상은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어 국수(菊水)라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정상을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충북 영동군 웅북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청화산에서부터 손잡고 달려온 상주시와도 아쉬운 작별을 한다. 김천시와 접경을 이루는 전위 봉에 오르면 남쪽의 발치 아래로 그 유명한 용문산 기도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1950년 나운몽 목사가 건립한 한국 최초의 기도원으로 50여 만 평의 너른 분지 안에는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실버타운을 조성하고 있다고 하니, 몸과 마음이 병든 환자들의 안식처라고 할 수 있겠다.
용문산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암릉 구간이 앞길을 가로막고 가파른 경사면을 치고 오르면 앙증맞은 정상석이 반겨준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은 오늘의 구간 중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정상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완만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687봉에 이르면, 특징 없는 정수리에 잡목만이 무성하다. 왼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분지에는 면소재지보다도 화려한 도시가 형성되어 있으니 용문산 기도원이다.
남쪽으로 구부러진 대간 길은 경사심한 비알 길로 이어지고 바람결에 휘날리는 억새의 춤사위를 뒤로하고 전망 좋은 헬기장에 오른다. 이름 모를 도사의 기도처인 움막을 지나 갈현고개(360m)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무좌골산이 높아 보이지만 큰 어려움 없이 정수리에 올라선다. 이곳의 전망 또한 일품으로 정면으로 묘함산과 오른쪽으로 눌의산이 아스라이 바라보이고, 이어지는 대간 길이 추풍령 저수지를 품에 안고 돌아간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걸리적거릴 것이 없고 2차선으로 포장된 작점고개(350m)에 도착하면 아담한 정자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영동의 추풍령면에서 김천시의 어모면으로 넘나드는 이 고개는 충청도 사람들이 고개 너머 경상도 땅에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기에 여덟 마지기 고개로 부르다가 백두대간 종주 팀들에 의해 작점고개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남쪽의 절 개지를 치고 오르면 가족묘지가 나타나고, 10여분 후에는 묘함산 중계소를 오르는 비상도로(콘크리트 포장)를 따른다. 왼쪽으로 신애원 농장과 김천노인 병원을 바라보며 숲속으로 들어선다. 묘함산으로 이어지는 정상은 대간 길에서 빗겨 나있고 오른쪽으로 비알 길을 내려서면 조금 전의 비상도로와 만난다. 10여 분간 비상도로(500m)를 따라 오르면 군부대와 송신소가 있는 정상이다. 김천시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1급의 조망 터가 전개된다.
대간 길은 비상도로에서 서쪽의 숲속으로 진입하여 사기점고개(390m)로 내려선다. 왼쪽의 너른 분지에는 상금농장이 자리를 잡고, 농장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분뇨냄새는 고향의 향수를 일깨운다. 무명봉에서 서북쪽으로 선회하여 435봉을 지나 502봉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지나온 백두대간(작점고개)이 손금 들여다보듯이 선명하게 보인다.
백두대간을 찾아가는 건각 중에 홀대모의 어느 산객이 지리산의 천왕봉에서 199.79km 되는 지점에 세운200km 표지 목을 만난다. 대간 길을 열어가는 산 꾼들의 지친 몸에 용기를 불어넣고, 종주의 꿈을 실현하는 자신의 의지를 담은 부적이 아닌가 싶다. 무성한 숲속을 달려가는 산객들의 행보가 빨라지고 가파른 비알 길을 치고 오르면 수 십 길 단애를 이룬 금산(384m)의 정상에 올라선다.
마루금의 반쪽을 칼로 도려낸 듯 무참하게 파헤친 모습이 볼 성 사납다. 살점 뜯긴 자병산이 무색하게 통째로 사라질 판국이다. 고속철도 공사구간에 필요한 골재를 채취하는 현장이다. 비운을 맞고 있는 금산은 정상까지 100여m가 넘는 수직벼랑으로 절개되어 가슴이 서늘하고, 아슬아슬하게 마루 금을 따라 철조망을 내려서면 포도밭의 둔덕이 나온다.
오순도순 살아가는 시골마을이 둘로 갈리어 경상도의 김천시와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뉘고, 고개 마루 작은 배나무 밭이 끝나는 자리에 청풍명월의 표지석이 우리를 반긴다. 구름도 쉬어 넘는 추풍령고개는 묘함산(卯含山:733m), 눌의산(訥誼山:743m), 학무산(鶴舞山:678m)의 높은 산에 둘러싸인 221m의 낮은 언덕에 불과한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괴산군의 조령, 영동군의 추풍령, 단양군의 죽령 등을 통하여 소백산맥을 넘었고, 이 가운데 대표적 관문이 조령이었다. 그러나 1905년 추풍령에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한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이 일대는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이 조령까지는 높고 험한 장년기 산맥으로 이어지고, 조령에서 추풍령까지는 낮고 평탄해지다가 다시 높아지는 지형적 특색 때문에 교통의 요지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정기룡장군이 용맹을 떨치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금강의 지류인 추풍령천이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황간면으로 이어지고,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이 남쪽 사면에서 발원한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대전-김천을 잇는 국도가 이 계곡을 통과하며, 남쪽에는 추풍령역과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이 휴게소에는 식당을 비롯한 각종 부대시설이 있으며, 이곳에서 서울 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서울-부산 간의 절반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