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릉산을 찾아서
인릉산(326m)을 찾아서
2008년 7월 18일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경기: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오늘도 산을 찾아 집을 나선다.
지난 4월 불곡산에서 실족사고로 고생을 한 뒤로 어느 정도 회복은 되었지만, 그때 받은 충격으로 산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과유불급이라 20 - 30km의 거리를 주파하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객기가 부른 재앙이 아닌가?
근신하는 마음으로 근교 산행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전화위복이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른 아침. 강남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숲, 인릉산을 찾아 수서역 6번 출구로 올라선다. 분당을 오가는 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물어봐도 고개만 흔들고 세곡동 사거리에서 오가는 행인에게 물어보지만 그런 산이 있느냐고 되물어 온다.
서울근교에 있는 산이라면 인근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을 터인데, 높이가 285m나 되는 산을 아는 이가 없다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는가. 사방을 둘러봐도 감이 잡히질 않는다. 사전에 지도라도 한번 살펴보고 올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며, 동네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한 병을 사며 주인 아주머니에게서 진입로를 확인 할 수 있었다. 허술한 골목길로 접어들어 탄천으로 유입되는 세곡천에 놓인 철다리를 건너며 산행이 시작된다.
백제시대 유물 발굴 현장
울창한 수림속의 개활지에는 백제시대의 유물을 발굴하는 중장비의 굉음소리가 요란하다. 잠시 후 울암약수터에 도착하지만, 오염된 약수터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인 듯 불결하기 짝이 없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산로에는 오가는 사람도 없이 조용한 오솔 길에 짝을 찾는 풀벌레 소리만 간간히 들려온다.
고마니 풀
서서히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산책로에는 습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마니풀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다. 토종돼지들이 즐겨 먹던 고마니풀을 베기위해 들판을 헤매던 어린시절이 생각난다. 큰 덩치를 이기지 못한 아카시아 나무가 산책로를 가로막고 쓰러져 있다. 뿌리 약한 나무가 거친 세상의 풍파에 견디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기초가 튼튼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뿌리를 드러낸 거목의 밑둥치에는 푸른 이끼가 돋아나고,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과 햇볕도 스며들지 못하는 짙은 숲 속에는 갖가지 잡초들이 다투어 피어난다.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 오솔 길을 가노라면 발걸음도 느려지고, 싱그러운 공기와 피톤치드에 흠뻑 빠져든다. 융단같이 부드러운 황토 길에서 사색을 즐기는 것도 근교산행에서 맛볼 수 있는 매력이다.
참나무와 개 동백이 주종을 이루는 숲속에는, 한 낮임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고 한 줌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면 끈적이던 땀방울도 잦아든다. 한 굽이 비알 길을 오르면 평평한 쉼터에 간이의자와 운동기구들이 반겨준다. 성남시계를 이어가는 제6구간의 이정표가 있는 공터에는 산책 나온 주민들이 막걸리 잔을 돌리며 신명을 돋운다.
가지런히 정돈된 산책로와 비알 길에는 로프와 나무로 계단을 설치하고, 주요 길목마다 이정표를 세워 안전한 산행을 도와주는 정성이 지극하다. 근교산행의 묘미는 누가 뭐래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가는 여인네들의 수다스러움이요. 시원한 그늘에서 담소를 나누며 즐기는 먹거리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진한 커피향을 뒤로하고 비알 길 을 올라서면, 리기다소나무 숲속에 간이식탁과 둥그런 바위가 있는 275m 쉼터가 반겨준다. 서쪽으로 너럭바위에 올라서면 인릉산 제일의 전망대가 펼쳐진다. 시원하게 터지는 전망대가 아니라면 인릉산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할것이다.
청계산의 연능들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양지바른 산자락에 자리 잡은 국정원건물과 대모산, 구룡산이 헌 인릉을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인다. 우리국토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국토를 종단하며 청계산과 이어지는 산자락이 잘려나가고 짐승들도 이동통로가 없어진 고립무원의 인릉 산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소나무의 천적 재선충
확인된 얘기는 아니지만, 암울했던 80년대 국정원건물이 정면으로 보이는 이곳에 철조망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인릉산을 찾는 사람이 없다보니 마을 사람들도 모르는 산이 되었고, 지금도 요소요소에 잔해물인 철조망이 남아있다.
산악자전거 팀들이 즐겨 찾는 이곳은 경사가 완만하고 숲이 무성하여 등산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삼림욕장에 들어와 사색을 즐기는 코스로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처럼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가슴을 활짝 열고, 시원한 막걸리 한잔으로 흥을 돋우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엔 듬성듬성 노여 진 바위들이 수석 전시장처럼 편안함을 안겨준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넓고 깊은 품속에 안기는 것이다. 산은 인자한 품성으로 당신의 품을 찾아 온 모든 사물들에게 골고루 자비심을 베풀고 경거망동하는 자들에게 준엄한 벌을 내리기도 한다. 흙과 바위를 보듬어 안고 아름다운 숲을 만들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짐승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꽃들이 만발하는 천상의 화원에는 산새와 벌나비들이 모여들어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세파에 찌든 심신을 달래기위해 산을 찾아 피톤치트 향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새로운 전기를 열어가는것이다.
머리위로 보이는 억새의 숲.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에는 폭염이 쏟아지고, 태풍 "갈매기"의 북상을 예고하듯 폭풍전야의 가마솥 열기에 나뭇잎마저도 후줄근히 늘어진다. 시야를 가리는 스모그로 남한산성도 우유 빛 안개 속으로 가두어 버리고 덩치큰 서울공항도 자취를 감추고 만다. 하지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임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시원한 그늘을 찾아 심곡동쪽으로 내려서며 명상속으로 잠긴다. 인생이 가는 길도 산길과 같아서 험하고 힘든 산을 오르는 고통이 따를 지라도 좌절은 금물이요.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베는 비수와 같은 것이니 끝 까지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더라도 경거망동은 삼가해야 할 일이요. 일을 그르치는 만용일 뿐이다. "고진감래"란 달콤한 열매가 기다리는 정상에 오르면 자아실현의 성취감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다.
무성한 그늘 속을 빠져나오면 서울 비행장의 활주로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산 비알에 손바닥만한 경계를 그으며 일구어낸 주말농장에서 구술땀 흘리는 농부들. 5km의 짧은 거리에서 호젓하게 사색을 즐기는 산객들. 모두들 나름대로의 보람이 있고 즐거움속에 행복이 있다.
서울의 근교에도 아기자기한 산들이 즐비한데 "제 주머니에 있는 보물이 귀한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멀리 있는 산만 바라보며 살아 왔으니 이제부터라도 근교의 산행으로 새로운 보람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