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백두대간. 제 3 부: 남부지역. 2

김완묵 2009. 11. 18. 05:38

            

               22. 추풍령(221m) - 궤방령(300m) - 우두령(720m) / 23.5km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고개

기적도 숨이 차서 목메어 울고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거칠은 두 뺨 위에 눈물이 어려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고개

 

남상규의 추풍령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이어지는 대간 길은, 서쪽으로 경부선 철도를 가로질러 고속도로 지하통로를 빠져나오면 포도밭의 둔덕에 도착하며 곧바로 눌의산 오름길이 시작된다. 추풍령의 고도가 221m이고 눌의산의 고도가 743m이고 보니 500m가 넘는 고도차를 극복하자면, 내 노라 하는 건각들도 지레 겁을 먹게 되고, 7-8월 삼복더위라도 만난다면 기가 질리고 만다.

 

1시간 이상 애간장을 태우며 올라선 눌의산(743m)은 추풍령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로 사방을 둘러봐도 막힘없이 가슴속이 후련하다. 지나온 중화지구대의 기름진 옥토가 속리산의 천왕봉까지 마루금 따라 가물거린다. 아래위로 두 개의 헬기장이 있는 정상에는 아담한 표지석 과 1981년 개설된 영동 22번 삼각점이 자리를 잡고, 그 옛날 나라에 긴급한 일이 있거나 외적이 침범했을 때 봉화를 피워 올리던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정상에서 663봉까지는 완만한 능선에 잡목이 무성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거칠 것이 없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장군봉(606m)에 올라 비알 길로 내려서는 좌측에는 가지런히 조성된 금릉공원묘지가 내려다보인다. 안녕 마을로 이어지는 고개 마루에는 따사로운 햇살아래 바람도 잠을 자고, 높고 높은 가성산(716m)을 향해 가파른 사면 길을 치고 오를 때, 음달편의 앙상한 굴참나무는 겨울잠이 한창이고 잔설이 분분한 낙엽 속을 헤집고 쑥부쟁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갈참나무 숲속에 가려진 정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오금이 저려오는 산 비알에서 죄 없는 나무 등걸 부여잡고 혼신의 힘을 쏟아낸다. 오가는 산 꾼들에게 시달림 당하는 물푸레나무는 길옆에 뿌리내린 죄로 뿌리까지 드러낸 채, 손찌검에 시달린 마디마다 상처투성이다. 가성산의 비알 길을 내려서면 샛노란 생강 꽃이 봄을 재촉하고, 양지바른 뫼잔 등에 진홍빛 할미꽃이 머리 풀어 실바람 속으로 시집을 보낸다. 한동안 갈참나무의 숲속에 포로가 되어 지루하게 이어지고, 김천시와 경부고속도로가 바라보이는 쉼터에서 물 한 모금 마신다.

 

오래골 소류지를 지나치는 능선에서 동남쪽으로 구부러진 대간 길은 418봉에서 서남쪽으로 선회하여 궤방령에 이른다. 괘방령의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이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를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管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科擧)길이고, 한양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눈길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이기도하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박이룡(朴以龍)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덕을 기린 황의사(黃衣祠)라는 사당이 있다.

 

민족의 정기를 받은 백두대간이 300m로 몸을 낮추는 괘방령. 추풍령을 넘어 과거를 보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할 것이요, 과거 급재를 알리는 방이 붙는 괘방령 넘어서 과거를 보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속설에 따라 선비들이 즐겨 넘었다는 곳. 괘방령은 영동군 매곡면에서 길을 잡아 넘자면 이곳이 진정 고개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평탄하기만 하다.

 

고갯마루는 906번 지방도만 지나는 것이 아니라, 대간의 마루금도 함께 지나므로 괘방령 사거리인 셈이다.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산악인의 길이요. 영동군 매곡면과 김천시 대항면을 이어주는 906번 지방도는 향리사람들의 정을 잇는 삶의 통로인 셈이다. 고갯마루 길섶의 장승과 간이 의자가 있는 조그만 공원에는 탑신제당모양의 돌탑이 있어 눈길을 끈다. 탑신의 중간을 돌아가며 매곡면의 마을 이름들을 새긴 벽돌모양의 대리석을 끼워 넣었는데 그 모양이 이채롭다.

 

궤방령에서 서남쪽으로 진행하면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의 경계를 지나게 된다. 한국가스공사와 매일유업 영동공장을 좌우에 거느리고 활처럼 휘어진 황학산(1.111m)의 정상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급경사를 치고 오르면 우측으로 여우굴이 나타나고 잠시 후 어촌소류지가 내려다보이는 평평한 봉우리가 여시골산이다.

 

옛날 노모를 모시고 사는 영복이라는 순진한 시골 노총각이 있었다. 가난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영복은 편찮으신 노모가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얼음 띄운 콩국이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총각들은 영복을 놀려줄 요량으로 여시골산에 가면 얼음을 구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순진한 영복은 동네 총각들의 말만 믿고 여시골을 찾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여 폐 암자에 쓰러지는데, 때마침 구미호가 사람의 간을 빼먹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윽고 죽을 위기에 빠지나 영복의 효심에 감탄한 구미호는 자신을 보았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영복을 살려준다.

 

얼마 후 영복이네 집에는 묘령의 여인이 찾아들고 영복이와 혼례까지 치르게 된다. 세월이 흘러 딸아이까지 낳게 되지만 미역국조차 제대로 끓여 먹이지 못하는 형편에 영복은 가슴을 아파한다. 이즈음 부인은 밤마다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가 값진 구슬을 가지고 돌아온다. 영복은 여시골산에 가서 구미호를 보았던 이야기를 무심코 꺼낸다. 이때 부인이 갑자기 백발 구미호로 변한다. 사실 영복이 십년간만 비밀을 지켜주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구미호였으나 내일이 바로 그 10년을 채우는 날이다. 영복이 하루만 더 참았더라면 영원히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구미호는 언약을 이행하지 않는 인간의 간사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두 아이를 데리고 홀연히 떠난다는 전설이다.

 

여시골산에서 운수산(680m)까지는 완만한 오름길이다. 황악산의 정수리를 표적으로 낙타 등에 올라탄 즐거움으로 직지사의 갈림길에 이른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는 신라의 눌지왕(418년)때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645년(선덕여왕 14) 자장율사가 중창한 이래로 930년(경순왕 4), 936년(태조 19)에 천묵대사와 능여대사가 각각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사명대사가 출가하여 득도한 절로도 유명하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1735 중건)을 비롯하여 천불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1661 창건)· 약사전·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사명각등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동6각 사리함(국보 제208호), 석조약사 불 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3층 석탑 2기(보물 제606호), 비로전 3층 석탑(보물 제607호), 대웅전삼존불탱화 3폭(보물 제670호), 청풍료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등이 있다.

 

직지사의 갈림길에서 다리쉼을 하고, 황악산을 오르는 길은 속리산의 천황봉(1.058m)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1.000m가 넘는 봉우리이다. 500여m의 고도를 극복해야하는 어려운 코스지만, 직지사와 같이 유서 깊은 사찰을 품에 안고 오르는 길이라, 부처님의 보살핌 때문인지 큰 어려움 없이 정상에 올라선다. 절 이름이 그러하듯 절을 감싸고 있는 황악산의 높이가 곧은 작대기 4개를 세로로 가지런히 세워 놓은 듯한 1,111m인 것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자연석에 새겨진 표지석하며 엉성하기 그지없는 돌무더기에도 정토세계의 관문처럼 편안하기 그지없다.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의 경계를 이루는 황악산은, 옛날 학이 많이 찾아와서 일명 황학산 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3개의 능선이 분기하는 정상에서, 북서방향의 지릉은 곤천산을 빚어 놓은 후 영동군 상촌면으로 내려가 평지로 변하고, 북동방면은 대간의 궤방령으로 정남쪽은 우두령으로 이어진다. 표지석이 없는 형제봉에 이르면 바람재 1.3km 황악산 0.9km 의 이정표가 반겨주고, 잠시 후 직지사로 내려가는 신선봉(944m)갈림길을 지나 넓은 헬기장이 있는 바람재(810m)에 도착한다.

 

바람재는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의 경계지점이다. 좌측으로 목장의 초지가 펼쳐지고 바람이 많이 불어 바람재라는 이름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골바람이 여간 아니다. 표지석의 좌․우에는 우두령 4.45km, 궤방령 8.4km라고 쓰여 있고 공터의 나무 아래는 쉬어갈수 있는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바람재 목장의 임도와 동행을 하다 서쪽으로 구부러지는 대간 길은 송신탑을 지나 여정봉(1.030m)을 오른 후, 남쪽으로 선회하여 잡목이 무성한 숲속을 오르내리며 삼성산(985m)까지 이어진다. 삼성산 에서도 큰 기복 없이 이어지다 870봉에 이르러 서쪽으로 선회하여 하산 지점인 우두령에 도착한다.

 

                   23.우두령(720m) - 부항령 (680m) / 18.5km

720m의 우두령은 화주봉과 황악산의 고산준령을 쉽게 넘으라고 소의 잔등처럼 허리를 낮추어서 질 매 재라고도 한다. 정상에는 야생동물의 이동통로로 관문을 열었으니 보기에도 장관이다.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자연을 보호하자는 발상에는 가상한 일이 아닌가? 경북 김천시 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을 넘나드는 579번 지방도로를 넘어서면 계곡에서 피어나는 운해가 신비롭기 그지없다. 야생동물 통로를 따라 대간길이 열리고, 지난밤에 내린 비로 진흙탕 비알 길에는 얼음 깔린 복병으로 엉덩방아 찧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가쁜 숨 몰아쉬며 정상으로 향할 적에 어둠속에 삼각점(영동 461)은 814봉이 확실하다.

 

앙상한 다래 숲이 온몸을 할퀸다. 무박으로 가는 길은 동이 트는 희망으로 힘 드는 줄 모르는데, 어둠 속을 가면서도 비만 오지 말라고 간절한 기도 속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사방천지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면서 순식간에 헬기장을 지나고도 1,162봉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앞사람의 거친 숨소리 따라 암흑 속을 달린다.

 

완만한 오르막에 거칠 것이 없지만 五里霧中으로 답답한 공간 속에 포로가 되어 개념도를 본다고 알 수 가 있나. 수많은 리본들이 홍수를 이루지만 이정표하나 없는 야박한 인심 속에 1시간 만에 화주봉 정상에 오른다. 하지만 이곳이 화주봉 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며 정상을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30여m의 벼랑길에 로프가 걸리고 미끄러운 바위와 씨름을 하며 힘들여 올라선 곳이 1,175봉이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최고의 전망대도 안개 속에 묻어 버리고 허망한 마음을 달래보지만, 그 보다 더 큰 실망은 30분전에 화주봉 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뒤 늦게야 알았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앞서가는 사람, 뒤쳐지는 사람, 돌아볼 겨를도 없이 나 홀로 가는 길에 안개 속을 헤치며 마음을 연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안개속의 솔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통통하게 물이 오른 진달래의 천국이 가관이다. 약산의 진달래로 시작되는 삼천리에는 대구의 비슬산, 창녕의 화왕산, 마산의 무학산, 장흥의 천관산, 여수의 영취산까지 방방곡곡 야산마다 붉게 타오르는 진달래로 금수강산이라 하지 않던가? 오호라 좋을 씨고.

 

1,111m가 높기도 하지만, 어느 곳은 이름 없이 정상을 비껴가는 설움으로 울고 있는데, 질 매 재 사이에 두고 이름삼자 거창하게 황 악 산으로 문패 달고 천년사찰 직지사에 풍악을 울리며 수많은 인파 속에 문전성시 이루니, 공평하지 못한 것이 우리 인간사와 매한가지라네. 헬기장(1,089봉) 하나 훌쩍 넘어 서서히 내리막길에 단독 종주 대간 꾼과 얼굴을 마주친다. 반가운 인사로 작별을 하고 한 없이 내려딛는 발걸음은, 급경사가 아니라도 밀 목재 가 가까운 듯.

 

세찬 바람 속에 고개 마루 당도하니, 좌우로 오간흔적 낙엽 속에 묻어두고 사방을 둘러봐도 물먹은 늪지대라. 앉을 자리 편치 않아 엉거주춤 선 자세로 안개 속에 밥 말아먹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이산저산 오르며 “산 행기에 사진까지”인터넷에 올리면 고맙게도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어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메모하며 산길을 오르는데, 최❍❍여사와 조우하여 인사를 나누고 보니 진실한 팬인지라 이 아니 반가운가?

 

오르고 또 오르며 거친 숨소리 하늘에 다다르고, 천근만근 무거운 발길 빙판길에 미끄러져도 오순도순 정담으로 지친 몸을 달랜다. 삼각점(영동 459)이 뚜렷한 1,123봉에 올라서니,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이정표가 선명하고 오늘의 고행 길도 이곳에서 끝이 난다.

 

쉬엄쉬엄 내려서며 오가는 정담 속에, 너른 분지 삼 미 골재에는 이정표와 리본들이 홍수를 이룬다. 삼도봉 오르는 나무계단은 하늘로 오르는 징검다리가? 안개 속에 하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물 한리와 해인 마을이 삼미골재를 사이에 두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오순도순 살 아 간 다 네. 대간길이 끝나도록 못 보던 조릿대, 한겨울 눈 속에도 독야청청 곧은 절개. 소나무와 바위, 해와 달, 조석으로 변하는 세상인심 속에 너희들이 있으니 외롭지 않다.

 

미니미골 내려서면 우렁찬 무지소에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내리고, 민주지산 오르는 갈림길을 지나면 정다운 물 한리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밭두렁 논두렁 동구 밖에도 감나무 고목들이 마을을 살찌우며 자식들 뒷바라지 톡톡히 한 몫을 한다네. 물 한리 주차장에 도착하며 확인한 만보기는 18,523 발 자 욱. 대 간길 치고는 짧은 여정에 진입로 까지 합해도 12,7km에 불과 하지만 5시간 동안 안개 속을 헤매며 진흙탕길 빠져나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2006년 3월 18일 뫼솔 산악회와 함께 안개 속을 지나며 쓴 산 행기를 인용하며........

 

하늘로 향하는 나무계단이 지친 몸에 무거운 족쇄가 되어 애를 태운다. 남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삼도의 화합을 이루는 희망의 탑이 솟아있다.  세마리 거북의 받침대에 지구모양의 둥그런 조형물을 떠 받들고, 매년 10월 10일이면 三道 民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조아린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화전봉 이었으나 조형물을 세우면서 이름까지 삼도봉 으로 부르고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 용화면과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시 부황면에 걸쳐있는 삼도봉이 일반에게는 영동의 민주지산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동군 상촌면에 위치한 물 한계곡이 워낙 유명하고, 산행의 들머리로 이곳을 주로 이용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삼도봉에 오르면 남쪽으로 대덕산(1.290m)과 덕유삼봉(1,254m)이 조망되고, 서쪽으로는 석기봉(1,205m)과 민주지산(1,241m) 각호산(1,176m)으로 이어지는 각호지맥이 분기된다.  동쪽으로 바라보면 금오산(976m)과 가야산(1,430m)이 북쪽은 지나온 황학산(1,111m) 자락이 시야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을 이루었던 이곳은 진달래 군락지로도 유명한 곳이고, 민주지산과 연계되는 물한리 계곡은 용소와 의용골 폭포. 음주골 폭포 등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여름이면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동쪽의 산자락에는 해인리 마을의 아늑한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 시킨다.

 

소백산에서 시작된 충북의 경계선과도 아쉬운 작별을 하고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대간 길은 고산준령의 힘찬 맥박으로 용솟음친다. 잠시 후 해인산장 갈림길에 이르면 삼도봉 0.5km 해인리 0.5km 삼도광장 3km의 이정표가 반겨주고 목장지대의 초원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설치한 나무계단을 따르면 삼도봉을 떠나 온지 1시간 만에 1,170봉에 도착한다.

 

전망이 신통치 않은 정상을 뒤로하고 남진을 하는 중에 10여분 후, 대간 길은 동남쪽으로 구부러지며 1시간이 넘도록 지루하기 짝이 없고 세미 암릉 구간을 지나 잡목을 헤치며 올라선 곳이 1,034m봉으로 백수리산 이라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정수리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970봉에 올라서면 대간 길은 또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주능선을 따른다. 남쪽으로 내려서면 무풍면 금평리 쑥병이 마을과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가목마을을 잇는 1089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부항령(680m)에 이르고  삼도봉 터널이 관통된다.

 

                       24.부항령(680m) - 신풍령(930m) / 20km

삼도봉 터널의 절개지를 치고 15분간 오르면 부항령에 이르고 본격적인 종주길이 열린다. 다소 완만한 오름길에서 진땀을 흘리는 대간 길은 종주 팀이 아니면 찾지 않는 별천지다. 야생화와 함께 멧돼지의 천국에서 머리가 곤두서는 긴장감속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삼각점이 있는 853봉을 지나 지루할 정도로 큰 기복이 없는 마루 금을 1시간동안 걸어가면, 녹지사업이 한창인 폐광터를 지나 833봉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20여분을 내려서면 덕산재(640m)에 도착한다.

 

30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 마루는 무주의 나제통문과 관기를 오가는 길목이다. 쌍방울에서 운영하던 주유소는 폐허가 된지 오래 이고, 산 삼 파는 전시장도 돌보는 이 없이 쓸쓸이 덕산재를 지키고 있으니 대간을 넘나드는 산 꾼 들이 어찌 반갑지 않으랴. 망덕산 아래 펼쳐지는 무풍 땅은 격암 남사고(조선 명종 때 철학자로 격암유록을 남겼고 위대한 예언가 이다)가 덕유산 근처에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여 임진왜란 때는 양반들이 이곳으로 피신해 들어와 그들이 남겨둔 유적은 지금도 백산서원, 죽림서원, 춘향서원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성벽으로 이루어진 나제통문(일제시대 에 뚫렸다고 함)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자 영토다툼으로 인하여 수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무풍은 신라의 땅이었으나 현재는 전북에 속하는 지역으로  언어와 풍습. 생활은 김천과 거창에 가까운 곳이다. 640m의 덕산 재에서 1,290m의 대덕산을 오르자면 웬만한 산 하나를 포개 놓은 듯 처다만 봐도 아찔하게 현기증이 난다. 숨이 턱에 차도록 안간힘을 쓰는 차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과 같이 벼랑길 한 모퉁이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으니 갈증 난 산 꾼들에게 신이 내려주신 용천수가 반갑기 그지없다.

 

멀고먼 대간 길에 샘터를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해발 1,000m 가 넘는 곳에서 솟아나는 샘터에는 오염도 탐욕도 없이, 목마른 나그네의 지친 몸에 갈증을 풀어주는 물 보시로 사랑을 받아오는 이곳에 시한구절 걸려있으니 ❉얼음골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는 길손이시여, 사랑하나 풀어 던진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용천수 한 사발에 용기를 내어 1,290m의 정수리에 올라서면, 검은 오석으로 단장한 대덕산 정상의 표지석이 반겨준다. 백두대간을 알리는 스텐 표지 석으로 둘러리를 세우고, 1988년 재설된 무풍 22호의 삼각점과, 모든 측량의 기준점이 되는 삼각점이 전국에 16,000여개 설치되어 있으니 우리 모두 소중한 자산을 보호하자는 안내문을 보며, 예로부터 대덕산은 덕이 많은 산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봉황을 닮은 산세는 대덕산을 몸통으로 하여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백두대간을 달리고, 동쪽으로 고추 세운 꼬리의 깃털은 수도지맥과 가야지맥. 금오지맥을 거느리며, 망덕산으로 향하는 부리는 알(풍수지리에서는 망덕산이 봉황의 알을 닮았다고 한다)을 보호하려는 에 미의 날카로움과 온화한 눈매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뉘 라서 자연의 섭리를 거절할 것인가! 거대한 봉황이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는 대덕산의 형태는 너무나 생생하여 요즘에도 대덕산이 품어내는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대덕산(1,290m)에서 삼도봉(1,248m)사이에는 수백만평의 평원위에 억새들의 천국이 펼쳐진다.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환경으로 자연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하여 때가 묻지 않은 곳이다. 작은 키에 줄기도 가늘지만 풀어헤친 백발이 세찬바람의 시련에도 꺾일 줄 모르는 강인한 자생력은 우리 민초들의 뿌리가 아닐 런지.

 

지리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을 지나노라면 경남 하동과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이 분수령을 이루는 1,550m의 반야봉 아래 삼도봉이 있고, 민주지산으로 유명한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 경북 김천을 아우르는 삼도봉은 너른 공터에 거창한 탑을 세우고, 매년 10월10일이면 삼도화합의 축제로 성시를 이루는데, 초점산으로 전해오는 이곳은 1,248m의 큰 키에도 반 동강난 표지 석에 대간 꾼이 아니면 돌아보는 이 없는 외로움에 억새들의 울음소리만이 석양노을에 메아리친다.

 

거창과 무주, 김천을 아우르는 삼도봉 정상은 사방팔방 거침없는 조망으로 백리 길을 열어준다. 건너편의 삼봉산(1,254m)이 하늘높이 걸려있고 고랭지 채소밭이 내려다보이는 부흥동 마을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은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덕산 재에서 대덕산을 오르며 당했던 고통도 소사 재를 내려가며 맞이하는 행복은 맞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실감할 수 있으랴.

 

가파른 비알 길을 내려오며 맞이하는 골바람은 그동안 쌓인 피로가 잦아드는 땀방울과 함께 싹 가시고, 억새들의 춤사위로 어깨춤이 절로난다. 채소밭이 시작되는 둔덕에는 사랑이란 커다란 표지석이 반겨준다. 고랭지 채소밭을 일구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손길을 바라보며 단풍나무 묘목단지를 지나면, 수확이 끝난 들녘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1089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소사고개에 도착한다.

 

해발 670m인 소사고개를 축으로 하여 북쪽에 있는 대덕산이 1.290m이고, 남쪽에 있는 덕유 삼봉이 1,254m로 양쪽 산의 정상에서 소사 고개를 바라보면 높낮이가 600여 m에 이르는 포물선을 그리는 협곡을 이루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서 물줄기 또 한 나누어지니 무풍(십승지지 중 한 곳인 무풍은 연풍. 현풍과 더 불어 삼풍이라 하였다)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금강을 따라 서해바다로 흘러들고 거창쪽 물줄기는 황강을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낙엽송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계곡으로 들어서면 하늘도 보이지 않는 수림 속에서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잠시 후 철조망을 지나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급경사 깔딱 고개는 잠시도 쉴만한 휴식공간도 없이 갈지자로 고도를 높이며, 싸리나무와 산딸기 억새밭에 철쭉나무의 키 작은 관목들이 대간 길을 가로막는다. 맞바람도 힘에 겨운 지친 몸. 가는 길이 고단하고 오는 길이 피곤해도 나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어 비몽사몽간에 천근같은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천신만고 끝에 덕유삼봉(1,254m)에 오르면 수도, 가야지맥의 산군들인 금오산. 수도산. 비계산. 별유산. 기백산과 남덕유산은 물론이고, 향적봉(1614m)과 투구봉(932m)까지 조망된다. 지나온 대덕산과 초점산(삼도봉)을 바라보며 고진감래의 희열을 맛본다. 3개의 암봉이 솟아있는 삼봉산은 세 번 째 봉우리에 표지석이 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첫 번째가 가장 높아 보인다. 고도계를 챙기지 않았으니 눈짐작으로 만족을 하고 오늘의 산행 구간 중 가장 스릴 있는 2봉에서 로프도 잡아보고 아슬아슬한 구간을 통과한다.

 

삼복더위에는 애를 먹을 급경사길이지만 시원한 바람결에 수월하게 정상에 올라서니 아담한 돌탑과 정상석이 자리를 잡고 있다. 북쪽으로 대간을 종주할 때 덕유산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고 하여 덕유 삼봉이라고 하지만 산경 표에는 덕유 삼봉에서 시작하여 백운산까지를 덕유 100리길이라 하였으니 소사고개에서 시작하는 산줄기를 덕유산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삼봉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급경사 길을 내려서면 호리골재에 이르고 빼재 3km 삼봉산 1km 금봉암 0.5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전망대 바위에 올라 답답하던 마음을 쓸어내리며 내딛는 발걸음에 키 작은 철쭉과 싸리나무가 앞길을 가로막고 된새미기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올라서면 수정봉(1,050m) 정상에 이른다. 별 특징이나 이정표도 없이 바람결에 스치고, 완만한 비알 길을 내려서면 발아래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신풍령 고개 길이 내려다보이고 급경사 절 개지를 내려서며 또 한 구간을 마감한다.

 

고개 마루의 절개지에 번듯하게 세워진 수령(秀嶺)이라는 표지 석은 잘못된 것이다. 원래 이곳은 험준한 고개라 도적들의 소굴이었는데,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버려진 뼈가 산을 이루어 뼈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도의 억센 발음으로 빼 재, 빼 재 하다가 빼어나다라는 말을 빌려 수령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표지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고개아래 마을 이름을 빌려 상오정 고개라고도 하고, 추풍령을 본떠 신풍 령으로 불리며, 무주구천동과 거창을 잇는 37번국도가 많은 이름으로 유명세를 달리하고 있으니 대간꾼들에게는 흥미로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