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세계/시와산 계간지.2

제 57 호 ( 시 와 산)

김완묵 2008. 1. 29. 05:59

 

 

 

                                                            지리산의 弄平마을과 피아골

시월은 상달이라. 한여름 떼 약 볕 아래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들도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맛보기 위함이요. 우리 시산도 일찌감치 가을 산행을 천년고도 경주로 정하고, 남산을 찾아 불교문화를 재조명 한다는 취지로 여름부터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빈약한 재정과 부족한 인원으로 우리의 계획이 벽에 부딪히며 심한 실망과 좌절감 속으로 빠져든다.

 

한창시절 5-60명이 넘는 회원들이 관광차를 대절하여 괴산의 칠 보산으로 정선의 민둥산으로, 춘천의 호반에서 밤을 지새우며 정담을 나누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이유로 회원들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관심도 전만 못하니 허탈한 마음속에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울 뿐이다. 꺼져 가는 불씨를 되살리는 데는 선풍기의 강한 바람도 아니요. 수북이 쌓인 장작더미는 더욱 아니다. 적당하게 불어대는 풀무의 실바람 속에 온갖 정성과 보살핌으로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다.

 

관심 많은 나 용준 회원의 주선으로 장소를 지리산으로 정하고 전화와 메일을 보내며 동참을 유도 해 보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고 가까스로 가족들까지 동원하여 18명으로 행사를 추진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창기회원이 제공한 15인승 봉고와 문영철 회원의 6인승까지 합세하여 대충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행사가 임박해 오면서 무박 여행이 부담스러웠던지 여성회원들의 불참이 늘어나며 또 한 번위기를 맞는다. 어려움 속에서도 행사를 중단 할 수는 없고, 김 천수 회장이 뒤 늦게 승용차로 오기로 되어있어 3대의 차량이 동원되는 행사가 되고 말았다.

 

盡人事待天命이라.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청명한 날씨 속에 집결장소인 양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11시 45분 양재역에는 미리 도착한 전상열 전 회장과 동행한 이기희 여사, 태산 같이 무거운 배낭으로 쩔쩔매는 주 진하 시인, 우리 모두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양재 주차장에 도착하니 나용준 교수가족 5명이 합세하여 봉고차 오기만을 기다린다.

 

남양주에서 직접 출발한 문영호 감사 일행은 벌써 진천을 지난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우리도 서둘러 지리산의 통곡 산장을 향해 출발한다. 남도지방의 단풍이 절정인지라 연도에는 행락객의 차량으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버스전용차선으로 들어선 우리는 신바람 나게 달려가지만 350km가 넘는 장거리 길이 멀기만 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천안 망향휴게소에서 식사를 한다.

 

일주일 전부터 점심식사와 술을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주 진하 시인의 보따리가 풀어지고 아내가 준비한 술안주까지 합세를 하며 10명의 점심상으로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든든하게 배도 채우고 반주까지 곁들였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경부, 대진, 88고속도로를 갈아타며 남원에 도착할 무렵에는 서산마루에 걸터앉은 태양이 살포시 고개 숙이며 아름다운 저녁놀이 펼쳐진다.

 

문 영호 감사일행은 현장부근의 화계장터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전갈이고, 김 천수회장 부부는 대진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라고 한다. 삼원중계로 일행들의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파악하며, 오늘저녁 산장에서의 모닥불 파티를 떠 올리며 즐거운 미소를 짓는다. 남원 시내를 관통하는 19번 국도를 따라 30여분 만에 구례에 도착하여 이마트에서 시장을 본다. 어둠속에 달리는 초행길에도 무사히 연곡사입구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문영호 감사일행과 합류하여 당치 마을을 찾아간다.

 

지리산을 수십 번 다녀오고 지난 가을에는 불무장등 경유하여 연곡사로 내려 왔지만 듣도 보도 못하던 곳. 지도에 조차 표시가 없는 생소한 곳이다. 돌비석에 새겨진 당치마을 이정표를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다. 짙은 어둠을 뚫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차량이 30도가 넘는 가파른 경사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한다. 당치마을에 도착하지만 우리의 숙소는 이곳에서도 1.5km를 더 올라가야 한단다. 별빛이 쏟아지는 어둠속에서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있다니.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나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대낮처럼 밝은 가로등 속에 마을이 나타난다.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농평 마을(해발 803m)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몇 가구 안 되는 오지마을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사람 두 사람 입소문을 타고 작가와 화가, 고시준비생들이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들어 지금은 이십여 호가 넘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어둠도 가로등 불빛 속에 사라지고 대낮같이 밝은 농평 마을의 밤이 깊어만 간다. 우리는 서둘러 저녁준비를 하고 한옆에서는 앞마당의 잔디밭에 숯불을 피워대며 삼겹살을 굽기 시작한다. 매캐한 연기와 신선한 공기, 농익어가는 술자리에 권주가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나 교수의 장모이신 최 순자 여사님이 경기민요의 명창이실 줄이야. 우리 시산에게 내려 주신 홍복이요 오늘의 모임에 더 없는 영광이다.

 

오봉산 타령에서 풍년가로 한강수타령으로 이어지는 가락 속에 우리의 혼이 녹아든다. 주진아 시인이 담아온 송엽주와 복분자술에 매실주까지 1.8리터짜리 팻트병 3개가 동이 나도록 우리의 신선놀음이 이어진다. 낭낭 하고 걸쭉하게 쏟아지는 시낭송은 농평 마을이 열린 이래 처음으로 쏟아지는 시인 묵객들의 흥겨운 잔치판이다. 子時를 훌쩍 넘기며 거나한 술기운에 하나둘 잠자리로 돌아가고 사그라지는 모닥불아래 도란도란 시산의 미래가 밝아온다.

 

선잠 속에 아련히 들려오는 장 닭의 울음소리.  농평 마을의 새벽을 여는 저 울음소리를 들어본지 얼마만인가? 폭음에 객기로 무거운 몸이지만, 자리보전하기에는 아까운 시간이다. 살그머니 일어나 댓돌로 내려서니 어둠도 계곡사이로 밀려나고 동쪽하늘에 주먹 만 한 샛별이 반겨준다. 아직도 날이 새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가로등 불빛 따라 동네 한 바퀴 산보를 하다 동네 어르신을 만나 인사를 드리며 이 마을의 내력을 들어본다.

 

마을 입구에는 농평 마을의 연륜을 말해 주듯. 수 백 년 된 당산나무가 자리를 잡고 시원한 그늘아래 서면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산골마을이 생긴 지는 확실치 않으나 화전민들이 일군 다랑논이 마을 가운데로 자리를 잡고 뒤란으로는 탐스러운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일제시대에는 60여 호가 넘는 큰 마을 이었으나 6.25전쟁으로 불에 타고 빨치산의 준동에 대비하여 주민 대피령이 내려짐에 따라 마을을 비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서너 가구가 마을의 명맥을 유지하던 중에, 고시생이 들어온 뒤로 입소문을 타고 외부로 알려지며 큰 마을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뱀사골의 심원마을 보다도 50 여m가 더 높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설에는 老號弄骨(노호농골)의 대지에 평평한 곳이라 농평으로 부르고 있단다.

 

날이 밝아오며 동쪽의 당재로 태양이 솟아오르고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지어먹고 피아골로 단풍놀이를 떠난다. 어둠속에 올라간 그 길을 내려오며 산간오지의 비알 길에서 곡예운전을 하는 전 호영 부회장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연곡사 입구에 도착하니 국립공원의 입장료가 폐지되었는데도 큰 길을 가로막고 요금을 받고 있다. 연곡사 탐방객에게나 받을 요금을 피아골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받고 있으니 황당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는 속담대로 2000원씩 하는 티켓 7장으로 타협을 보고서야 통과를 할 수가 있었다.

 

투덜투덜 모두들 찜찜한 마음으로 계곡에 들어서니, 절정을 이루는 단풍의 터널 속에서 감탄사가 절로난다. 이곳 피아골 단풍은 지리 십경에 선정될 만큼 아름답다. 피 빛이 뚝뚝 떨어지듯 진홍색단풍이 직전마을 입구에서 삼도봉까지 계곡 전체를 물들인다. 조정래 씨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무대이기도한 이곳에도 흘러가는 강물 따라 옛 상처가 씻겨 내리고, 행락객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직전마을의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계곡 길을 거슬러 오른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은 법이라 반야봉과 삼도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골골마다 폭포를 빗어내고, 용소를 휘돌아 부서지는 계곡물에 타 오르는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

 

옛날 표고버섯을 재배하던 표고 막 터에서 땀을 들이며 인원점검을 하고 삼흥소까지 올라오는데 1시간 반이 소요된다. 느린 걸음에 장사진을 이루는 인파속에서 피아골 산장까지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너른 암반위에 자리를 잡는다. 우리 가락에는 막걸리가 제격인지라. 한 순배씩 잔을 돌리고 명창의 노래 가락으로 흥을 돋운다. 

 

폭포수 흘 러 흘러 삼흥소를 감돌고, 정선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아리랑...........  우리민족의 한이 서린 애절한 노래 가락이 물길 따라 흘러가며 흥겨운 춤사위에 어깨춤이 절로난다. 신명풀이 속에 꿈결 같은 시간이 흐르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의 발걸음을 되돌린다. 피아골 아베스 산장 뒤 뜨락에 점심상을 차리고 시원한 물소리와 어우러진 단풍 속에서 닭백숙에 메기탕, 파전에 토토리 묵까지 복분자로 삼합을 이루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일박이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무사히 행사를 마무리한다. 제비가 날아가는 형상의 명당자리에 터를 잡은 연곡사는 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많은 부도와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피아골을 떠나기 전에 연곡사를 둘러보기로 했지만, 주차장이 초만원이고 귀경길의 고속도로가 염려되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린다.

 

남원에서 임실, 전주를 경유하는 17번 국도에서는 신나게 달려가지만, 호남고속도로에서 많은 시간이 지체된다. 논산 천안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내더니, 경부고속도로에서는 아예 주차장이 되고 만다. 버스 전용차선도 무용지물이 되고, 밤이 이슥해서야 양재역에 도착하여 시산의 모든 일정도 끝을 맺게 된다. 

 

이번행사로 우리는 보았다. 비록 몸집은 작아도 서로 보듬어 안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없이 충만 되고 참석한 회원이나 불참한 회원이나 시산을 사랑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그리운 금강산

제 1 부  - 세 존봉을 찾아서


금강산을 다녀 온지 삼 일째

미명의 어두음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새벽 서재에서 산란한 마음을 가다듬고 명상에 잠긴다. 세 존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기암절벽의 환상에 취해 와! 멋있다 아름답다는 탄성과 환호성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몽유병 환자처럼 글 한줄 쓰지 못하며 열병을 앓고 있으니 15년간 700여산을 다녀오며 처음 겪는 고통이기에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몽매에도 그리던 금강산의 행차는 밤도 이슥한 9시 30분 회룡역에서 강서 고속 관광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출발지가 의정부인지라 텅 빈 버스 안이 을씨년스럽기는 하지만 종로3가에서 한 무더기 승차한 이후로 활기가 넘친다. 경유지를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서울을 빠져나가는 11시경에는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밤도 잊은 채 금강산으로 향하는 설레 임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남북이 분단 된지도 어언 60여년. 정치의 이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허리가 두 동강으로 잘리고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 얼었던 동토에도 해빙의 온기가 스며들며 금강산의 뱃길이 열렸다. 초기에는 구룡연 폭포를 중심으로 상팔담까지 다녀오는 관광코스와 만물상에서 해금강을 돌아보는 코스로 한정되어 천하제일의 금강산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산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지난해부터 세존봉을 중심으로 수정봉까지 산행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백두대간이 지나는 비로봉은 오르지 못하지만 어찌 마냥 기다릴 수가 있단 말인가?


밤새 달려온 버스는 새벽녘이 되어 금강산 콘도가 있는 남측 휴게소에서 입국수속을 마친 뒤 북녁 땅으로 들어선다. 육중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북녘 땅으로 들어선다는 자체가 긴장과 초조함으로 온몸이 경직된다. 북녘 땅에서 지켜야 할 안전수칙을 수 없이 들어 알고 있지만,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동해의 푸른 물은  변함이 없건만, 민둥산의 북녘 땅을 보면서 남북의 현실을 실감하게 되고, 인공기가 휘날리는 농촌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생활을 직감하게 된다.


온정리에 도착하며 산행에 불필요한 짐은 구룡 마을 빌리지에 보관하고 등산 팀과 관광 팀으로 나누어 행사를 진행하게 된다. 본인의 능력에 따라 자유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지난여름 홍수로 산사태가 일어나 관폭정에서 시작하는 등산로가 폐쇄되어, 동곡동 계곡을 경유하는 원점 회귀 형으로 산행을 하였는데, 삼일 전에 복구공사가 완료되어 또 다시 관폭정 코스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 환호와 박수로 화답을 하며 생각지도 못한 구룡폭포까지 관광을 하게 되었으니, 행운의 여신이 우리에게 미소를 짓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관광 팀까지 한 무더기를 이루어 미인송이 하늘 숲을 이루는 임도를 따라 새로 복원된 신계사 앞을 지나게 된다.


신계사는 금강산 4대 사찰 중에 하나로( 내금강의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신라 법흥왕 6년(519년)에 보운 스님이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6.25때 소실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2004년 조계종에서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11개의 전각이 모두 복원되어 10월 13일이면 성대한 낙성식이 거행된다고 하니 남북의 승려가 하나 되는 역사적인 행사로 금강산의 중요한 명소로 새롭게 태어나는 신계사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잠시 후 옥란관 주차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차량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구룡폭포를 오르는 길목으로 항시 많은 인파로 성시를 이루는데. 오늘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으로 3,000여명의 관광객이 머물고 있다고 한다. 세존봉까지 산행을 하자면 7시간이상 시간이 소요되는데 관광객들의 발길에 묶여 시간이 지체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조바심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맑은 물이 넘쳐흐르는 암반위로 울창한 금강송이 자리를 잡고 계곡의 양 옆으로 기암절벽들이 병풍을 두른 듯 펼쳐진다. 왼쪽에는 세존봉, 오른쪽에는 관음 연봉이 장관을 이루는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오선암으로 부르는 옥란교에 도착한다. 관광식당으로 휴게소를 겸하고 있는 옥란관이 푸른 숲과 맑은 계곡을 배경으로 백옥 같은 자태를 뽐내는데, 삼일포의 단풍관과 금강산 호텔의 금강원과 더불어 금강산 3대 관광식당이라고 한다.


많은 인파의 숲을 헤치며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바위틈의 단풍들이 화려한 색깔로 선보이고  앙지대의 너른 바위에 올라서면 우렁차게 흘러넘치는 계곡의 건너편으로 志遠(지원)이라는 붉은 글씨가 유독 신선을 끈다. 1954년 7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탄생 80주년을 기념해 새겨 놓았다고 한다.


비로봉이 바라보이는 금수다리를 지나면 산삼과 녹용이 녹아 흐른다는 삼록수가 있는 만경다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보는 경치야말로 선경 속에 들어온 듯 황홀경속으로 빠져든다. 전설에 의하면 그 옛날 옥황상제가 금강산이 천하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금강산에 놀러 왔단다. 그 경치가 하늘나라와 비길 수 없는 선경이라 구룡연계곡의 수정 같은 맑은 물에 삼복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관과 옷을 벗어 담소에 뛰어 들어 목욕을 하는 삼매경에 빠졌단다. 이를 본 금강신이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으니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노하여 옥황상제의 관과 옷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니 옥황상제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세 존봉 중턱에 맨머리 채로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곧 이어 금강문에 이르는데, 일명 칠선암 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자연석 문으로 높이가 5m쯤 되는 두개의 바위가 삼각형 모양으로 포개지면서 생긴 문이다. 입구 왼편에 金剛門(금강문)과 玉龍關(옥룡관)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玉龍關(옥룡관)의 의미는‘옥류동과 구룡연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의미로 이곳부터 천하절경의 옥류동이 구룡폭까지 장관을 이루며 세속의 묵은 때를 씻어 내리는 시원한 물줄기에 압도당한다.


계곡의 물줄기가 한 굽이 소용돌이치는 협곡에 출렁다리가 걸려있다. 어지러움에 놀라지 말고 하늘을 처다 보라는 말대로 하늘을 처다 보면 빗자루로 쓸어낸 듯, 청명한 하늘아래 기암절벽의 봉우리들이 만 가지 형상으로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낸다. 금강의 풍악산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붉은색 단풍이 바위틈을 비집고 핏빛으로 물든다.


붉은 글씨로 명명된 무대바위. 수 십 명의 신선들이 망중한을 즐기는데 시원하게 쏟아지는 옥류동 폭포는 투명인간의 실핏줄같이 옥색의 물감을 풀어헤치며 깊고 깊은 소를 이루니 우리네 서린 한도 말끔하게 갈고 닦아 천년만년 살고지고.


철교를 지나면 곧바로 선녀가 실수로 두 알의 구슬을 흘리고 갔다는 연주 담.  잠시 후 왼편으로 높고 높은 세존 봉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백 척의 비봉폭포. 금강산 4대 폭포중의 하나로 봉황이 흰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다. 높이가 140여 m에 봉황담의 깊이는 6m에 이른다고 하니 바라보는 눈길에 현혹되어 장관을 이루고 무봉폭포의 굉음소리에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든다.  


상팔담과 관폭정의 갈림길에 이르면 사람들의 행렬도 반으로 줄어들어 조용한 산책길에서 사색에 잠겨보지만 천하제일 금강산이 잠시라도 한눈을 팔게 내버려두겠는가? 귀청을 때리는 굉음소리는 78m의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기둥이 13m의 깊은 용소에서 휘돌아 솟구치며 소용돌이치는 물보라.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중에서도 으뜸으로 가히 장관이다. 관폭정에 올라 바라보는 경치는 한 폭의 그림 같고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은 구룡폭포의 용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싶다.


옥란관 주차장에서 관폭정까지 4km에 1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 이곳의 계곡과 계류는 금강산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흥을 일으킨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간직한 상팔담에서 백미를 장식하지만 우리의 행선지가 세존봉 이므로 관폭정까지의 관광만 해도 큰 은혜를 입은 것으로 만족한다. 후미가 도착하는 30여분동안 휴식을 하며 이곳의 명소로 자라잡고 있는 화장실을 지나칠 수 없어 관폭정 아래로 찾아간다.


금강산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관폭정에는 포세식(비닐봉투)으로 일본에서 수입한 비닐을 사용하고 환경 관리사가 수거하여 처리하는 방식으로 소변은 1불, 대변은 2불씩 요금을 징수하는데 우리나라도 이런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자연환경을 보호하는데 바람직하리라 생각이 든다.


11시 30분이 되어 우리일행이 모두 도착을 하고 인원점검과 함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대원은 이곳에서 포기하라고 하지만 누구하나 포기하는 사람이 없다. 남자10명에 여자13명, 경주에서 신계사에 수행 차 온 여자 스님 두 분이 합세하여 북측의 안내원 2명에 군인이 3명 도합 30명이 한조를 이루어 가이드의 안내로 산행이 시작된다. 


관폭정의 표고가 660m가 되고 보니 들머리가 꽤 높은 편이라 1,132m의 정상을 안일하게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50도의 가파른 비알 길에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지고 뒤돌아보는 구룡폭포가 발치 아래로 밀려나며 상팔담의 전모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 구룡폭포에 상팔담 까지 금강산의 모든 비경을 보게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고도가 높아지며 경사도 심해지고 남측의 산악인들을 시험이라도 하려는지 30대의 젊은 혈기로 성큼성큼 올라서는 그들을 따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천천히 가자는 구원의 요청을 하며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결에도, 턱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결에 땀이 비 오듯 온몸을 적신다.


너덜지대 돌층계를 지나며 지난번 붕괴사고 지점을 통과한다. 임시로 복구된 구간에는 철 사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 나뒹굴고 철사다리를 3개 오른 뒤에야 세존봉의 첫 번째 관문인 고개 마루에 당도한다. 양옆으로 수 백 장의 기암절벽이 버티고선 협곡에서, 멀리보이는 세존봉의 연봉들을 가리키며 지금까지 지나온 코스는 맛보기에 불과하니 자신이 없는 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돌아가란다. 지난번에는 동곡동 코스에서 무리하게 산행을 하다가 밤8시에 하산하는 고초를 겪었다는 말에 모두들 기가 막혀 묵묵부답으로 상대방의 얼굴만 바라본다.


수백 미터의 수직 절벽을 이룬 정상을 오르는 길. 나는 새도 넘지 못할 요새와도 같이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어 한숨이 나온다. 이곳에서 출발을 하면 수백 미터의 계곡을 내려섰다 다시 올라야 하므로 되돌아서기가 난감하다는 엄포에도 모두들 의지가 대단하고, 그중에는 화곡동에서 온 66세의 이 주영 여사도 계시는 터라 은근이 걱정이 되지만 어렵게 마련한 세존봉의 등산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과 새로운 다짐으로 가이드의 뒤를 바짝 따른다. 


수백 장의 벼랑을 내려서면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계곡에 이르고, 조금 전 우리가 관폭정에 오르며 보았던 비봉폭포의 상류지점이다. 바람하나 불지 않는 아늑한 분지에는 북사면으로 붉게 타오르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세존봉을 오르는 등산로가 산 사면을 끼고  Z자로 이어지고 너덜지대의 바위들이 비수처럼 날카로워 우리의 발걸음을 무디게 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하나 둘 우리의 시야로 들어온다.


옥녀봉을 비롯하여 동북쪽으로 만물상과 수정봉이 햇볕에 반사되어 은백색으로 눈이 부시고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에 눈이 팔려 발걸음이 느려진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다그치던 안내원이 속도를 줄여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도 잡아주고 대원들의 상태를 보살펴준다. 자주자주 휴식을 하며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을 보면, 체력이 약한 대원들을 처음부터 포기시키려는 배려가 아닌가하여 그들의 전략을 이해를 하게 된다. 배고픈 사람이 보면 떡 바위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책 바위로 보인다는 층층바위를 지나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로 목을 축이며 잠시 휴식을 한다.


머리위로 버티고 선 벼랑 끝의 바위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고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고사목과 측백나무에 단풍나무들, 정원사가 평생의 역작으로 다듬어도 이루지 못할 분재들이 바위틈을 비집고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고 만다. 수 백길 절벽의 틈사이로 알록달록 화려한 빛깔로 불타오르는 단풍은 세존봉이 자랑하는 선물이기에 피 와 땀으로 얻어진 값진 전리품이 아닌가? 시골 촌놈 서울 구경하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마냥 느려지는 발걸음에 금강의 지존인 비로봉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정상도 멀지 않은 듯, 깎아지른 절벽에 걸려있는 철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에 자신감이 붙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주능선에 올라서면 말이 필요 없이 감탄사만 쏟아진다. 일 만 이천 봉이 침봉을 세워 놓은 듯 숲을 이루고, 깊은 계곡의 벼랑사이로 걸려있는 폭포는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오는 층층 계단인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정신이 몽롱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한 점 막힌 곳이 없는 외설악의 전망대가 세존봉이다.


관폭정을 출발한지 1시간 40분 만에 정상에 도착한다. 북측의 안내원도 놀라며 남측 선상님들의 등산 실력이 대단하십네다. 주위의 경치를 마음껏 감상 하시라요. 칭찬이 자자하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더 잘 보이는 연봉을 찾아 아슬아슬 한 곡예를 한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유난히도 뾰족한 옥녀봉, 만물상의 연봉들이 하늘 금을 이루며 옥류동 너머로 상 관음봉, 중 관음봉, 그 품에 안긴 온정리 뒤편으로 수정봉이 천불산과 어우러져 해금강을 빗어 놓으니 동해바다 푸른 물결이 삼일포를 감싸 안는다.


쌍봉을 이루고 있는 비로봉(1,638m)을 정점으로 서쪽으로는 내금강과 경계를 이루는 월출봉과 채하봉, 집선봉을 연결하는 주능선이 북에서 남으로 내달리며 대간길이 이어진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이 비로봉을 지나 남쪽으로 달려가면 곧바로 향로봉에서 지리산의 천왕봉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가보지 못하는 북녘의 대간 길이기에 더욱 애착이가고 종주는 하지 못할지라도 백두산의 장군봉이라도 올라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집선봉에서 동쪽계곡으로 수백 미터의 절벽에 걸린 선화폭포의 물줄기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흰 스카프가 흘러내린 듯 장관을 이루며, 정상의 남쪽으로는 천길 단애를 이룬 절벽사이로 수도 없는 침봉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30여 분이 지나고야 후미까지 무사히 도착을 하며 한 시간여 망중한 속에 보고 또 보고, 사진 찍고 또 찍고, 망각 속에 잊어질까 조바심친다. 북풍한설 설한풍에 모진 목숨 이어오며 꿋꿋한 기상으로 수백 수천 년간 세존봉의 자존심을 지켜온 주목들이 우리에게는 황금으로만 보이는 귀중한 보물들이다.


세존봉(1.132m)은 애를 못 낳던 여인네가 이 봉에 올라 하늘의 정기를 받아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중에 임금이 되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유래로 ‘세존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망망대해처럼 넓은 외금강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금강산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로 이곳에 오르지 않고서야 그 화려함을 어찌 설명으로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2시간 반을 정상에서 머물면서도 미련이 남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재촉하는 안내원을 따라 하산을 한다. 마지막으로 비로봉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몇 걸음 옮기자 천길 절벽이 앞길을 가로 막고 길고긴 철사다리가 벼랑 끝에 걸려있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160m의 단애를 이룬 수직절벽에 걸린 철 구조물은 폭이 1m 남짓하지만 80도의 각을 이룬 경사에 밑구멍이 숭숭 뚫린 발판. 듬성듬성 바위에 고정된 핀으로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기 십상인데, 비바람이라도 분다면 난감한 장애물을 어찌 통과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370여 계단을 내려오는 길고긴 시간. 삐걱 소리만 들려도 천지가 무너지는 공포감속에 오금이 저려온다. 천하제일의 세존봉을 만만하게 볼 수 있는가?  바닥에 내려서며 뒤돌아보는 계단은 하늘위에 걸린 듯 더욱 높아만 보인다.


곧바로 채하봉으로 연결되는 안부에 이르는데, 희미한 오솔길이 비로봉 까지 연결이 된다지만 아직 까지 정상으로 개방이 되지 않아 아쉬움이 크기만 하다. 세존봉을 찾는 사람이외에는 찾아오는 이 없는 호젓한 비알 길. 비경이 숨어있는 동석동 계곡으로 들어선다. 한 낮임에도 높고 높은 산 그림자가 계곡을 쓸어 덮고 반대편의 세존봉 암벽이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은 신비의 절정으로 조물주가 만든 석주의 기둥들이 빼곡히 들어찬 침봉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한 치의 오름도 없이 가파른 비알 길. 협곡으로 내려서면 비수 같은 바위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없는 너덜지대에서 선화폭포의 우렁찬 굉음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며 사지를 빠져나가기에 여념이 없다. 세존봉을 출발한지 1시간 만에 세존봉 계곡과 집선봉 계곡이 만나는 합수목에 도착하여 후미가 도착할 때 까지 느긋하게 휴식을 한다.


합수곡 철사다리 아래엔 천수를 누리고도 미련이 남아, 두 물머리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를 맞으며 한 꺼풀 벗겨진 벌거숭이로 끄덕끄덕 물장구치는 모습이 천연스러워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명물이 된 고목나무. 신기한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섬섬옥수로 빗어 놓은 백옥 같은 반월 소. 뒤따라오는 이도 없는데 빨리 간들 무엇 하리. 명경지수의 맑은 물에 뛰어들고 싶은 욕심으로 안내 동무의 눈길을 살피는데 남측의 선상님 손도 씻지 마시라요. 알았수다. 알았어. 무안한 마음에 조롱박에 물을 떠서 벌컥 벌컥 마시고 만다. 안내 동무 흐뭇한 미소로, 흔들바위(동석)가 있다며 손길을 끄는데 너른 암반위에 10여 톤이 넘는 바위가 있어 아무리 보아도 흔들릴 것 같지 않아 밀어보라 재촉하니 지렛대로 흔들면 된다는 멋쩍은 웃음에 파안대소하며 배낭속의 소주로 정을 나눈다.


동석동이 가까워 오는지 등산로도 점점 넓어지고 금강산이 자랑하는 미인송이 하늘 숲을 이루는 암반에서 휴식을 한다. 오늘의 선상님들은 산을 너무도 잘 타십네다. 지난번에 온 팀은 낙오자가 생겨서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내려오느라 애를 먹었습네다. 그런데 선상님도 불을 밝히는 전지가 있습네까?  있다마다요. 헤드렌턴을 보여주자. 이것이 무엇입네까? 신기한 듯, 이리보고 저리보고, 사용법을 설명하자. 뭐 이런게 다 있습네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애장품이지만 남측의 등산객이 찾아오면 잘 인솔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머리에 씌워주며 나이를 물어보니 막내 자식과 동갑이라 애틋한 정감이 더 간다.


이제 우리는 남과 북이 아니라 부자간의 정으로 손에 손을 잡고 동곡동 입구에 도착하며, 꿈에 그리던 세존봉의 등산을 끝낸다. 17시가 되어 후미까지 무사히 완주를 하고 미니버스 편으로 온정리로 돌아와 샤워하고 방배정하고 금강산 삼대 관광식당인 금강원에서 멧돼지(흑돼지) 삼겹살에 백두산의 들쭉술을 반주삼아 만찬을 즐긴다.


냉면으로 입가심하고 금강산호텔 12층 라운지로 자리를 옮겨 송이버섯을 안주삼아 은은한 음률 속에 밤 10시면 통행금지라는 사실도 망각 한 채 금강산의 첫날밤이 무르익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