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 4 부: 지리산 자락. 1
제 4부 지리산 자락으로
27. 중재(640m) - 여원재(477m) /34km
남쪽으로 월경산(990m) 오름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비알 길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오는 산 사태지역의 벼랑을 올라서면 월경산(988m) 분기점에 이른다. 장거리 대간 길에서 시간을 벌기위해 그대로 지나치려는 눈치들이지만, 마루 금에서 벗어난 월경산을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 좌측으로 수북이 쌓인 낙엽위로 남아있는 잔설을 헤치며 올라선 월경산 정상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이 찬바람만 옷깃을 파고든다.
오늘의 구간에서 가장 높은 월경산(988m).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어렵게 올라온 보람이 있지만, 산 이름이 여인들의 달거리와 인연이 있어서인지 부정을 탄다는 두려움 때문에 찾는 이도 별로 없이 홀대를 받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장안산과 백운산, 봉화산을 두루 살펴보고 갈림길로 내려와 20여분의 시간을 보충하기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잠시 후 육중한 철조망(특수작물 재배단지)을 따라 된 비알을 내려서면 광대치에 이른다.
억새가 무성한 광대치는 대간 꾼들의 리본이 홍수를 이루고, 왼쪽으로 대상동 마을의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비포장도로가 터널공사 중인 광대치 밑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쇠 음달 북사면을 치고 오르는 무명봉은 유리알처럼 빙판을 이루고, 나무 등걸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일단 정수리에 올라서면 고진감래라는 말이 실감나게 전망 또한 시원하다.
앙증맞은 암릉을 넘나들며 40여 분간 주능선을 따르면 944봉에 이르고,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무명봉 정상에는 명당자리 찾아 모신 무덤이 후손들의 보살핌 속에 긴긴 세월 복록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세월 따라 명당자리도 변하고 말았으니, 지금은 자가용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로 옆이 명당자리라고 말하지 않던가?
이제 봉화산(919m)도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서고, 내친김에 870봉에 오르면 그동안 정들었던 경상남도와 작별을 하고 남원시 아영면으로 들어선다. 억새가 천국을 이루는 산등성이. 수백만평의 분지에 자생하고 있는 억새밭은 시원하게 펼쳐지는 조망이 일품이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억새의 춤사위가 시작되면, 우리네 고단한 인생살이도 잠시 접어두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날개를 편다. 드넓은 광야의 억새밭에 조림이 한창이라, 머지않아 울창한 수림 속에 시원한 조망도 사라지고 답답한 산길이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앞선다.
『덩치 큰 정 상석에 919m』 그 뒷면에는 한반도의 지도와 백두대간이 등줄기를 따라 백두산까지 뻗어있다. 우리의 힘찬 기상과 불굴의 정신으로 백두의 천지까지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련만 언제나 그날이 오려는지? 남쪽으로 웅장한 지리의 영봉들과 북으로 백운산과 장안산을 넘어 덕유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봉화산의 명당자리. 남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한양으로 전달하는 봉화 터가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1km지점에 있다고 한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 키를 넘는 폭설 속에서도 자연에 순응하며 용케 살아남은 억새밭의 대평원과 철쭉동산. 영남 알프스와 강원도 민둥산의 억새와 견줄만한 장관이 아닌가? 남진하는 대간길이야 금상첨화의 비단길이지만 북진하는 이들이 겪는 고초는 굳센 의지가 없으면 넘기 어려운 난관이다. 고도가 높아지며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들이 펼쳐지지만, 옷깃을 파고드는 추위 속에서도 땀을 흠뻑 흘린 뒤에야 정수리에 올라설 수가 있다.
꼬부랑 재에서 치재까지는 봉화산이 자랑하는 철쭉단지가 수백만평의 분지위에 펼쳐진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이기고 신록의 계절 5월이 오면, 봉화산 자락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상춘객을 불러 모은다. 바래봉의 철쭉제와 함께 절정을 이룰 꽃망울이 입춘추위 속에서도 탱탱하게 여물고 치재의 움푹 패 인 네거리 갈림길은 철쭉나무로 터널을 이루고 있다. 좌측의 치재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고개 아래까지 연결되고 우측으로 펼쳐지는 목장과 건너편의 산마루에 하얀 색 돔의 천문대가 동화의 나라에온 듯 신비감을 안겨준다.
바람도 잔잔한 고개 마루에는 철쭉나무와 산딸기, 산초나무가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다소 가파른 비알 길을 뛰어넘어 울창한 소나무숲속을 빠져 나오면 흥부마을이 있는 아영면 성리와 번암면 노단리를 넘나드는 2차선 포장도로인 복성이재(550m)에 도착한다. 춘보의 설화로 유명한 흥부마을을 답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 사연이나 들어보자.
남원시 아영면 성리마을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다. 설화와 지명을 근거로,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로 밝혀졌다. 흥부가와 춘보 설화는 가난 끝에 부자가 된 인생역정, 선덕의 베품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유사하다. 실제로 성리마을에는 박춘보(朴春甫)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고 매년 정 월 보름에 망제 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 망제를 지내오고 있다. 성리에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어 흥미롭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 모퉁이, 흰 묵배미 등의 지명은 고전에도 등장했던 지명이다. 지금은 길 양쪽으로 감자농사가 한창인 '허기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라고 전해진다.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으로, 흥부는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준 발복 집터이다. 이곳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짓재 고개 마루에 높다랗게 자리를 잡고 마을의 산자락과 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금모퉁이는 사금꾼들이 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흥부가 이곳에서 금을 주워 부자가 된 것이 아닌 가 추측된다.
한편, 흰죽배미란 장소는 흥부가 부농이 된 후 은인들에게 보답으로 주었다는 논으로 전해진다. 흥부아내가 이웃들이 흰죽을 먹고 살아나서 흰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디막거리는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건넜다는 개울로 추정된다. 형제간의 우애, 부(富)와 빈(貧), 성공한 이후에도 어려웠을 시절 함께 했던 이웃을 잊지 않은 겸손과 나눔의 정신을 되돌아 봄 직하다. - 남원시청 문화관광과 제공 -
사치재 7.2km 중치 12.1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남진하는 대간 길은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601봉에 올라 소나무의 향기 속에 재성암 갈림길을 지나 야막 성터에 이른다. 돌로 쌓은 이 산성은 아영고원 줄기에 자리한 산봉우리를 에워싼 것으로 둘레가 633m가량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격렬한 영토쟁탈전이 벌어진 곳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이라고 불렀다. 산성은 세월의 무상함속에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고, 정성들여 쌓은 돌탑들이 백두대간의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넘게 해달라는 소박한 꿈으로 승화되고 있다.
철쭉나무가 앙살 맞게 곁가지로 훌쳐대는 비알 길 을 올라선 정수리는 고진감래도 무색하게, 통안재까지 15km 종주 길에서 가장 높은 칠백 팔십 일봉이지만 이름 없는 무명봉 이다. 힘들여 올라온 정수리에 표지석은 고사하고 삼각점하나 없으니, 무수하게 달려있는 표지기로 위로삼아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물 한 모금을 마신다.
촛대바위처럼 잘생긴 바위를 지나 헬기장에 도착하면 왼쪽으로 빗겨있는 시리봉(776m)이 손짓을 한다. 모두들 그냥 지나치는데 나 홀로 다녀오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미련을 버리고 일행들을 따르기에 여념이 없다. 이제 이곳부터는 가파른 벼랑이지만 수월하게 내려설 수가 있고, 새맥이재를 지나 소나무 사이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철쭉나무 숲을 헤치며 637봉에 올라선다.
무성한 억새들의 꽃바람 속에 벼랑길을 내려설 때, 억센 싸리나무가 종아리를 후려치고 앙살 맞은 가시덤불이 사정없이 할퀴어댄다. 억새의 비수로 살점을 그어대는 고행의 대간 길. 심술 굳은 꽃비까지 가세를 하지만 질주하는 88고속도로의 차량들이 영호남의 갈등을 씻어주는 가교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볍다. 지난겨울 산불이 났는지, 수 십 년 된 나무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으니, 가슴 아픈 현실을 바라보며 산을 찾는 우리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통감한다.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압권이다. 발치로 88고속도로가 질주하고 지리산 휴게소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꿈에 그리던 지리산의 천왕봉과 반야봉이 가슴속으로 다가오고 절 개지와 같이 경사가 급한 벼랑길을 내려서면 88고속도로가 지나는 사치재로 내려선다. 우리국토가 바둑판처럼, 거미줄처럼 건설되는 고속도로 덕분에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우리의 풍요로운 내일을 기약하고 있다. 하지만 정다운 이웃들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단절되는 아픔을 생각이나 해봤나.
종주하는 우리들도 고속도로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간의 힘찬 맥박이 도로건설로 단절되어 뛰어 넘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다행이 좌측으로 50여 m 떨어진 굴다리(일명 토끼굴)를 이용하여 안전하게 통과를 한다. 사치재를 건너며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선다. 유치 삼거리 2.5km 복성이재 7.2km의 이정표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향로봉에서 시작하여 600 여km를 밟아온 보람으로 지리산의 품에 안겼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苦盡甘來의 의미를 되새기며 20여 분간 소나무 숲속을 진행하면 돌탑이 반겨주고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618봉에 오른다.
포근한 비단길위로 열려있는 이 길은 백두대간 중에서도 가장 편안하고 수월한 구간이다. 다리에 힘이 오를만하면 평지가 나온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거니는 삼림욕장에 들어선 듯, 피톤치드의 짙은 향기가 온몸으로 쏟아진다. 지리산의 험준한 고산준령을 넘어야 할 건각들에게 체력을 보충하라는 배려가 아닌가? 금상첨화로 산행하기에 좋은 가을이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시속 4km가 넘는 속도로 마루 금을 넘어가게 된다.
울창한 솔밭을 벗어나 제재소 뒤편으로 돌아서면 유치 삼거리다. 유치 삼거리는 남원시 운봉읍과 장수군 번암면을 왕래하는 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 지른다. 이곳에서 2km 거리에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판소리 동편재의 본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시조인 송흥록 선생의 생가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선생의 생가가 있어 예향의 도시 남원의 뿌리가 이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번지에는 황산 대첩비가 있으니 1,380년 이성계(李成桂), 이두란(李豆蘭) 장군이 황산(697m)에서 왜적 아지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이다. 1577년에 구상수립 식으로 건립했으며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해발 460m인 유치 삼거리에는 고남산 4.8km 사치재 2.8km의 이정표가 있다. 매요마을로 넘어가는 농로주변으로는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 김장용 무가 출하를 위해 산적되어 목가적인 풍경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처럼 포근하게 안겨온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지만 운성초등학교 뒷담을 빠져나오면 매요 교회를 만나게 되고, 돌담길 사이로 매요마을에 도착한다. 백두대간 마루 금에서 유일하게 만나는 마을에는 대간꾼들이 즐겨 찾는 매요 휴게소의 할머니가 건네주는 막걸리 또한 잊지 못할 명물이다.
마을을 벗어나 완만한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유치재를 만난다. 수월하게 올라선 무명 봉에는 98년에 개설된 운봉 403번의 삼각점이 있지만, 더 높은 703봉의 정수리가 기다리고 있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송림 속에서 피톤치드의 싱그러움 속에 경쾌한 발걸음을 재촉하면 매요마을을 떠난 지 1시간 만에 통안재에 도착한다. 통안재는 권포리에서 올라오는 길목으로 당일 종주 팀들이 구간을 이어주는 들머리로, 고남산(846m)을 오르는 쉼터로 활용을 하고 있다.
백두대간에 미처 한창 돌아 갈 때 미투리 산악회의 최 효범 대장이 하는 말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일인데, 무모한 도전으로 몸이라도 상하면 평생후회를 하게 되니 이쯤에서 접어두라는 간절한 호소에 중단을 하고 말았다. 그 후 한북정맥과 한강기맥을 종주하며 아직까지 체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자신감에 백두대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삼년 만에 밟아보는 마루금은 고향을 찾아가는 철새들처럼 감회가 새롭다. 새로운 도전 앞에 의지를 불태우며 회갑을 넘은 나이지만 신발 끈을 졸라맨다.(권포리에서 복성이재까지 종주하며)
통안재에서 올려다보는 고남산은 철옹성과도 같이 험준한 암봉 이다. 잡목을 헤치며 숲길을 오르면 정상으로 향하는 군 비상도로를 만난다. 비상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중계 탑이 있는 철조망을 따라 올라서면 산불감시 초소가 있는 정상이다. 스텐 기둥으로 만든 정상 표지 석 옆으로 삼각점도 있고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너무 좋아 운봉의 너른 들녁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북쪽으로 광주와 대구를 이어주는88고속도로가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고 지나온 봉화산이 선명하다. 동쪽의 너른 들녘을 배경으로 만복대에서 바래봉까지 줄기차게 뻗어 내린 태극능선의 끝자락에 조용히 졸고 있는 황산이 정겹기만 하다.
황산대첩이라면 우리는 먼저 백제의 계백장군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곳과는 전혀 다른 전투가 있었다. 일본(왜구)은 삼국시대 이후로 우리나라의 남쪽으로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는데, 이곳 바래봉 기슭의 인월리와 인풍리를 점령한 아지발도를 상대로 고려의 토벌대장 이성계 장군이 격전을 벌이게 된다. 꿈속에 나타난 여원재 주모의 가르침에 따라 고남산에 올라 적의 동태를 살피며 작전을 구상 한 뒤 소년장수 아지발도를 사살하므로 왜구의 난을 평정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를 기반으로 조정에서 신망을 얻어 조선을 건국하고 다시 찾아와 고남산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이곳에는 이성계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바래봉의 북서쪽 기슭에는 광활한 분지에 조성된 푸른 초원위로 수 백 마리의 소와 면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국립종축장이 있다. 오뉴월이면 붉게 타오르는 철쭉과 어우러진 그림 같은 정경이 일대 장관을 이루는데, 우리나라 낙농산업의 효시를 이루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운봉목장이 아닌가? 사방을 둘러봐도 막힘없이 터지는 조망으로 고산준령의 지리영봉들과 지나온 대간의 줄기들이 힘차게 맥을 이어간다.
정수리에 세워진 통신 안테나. 높은 철탑에서 발신되는 핸드폰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가야산의 계곡에서 무등산의 골짜기 까지 지구촌 곳곳으로 울려 퍼지고, 남극에서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안방으로 전달되는 한시라도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 옛날 봉화를 올리던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다.
내려서는 암릉 에는 로프도 걸려있고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오랜만에 억새의 춤사위에 신바람이 난다. 권포리와 장교리의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철쭉의 무리를 지나면 이곳 또한 산불로 수십 년 된 소나무들이 수난을 당하고 수 만평의 산림이 황폐화 된 현장을 지난다. 불에 탄 나무 자르는 굉음소리가 우리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온다. 장동마을을 좌측으로 안고 방풍림 비슷한 야산을 휘돌아 오르면 묘지가 있는 561봉(장봉)에 오른다. 여원재에서 올라올 경우 알바하기 쉬운 곳으로 주위가 필요하다. 가선대부 김해김씨, 정부인 경주김씨의 묘 잔등에서 좌측으로 90도를 꺾어서 내려서는 길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대간 길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물을 건너지 말라는 교과서를 그대로 답습하듯,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마루 금을 이어갈 때, 마려운 소피줄기가 왼쪽은 낙동강으로 오른쪽은 섬진강으로 갈라지는 분수령을 이룬다. 장동마을을 안고 돌며 완만한 솔밭 길을 한없이 지나면 노치샘 6.7km 유치 삼거리 10.5km의 이정표가 반겨주는 여원재(477m)에 도착한다.
남원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운봉으로 가다보면 해발 477m의 여원재에 이른다. 눈이 부리부리한 운성대장군이 길목을 지키고 현대화의 바람을 타고 들어선 장동마을의 봉송 황토마을 입간판이 있는 고개의 사연을 알고나 있는지? 이곳은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2차선의 도로가 시원하게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남원과 운봉, 함양을 오가는 길목인 이곳에는 장거리 여행길에 지친 길손들의 여독을 풀어주는 주점들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물자가 부족한 왜구들이 남해안을 수시로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중, 고려 우왕 6년에는 부산에 상륙한 왜구들이 진주, 함양을 거쳐 남원군 인월면 일대를 점령하고 살인, 방화, 약탈 등 갖은 만행을 저지른다. 한양을 향해 북상을 하던 중 이곳에 도착한 선봉대장 아지발도(당시 15세)가 미모와 자색을 겸비한 주모를 희롱하게 되는데, 왜구의 손이 닿았던 왼쪽 젖가슴을 예리한 비수로 도려내고 자결을 하고 만다. 그 고귀한 정조를 기려 비석을 세우고, 사당도 짓고, 고개 이름을 여원재라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한다.
또한 이곳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삼한시대 이래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맞대고 수많은 전투를 벌인 곳이다. 근세에는 동학군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진격을 하기에 이르자 박봉양이 운봉의 만보군과 함양등지에서 보내온 지원군과 합세하여 방아치, 관음치 전투에서 승리하므로 운봉을 지키게 되고 동학군이 처음으로 참패를 당하며 영남으로 진출하는데 실패를 한 현장이기도하다.
28. 여원재(477m) - 성삼재(1,000m) / 20km
여원재에서 숨 한번 들이쉬고 달려가는 대간 길은 숲속으로 들어서지만 곧이어 마을의 뒤쪽으로 날 등을 타고 임도에 도착한다. 우측으로 능선의 끝자락에 우뚝 솟은 암봉 하나, 전망대바위에 홀려 열심히 달려가지만 무심한 대간 길은 좌측의 사면 길을 가로 질러 전망대 바위와 점점거리가 멀어진다.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보는 남원분지의 너른 들판과 지리산의 장쾌한 산맥을 두루 조망하는 여원 낙조는 운봉팔경의 으뜸이라고 하는데
제1경 : 할미재의 아침 햇살 제2경 : 팔양치의 저녁 놀 제3경 : 황산의 밝은 달
제4경 : 베틀위의 맑은 바람 제5경 : 봉화산의 풀 피리소리 제6경 : 개논들의 농부가
제7경 : 방장산의 돌아가는 구름 제8경 : 덕두봉의 저녁놀
헬기장을 지나 무명 봉을 간단히 넘어서서 완만한 능선을 20여 분간 진행하다 가파른 오름길에서 진땀을 흘리며 올라선 곳이 입망봉(705m)정상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조망을 기대할 수 없는 대신, 펑퍼짐한 정수리에는 피로에 지친 대간꾼들의 휴식처로 안성맞춤이다. 일명 갓 바래재라 부르는 입망치로 내려서는 비알 길은 급경사를 이룬다. 운봉읍과 이백면을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운치 좋은 소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어 쉬어가기 알맞은 곳이다.
수정봉 오름길은 헬기장을 지나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다. 아득히 올려다 보이는 정수리는 지리산으로 가는 전주곡으로 소나무 향기에 취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수정봉(804m)정상에만 오르면 멋진 조망으로 남원시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일 것으로 상상을 했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포로가 되고 만다. 우측의 남원 쪽으로는 천야만야한 벼랑이 수직단애를 이루고 있는 반면, 고기리에서 바라보는 수정봉은 800m 가 넘는 고봉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펑퍼짐한 야산으로 보인다. 이것은 운봉과 주천읍 일대가 해발 500m가 넘는 고원지대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오는 착각으로 덕치 샘이 해발 550m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소나무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주능선을 이어가는 마루금 뿐이다. 빼 꼼이 터진 오솔길을 따라 시원한 그늘 속으로 진행하면 잠시 후 급경사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친다. 좌측으로 급선회하여 내려서면 노치마을이 내려다보이고, 5그루의 노송이 있는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다.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비는 제단이 있어 백두대간에 오르는 산 꾼들도 제단에 머리를 조아리며 무사 산행을 기원한다. 당산나무를 뒤로하고 마을로 내려서면 노치 샘이 있다. 샘 옆에는 여원재 6.7km, 정령치 6.0km의 이정표가 반겨주고 백두대간을 소개하는 표지 석과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노치마을의 유래가 돌비석에 새겨져있다.
주천읍 덕치리 노치마을: 조선조 초에 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형성되었다는 이 마을은 해발 550m의 고랭지로 마을 앞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에 억새가 많아 갈재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노치라 부르며, 한국 전쟁 때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마을이 완전히 불에 타는 불운 속에 마을의 동쪽은 운봉읍에, 서쪽은 주천읍에 속하는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마을의 뒷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성한 노치 산성이 있어,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 아영면 아막산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고 한다.
마을 앞의 삼거리 길에 나서면 동쪽으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고 있는 형상의 바래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70년대 초 바래봉(1,185m) 일대에는 호주에서 들여온 면양을 방목했는데, 식성이 좋은 양들이 능선의 나무와 풀을 모두 먹으면서도 유독 독이 있는 철쭉만 남겨 놓았다고 한다. 이런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수백만평의 구릉지에 남아있는 철쭉이 동산을 이루어, 매년 오뉴월이 되면 화려하게 피어나는 철쭉을 찾아 상춘객들이 모여들고, 전국 제일의 철쭉 군락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가재마을에서 고기리까지 1.5km 구간은 운봉읍에서 주촌 읍을 오가는 60번 지방도로를 따르게 된다. 지리산의 험준한 산행을 앞두고 워밍업을 하라는 신의 계시에 따라 모처럼 고향을 찾아온 듯 담소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고기리의 당산나무에는 대간꾼들의 의지가 담겨있는 표지기 들이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있다. 남원과 정령치(1,172m)를 넘어가는 삼거리에서 출발한 대간 길은 좌측으로 목장의 철조망을 끼고 노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완만한 오솔길에 들어선다. 솔 갈비로 포근하게 단장을 한 비단 길이 반겨주는 주천리 1.5km의 이정표를 지나며 코가 땅에 닿도록 가파른 비알 길에서 고된 신고식을 치른다.
지리산이 나를 부른다. 고단한 육신에 채찍질을 하는 것은, 피할 수없는 목표가 있고 사명감을 완수할 수 있기에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발산을 하며 천신만고 끝에 큰 고리봉(1,304m)의 정상에 올라선다. 모두가 발아래 조아리듯, 사방으로 터지는 조망으로 막막하던 가슴이 툭 터진다. 북녘으로 세걸산(1,207m), 부운치, 팔랑치(1,005m)로 이어지는 태극능선의 끝자락에 우뚝 솟은 바래봉(1,165m)이 손짓을 하고 남쪽으로 달려가는 대간 길은 정령치(1,172m)와 만복대(1,433m), 노고단(1,507m)과 반야봉(1,732m)이 그동안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위로 하려는 듯 가슴을 활짝 열고 달려온다.
정령치(1,172m)로 내려서는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환상적이다. 푸른 숲 사이로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오르는 차량들. 부지런한 개미들의 행진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이고, 만복대의 줄기 따라 수 십 만평의 평원위에 물결치는 억새들의 춤사위로 짓눌렸던 가슴이 활짝 열린다. 가파른 내리막길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패여 나가는 토사의 유실을 막기 위해 나무계단을 설치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전에 입산신고를 받아 적정인원만을 통과하는 방법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남원시에서 주천 읍을 거쳐 성삼재로 이어지는 730번 지방도로가 관통하는 정령치(1,172m)에 도착한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의하면 기원전 84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다는 전설과, 신라 때 화랑들이 무술을 연마했다는 유래가 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시원하게 뚫린 도로에 교통량도 많은 번화한 곳이지만 2-3십년 전만해도 첩첩산중으로 심원마을의 주민들이 남원 장을 다녀오려면 얼마나 고생들을 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자연의 품으로 들어서면 오기와 욕심도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속에 온갖 시름을 잊게 되니, 순진무구한 어린이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림 같은 정령치를 뒤로하고 만복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죽장망혜 단표자로 천리강산을 들어서는 여유로운 발걸음에, 김삿갓을 떠 올리며 詩心이 피어오르고 주절대는 재담 속에 詩香이 묻어난다.
산불감시 초소가 있는 무명봉에 올라서면 좌측으로 심메마니 능선위로 반야봉(1,732m)이 우뚝 솟아 첨봉을 이루고 노고단으로 종석대로 서부능선 줄기 따라 하늘 금을 이룬다. 정상을 300여m 남겨두고 우측으로 갈라지는 능선이 다름재와 숙성치를 지나 견두산(774m), 천마산(656m), 깃대봉(691m)까지 지리산온천지구가 있는 산내면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힘들게 올라온 정상(1,433m)은 전라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반야봉을 지나 대간의 종주길 따라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서부능선 제일의 정수리이다. 정상에는 그 흔한 돌비석 하나 없이 푸대접을 받고 있으니, 오가는 산 꾼들의 정성으로 쌓아올린 돌탑을 위안 삼아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름만큼이나 복스러운 만복대는(1,433m) 산 전체가 부드러운 구릉으로 되어 있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지리산 10승지지 중의 하나로 전해오는 명당으로 많은 사람이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한다.
여름에는 야생화, 가을에는 억새로 지친 산 꾼들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는 묘봉치(1,130m) 가는 길. 올라오는 길이야 고된 행군이지만 300여m의 고도를 내려서는 길은 꿈같이 달콤한 환상의 대간길이 아닌가?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아래 휜 머리 풀어헤친 억새들의 춤사위로 어깨춤이 들썩이고 고리봉과 반야봉이 반겨주는 툭 터진 시야로 가슴속이 후련하다. 심원마을에서 위안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은 휴식년제로 출입금지 경고판이 앞길을 가로막아 그나마 형체도 없어진지 오래 이고, 헬기장의 너른 공터에서 숨을 고르고 서둘러 고리봉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키를 넘는 조릿대와 철쭉나무의 날카로운 가지들이 반팔차림의 팔다리를 휘감는 고통 속에 치고 오르는 비알길이 멀어만 보인다. 20km의 구간 중에 마지막 봉우리를 향하는 마음이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닌가? 1,248m의 고리봉 정상에는 앙증맞은 정상석이 반겨주고 툭 트인 시야로 천지사방이 한눈에 펼쳐진다.
고리봉 의 이름은 소금 배를 묶어두었던 ‘고리(還)’에서 유래했다 전한다.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른 소금배가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蓼川) 물줄기를 타고 남원성 동쪽 오수정(五樹亭· 참나무정)까지 올랐는데, 당시 소금배가 중간 정박지로 금지평원에 머물기 위해 배 끈을 묶어두었던 쇠고리가 바로 고리봉 동쪽 절벽에 있었다고 전해온다.
지척에 보이는 성삼재(1,000m)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하듯 유순하게 진행된다. 뱀사골에서 올라오는 861번 도로를 왼쪽허리에 끼고 한껏 멋을 부리는 팔자걸음에 하늘아래 첫 동네인 심원마을과 노고단, 종석대가 반겨준다. 우측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성삼재가 북한산보다도 높은 1,000m라는 사실이 실감나게 지리산 온천관광지구와 구례읍의 너른 평야가 시원하게 파노라마를 이룬다. 오욕(다섯 가지 욕심)을 잊은 지 오래된 우리가 바로 신선이 아닌가? 지리산의 관문인 성삼재에 도착하며 내일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