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호 ( 시 와 산 )
2008년 3월 21일 출판
남한산성 송년 산행
세모의 스산함 속에 또 한해가 저물고 송년회를 겸한 정기산행이 있는 날.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라고는 하지만 비가 오겠다는 예보에 마음이 착잡하지만 시산의 형제들을 만난다는 설 레임에 새벽부터 일어나 고추전과 깻잎 전을 데치고 김밥을 말아 아내와 함께 5호선 종점인 마천역에 도착하니 부지런한 김은남 전회장과 이창기회원이 반겨주고 잠시 후 대전의 신 익현 시인의 밝은 미소를 대하며 백만 원군을 얻은 듯 용기백배하여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전날 오후에 상경하여 마천역 부근에서 숙박을 했다는 설명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약속시간이 가까워 오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타나는 회원들로 활기가 넘치고 10시 20분 남한산성의 서문 쪽으로 방향을 잡아 시가지를 10여분 오르면 3145번 버스종점에 도착하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지만 휴일을 맞아 산으로 향하는 인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대통령선거의 도우미들로 좁은 골목이 시끌벅적하다. 오늘도 나 용준 회원이 가족과 함께 참석을 하고 혜림이와 재균이는 우리 시산의 마스코트로 즐거운 산행 길을 열어주며 지리산의 여운 때문인지 내손을 꼭 잡고 돌계단 비알 길을 잘도 오른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발길에 채이고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에 거친 숨소리. 계단 길 오르기에 힘이 겨운지 쉬어가자며 하소연 하는 아내의 요청에 모두들 바위에 걸타 앉아 휴식을 하는 중에도 신 익현 시인의 시낭송과 재담으로 웃음이 만발한다.
급할 것 없이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보수가 한창인 서문에 도착하며 깔딱 고개도 끝이 나고 탄탄대로의 남한산성 순례길이 펼쳐진다. 산행의 즐거움 속에 먹거리가 으뜸이라 찬바람을 피해 아늑한 소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전을 펼친다. 스티로폴 상자 속에 담아온 음식들이 모락모락 김이 오르며 코끝으로 스며드는 구수한 냄새에 군침이 돌고 출출한 시장 끼에 회가 동한다.
곁들이는 토속주는 주진하 시인의 전매특허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고 이런 자리에 권주가가 빠질 소냐. 흥겨운 어깨춤에 시산의 나들이는 절정에 이르고 손에 손 잡 고 우리의 발길은 수어장대로 향한다.
한양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으니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로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에서 북동쪽으로 6km지점에 있는 남한산의 정수리 너른 분지에 쌓은 성으로 길이가 9km 높이가 7.3m에 이른다. 한강을 중심으로 백제를 세운 온조왕이 이곳에 토성을 쌓았으나 신라 문무왕때 다시 쌓아 주장성을 만들고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보수를 하다가 조선 광해군(1,621년)때 대대적으로 축성을 하여 관아와 창고 행군을 건립하여 광주읍의 행정처도 이곳으로 옮기고 인조 17년(1639)에 는 기동훈련까지 실시하며 유사시를 대비하였지만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내부의 분열로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고 말았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남한산성만은 2000년의 역사 속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으니 한양을 지키는 보루로 동서남북 에 각각 4개의 대문과 8개의 암문을 만들고 4곳에 장대를 세웠으나 일제시대 에 방화로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오다가 복원작업으로 현재는 도 유형문화재 1호인 수어장대를 비롯하여 많은 건물들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守禦將臺(수어장대)는 군 통수권자의 지휘본부로 성의 주위가 잘 보이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탓에 산성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마냥 느려지는 발걸음으로 남문 쪽의 종주코스를 단념하고 마을 쪽으로 내려와 멀찌감치 북문 가는 길이 보이지만 그곳도 생략한 채 지름길을 골라 복원공사가 한창인 행궁 터와 숭모 전(온 조대왕의 위폐를 모신 사당)을 지나며 우리 조상들의 국난극복을 위한 집념을 되돌아보며 울창한 송림 속으로 들어서면 싱그러운 솔향기가 온몸을 휘어 감는다.
비알 길에서도 신이 나서 재잘대던 혜림이와 재균이가 장시간의 산행이 무리였든지 칭얼대기 시작하고 서문에 도착하여 오늘의 백미인 연주암의 옹성으로 가야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체되고 대다수 인원들이 그대로 하산하자는 요청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휴일을 맞아 건강을 챙기는 이들의 발걸음으로 비알 길 계단길이 장사진을 이루고 풀린 다리 어루만지며 내려온 골목길에는 먹 거리 식당들이 난전을 펼치고, 호객행위로 흥청거리는 군침 도는 시장 끼에 남한산성의 전골 집에 자리를 잡는다.(오후 2시)
마천역으로 오고 있다는 고 양규 전 회장의 밝은 목소리는 반가운 복음이 되어 1km가 넘는 곳까지 마중을 하며 동행하는 발걸음에는 우리시산의 밝은 미래가 엿보이고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우리는 하나@라는 합창으로 술자리가 무르익어가고 몸을 쥐어짜며 토해내는 신 익현 시인의 시 낭송은 혼신을 다하는 신들린 몸부림으로 교직에서 평생을 몸담아오며 詩仙(시선)을 위해 산을 오르고 정수리 하나에 시 한수씩 천편이 넘는 시상을 펼치고 있으니 우리의 자랑이 아닌가? 무르익는 뒤풀이로 동지섣달의 짧은 해가 서산마루에 걸리고 손 에 손잡고 향하는 발걸음은 노래방의 순례로 이어진다.
오!!!!!!!!! 시산이여 영원 하라.
1994년 2월 24일 시산이 문을 열어 14년의 연륜을 갈고 닦으며 오늘에 이르렀으니 남한산성의 주장성에서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새로운 다짐을 하고 질곡의 세월 속을 헤쳐 나온 우리의 저력은 무자년의 밝은 햇살아래 활짝 열릴 것이다. 파이팅!!!! 시산이여 영원 하라.
낙동정맥 왕릉봉(631m)
한티재 (430m) - 검마산 휴양림임도 (620m)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수비면
낙동강이 태백의 황지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의 하구언 까지 장장 513km를 흘러오며 함께 아우르는 산맥을 낙동 정맥이라 부르며 대간의 종주를 마치고나면 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이지만 서울에서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2-3년 전부터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매주 문자 메시지로 연락이 오는 박 효종 회장님의 정성이 고맙기는 하지만 700여산을 오르다보니 안내 산악회의 행선지는 거의 다녀온 곳이라 함께 산행을 할 기회가 없어 미안 하던 차 오지산행 낙동 정맥의 제 7구간이 모처럼 구미에 당겨 예약을 하고 보니 지도에도 표시가 없는 곳이고 대표적인 산도 없으니 막막하기 그지없어 인터넷을 뒤적인 뒤에야 검마산과 백암산의 근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
훈풍이 불어오는 겨울 날씨가 소한추위도 없이 수월하게 넘기며 올겨울도 별 추위 없이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산행 날짜만 잡아 놓으면 영락없이 굿은 날씨로 변덕을 부리고 있으니 이 무슨 조화인지. 목요일 밤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한 날씨는 토요일 오후에나 개이고 강추위가 몰려온다는 예보에 따라 착잡한 마음에 험준한 정맥 길에서 생고생이나 하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으로 굿은 날씨에 집을 나서기가 망설여지지만 모처럼 박 회장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어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배낭을 꾸리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아직도 먼동이 터오기에는 이른 6시30분. 군자역 5번 출구에 신동아 관광이 대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올라서니 낮선 기사가 접수를 받고 있어 의아한 생각에 물어보니 박 회장은 러시아로 출장을 갔다는 대답에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맥이 풀린다. 사실은 산보다도 오래간만에 박 회장과 회포를 풀려고 했던 것인데 이마저도 어그러지고 말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산 꾼이 산을 마다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강남으로 복정역으로 순례를 하며 40인승의 안락한 좌석도 다 채우지 못하고 경상도의 산간마을 한티재를 향하여 출발을 한다.
이틀이나 내린 눈이 제법 많은 양으로 고속도로의 주위가 온통 눈으로 뒤덮이고 치악 휴계소의 전나무들이 눈의 무게에 짓눌려 가지가 축 늘어진 그림속의 동화의 나라에 온 듯 별천지를 이루고 죽령터널 지나 남쪽으로 달릴수록 눈의 양도 적어지며 구름 속에서 간간이 태양이 얼굴을 내 비친다. 영주를 지나 봉화 터널을 빠져 나오면 우리의 목적지인 영양 땅으로 들어선다. 우측으로 영양 제일의 고봉인 일월산(1,219m)이 구름 속에 잠겨있고 발길이 뜸한 경상도에서 영양군은 처음이라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설 레임으로 주위를 살펴보지만 첩첩산중의 오지마을이 三冬의 추위 속에 잠들어 있다.
자동차의 왕래가 뜸한 한티고개는 제설작업도 이루어 지지 않은 빙판길에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으로 산마루에 도착하니 눈은 그쳤지만 앞뒤의 연봉들이 운무 속에 자취를 감추고 바람한 점 없이 착 가라 앉은 날씨가 고단한 육신에 무거운 짐 하나를 더 얹어 놓은 듯 가슴이 답답하다. 토요일 아침의 텅 빈 고속도로를 질풍같이 달려와도 11시 30분에야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도 망설임 없이 눈 속으로 빠져든다. 수북이 쌓인 눈 속에 발자취를 남기며 미로 속을 찾아가는 길목에는 산객들의 소원이 담긴 표지기 들이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고 수월하게 몇 구비의 무명봉을 지나치면 낙락장송 허리춤에 시비가 걸려있으니 양주동님의 “산 길”이다.
산길을 간다 말없이/ 홀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소리/ 새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 그윽히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없이/ 밤에 홀로 산길을/ 홀로 산길을 간다.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 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바리톤 윤치호님의 음색을 되 뇌이며 한 구비 돌아서면 이번에는 박 목월 님의 (산이 날 에워싸고) 시비가 한얀 눈 속에서 우리를 반겨준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당 안팍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일월산의 정기를 받은 이곳은 충의 열사들과 문인들을 배출한 선비의 고장으로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유명한 이문열 작가의 고향이며 조광조의 후손이 살고 있는 주실 마을은 한양 조씨의 집성촌으로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 호은 종택이 있고 “시원” 창단과 저항 시인 오일도의 생가와 시비가 있는 문인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문학의 고장이라고 영양 군청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눈 속을 지나치는 봉우리마다 우리의 삭막하던 가슴에 불을 지피고 구중궁궐의 들보 감으로 천수를 누리고 있는 금강송의 향기에 취해 발걸음이 빨라지는데 예리한 칼날아래 난도질당한 밑둥치는 우리 인간들의 잔인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가슴 아픈 현장이 아닌가? (송진 채취를 위한 모습) 투덜투덜 푸념을 하며 눈길을 내려서면 우천 마을이 보이고 밭둑길을 지나 송림 속으로 정맥 길이 이어진다.
사방을 둘러봐도 논이라고는 단 한 평도 없이 완만한 산자락을 타고 비알 밭이 펼쳐지는데 공기 좋고 산수 좋은 이곳에서 재배되는 고추가 전국 제일의 명성을 얻고 있는 영양고추가 아니던가? 더하여 시원하게 뚤 린 정맥의 길목마다 이정표를 세우고 쉬어갈수 있는 나무의자를 만들어 그 어느 대간길보다도 정비가 잘 되어 있으니 바람결에 스쳐가는 정맥 길이지만 양반고을의 후덕한 인심에 감사드리며 완만한 능선을 넘나들며 “처사 단양 장공 한벽 지묘”를 내려서면 곧 바로 추령에 도착한다.(13시 20분)
한티재와 덕재의 중간거리인 6.6km 지점에 있는 추령은 포장길인지 비포장 길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많은 눈이 쌓여있고, 일명 가랫재 라고도 부르는 곳으로 일월면 가천리에서 수비면 오기리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인데 골짜기를 따라 거슬러 오른다는 *갈림*의 뜻과 가래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1.1km 지점에 오기저수지가 있다고 하지만 연무로 시야가 가려 볼 수가 없고 오늘의 산행 중에 가장 난코스라 할 수 있는 635봉 오름길은 설화가 절정을 이루는 구간으로 시베리아의 설원 속에서 썰매를 끌던 순록들이 거추장스러운 뿔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듯 빽빽한 나뭇가지들이 갖가지 형상의 녹용으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으니 세상의 어느 조각가가 이를 흉내 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의 오묘한 이치에 감복하며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도 녹용 열 첩보다도 값진 보약을 마시고 보듬어 보는 손길에 한 겨울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명약이 지천으로 널려있지 않은가?
635봉에 올라서면 완만한 능선 길에 설화가 만발하고 소나무와 철쭉의 터널을 빠져나오면 평평한 안부에 밑 빠진 가마솥이 휜 눈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발길로 눈을 쓸어보며 주막거리인지 화전민 터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심심산골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50,000/1 지도에는 오기리에서 죽피 마을로 이어지는 산길이 표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것으로 추정을 해 볼 수가 있다.
별 특징이 없는 구간에서 집터의 가구들을 발견하는 쾌감으로 콧노래 흥얼거리며 무명봉 하나를 넘어서면 남쪽으로 전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는 공터에 이르고 다래 넝쿨과 가시덤불이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설화를 피워내는데 우리의 눈이 사물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일억 화소라는데 500만 화소의 카메라로 얼마나 정교하게 담아낼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하루 종일 눈 속을 헤치며 시달려온 다리는 천근만근 눈 속으로 빠져들고 등산화 속으로 습기가 차오르는 고통 속에 631봉이 왜 이다지도 높아만 보이는지 갈지자로 어기적거리며 올라선
정수리에는 찬바람만 불어오고 지척에 왕릉 봉으로 명명된 635봉이 있다고 하지만 지친 몸에 찾아보기도 귀찮고 덕 고개를 향해 발걸음을 이어갈 뿐이다. 재미있는 일화로 한티 재에서 검마산 임도까지 장장 15km가 넘는 구간에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봉우리들이 올망졸망 솟아 있지만 이름표하나 달고 있는 산이 없기로 어느 사진작가가 왕의 능처럼 생긴 봉우리를 바라보며 읍 조린 것이 시작이 되어 정맥의 개념도에도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지섣달의 짧은 해가 서산마루에 걸리고 깊고 깊은 계곡으로 산 그림자가 드리우는 16시. 드디어 덕재에 도착했지만 우리의 앞길에는 3km의 여정이 더 남아 있다. 전망 좋은 절개지 위로 올라서면 하루 종일 운해 속에 몸을 숨기던 오기리 들녘이 활짝 열리며 한티재가 빤히 바라보인다. 직선거리로는 4km에 불과한 거리를 V 형태로 돌고 돌아 물길을 피해 달려온 거리가 12km에 이르니 대간의 종주길이 아니면 맛보기 힘든 즐거움이 아닌가?
고도를 높이며 지그재그로 다람쥐 체 바퀴 돌리는 주능선은 열두 폭 치마의 주름을 잡아 놓은 듯 가도 가도 제자리를 맴돌고 남쪽의 오십봉(826m)과 전면의 검마산 그 너머로 백암산(1,003m)이 구름사이로 간간이 얼굴을 내 비추며 어슴푸레 짙어가는 노을 속에 어둠이 드리우고 급해지는 마음을 다스리며 630봉을 올라서니 드디어 발치 아래로 임도가 모습을 들어 낸다. 사실 대간 길로는 멀지않은 구간이지만 하루 종일 눈 속을 헤치는 강행군에 녹초가 되어 그 어느 구간보다도 힘이 들었지만 1.5km의 임도만 내려서면 된다는 자신감에 새로운 용기가 나고 16시 20분 사곡 마을에 있는 검마산 휴양림에 도착하며 무자년을 시작하는 서설산행도 무사히 마감을 한다.
제 2 부 - 조물주가 빗어 놓은 만물상
좋은 말로 빌리지, 콘테이너 숙소는 장병들이 사열하듯 네 줄 벌로 10열 횡대. 1칸에 6명씩 새우잠을 자는데 다리건너 찾아가는 화장실과 샤워장은 70년대 꼬방 동네를 떠 올리며 맥 놓고 돌아섰다 미아 되기 십상이라. 코고는 이, 이빨 가는 이 연화지옥 수라장이 따로 없고, 선 잠속에 과음한 탓으로 모래알 씹는 부페 식당의 모두메밥,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억지로 배 채우고 만물상을 찾아간다.
북측이 자랑하는 미인 송은 금강산과 백두산, 시베리아의 어느 곳에만 자생하는 희귀종이라고 자랑이 늘어지고 15m 이상으로 미끈미끈하게 자란 것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무게를 이기지못하고 가지들이 부러진 탓이란다. 80년에서 300년씩 된 소나무 숲은 세상에 둘도 없는 산림욕장으로 아침햇살에 눈부시게 피톤치드가 넘쳐난다.
일제시대 에 중단된 도로를 전사들이 만들어서 영웅고개라 부르는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금강산의 정상인 비로봉도 이곳을 거쳐야 하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인간들이 활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여 미니버스 한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일방통행으로 좁은 길이 이어진다. 일흔일곱 구비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만물상을 오르는 12km 머나먼 길에 통행시간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마주 오는 차량을 볼 수가 없다.
온정리를 떠나 10분쯤 왼쪽으로 관음봉이 까마득히 올려다 보인다. 수백 척 절벽에 걸린 폭포는 이슬비 내리는 건폭이지만 7-8월 장마철엔 하늘에서 쏟아지는 힘찬 물줄기가 천지를 진동하고 굉음소리가 삼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는 육하폭포다. 차안에서 사진 찍는 것이 금지되어 아쉬운 장면들이 스쳐 지나고 만다.
25분 만에 만물상의 들머리인 고개 마루(표고 660m)에 올라서면 미리 와서 기다리는 수 십대의 버스가 길옆에 대기하고 있다. 이곳은 만물상에 올랐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로 먼저 내려오는 순서대로 차에 탑승을 하게 된다.
또한 이곳에는 천선대와 망양대의 두 코스가 있는데 어느 쪽이든 자기의 취향에 따라 선택을 하여 한곳만 다녀와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주차장에서 1km 지점에 갈림길이 있다. 이곳에서 좌측의 천선대는 만물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노약자들이 선택하는 250여m의 짧은 코스이고, 우측의 망양대는 해금강을 비롯하여 주위를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제1, 2, 3 전망대 까지 1,5km의 장거리 코스로 당연히 망양대 쪽으로 겨냥을 하여 출발을 한다.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만상정이 있지만 내려와서 보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협곡으로 들어선다. 들머리는 경사가 심한 돌계단으로 시작이 된다. 세존 봉을 다녀오며 많은 힘을 소진한데다 과음을 한 탓인지 온몸이 쑤시고 결리고, 평상시 같으면 성큼성큼 올라갈 계단이지만 물먹은 솜처럼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른다.
고도를 높여가며 400여 m를 올라가면 삼선암에 도착한다. 주위에 펼쳐지는 만물상의 전모가 윤곽을 드러낸다. 만 가지 형상의 기암괴석이 자태를 뽐내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 흉물스러운 귀면 암이다. 금강산의 잡귀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설악산의 귀면 암과는 사촌지간이 아닐 런지. 주위경관을 카메라에 담느라 느려지는 발걸음, 하나둘 추월을 하다 보니 어느덧 선두에 나선다. 좀 더 멋있는 경관을 보기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길을 안내하는 동무들이 자기들 보다 먼저 올라가서는 안 된다며 통제를 하고 있다.
사전교육에, 하지 말라는 첫 번째는 침 뱉지 마라. 휴지 버리지 마라. 담배 피지마라. 방뇨하지마라. 하지만 가장 큰 것은 이북 안내원들과 정치얘기로부터 그들과 언쟁을 하지마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어찌 거역을 하겠는가? 순한 양이 되어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아픈 다리 쉬어 갈 겸, 철 계단에 걸 터 안는다.
잠시 후, 절부암에 올라서면 고도가 높아진 탓인지, 만물상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건너편의 석주기둥 꼭대기에는 날렵하게 올라앉은 독수리상이 이채를 띠고, 드디어 갈림길에 도착한다. 왼쪽으로 가면 천선대요, 오른쪽은 망양대라. 선두의 주력 좋은 산객들이 모두 망양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암봉의 틈 사이를 비집고 오르는 암릉 길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는 경치는 점입가경으로 만물상은 물론이요. 관음봉의 연릉 들이 그림처럼 흘러간다.
절부암에서 600m를 오르면 전망 좋은 안심대에 도착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일만 이천의 기암들이 만 가지 형상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건너다보이는 천선대 정상에는 어느덧 하나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벼랑 끝에 수직으로 걸려 있는 철사다리가 멀리서 바라보아도 아슬아슬하고 지레 겁을 먹고 내 지르는 단말마와 같은 비명과 탄성소리가 깊은 계곡으로 울려 퍼진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어느 곳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 가파른 철 계단이 협곡사이로 걸려있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린다. 아득하게 멀어만 보이는 정상은 수백 개의 계단이 하늘로 이어진 듯 , 오르고 또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안부에 올라서면 시끌벅적 인기척이 나는 정상이 지척이다. 안심대에서 720m, 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2.2km 그리 멀지않은 곳이지만 가파른 돌층계를 오르는 길이 수월하지 않고 1,041m의 정상은 뾰족한 암 봉으로 서너 명이 머물만한 협소한 공간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눈이 부신 만물상. 보고 또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일만 이천 봉. 하나하나 세어 볼 수는 없지만, 발아래 펼쳐지는 계곡너머로 관음봉이 병풍처럼 솟아오르고, 어제 올랐던 세존 봉이 유난히 뾰족한 첨봉으로 바라보인다. 금강의 주봉인 비로봉은 봉황이 비상하는 날개 짓으로 옥녀봉, 관음봉, 차일봉, 장군봉, 집선봉의 산줄기들이 꼬리를 치켜든다.
남쪽을 바라보면 수정봉의 백옥 같은 바위들이 아침햇살에 눈이 부시고 동쪽으로 짙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금수강산. 일만 이 천봉 어느 한곳도 부족함이 없는 수석 전시장으로 우리의 가슴이 요동친다.
금강산의 외설악은 어제 올랐던 구룡연과 만물상이 대표적인 관광명소인데 구룡연은 계곡을 끼고 5km에 걸쳐 크고 작은 폭포와 용소들이 아름다운 절경을 빗어내는 섬세한 여인의 모습이라면, 이곳 만물상은 기골이 장대한 호걸선풍의 남자에 비유할 수 있으니 두 곳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동쪽으로 보이는 제2, 제3의 전망대로 건너가는 길. 하지만 앞을 가로막는 안내원들. 더 이상 가지 마시라요. 냉정한 한마디에 가지 못할 전망대를 바라보며 힘없이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현재시각이 9시 40분, 오후 2시에 만나는 그 시간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막연한 생각에 건너편의 천선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한 달음에 달려온 갈림길, 수고 많이 하셨습네다. 안녕히 가시라요. 사정도 하기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는 목석같은 안내원. 야속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며 곰곰이 생각을 해도 천선대를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미련이 남아, 올라오는 일행들 틈에 끼어 천선대의 길목을 통과하는데 성공을 하고 쾌재를 부른다.
갈림길에서 70m 를 오르면 산수화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전망대에 도착한다. 너른 암반위에 서 바라보는 만물상의 또 다른 모습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조금 전에 올랐던 망양대가 아슬아슬한 수직 단애를 이루고 있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200여 m 남짓하지만 수직절벽의 벼랑에 걸려있는 철사다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거리가 짧다는 만만함으로 노약자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룬다. 생전에 소원으로 금강산 구경을 왔다는 8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아슬아슬한 사다리에서 후둘 거리는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여러 사람들이 가는 길을 방해 하고 있지만, 누구하나 불평 없이 기다리는 느긋함에서 선진국민의 질서의식을 실감할 수 있다.
150여 m의 짧은 거리를 20여분이나 기다린 끝에 하늘로 오르는 땅 문에 올라선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절경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만다. 우리 모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소풍 나온 유치원생처럼 기쁨과 즐거움에 홍조 띤 얼굴로 처음 보는 사람과도 격의 없는 대화가 오고가고 십년은 젊어지는 듯 소문만복래라 드디어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216호 천선대* 의 표지석이 있는 정상(936m)에 올라선다. 천선대와 망양대를 모두 돌아보는 소원을 이루어주신 금강산 신령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묘한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위대한 수령님의 찬양비가 있는 곳을 정점으로 하산 길에 들어선다.
하늘문의 들창을 열고 정원을 바라보면 망양대의 산수화가 정면으로 들어오고 하늘의 신선들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노닐던 곳이 아닌가? 가파른 벼랑을 휘돌아 내려서면 만물상의 산삼이 녹아 흐르는 망장천에 도착한다. 몸에 좋은 영약이라 아기오줌 줄기보다도 적은 양으로 감질나게 기다려야 하는 인내가 필요하지만 장수한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다리는 인내력으로 한 모금 목을 축이고, 또다시 벼랑길을 내려서면 갈림길에서 안내원 동무. 안녕히 가시라요. 상냥한 미소로 작별인사를 건넨다.
올라오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 모두가 기다림에 지쳐 짜증이 나는데, 새치기 하다 무안당하는 꼬락서니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온들 별수 있나* 담배꽁초하나, 쓰레기 한 점, 먹다 남은 과자봉지하나 찾아볼 수 없고 똥파리와 개미떼를 볼 수 없으니 공중도덕 자연보호 본받아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에서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곳에도 이동주보 목청을 높이고, 옥수수 막걸리 한 병에 3불씩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망양대 다녀오는 갈증에는 최고 인기라. 내장까지 시원한 짜릿함이여.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 만이 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어느새 합창으로 변하여 멀리멀리 관음봉 골짜기로 울려 퍼지고 그리운 금강산의 정경이 우리가슴속에 자리를 잡는다.
온정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이 11시 50분. 서둘러 샤워하고. 온정각 동관의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제육볶음(10불)에 반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2일간을 되돌아보며 입가에 피어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면세점에 들려 쇼핑도하고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장전항으로 향한다.
행정지명으로는 고성 항으로 부르고 있는 곳.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아이가 활시위를 팽팽이 당기고 있는 모습이라 長箭港(장전항)으로 부르고 있단다. 뱃길이 열리고 처음에는 장전항에 유람선이 들어와 정박을 하고 이곳에서 숙식을 하며 관광을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장전항에는 싱가포르에서 구입한 자상 6층에 지하 2층의 유람선을 해금강호텔이라 명명하고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해금강 호텔 테라스(갑판)에서 바라보는 경관 또한 압권으로 명경지수의 잔잔한 호수는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내고 정면으로 외금강의 주요한 산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듯 황홀경에 빠져든다. 바닷가의 낮은 언덕에는 골프장이 조성되어 영업 중이고, 이곳에도 빌리지가 단지를 이루며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은 팬션과 큰 대조를 이룬다.
다시 온정리로 돌아와 금강산을 출발하는 시간이 남아있어 면세점 옆의 광장으로 올라서니 큰 비석에는 고인이 된 현대아산의 정몽헌 회장을 추모하는 비문과 그 옆에 유품으로 조성한 묘가 있다. 먼 훗날 정주영 명예회장 부자의 공적이 더욱 빛을 발할 큰 업적이기에 머리 숙여 추모를 한다. 이분들의 숭고한 정신이 헛되지 않아 남북이 화해의 물꼬를 트며 뱃길이 열린지 10년. 150만의 관광객이 금강산을 찾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10월2일 남북정상회담차 판문점의 휴전선을 넘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감동적이었는데, 일주일 사이를 두고 내 자신이 분단의 벽인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 관광을 하게 되었으니 내 생전 가장 큰 소원을 이룬 것이다. 철의 장막에 가로막힌 북한 땅을 가고 싶을 때는 언제라도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