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세계/시와산 계간지.2

제 63 호 -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가?

김완묵 2009. 9. 5. 07:25

 

                           흑성산(519m) 시산제


 

오늘은 제 16회 정기총회에서 새로이 출범한 전 호영 회장이 시산제를 올리는 첫 행사로 의미가 깊은 날이다. 하늘도 우리의 행사를 축복함인지 화창한 5월의 햇살아래 고속도로를 신나게 질주한다. 봉고차도 다 채우지 못하는 7명의 회원들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어난다. 하지만 버스를 대절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가던 옛 영화를 들춰내면서 우리 모두 숙연한 마음으로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시류의 변화에 따라 소슬한 가을바람에 낙엽 되어 떨어지듯, 하나둘 우리의 곁을 떠나고 이제 남은 인원이 20여명으로 줄어들고 말았으니 암담하기 그지없다. 산악활동에서 얻어진 고귀한 성취와 업적을 산악문학으로 형상화 해냄으로써 풍요로운 문학적 성과를 거둔다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1994년 2월 26일 7명이 뜻을 같이하여 발기한 詩山. 사시사철 계간마다 회원들의 주옥같은 시편들을 발표하는 동안 전국의 동인들이 모여들어 50여명이 넘는 회원들의 활동무대로 200여 쪽이 넘는 문예지로 거듭 태어나 전국의 유일한 山 문학지로 각광을 받았었다.


예로부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재물과는 거리가 멀어, 독지가의 후원이 없이는 모임의 지속성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 계간마다 책을 발행한다는 것이 큰 숙원이 아닌가. 때를 맞추어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되며 지역마다 거금의 활동비가 지급되는 단체로 흡수되며, 전국의 문학지라는 이유로 지원받는 손길이 없다보니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자명한 현실이 아닌가.


우리의 현주소를 뒤돌아보며 위기 뒤에는 찬스가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목 천 I. C를 빠져나오면 흑성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민족의 성전인 독립기념관이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다.

하늘로 승천하는 겨레의 탑이 중앙에 자리 잡고, 너른 광장 가운데 겨레의 집 뒤로 흑성산(519m)의 정상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을 계기로 1982년 8월 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여 5년간의 공사 끝에 1987년 8월 15일 개관되었다. 겨레의 탑에서 옷깃을 여미는 경건함속에 다리를 건너면 백련지에 이르고 태극기마당에서 더욱 숙연해진다. 중앙의 겨레의집은 국내최대의 한옥이다. 지붕을 이은 수 십 만개의 기와는 우리 모두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값진 유산으로 숱한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켜온 선조들의 얼이 담겨있는 성전이다. 우측으로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보며 우리선조들이 북벌정책으로 만주벌판을 호령하고 웅지를 불태웠던 그 시절을 되새겨 보며 강한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쇠약해진 국력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한 애국 열사들의 고난의 현장을 보며 심한 자책감으로 전율을 느낀다. 


일찍 찾아온 불볕더위를 피해 숲속으로 들어서면 울울창창한 삼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시원한 숲길에는 각종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장끼와 까투리가 춘정 속에 화들짝 놀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인적도 없이 고요한 흑성산 가는 길엔 한낮의 열기 속에 피톤치드의 짙은 향기가 몽롱하던 머릿속을 말끔하게 씻어 내린다. 안성의 칠장산(492m)에서 시작된 금북정맥이 남쪽으로 내려오며 서운산(547m), 성거산(579m), 태조봉(422m)을 솟구치고, 솔봉(321m)을 지나 아홉사리 고개에서 동쪽으로 금계포란(金鷄包卵: 금닭이 알은 품은 형상)의 길지에 흑성산(519m)이 자리 잡고 있다.


산의 본래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다. 군 시설과 방송시설, 텔레비전 중계소 등이 있는 정상은 천안의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에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수 백리 산하를 굽어 볼 수 있고, 격변기에는 나라를 수호하는 요새지로 각광을 받는 성지이다.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죽자(영조32년, 1756) 지관을 풀어 이곳 흑성산 남쪽 아래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묘 자리를 정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어느 유명한 지관이 와서‘이곳은 2, 3백년 후에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라 그 때 이장해야 될 것이니 이곳에서 십여 리 동쪽에 묘를 쓰라’고 권하여 그 말 대로 흑성산 정동 6Km 지점의 은석산(455m) 남쪽 기슭으로 옮겨 썼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정상에서의 깊은 감회를 뒤로하고 시원한 그늘 속에 자리를 잡는다. 적은 인원에 조촐한 제단이지만, 정성스런 제단 앞에서 엄숙하고도 경건한 의식이 진행된다.


저희 시산 문학회 회원일동은 이곳 흑성산 정상에 올라, 조국의 수호를 위해 혼 을 불사른 선각자 제위와 조국의 산하를 굽어보시고 그 속의 모든 만물을 지켜주시는 흑성산 산신령님께 고합니다. 자랑스러운 조국의 산하를 두루 탐방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자연을 벗 삼아 시심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정성으로 보살피고 새 한 마리, 다람쥐 한 마리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발아래 작은 미물까지도 보듬어 안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산에서 배운 사물과 감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시로 풀어내어 삭막한 우리의 가슴속에 꽃을 피우고, 의기투합하는 동지들과 어울려 자아실현의 성취감으로 계간지를 발행해 온지 어언 15년에 62호가 탄생했습니다.


이런 저희들의 부단 없는 노력에도 시산회는 존폐의 기로에서 전성기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200여 쪽의 문예지가 축소된 인원으로 100여 쪽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저희의 숭고한 사명감도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흑성산 신령님이시여!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는 진리를 몸소 실천하는 저희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시고, 경향각처에 숨어있는 인재들을 발굴하여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가호가 있기를 굽어 살펴 주스기를 앙망하나이다. 시산의 회원들이 가는 길에 시심이 용솟음 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겸손한 산 꾼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강한 자부심으로 출발하는 시산 문학회의 전 호영 회장의 앞길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주시고, 회원들 모두 무사고의 산행이 되도록 돌봐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그 어느 곳이라도 우리의 보금자리요.  쉼터가 아니던가.

우리민족의 성지인 흑성산에서 진행된 시산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울고 싶은 마음속을 후련하게 씻어 내린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려딛는 발걸음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永遠하라 시산이여!

일어나라 시산이여!

그대 시산을 사랑하리.

 

 

 

                          소요지맥 종주 길

나에게는 너무도 행복한 시간 속에 하루하루가 저문다. 그렇다고 집안에 경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복권에 당첨된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평범한 시간들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백두대간을 탈고하여 계간지인 時와山에 연재를 하고, 한북정맥을 집필하며 차레차례로 지맥을 순례하는 즐거움은 건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65세의 나이에 15km가 넘는 산을 누비며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특권이다.


왕방지맥의 끝자락인 놀미 마을을 다녀 온지 일주일. 건너편의 소요산을 품고 있는 소요지맥을 어찌 그대로 지나칠 수가 있단 말인가? 소요산은 여러 차례 다녀온 곳이라 익숙하지만, 지맥의 종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라 험한 산길을 마다않고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요지맥은 왕방지맥의 주봉인 국사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 신천과 열 두개울이 합류하는 신천교까지 13km에 이르는 지맥이다.


국사봉에 올라서면 쇠목고개를 중심으로 북쪽의 금동리 와 남쪽의 왕방이 마을이 깊은 계곡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전란을 피해 숨어들기 좋은 십승지지에 버금가는 하늘아래 첫 동네. 동두천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마을이지만 깊은 산자락에 숨어있는 곳이라 이런 궁벽한 곳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지맥의 들머리인 새목 고개를 찾아가는 교통편은 공기 좋고 물 맑은 심심산골에 자리 잡은 노인요양 병원을 오가는 60번 버스가 있어 접근이 용이하다.


탑동마을에서도 버스로 10여 분간 산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노인병원은 아무리 위중한 환자라도 완치될 수 있는 청정지역의 양지바른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병원의 앞마당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새목 고개는 나는 새도 넘지 못할 험준한 준령을 절개하여 V형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된 비알 길에 포장된 도로를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겁고 등줄기에서 진땀이 흐른다. 왼쪽으로 공동묘지로 조성된 예미원이 있지만 찾는 이가 별로 없는 탓에 한산하기 그지없다. 중간에 왕방산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가파른 경사도에 울창한 삼림으로 발을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보이지 않으니, 산행도 못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고개 길을 중턱쯤 올라서면 남쪽으로 해룡산과 포천으로 넘어가는 오지재 고개가 멋진 V 라인을 그린다. 40여 분만에 고개 마루에 도착하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호된 신고식을 하고 보니 건너편의 국사봉으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쪽의 수위봉(648.9m)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수십 길 절개지에 발을 들여 밀 틈새 하나 없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는가? 고개 마루를 지나며 왼쪽으로 빛바랜 리본 하나가 바람결에 나부낀다. 구세주를 만난 기쁨으로 달려가니 무성한 억새사이로 희미한 오솔길이 열린다.


진입로를 제대로 확인한다는 것은 절반 이상의 성공이라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힘이 솟는다. 500만 명의 등산인구로 수도권의 산들이 몸살을 앓고 있지만 지맥의 종주를 고집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주위에서 무모한 도전이라는 핀잔 속에서도 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함은 자신만의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산의 체계를 이해하고 맥을 이어간다는 숭고한 신념과 집념의 결정체로 고독한 승부가 따라야 한다.


하루에 20km이상의 종주와 10시간이상의 산행을 할 수 있는 강건한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다음으로 산의 지형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과 체계적인 독도법을 숙지하여 악천후 속에서도 길을 잃는 일이 없도록 전문지식을 습득해야한다. 또한 산행하기 전에는 산의 특징과 탈출로를 숙지하여 만일에 대비하고 기록과 사진 찍는 습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종주에는 단독으로 산행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소한 준비물이라도 꼼꼼하게 챙기는 습관을 길러야한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특히 여름철에는 숲이 무성하고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야생동물들의 기습에도 대비하여야 한다. 짐승들도 사람을 무서워하기는 마찬가지라 배낭에 딸랑이를 달아 인기척을 내어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한다. 뱀이 많은 바위지대를 지날 때는 뱀이 싫어하는 백반을 소지하여 접근을 막는 방법도 있다. 특히 벌의 공격에는 특별한 예방이 없지만 등산로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마음이 심란할 때는 호각을 불어 자신의 위축된 마음을 추 수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산행을 하며 가장 긴장되는 것이 멧돼지들과의 조우이다. 산림녹화의 성공으로 숲이 무성하여 야생동물들의 개체수가 늘어나 정맥이나 지맥과 같이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곳에서는 멧돼지들의 흔적을 흔히 볼 수가 있다. 몸길이 1~2m에 몸무게가 40~200kg이나 되는 놈들이 십여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닌다는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하다. 참고로 멧돼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예리한 송곳니가 있는데 아래턱에 있는 송곳니는 일생 동안 계속 자라 큰 엄니가 된다. 엄니는 마치 칼날 같이 날카로워 적을 공격하거나 위험에 부닥쳤을 때 긴요한 무기가 된다. 코뼈는 가늘고 길며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땅 속의 먹이를 파내는 데도 적합하다.


멧돼지는 깊은 산, 활엽수가 우거진 숲 속에서 살기를 좋아하며 눈이 많고 추위가 심해지면 야산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보금자리는 양지바른 곳에 땅을 파고 앞쪽이 트이게 입구를 파서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과일·나무뿌리를 먹고, 작은 포유류, 물고기, 죽은 동물의 사체까지 먹는다. 긴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고 속에 있는 감자·고구마·나무뿌리뿐만 아니라 벌레까지 닥치는 대로 먹는다. 시력은 나쁘지만 청각과 후각이 발달해 있다. 식물은 물론 토끼·들쥐 등 작은 짐승에서 물고기나 동물의 사체를 먹는 등 잡식성이다.


멧돼지가 가장 난폭할 때는 모성애의 보호본능으로 새끼를 거느리고 있을 때로 이 시기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번식기는 1년에 한 번이고 교미기는 11월-1월 사이이다.  임신기간은 4개월 정도이며 3-8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태어난 직후 새끼는 눈을 뜨고 걸어 다닐 수 있으며, 태어난 지 3개월이면 젖을 떼지만 그 후에도 어미가 돌본다. 새끼의 엷은 갈색 몸에는 노란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수평 방향으로 몇 개 있어 보호색이 되고 있다. 이 줄무늬 모양은 처음 영구치가 나오는 생후 5개월 무렵 없어져서 어미와 같은 센털로 변한다.


등산이 다른 운동에 비해 좋은 점이 많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첫째 유산소운동으로 경쟁 없이 자신의 페이스에 알맞게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산책 정도라면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가능하다. 때문에 산을 찾는 순간부터 안정감과 신선함을 느끼는 것은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의 정기를 받으므로 운동의 효과를 더욱 높여 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숲이라는 환경은 도시생활에 찌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다. 식물이 만들어낸 정화된 산소와 음이온이 가득한 공기, 그리고 피톤치드와 같은 갖가지 물질이 우리의 몸속에 축적된 노폐물을 걸러주고, 도시민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아토피스 피부병에 특효라는 사실만으로도 산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덧 648.9m의 수위봉 정상에 올라선다. 무성한 잡목 속에 커다란 광고판이 자리를 차지하고 꽁꽁 숨어버린 삼각점 찾기를 포기한다. 갈참나무 밑 둥에 매단 비닐봉투속의 정상표지는 비바람에 바랜지 오래되어 판독하기도 어렵다. 동쪽으로 국사봉 정상은 조국을 지키는 파수군의 늠름한 모습으로 철통같은 요새지가 마음 든든하다. 인적이 별로 없는 무성한 숲속에는 멧돼지들의 아지트인양 푸짐한 배설물과 함께 이른 봄 논을 갈이를 한 것보다 더욱 푸짐하게 낙엽을 뒤집어 놓았으니 오금이 제대로 떨어질 리가 있는가?  


걸음아! 날 살려라. 종종 걸음을 치며 곤두박질치는 비알 길을 단숨에 내려선다. 서쪽으로 광암동과 걸산동을 갈라치는 능선하나가 길게 꼬리를 물고 내달리는 와중에 동두천 M.T.B 회원들이 즐겨 찾는 임도와 만난다. 주위에 펼쳐지는 소요산의 줄기와 종현산의 모습도 보인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임도와 작별을 하고 다시 숲속으로 들어서면 완만한 주능선이 이어지고 병사들이 훈련하며 다져놓은 산길덕분에 편안하게 진행한다.


우측으로는 금동리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좌측으로는 처음 들어보는 걸산동이 계곡 속에 자라잡고 소요산 의상봉 줄기가 점점 가까워 온다. 그늘 속을 걸어가는 종주길이지만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서는 체력의 한계가 있는지라 너른 공터에서 막걸리로 갈증을 풀며 휴식을 한다. 이제 새목 고개에서 감투봉(535m)까지 절반 거리에 이른다. 불탄 자리에는 억새와 싸리 밭이 펼쳐지고 동두천 시내가 그림같이 내려다보인다. 화초지초 흐드러진 그늘 속에는 군부대 삼각점이 있고 잠시 후 금동리와 걸산동을 오가는 고개 마루를 지나면 철조망이 가로막는다.


바위지대 벼랑길을 타고 이어지는 철조망은 사격장의 경고판을 바라보며 가슴이 서늘하다. 1km 남짓 철조망과 동행을 하다 마지막으로 철조망을 넘어서며 긴장되는 사격장과 작별을 하고 소요산의 주능선인 칼바위능선 오름길이 시작된다. 만고풍상의 노송이 어우러진 칼바위 능선의 매력은 날카로운 암봉을 넘나드는 것. 지친 몸에도 스릴 넘치는 구간을 올라서면 상백운대. 내친김에 감투봉의 쉼터에서 점심상을 차린다.


허기진 몸에도 생기가 돌고, 솔향기 그윽한 노송의 휘어진 가지사이로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한 조각  구름이 흘러가는 곳. 경기제일의 금강으로 가을의 단풍이 절경인 소요산. 3일간의 짧은 사랑으로 영원히 이별을 하고만 원효와 요석공주 못다 한 사랑의 애틋한 전설하나를 들춰본다.


신라 무열왕 김춘추의 딸인 요석공주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요석을 짝사랑하여 경주 거리를 돌아다니며 흠모의 노래를 부르던 승려 원효는 남천 월정교에서 뛰어내려 옷을 몽땅 적신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요석 궁에 몰래 들어가 옷을 말리며 꿈같은 3일을 보낸다.

승려의 신분인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애절한 두 사람의 운명은 요석과의 염문으로 궁을 빠져나와 소요산으로 들어가 버린 파계승 원효를 그리며 아들 설총을 낳아 홀로 기르며 오매불망 그리움에 눈물짓는 요석공주가 세 살배기 어린 설총을 데리고 천리 먼 길 소요산으로 원효를 찾아간다. 하지만 소요산의 신선이 되어 세속으로 갈수 없다는 원효의 말에 자재암 일주문 밖에 움막을 짓고 원효를 만나기 위해 애타게 기도를 한다.


원효의 심오한 불법을 깨닫고 쓸쓸히 소요산을 떠나는 요석공주의 애닲은 심정을 뉘 알리요. 애잔한 전설을 간직한 소요산 곳곳에 원효와 요석의 못 다한 사랑의 흔적들이 있으니, 자재암과 원효폭포,  원효대,  나한대,  공주봉,  금송굴이라


좌측으로 간담이 서늘한 폐광터의 벼랑 끝을 돌아가는 길목에는 로프가 매여 있다. 신북 온천과 상봉암동을 넘나들던 이시랑 고개로 내려서면 무심한 세월따라 옛사람들의 발자취도 가시덤불속으로 묻혀버리고 다이너스티 골프장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번대산(450봉)을 지나 한동안 그린을 끼고 돌며 골프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임도와 만나 초성리 까지 이어지고 법수동의 신천과 열두 개울이 만나는 수동교에서 지맥의 종주도 종지부를 찍는다.


 

 

                          백두대간에 부는바람 - 4 -

 

 7. 백봉령(780m) - 연칠성령(1,184m) -  댓재(810m) / 31.5km

백복령에서 댓재 구간은 백두대간 중에서도 가장 멀고 힘든 구간으로 무박산행으로도 벅찬 곳이라 3구간으로 나누어 당일산행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백복령의 본뜻은 소나무뿌리에 기생하는 한약재를 복령이라 부르는데, 이곳에 소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탓에 백복령(780m)이라 부르지 않나 추측을 해본다. 대간 동쪽의 백복령 고갯길은 중턱에서 한줄기는 옥계로 가고 또 한줄기는 동해와 삼척으로 간다. 옥계 길은 남면치라는 이름으로 해안으로 떨어지고, 삼척 길은 유명한 무릉계곡의 들물을 지나 동해안을 달리는 7번국도 에서 동해시와 삼척시가 남북으로 갈린다. 서쪽으로 내려가면 정선군 임계면과 연결되는 42번 국도에 많은 차량들이 넘고 있지만, 그 옛날 보부상들이 삼척의 소금을 얻기 위해 넘나들던 곳으로 지금도 정선아리랑의 가락 속에 그 애환이 남아있다.


백복령에서 진행하는 대간 길은 아름드리 소나무사이로 철쭉이 제철을 맞아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완만한 능선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987봉도 거뜬하게 뛰어 넘는다. 울창한 수림사이로 키를 넘는 조릿대, 종주 팀이 아니면 인적도 끊긴 첩첩산중에서 가쁜 숨 몰아쉬며 올라선 1,022봉에는 구중궁궐 들보감이 즐비한 소나무군락으로 강원도의 대간길이 아니면 어찌 볼 수 있으랴. 멀고 먼 원방재(730m)는 계곡으로 숨어들고 980m의 상월봉 오르기에 진이 빠진다. 도상거리 10km의 이기령에 도착하면 원방재에서 만났던 임도와 다시 만나고 당일산행 팀들은 관기 마을로 내려선다.


임도좌측의 소나무 밭으로 들어가면 가지런히 깔아놓은 디딤돌이 정성스럽고, 완만한 산길에는 갈미봉(1,260m)이 멀지않다. 갈미봉에서 서쪽으로 수병산(1,201m)이 보이고 완만하던 산세에 기암절벽이 나타나며, 삼척이 자랑하는 무릉계곡은 주문진의 소금강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동해안의 절경이다. 왼쪽으로 수 백길 벼랑 아래로 간담이 서늘하고, 고적대(1,354m)와 청옥산(1,403m), 두타산(1,352m), 쉰움산(888m)이 병풍처럼 둘렀으니 천하제일의 절경으로 애국가에도 나타나는 신선대가 예 아닌가?


무릉계곡의 아름다움도 고적대를 오르는 고통에는 미치지 못하는지 턱에까지 차오르는 숨넘어가는 소리는 벼랑 끝을 맴돌고, 무거운 쇳덩이가 매달린 듯 흐느적거리는 두 다리는 제 자리 걸음이다. 삿갓을 엎어 놓은 듯 가파른 벼랑길에도 가녀린 야생화가 꽃을 피우고, 소나무등걸이 바위틈새를 비집고 있다. 서너 평의 정수리가 높기도 하지만, 비좁은 정상에서 내지르는 호탕한 웃음소리는 산객들의 사자후가 아닌가?


무릉계곡 골골마다 부처님 손바닥이라, 신비하고 아름다운 정경을 형언하기 어렵다. 서쪽으로 중봉산(1,283m)은  은고개(임계면, 하장면, 동면의 경계)로 향하고 동남방향 대간 길은 망군대(1,247m)로 향한다. 가파른 비알 길을 내친김에 내려서면 무릉계곡으로 내려서는 연칠성령(1,184m)에 도착하며, 피곤한 몸을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청옥산 오르는 길엔 거목들이 하늘을 가리고, 갈길 먼 발걸음을 막아서는 가파른 오름길에 무슨 힘이 남아있어 저 고지를 넘어 설꼬. 황소 같은 맞바람이 박달재를 넘어올 때 가녀린 산객도 청옥산(1,404m) 정수리에 몸을 누인다.


박달령을 내려올 때는 신바람이 나지만 두타산(1,352m)의 정수리가 지옥의 문턱인가? 정수리에 외로운 무덤이여. 명당자리 찾아 예까지 오셨는가? 매서운 북풍한설 맞아보니 어떠하신지. 대간 길에 나선 길손에게 위로의 한 말씀 전해 주시 구료. 동북 방향으론 쉰움산(888m)의 오십정(바위에 뚤린 50개의 구멍)이 반갑게 맞아주고 천년사찰 천은사를 품에 안고 삼척 해수욕장까지 장대한 산맥을 이룬다. 남쪽으로 향하는 대간 길은 힘든 고비 다 넘기고 통골재로 향하는 내리막길이라 여유만만하게 도착을 하면, 두타산 2.2km 햇댓등 3.6km의 이정표에서 보듯이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어렵고 힘든 코스를 다 지나왔기에 오르락내리락 지나온 30여km를 반추해보며 댓재(810m)에 안착한다.



                        8. 댓재(810m) - 피재(三水嶺 920m) / 25.22km

이번구간은 삼척시를 관통하게 된다. 댓재의 정상에 있는 조형물에서 보듯이 이 지역은 석회암의 지질대가 정선과 영월을 지나 단양까지 이어지며 ❝세계적인 동굴 관광도시 삼척❞의 이미지에 걸맞게 환선동굴을 중심으로 많은 동굴이 산재하고 있다. 우리가 지나오며 보아온 자병산의 정수리를 깎아내리는 흉물스러운 모습은 현대 건축에 없어서는 안 될 시멘트의 원료를 채취하는 현장으로 삼척과 단양에는 수많은 석회암 광산들이 조국 근대화의 역군으로 한 몫을 하고 있다.


댓재는 삼척시의 미로면 삼거리에서 하장면 평지마을을 거쳐 태백으로 넘나드는 424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다. 한겨울이면 많은 눈이 내리고 바람이 심하여 산 짐승들이 수난을 당하는 곳으로 겨울 산행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 댓재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황장산에 올라서면 지나온 청옥산과 두타산이 정겹게 바라보이고 삼척시가지 너머로 동해의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망망대해가 대간을 누비는 산 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정표가 세워져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지루한 종주 길에 1,059봉에 오르면 황장산 2.5km  큰재 1.9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느긋한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큰 재에 이르면 1980년에 개설된 임도가 고랭지 채소밭이 시작되는 마을까지 3.3km이어진다. 마을 뒤편의 물탱크가 있는 지극산(1,058m)에 오르면 드넓은 고랭지 채소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지나온 두타산이 아련히 바라보인다. 지극산을 뒤로하고 고랭지채소밭의 임도를 따라가면 우측으로 광동댐 이주단지인 귀내미골이 내려다보이고 잠시 후 자암재에 도착한다.


자암재 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는 환선동굴은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있는 삼척이 자랑하는 동양최대의 석회암 동굴이다. 덕항산 건너편의 해발 800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동굴은 폭이 30m, 높이 20m, 총연장6.2km(추정)로 밝혀지고 있지만 아직 일부분만 관람이 가능하다. 동양 최대의 동굴이라는 말에 걸맞게 커다란 광장을 연산시킬 만한 공간들이 철제 난간으로 만든 관람로를 따라 천당계곡, 환생계곡, 이승계곡, 지옥계곡, 은하계곡, 신선계곡과 제일폭포, 소망폭포, 오련폭포 등의 크고 작은 폭포들. 그리고 꿈의 궁전, 만리장성, 옥좌대등 기이한 형태를 보여주며 특히 지옥계곡 위로는 아주 높은 출렁다리가 있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수가 있다. 신비한 동굴의 관람에만 한 시간이 족히 걸린다.


자암재를 지나면 곧이어 환선봉(1,080m)과 덕항산(1,071m)에 이르는데 산불감시초가 있는 덕항산은 삼척시 신기면과 태백시 하사미동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그 옛날 삼척사람들이 산을 넘어오면 평평한 땅이 많아 덕메기 산이라 불렀으나 한자로 표기하면 덕항산(德項山)이 된다고 한다. 피재 7시간 황장산 4시간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남진을 하면 1km 지경에 구부시령이 있으니, 태백시 하사미의 외나무 골에서 삼척시 도계읍 한내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는 기막힌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고개 동쪽 한내리 땅에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여인이 살았는데 서방만 얻으면 죽고 또 죽어 무려 아홉 서방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홉 남편을 모신 여인이 살던 곳이라 하여 구부시령(九夫侍嶺)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구부시령에서 1km로 못 미치는 삿갓봉(1,055m)에 오르면 한의령 6.1km에서 보듯이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한내령에 이르면 구부시령 3.8km 한의령 3km의 이정표를 맞이한다.


멀고먼 푯대봉(1,009m)에는 태백시 한마음 산악회에서 세운 커다란 정상석이 반겨준다. 한의령 1.1km 구부시령 5.7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건의령(한의령)에 도착하면 등산 안내도와 건의령의 경도가 적힌 표지판이 대간 길에 지친 산객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다. 태백 상사미에서 삼척 도계로 넘어가는 이곳에도 슬픈 전설이 있으니, 고려말 삼척으로 유배를 온 공양왕이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고갯마루에 관모와 관복을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며 태백의 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두건 건(巾), 의복의(衣)자를 써서 巾衣嶺 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건의령 에서도 삼수령(920m)까지 이어지는 6km의 대간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고, 노루메기에 도착하며 삼수령(피재)도 지척에 있다. 태백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오르면 삼수령이다. 서해로 흐르는 한강, 남해로 흐르는 낙동강,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의 물줄기가 갈리는 곳이라 하여 삼수령이라 부르는 이곳은 낙동정맥의 시발점이기도하다. 한편 피재라고 하는 이곳의 유래는 삼척 사람들이 황지지역을 이상향이라 하여 난리를 피해 이곳을 넘어 온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9. 피재(920m) - 화방재(950m) / 23.5km

삼수령을 출발하여 40여 분만에 도착한 곳은 낙동정맥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부산의 몰운대까지 392km의 천리 길을 달려갈 장대한 산맥의 들머리이기에 새로운 감회가 든다. 참고로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면 ❝동국여지승람, 척주지, 대동지지 등에서 낙동강의 근원지라고 밝혀 놓고 있다. 처음에는 하늘의 못이라는 의미로 천황(天潢)이라했고 황지(潢池)라고도 했는데 태백시내 중심지에 있는 황지공원의 커다란 비석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지, 중지, 하지로 이루어진 둘레 100m의 소(沼)에서 하루에 5000t의 물이 솟아 나오고 있다. 이물은 태백시를 둘러싼 태백산, 함백산, 백병산, 매봉산 등의 줄기를 타고 땅속으로 스며들었던 물이 모여 연못을 이룬 것으로 시내를 흘러 구문소를 지난 뒤 경상남북도를 지나 부산의 을숙도에서 남해로 유입된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남서쪽으로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1,145봉에 올라 1시간 땀을 흘리며 숲속으로 들어서면 매봉산(천의봉-1,303m)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풍력 발전기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이곳에는 전망대와 정상석이 있고 사방팔방 시원하게 트이는 조망으로 태백산, 함백산을 중심으로 대간의 능선들이 파노라마를 이룬다. 또한 이곳에서 통리로 항하는 낙동정맥이 시작되는 기점으로 대간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비단봉 까지는 그 유명한 태백의 고랭지 채소밭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대간길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비단봉(1,281m)의 정상에 올라선다. 암릉 위의 정수리에는 정상석이 반겨주고 시원한 조망으로 매봉산의 풍력발전기가 이채롭다. 급경사를 내려서면 쑤아발령에 이르고 삼수령6.4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대간은 서남쪽으로 선회하여 1시간을 진행하면 양강의 발원봉으로 유명한 금대봉(1,418m)에 오른다. 산불감시초소와 정상석이 있지만 전망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이곳에서 대간길은 남쪽으로 이어지는데 서쪽으로는 126만평의 너른 분지에 조성된 야생화 단지로 유명한 대덕산(1,307m)을 비롯한 노목지맥이 분기하고 있다.


금대산에 내린 빗물이 동쪽으로는 낙동강으로 서쪽으로는 한강으로 흘러들게 되니 강원도 태백의 대덕산 자락에 위치한 검룡소에서 하루 2천여 톤의 생명수가 석회암반에서 사계절 영상9도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솟아올라 5백14km를 흘러내려 한강 하구의 조강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발원지가 된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바다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최상류인 검룡소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무기가 연못에 들어가기 위해 거칠게 몸부림친 흔적이 검룡소 폭포라고 한다. 소가 풀을 뜯다 물먹으러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곳을 찾았다가 빠져죽자 마을 주민들이 이무기의 짓이라고 검룡소를 돌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오대산의 우통수를 남한강의 발원지라 하였으나 국토지리원에서 새로이 측정한 뒤로 이곳을 발원지로 정하고 1986년 태백시에서 새로 준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대봉에서 남진하는 대간 길은 야생화의 꽃길을 따라 두문동재(1,268m)에 도착한다. 동쪽의 태백과 서쪽의 고한을 넘나드는 38번 국도이다. 이곳 또한 터널이 개통된 뒤로는 산객들이나 약초꾼 들이 찾아드는 한가한 곳으로 겨울에 눈이 한번 내리면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는 오지이다. 두문동재는 고개 이름에서 전해 오는 대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서기 1392년 7월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자, 二君不仕를 고집하며 조선의 개창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거를 한다. 송도(지금의 개성) 동남현에 들어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있는 곳을 향하여 예를 올리고 삿갓을 쓰고 산야에 은거하며 후진교육과 농사에 종사하며, 頭門不出(두문불출)하였다. 아무리 불러내어도 나오지 않고 의리와 貞節(정절)을 지키자 화가 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질러 72현을 몰살하는데 살아남은 자가 강원도의 고한 땅에 숨어들어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동리 이름도 두문동으로 부른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함백산을 향하여 남진하는 대간 길은 은대봉(1,442m)에 오른다. 산 아래에는 정암사라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천년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서기 636년(선덕여왕 5년)자장율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문수도량인 산서성(山西城) 운제사에서 21일간 치성을 올린 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의 신보(神寶)를 얻어 귀국 한 후 전국의 5곳에 나누어 모셨으니 그중에 한곳이다.


제1쉼터와 제 2쉼터를 지나면 우리나라 5대 고봉중의 하나인 함백산(1,572m)정상에 오른다. 거대한 정상석과 송신 중계탑, 고산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사목이 북풍한설에도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장관이다. 발치 아래 건너편으로 바라보이는 강원랜드의 카지노와 스키장은 폐허가 된 탄광의 옛 영화를 되살리는 태백의 원동력이 된다는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인근에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고지대 훈련장이 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막힘없이 시원한 조망 속에 힘들여 올라온 만큼 발걸음이 가벼운 하산 길. 정선과 영월을 잇는 우리나라의 포장도로 중 가장 높은 만항재(1,330m)에 도착한다. 만항재 보다 낮은 수리봉(1,214m)은 1,238봉 다음이며 지나온 함백산과 이어갈 태백산이 시원스레 조망되며 잠시 후 화방재(950m)에 도착한다. 



                        10. 화방재(950m) - 도래기재(770m)  / 24.3km

31번 국도가 지나는 화방재는 태백시와 영월군을 오가는 고개로 태백산과 함백산의 경계를 이룬다. 매년 1월 1일이면 한해의 무사안녕과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는 인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밤새도록 태백산의 장군봉을 향하는 행렬로 장사진을 이룬다. 화방재에서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남진을 하면 산신각이 있는 사길령 매표소에 도착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강원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길목이지만 산길이 높고 험하여 맹수와 산적들이 많이 출몰하기에 보부상들이 수십 수백 명씩 한 무더기를 이루어 넘어 다녔다고 한다. 특히나 고갯길의 무사안전을 위하여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음력으로 4월 15일이면 태백 산신령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천금록에 전해오고 있다.


사길령에서 1.8km를 거슬러 오르면 유일사 갈림길에 도착한다. 해돋이 산행 때는 유일사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인파와 합류하는 병목현상으로 아비규환 속에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옆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주목 군락지가 펼쳐진다. 수백 수천의 고사목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성한 산으로 추앙을 받는 것도 주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백두산 장군봉(1,567m)에 올라서면 동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태백산은 우리나라 3신산 중의 하나로 산 정상에는 태고 시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으니, 자연석 편마암으로 둘레27m, 폭8m, 높이3m의 원형제단으로 쌓아올려 중용 민속자료 제 288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정상에는 천제단이, 남쪽아래 하제단이 있고, 북쪽의 장군봉에는 장군단의 3개 제단으로 이루어졌다. 매년 10월 3일 개천절이면 천제를 올리는데 한배검이라는 자연석의 위폐가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주위의 산기슭에는 무속인 들의 성지로 단군성전을 비롯하여 윤 씨 산당, 불정암, 배씨 산당, 태백산 마구 할머니 산당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전국에서 모여든 도인들이 심신을 수련하고 있는 곳이다.   


커다란 정상석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길을 내려서면 부쇠봉(1,546m)에 이른다.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문수봉(1,517m)에 이르지만 대간 길은 오른쪽으로 부쇠봉의 산허리를 감아 돌며 비알 길을 내려선다. 3.25km를 널널하게 걷다보면 깃대배기봉(1,353m)에 이르고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지근거리에 두위봉(1,363m)이 있고 청옥산(1276m)이 산맥을 이룬다. 큰 기복 없이 울창한 숲속을 지나면 차돌배기(1,141m)삼거리에 이르는데 이정표에는 태백산 10km, 석문동6km, 참새골 입구6km 에서 보듯이 이곳에서는 어느 쪽으로도 탈출로가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대간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남진하던 대간 길은 신선봉을 향해 서북쪽으로 진행을 한다. 직진을 하면 각화산(1,176m), 왕두산(1,044m), 형제봉(833m)을 지나는 주능선으로 화장산(859m)에 이르게 된다. 


차돌배기 삼거리에서 서북방향으로 달려가는 대간 길은 외로운 무덤이 잠들어 있는 신선봉(1,300m)에 이른다. 이곳에서 대간 길은 60도 각도로 꺾어지며 남쪽방향으로 선회하기 때문에 무심코 직진을 한다면 상동읍 천평리 방향으로 이탈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헬기장까지 내려온 대간 길은 서서북 방향으로 선회하여 곰넘이재(1,074m)를 넘는다. 구룡산 5km, 차돌배기 6km로의 이정표를 바라보며 지루하고도 먼 대간 길에 몸도 마음도 지치고 만다. 직진방향으로 고직령(1,231m)을 지나 구룡산(1,344m)에 올라서며 그동안 정들었던 강원도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경상도지역으로 들어선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수리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5,54km를 진행하면 도래기 재에 도착한다.



구룡산의 유래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위치한 구룡산(1,344m)은 태백산(1,567m)과 옥석산(옥돌봉1,242m)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이루는 산이다. 강원도와 경북의 경계선에 있는 이산에서 흐르는 물은 남쪽으로 낙동강과 북쪽으로 남한강으로 흘러들며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하여 구룡산이라 부르며 용이 승천할 때 물을 길러오던 아낙이 뱀봐라 하며 꼬리를 잡아당겨 뱀이 되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