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제 5 장 - 신바람 나는 하이워킹
제 5 장
신바람 나는 하이워킹
중랑천의 새 아침
아름다운 한강 걸어서 백리 길
양재 천과 탄천의 만남은 학 여울에서
우산속의 한강 아름다워라
호반 위로 떠오른 오봉산
여기도 용아장성 빗속을 가다
키나바루에는 불로초가 있었네.
황산에 부는 바람
10년만의 외출
사랑하는 아들아
내소사 가는 길
겨울 산
두위봉의 철쭉
쉰 길 폭포
해설 - 산악문학이 새로운 지평을 열며
(시조시인 - 김은남)
중랑천의 새 아침
여울 져 흐르는 중랑천에
물안개 피어오르면
흰 두루미 재두루미 날개 짓하고
잉어 떼들 힘차게 솟구쳐 오르며
가지런한 푸른 잔디
그 사이로
붉은색 아스콘 자전거 도로
걷는 사람 뛰는 사람 모습은 달라도
마음만은 한 가지 건강을 위해
먹장가래 토해내며 堪耐 하는 즐거움에
삶의 활력이 솟아 나오고
송사리 떼 피라미 떼
개구쟁이 물장난
맑은 물이 졸, 졸, 졸
아름다운 중랑천이
공장의 오폐수로
죽음의 강이었지
수십 배의 노력으로 되살아나서
이제는 숨 쉬고 살만하게 되었네.
하늬바람 불어오는 강 언덕에
싱그러운 코스모스 고추잠자리
모두가 내 친구 지상의 낙원
밝은 인사 환한 웃음
우리의 희망
아름다운 한강 걸어서 백리 길
-한강 암사 유원지에서 행주대교까지-
진 입 로 : 암사역에서 출발지까지 3.6km, 도착지에서 방화역까지 3km.
우리 집 옆으로 중랑천이 흐르고 큰 비만 내리면 부유물이 쌓이고 공장 오폐수가 흘러내리며 악취로 코를 들지 못했는데, 금년 봄부터 하상정리를 하고 푸른 잔디를 심어 붉은 아스콘으로 자전거 전용도로를 조성하면서 주위가 청결해지고 두루미 가족들이 날개 짓하며 잉어 떼들이 노니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변신을 하게 되었다.
조깅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산으로만 향하던 나의 편견도 고수부지로 내려서서 그들과 함께 걷다보니 시속 6km의 주력으로 자신감이 생기며 연결되지 않은 길이지만 도봉동을 지나 월계역까지 2시간 만에 도착을 하고보니 주위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어느새 살곶이 다리까지 오게 되며 새로운 도전으로 한강을 완주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산행경력 십 수 년에 300여산을 오르며 내 나름대로 건강에 자신감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도전 앞에 두려움을 지우고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 주위에 입소문을 내고 남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들을 하겠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목표이기에 최선을 다 하여 세밀한 계획과 사전답사까지 하며 8월 28일에는 한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 금대봉 기슭에 있는 검룡소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된 새벽에 일어나 배낭을 꾸리고 지하철과 택시를 번갈아 타며 출발지인 암사동 유원지에 도착하니 오늘의 동반자인 미투리산악회의 황도현대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강가의 수초사이로 스멀스멀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며 건너편의 아차산도 워커힐도 운무 속에 몸을 가리고 조깅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린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강가를 중심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암사동에 있는 선사유적지는 신석기시대(약 6,000년 전)의 주거지로 움막형태를 이루고 사적 제 267호로 보호를 하고 있으며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마을로 바위절(백중사)이라 부르며 생겨난 암사동은 상수원 보호 지역으로 상류 쪽으로는 더 이상 접근을 할 수가 없고 자연 모래톱과 수 십 만평의 갈대밭이 철새들의 천국을 이루고 있다.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황 대장과 굳은 악수를 나누며 무사히 완주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며 7시 10분 멀고도 먼 행주대교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 딛는다.
인구 천 호가 살만한 곳이라 하여 천호동으로 부르고 있는 이곳은 수도 서울의 동쪽에 수십만이 생활하는 거점도시가 되었으며 한강에서 두 번째로 가설된(1936년) 광진교가 천수를 다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공사가 한창이며 천호대교 옆으로는 사적 제 11호인 풍납토성이 새로 복원이 되어 옛 조상들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 백제의 수도인 하남 위래 성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올림픽대교.....
88년 올림픽의 힘찬 함성이 지구촌에 울려 퍼지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korea가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곳으로 암사유적지에서 6km 하류에 있는 몽촌토성은 움막의 형태를 버리고 지상에 건물을 지어 그 당시로는 첨단문명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백제 초기의 중심지로 목책과 진흙으로 토성을 쌓고 해자를 파서 방어용 성을 구축하였는데 우리 후손들이 이곳에서 지구촌 한 마당 잔치를 펼친 곳이라 감회가 남다르다.
물러 설줄 모르는 안개가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지만 경쾌한 발걸음에 거칠 것이 없고 시속 6km가 넘는 속도로 한 시간 만에 잠실철교를 통과하고 쓰라린 역사를 되돌아보는 삼전도를 지나치게 된다. 지금은 롯데 재벌의 안마당이 되어 화려하고 풍요로운 휴식공간으로 꽃을 피우고 있지만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삼전도비는 역사의 치욕이며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을 하다가 엄동설한에 세자와 함께 맨발로 걸어 나와 삼전도에 마련한 청 태종의 수향진에 무릎을 꿇었으니 국제정세를 무시한 친명정책이 국운을 흔드는 비극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으로 남아있다.
잠실 선착장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전의를 가다듬고 경쾌한 발걸음을 재촉할 때 ?桑田이 碧海?라는 말이 실감나는 뽕나무밭이 무성하던 삼전나루에 무역 센타를 중심으로 빌딩들이 하늘 숲을 이루고 88올림픽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던 잠실종합 운동장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차도와 철교가 공존하는 청담대교를 지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성수대교가 나타난다.
전쟁의 폐허와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조국 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빨리 빨리?라는 신조어가 유행하며 단시간에 도로가 뚫리고 다리가 놓이며 빌딩이 들어서는 대역사가 이루어지더니 부실공사의 대명사로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15km를 2시간 30분만에 주파하며 동호대교를 지나 잠원 선착장에 이르면 조국 근대화의 효시인 한남대교가 바라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이 다리에서 시작된 것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일일 생활권으로 이어주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며 강남이 발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우리의 발걸음은 10시를 조금 넘어 암사동에서 행주대교까지의 중간거리인 반포대교를 지난다.
한강이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름답게 조성한 시민 공원이 있기 때문인데 강북에는 난지지구, 망원지구, 이촌지구, 뚝섬지구, 강남으로는 강서지구, 선유도공원, 양화지구, 여의도 지구, 반포지구, 잠원지구, 잠실지구, 광나루 지구 등 각 지구마다 각종 체육시설과 오락시설이 마련되어 다양한 레포츠로 건강을 살찌우고 서울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작대교를 지나며 왼쪽으로 양지바른 산기슭에는 조국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가 나타난다. 관악산의 공작 봉을 주봉으로 한강을 굽어보며 조성된 43만평의 면적에 16만 3천 여기가 모셔져있는데 그곳에는 69년 월남의 정글에서 백마사단작전을 수행하던 중 산화한 나의 전우 신재기 병장이 잠들어있어 그 시절을 회상하며 눈시울이 붉어진다.(백마 52포병대대 B포대 캄란베이 주둔)
사연도 많고 한도 많은 한강대교......
한강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서울의 관문으로 그때까지 주요 수단이던 배들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한강철교의 건설과 함께 노량진과 영등포가 비약적으로 발전이 되었으니 강남개발의 효시는 이때부터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보무도 당당하게 한강대교를 지나 사육신묘를 왼편으로 끼고 돌면 코스모스 꽃길 너머로 하늘높이 솟아오른 63빌딩이 황금색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전망 좋은 여의도의 길목에서 욱일승천하는 대한민국의 기상을 대변하는 그 모습을 마주보며 사이클, 인라인, 조깅하는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암사동을 출발한지 4시간 43분만인 11시53분 원효대교 앞을 지나며 여의도에 입성한다.(도상거리 24km)
면적이 8,4㎢에 3만여 명이 살고 있는 여의도는 강의 상류로부터 유입된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섬으로 오랜 세월 방치되어 오다가 1916년 일제가 이곳에 간이 비행장을 건설하며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고 1936년 김포공항이 건설된 후로는 명맥을 유지하다가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다 1968년 서울시에서 윤중제를 축조하며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는데 1970년 마포대교가 건설되고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과 증권회사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밀집되어 있고 방송국을 중심으로 63빌딩, 쌍둥이빌딩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건물들이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유동인구 수십만이 숨 쉬고 있는 서울의 심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때 이른 점심이지만 이동버스 간이식당에서 잔치국수를 들며 1시간 동안의 즐거운 휴식을 보내고 12시 51분 마포대교를 지나며 행주대교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평지를 걷는 것이 산을 오르는 것보다야 수월하지만 나름대로 힘든 고비길이 있어 여의도에 도착하며 발에 물집이 생기며 고통으로 힘들어 하던 황 대장이 서강대교를 지나며 다리를 절기 시작한다.
한발 한발 걸어가는 발자국 마다 고통스러운 그 모습이 안스러워 말도 못하고 눈치를 보며 속도를 조절하고 쉬어가는 시간이 길어지지만 백리가 넘는 길을 단시간에 걷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무그늘 하나 없는 아스팔트 위를 30도의 지열 속에 움직이다보면 온몸이 나른하게 늘어지고 한낮이 기울건만 야속한 안개는 시야를 가리고 강 건너 절두산이 당산철교 끝머리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양화대교를 지나며 그림 같은 선유도 공원이 나타난다.
하늘높이 무지개다리가 선유도 숲속으로 이어지고 한가로운 강가에는 여유로운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고 아름답게 조성된 꽃 길사이로 자전거 행렬이 질주를 하며 지금은 가동이 중단되고 있지만 세계제일의 분수(202m)가 한 여름이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성산대교를 지나며 인적도 드믄 다리 사이로 지루한 행진이 계속되는데 황 대장의 발에서 물집이 터져 등산화 밖으로 흥건하게 흘러나온다.
가양대교 아래 자리를 잡고 휴식을 하지만 응급조치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목적지까지는 아직도 5.5km나 남아있고 되돌아 나와 방화역까지 가자면 8km가 넘는 데 저런 고통으로 어찌 완주를 할 수 있을지? 37km를 지나왔는데 중도에서 포기한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워 괜찮겠느냐고 물어보니 피곤함속에서도 씩 웃어 보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강 건너로는 붉은 악마로 대변되는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상암 경기장이 윤곽을 드러내고 서쪽으로는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난지도 쓰레기 산. 조국 근대화의 부산물로 버려진 땅으로 그 누구도 찾지 않던 악취 나던 그곳에서 지구촌의 축제가 열리고 이제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105만평의 너른 대지위에 평화의 공원, 난지천 공원, 하늘 공원, 노을 공원으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오늘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해 도착 지점에서 만나기로 한 아내와 아이들이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는 핸드폰 신호음이 계속 울리고 목적지를 향하는 발걸음에 힘이 솟는다.
한강에 27번째로 건설된 방화대교(2,000년)는 가장길고(2,559m)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인천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교량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며 중앙의 540m의 아치 트러스는 비행기의 이 착륙을 연상하는 공법으로 야간의 화려한 조명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오후 3시 49분 드디어 방화대교에 도착하고 남은 것은 1,7km. 그 멀고도 지루한 여정을 마감하고 결승점을 향한 숨고르기를 하며 아직도 행주대교에서 되돌아 나오는 것을 감안하면 3km가 넘는 거리가 남아있어 고통스러워하는 황 대장에게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보지만 그러면 진정한 완주가 아니니 그대로 걸어 보겠다고 한다. 지칠 줄 모르는 투지에 감복하면서 결승점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내걷는 다.
행주대교 까지 펼쳐지는 수 십 만평의 초지는 강서생태공원으로 거듭 태어나 철새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수초사이로 산책로를 따라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이 다정해 보이며 강 건너 우뚝 솟은 행주산성은 사적 제 5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권율 장군이 10배가 넘는 왜군 3만을 물리친 곳으로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가 있고 그 당시 부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다 싸운데 유래하여 행주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행주대교 아래 버드나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오후 4시 10분 . 9시간의 힘든 고행의 길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우리는 힘찬 포옹으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뒤따라 도착한 아내와 큰딸 명숙, 둘째 미숙, 아들 재형이 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가장인 애비의 성공을 자축하는 환영파티로 즐거움을 나누며 행복의 나래를 활짝 편다.
걸어서 종주를 하기는 처음이라는 한강관리사무소의 설명이 아니라도 50km는 나의 자존심이며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지리산 당일 종주와 함께 가슴속에 훈장으로 간직하며 자아실현의 긍지로 삼고 오늘 내가 걸어온 45km, 68,000여 발자국도 암사동에서 제1보를 시작했듯이 유유히 흐르는 저 넓은 강물도 금대봉 기슭의 이름 모를 풀잎에서 떨어진 빗물이 고목나무 샘물을 적시고 지하에서 솟구치는 검룡소의 계곡물이 발원지가 되어 497km를 지나오는 동안 숱한 사연을 잉태하며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은 확인하며 무심히 지나쳤던 일들을 되돌아보게 되고 이 길이 김포를 지나 강화까지 이어지는 날 한 없이 걸어보고 싶다.
한강을 걸어서
다리 이름 길이 완공일자 거리 도착시간 비고
암사동 수원지 출발 07시 10분
광 진 교 1,037m 1936 년 3,5km 07시 42분
천호대교 1,150m 1976 년 3.9km 07시 45분
올림픽대교 1,470m 1989 년 5.4km 08시
잠실철교 1,270m 1979 년 6.3km 08시 09분
잠실대교 1,280m 1972 년 7.1km 08시 15분
잠실 선착장 08시 27분 도착. 8분간 휴식. 08시 35분 출발
청담대교 1,211m 1999 년 10.1km 08시 55분
영동대교 1,040m 1973 년 11.4km 09시 05분
성수대교 1,160m 1979 년 13.2km 09시 27분
1994년 10월 21일 붕괴로 1998년 다시 건설하고 확장 공사 중
동호대교 1,220m 1984 년 14.3km 09시 39분
잠원 선착장 09시 49분 도착, 11분간 휴식, 10시 출발
한남대교 915m 1970 년 15.4km 10시 05분
반포대교 1,495m 1982 년 17.4km 10시 30분
잠 수 교 795m 1976 년
동작대교 1,330m 1984 년 19.2km 10시 50분
동작대교 아래서 10분간 휴식 11시 출발
한강대교 1,005m 1930 년 21.2km 11시 27분
한강철교 1,110m 1900 년 22.0km 11시 35분
원효대교 1,470m 1981 년 24.0km 11시 53분
여의나루 선착장 11시 55분 도착, 50분간 점심 겸 휴식 12시 45분 출발
마포대교 1,389m 1970 년 25.8km 12시 51분
서강대교 1,320m 1996 년 26.6km 13시
국회의사당 옆 13시 05분 도착, 5분간 휴식, 13시 10분 출발
당산철교 1,360m 1983 년 28.4km 13시 30분
양화대교 1,128m 1965 년 28.8km 13시 35분
양화진 선착장 13시 47분 도착, 9분간 휴식, 13시 56분 출발
성산대교 1,410m 1980 년 30.3km 14시 03분
가양대교 1,515m 33.5km 14시 39분
가양대교 아래서 15분 휴식, 14시 55분 출발
방화대교 유원지 15시 40분 도착, 5분간 휴식, 15시 45분 출발
방화대교 2,559m 2000 년 37.3km 15시 49분
행주대교 1,460m 1995 년 39.0km 16시 10분
암사동 수원지에서 행주대교까지 39km를 9시간에 완주하고 진입로 6.6km는 별도임
양재천과 탄천의 만남은 학여울에서
행사일시 : 2003년 11월 12일 진행시간 : 7시간 3분 동행인: 전 부하
장 소 : 서울시 양재천 시민의 숲, 무지개다리 - 경기도 분당구 오리역 동막교 까지
무성했던 가로수도 스산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맥없이 떨어져 아스팔트위로 흩날리고 외투 깃 곧추세우고 동동거리는 시민들의 출근길 따라 우리는 양재동 시민의 숲 무지개다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난 9월 17일 암사동에서 행주대교까지 한강변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백리 길을 완주하고 주위에서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제2탄으로 양재 천과 탄천을 거슬러 오르는 행사를 추진하며 큰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희망자들 중에 내 노라 하는 산 꾼들을 엄선하여 심혈을 기울여 왔지만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몇 일째 오락가락하며 애를 태우더니 행사날인 12일까지도 계속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 함께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하고 애를 태우다 결국 무모한 강행군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다음기회로 미루자는 결심으로 연락을 하니 모두들 근심어린 심정으로 환영을 한다.
오후 내내 허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다 초저녁 하늘을 바라보니 이 무슨 일이람 !
그렇게도 내 가슴을 억누르던 먹장구름은 어디로 가고 어둠속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의 향연. 일기예보에서는 차차 흐린 뒤 내일오후부터 비가 내린다고 알려준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이얼을 돌리니 이미 다른 약속이 있다는 응답으로 도봉동의 전 부하 씨와 둘이서 행사를 하게 되었다.
양재천은 관악산의 남동쪽에서 발원하여 과천 신도시를 거쳐 서초구와 강남구를 경계로 18.2km를 흘러오다 대치교 아래서 탄천과 합류하게 되는데 예전에는 한강으로 직접유입이 되었으나 1970년 수로 변경공사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청담교 아래서 7.8km 상류지점인 양재동 시민의 숲 무지개다리까지 자전거 전용도로가 개설되어 이곳이 오늘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도성에서 바라보는 관악산은 연봉들이 타오르는 불꽃형상을 하고 있는 火山으로 그 기운이 강성하여 각종질병과 화재가 만연하므로 경복궁 정문에 물의 화신인 해태 상을 세우고, 불은불로 제압한다는 속설대로 일직선상에 있는 남대문의 현판을 崇禮門 으로,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라는 뜻에서 세로로 내걸었지만, 火氣가 센 흉산으로 알려진 관악산이 경기 五嶽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며 남쪽의 양지바른 언덕에는 과천 신도시가 자리 잡고 그 앞으로 수백만평의 너른 분지에 남서울 대공원과 경마장이 도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남쪽기슭에는 호국영령들이 잠들어있는 국립묘지와 나라의 동량들이 백년대계를 꿈꾸는 보금자리인 서울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도심지 가운데 자리 잡은 관악산은 심신을 단련하는 안식처로 도봉산, 북한산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서울의 명소가 되어있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08시10분 출발지인 무지개다리에 도착하니 착 가라앉은 구름,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이 심술을 부리지만 가는데 까지 가보자는 느긋한 심정으로“50km는 나의자존심”이라는 로고가 새겨진 노란 티셔츠로 갈아입고 배낭에는 깃발도 꽂고 파이팅 외치며 전의를 불태운다. 오늘 함께 동행 하는 전부하 씨는 고향이 충북영동으로 소년시절부터 중장거리 선수로 도 체육대회에서 입상을 하며 높이뛰기(1m 65㎝) 에서 두각을 나타낸 만능선수로 64세인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야 산악회의 선두가이드로, 젊은이도 따르지 못하는 산 꾼으로, 2년 전에는 산악마라톤에 참가하여 입상을 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는 베테랑이다
대학입시 열풍의 진원지로 명문 고등학교와 입시학원이 밀집되어있고 하늘높이 치솟은 빌딩의 숲, 화려한 쇼핑센터와 젊음의 혈기가 넘치는 서울의 심장부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강남이지만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느 농촌과 다름없이 홍수가나면 상습 침수지역으로 갈대와 뽕나무밭이 무성한 버려진 땅으로 논농사에 의지하고 서울 시민들에게 채소를 공급하며 생활하던 인구 만 여명에 불과한 광주군 언주면과 대왕면 시흥군 신동면이, 조국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하는 인구로 강북이 포화상태가 되자 인구를 분산하기 위하여 63년 강남개발을 추진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불편한 교통여건과 기반시설이 미약하여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지만 한남대교를 건설하고 강북의 명문 고등학교를 이주시키고 지하철 2호선을 신설하여 살기 좋은 아파트가 한강가로 들어서며 각종 행정력을 동원하여 불도저식으로 추진을 하면서 성동구에서 강남구로, 서초구로, 송파구로 핵분열을 일으키듯,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강남, 서초, 송파에 150만의 주민이 생활하는 서울에서 가장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동리가 된 것이다.
부자동네에 걸맞게 친환경 생태공원으로 조성된 양재천은 양쪽으로 자전거 전용도로가 시원스레 뻗어있고 무성한 갈대와 수초사이로 징검다리가 놓이고 물가에는 갯버들이 물고기들의 안식처가 되어 송사리, 피라미를 잡든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군데군데 쉼터에는 야외무대가 마련되어 한여름 밤의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내리는 환상 속에, 붉은색 아스콘 위를 미끄러지듯 6km가넘는 속도를 유지하며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즐거운 마음으로 러닝하이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촘촘하게 놓인 다리위로 차량행렬이 질주하고 왼편으로 하늘높이 솟아오른 삼성타워 펠리스, 최첨단 보안시스템이 갖추어진 이곳은 선택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복권으로 횡재를 하게 되면 남의이목을 피해 은신처로 이곳을 택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영동4교에 이르니 가을걷이가 끝난 벼농사 학습장에는 집단들이 듬성듬성 쌓여있고 지난가을 고향(충주시 주덕읍)에서 시집온 메뚜기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는 곳이라 더욱 정겹게 느껴지며 왼편으로 우성 ,선경, 미도 APT가 시야에 들어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겉으로 보기엔 아주 평범하고 지은 지 20여년이나 된 낡은 APT이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평당 3,000만원으로 31평형이 9억 3,000만원을 호가하고 있으니 금싸라기 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평당 500돈의 금을 지니고 있다면 실감이 날수 있을까?
출발한지 한시간만에 양재천과 탄천이 만나는 대치교에 도착하니 두 물이 합류되는 이곳을 학 여울이라 하고 노랑부리 백로의 서식지로 180여종의 수변 식믈이 자생하고 있으며 강폭도 넓어지고 무성한 갈대숲사이로 청둥오리와 두루미들이 날개 짓을 하고 있다. 우리의 힘찬 발걸음은 멈출 줄을 모르고 한강본류를 향하여 물길 따라 내려가니 탄천2교아래 둔치에는 예비운전자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강남 운전면허시험장이 나타나고, 좌측으로 삼성교가 걸려있는 테헤란로는 강남의 일번지로 경제, 무역, 금융을 대변하는 무역회관을 중심으로 빌딩숲을 이루고, 우측으로 지구촌의 한마당 잔치가 펼쳐진 88올림픽의 메인스타디움이 웅장한 모습을 보이며, 머리위로 어지럽게 펼쳐지는 고가차도위로 차량행렬이 질주하고 있다.
양재천 무지개다리를 출발한지 1시간 15분 만에 청담대교아래 한강둔치에 도착한 우리는 가쁜 숨을 고르며 유유히 흐르는 한강 너머로 뚝섬의 공장지대가 아파트 숲으로 강변을 따라 솟아오르는 모습이 애벌레가 성충이 되기 위한 몸부림으로 허물벗기를 하는 것으로 연상이 된다. 양재천의 답사는 끝이 나고 이제 탄천을 거슬러 오르는 본격적인 행진이 시작되지만 심술 굳은 날씨는 그새를 참지를 못하고 비를 뿌리고 만다. 탄천은 경기도 용인시 구성 읍에서 발원하여 성남시, 송파구, 강남구를 지나며 한강으로 흘러드는데 35,6km에 면적이 302㎢이고 그중에 절반이 넘는 25km구간이 성남의 중심지를 지나게 되며 오늘 우리가 지나는 답사의 길이 되는 것이다.
두 물 머리 학여울 갈대밭 둔치에는 탄천의 유래가 소개되고 있는데, 한강이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던 먼 옛날 강원, 충청지방에서 싣고 온 나무들을 이곳에서 숯을 구워 도성에 공급하였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고 또 한 가지 삼천갑자 동방삭을 잡아들이기 위해 옥황상제께서 저승사자를 시켜 냇가에서 검은 숯을 씻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양재천을 뒤로하고 탄천으로 접어들면 넓어진 강폭에다 다리의 간격도 멀고 왕래하는 사람들도 없이 지루한 구간이 계속되는데,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걷는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심란하지만 묵묵히 걸음을 재촉한다. 2시간 만에 남부순환 도로가 지나는 탄천1교를 지나며(11km 지점) 왼편으로 우리식탁에 싱싱한 채소와 생선을 공급하는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웅장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남한산성의 산자락이 아득히 바라보인다.
요즈음 이라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의 파병요청에 대처하는 우리의 고민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의 비애를 맞게 되는데, 우리의 선조들도 자주국방을 외치며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을 지키는 보루로서 아주 중요한 남한산성에,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인조 2년에 새로 축성을 하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1만 2천여 명을 동원하여 훈련까지 하였지만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으니 어려운 난국일수록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광평교 아래 너른 광장에는 지난 10월 26일 분당에서 시작되는 자전거전용 도로가 한강하류와 연결되는 기념식이 있었던 곳이다. 탄천을 가로지르는 세월교를 건너면 올림픽 훼미리 APT에서 자전거 전용도로까지 제방도로를 따라 폭 3m 길이 114m의 진입램프가 나선형으로 아름다운 조형미로 장식되어 있지만 계속내리는 빗속에서 배낭 속에 있는 카메라를 꺼내기가 번거로워 아쉬움을 남긴 채 발걸음을 재촉한다.
행진을 시작한지 3시간 만에 복정역이 있는 대곡교를 지나 서울과 성남시의 경계인 대왕교에 도착하여 비를 피해 다리 밑에 자리를 잡고 간식을 들며 곁들이는 반주로 피로를 풀어본다, 15,8km인 이곳이 목표지점인 동막교까지 절반이 가까운 곳이지만 우측으로 제방너머 세곡동 로터리에는 반고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부산과 의주가 각각 천리가 되는 중간지점으로 송파나루로 연결되는 길목이며 부근(양재역으로 추정)에는 그 유명한 말죽거리가 있어 한양을 오고가는 길손들이 말에 죽을 먹이던 곳으로 관에서는 역촌까지 두고 삼남지방을 오가는 요충지였던 곳이다.
서울을 벗어나 성남시로 접어드니 목가적인 풍경으로 빗속에서도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들의 여유로움 속에서 각박하고 고단한 삶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몸짓으로 휘적휘적 제방 길을 따라 오른다. 제방의 오른쪽으로 한없이 이어지는 높다란 성벽을 따라(약 6km)철조망이 처지고 철새들과의 전쟁으로 연일 쏘아 올리는 공포탄이 적막을 깨트리지만 정작 새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여유 작작 물장구치며 가족나들이에 여념이 없다.(성남비행장)
왼쪽으로 검단산 아래 너른 분지에 펼쳐진 성남시가 인구 백만을 수용하는 거대한 도시로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특수한 목적으로 처음 만들어진 인공도시로 조용하고 평화롭던 광주군 중부면의 시골마을에 피난민 행렬이 밀려들며 아수라장을 이루니, 아침마다 공중화장실 앞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장사진을 이루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는 짐짝 실리듯 아비규환을 이루니 군사정부의 전시행정의 부산물로, 서울 도심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데 천계천이 복계되며 판자촌이 철거되고, 세운상가 지으며 철거민이 생겨나며, 도로가 만들어지고, 공단이 생기며,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변두리 산동네로 내몰리다 1969년 서울시 철거민 집단이주가 시작되며 생겨난 성남시는 기반공사도 없이 졸속으로 내몰리다시피 황량한 벌판위에 새끼줄 따라 집터가 분배되고 움막생활로 천대받으며 태어난 곳으로, 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부랴부랴 잠실대교를 건설하며 1973년 성남시로 승격이 되어,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어 지금은 분당까지 포용하는 전국의 10대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우리가 출발한지도 벌써 4시간 지루한 성남비행장 구간도 벗어나고 저 멀리 여수대교가 바라보이는 20km 지점을 지나며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청담대교부터 대왕교 까지 우산 속에 행군을 하다 보니 평시보다 에너지가 배 이상 소모되고 신발 속에 차오르는 습기로 보행에 지장을 주며 발바닥에 통증이오며 컨디션이 갑자기 떨어진다. 우리는 여수대교 밑에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하며 40여 분간 충분히 휴식하고 10여km남은 분당의 중심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여수대교를 건너 성남시내로 들어서면 그 유명한 모란시장이 펼쳐지는데, 현대문명에 밀려 사라져가는 5일장이 이곳에서만은 성황을 이루고 있으니 4일, 9일장으로 열리는데 3,000여 평 위에 펼쳐지는 장터에는 내방객이 10만 여명에 이르며 한약재료, 고추, 참기름, 잡곡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개고기를 비롯한 건강식품이 눈길을 끄는 전국제일의 재래시장이다.
사송교를 지나면서 아파트 숲속으로 탄천이 흐르고 고수부지에는 각종 운동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으며 말끔히 단장된 잔디밭 그 사이로 아름다운 꽃길, 탄천을 가로지르는 인도교가 아치를 이루며 부티 나는 시설들이 외국의 어느 공원에 들어온 듯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 지붕아래 2가족이 동거를 하면서도 이질감속에 우리의 핏줄은 강남이라고 주장하며 성남과는 한집에서 못살겠다고 딴살림을 내달라며 떼를 쓰는 콧대 높은 분당구.
태어난 배경부터가 다른 분당은 성남시와 나이 차이는 20여년밖에 안되지만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도록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다보니 살기 좋고 교육여건이 좋은 강남으로 몰려들게 되고 폭발적인 수용을 분산하기 위한 정책적인 배려로 89년 개발이 시작되어 91년 분당구로 승격이 되었는데 주거만족도 1위로 전국에서 가장 살기좋은곳, 문화수준 1위에서 보듯 제2의 강남으로 자부심이 대단하여, 용인에서 들어오는 차량이 분당시민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길을 막는 일도 있었으니 ........
아름다운 도심지를 통과하며 지루함도 덜고 원기도 회복하여 한국가스공사 사옥이 바라보이는 돌마교를 지날 즈음 핸드폰의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 한다 . 마중 나온 아내의 위치확인 전화로 새로운 용기를 얻고 이제 남은 거리는 3km, 30여분만 고생하면 오리역 앞의 동막교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같이 굳은 날씨에 혼자라면 중간에서 포기하고 말았겠지만 둘이 함께하는 일이라 서로의지하며 격려와 채찍질로 완주할 수 있었으니 인생이 가는 길도 나 홀로 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는 길이 역경을 이겨나가는 보람도 있고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아닐까?
예상보다 1시간이상 더 걸렸지만 32km의 장거리를 완주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손을 맞잡고 환호하며 악천후에도 무사히 완주를 한 전 부하 씨에게 찬사를 보내며,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아내가 더욱 사랑스럽다.
우산속의 한강 아름다워라.
-의정부의 고수부지에서 한강대교까지-
제주에서 시작한 비가 전국으로 확산이 되어 지리산 무박산행도 허공으로 날리고 먼동이 터 오는 이른 아침. 베란다에 나와 보니 도봉산에 걸린 구름이 비를 흠뻑 머금고 하염없이 내리는 빗속에 돌덩이 하나 가슴에 올려놓은 듯 답답하기만 하다.
울적한 마음에 “에라 모르겠다.”침대에 누워 게으름을 피워보지만 천성이 부지런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일어났다 앉았다 좌불안석으로 몸 둘 바를 모르다가 모처럼 맞은 휴일을 무료하게 보낼 수 가 없다는 생각에 산책 삼아 우산을 받쳐 들고 고수부지로 내려선다.
사람들로 붐비던 자전거 전용도로도 굳은 날씨 탓으로 인적이 없이 공허로 운 바람만 불어오고 게으른 사람 낮잠 자기 좋을 만큼 차분하게 내리는 빗속을 하염없이 걸어가며 매일아침 산책하던 길이라 낯설지 않고 빗물에 씻겨내린 붉은색 아스콘이 더욱 선명한데 구청별로 동리별로 마라톤 대회를 하며 일정한 규정도 없이 바닥에 스프레이로 마구 뿌려놓아 볼썽사나운 낙서판이 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 시작이 어디인지 호기심에.........
걸어가는 거리도 측정할 겸 수많은 표시 중에서도 도봉구청과 의정부에서 표시한선을 주목하면서 출발점이 반대인 관계로 줄어들고 늘어나는 표시에 정신을 집중하다보니 지루함도 모른 채 빗속을 마냥 걷게 된다. 의정부 회룡역 앞에서 출발한 전용도로는 도봉동 노원교가 5km지점이고 길가에는 봉선화, 백일홍, 메밀꽃, 율무, 기장을 단지별로 심어 농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갈대숲이 무성한 중랑천에는 힌두루미들이 날개 짓하며 강태공들의 낚시질에는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다.
창동교 아래가 8km지점이고 잠시 후 월계역이 10km지점으로 2시간여를 걸어오는 동안 등산화가 축축이 젖어오며 비바람 속에 싫증도 나지만 의정부에서 표시한 코스가 계속 따라오고 있으니 끝까지 확인을 해보자는 오기 심으로 석계역도 지나고 14km인 이화교에 도착하니 거세지는 비바람 속에 고비를 맞게 된다. 지난번에도 이곳까지 왔다가 되돌아간 적이 있어 좀 더 가보자는 다짐으로 행진은 계속된다.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된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면 이문동과 석관동 망우리에는 연탄을 찍어내는 공장들이 밀집되어 석탄더미가 산을 이루고 온통 주위가 석탄가루로 뒤범벅이 되어 사람 살 곳이 못되던 시절 중랑천 제방아래
판자촌이 비만 오면 물난리를 겪던 곳으로 연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시가지가 정비되어 살기 좋은 동리로 변모되었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중앙선 철교를 지나 15km지점인 중랑교를 12시에 통과하며 목적지가 가까워온다는 희망으로 발걸음이 빨라지는데 동대문구의 아스콘이 초록색 융단으로 바뀌고 넓은 고수부지위로 피어나는 코스모스 꽃길은 외로운 나그네의 발걸음에 활력을 불어 넣으며 장안교, 장평교를 지나며 강남의 무역센터가 모습을 드러내고 18km지점에서 도봉구 마라톤의 반환점을 뒤로하고 군자교를 지나며 강 하구에 펼쳐지는 갈대숲이 세찬 비바람에 몸부림치며 화려한 춤사위로 장관을 이루는데 동부간선도로가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낮은 다리 밑을 통과하며 의정부에서 출발한 마라톤의 반환점이기도하다.
장안평에서 시작하는 제방 도로가 자전거 전용도로의 종착점인데 의정부에서 23km. 집 앞에서 21.8km를 걸어온 것이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지만 3시간 40분간의 지루함속에서 이루어낸 보람으로 새로운 감회를 맛보게 되며 2년 전 이곳을 왔을 때는 한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었는데 그동안 도로 밑으로 터널을 만들어 한양대 앞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의정부까지 되돌아가기에는 체력이나 시간상으로 감당하기가 어렵고 교통의 사각지대에서 탈출로를 생각하다보니 한양대역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수월할 것 같아 새로 개통이 된 전용도로를 따라 청계천을 가로질러 고수부지에 도착을 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도 축구경기에 여념이 없는 젊은 함성에 고무되어 벤치에 앉아 간식을 들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살곶이 다리를 지나 성동교 아래서 한양대역으로 올라서야 하지만 불현듯 한강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양궁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붉은 빛 토해내며 탐스럽게 피어나는 칸나의 꽃길을 지나 용비교 갈대숲사이로 뚝섬과 한강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성산대교까지 16km의 이정표가 나의 마음을 유혹한다.
현재 시각이 13시 40분, 저녁 모임을 감안하면 3시까지는 여유가 있어 8km거리에 있는 한강대교까지는 갈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으로 무리하지는 말고 천천히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발길을 내 딛는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강 건너 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잠실 나루터.......“桑田이 碧海”되어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전철과 승용차가 나란히 달리는 동호대교, 국토의 대 동맥을 이어주는 한남대교를 지나 조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반포대교를 지나면 한강대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며 예정대로 완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신발 속으로 물이 들어와 오른 발가락에 통증이 심해도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된다.
도도히 흐르는 한강은 무한히 넓은 가슴으로 우리를 포용하고 갖은 애환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말이 없는데 동작대교 건너 순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의 울창한 숲이 더욱 푸르게 보이는 것은 우리의 뻗어나가는 기상이요. 한강변으로 솟아오르는 빌딩들은 우리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상이니 나의 발걸음도 그곳을 향하여 멈출 줄을 모른다. 드디어 거북선이 정박해 있는 이촌 지구에 도착하여 빗속을 달리는 건각들과 산책 나온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달래고 63빌딩의 황금빛 손짓 따라 한강대교의 계단을 오르며 09시 20분부터 시작한 하이워킹도 5시간 40분 만에 33km의 종주 길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호반 위에 떠오르는 오봉산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신북면 화천군-간동면
추석명절의 연휴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 귀성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고속도로는 들어 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평소에 꼭 가보고 싶었던 오봉산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경춘가도는 민족의 대이동과는 큰 영향이 없는 듯 시원스레 소통이 잘되고 초가을의 상쾌한 아침공기에 맑은 하늘은 호반위로 떠오르는 오봉산을 더욱 아름다운 산수화로 그려내고 있다.
굽이굽이 휘돌아 오르는 배후령은 36년 전 월남으로 파병되는 장병들이 훈련을 받기위해 넘던 고갯길인데 첩첩산중에 비포장도로에서 사람 따로 차 따로 힘들여 넘던 고갯길인데 시원스레 산굽이를 치고 오르며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며 향수에 젖어본다. 배후령 고갯마루에는 비수기와 명절준비로 등산객들의 숫자도 현저히 줄어들어 춘천에서 온 다른 팀들까지 50여명이 한 무리를 지어 산행을 시작하는데 15분 만에 제 1봉에 오르며 수월한 산행길이 열리고 무성한 숲 사이로 연봉들을 넘나드는 아기자기한 코스는 오봉산의 이름이 나한봉을 시작으로 관음봉, 문수봉, 비로봉으로 연결이 된다고 하지만 표지석이 3곳에만 있고 그나마 위치도 달라 혼선을 빚고 있으니 관계당국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겠다.
오봉산이 자랑하는 암릉 구간은 제3봉과 4봉 사이에 걸려있는 쇠사슬을 맞보기로 하여 정상에서 남쪽으로 암릉을 내려서면 홈통바위를 통과하며 본격적인 스릴을 만끽하게 되는데 발치 아래로 소양호가 산굽이를 파고들며 시원한 호수를 그려내고 현기증이 나는 암릉에는 수백 년 기나긴 세월동안 만고풍상의 시련 속에 틀어지고 비비꼬인 노송의 끈질긴 생명력이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안겨주며 산과 호수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동양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오금이 저려오는 벼랑길에는 쇠사슬이 길게 늘어져있고 하나뿐인 생명을 담보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며 내려딛는 발걸음마다 간담이 서늘한데 연이어 나타나는 벼랑길이 오봉산의 매력이라면 초가을의 푸른 하늘은 여름 내내 산행마다 비를 뿌리던 악연을 떨쳐 버리고 보상으로 안겨주는 크나큰 선물이어라.
쇠사슬과 힘겨운 씨름을 하다 보니 울창한 숲 사이로 청평사의 천년사찰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데 지형이 협소한 탓인지 건물이 너무 촘촘히 붙어있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 청평사는 고려 광종(974년)때 승현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이 자현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은둔하면서 자연경관을 살려 정원을 꾸미고 계곡물을 끌어들여 사다리꼴의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 3개의 큰 돌을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해 자연의 멋을 돋보이게 하여 오봉산의 수려한 경관이 연못에 비치게 하였으니 이름하여 영지라 부르고 구성폭포아래 거북바위에서 절 뒤편 청경선동까지 1km구간에 조성한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효시가 되었으니 청평사가 자랑하는 삼층 석탑과 함께 중요한 문화유물로 보존되고 있다.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뒤덮은 시원한 계곡에는 유리알처럼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아홉 가지 소리가 난다는 구성폭포에 도착하면 우렁찬 굉음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산행으로 절은 땀을 말끔히 씻어 내리고 매표소를 지나며 양 옆으로 음식점들이 호객 행위를 하는데 자연보호에 역행하는 이런 모습들은 오봉산과 청평사의 아름다운경관을 해치는 볼썽사나운 일로 다른 곳에 집단촌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어떠할 는지?
소나무그늘 쉼터에서 1시간에 한 번씩 오는 유람선을 기다리며 컬컬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10분 만에 소양호 선착장에 올라서니 사력댐으로는 동양 최대라는 소양강댐이 그 위용을 드러내는데 29억 톤의 담수 량에 댐 높이 123m, 제방의 길이가 530m로 1973년10월에 완공된 다목적 댐으로 서울시민의 생명수를 공금하며 홍수조절과 발전설비까지 갖추고 있으니 물 부족 국가라는 오명 속에 우리가 간직할 귀중한 자산으로 보호해야 하겠다.
산행시간이 짧아 아쉬움이 크지만 암릉구간의 짜릿한 스릴과 유서 깊은 청평사의 문화탐방, 소양호의 유람선 관광까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환상의 코스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으로 추석명절을 앞두고 찾아온 오봉산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큰 감동으로 안겨 올 것이다.
여기도 용아장성 빗속을 가다.
주행봉(865m),백화산(포성봉 933m)을 넘어
산행일시; 2003년 9월 7일 10시-18시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 경북 상주군 모동면
비,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난다.
7월부터 2달 동안 개인 날 보다 비오는 날이 더 많고 주말마다 심술을 부리고 있으니, 이것도 기상이변이라고 해야 할지, 넘치는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대로 봄 가뭄보다도 더 징그러운 가을비가 아닌가?
우산을 받쳐 쓰고 새벽바람 맞으며 시청 앞에 도착하니 두 좌석에 한사람씩 앉아도 자리가 남아 널널하게 자리를 잡고, 대장의 속 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들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버스는 잘도 달린다. 들머리인 황간에 도착하니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짙은 운무가 산허리를 감아 돌고, 시간도 정지된 듯 바람 한 점 없이 후끈한 열기 속에 물먹은 솜처럼 몇 발짝 가기도 전에 땀이 줄줄 흐른다.
처음부터 가파른 돌계단에 주눅이 들고, 오늘의 산행이 예사롭지 않겠다는 예감에 따라 느린 행보로 운무 속을 헤집고 미끄러운 암릉을 기어오를 때 앞서가는 사람들의 귀에 익은 말소리에 고향을 물어보니 우리는 충주서 왔어유우. (에델바이스 산악회)
고향의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는데 고향의 형제를 만난 듯 반가움에 두 손을 흔들고 변 학수 씨 와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어렵사리 주행봉 정상에 올라서니 상주 쪽은 운해의 바다가 장관을 이루고 영동 쪽으로는 아기자기한 암릉이 맥을 이루며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흐르는 운무가 우리를 유혹한다.
앙증맞은 돌비석, 그 앞에 이름 모를 무덤1기, 명당자리 찾아서 이곳까지 올라왔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늘과 맞닿은 이 높은 곳에 조상을 모신 그 후손들이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여라.
물 한 모금 마시고 영동의 암릉 쪽으로 안내표지를 깔아놓은 박대장의 뒤를 따라 물에젖어 미끄러운 암릉길을 오르내리며 뒤돌아보니 스릴 넘치는 용아장성이라,
몇 구비 돌아서면 갈림길이 나오고 목적지는 같은데 반대편으로 들어서는 고향사람들, 의아심이 나지만 박대장의 안내 표지 따라 가다보니 능선은 점점 낮아지고 무엇이 잘못되어간다는 예감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앞사람들의 행보를 물어보며 20여분을 내려가는데 힘이 쭉 빠진 박 대장 빽 을 하잔다.
평소에 그렇게도 당당하던 여장부의 몰골이 말씀이 아니다. 뒤돌아보는 능선은 거대한 장벽이 되어 가슴을 짓누르고 저 험준한 암릉을 다시 오를 생각을 하니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 투덜투덜 볼멘소리로 짜증을 내보지만 한가하게 화풀이를 할 처지도 아니고 무거운 발걸음을 되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 산신령이 된 듯 묵묵히 수련중이다.
비지땀을 흘리며 갈림길까지 되돌아왔지만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운무 속을 헤매는 난파선이 되어 우왕좌왕, 나침판으로 확인을 해보니 주행봉 정상에서부터 잘못되었으니 또다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한다. 시간은 흘러가고 아직도 갈 길을 찾지 못 한 채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이런 난감할 때가 있나?
어려움에 처할수록 여유를 가져라. 당황하지 마라. 우중에 집을 나선 사람들이니 산행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산 꾼들이라 모두들 침착하게 잘들 오르고 주행봉정상에 되돌아 와보니 1시간 30분을 허비하며 다람쥐 체 바퀴를 돌고 말았으니 이런 낭패가 있나!
생각해보면 I,M,F 이후 등산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우후죽순처럼 동리마다 산악회가 태어나고 값싼 경비로 유혹을 하니 전문산악회가 발붙일 곳이 없게 되고 양적인 팽창으로 일주일에 3번씩 산행을 하다 보니 질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째, 자만심을 버려라 -수 십년 산행경력으로 산악회를 운영하는 노련한 대장이라도 몇 년 전에 다녀온 어렴풋한 기억하나로 수십 명의 인원을 사지로 내모는 무모한 행동을 삼가야한다. 둘째, 안내책자에 의존하기보다 발로 뛰어야한다 - 나 자신도 월간 산행 팀의 일원으로 개척 산행을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지만 아무리 세심하게 표기를 한다 해도 만에 하나 실수를 하게 되면 그것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낭패를 안겨주게 된다. 셋째, 동호인끼리 정보교환이 잘 이루어져야한다 - 미심적은 곳은 사전에 먼저 다녀온 산악회에 자문을 받아 행동을 해야 하고 실수로 어려움을 당한 산악회에서는 부끄럽고 창피하다 생각지 말고 언론매체에 발표를 하여 안심하고 산을 찾는 풍토가 조성되어야겠다.
주행봉 정상에서도 진입로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며 짙은 안개 속에서 이곳보다 높은 포성봉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니 목이 타는 갈증에 물만 벌컥벌컥, 어렵사리 처음 올라오던 길에서 정상 바로 밑(20여m거리)에서 90도 각도로 우회전하는 길목을 발견하고는 박대장의 자신 없는 목소리에 묵묵히 뒤따르며 포성봉이 아니라도 이 길을 하산코스로 잡는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우고 가끔씩 비껴가는 햇볕이 한증막이 되어 숨이 턱턱 막힌다.
일행 중에는 벌써 물이 바닥을 드러내어 갈증을 호소하고 용아장성의 스릴 넘치는 암릉 구간이 연화지옥의 문턱처럼 지친 몸에 간담이 서늘하고 날 등을 사이에 두고 상주 쪽은 짙은 운무가 앞을 가리고 왼쪽의 영동 쪽으로는 높고 낮은 암릉 들이 맥을 이으며 화려하게 펼쳐지는 경관도 그림의떡인양 어서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앞서가던 박대장이 755봉이라는 힘찬 외침에 모두 환호하며 사지 속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우리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시간은 많이 지체되고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지만 용기백배하여 용아장성을 넘는다. 용의 이빨도 무사히 통과하여 푸른 숲 사이로 여유로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높고 높은 포성봉은 보이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지니 겁이 덜컥 날수밖에.
오늘의 산행이 5시간이라고 멘트를 했지만 예정시간이 다 지나도록 포성봉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제풀에 지쳐 체력이 급격이 떨어지고 풀 섶에 주저앉은 옆자리의 ? 은 처자 체면 따질 겨를도 없이 물 달라는 하소연에 말없이 내미는 물병을 가로채듯 입에 털어 넣고 고마움에 씩 웃는 그 모습이 천진스런 해맑은 웃음이었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높은 봉우리 천근만근 무너져 내리는 두 다리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비알 길을 기어오르는 거친 숨결 속에 포성봉의 정상은 자꾸만 뒷걸음친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올라선 정상에는 표지석도 이곳이 전위 봉임을 알게 된 우리는 또다시 큰 실망을 안고 체력보강을 위해 찰떡파이를 입에 넣어보지만 말라버린 입안에서 삼켜지지를 않는다. 비상식수로 입안을 헹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할 때 또다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갯길에 내려서니 기다리고 있던 박대장이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20분이 소요되는 마의 장벽으로 정 힘이 부치는 사람은 이곳에서 탈출을 하라는 충고에도 모두가 말없이 굼벵이 걸음으로 산 비알을 기어오른다. 6시간의 어려운 난관을 뚫고 이곳까지 왔는데 머리위에 높이 솟은 성벽이지만 포기 할 수 있으랴.
너덜지대 돌들이 장애물 이 되고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정강이를 긁어도 통증도 모르고 고통스런 숨소리가 숨통을 조여 오며 쇠뭉치 달아맨 두 다리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천신만고 끝에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하늘과 맞닿은 포성봉정상, 백화산 돌비석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토해내며 용케도 이곳까지 올라온 감격에 목이 메인다. 긴장이 풀린 탓으로 우리일행 5명은 풀 섶에 주저앉아 널 부러지고, 빈 식수통만 바라보고 있을 때 주섬주섬 배낭을 풀어헤치며 여러분 정 상주 한잔 어때요?
포천막걸리에 도토리묵, 언감생심 꿈에라도 상상할 수 있으랴. 이체면 저 체면 볼것도 없이 마른입에 침이 고이고, 조롱박에 따르는 정 상주가 감로주가 되고 감칠맛 나는 도토리묵은 감칠맛을 더하며 우리 모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난다. 운무 속에 피어난 신선놀음에 금돌산성 가는 길이 여유가 있고, 이곳이 삼국시대 격전장으로 험준한 산자락에 성벽을 쌓고 땅따먹기 놀이를 상상하며 천년세월 흐른 지금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고치며 선조들의 가르침을 고스란이 전수받아 지금은 삼팔선 휴전선에서 충실한 후예로서 땅뺏기 놀음에 열중하고 있답니다.
높은 산 깊은 계곡 지루하게 내려오는 산 비알에 너덜바위 장애물이 되어 발길을 부여잡고, 소리 없이 내리는 비속에서도 발걸음만 재촉한다. 열두 번 개울을 건너 용추폭포 도착하니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소리에 세파에 찌든 때를 털어버리고 명경지수 맑은 물에 몸을 담그니 세상만사 근심걱정 녹아 흐르네.
황희정승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옥동서원을 꿈길에 스치고, 천하절경 세심석, 백옥정도 배 고품만 못하다. 지난해 수해복구가 이제야 한창이라 다리건너 수봉리 정류장까지 고단한 육신을 이끌며 8시간의 고행도 막을 내린다.
백화산이여 안녕.
키나바루에는 불로초가 있었네
아내의 따스한 손길을 뒤로하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서먹서먹한 분위기이지만 키나바루 등반을 위해 모였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금 새 친숙해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운행한다는 말레시아 항공에 몸을 싣고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날아가다 보면 아름다운 서해대교도 보이고 백설로 뒤덮인 한라산이 장관을 이룬다.
5시간의 비행으로 보르네오 섬의 북단에 자리 잡은 코타 키나바루 공항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30도가 넘는 후끈한 열기로 서울의 기온이 영하 10도였으니 40도가 넘는 기온차로 등줄기에서 주르르 땀이 흘러내린다. 크라문싱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중국 요리인 크림포드로 저녁식사를 하고 냄새는 고약하지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즐겨 들어서 유명해진 두리안(과일)을 맛보며 싱그러운 열대풍이 불어오는 밤바다를 거닐며 남국에서의 첫날밤을 보낸다.
구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사피섬으로 향하는 보트에서 뒤돌아보는 구름사이로 키나바루의 웅장한 모습이 우리를 유혹하는데 마음은 벌써 그곳으로 달려간 듯 우리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흥분의 도가니로 휩싸인다. 선착장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사피섬은 인천의 작약도와 비슷한 작은 무인도로 깨끗한 모래와 맑은 물속에 갖가지 모양의 산호가 만발하고 야자수 그늘아래 그림 같은 방가로가 이국적인 풍경을 물씬 풍기며 그 앞으로 쪽빛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물 반, 고기 반으로 아름다운 열대어들이 관광객이 던져주는 빵부스러기에 길들여져 우리들의 주위로 몰려들고 하늘도 푸르고 물도 푸르고 그 속에서 파라셀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생선 바베큐로 입맛을 돋우고 92km떨어진 키나바루 산을 향해 버스로 이동을 하게 된다. 목적지가 가까워 올수록 2,000m 이상의 고산지대가 밀림 속에서 베일을 벗고 2차선이지만 잘 다듬어진 포장도로가 산굽이를 돌고 돌아 큰 어려움 없이 1,300m에 자리 잡고 있는 케빈 산장에 도착한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짙은 먹구름이 키나바루 산허리를 휘감아 돌며 정수리를 베일 속에 가리고 우리의 애간장을 태우는데 중국인이 운영하는 이 산장은 전망이 좋은 언덕위에 그림 같은 2층으로 자리를 잡고 2인 1실에 샤워장 까지 갖추고 있어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안락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키나바루의 환상에 시달리며 선잠 속에 새벽 2시 베란다에 나서니 초조함과 불안감속에 가슴을 짓누르던 먹장구름이 자취를 감추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는 은구슬을 뿌려 놓은 듯 영롱한 별들이 화려하게 수를 놓고 있다. 정상을 향하는 등산로에는 가로등이 라반 라타 산장까지 꼬리를 물고 우리를 유혹하는데 주위가 밝아지며 검은 성채와도 같은 키나바루의 암 봉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4,000m 가 넘는 고봉답게 울창한 밀림 숲을 허리에 두르고 위풍당당하게 솟아있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서둘러 국립공원 관리사무실에 도착하여(해발1,563m)입산신고를 하고 현지 가이드도 배정받아(등산객을 보호하고 자연보호를 위해 등산객 7명에 1명씩 배정) 팀 폰 게이트까지 버스로 이동을 하여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데(8시 45분)대청보다도 높은 1,866m이지만 울창한 삼림이 하늘을 가리고 10m앞도 보이지 않는 정글 지대가 펼쳐진다.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과 주위에 펼쳐지는 이름 모를 열대식물들에 매료되어 완만한 내리막길을 천천히 걷다보니 지축을 울리는 굉음소리와 함께 칼슨 폭포가 우리를 반기고 이곳부터 오르막이 시작된다.
해발 1,781m인 캔디스 대피소까지는 큰 무리 없이 도착을 했지만 이제부터 정상까지는 피라밋을 올라가듯 가파른 나무계단과 돌층계를 올라야 하기 때문에 속도를 내기는커녕 고도가 높아질수록 희박해지는 산소의 영향으로 가빠오는 숨결 속에 무거워지는 몸을 주체 못하며 거북이걸음으로 2,095m의 우아 대피소에 도착한다. 국내산만 다닌 우리로서는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신기록을 갱신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게 되고 가장 먼저 피로를 느낀 효선 씨가 길옆에 주저앉기 시작한다.
앞으로 5시간을 더 올라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짐을 가볍게 챙긴다 해도 산장에서 잠도 자야하고 정상에서 입을 파카도 넣다보니 배낭이 제법 무거워 딱한 사정을 바라보면서도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선뜻 나서는 구원의 손길이 없다. 그래도 힘의 여유가 있는 내가 보디가드를 자처하며 배낭을 받아들고 함께 오르는데 앞뒤로 배낭을 메고 돌층계를 오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남을 돕는다는 즐거움에 유모어와 노랫가락으로 지친 그들에게 힘을 불어 넣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숨도 가빠지고 다리도 무거워져 길가에 주저앉는 횟수가 많아지며 최대장과 효선 씨, 가이드와 한조가 되어 후미에서 느린 걸음으로 2시간 45분 만에 리양리양 방가로(2,621m)에 도착을 하니 먼저 올라온 일행들이 앞뒤로 배낭을 메고 있는 우수꽝스러운 모습에 박수로 환영을 하는데 한번 가이드는 영원한 가이드라고 화답을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고맙다는 인사를 수없이 하면서도 너무 지친 탓인지 배낭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식당에서 마련해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울창한 삼림 속에 갇힌 우리는 오직 돌계단을 바라보며 안간힘을 쓰고 주위에서는 벌써부터 고소 증으로 괴로워하지만 길 옆에 피어있는 만병초의 향기에 피로도 풀리고 곤충들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살아가는 식충식물을 보는 순간 지친 몸이지만 즐거운 환상 속으로 빠져들어 카메라 누루기에 여념이 없다.
함께 오르는 가이드는 우리가 걸으면 같이 걷고 휴식을 하면 함께 쉬며 그림자 경호를 하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은 착각 속에 간식도 함께 나누며 말은 통하지 않지만 친근한 눈빛으로 즐거운 산행길이 계속된다. 빌오사 대피소 옆의 바위에 올라서니 거대한 성채와도 같은 키나바루 산의 전경이 나타나고 4시간 40분간의 고생도 한순간에 환호로 바뀌고 고통을 이겨낸 보람이 즐거움을 만끽한다.
어느덧 백두산의 높이도 건너뛰어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하늘과 가까워지고 발밑으로 흰 구름이 흘러가며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우리를 반겨주니 지친 몸이지만 마음만은 천상의 화원에서 노닐고 있다. 오후 3시10분 멀고도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라반 라따 산장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박수로 맞아주고 거리는 6km에 불과하지만 6시간의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계에서 바라보는 환상적인 일몰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으며 3,352m의 산장에서 우리에게 안겨주는 선물은 고소증이 아닌가?
속리산 줄기를 내 집 안마당처럼 넘나들고 노장 마라톤에서 입상까지 했다는 청주에서 온 김기준, 박동석씨도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두통을 호소하며 밤을 지새운다. 새벽 2시 20분. 별빛도 초롱초롱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정상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다.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며 일렬로 늘어선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침묵 속에 오르는데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내려가고 거세지는 바람 속에 희박해지는 산소로 호흡이 가빠오고 느려지는 발걸음으로 출발 1시간 30분 만에 마지막 대피소인 사얏사얏 산장에 도착한다.
후지 산 보다도 높은 3,810m 어둠 때문에 주위를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거대한 화강암덩어리가 끝없이 펼쳐지고 길게 늘어진 로프가 아니라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도,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바람 한 점 피할 수 없는 황량한 벌판이다. 못생긴 자매 봉이 마귀할멈과도같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귀청을 파고드는 바람소리에 정상의 길은 멀기만 한데 그대로 주저앉고 마는 효선 씨가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포기를 하고 만다.
이곳까지 어려운 고비마다 잘 참아 왔는데 정상을 눈앞에 두고 포기를 하다니 안타까운 순간이다. 그렇지만 어찌 혼자만 남겨두고 떠 날수 있으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바위 밑으로 자리를 옮겨 휴식을 하며 비상식량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오리털 파카로 중무장을 한 다음 정상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여명이 밝아오며 적도의 하늘아래 가장 높은 첨봉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초속 10m 가 넘는 세찬 바람에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나 되는 추위로 몸은 오그라들고 가파른 너덜지대를 기어오르는 모습에서 우리의 의지는 더한층 힘을 발휘한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정상에서 내 인생에 또 하나의 금자탑을 세우며 동 남아에서 가장 높은(4,101m) 키나바루의 정상이 발밑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다.(06시 5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영롱한 별빛이 쏟아지고 저 멀리 코타 키나바루 시가지의 불빛이 가물거리며 보루네오 섬의 준봉들이 밀림을 헤치며 달려 나가는 장쾌한 그 모습에 우리 모두 환호성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메아리는 지구 끝까지 울려 퍼진다.
올라올 때는 초죽음이 되어 울음보를 터트리던 효선 씨가 더 즐거워하며 최대장과 황 대장, 박동석 씨와 한 무더기를 이루어 비디오에 몸짓을 담아보는 여유까지 부리며 라반라타 산장으로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고 기화요초가 만발한 정원을 거닐듯 어제 올라왔던 그 길을 다시 내려간다. 어쩌면 내려딛는 돌계단이 이리도 힘이 드는지 이틀간의 산행으로 발등이 부어올라 등산화가 꼭 끼는 통에 발가락에 통증이오며 걸음걸음 마다고통의 연속으로 자지러지는 비명을 참아내며 안간힘을 쏟는다.
밀림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키나바루 산은 말이 없지만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영광의 상처를 안고 팀 본 게이트에 도착하여(12시 30분) 관리사무소에서 주는 완주 증을 받아 드는 순간 그 험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산행하는 동안 매일 내린다는 스콜도 비켜가는 행운을 얻었으니 우리 모두 정상에 오르는 기쁨도 맛보고 케빈 산장을 떠나며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는 시원한 청량감으로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오십대 후반의 나이로 4,000m 가 넘는 고봉을 오르는 동안 고소 증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나의 특이 체질에 자부심을 가지며 지난해 지리산 당일 종주로 다져진 강한 체력이 이번 산행에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니 키나바루의 정기는 나에게 불로초가 되어 삼십대의 나이로 살아가고 싶다.
황산에 부는 바람
천하제일 황산을 찾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창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보다도 더욱 부풀어 오르고 미투리 산악회원 17명은 상해를 경유하여 안휘성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황산 시 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버스로 1시간 30분 만에 온천지구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상해시 뒷골목엔 만국기가 나부끼고
농촌 마을 추녀에는
연장한 돼지다리
함께 널은 빨래가 잘도 마른다.
경사진 비알 밭에 차 향기 그윽하고
무성한 왕대밭에 팬더곰은 어디가고
무심한 오리 떼가 앞길을 막는구나.
다리 건너 기암절벽 사이로 노송이 어우러지고 그 밑으로 온천 호텔이 그림같이 자라잡고 있어 감탄을 연발하며 카메라를 꺼내드니 시작에 불과한 곳이니 필름 허비하지 말고 빨리 따라 오란다. 온천 지구를 지나 대나무 숲에는 밤사이 내린 비로 죽순이 삐죽삐죽 솟아 오른 모습이 신기하며 가파른 계단을 20여 분간 올라가니 자광사의 경내로 들어서게 되는데 장엄한 대웅전과 많은 인파들 속에서 잠시 휴식을 한 뒤 곧바로 케불카 타는 곳으로 이동을 한다.
6인용 케불카 가 스키장의 곤돌라와 같이 계속 돌아가고 있어 짝을 지어 탑승을 하고 옥병루를 향해 올라갈 때 주위에 펼쳐지는 경관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환상적인 모습으로 아슬아슬한 벼랑 사이로 계단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파고드는 운해는 우리를 신비의 세계로 인도한다. 10여분 만에 케불카 에서 내려서니 주위가 온통 운해로 뒤덮이고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땡감 씹은 표정들이다. 검 연 쩍은 가이드는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니 다행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운해가 없어지니 옥병루로 가자며 재촉을 한다.
십삼만 개나 된다는 좁은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고 양복에다 구두까지 온갖 치장으로 한껏 모양을 내고 땀을 뻘뻘 흘리는 중국 사람들의 모습, 게다가 힘이 달리는 사람들은 가마에 올라 남의 힘을 빌리며 거들먹거리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우리 17명의 멋들어진 등산복 차림이 오히려 신기한 듯 저희들 끼리 수군거린다.
그 유명한 옥병루에 올라서니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기암절벽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1,300여 년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영 객 송. 운무가 앞을 가려 희미한 모습이지만 황산의 상징으로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하였으니 어찌 반갑지 않으리오. 안타까운 모습으로 기다려 보지만 운무는 더욱 짙어지고 아쉬움 속에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빌 길을 돌릴 적에 송객송이 다소곳이 고개 숙이며 이다음에 다시 오라 손짓을 한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풍류시인 묵객들이 하는 일이란 바위에 글씨쓰기. 경관 좋은 바위마다 깊숙이 후벼 파고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라고 붉은 색으로 칠을 하였으니 어찌 보면 멋들어진 글귀로 자손만대에 전해줄 유물로 보이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볼썽사나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연 화 봉으로 오르는 길은 험난한 길.
수 백길 낭떠러지 벼랑사이로 계단을 만들어 운무 사이로 드러나는 계곡은 끝이 없고 음산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오금이 저려온다. 심술 사나운 운무는 우리 주위를 맴돌고 힘들게 올라온 연화봉 정상(1,864m). 시선이 머무는 곳은 우윳빛 허공뿐. 안타까운 마음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사진 찍고, 고함을 지르고 좁은 공간에서 부산스러움 속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지리산의 세석평전을 걷는 기분으로 백보운제의 넓은 분지를 걷다보니 백운 호텔을 지나게 되고 황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광명정(1,860m)에 올라섰지만 고향의 뒷동산에 오른 듯 고도감을 느낄 수가 없다. 백보운제에서 불어오는 동남풍이 광명정에서 일진광풍으로 변하며 장풍을 쏟아내니 합장봉 계곡의 운무가 혼비백산 흩어지며 숨겨진 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니 이럴 수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성을 지르며 화들짝 놀란 눈이 화등잔만 해지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마 환 경구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된다. 그러면 그렇지 저런 비경을 쉽사리 보여 줄 리가 있는가? 갖은 애간장 다 녹이다 깜짝쇼를 연출하다니. 수많은 침봉들이 수 만 가지 형상으로 다가오니 우리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신 바람난 가이드는 수다를 떨며 점심시간 늦는다고 성화를 부린다.
무거웠던 발걸음에 힘이 절로 솟아오르고 아리랑 타령이 절로 나며 서해반점에 도착하니 푸짐한 점심상이 식욕을 돋우고 곁들이는 고량주가 찬하제일이라 든든하게 배도 채우고 무거운 배낭은 식당에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마환 경구 관광길에 나선다. 배운정 호텔을 지나며 시작되는 마환 경구 관광 길은 조물주가 빗어 놓은 걸작 품으로 이 세상 어느 곳에 이런 곳이 또 있는가?
금강산이 이럴까? 설악산이 이럴까?
신비의 세계로 빠져들며 자연의 신비에 인간이 만든 조형물이 접목 되었으니 가파른 벼랑에 계단을 만들고 터널을 뚫어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요소요소에 전망대를 만들어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널 때는 가슴이 떨리는 스릴도 맛볼 수 있고 미로 속을 헤매는 계단은 암 봉의 요소요소를 파고들며 끝 간 데 없이 이어진다.
건너편의 비래석이 벼랑 끝에 걸려있고 오전에 우리는 그곳에서 소리높이 고함을 질러 보았지 사방을 둘러봐도 침봉의 연속으로 만 가지 이름을 지어도 남을 만큼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하고 환상의 세계에서 헤매다 무아지경으로 빠져든다. 깃털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서해반점에 돌아와 짐정리를 하고 북해 호텔가는 길에 서하객이 지은 등 황산 천하 무산(登 黃 山 天 下 無 山)이 실감이 난다.
등소평이 묵었다는 북해호텔
1,500m의 산중에 별 4개의 호텔이라면 특급이 아닌가? 335호실에 여장을 풀고 낙조를 볼 수 있겠다는 설 레임으로 정원으로 나와 서쪽 하늘을 바라보지만 서산마루에 걸린 태양은 이내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의 주위를 감싼다.
다음날 새벽 동녘하늘이 붉게 물들며 금방이라도 태양이 솟아오를 듯 조바심 속에 마음이 급해진다. 청량대에 올라서니 사방이 환하게 밝아오며 나한봉 사이로 태양이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우리 모두 함성을 지르며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구름이 태양을 삼켜 버리고 회색빛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다 잡은 보물을 도둑맞은 기분으로 허탈한 마음으로 내려오다 21세기 종을 관람하고 서광정을 경유하여 호텔로 돌아와도 식사 시간까지는 2시간이나 남아 있어 어제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광명정으로 향했다.
꿈에도 그리던 연화봉과 옥병루, 천도봉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오고 어제 우리가 사진 찍고 고함지르던 정상이 뾰족한 암봉으로 아슬아슬하게 바라보이고 기암절벽위에 소나무와 어우러져 날렵하게 올라앉은 옥병루, 산수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듯 황홀하기 그지없다. 비래석에서 바라보는 마환경구는 우리가 어제 직접 오르내렸던 곳이라 더욱 애착심이 가고 언제 또 만나게 될지 아쉬움 속에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아쉬운 이별 속에 황산도 눈물을 보이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호텔로 돌아오니 7시50분, 즐거운 식사를 한 다음 10시 30분까지 달콤한 휴식을 보내고 현관으로 내려오니 비바람이 불어오는 악천후로 우리의 발목을 잡지만 우비로 완전무장을 하고 등소평이 몸소 올라 아름다움에 반했다는 시신봉(1,668m)으로 향한다.
비바람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제갈량의 팔진법.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의 신호에 따라 변화무쌍한 운무의 춤사위는 기암절벽과 계곡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부리는 신기의 마술에 혼마저 빼앗기고 정지된 시간 속으로 빠져든다.
건너편의 흑호송
모든 나무들이 울울 창창 복록을 누리고 있건만 너는 어이하여 벌거벗은 모습으로 벼랑의 한구석에서 벌을 받고 있느냐? 1,300여년이나 구제 받지 못하고 유네스코 명부에 까지 올랐다니 한심하고 한심하다.
12억의 인구에 한반도의 50배가 넘는 면적을 가지고도 소소한 나무 한그루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가지가 56개로 뻗어 있다하여 단결 송으로 명명을 하고 벼락을 맞아 검게 그 을린 검은 소나무를 흑 호송이라 하여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을 하는 것을 볼 때 귀중한 유산을 대수롭게 지나치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점점 거세지는 비바람을 피해 종종 걸음을 치다보니 어느새 백아령 휴게소에 도착하여 황산의 관광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고 어제 12km 오늘 10km(케불카 포함)를 걸으며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웅장한 황산의 일부분만 보고서도 황홀감에 몸 둘 바를 모르니 무한한 중국의 잠재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10년만의 외출
화면 가득히 쏟아지는 날렵한 군인들의 행렬, 그들의 눈에서는 섬뜩한 광채로 번뜩이고 목표물을 향해 돌진하는 그들의 둔탁한 발걸음, 잠시 후 조명탄이 새벽하늘을 수놓으며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경천동지할 사건으로 포로가 된 김 신조의 입에서는 거침없이“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수다” 68년 1월 21일 김 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실미도의 비극은 잉태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냉전시대에 평양의 김일성의 목을 따 오기 위한 수단으로 급조된 것이 684군 부대로 한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필요 없으면 폐기처분되는 소모품으로 비밀을 유지하기위해 그들을 생매장하는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21세기를 지향하는 현재에도 자행되고 있었으니.....
영원한 비밀이 없듯이 71년 8월 하순으로 기억 속에 아른거리며 풍문으로 전해오던 유언비어가 36년의 오랜 침묵을 깨고 영화로 재현되어 우리 앞에 되살아나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집중되고 한국영화 사상 전무후무한 신기원을 이루며 천만 명을 육박하는 관객을 극장 앞으로 불러 모았으니 우리를 십년 만에 극장 앞으로 되돌리게 한 것은 실미도의 명성보다는 아내와의 달콤한 데이트를 위한 외출이었다.
평소에 약질인 아내는 갱년기를 넘기면서 허리 통증으로 긴 긴 밤을 지새우며 아픔을 호소하고 물리치료와 한방병원으로 전전하다 20여 일전 강남병원에서 MRI검사에 의해 밝혀진 병명은 선천성 척추 협착증으로 척추관의 추간 공간이 좁아 오래 서 있거나 무리한 운동을 하게 되면 3번과 4번의 요추사이의 연골이 부어올라 다리에 통증이 오고 저리며 자주피로를 느끼게 되며 남들이 보기에는 꾀병으로 보이는 고통스러운 병으로 가족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응급조치로 뼈 주사를 맞고 보름간 약을 복용한 뒤 수술여부를 결정하자고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증상이 심하므로 수술에 대비하라는 귀띔을 받는다. 뼈 주사는 통증이 어찌나 심한지 국소마취를 한 다음 주사를 맞게 되는데 2시간 동안 회복실에서 휴식을 한 다음 중환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꼼짝도 못하고 누어있어야 하고 일주일 동안 허리에 복대를 차고 화장실 가는 것과 기초적인 동작 외에는 몸의 움직임도 삼가며 호전반응을 체크하게 된다.
만약 수술을 하게 된다면 보름 동안은 식물인간처럼 움직일 수도 없고 3개월 동안은 보호자의 수발을 받아야하며 그 후 3개월 동안 재활운동을 하야하는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고통을 견디어 내야하는 병으로 다른 수술과는 다르게 경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두 번 다시 재수술을 할 수 없는 절박한 일이기에 수술만은 하지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바 램 속에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번거로운 일들도 힘 드는 줄 모르게 초조한 시간을 보내며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는 안도감 속에 아내의 마음을 진정시키며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수험표를 받아든 학생처럼 초조한 심정으로 의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기다리는 그 시간이 왜 이리도 지루한지.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가 복음이 되어 머리를 짓누르던 먹구름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우선한달 동안 약을 복용하면서 경과를 지켜보자며 무리한 운동은 삼가라는 당부의 말씀을 가슴깊이 되새기며 성치 않은 몸이지만 마음만은 창공을 향해 훨훨 날아오른다.
맑게 보이는 하늘이 날씨 탓만은 아니고 절망 속에서 다시 찾은 행복으로 두 손 꼭 잡고 십년 만에 극장 앞으로 발길을 돌린다. 종로 3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간 서울극장,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파들 속에서 지루한줄 모르게 줄을 서서 기다리며 예매를 하고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시간에 맞추어 극장에 들어서니 예전에는 상영관이 하나로 1-3층까지 객석이 빼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7개의 상영관이 한 건물에 자리를 잡고 제각기 다른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니 마음에 드는 프로를 선택 할 수 있고 휴게실도 여느 카페보다도 분위기 좋게 꾸며져 있어 그 옛날 담배연기 자욱하던 시절과는 천양지차로 만남의 장소로도 손색이 없는 아늑한 분위기에 젖어 팝콘을 씹으며 젊은 시절의 추억을 그려본다.
극장 안에는 안락한 의자에 싱글좌석과 커 풀 좌석이 따로 있어 인상적이며 음향시설 또한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관중들을 매료 시키며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젊은 시절의 추억 속에 극장은 빼놓을 수 없는 만남의 장소로 라디오도 TV도 없던 시절 신성일, 엄앵란으로 대표되던 전성기를 구가하다 칼라시대가 시작되며 사양의 길을 걷던 영화가 다시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었으니 자국영화 관람 율이 50%가 넘는 나라가 미국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우며 10여 년 전부터 산의 매력에 빠져 휴일이면 산으로만 다니는 동안 우리나라의 영화 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을 줄이야.
안락한 의자에서도 허리에 오는 통증으로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고통을 참아내는 아내의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신경을 쓰다 보니 2시간 반의 시간이 지루하기도 하지만 극장을 나서는 아내의 얼굴에는 해맑은 웃음으로 오랜만의 외출에서 오는 행복감으로 다정히 팔짱을 끼고 어둠이 내리는 종로를 걸어가며 우리세대가 외면하는 극장이지만 가끔씩 지난날의 추억을 되살리며 다시 찾아보자고 다짐을 해 본다.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아침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느냐?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오늘 아침 수락산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은 유난히도 아름다우며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반사되는 만장봉은 너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 청명한 하늘아래 선명하구나. 초, 중, 고, 대학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사회로 첫 출발을 하는 졸업식 날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구일역 뚝 방 길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양지바른 언덕아래 개나리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며 머지않아 꽃망울을 터트리겠지.
회고해 보면 26년 전 누나들의 재롱에 현혹이 되어 너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큰 어머니의 간곡한 소망에 의해 잉태된 것이 바로 너였단다. 우렁찬 사내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리가정의 희망이요. 행복으로 나날이 튼실하게 자라면서 창밖의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씩씩한 아이로 성장하며 “학교 다녀오겠습니다.”골목에 울려 퍼지는 너의 목소리에 힘 드는 줄 모르고 신바람 나는 하루가 시작됐단다.
초등학교에서는 우등상장과 반장 임명장이 너의 손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너에게 거는 기대로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피아노, 미술, 속셈학원으로 스케이트, 수영장으로 혹사시키며 그것도 모자라 그룹 과외까지 시켜가며 엄마 아빠의 못 다한 꿈을 이루어줄 신동으로 자라는 네가 너무나도 대견스러웠다.
대리만족으로 하루하루 즐거움 속에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들이 겪는 사춘기의 방황도 모른 채 우리가정의 기둥으로 믿음직스러운 청소년으로 성장하며 중학교를 졸업하는 겨울방학의 50여 일간 스파르타 교육장으로 밀어 넣을 때 낮선 곳에 남겨질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너를 두고 돌아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안쓰러움도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재목으로 키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며 고등학교에서도 우등생이 되어 달라는 부모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너에게는 너무 버거운 짐이 되었는지 합숙소에서 돌아온 날은 말수가 적어지고 친구 집에 머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따라 나서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느 것이 잘 하는 짓인지 갈등 속에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네가 원망스럽기도 했단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도 너에게는 큰 변화 없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범 생활을 하고 있지만 너 혼자만의 고민이 많아서인지 가족 간의 대화가 줄어들고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을 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집안에는 썰렁한 분위기속에 너의 심정은 헤아릴 생각은 않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러면 안 된다. 왜 그러느냐”는 과잉기대와 보상심리로 질타를 하며 일방적인 요구를 하며 탈출구를 잃어버린 너의 참담한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었으랴?
그래도 심성이 착한 너였기에 옆으로 새지 않고 모범 청소년으로 생활은 하지만 떨어지는 성적에 조바심을 느낀 엄마와 아빠는 궁여지책으로 서울대생을 초빙하여 단독과외를 시키고 엄마는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시키며 보충수업이 있는 2학년부터는 밤늦은 시간 학교 정문에 차를 세우고 너에 대한 열정으로 극성을 부리지만 너의 성적은 반에서 5-10등을 넘나드는 안타까움 속에 중간고사 점수에 따라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과외는 없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해 보지만 어디 지식 키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겠느냐?
애비의 생각이지만 누나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자란 심성이 곱고 착한 네가 거친 세상을 살아가려면 교육대를 나와서 안정된 직업으로 선생님이 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을 하고 너에게 주문을 외우며 설득을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지 항상 시큰둥한 대답뿐이다.
초조함과 두려움 속에 대학 예비고사를 본 후 난생처음으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에 취해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온 너의 허물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멀거니 바라보며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예상대로 성적표는 신통치 않았고 再修는 없다고 입버릇처럼 외쳐 왔지만 다시 한 번 도전하겠다는 너의 말 한마디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자청해서 피를 말리는 가시밭길을 헤쳐 가겠다는 가상한 용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는 너에게 간섭을 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며 된 새벽에 일어나 노량진으로 향하는 발길을 바라 볼 때마다 답답해 오는 가슴을 쓸어 않으며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열심히 하여다오. 수없이 기도를 하였단다.
예비고사를 보고 돌아온 너의 표정은 너무도 밝았다. 지난해 보다 20여점이 올라갔으니 연, 고대는 몰라도 한양, 중앙대는 무난히 들어갈 수 있는 점수로 가슴 졸이며 지나온 날들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어났지만 이것도 일장춘몽이란 말인가? 이튿날 조간신문에는 수능시험 너무 쉬워........
제자리걸음을 하고 말았으니 철퇴로 맞은 뒤통수는 천 길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깊고 깊은 늪 속으로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는 한숨 소리만 묻어나오며 몇 날 몇 일을 그렇게 지나다가 너의 의중을 물어보니 묵묵부답.... 답답한 심정으로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전문대학이라도 적성이 맞는 곳을 선택하여 꿈을 펼치라는 당부를 했지만 몇 일간 말미를 달라는 요청에 수긍을 하고 하루 빨리 이 수렁에서 몸을 추 수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랄뿐이다.
三修를 하겠다는 너의 뜻은 고뇌에 찬 결심이겠지만 또다시 가시밭길로 들어서겠다는 너의 결심에 선뜻 찬성을 하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을 너는 알고 있느냐? 다시 시작하여 점수가 오른다는 보장도 없고 시간 낭비에 잘못되면 좌절감속에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라 설득을 해 보면서도 한 편으로는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겠다는 백전 불굴의 용기가 가상하여 줄다리기에 지친 애비는 반승낙으로 체념을 하고 세상의 하고많은 일들 중에 자식농사가 가장 어렵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오직 네가 가는 길에 행운이 따르기를 기도 할 뿐이다.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안간힘을 쓰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Tm러운 마음에 등 뒤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기를 수십 번..... 그렇게 세월은 흘러 또 다시 수능시험을 보았지만 신통치 않은 결과로 가족 모두가 침울한 분위기속에 오직 네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말수를 줄이며 전전 긍긍하였지.
병역 문제로 더 이상 물러설 명분도 없이 내키지 않는 대학에 원서를 내고 3년간의 시련도 종지부를 찍고 대학생활을 시작했지만 무슨 연유인지 MT다. 동아리 모임이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돌아오고, 참다못한 애비의 불호령으로 냉전이 시작되고 썰렁한 분위기속에 얼굴만 마주하면 언성이 높아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곳에 다니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에 밤잠을 설치며 고심한 끝에 1학기를 마칠 즈음 너에게 최후의 통첩을 하게 되었다.
힘들게 들어간 대학에 적응을 못하고 방황을 할 바에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차피 다녀와야 할 군에 지원을 하여 새 사람이 되어 나오너라. 애비의 간곡한 말 한마디에 무슨 생각에서인지 순순히 따라주는 너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2학기 등록을 포기 한 채 무더위도 한풀 꺾인 9월 27일 춘천의 신병훈령소로 입대를 시키고 돌아오며 온실 속에서 자라온 나약한 네가 그 힘든 군 생활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안쓰러운 마음에 눈시울을 적시는 엄마를 위로하며 너의 소식이 오기만을 학수고대 하였단다.
그러던 어느 날 강원도 최전방 화천의 포병부대에 배속이 되어 신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씩씩한 너의 목소리는 가슴 졸이며 지나온 시간들의 고통을 한 순간에 날려 보내는 메시지로 새로운 출발의 신호탄이었다. 백일휴가, 포상휴가로 고된 신병생활도 잘 참아 내고 늠름하고 씩씩한 젊은이로 다시 태어나 믿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우리 모두 환호하며 얼싸 안았다.
제대 후에는 손수 학비를 벌겠다며 엄동설한 혹한 속에서도 궂은일 마다않고 노력하는 너의 모습에서 내 젊은 시절을 보는듯하여 피는 속일 수 없다는 진리를 되새기며 너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확신으로 가슴속에 쌓여있던 십년 묵은 체증이 봄눈 녹듯 사라지게 되었다. 대학에 복학하여 더욱 성숙한 마음가짐으로 착실한 생활을 하면서 I.M.F 이후 어려워진 경제의 후유증으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도 어렵다는 취업의 문도 무난히 넘어 3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거쳐 금년 1월부터 정식사원으로 출근하는 의젓한 너의 모습은 이 세상 그 어느 기쁨과 견줄 수 있으랴?
일찍 찾아온 시련을 극복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새 출발하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족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고 잘 참아온 너에게 찬사를 보내며 어둡고 지루한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양지바른 언덕아래 따스한 햇볕이 내려 쬐이고 개나리 진달래 피어나는 꽃동산이 펼쳐지는구나.
금년이 갑신년 애비가 태어나기도한 해이지만 평생을 가꾸어 온 씨앗이 결실을 맺어 꽃을 피우기시작하는 보람의 해로 그 동안 우리가정에 희, 노, 애, 락이 반복되며 가슴 졸이는 날들이 많았지만 이제 장밋빛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고 쨍하고 햇볕이 비쳐 오지만 모든 것이 순탄한 날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조명 속에 그윽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그림 같은 환상의 무대로 보이지만 막상 그 속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미로 속을 헤매듯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막다른 골목길과 천길 벼랑길도 나타나며 무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단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마라톤 코스를 무사히 완주하려면 서둘러도 안 되고 자만해서도 안 되며 더구나 좌절은 금물이다.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성실한 마음과 끈질긴 인내로 꾸준히 달리다보면 남에게 인정도 받게 되고 성취감도 맛보게 되며 설사 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무릎에 피멍이 드는 정도이지만 초 스피트로 달려가는 고속도로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돌이킬 수없는 대형 사고가 아니겠느냐?
우리의 보금자리인 도봉동 생활을 청산하고 신정동으로 출근하는 10여 년 동안 그 먼 거리를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다지며 고난의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올바른 자세로 욕심 부리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고 심신을 단련하기위한 등산은 삶의 활력소를 불어 넣으며 산을 오를 때마다 쓰는 글은 나의 반성이며 문단에 등단을 하고보니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아실현으로 호연지기를 기르며 이 모든 것이 너에게 보이는 애비의 본보기 이니라.
부모의 그림자는 자식의 거울이 된다고 하지 않더냐? 지금까지는 우리가족을 위해 손수레를 끌고 언덕바지와 진흙탕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지만 이제부터는 네가 애비의 대물림으로 앞장을 서야하고 이 애비가 뒤에서 밀어주련다. 날갯짓을 하는 새들도 둥지를 떠날 때는 새로운 두려움 속에서 주춤거리지만 벼랑에서 떨어지며 날아오르는 비행 속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단다.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날아오르는 너의 앞날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훌륭한 대들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내소사 가는 길
탐스런 왕 벗 꽃
안개비에 흩날리고
전나무 숲 길 따라
일주문 들어서니
천년 고목 고운 자태
돌담장에 푸른 이끼
추녀 끝 서까래
완자무늬 꽃 창살
무심한 세월 따라
창연한 고운 빛깔
모두 벗어 버리고
소박한 모습으로
미소 지으며
곰소만의 높새바람
관음봉을 넘어 올 때
연분홍 진달래
얼굴 붉히며
채석강에 지는 해는
나그네의 가슴에
모닥불을 지피네.
겨울 산
마지막 잎새마저
이별을 하고
매서운 북서풍에
매를 맞아도
내 마음 슬프지 않습니다.
한창 시절
매미도 쪽박 새도
지상의 낙원이라 합창을 하며
부구영화 누리더니
물기가 잦아들고
원기가 쇠약하니
모두들 등 돌리고 떠났습니다.
가슴 아린 슬픔도
시간 속에 녹아들고
시류 따라 움직임은
자연의 섭리이니
명년 삼월 꽃이 피면 돌아온다고
태양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두위봉의 철쭉
연분홍 빛 사랑의
추억을 안고
님 그리는 애절함을
가눌 길 없어
양지바른 산언덕에
살포시 앉아
바람결에
님 소식 기다립니다.
오월이면 온다던
그 약속 허사가 되고
매정한 비바람에
꽃잎마저 떨어지니
아라리의 슬픈 가락
강물 따라 흐릅니다.
쉰 길 폭포
소 재 지: 설악산 큰 귀때기골
백담 산장 맞은편
귀때기골 협곡에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크고 작은 폭포들
시종별배 거느리고
제1관문 , 제2관문
인간의 접근을 거부할 때
심마니 흔적 따라
층암절벽 사이로
한 마리 나비되어 그네를 타면
음습한 기운에 모골이 송연하다.
신비의 땅에 들어서니
천 미터 넘는 곳에 쉰 길 절벽 있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기둥에
오감도 화들짝 놀라
혼마저 빼앗기네.
해 설
산악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 김완묵의 산행수필 -
김 은 남 (시조시인)
1. 들머리
우리나라는 참으로 많은 산을 가진 산의 나라이다. 방방곡곡에 자리한 허다한 명산을 찾아 오르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등산인구도 늘어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600만 명의
동호인을 헤아린다고 한다. 이삼십 년 전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인 등산인구의 증가이다. 그러나 그 많은 산 꾼들의 대부분은 건강증진과 여가 선용을 위해 산을 오르내릴 뿐. 산을 문학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문학에서 산악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은 상당히 미약한 실정이다. 문학의 소재는 참으로 다양하다. 이러한 산을 소재로 글을 엮어내는 산 꾼 문학이야말로 후세에 길이 전할 명저를 남길 수 있으며 또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 문학인이라 생각된다.
1992년 2월 도봉산에서 산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국 산악문학동인 시산(詩山)을 결성 하였다. 그 후 시산은 착실한 발전을 거듭하여 상당한 회원들이 모여 들었고 어언 44권의 계간지를 발행하였다. 4년 전 가을이었다. 지리산 등반을 위해 산자락의 휴게소에서 차를 마시던 필자는 참으로 우연히도 김완묵 수필가를 만나게 되었다. 150여산을 오르고, 꼬박꼬박 산 행기를 써서 파일에 보관하고 있노라고 말을 걸어오는......
당시 시산회 회장이던 필자는 김완묵 수필가와 인사를 나누었고, 며칠 후 수필 몇 편을 우편으로 받아보고 시산에의 가입을 권유하였다. 돌이켜 보면 이 책의 저자 김 수필가와 필자의 만남은 한국 산악문학의 발전을 위한 지리산 신령님의 주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시산의 회원이 된 김 수필가는 더욱더 산행과 문학에 정진하게 되었고 드디어 첫 수필집 ?바람과 구름이 머무는 곳?을 상재하게 되었으니
2. 대단한 산 꾼
현재까지 350여 산을 오르내린 김 수필가는 대단한 산 꾼이다. 웬만한 등산경력을 가진 산 꾼들도 산행횟수는 많아도 방방곡곡의 산을 두루 찾아 오르는 산 꾼들은 드물다. 국립공원을 비롯한 유명산은 찾을 기회도 많거니와 등산로가 정비되어 산행에 큰 어려움이 없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오지의 산은 찾아가기도 어렵거니와 산길이 없어 상당한 고생을 하거나 더러 부상을 당하는 낭패를 격기도 한다.
방방곡곡의 산을 두루 찾아가는 필자와 한번 정도 산행을 같이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음 산행에는 슬그머니 피하기가 일수이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산 꾼이면 지리산 종주산행을 꿈꾼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잇는 종주코스는 2박 3일이 소요되는 참으로 만만치 않은 장거리 코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 수필가는 단 하루에 종주를 끝낸 참으로 건각이다. 웬만한 산 꾼 들 조차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당일 종주를 글을 쓰기위해 메모하며 주위 경관과 나무와 꽃을 살피는 김 수필가는 참으로 건각을 자랑하는 산 꾼 중의 산 꾼이다.
3. 빛나는 기록 산행
이제 이 책에 실린 김 수필가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김 수필가의 수필은 머리로 쓰는 글이 아니라 발로 쓰는 기행 수필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211번지로 어릴 때부터 보련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고 50여년 만에 이곳에 올라서니 감회도 새롭거니와 남쪽 기슭의 수룡리 천룡에 사시는 큰 고모님 댁에 세배를 다니며 무쇠점 고개에서 바라보는 보련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생각하던 순진한 시절이 있었는데.......’
‘명성왕후의 눈물’ 에서 김 수필가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산에 올라 아득한 향수에 젖는다. 또 국망산의 산 이름 사연이며 간직한 역사를, 보련과 장미의 전설이 남은 보련산의 산행소감을 피력한다. 보련산 자락에서 태어나 산을 우러르며 자란 김 수필가. 어른이 되어 산악인이 되고 산악 문학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쩌면 숙명이리라.
‘한강기맥 제 3구간’ 에서 김 수필가는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이야기 한다. 우리들은 어린 시절 학교 교과서에서 태백산맥 묘향산맥 등 산맥을 배웠다. 그러나 그 산맥들의 이름이 민족 암흑기에 일본학자에 의해 명명된 명예롭지 못한 이름임을 알지 못하고 자랐다. 해방 된지도 어언 60년. 아직도 그 이름들이 고스란히 교과서에 남아 있는 것이 부끄러운 현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우리 산 꾼들은 조상들이 남긴 산경표에 백두대간을 비롯한 1대간, 1정간, 13정맥의 떳떳한 우리 이름 산줄기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남한에서 오를 수 있는 백두대간의 절반과 9정맥의 산줄기를 차례로 밟아본다. 산 꾼들은 먼저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마친 후, 한북정맥 호남정맥 낙동정맥 낙남정맥 등 정맥 종주 산행을 이어간다. 대간과 정맥을 다 밟은 경력 산 꾼들이 시작하는 그 기맥 종주, ‘ 한강기맥’ 이란 수필 제목만 보아도 우리는 김 수필가가 상당한 수준의 산 꾼임을 알 수 있다.
‘한강 기맥 종주만은 산악회와 함께 완주하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하였건만 집안의 대소사로 시간이 여의치 않아....’ ‘주능선에만 올라서면 용문산의 정상이 길잡이가 되어 편안한 산행이 될 것으로 예상을 하였지만 막상 산에 들어서고 보니 울창한 숲의 늪에 빠져 상황을 판단하기가 어렵고 지나온 봉우리들도 숨바꼭질하는 고독감속에 긴장을 늦출 수 없어 겹겹이 외워 싸고 있는 능선과 계곡이 태산준령의 위용을 과시하며 마루금의 오르내림이 산 꾼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
부제 ‘비슬 고개에서 농다치까지’ 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혼자 나서게 된 한강기맥 종주 산행기이다. 단독산행의 불안감이며, 산길 찾기의 어려움이며, 길을 잘못 들어 되 돌아가야 하는 괴로움이며, 천둥번개를 만나 고생한 단독 종주산행의 그 어려움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수필을 읽는 산 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다시 찾은 공룡능선’ 에서는 산 꾼들의 길을 막는 철조망 아닌 철조망을 이야기한다. ‘내 설악 광장에서 산행에 필요한 마지막 점검으로 김밥으로 아침요기를 하고 신발 끈도 고쳐 매며 황철봉의 환상 속에 미시령 고개 마루에 도착을 하였지만 차에서 내려 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되 돌려야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휴식년제로 출입이 통제되어...... ’
조국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국토순례의 뜻있는 발걸음도 숱한 복병이 길을 막는다. 휴식년제, 산불강조기간, 군부대, 골프장, 목장 등의 사유지까지. 어찌 그 뿐이랴. 모든 산 꾼들의 염원인 백두대간 종주산행도 동족상잔의 뼈아픈 상흔인 휴전선이 길을 막아 설악산 향로봉에서 끊어지고 말았으니. 어쩌면 김 수필가의 이 작품 깊은 곳에는 북녘 땅을 아우르는 백두대간 완전종주의 간절한 염원이, 7천만 겨레의 조국통일의 비원이 담겨있음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으려니.......
4. 새로운 영역으로
방방곡곡의 명산을 찾아 국토순례의 길에 나선 김 수필가의 발걸음은 한 단계 차원을 넓혀간다. ‘아름다운 한강 걸어서 백리 길’ 이 바로 그것이다. 금강산 남녘 부근 자락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함백산 금대봉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조국의 들판을 살찌우며 흐르고 흘러 양평의 두 물머리(양수리)에서 만난다. 비로소 한강의 이름을 얻게 된 이 강물은 서울을 지나 임진강을 아우르고 예성강과 만나 마침내 서해가 되는 민족의 젖줄이다. 아득히 초기 백제의 400년여 수도, 600년 조선의 수도, 현재 2천만 인구가 모여 사는 수도권의 젖줄인 한강은 찬으로 중요한 강이다.
‘된 새벽에 일어나 배낭을 꾸리고 지하철과 택시를 번갈아 타며 출발지인 암사동 유원지에 도착하여보니 오늘의 동행자인 미투리의 황 도현 대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강가의 수초사이로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며 건너편의 아차산도 워커힐도 운무 속에 몸을 숨기고 조깅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린다.’
‘행주대교 아래 버드나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오후 4시 10분, 9시간의 힘든 고행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우리는 힘 찬 포옹으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뒤따라 도착한 아내와 큰딸 명숙, 둘째 미숙, 아들 재형이 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가장인 애비의 성공을 축하하는 환영파티로 즐거움을 나누며 행복의 나래를 활짝 편다.’
지하철 8호선의 종점인 암사역에서 5호선의 종점인 방화역까지 도보로 한강을 따라 흘러가는 이 길은 어쩌면 선구자의 길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광진교, 천호대교, 올림픽대교, 잠실철교, 잠실대교, 청담대교, 영동대교,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반포대교, 동작대교, 한강대교, 한강철교, 원효대교, 마포대교, 당산철교, 양화대교, 성산대교, 가양대교, 방화대교, 행주대교를 만나게 된다.
오 오, 한강의 뭇 다리를 만나게 되는 이 물길에서 만나는 것이 어디 다리뿐이랴. 초기 백제의 역사가, 고구려의 산성이, 암사동의 선사유적이, 올림픽을 유치한 자랑스런 우리의 국력이, 삼전도 역사의 치욕이, 성수대교의 비극이, 잠실벌의 옛 추억이, 경부고속도로의 대 역사가, 시민공원의 쉼터가, 국립묘지의 호국 영령이, 여의도의 의정활동이, 절두산의 순교자 넋이, 난지도의 슬기가, 행주산성의 대첩이.....
한강의 흐름은 단순한 물결이 아닌 유구한 겨레의 역사 바로 그것이거니. 김 수필가의 악전고투 끝에 완주한 이 길이, 김 수필가의 수필로 말미암아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걷게 될 국토순례의 거룩한 길이 될 것이니....
5. 날머리
방방곡곡의 산을 오르고 , 외국의 고산을 오르고, 한강을 따라 흐른, 땀에 젓은 기행문을 모아 첫 수필집을 상재하는 김 수필가에게 다시 한 번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전문적인 문학수업을 받지 못한 김 수필가의 글에는 표현의 미숙함이, 매끄럽지 못한 낱말 사용이, 띄어쓰기의 부족함 등이 더러 발견된다. 그러나 그러한 약간의 흠에도 불구하고 산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는 김 수필가의 뜨거운 정열과 땀에 절은 고생이 생생하게 느껴져 읽는 이들에게 감동의 파도를 일으킨다.
둘러보면 요즈음은 겉만 번지르한 미사여구가 판치는 세상이다. 내용이 없는, 겉포장만 화려한 허다한 미사여구에 식상한 우리들, 알맹이가 없는 유창한 웅변보다 진실이 담긴 눌변이 오히려 사람을 감동시키는 눌변의 시대이다.
어디 첫술에 배가 부르랴. 뒤늦은 나이에 산을 오르고 문학의 길에 들어선 김 수필가. 그러나 그에게는 무서운 집념과 남다른 건각이 있다. 연륜이 더 할수록 더욱 완숙한 문장으로 제 이, 제 삼의 주옥같은 수필집이 탄생하리라 확신하며 건승을 기원한다.
김완묵 산행 수필집
구름과 바람이 머무는 곳
초판인쇄 : 2004년 12월 27일
초판발행 : 2004년 12월 31일
발행처 : 호산 출판 기획
(출판 등록 제20 - 1 - 54호)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17-6
T디. 031-241-6441 / Fax, 031-231-6461
값 10,000원
ISBN 89- 90189-20-9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태고의 전설이 전하고 민족의 아득한 역사가 숨 쉬는
산이야 말로 참으로 매력적인 소재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산을 소재로 글을 엮어내는 산 꾼 문학인이야 말로
후세에 길이 전할 명저를 남길 수 있으며
또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 문학인이라고 생각된다.
방방곡곡의 산을 오르고, 외국의 고산을 오르고,
한강을 따라 흐른 땀에 젖은 기행문을 모아
첫 수필집을 상재하는 김 수필가에게 다시 한 번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 김 은남 산악시인
허무와 회의로
고독이 여울져오는 길목에서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신의 유혹에 이끌려
정감어린 보살핌 속에 삭막하던 가슴에 꽃을 피우고
십 오년간 350여 산을 오르내리며
습작으로 그려온 글들이
“시산”으로 햇볕을 보고
문학공간으로 등단을 하여
수필가로 걸음마를 하게 되었으니
벅찬 감회와 활기찬 모습으로 제2의 인생을 열어가며
비록 어눌한 글들이지만 세상에 선을 보이며
수험생의 초조한 심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자의 머리말 중에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