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금북정맥 7 부: 부용지맥
부용지맥 /43.1km
부용지맥은 한남금북정맥 상의 보현산(483m)에서 분기해서 사정고개 - 부용산(644.3m) - 수레의산(678.8m)을 지나며 북쪽으로 이어가다,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승선고개 - 매방채산(375m) - 자주산(483.6m) - 평풍산(395m) - 삼봉(276.6m)을 지나 요도천이 남한강에 합수하면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3.1km의 지맥이다.
부용지맥의 수례의산을 지나서 그대로 북으로 뻗어간 또 하나의 능선은 행덕산(447m)-원통산(655.6m)-오갑산(609.4m)-마골산(250m)-봉우재를 지나서 청미천이 남한강으로 합수하는 도상거리 30.2km의 능선이 있는데 이 능선을 편의상 원통지맥이라 하고, 원통산(655.6m)을 지난 질마재에서 다시 동쪽으로 분기한 능선은 승대산(567m) - 국망산(769.5m) - 보련산(764.4m) - 쇠바위봉(593.5m) - 국사봉(480m) - 무쇠봉(370.8m)을 일으킨 후 한포천이 남한강으로 합수하며 그 맥을 다하는 비교적 큰 산들로 이루어진 이 능선을 국망지맥이라 한다. 또한 부용지맥의 사정고개와 부용산 중간 지점 능선에서 음성천과 요도천을 가르는 음성의 최고봉인 가섭산(709m), 어래산(393m), 고양봉(525m), 풍류산을 지나 달천에 닿는 가섭지맥이 분기한다.
음성에서 택시로 약수터 고개까지 이동한 다음, 정맥의 종주 길을 따라 10여 분간 올라서면 산불 감시초소가 있는 보현산(483m)정상이다. 소나무 그늘아래서 주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펼쳐진다. 음성군 최고봉인 가엽산(가섭산709m)과 부용산(644m)의 지맥이 음성의 분지를 감싸고 37번 도로가 정맥을 따라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정맥은 북쪽으로 부영지맥은 동쪽의 감우재(385m)로 내려선다.
고개로 내려서면 GS주유소와 전승 탑, 기념관, LG텔레콤 송신탑, 부영지맥 능선과 보현산 등산안내판이 보인다. 37번 도로는 일반도로와 4차선 고속화도로가 함께 가는데, 고속화도로의 지하도를 빠져나와 전승기념관으로 들어간다. 초산부대(6사단)는 감우재 전투에서 우리국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두고 압록강에도 가장먼저 진격한 부대라는 설명이다.
1950년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첫 승리를 올린 곳으로, 7월 5일 6사단 7연대 장병들은 무극에서 음성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군을 소여리 부근에서 격파했으며 이어 진지를 인수한 국군 제1사단 11연대가 8, 9일 연달아 소여리 감우재 마루턱에서 재차 적군을 크게 무찔렀다. 상대는 북한군 15사단으로 중부지역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일시 지연시킴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어느 정도 갖게 됐으며 더 중요한 것은 6·25전쟁 발발 이후 그렇게 목말라하던 승전고를 크게 울렸다는 사실이다 -기념관에 대해서-
기념비 뒤 산책로를 들머리로 고개에 올라선 다음, 소나무 숲이 무성한 능선으로 오른다. 정수리에서 동북방향으로 평탄하게 이어지는 숲길에는 낙엽이 채이고, 감우재를 출발한지 30여 분만에 삼각점이 있는 385.3봉에 도착한다. 조금 진행하면 370봉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부용산은 너무도 아름답고 지나온 보현산의 산불감시초소까지도 보인다. 사정고개로 내려서는 길에는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왼쪽의 안감우재 마을로 내려서는 갈림길을 지나면 굴참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철망을 우측으로 끼고 북쪽으로 비알 길을 내려서면 임도삼거리인 사정고개에 안착한다.
사정고개는 사정리와 용산리를 넘나드는 지맥의 마루 금인데, 왼쪽 계곡은 안말에서 수레길을 따라 사정고개까지 연결이 되고, 오른쪽은 용산리 새터에서 올라오는 자동차가 다닐 정도의 넓은 임도로 염소목장 건물이 보인다. 정면으로 마루금과 나란히 자동차가 다니는 임도가 뻗어있지만 능선으로 올라서야 한다.
능선으로 올라서면 염소사육장 철조망에 경고문이 붙어있다. 잠시 후 철조망을 뒤로하고 북동쪽으로 틀어 오르는 비알 길은 경사가 심하여 가쁜 숨을 몰아쉰다. 482봉에 올라서면 왼쪽계곡으로 사정리 통벵이 마을이 보인다. 부용산을 오르는 동안 마을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가는 형국이다. 이곳이 가섭지맥과 부용지맥의 분기점이다. 그저 평범한 능선일 뿐이고, 북쪽으로 잠시 올라서면 숫고개 삼거리에 도착하며 ←정상2.4km ↓삼성목장1km →궁도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다. 정상은 부용산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에서의 조망이 압권으로 북서쪽으로 사정리와 무극저수지, 그 너머로 금왕읍이 보이고, 동쪽으로 통신 안테나가 숲을 이루는 가섭산의 모습도 선명하다. 서서히 북서쪽으로 기수를 돌리는 지맥이 503봉을 지난다. 음성군과 충주시의 경계를 따라 진행되는 지맥은 낡은 비닐움막을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318번 도로가 내려다보이고 금강공업회사가 있는 곳이 무수골이다.
안부4거리에는 나무에 고추4개를 엮어 만든 모양의 무수막 쉼터라는 이정표가 걸려있다. ←정상0.9km ↓사정리0.5km ↑무수막1.2km →궁도장3.1km의 안부에서 부용산의 정상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지만 가파른 비알 길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해서 정상을 오르기 위한 체력의 안배로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부용산을 오르는 일반등산로인 무수막 쪽으로 리본들이 많이 달려있다.
보기보다는 경사가 심하여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가는 길이 험하다 해도 지맥을 찾아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호기심과 성취감, 넘치는 희열로 엔돌피가 솟아나기에. 숨을 헐떡이며 비지땀을 쏟는 중에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노송의 그늘아래 시원하게 터지는 전망대는 피곤한 몸을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지나온 능선들과 보현봉이 파노라마를 이루고, 왼쪽으로 무극저수지와 대소면의 너른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오른쪽으로 무수리를 품에 안은 선지봉이 선명하다.
오름은 계속되고 전위봉의 안부에 올라서며 완만한 지릉길이 이어진다. 苦盡甘來(고진감래)가 실감나는 부용산(644m)정상에는 3개의 각기 다른 정상석과 정상을 찾은 이들의 사인을 받아두는 철제함, 등산로안내판과 삼각점(304복구 769 건설부)이 있다.
부용산(해발644.4m)은 금왕읍 육령리와 음성읍 사정리 및 생극면 오생리,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가섭산과 접하고 있으며 산형이 부용(芙蓉)처럼 생겨서 부용산이라 부르고 있다. 남으로는 사정고개를 경계로 북으로는 완만한 구릉을 지나 오생리 농경지대와 연결되며 용대골과 황새골을 흐르는 물은 금석저수지의 수원을 이루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요도천으로 남쪽의 물은 음성천으로 서쪽의 물은 응천으로 유입하지만, 끝에 가서는 모두 한강으로 합류된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뚜렷한 길을 따르면 생극면 육령리와 무극저수지로 가는 일반 등산로이고, 지맥은 오른쪽으로 2시 방향이다. 정상에는 육령리 2.9Km, 용산리 3.85Km의 이정표가 있다. 북동쪽으로 내려서는 마루금이 뚜렷하기는 하지만 급하게 내려서는 사면 길에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묘 2기가 나오는 안부에서 왼편으로 가야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루는 능선에서 진행할 마루금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잠시라도 방심을 한다면 각도가 점점 벌어지고 되돌아오는 길이 험난하여 돌이킬 수없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우리네 인생길도 기로에서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역정의 길을 걷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닌가?
곳곳에 나무들을 간벌해서 방치해놓아 걷기가 불편하지만, 지형지물을 판단하기가 수월하여 숨통이 트인다. 군경계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왼쪽이 생극면 오생리이고 오른쪽이 신니면 광월리가 된다. 마을이 가까워 오며 야산의 능선에는 묘들이 점점 많아진다. 또 묘가 나오면서 오른쪽으로 집이 보이고, 왼편에도 농장 같은 집이 있는 4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이웃집을 오가는 마을길을 뒤로하고 능선으로 붙는다.
304봉에서 10시 방향으로 휘어져 내리면 오른쪽으로 빨갛고 파란색 지붕의 큰 공장이 내려다보인다. 10여분을 진행하면 지도상에 삼각점이 있다는 294봉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왼쪽전면으로 연립주택과 높은 굴뚝이 있는 경남알미늄 공장이 보이고 그 앞으로 3거리, 오른쪽 전면으로 빨갛고 파란 지붕의 큰 공장이 가까이 보인다. 완만하게 휘어져 내려서면 왼쪽으로 이동통신 안테나가 있고, 오른쪽으로 빨갛고 파란 지붕의 공장 뒤, 배수로를 따라 넓은 수레길로 이어진다.
3번국도가 지나는 못 고개에 안착한다. 고갯마루에는 못고개 표지석과 붕어 해장국 간판이 있고, 신호등이 있다. 전면으로 300m지점의 갈림길을 알리는 신니 동막 과 충주 주덕의 간판이 보인다. 내 고향이 주덕이고 보니 이곳에서 10km 거리이고, 어린 시절 3번 국도를 따라 서울 구경을 한 것은 코 흘리던 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의 위세에 눌려 빛을 바랜지 오래이지만, 3번 국도야 말로 1번 국도와 함께 우리나라 국토의 근간을 이루는 축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경상남도 남해군 해조면에서 북으로는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까지 연결된다. 남해군 해조면 - 사천 - 진주 - 산청 - 함양 - 거창 - 김천 - 상주 - 문경 - 충주 - 주덕 - 장호원 - 이천 - 광주 - 성남 - 서울 - 의정부 - 동두천 - 전곡 - 연천 - 철원을 지나 휴전선까지의 길이가 555.2㎞에 이른다.
주덕에서 생극까지 4차선 고속화 도로가 앞을 가로막기 때문에, 우회로를 찾기 위해서는 못 고개의 도로를 건넌 다음 오른쪽으로 300여 m를 진행하면 고속화도로의 굴다리를 통해 무사히 건널 수가 있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주)윈텍, 한국담배주식회사, 운정휴계소를 가르키는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가면 절개지 뒤로 또 다른 공사 현장이 나타난다. 음성과 충주시의 경계선인 290m봉에 올라선다. 요즈음은 시 경계 걷기가 붐을 이루는 탓인지, 길이 제법 잘 나있다.
좌우로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는 안골고개로 내려선다. 이후 길은 더욱 희미해지고, 울창한 참나무의 숲속에 빠지고 만다. 키 큰 나무아래 작은 나무들이 층층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모습은 공생공존의 자연의 법칙이 아닌가싶다. 큰 인물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큰 소나무아래는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고, 잎이 무성한 참나무 속에서는 소나무가 견디지 못한다는 것도 자연의 법칙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주위에 펼쳐지는 시야가 넓어진다. 왼쪽으로 저수지가 보이는 그린위에 체육관 같은 돔이 시선을 끈다. 동부컨트리클럽의 골프장이다. 수레의산 서남쪽으로 너른 분지가 모두 그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그린이 장관을 이룬다. 산은 점점 가파르게 전개되고,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삼거리 갈림길인 530봉에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회문 저수지와 화계산(381m)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정상을 목전에 둔 오름길은, 코에서 단내가 나도록 심한 경사로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정상이 가까워 오며 연륜을 자랑하는 송림들이 무성한데, 말끔하게 간벌 한 것까지는 잘한 일이지만 뒤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진행하는 데 여간 고역이 아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해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곳이 없지 않은가? 부용지맥에서 가장 높은 수레의산(679.4m)의 정상에 올라선다. 아주 옛날 천지개벽으로 정수리가 수례만큼 남았다는 전설에 따라 수레의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2개의 정상석과 삼각점, 이정표와 산행안내도, 기상측정용 백상자까지 구색을 갖추고 있다. 조망이 시원하게 터지는 작은 광장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힘들여 올라온 보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먼저 남쪽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지맥이 용트림하는 끝자락에 부용산(644m)이 선명하고, 왼쪽으로 가섭산(709m)이 음성군 제일의 고봉답게 하늘 금을 이룬다. 동남쪽으로 산자락을 파고드는 육지속의 너른 호수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름 하여 신덕 저수지, 신니면과 주덕읍의 글자를 인용하여 만든 저수지는, 요도천을 품에 안은 주덕 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젖줄이다. 저수지가 별로 없던 시절에는 충주까지도 물길이 흘렀다고 하니 이고장의 생명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어린 초등학교 시절. 제대로 소풍을 갈만한곳이 없는 탓에, 8km가 넘는 신덕저수지까지 고생고생하며 다녀간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동쪽으로는 앞으로 진행될 지맥의 주능선이 살아 움직이고, 북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원통지맥과 국망지맥의 연봉들이 장관을 이룬다. 삼년 전에 올라왔을 때는 없던 이정표가 우리의 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헬기장 600m /묘구재 2.3Km는 동부 골프장으로 내려서는 서쪽 길이고 B코스 1.1Km /C코스 1.9Km는 지맥과 원통지맥으로 가는 동쪽 길, 우리가 지나온 남쪽 길을 충주방향 폐쇄라 적고 있다.
산이라는 것이 올라올 때는 힘이 들지만, 일단 정상에 올라서면 평지와 비슷한 완만한 능선을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다. 널널하게 이어지는 지맥을 따라 659m 봉에 올라선 뒤, 비슷한 높이의 봉을 지나면 3거리 갈림봉에 이정표가 있다. 정상 320m, 왼편 B코스 780m, 우측 병풍바위 520m라 적고 있다. 병풍바위 앞에 도착하면 허물어진 성벽 같은 돌들이 보이고 채석장처럼 수직단애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왼쪽 길은 상여바위, 전설의 샘을 지나 행덕산-원통산-승대산-국망산-보연산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마루금으로 시경계선을 따르게 된다.
진행할 부용지맥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내려서야 하지만, 단애를 이룬 수직절벽이 있어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다. 고도차 150여m를 내려서면 안부에 잘록한 재가 나온다. 신니면 회문마을과 노은면 법동리를 잇는 고개인데, 세월 따라 찾는 사람도 없이 낙엽 속에 흔적도 뭍이고 만다. 병풍바위 있는 분기봉에서 지맥은 면경계선을 따른다.
500봉에 올라서면 삼각점(건설부 432, 74.10복구)이 있다. 웃고개 까지는 아주 편안한 길이 진행되지만 양옆으로 경사도가 심하여 멀리서 보면 가파른 봉으로 보인다. 36번 고압선 철탑이 있는 봉에서 내려선 안부에는 아주 큰 바위가 있고, 주변에는 온통 참두릅 밭이다. 좀 더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화계산으로 내려서는 남쪽길은 흔적만 남아있고, 왼쪽으로 90도 꺾어 내려선다.
법동리 양지말과 문승리 승선마을이 왕래하던 웃고개에 도착한다. 고개를 넘나들며 올려놓은 돌무더기의 흔적이 있는 널찍한 공터에는 쉼터로도 안성맞춤이다. 373봉을 지나면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는 능안고개에 안착한다. 신니면 문승리와 노은면 법동리를 이어주는 한적한 도로에는 통행량도 별로 없고, 건너편에는 전주이씨 가족묘들이 있다. 이곳에서 가섭산이 선명하게 잘 보인다. 이후로 지맥을 이어가는 동안 가섭산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바다를 항해하는 북극성처럼 가는 길을 밝혀준다.
묘를 뒤로하고 능선으로 올라서면 길이 나오고, 왼편으로 휘어지면서 377m봉에 오른 다음 제일 높은 곳에서 왼쪽으로 꺾여 내려간다. 419m봉에서도 왼편으로 살짝 내려서면 11시 방향으로 동물들이 다니는 길을 만나고 길은 점점 넓어진다. 안부에 내려서면 북쪽으로 국망산(769m)이 잘 보인다. 갑오경장때 명성황후 민비가 국망산 아래 마을로 피신해와 그 산에 자주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며 슬피 울었다하여 국망산이라 했단다.
진행하는 지맥이 300-400여 m로 주위의 지형에 비해 높고 단순하여 주능선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별로 없다. 314봉을 지난 후 잘록이재에 도착한다. 지금도 간혹 오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발자취가 남아있는 잘록이는 북쪽의 새터마을과 남쪽의 장터마을 을 이어주는 중요한 길목이다. 충주 음성간고속도로 공사현장을 빠져 나와 전방의 덕고개에 있는 파란지붕 공장건물과 그 뒤로 3각형으로 보이는 매방채산을 겨냥해서 가야한다.
매우 높은 절개지위에 서면 아래로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내려다보이고, 도로건너편으로 규모가 큰 공장이 보인다. 도로변에는 덕고개 비석이 있는데, 신니면 소재지인 용원리와 노은면 소재지인 문성리를 연결하는 덕고개는 옛날 이 고개 밑에서 예승인이 도를 닦아 큰 덕을 입은 후로 덕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부터 부용지맥에서 가장 험난하고 어려운 코스를 통과해야한다.
도로 건너편으로 (주)용암 공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매우 넓다. 진입로인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면 철조망에 감시카메라까지 설치되어있다. 지맥은 수도 시설이 있는 능선이지만 군부대보다도 견고한 장벽 앞에서 펜스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서고, 길도 없는 비알 길에서 고지를 탈환하는 병사들처럼 무모하게 기어오른다. 능선 너머는 (주)용암 공장 뒤편으로, 굉음소리와 함께 골짜기 전체가 뿌연 분진이 가득 차 있다. 싱그러운 공기 마시려고 찾아온 산에서 매연과 사투를 벌인 40여 분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능선을 넘어 안부에 도착하면 수종개량을 위해 벌목을 한 자리에 잣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옥문을 넘나들며 수행한 덕분인지, 375m의 매방채산도 거뜬하게 올라서지만, 실망스럽게도 아무런 표시가 없다. 조망만은 그런대로 확보가 되어 노은면소재지와 그 주변의 산촌마을이 그림같이 자리 잡고,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달리는 뒤편으로 보련산이 멋진 자태를 보인다. 또한 남쪽으로는 신니면과 주덕읍의 면경계선인 남산(404m)과 407봉이 내려다보이고, 이곳에서 지맥은 동남방향으로 진행한다.
왼편에서 올라오는 넓은 길과 만나는 3거리에 왔다. 곳곳에“충주밤”을 알리는 노란 리본이 바람결에 나부끼고, 임도와 산책로가 나란히 동행한다. 291m봉을 지나고, 367m봉 직전에서 임도는 우측으로 휘어진다(임도는 407m봉과 남산 사이 안부로 넘어간다). 왼쪽의 산책로를 따라 367m봉을 우회하면, 경사가 서서히 높아지며 면 경계선인 405봉에서 신니면은 주덕읍에 바톤을 넘겨주고 왼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잠시 후에 돌탑이 있는 407봉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주덕읍의 너른 평야가 황금물결을 이룬다. 좌우로 넓은 길이 있는 우리재를 지나 자주봉을 향한 완만한 오름이 시작된다. 431m봉에서 넓은 길이 왼쪽으로 내려서지만 자주봉은 오른쪽길이다. 평평한 공간이 있는 자주봉(483.6m)에는 3각점(76.9 건설부)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 왼쪽의 길을 버리고, 지맥은 직진으로 낮은 봉을 지나며 급경사로 내려선 뒤, 오른쪽으로 휘어지다 왼쪽의 너덜지대를 통과한다. 잠시 후 리본이 있는 오른쪽계곡을 버리고 길이 없는 능선을 따른다.
2차선 도로가 지나는 솔고개를 일명 덕련리(220m)고개라 부른다. 표지석 옆으로 보이는 이정표에 주덕읍이라는 간판이 눈길을 끈다. 꿈에도 잊지 못하는 내 고향. 고개를 내려서서 4km를 가면 고향집이다. 고향을 다녀 올 때마다 넘나드는 곳이기에 정감이 가는 곳.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북 충주 인터체인지가 고개 너머 노은면 쪽으로 신효리에 생긴 이후로는 더욱 편리하게 이용을 하고 있다.
길을 건너 공장의 오른쪽으로 절개지를 올라선다. 사람이 쉽게 오를 수 있는 야산에는 산딸기를 비롯해 산초나무, 찔레나무, 칡넝쿨에 다래 넝쿨까지 앙살 맞은 가시를 앞세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데, 볼품없고 쓸모없는 이 나무들이 숲을 지켜주는 첨병이라고 하니 오묘한 자연의 이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평탄하고 완만한 길에서 주위를 돌아보며 여유로운 사색에 잠겨본다.
258봉을 지나며 왼쪽으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노원C.C의 그린이 소나무 사이로 내려다보이고, 골퍼들의 외치는 소리도 가까이서 들려온다. 이후 삼각점이 있는 햇골산(321m)을 지나고, 340봉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선회 한 뒤, 정상부가 밋밋한386.6봉에서 3각점(442건설부, 76.9 재설)을 확인하고, 갈림길을 지나 잘록한 안부에 도착할 때 까지 골프장의 너른 그린이 이어진다.
312m봉을 완만하게 오르면 갑자기 전면이 확 트이고 밤나무 단지가 전개된다. 북쪽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북충주 I.C가 내려다보이고, 노은면의 좁은 분지를 경개로 보련산(764m)과 쇠바위봉, 국사봉(480m)으로 이어지는 국망지맥이 병풍을 두른 듯, 동쪽으로 힘차게 달려간다. 먹법골밤 농원의 경고문이 있는 질루마재는 나와는 또 다른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일명 매남고개로 불리는 이곳은,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덕련리 고개로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던 시절에는 노은면과 주덕읍을 왕래하던 지름길이다. 지루하고 힘든 20리 길을 넘어야 하기에, 노은면 수룡리에 사시던 큰 고모님 댁으로 세배를 다니며, 노은면 쪽으로 쇠음달의 사면 길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고생하던 생각이 엊그제 같기만 하다. 밤 수확기에만 사용하는 빈집이 있는 고개를 지나 밤나무 밭을 왼편에 두고 숲과의 경계인 농로를 따라간다.
밤나무단지가 끝나고 숲속으로 들어선다. 서서히 경사가 높아지며, 한 바탕 진땀을 흘린 후에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병풍산(395.6m) 정상에 올라선다. 억새와 잡목이 있는 공터에 낡은 삼각점이 있지만, 이곳이 나에게는 아주 귀중한 곳이다.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화곡저수지 아랫동네가 고향 마을이다. 12대조 할아버지께서 터전을 잡으신지 350여년, 그 후로 대대로 뼈를 묻어온 고향을 한시 인들 어찌 잊을 수 있으리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211번지 여의래 음지마을은, 백두대간이 속리산의 천황봉에서 한남금북정맥으로 분기하여 음성지방을 지나는 중에 보현산에서 지맥을 이루어 이곳에 이르렀으니, 병풍산의 정기를 받아 마을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너무나도 시원하게 터진다. 남쪽으로 화곡 저수지를 중심으로 주덕읍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선명하고, 충주시내와 월악산의 영봉이 개구리 머리와 같이 하늘을 향해 도약하려는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
동쪽은 충주댐을 지나온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4대강 살리기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가흥창이 내려다 보인다. 북쪽으로 노은면과 가금면의 경계를 이루는 을궁산(394m)이 분기하고 건너편으로 무쇠봉(371m)이 지척에서 손짓한다. 또한 서쪽으로 지금까지 걸어온 지맥의 마루금이 힘차게 맥박을 이어가고, 부용산과 가섭산의 정기가 주덕의 너른 뜰을 굽어본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려서는 비알 길은, 로프가 아니면 통과하기 어려운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잘록하게 내려선 안부가 송사재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예전에는 주덕 사람들이 땔나무를 하기위해 넘나들던 곳이다. 다시 한 번 고도를 높여 올라선 곳이 송수산(403m) 정상이다. 가금면 매봉 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이 반겨준다.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이 보인다.
중원고구려비: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그 기념으로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송수산에서 지맥은 동남쪽으로 진행하며, 황무지처럼 온산과 계곡을 파헤친 현장이 내려다보인다. 송수산에서 내려오는 기슭에는 폐 광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곳은 금을 채취하던 광산으로, 그리 깊지 않은 굴이 있는데, 6.25전쟁 때 마을 사람들이 피신하던 곳이라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남는 곳이다. 내려선 안부가 갈골 고개다. 지금이야 오가는 사람이 없어 흔적조차 찾기 힘든 곳이지만, 그 옛날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던 시절에는 청주와 음성에서 오는 보부상들이 한양으로 가는 한강의 나루터인 가흥 창으로 가는 길목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안부에 내려서면 너른 분지에 마루 금을 분간하기도 어렵고, 부근의 공동묘지에는“충주 기업도시 개발사업지구내 편입”이라 쓴 분묘이장권고 팻말이 보인다. 이곳부터 210만평의 도시개발사업지구가 시작되며 공사현장의 중심부를 통과해야 한다. 화곡저수지에서 올라오는 배나무골과 쉰배미골이 도시의 중심이 되고 동쪽으로 충주 휴게소가 자리 잡고 있다.
충주농고 실습장을 지나면 주덕읍과 이류면, 금가면의 3면 경계지점이다. 이곳에서 지맥은 이류면과 금가면의 경계를 따르게 된다. 경계지점에서 남쪽으로 1km 거리에 선산이 있는데, 기업도시에 편입은 되지 않았지만, 진입도로가 지나는 관계로 조상님의 분묘를 이장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한동안 능선을 완만하게 따라 오르면 정상의 구분이 어려운 276m봉을 지난다.
아름다운 산과 계곡이 중장비의 굉음소리에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桑田이 碧海로 바뀌는 중심부를 지나는 고역을 뉘 알리요. 오른쪽으로 감지되는 봉우리가 264.6m. 삼각점(410재설 78.9 건설부)을 확인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동통신 시설물을 지나 599번 도로에 내려선다. 차량 왕래가 빈번한 도로 왼편으로 법고개라 쓴 표지석과 금가면의 이정표가 있다. 옛날 이 부락에 뻣나무가 많아 부락이름과 함께 고개이름을 뻣고개라고 부르다 발음이 변하여 법고개로 부른다고 한다. 이류면 대소리와 가금면 탑평리를 오가는 599번 지방도로인 법고개에서 북쪽으로 3km 거리에 국보 제6호로 지정된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이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된 이탑은, 높이 14.5m의 화강석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탑이다. 1917년 보수 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 장치가 나왔고, 6층 몸돌에서는 경감(鏡鑑) 2매, 칠합(漆盒) 1개, 은제사리병(銀製舍利甁)과 그 안에 들었던 유리제 사리병 각 1개씩이 발견되고, 기단에서는 청동제 유대합(有臺盒) 1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 경감은 고려시대의 거울로서 창건 이후 두 번째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탑은 한국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하여 중앙탑이라고도 부르는데, 신라 원성왕대에 세워진 것이라고 전한다.
도로를 건너 개발지 가장자리의 시멘트 배수로를 따라200여m 가면, 왼쪽으로 폐기물 공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사시대의 유물발굴현장이 보인다. 길도 없는 가시덤불을 헤치며 올라선 안부는 고속도로가 관통하는 가금터널 위가 된다. 시원하게 달리는 차량들의 굉음소리를 뒤로하고 밤나무 단지와 나란히 동행하는 수레 길을 따른다.
성황당 흔적이 보이는 일곱실 고개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고속도로도 점점 멀어지고 한티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오래된 헬기장이 있는 290m봉에 오르면, 지도에도 없는 3각점(충주 414, 2003년 재설)이 보이고 지맥은 남쪽으로 진행한다. 284봉, 281봉을 지나, 밤고개 안부에 도착하면 철조망을 두른 야산이 이어진다. 283봉, 261봉, 278봉을 지날 때 까지 지루하게 동행하던 철조망과 작별을 한다. 하지만 288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하면 또 다시 철조망이 나타난다.
삼각점이 있는 삼봉(276.6m)에 올라서면 철조망도 사라지고, 남한강과 충주 시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263봉을 지나고, 248봉에서 직진하면 암릉이 나타난다. 암릉을 우회하여 능선으로 오르면 237봉이다. 암릉으로 된 작은 봉에서 오른 쪽으로155m봉과 그 뒤의 158m봉을 지나야 요도천이 남한강에 합수하는 하검단 마을에 도착하지만, 지맥의 마루금이 도로공사 중이라 접근을 할 수가 없어 포기를 하고 공사장으로 내려선 다음 금강사가 보이는 수레길을 따라 82번 도로에 나오면 금가대교 건설현장 아래 버스정류장이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의 탄금대를 건너다보며 부용지맥도 종지부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