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 산행기
칠갑산(七甲山-561m)
일 시: 2009년 11월 19일
장 소: 충남 청양군: 정산면, 장평면, 대치면
입동을 지나며 수은주도 영하로 내려가고 동장군이 기세를 떨치는 이른 새벽.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운 것은, 지난 7월 부상당한 이후로 4개월 만에 장거리 산행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청양의 칠갑산은 아주 편안하게 등산을 할 수 있는 부드러운 산세가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키지만, 큰 사고의 후유증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기에 아기 걸음마와 같이 두려움이 앞선다.
경기 칠장산(492m)에서 시작하는 금북정맥이 서산의 안흥진까지 이어가던 중, 국사봉(488m)과 금자봉(324m)사이의 410봉에서 분기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산줄기가 한치 재를 넘어서면서 우뚝 솟아오른 산이 칠갑산(561m)이다. 칠갑산은 “충남의 알프스”라 불릴 정도로 높이에 비해 산세가 수려하고, 천년고찰 장곡사(長谷寺)가 자리 잡고 있어 1973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대중가요‘칠갑산’으로 일반인에게 더욱 잘 알려진 산이다.
평일임에도 자연경관을 찾아드는 인파로 주차장이 떠들썩하고 서둘러 산행 길로 들어선다. 가지런히 정비된 계단길이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가슴깊이 간직하며 처음부터 고된 신고식으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지금이야 450여 m의 터널이 관통하고 있어 고개 정상에는 한가롭기 그지없지만, 청양과 공주를 왕래하자면 한치 재를 넘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기에 고개마루에는 사시사철 인파로 성시를 이루고, 이 고장의 상징물인 조형물을 한데 모아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하고 있다.
칠갑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북쪽의 山 斜面에 자리 잡은 면암 최익현의 동상이다.
근세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면암선생님의 고귀한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일행들의 뒤를 따른다. 한치 고개의 고도가 해발 310m. 정상이 560m로 3km 거리에 표고차가 고작 250m에 불과하고,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널찍한 임도는 평지수준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조금은 실망감이 앞선다.
길옆에 있는 칠갑산의 유래비를 살펴보면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地,水,火,風,空,見,識) 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七甲山이라 경칭하여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충청남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이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이다.
무성한 송림사이로 임도를 따라가면, 정면으로 하얀 탑이 나타난다. 이 고장 출신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을 후손들에게 기리는 취지로 세운 충혼탑이다. 주차장 입구에 있는 월남참전 기념탑과 함께, 충효의 고장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상징이다. 잠시 후, 왼쪽으로 칠갑산 천문대가모습을 드러낸다. 오염이 심한 도신에선 밤하늘의 별이 실종 된지 오래지만, 시선한 공기가 흐르는 산정에서 바라보는 별자리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화속의 요정이 아닌가?
산이 수려하다는 것은 능선과 계곡, 기암과 수림이 자연적으로 조화롭게 형성된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칠갑산은 커다란 바위하나 없는 전형적인 육산으로, 부드러운 능선과 포근하게 안기는 행복감에 심신을 단련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 충족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100대 명산으로 손색이 없다. 지금이야 모든 잎 새를 떨 군 앙상한 나무들이지만, 봄이면 대치터널 위의 옛 도로변을 따라 70 - 80년생의 벚나무가 벚꽃 터널을 이루고, 정상에 이르는 임도 변을 따라 화사한 벚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한다.
산 사면을 따라 이어지는 임도는 주위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고, 2층 정자가 있는 자비정에 올라서면 조망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자비정을 지나며 아름드리 소나무와 굴참나무가 공존하는 숲길이 펼쳐진다. 전위 봉 몇 개를 넘고서야 정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곧 바로 정상진입이 시작된다. 없어도 될 로프를 따라가면 수백 계단이 하늘 끝까지 이어진다. 어느 곳이고 정상은 녹녹하게 볼일이 아니다. 다리가 뻣뻣하게 계단을 오르는 동안 심하게 토해내는 숨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칠갑산 정상. 56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서해안의 지형이 낮은 평야지대라. 주위에 대덕봉(472m), 명덕봉(320m), 정혜산(355m)을 압도하는 전망대로 손색이 없어 칠갑산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 있다. 널찍한 정수리에는 대형헬기장을 중심으로 7척 장신의 표지석과 삼각점, 산불감시초소와 통신철탑이 있고 휴식공간에는 벤치들이 마련돼 있다.
사방팔방 막힘이 없는 정수리에서 바라보는 산세는 불가사리 형상으로, 5가닥의 산줄기가 방사선을 이루고 있다. 한치재에서 올라오는 산장로와 구름다리가 있는 천장로, 백운골에서 올라오는 도림로, 삼형제봉으로 내려서는 장곡로, 장곡사로 내려서는 사찰로가 균형을 이루어 동남쪽의 잉화달천(仍火達川), 동북쪽의 잉화천(仍火川), 서남쪽의 장곡천(長谷川)과 지천천(之川川), 서북쪽의 대치천(大峙川) 등의 물줄기가 금강으로 유입된다.
북쪽으로 대덕봉(472m)과 마루금에는 금북정맥의 국사봉(488m)이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 동쪽으로 계룡산의 연봉들이 아스라이 하늘금을 이루는 가운데, 남쪽으로 정해산(355m), 망월산(355m), 축융봉(455m), 감봉산(465m)으로 돌아 서해안의 진산인 성주산(680m), 문봉산(600m), 성대산(624m), 오서산(790m)으로 충남의 알프스라는 명성에 걸맞게 겹겹이 포개진 산자락을 타고 계곡이 흐르고, 청정옥수의 맑은 물이 금강으로 모여든다.
한겨울임에도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칠갑산은 거대한 수림이 장관을 이룬다. 삼형제봉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내려선 안부에서 서쪽의 사찰 로를 따른다.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송림이 하늘을 뒤덮고, 경사진 비알에는 나무 등걸이 들어나 걸음걸음마다 신경이 많이 쓰인다. 키 큰 소나무 아래로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이른 봄이면 화사한 꽃망울을 터트리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황홀해진다. 경치가 수려한 장곡천 골짜기의 절벽 위에는 청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장곡사가 자리 잡고 있다.
장곡사는 돌탑하나 없는 절이지만 2개의 대웅전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이다. 보물 제162호인 상대웅전과 보물 제181호로 지정된 하대웅전이다. 신라 문성왕 12년(850년) 보조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장곡사는 공주의 마곡사와 예산의 안곡사(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와 함께 충남의 삼곡사(三谷寺)라고 한다. 일주문을 내려서면 칠갑산이 자랑하는 장승공원이 펼쳐진다.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은 콩밭 매는 아낙네의 황금동상이다. 콧날이 오뚝한 촌부의 미모가 너무 뛰어난 것도 흠이 아닐 런지 ㅎㅎㅎ.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신장이 10m요, 무게가 14톤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최대의 장승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고, 오방장승과 변강쇠의 남성 심볼이 하늘을 향해 용솟음치는 모습은 수 백 개의 장승중에 으뜸이라. 국태민안과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장승을 모시는 인근마을의 풍습을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의 산행이 6km의 짧은 거리에 유순한 길이지만, 무사히 완주를 하고 보니 여름 내내 부상의 고통 속에서 다시는 산을 찾지 못할까봐 노심초사를 했지만, 터널을 빠져나온 해방감으로 마음이 홀가분하다. 강경의 젓갈시장까지 순례하며 새로운 삶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