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시낭송
제 2 부 시낭송
기 도
오 희 정
나를 심으신 이 자리에
아름다운 꽃망울 맺게 하소서
나를 피우신 이 자리에
다함없는 향낭을 열게 하소서
나 어디에 있을지라도
당신 안배에 순종하며
영롱한 빛으로 살게 하소서
때로
북풍과 뇌성으로 흔들고 깨우실 때
급히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애매한 고난 사람 막대기가 나를 칠지라도
다만 생각하고 엎드리게 하소서
환경의 모든 주권을 당신께 맡기며
단일한 마음 오직 영 안에
아멘의 삶이 되게 하소서.
겨울 허수아비
김 응 만
외풍(外風)에 견딘 손
잘려 나갔고
시린 얼굴 들어
참새 원망해도
너무 겨운 팔 벌림
외다리 되어
언 땅에 섰다.
석양 나그네 이따금 길을 물어
공허한 노래로 길 떠나고
이어온 생명 다한
눈물 남아 있어
볏짚 가슴으로 기다림 걸려
헤진 앞섶 헤쳐 눈비로 얼며
깃틀 곳 없어 나는 새들 불러 모아
춘경(春耕)에 밑둥 잘려
스러진다 해도
눌러쓴 모자로
해동(解冬)은 머언 구름이라며
바다, 그리고, 노을
김 정 인
해저문 바다
바다는 지금 핏빛이네
금빛파도가 넘실거리던 바다
그 바다는, 지금
노을빛에 젖어있네
폭풍이 흔들고 지나 간 바다
넝마 같은 물파래가 나풀거리고
그믈을 던져봐야, 별 볼 일이 없는
이제는, 볼장 다본 바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버린 바다
바다는, 이제
아무런 말이 없네
다만, 침묵할 따름이네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 표류의 바다
열 두폭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하염없이, 울고 있네
청동의 포말을, 빗질하고 있네
- 날벼락을 맞은 바다
참상의 그 바닷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리라
강 진 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디모데전서6:7)
내가 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은
순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 곳
산다는 것은 깨닫는 것이라 하나
진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탐욕의 순간 덧없이 지나가니
걸어온 길 뒤돌아보면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란 없고
믿음과 사랑이 부족한 탓으로
가족과 이웃을 실망시켰으니
나 이제 그들 곁으로 돌아가
열심히 살고, 조용히 생각하며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솔직하게 행동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고, 서두르지 않으리라
특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리라
오 두 막
서 영 선
아파트 숲 옆 오두막 하나
지붕보다 큰 키 해바라기 대자
불쑥 솟은 맨드라미 가족
가을볕에 반짝이는 하얀 무들이
단정하게 속삭이는 고향냄새들
채송화 한창인 이집 뜰에는
저마다 채소들이 군락을 이루고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
푸른 숲 속에 조경화 이루네
온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문명의 손길 덜 받으면 어떠하리
연탄불 피우면 어떠하리
푸른 사랑 나누며 행복한 사람들
구 름 산
이 종 석
어렸을 때 나를 키운
우뚝솟은 구름산은
고요에 겨워
싱싱한 가지가지에
푸르른 잎새도
그 영화를 감추는 계절
나무들의 위안도 싱그러워가는
산들바람이는 구름산이여
온 산을 가리고 지는
나뭇잎들
바람자면 고요히 명상에
잠기고
나를 오라고 끊임없이 손짓하는
구름산이여
허구한 나날
거센 바람에 인종해
하늘만 우러르고 사는
구름산이기에
너그러운 늠름한 품이여
지난 날 이 산에서
솔잎을 긁던 추억이
지금 그리움에 떠는데
평화와 고요가
기쁨이 깃들었다
아, 구름같이 솟아있는
구름산아
가을햇살
박 상 임
온갖 것들이 익어가는
가을을 위해
맨발로 들길을 서성이는 햇살
장대 끝에는 벌써
바알간 감알이 매달리고
풀잎에 방울방울
농부의 땀방울이 영글 때마다
햇살은 풍성한 인고의 보람으로 부푼다.
오늘은 또 누구에게 바치려는지
갈나무 가지 위의
감알을 만지작거리는 햇살
바 구 미
이 덕 주
죽음이 즐겁다
쌀통을 타고 오르는
바구미, 잡아서 물통에 넣는다
쌀 숨의 힘으로 자일도 없이
암벽을 타고 오르는 행렬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쌀알 사이사이 구도자로 남아 있더니
쌀통 틈새로 빛이 보이는 그 곳
카알리스
밖의 세계는
알 수 없으니 영원한 피안
바구미 한 마리
물통 속에서 허우적이며
내 손가락을 타고
우화의 길에 오른다
조용한 죽음은 슬프지 않다.
토담집 어머님
홍 춘 표
가을 산 나무 위에
부슬부슬 찬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강촌에 깊숙한 토담집 한 채
저물녁 인적 없어 어머님 쓸쓸하다.
솔바람 황금빛에 흰머리 물들이고
낮과 밤을 꿈속에서 자식 생각하며
건강을 가슴으로 기원하는 어머니
잘 살고 못 사는 게 팔자라지만
하루하루 자식 걱정 끝없는 사랑
산속의 선녀가 주름살 알까
도시의 아들딸 살아온 나날 알까
인생은 외로운 짧은 삶인 걸
청산은 말 없어도 달빛 잠을 재우고
아침은 따사로운 햇살을 연다.
현충원을 찾아서
- 2008년 5월 31일 -
김 완 묵
현주소 :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산 44-7
국립묘지는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178m)을 주봉으로 하여 한강을 굽어보는 명당자리로 43만여 평의 성역에 16만 5천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끝나면서 조국의 부름에 초개와 같이 달려 나가 장렬하게 산화한 영령들을 모시기 위한 방안으로 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을 하여 안장을 하여 오다가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을 하여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게 되었으며 기관 명칭도 국립 현충원 으로 정하고 매년 6월 6일에는 거국적인 추념행사가 거행되고 있는 곳이다.
항시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 속에 월남의 전선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나의 전우 “신재기 병장”이 잠들어있는 곳,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지만 40년이 다 되도록 발걸음 한번 하지 못한 무심함을 자책하면서 금년에도 보훈의 달인 6월을 맞는다.
신록의 계절 오월의 마지막 날, 지구의 온난화 탓인지 일찍 찾아온 더위가 수은주를 30도로 끌어 올리는 불볕더위 속에 지하철 4호선의 동작역에 내려서니 건너편으로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현충원이 시야에 들어온다. 너무도 늦은 발걸음이기에 죄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지만 속죄하는 마음으로 장미 한 다발을 가슴에 안고 현충문을 들어선다.
현충일을 일주일 남겨둔 토요일이라 경내는 조용하다 못해 엄숙하고 산책 나온 인근 주민들과 야외 학습 나온 학생들이 간간이 지나칠 뿐이다. 하지만 43만여 평의 너른 광장에 빼곡히 들어찬 영령들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이 난감하기 그지없어 민원 안내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손에 쥔 안내표에는 제 19묘역 1판 2498호로 명명이 되어있다.
조국의 수호를 위해 헌신한 임들이 계신 현충원은 엄숙하면서도 정갈하고 질서정연하게 조성된 묘지들이 너른 벌판을 가득 메우고, 국가의 성전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무하나 풀 한포기마다 살뜰하게 가꾸어온 정성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어 구천을 떠돌던 영령들이 편히 영면 할 수 있는 안식처로 손색이 없다.
현충원을 들어서면 너른 광장 한 가운데 충성분수대가 있고 겨레얼 마당 과 현충탑을 중심으로 묘역이 동서로 나누어진다. 오른쪽으로 호국의 종이 있는 곳에서부터 제1묘역이 시작되어 26묘역까지 왼쪽으로는 17묘역부터 56묘역까지 그 너른 벌판위에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묘지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진다.
큰 번호판의 순서대로 한참을 걸어서 찾아간 19묘역은 월남에서 전사한 사병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생각보다 전사자들이 많다는데 다시 한 번 놀라고 번호가 순서대로 되어있지 않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주인공을 찾기에 골몰한다. “육군병장 신재기의 묘” 뒷면에는 2498의 숫자 아래 1969년 5월 16일 월남에서 전사라는 확인으로 우리는 40년 만에 해후를 한다.
산자와 죽은 자의 사이가 이렇게도 멀단 말인가? 총알이 빗발치는 정글 속에서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살아서 돌아가자고 굳게 맹세를 했지만 백마 9호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 모두 망연자실하여 절규와 통한의 시간을 보냈지.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오빠의 전사를 모르는 고국의 누이동생이 보내온 무운장구를 비는 편지를 보고 우리 모두 슬픔의 시간 속에서 방황을 했었네.
전우여! 미안 하이. 밤하늘의 십자성을 바라보며 어깨를 얼싸안고 고국의 소식에 눈물지으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고 했는데 4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서야 전우 앞에 머리를 숙이며 무슨 변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68년 3월 월남에 파병되는 나는 배안에서 분류되는 부대배치를 초조히 기다리는 중 포병통신으로 병과가 바뀌면서 월남의 보급기지창이 있는 캄란 만을 방어하는 52포병 대대에 배속되는 행운으로(가장 안전한 지역이라 월남에 가나마나) 다른 전우들의 부러움 속에 임기가 다 하도록 우리 부대에서 전사자가 속출하기는 극히 드믄 일이었는데.........
백마부대 52포병대대 B포대 통신 반에 근무하던 우리는 군의 편제상 보병중대를 지원하는 엄호 부대로 관측 장교와 함께 2명의 사병이 백마 30연대 2대대의 각 중대에 파견근무를 수행하게 된다. 의협심과 책임감이 강한 신재기 상병은 파견근무를 자청하고 1년간 무사히 작전을 수행하면서 백마 9호 작전이 끝나는 대로 복귀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운명의 여신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으니 애석하고 원통한일이다.
전우여!
우리가 월남의 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피를 흘린 숭고한 사명감이 헛되지 않아 조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하면 된 다” 는 신념아래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헐벗고 굼주리는 나라의 오명을 벗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88올림픽과 월드컵도 개최하고 이웃을 도와주는 강병부국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초개와 같이 바친 조국이 번영하는 동안 살아 있는 우리는 곁눈질 한번 하는 법 없이 열심이 노력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네. 어느덧 육십을 훌쩍 넘기고 반백의 머리에 홍안의 젊음이 주름살로 변하였으니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것이지.
전우여!
그동안의 서운함을 푸시고 진혼곡이 울리는 동작동의 양지바른 언덕에서 영면 하시게.
- 시화전에 올릴 글의 요지 -
전우여! 미안 하이. 밤하늘의 십자성을 바라보며 어깨를 얼싸안고 고국의 소식에 눈물지으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고 했는데 4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서야 전우 앞에 머리를 숙이며 무슨 변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전우여!
그동안의 서운함을 푸시고 진혼곡이 울리는 동작동의 양지바른 언덕에서 영면 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