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 3 부: 남부지역. 1
제 3 부: 남부 지역
19. 갈령(443 m) - 신의터재(320 m) / 23.5km
갈령은 상주시 화서면에서 화북면을 거쳐 괴산으로 넘어가는 977번 지방도로가 된다. 갈령 삼거리까지는 백두대간 중에서 유일하게 자동차가 오르지 못하는 곳이라 30여 분간 진입로를 따라 걸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갈령 삼거리에서 우측으로는 충북알프스의 구병산 줄기가 흐르고, 좌측은 갈령에서 분기한 청계산(877m)과 대궐터산(746m)이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로 맥을 이어간다.
대궐터산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하송리에 자리 잡은 청계산(877m)이 두리 뭉실 하다고 하여 두루봉 이라 부르고 극락정사의 뒤에 삼각점이 있는 곳을 대궐터산(746m)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장군이 이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고 하여 대궐 터라 부르고 있다. 이 산의 조산은 백두대간상의 형제봉이다. 형제봉에서 뻗어 내린 백두대간이 갈령 삼거리에서 지맥의 한 끝이 동으로 내려와 갈령재에서 잠시 멈춘 후 솟구쳐 오르다가 Y자로 갈라져 하나는 북으로 도장산과 용유. 쌍용계곡을. 또 한 가지는 남으로 뻗어 두루봉을 낳고 칠봉산과 뭉우리 재를 지나 작약산과 함창의 광활한 평야를 빗은 후 영강에서 몸을 푼다.
완만한 대간 길에 무명봉을 넘어 안부에 도착하면 생태계의 보고인 습지대가 있다. 비만 오면 물이 고여 천지라 일컬으니 655m 분지위에 펼쳐지는 못제여! 늪지여! 신비한 그대를 영원히 보호 하리. 백두대간에는 지리산의 왕등재 늪지대와 함께 유일한 못인데, 약 오륙백 평 정도의 넓이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주변 지방을 장악해 나간다. 이때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 장군과 견훤이 세력 다툼을 하며 거의 매일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싸움을 벌인 족족 황충은 패하고 만다.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부하를 시켜 미행한 끝에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낸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은 사라졌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를 했다고 한다. 이 못제에 얽힌 전설은 대간 마루금 동쪽에 있는 대궐터 산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북암리 견훤산성과 함께 천하를 호령하고 싶었던 견훤의 야망을 대변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무명봉을 넘어서면 척박한 왕 사토에 등이 굽은 소나무들이 뒤틀리고 휘어지고, 만고풍상 설한풍에 모진 고초 다 겪으며 모진생명 이어가는 가련한 모습이 우리네 민초들의 삶과 무엇이 다르랴. 암릉 길을 넘나들며 헬기장에 도착한다. 답답한 수림 속에 간간이 나타나는 암봉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구병산과 봉황산, 대궐터산이 지척에서 반겨준다. 510봉 오르는 길이 고단한 몸에 무리인지 내딛는 발걸음이 무뎌지고 거친 숨소리만 하늘을 찌르는데, 정상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가슴속이 후련하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닌가? 곤두박질치며 내려앉는 비알 길에 오금이 저려오고 철 계단 딛고 내려선 2차선 포장 도로. 말끔하게 단장된 비재(320m)에는 오가는 인적도 없이 공허로운 바람만 불어온다. 450m 무명봉이 양 옆으로 시립하니, 깊고 깊은 협곡은 전략적 요충지로 백만 대군이 몰려온들 무엇이 두려우랴. 비재는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동관 마을과 장자동을 오가는 고개로 남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비알 길에서 다리 힘이 쭉 빠지도록 안간힘을 다하는데, 한낮의 열기 속에 물먹은 솜뭉치로 천근만근 무너지는 몸을 추 수리기 힘겨워라.
암 능 구간 넘나들며 지루함을 달래는 중에 명당자리 골라잡은 허물어진 묘 잔등. 후손들이 살아가는 행적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화남면과 화서면의 경계선을 타고 동쪽으로 구부러진 대간 길은 오르락내리락 편안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이 이어진다. 전면에 보이는 봉화산(740m)이 높아만 보이고, 산정을 오르는 비알 길에서 온갖 삭신 녹아나며, 심장의 고동소리에 애간장이 다 녹는다. 고진감래라 하였던가? 고생했던 만큼의 보상이 없이 시원치 않은 조망에 앙증맞은 표지석, 판독하기 어려운 삼각점을 바라보며 물 한 모금으로 하산 길을 서두른다.
된비알 내리막길. 암릉도 나타나고 30여 분후 안부에 내려서면 울창한 수 림 속에 속절없이 포로가 되고 만다. 주위의 지형지물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힘겨운 보행 끝에 정수리에 오른다. 우뚝 솟은 감시 초소에 올라 바라보는 상주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풍요로운 들녘이 평화롭고 남쪽에는 윤지미산이, 뒤돌아보면 지나온 봉화산이 하늘높이 걸려있다.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비알 길을 내려서면, 완만한 대간 길은 지친 몸을 추 수리는 편안한 길로 이어진다. 450봉을 넘은 후에 소나무 어우러진 잡목 속으로 빠져들면, 유순한 산등성이 짙어지는 녹음 속에 실바람 산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피곤한 몸에도 생기가 돈다. 잠시 후 25번 국도와 49번 도로가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착하면 효자마을 표방하는 상곡리 표지석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봉화산 4.6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25번 국도를 따라 화령재(320m)에 도착한다. 대간 길에 지친 산 꾼들이 쉬어가기 좋은 화령정(1990년 6월 건립)이 자리 잡고 있다. 커다란 화강암의 백두대간 화령재 표지석이 눈길을 끄는데, 길 건너 분수령을 어찌 그냥 지나치랴. 한줄기 소낙비에 금강과 낙동강으로 운명이 갈려지고 지나는 골골마다 시세풍습 달라지며, 말소리와 행동거지 딴판이라. 서해와 남해로 영영 이별을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오대산의 물줄기는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갈렸어도 양수리의 두 물 머리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이 있으니 어찌 부럽지 않으리오.
경북 상주시와 충북의 보은군으로 연결하는 국도 25번인 화령재에서 추풍령까지 55km를 중화지구대라 일컫는다. 250m에서 500m의 고도를 유지하고 있는 중화지구대는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과수농사가 잘 되는 곳으로, 비교적 높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자연재해가 적은 편이다.
화령재를 출발한 대간 길은 상주-당진을 이어주는 고속도로(2008년 12월 완공예정) 터널 위를 지나 삼백(누에, 쌀, 곶감)의 고장, 상주의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유순한 산길을 따른다. 405봉을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완만한 등로가 이어진다. 200여 m의 급경사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른 후 정상에 올라서면 돌무더기위에 세워진 초라한 윤지미산(538m)의 표지석이 반겨준다. 이산의 원래 이름은 소머리 산이라고 하지만,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윤지미산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인 된 바가 없다.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리막길에는 급경사를 이루고 판곡 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405봉에서부터 윤지미산을 경유하는 대간 길은 판곡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가는 형상이다. 437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는 유순한 등로에서 속도를 내면서 체력을 보강한다. 대간 길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지만 큰 기복 없이 달려가는 길이 동남쪽으로 선회하여, 무지개산(441m)의 정상을 올라도 되지만 사면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간다. 40여분 후 과수원을 지나 서쪽으로 30여분 진행하면 329봉에 이르고, 공동묘지가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선회하여 내려서면 팔음산 포도 홍보판이 있는 신의터재(280m)가 된다.
20. 신의터재(280m) - 큰재( 320m ) / 24.5km
신의터재의 원래 지명은 임진왜란 전까지 "신은현"이라고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어산재"로 개명되었으나.1995년 문민정부 때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준신이 의병을 모아 상주성에서 왜적을 도륙하고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을 기리고자 "신의터재"라고 지명을 바꾸게 되었다는 내용을 표지석 뒷면에 새겨 길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신의터재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내서면 낙서리에서 화동면 이소리를 오가는 지방도로인데 2차선으로 포장이 되어있고, 이곳에도 어김없이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 이정표가 서있다. 대간 길은 동남쪽으로 진행이 되며 큰 기복이 없는 마루금은 포도밭과 숲속을 드나들며 1시간동안 걷노라면, 슬 랩 지대에 도착하고 남쪽으로 백학산(615m)의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안쑥밭 골에서 남쪽으로 달려가던 대간 길은 화동면과 모서면의 경계지점을 지나며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며 남쪽으로 진행을 하다 지기재에 이른다. 그 옛날 도적의 소굴이었다고 해서 적기재라 부르던 지기재는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이다. 양지바른 언덕의 비알에는 이곳의 명물인 포도밭이 즐비하며 농로에는 시멘트 포장길이 산뜻하게 정돈되어있고, 금강과 낙동강, 분수령의 이정표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기재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묵정밭과 과수원을 지나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400고지에 오른 이후 평탄한 숲길로 연결되고 임도를 만나 포도밭 사이로 빠져 나오면 개머리 재(295m)에 이른다. 지기재 와 개머리 재는 모서면의 마을을 연결하는 지방도로로 깔끔하게 포장되어있다. 이제는 산간오지의 두메산골도 포장된 도로를 따라 왕래를 할 수 있는 풍요로운 우리의 삶이 펼쳐진다. 햇볕이 따사로운 가을 들녘, 과수원 주위를 둘러보면 까치와 산 비들기로 부터 탐스러운 과일들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처 놓은 그물망을 보게 된다. 자연보호도 좋지만 농민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된다.
개머리 재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마루 금을 따라 과수원과 숲길을 따르면 모서면과 모동면의 경계지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면의 경계선을 따라 동쪽으로 대간길이 이어지고 20여 분후 모서면 대곡리와 공성면 효곡리를 이어주는 임도를 만나 백학산(615m)오름길이 시작된다. 모처럼 만나는 오름길에서 땀을 쏟으며 올라선 정상에는 아담한 정상석이 반겨준다. 무성한 잡목으로 조망이 신통치 않지만, 모서면 대포리와 모동면 덕곡리. 공성면 효곡리가 경계를 이루는 3개 면의 꼭 지점이 된다.
백학산 정상에서 면 경계선을 따라 남쪽으로 분기한 줄기에는 성봉산(572m)이 있고 상판 저수지로 연결이 된다. 하지만 대간 길은 북쪽으로 10여 분간 진행을 하다 동남쪽으로 구부러지며 477봉까지 이어지고 지그재그로 남진하는 마루금은 숲속에 포로가 되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동물 이동통로가 있는 윗 왕실재(400m)에 도착하면 백학산 2.9km 개터재 3.7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왕실임도는 공성면 효곡리에서 외남면 소상으로 연결되는 소로이다. 시멘트포장길 중간 중간에 길이 패어나가 승용차가 다니기에는 불편한 곳이다.「국토가 숨 쉬는 곳! -여기는 백두대간」 윗 왕실임도를 가로지르는 육교에 걸린 표어의 글귀다. 동물들은 각기 그 먹이를 취하는 자신의 행동반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로나 임도를 내면서 산줄기를 끊어 절개지가 생기면서 자신들의 행동반경이 줄어들고 먹이사슬과 개체수가 줄어들어 서서히 멸종이 된다고 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육교를 만들어 끊어진 산줄기를 이어주는 방법으로, 우리의 자연을 지키려는 노력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중화지구대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큰 기복이 없는 개활지대로 광활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리기다소나무가 무성한 숲속에는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오고, 463봉을 지나며 남쪽으로 대간길이 구부러진다. 지루하리만치 평탄한 길을 따라 505봉에서 서쪽으로 진행을 하면 개터재(350m)에 이른다. 개터재는 효곡리 사람들이 인근의 개터골에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공성면 효곡리와 봉산리를 이어주는 개터재 밑으로는 상판저수지 물을 상주 삼남(청리, 공성, 외남)평야의 농업용수로 돌리기 위하여 뚫은 지하수로가 지나고 있다.
개터재에서 마루금은 서남쪽으로 이어지고, 460봉 오름길에서 왼쪽으로 우회로를 따라 산허리를 감아 돌아 남쪽으로 30여 분간을 진행하면, 공성면 봉산2리 회룡 마을에서 봉산1리 골가실을 넘나드는 회룡재(340m)에 도착한다. 개터재 1.7km 큰재 3.9km의 이정표가 반겨주는 쉼터는 대간 길에 지친 몸을 쉬어가기에 좋은 곳이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30여분을 진행화면 목장지대가 나타난다. 회룡 목장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이어지는 대간 길을 따라 한 동안 진행하다 숲을 빠져나오면 임도에 이르고, 곧 이어 회룡 목장의 이정표가 자리 잡고 있다. 30여 분후에는 우하재로 불리는 큰재(320m)에 도착하며 또 한 구간을 마감한다.
21.큰재( 320m) - 추풍령(221m ) / 17.7km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평한 곳이 공성면 옥산리와 모동면을 오가는 68번 국도와 920번 지방도를 겸하고 있는 표고 320m의 고개 마루인데, 상주 읍내에서 바라보면 제법 높아 보이는 고개라 하여 큰 재로 부른다고 한다.
정상에는 폐교된 인성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인성초등학교는 백두대간 선상에 있는 유일한 학교로써 1947. 7. 1 설립 되었으나, 최근 도시화와 산업화에 밀려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노인들만 고향을 지키다보니,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어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나마도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어 5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7년3월1일 폐교가 되어 지금은 부산녹색환경연합에서 임대하여 생태학교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변화무쌍한 세월 따라 격세지감을 느끼며, 언젠가는 학생들이 다시 돌아올 날을 기대하면서 쓸쓸히 대간을 지키고 있다.
국수봉 3km, 회룡재 3.9km, 공성면 5.3km, 모동면 12.5km의 이정표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대간 길은 박례분 할머니의 집 뒤로 이어진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가면 이곳의 지대가 상당히 높은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우측으로 남실마을과 중남마을의 전답이 펼쳐지고 좌측으로는 능선과 골짜기가 길게 뻗어 내린 경치를 감상하면서 475봉을 지나 완만한 분지 도착하면 자작나무들의 군락지를 지나 전망바위에 오른다.
가파른 경사면을 20여 분간 치고 오르면 국수봉(790m) 정상이다.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615m). 서산(509m). 기양산(469m). 갑장산(806m). 묘함산(733m). 황악산(1.111m).민주지산(1.241m)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백두대간 줄기인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이 된다고 한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정상은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어 국수(菊水)라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정상을 내려서면 우측으로 충북 영동군 웅북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청화산에서부터 손잡고 달려온 상주시와도 아쉬운 작별을 한다. 김천시와 접경을 이루는 전위 봉에 오르면 남쪽의 발치 아래로 그 유명한 용문산 기도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1950년 나운몽 목사가 건립한 한국 최초의 기도원으로 50여 만 평의 너른 분지 안에는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실버타운을 조성하고 있다고 하니, 몸과 마음이 병든 환자들의 안식처라고 할 수 있겠다.
용문산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암릉 구간이 발목을 잡고, 가파른 경사면을 치고 오르면 앙증맞은 정상석이 반겨준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은 오늘의 구간 중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서북쪽으로 백화산(933M)이 하늘 금을 그으며 그 앞으로 지장산(772m)이 우뚝한데, 서남쪽으로 추풍령 고개 너머로 눌의산(743m)의 자태가 아련하다. 남쪽은 대간의 능선을 따라 묘함산(733m)으로 이어진다. 동쪽으로 백운산(618m), 북쪽에는 국수봉(683m)과 상봉산(572m)이 사방팔방 막힘없이 펼쳐진다. 발아래로 후미진 산골마을에 여느 면소재지보다도 화려한 도시가 형성되어 있으니 용문산 기도원이다.
정상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완만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687봉에 이르면, 큰 특징이 없는 정수리에 잡목만이 무성하다. 남쪽으로 구부러진 대간 길은 경사심한 비알 길로 이어지고 바람결에 휘날리는 억새의 춤사위를 뒤로하고 전망 좋은 헬기장에 오른다. 이름 모를 도사의 기도처인 움막을 지나 갈현고개(360m)에서 정면에 바라보는 무좌골산이 높아 보이지만 큰 어려움 없이 정수리에 올라선다. 이곳의 전망 또한 일품으로 정면으로 묘함산과 우측으로 눌의산이 아스라이 바라보이고 이어지는 대간길이 추풍령 저수지를 품에 안고 돌아간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거칠 것이 없고 2차선으로 포장된 작점고개(350m)에는 아담한 정자와 함께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영동의 추풍령면에서 김천시의 어모면으로 넘나드는 이 고개는 충청도 사람들이 고개 너머 경상도 땅에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기에 여덟 마지기 고개라 불려오고 있다는데, 백두대간 종주 팀들에 의해 작점고개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남쪽의 절 개지를 치고 오르면 가족묘지가 나타나고, 10여분 후에는 묘함산 중계소를 오르는 비상도로(콘크리트 포장)를 따라 좌측으로 신애원 농장과 김천노인 병원을 바라보며 숲속으로 들어선다. 묘함산으로 이어지는 정상은 대간 길에서 빗겨 나있고 우측으로 비알 길을 내려서면 조금 전의 비상도로와 만난다. 10여 분간 비상도로(500m)를 따라 오르면 군부대와 송신소가 있는 정상이다. 김천시의 너른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제1급의 조망 터가 전개된다.
대간 길은 비상도로에서 서쪽의 숲속으로 진입하여 사기점고개(390m)로 내려선다. 좌측의 상금농장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는 고향의 향수를 일깨우는 청량제로 발걸음이 빨라지고, 무명봉에서 서북쪽으로 선회하여 435봉을 지나 502봉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지나온 작점고개가 지척이라. 국수봉에서 시작되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선 따라 대간 길이 묘함산까지 칼끝처럼 뾰족한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산줄기의 마루 금을 따라 행정구역이 정해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을 해본다.
백두대간을 찾는 건각 중에 홀대모의 어느 산객이 지리산의 천왕봉에서 199.79km가 되는 지점에 200km 표지 목을 세우는 정성으로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대간 길을 열어가는 산 꾼들의 지친 몸에 용기를 불어넣고,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며 종주의 꿈을 실현해가는 가상한 일이 아닌가 싶다. 오르락내리락 무성한 숲속을 달려가는 산객들의 행보가 빨라지고 가파른 비알 길을 치고 오르면 수 십 길 단애를 이룬 금산(384m)의 정상에 올라선다.
대간 마루금의 반쪽을 칼로 도려낸 듯 무참하게 파헤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고, 살점 뜯긴 자병산이 무색하게 통째로 사라질 판국이다. 고속철도 공사에서 골재를 채취하는 현장으로 비운을 맞고 있는 금산은 정상까지 100여m가 넘는 수직벼랑으로 절개되어 모골이 송연하고, 아슬아슬하게 마루 금을 따라 철조망을 내려서면 포도밭의 둔덕이 된다.
오순도순 살아가는 시골마을이 둘로 갈리어 경상도의 김천시와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뉘고, 고개 마루 작은 배나무 밭이 끝나는 자리에 청풍명월의 고장이라는 표지석이 우리를 반긴다. 구름도 쉬어 넘는 추풍령고개는 묘함산(卯含山:733m)· 눌의산(訥誼山:743m)· 학무산(鶴舞山:678m)의 높은 산에 둘러싸인 221m의 낮은 언덕에 불과한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괴산군의 조령, 영동군의 추풍령, 단양군의 죽령 등을 통하여 소백산맥을 넘었고, 이 가운데 대표적 관문이 조령이었다. 그러나 1905년 추풍령에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넘나드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 일대는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이 조령까지는 높고 험한 장년기 산맥으로 이어지고, 조령에서 추풍령까지는 낮고 평탄해지다가 다시 높아지는 지형적 특색 때문에 교통의 요지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정기룡장군이 용맹을 떨치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금강의 지류인 추풍령천이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황간면으로 이어지고,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이 남쪽 사면에서 발원한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대전-김천을 잇는 국도가 이 계곡을 통과하며, 남쪽에는 추풍령역과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이 휴게소는 식당을 비롯한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곳에서 서울 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서울-부산 간의 절반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