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백두대간. 제 3 부: 남부지역. 3

김완묵 2009. 11. 18. 05:41

                     

                  25. 신풍령(930m) - 육십령(734m) / 29km

이번구간은 덕유산 국립공원을 지나게 되는데 덕유산은 1975년 오대산과 더불어 국내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태백산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소백산, 속리산 등을 솟구치며 다시 지리산으로 가는 도중 그 중심부에 빚어 놓은 또 하나의 명산이다.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와 장수, 경상남도 거창과 함양군 등 2개도 4개 군에 걸쳐 솟아 있고, 주봉인 향적봉(1,614m)을 중심으로 1,300m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장장 30여km를 달리며, 동쪽으로는 고산준령이 서쪽으로는 우리나라 제일의 곡창인 호남 벌을 품고 있다.

 

산뜻하게 단장을 한 팔각정을 뒤로하고 서쪽의 빼봉(1,039m)을 향하여 대간길이 시작된다. 워밍업을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봉우리를 3개 넘나들지만 갈미봉 오름길에서 진땀을 뺀 후, 1시간 20분 만에 갈미봉(1,210m)에 올라서면 덕유산의 고산준령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서남쪽으로 남덕유산(1507m)이 아련히 마루 금을 이루고 20여km가 넘는 그곳으로 향하는 산 꾼들의 의지를 불태우며 맥박이 용솟음친다.

 

거창군에서 세운 앙증맞은 표지석에 입맞춤하고, 지나온 삼봉산을 뒤돌아본다. 거창군 북상면과 고재면의 경계를 이루는 호음산(929.8m)이 남쪽으로 지 능선을 이루지만, 대간 길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대봉을 향하여 달려간다. 1km 거리인 대봉(1,263m)까지는 완만한 마루금을 오르내리며 30여분 만에 완주하고 정상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달려가는 대간길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주봉인 향적봉(1,614m)과 칠봉(1,305m)을 품에 안은 무주구천동의 3십리계곡의 푸른 숲이 비단결 같이 포근하게 안겨오고, 북쪽으로 투구봉(1,274m)으로 향하는 능선을 따라 무주군의 설천면과 무풍면이 경계를 이룬다.

 

신풍령 3.6km 횡경재 4.2km 송계삼거리 7.4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200여m의 급경사를 내려서는 비알길은 팔뚝 같이 굵은 싸리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무성하다. 반대로 올라올 경우, 한 여름에는 더위와 힘겨운 씨름을 해야 하고, 한겨울에는 눈 속을 헤치는 고행의 구간이다.

 

순수한 우리말인 달음령(월음령1,078m)에 도착하면 북쪽으로 무주구천동과 남쪽의 송계사 지구의 소정리와 연결이 되지만, 횡경재 보다 지리적으로 불편한 곳이라 탈출로가 여의치 않아 보인다. 국립공원의 구간답게 촘촘히 세워진 이정표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지봉(1,342m)을 오르는 급경사는 대간 길에 지친 산 꾼들이 넘어야 할 복병으로 1.4km의 거리가 한없이 멀어만 보이고, 270m의 고도를 극복해야하는 마의 구간이다.

 

신풍령에서 백암봉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저마다 시원한 조망으로 피로에 지친 산 꾼들에게 원기를 북돋운다. 못 봉으로 불리는 지봉(1342m)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덕유 평전과 무룡산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지봉은 우리말로 못 봉인데 옛날에 이 근처에 큰 연못이 있었다는 유래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거창군에서 세운 앙증맞은 돌비석이 눈길을 끈다. 이정표에는 송계삼거리 4,9km 신풍령 6,1km가 가리키듯 어느 쪽을 보아도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설상가상으로 급경사 내리막길에는 겨우내 쌓인 눈이 허벅지까지 차오르고,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 따라 허들 경기하듯 장애물을 넘다보면 허벅지가 뻣뻣하게 굳어온다. 지친 몸을 이끌고 헬기장에 내려서면 완만한 능선으로 몰아치는 칼바람이 온몸을 휘어 감고, 바람피해 내려선 눈구덩이 속은 앉을 자리도 없다. 나무둥치에 기대서서 김치 국에 밥 말아먹는 식사시간은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한의 의식 행위로, 반주로 곁들이는 소주는 언 몸을 녹여주는 겨울산행의 필수품이다. 짜릿한 감칠맛에, 시장이 반찬이라 3분식사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고난의 길을 헤쳐 간다.

 

완만한 능선이라도 눈 속을 헤치는 발걸음이 수십 배 힘겨운데, 무성하던 잎 다 떨 구고 앙상한 가지를 내민 철쭉들이 매서운 설한풍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동병상련의 애절한 심정으로 연민의 정을 가눌 길 없다. 횡경재(1,350m)에 도착하면 눈 속에서도 푸른 절개를 간직하고 있는 산죽의 포근한 온정 속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분지가 반겨준다. 백련사와 송계사로 이어지는 이곳에는 송계삼거리 3.2km 빼재 7.8km의 이정표와 안내판이 서있고, 종주 길에 지친 산객들이 탈출할 수 있는 하산 로가 열려있다.

 

횡경재에서 1.1km를 진행하면 싸리등재(1,300m)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완만하게 800여m를 오르면 귀봉(1,370m)에 이른다. 이곳 또한 전망이 좋아 눈 속을 헤치며 지나온 지봉과 대봉, 갈미봉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끝없는 설원 속에 황홀감이 극치를 이룬다. 귀 봉을 지나며 날 등에는 겨우내 내린 눈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진달래 만발하던 춘삼월엔 까치발로도 닿지 않던 나뭇가지들이 엉거주춤 내딛는 발걸음에 몽둥이찜질로 달려드니 날벼락에 정신이 몽롱하다. 이마에 불거진 혹을 쓸어내리며 몽둥이찜질 피하려다 눈 속으로 나둥글며 이래저래 겨울산행은 불청객의 수난인가보다.

 

상여덤(1,430m)을 지나 송계 삼거리인 백암봉(1,503m)에 도착하면 향적봉(1,614m)과 동업령(1,260m)이 분기하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신풍령에서 악전고투하며 걸어온 11km의 대간 길도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발자국이 탄탄대로 고속도로를 만든다. 북쪽의 완만한 덕유평전 설원위로 시선을 돌리면 중봉(1,594m)을 지나 향적봉에 이르는 분지에는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나뭇가지마다 만발한 상고대가 겨울 산의 백미를 이룬다. 겨울이가고 따스한 봄볕아래 새싹이 움트면 화려한 상고대가 피어나던 철쭉도 분홍 옷으로 갈아입고 샛노란 원추리가 만발하는 오뉴월에는 전국에서 찾아드는 상춘객으로 또다시 만원을 이룬다.

 

자그마한 표지석이 눈 속에서 빼 꼼이 고개를 내밀고, 남쪽으로 본격적인 대간길이 이어진다. 어머니의 젖무덤같이 부드러운 능선 길은 내려서는 길이라 편하지만 반대로 올라온다면 또 한 번 애를 먹게 되는 구간이다. 무릅까지 빠지는 눈구덩이를 헤치며 2.2km거리를 진행하면 안성면의 칠연 폭포 쪽에서 올라오는 동업령(1,320m) 삼거리다.

 

덕유산의 거센 바람을 피해 털벙거지에 중무장을 하고도 추위를 이기는 데는 역부족이다. 큰 기복이 없는 능선 길을 900여 m 진행하면 동업령(1,260m)에 도착한다. 안성면 칠연폭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휴식장소로 성시를 이룬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1,350고지를 올랐다가 또 한 봉을 넘어서면 돌탑이 있는 무명봉이다. 동업령 2km, 삿갓재 대피소 4.2km의 이정표가 반겨주고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거칠 것이 없지만, 한 여름이면 무성한 숲과 가시 엉킨 덤불들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돌탑에서 40여분을 진행하면 무룡산(1,491m)에 오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 또한 일품이어서 남덕유산(1,507m)과 서봉(1,510m)이 낙타 등처럼 쌍봉을 이루고, 동쪽으로 수도산(1,316m)과 가야산(1,430m)이 남쪽으로 금원산(1,353m)과 월봉산(1,279m)을 비롯하여 거창의 고산준령이 한눈에 조망된다. 원추리를 비롯한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희귀식물들을 보호하기위해 나무계단에 폐타이어로 바닥을 깔아놓은 길을 따라 2km를 내려서면 삿갓재(1,280m) 대피소에 도착한다.

 

덕유산을 종주하는 팀들이 하룻밤을 묵게 되는 삿갓재 대피소는 정원이 45명에 1인이 4명까지 예약이 가능하다. 요금은 8,000원, 2층의 목조건물로 1층은 남자 2층은 여자전용으로 부부인 경우 2층사용이 가능하다. 취침담요 1장에 1,000원으로 2장이면 충분하고 보일러가동으로 겨울에도 따듯하고 약간의 먹거리도 있어 햇반3,000원 사발면 참치캔 깻잎 2,000원, 꽁치 캔 4,000원에 술과 샤워시설은 없고, 150m 떨어진 샘을 이용하여 간단하게 조리도 할 수 있다.

 

삿갓재 대피소에서 700여m거리에 있는 1,340봉은 가파른 오르막길이고 이곳에서 삿갓봉(1,380m)은 조금 비껴서있다. 갈림길에서 월성재(1,240m)로 내려서는 길은 순탄하지만, 반대로 올라오려면 애간장이 타는 구간으로 2.7km에 1시간이면 넉넉하다. 남덕유산 1.4km, 삿갓재 2.9km, 월성통제소가 있는 황점 마을까지 3.6km의 이정표가 지친 몸을 달래주며 황점 마을로 탈출이 가능하다.

 

이제 대간 길은 남덕유산(1,507m)의 우측 사면 길로 연결되지만 정상을 어찌 그대로 지나칠 수 있겠는가? 십여 분간 수고하면 정상에 오를 수 있고, 이곳에서의 조망은 가히 환상적이다. 동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능선이 남령을 지나 월봉산(1,279m)에 이른다. 잠시 후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능선을 따르면 거망산(1,184m)과 황석산(1,190m)에 이르고, 동쪽의 능선을 따르면 금원산(1,353m)과 기백산(1,331m)에 이르는 거창이 자랑하는 기백산 군립공원과 연결이 된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급경사 비알 길을 내려서면 월성 재에서 사면 길을 돌아오는 남덕유와 서봉의 중간 갈림길(1,398m)이다. 이곳에서 한동안 너덜지대를 지나 산죽이 무성한 야생화단지를 지나면 마의 구간인 철 계단이 가로막고, 곧이어 서봉(장수덕유(1,510m)정상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육십령까지는 6.5km가 남았지만 어려운 고 빗길을 모두 넘겼으니 지척이나 진배없이 마음이 홀가분하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남덕유산과 함께 덕유산 남쪽지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다. 육십령 너머로 이어지는 대간의 주능선이 끝없이 펼쳐지고, 장수군 장계면의 넓은 들과 계곡이 손금 들여다보듯이 선명하다. 남쪽의 하늘 금에는 백운산(1,278m)과 장안산(1,237m)의 정수리가 아른거린다. 바위 틈 사이를 비집고 내려서면 샘터가 나오고, 곧이어 헬기장을 지나면 경남교육청 덕유 교육원으로 내려서는 삼거리에 도착하며 덕유산 국립공원도 끝이 난다.

 

이곳에서 할미봉까지는 2.8km이다. 평지나 다름없는 오솔길에서 숨고르기를 하며 전망 좋은 할미봉(1,026m)에 올라선다. 대진고속도로가 터널 속으로 시원스럽게 빨려 들어가고 육십령을 오르는 26번 국도가 힘겨워 보인다. 할미봉아래 성터는 옛날 어느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할미성이라 했고, 산봉우리를 할미봉이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대포바위(일명 좃대바위)또한 그냥 지나칠 수없는 명물이다. 이제 남은 것은 2.2km, 지루하고 고된 구간도 대미를 장식하며 915봉을 넘어 육십령(734m)에 도착하면 싱그러운 바람이 온 몸을 감싼다.

 

육십령에는 세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첫째는 장수 감영에서 육십령까지 육 십리 길이며, 안의감영( 현재의 함양군 서상면)에서도 육 십리 거리여서 육십령이고, 둘째는 크고 작은 60개의 굽이를 돌아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육십령이 높고 험해서 도둑들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넘으려면 고개아래 주막거리에서 60명 이상의 장정이 모인 뒤에 함께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60령' 이라고 한다.

 

                   26.육십령 (734m) - 중재(640m) / 21km

지금이야 깃대봉(1,015m) 밑으로 대진고속도로가 관통되어 오가는 차량이 별로 없다. 소백산맥이 남진하면서 동쪽의 남강 상류와 서쪽의 금강 상류인 장계천이 침식작용에 의해 낮아진 부분으로,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9m)의 안부에 해당한다. 소백산맥이 활처럼 둘러싸고 있어 다른 지방과의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영남지방의 주요교통로로, 조령(643m)· 죽령(689m)· 팔량치(513m) 등과 함께 영남지방의 4대령으로 꼽아왔다. 특히 육십령은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였으며, 현재는 26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사용하던 이 고개는 당시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로 함양 사근산성(사적 제152호)· 황석산성(사적 제322호) 등 삼국시대의 성곽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개 마루의 팔각정에 올라 장수군의 너른 들을 굽어보고 남진하는 대간 길은 보무도 당당하다. 큰 기복이 없는 주능선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전망대 바위에 올라선다. 지나온 남덕유산과 서봉 그 아래 할미봉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바쁜 걸음에도 돌아보는 회수가 많아진다. 이제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지압등산로의 표지판을 지나면, 마사토에 나무계단까지 정성스런 그 손길이 산 꾼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으며 정갈하게 보존하고 있는 깃대봉 샘터에 도착한다. 대장정을 이어가는 산 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이 샘물이 아닌가? 600여km가 넘는 종주 길에 반가운 샘터가 몇 곳이나 되던가? 종주 길에 지친 산 꾼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샘터는, 억새능선아래 안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로 새로운 활력을 찾아 깃대봉(1015m)을 향한다.

 

정상에는 조망 안내판과 깃발을 계양할 수 있는 깃대봉이 세 개있다. 이곳에서의 조망 또한 일품으로 할미봉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쪽으로 진행해야할 주능선에는 백운산(1,278m)과 영취산(1,075m), 장안산(1,237m)과 괘관산(1,251m)의 정수리들이 겹겹이 주름을 잡아 끝없이 펼쳐진다. 광활한 구릉지에 펼쳐지는 억새들이 푸른 하늘아래 황금물결로 출렁이고, 시원하게 뻗어 내린 대진고속도로가 땅속으로 달려가는 가파른 능선 길에서 철탑의 자취는 발견하지 못해도, 가시덤불 속에 허물어진 돌무더기로 흔적만 남아있는 민령(서상면 금당리에서 오동제 논개 생가로 넘어가는 길)에 이른다.

 

완만한 능선에는 무성한 억새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산딸기와 산초나무 가시가 앞길을 가로막아 고통스런 행진이 이어진다. 하지만 전망 좋은 능선 길은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준령이지만, 완만한 종주 길에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오는 쾌적한 날씨에 4km의 속도로 진행한다.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듬성듬성 나타나는 암봉 들이 억새밭사이로 전망대를 만들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질러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기암절벽 북 바위에 올라서면, 푸른 물결 넘실대는 오동제가 장관을 이루고 머리 뒤로 깃 대봉이 손짓하는데, 그 너머로 남덕유산의 자태가 완연하다.

 

북 바위에서 20여 분을 진행하면 논개생가 갈림길에 이른다. 전북 장수 출신으로 성은 주씨(朱氏)요, 이름은 논개라. 1593년(선조 26년)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593년 6월 김천일(金千鎰), 최경회, 황진, 고종후(高從厚)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로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고 1721년(경종 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웠으며, 1739년(영조 15) 무렵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1868년(고종 5)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에 의해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고 말았다고 한다.

 

오르락내리락 지루한 종주길이 푸른 숲에 가려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따금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면 장계면 대곡리와 서상면 옥산리가 그림같이 펼쳐지고, 시원하게 달려가는 고속도로가 지친 몸을 어루만진다. 옥산리로 내려서는 조망바위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먼발치에서 손짓하는 영취산과 백운산의 마력에 이끌려 발걸음을 이어간다. 서덕운봉 전망대에서 덕운봉(983m)은 동쪽으로 200m 빗겨나 있다. 서쪽으로 이어가는 암능을 지나, 엇비슷한 봉우리 3개를 넘어 질펀하게 군락을 이루는 산죽 밭을 지나 영취산(1,075m)의 정상에 올라선다.

 

신령 "靈자"에 독수리 "鷲"자를 쓰는 영취산은 결코 평범한 산이 아니다. 우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동쪽은 낙동강으로, 서쪽은 금강으로 흐르는 3강의 발원지도 이곳이다. 또한 서쪽으로 무령고개를 넘어서면 금남호남정맥이 이어진다. 경도 127도 37분 81초에, 위도 35도 38분 23초의 정상에는 검은 오석의 정상석이 기품 있게 자리 잡고, 2002년에 복구된 함양 309번의 삼각점이 산 꾼들의 의지를 불태운다.

 

호남지방의 산과 들을 두루 섭렵하는 금남호남정맥은 장수군의 장계면에서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무령고개를 가로질러 장안산(1,237m) 정상에서 서쪽으로 시루봉(1,014m), 신무산(896m), 팔공산(1,151m), 삿갓봉, 성수산(1,059m), 마이산(686m), 부귀산(806m), 주화산으로 이어지는 64km의 산맥이다. 9정맥 중에서 가장 짧은 산줄기지만 1,000m의 산들이 자못 웅장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으며, 진안의 명산인 마이산을 지나 주화산에서 구드례 나루까지 이어지는 금남정맥과 광양만의 외망포구까지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중치 8.2km 육십령 11.8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백운산으로 향하는 발길을 재촉하면 억새와 싸리나무가 장관을 이루는 분지에 도착한다. 잠시 비알 길을 내려서면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금남 호남정맥의 선바위 갈림길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선바위의 빼어난 경관이 가슴속에 멋진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오르락내리락 완만한 능선 길에는 조망도 좋고 무성한 산죽의 숲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진행을 하다 1,066봉의 양지바른 언덕아래 헬기장에 도착한다.

 

冬節期에는 山上의 높은 고지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 식으로 보온밥통에 담아온 국에 밥을 말아먹는 간편하면서도 신속한 동작으로 배낭의 부피도 줄이고, 소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하는 나만의 행동식으로 10분간의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전망 좋은 암 봉에 올라서면 직경이 30cm에 높이가 10여m나 되는 거대한 철쭉나무가 눈길을 끌고 좌측으로 방향을 잡아 본격적인 백운산 오름길이 시작된다. 키를 넘는 산죽과 눈(雪)의 만남은 환상적인 슬로프가 되어, 올려 딛는 발걸음이 인정사정없이 미끄러지며 정상이 자꾸만 뒷걸음친다. 걷는 시간보다 멈추는 시간이 더 많은 비알 길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신만고 끝에 정상(1,278m)에 올라서면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하듯 시원하게 펼쳐지는 조망으로 가슴속이 후련하다.

 

정상에는 아담한 돌비석이 자리를 잡고 “同名異山으로 많고 많은 白雲山”그 중에서도 명성은 광양의 동생(1,218m)만 못하지만, 키만은 가장 큰 맏형(1,278m)으로 사방팔방 둘러봐도 거침없이 터지는 조망이 단연 으뜸이다. 남쪽의 하늘가를 바라보라! 지리산의 천왕봉이 웅지를 틀고, 대간의 마루 금이 북으로 달려오며 덕유 평전까지 아련하지 않은가? 경남의 고산준령들이 겹겹이 주름을 잡고, 이정표의 기둥에는 수고하셨습니다. 苦行을 자처하는 산 꾼들에게 정감어린 인사를 건넨다.

 

또한 서쪽은 어떠한가? 우뚝 솟은 장안산이 호남벌을 향해 힘차게 飛翔(비상)을 하고, 동쪽으로 서래봉(1,078m)을 거쳐 빼빼재, 괘관산(1,251m), 천황봉(1,228m)을 거쳐 백암산(621m)까지 함양의 기상이 발원하는 산줄기가 힘차게 요동을 친다. 이제 중치로 내려서는 대간 길엔 월경산(990m)과 봉화산(919m)이 손짓을 하고 중재까지는 2.9km 짧지 않은 거리지만 내려서는 길이라 편안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비지땀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듬성듬성 솟아오른 전망대에 올라서면 森羅萬象이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빼어난 경관이 펼쳐지는 백운산 자락에서 고된 종주 길의 풍운아도 모처럼 아름다운 정취에 흠뻑 빠진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내려서는 길은 잠시 후에 묘지가 있는 갈림길에서, 함양이 자랑하는 상연대의 물맛을 보고 싶지만 다음으로 기약을 하고 묵계암에 관한 문헌을 살펴본다. 전통사찰 제85호(등록 1986. 1. 18)인 이 사찰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신라 말 경애왕 1년(924)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 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는 이름을 불러 상연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라 말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선문(實相禪門)을 이곳에 옮겨와 선문(禪門)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역대 고승, 대덕스님들이 수도 정진해 오던 곳으로 천여 년의 영험(靈驗)이 어리고 신령한 수도 도량이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란(戰亂)에 소실된 것을 1953년경에 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이 사찰의 뒤편에는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백운산(1279m)이 우뚝 솟아 있다.

 

표고 870m인 중고개재에서 뒤돌아보는 백운산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고봉이다. 구름이 끼는 날이 많아 백운산이라 하였던가? 산허리를 감아 도는 운해 저편에 솟아오른 정수리는 신령스러운 모습으로 토착민들의 숭배의 대상이다. 이제 중치까지는 1.7km의 여정이 남아있지만 완만하게 내려서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백두대간을 밟아가는 산 꾼들에게는 성지순례와도 같이 백운산을 오르는 길목이다. 일 년 내내 외지인들 구경 한번 못하는 중기마을이지만, 산수유나무 흐드러진 개천을 따라 시멘트 포장길을 1.5km 거슬러 오르면 함양군 백전면 중기마을에서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로 넘어가는 중치에 도착하며 또 한 구간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