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세계/문학공간

사유 그 자유로움 - 대표 수필선 제 12집

김완묵 2007. 8. 26. 06:37
 

서산으로의 나드리

 

발행일 : 2007년  7월 25일

한국공간 수필가협회 대표수필선 제 12집


 

2006년 11월 23일   충남 서산시 팔봉면 진장2리


2006년 새해 벽두부터 아내 선화는 척추 협착증 수술을 위해 강남의 21세기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전국에서 몰려든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현대 의학의 발달로 위험하다는 척추수술을 무 통증으로 시술을 하고 신기하게도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하여 10여 개월이 지난 지금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완치가 되었으니 즐거움 속에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불가에서 이르기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같은 병명으로 수술을 하고 일주일 동안 한 병실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심전심으로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퇴원 후에도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십년지기가 되어 다시 만나자는 병실에서의 약속을 확인하며 최 향월 여사의 서산농장을 찾아 가게 되었다.


서울 외곽 순환도로(구리 - 판교)위를 질주하는 우리의 마음은 부풀어 오르고 금상첨화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날씨마저도 활짝 개어 어린아이 소풍  나가는 설레임으로 논곡 I.C에서 서해 고속도로와 접속을 하여 남으로 남으로 서산을 향해 신나게 달려간다.


평일이라 고속도로의 차량들도 뜸하여 속도 제한을 넘나들며 달려가는 우리는 21세기 조국발전의 상징물인 서해 대교도 순식간에 지나고 11시를 조금 지나 서산I. C를 통과하며 메스컴에서 소개한 간월도와 비도산 기슭의 부석사를 둘러보기로 하고 홍성 I.C까지 내처 달린다.


수술 후 처음으로 장거리 운전을 하는 아내의 몸 상태를 살피며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의 천수만 제방 위를 달리며 싱그러운 바다 내음에 이끌려 차를 세우고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호수 광활한 대지로 탈바꿈한 농경지를 바라보며 우리

인간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서산의 지도를 바꾸는 대역사는 정주영이라는 한 인간의 의지의 결정체로 조국 번영의 밑거름이 되어 하면 된다는 자신감속에 바다가 육지가 되고 문전옥답이 되었으니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세찬 바람이 참기 힘들었던지 장거리 운행이 무리인지 지척에 있는 간월도 가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여 포기하려던 차에 간월도 축제의 현수막을 보고 그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간월도의 끝자락에 작은 무인도. 작은 암자가 전부인 이곳은 밀물 때는 섬이 되어 밧줄에 달린 조각배로 건너야 하고 썰물 때는 갯벌을 걸어서 간월암을 오르게 되는데 때마침 썰물시간이라 암자에 올라서니 시원한 천수만의 바다위에 떠있는 부표와도 같이 조망이 시원하다.


간월암은 이 태조의 왕사 무학스님이 이곳에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여 달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이조 말엽 완전히 퇴폐된 것을 1941년 송민공 선사의 주창에 의해 마벽초 선사가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여러 섬들에 둘러쌓인 한 송이 연화 꽃으로 피어났으니 이곳이 진정한 적멸보궁이라는 주장이 허구만은 아닌 것 같다.


간월도 를 뒤로하고 서산 휴게소를 지나며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부석사를 찾아가는 길은 차량의 왕래도 별로 없는 드라이브 코스로 싱그러운 바다 내 음이 코끝을 스치고 초행길에 지도 한 장 없이 찾아 가는 길이지만 낮 설지가 않고 부석면 소재지인 취평리에서 동쪽으로 봉긋하게 솟은 도비산(361m) 의 중허리에 걸린 산사를 찾아간다.


서해안의 조그마한 산자락에 세인의 이목에서도 멀어져 있는 산사를 찾아가는 데는 남다른 호기심 때문이다.


부석사라하면 영주에 있는 사찰을 떠올리게 되지만 작은 사찰에 불과한 이곳이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서부터 창건설화와 浮石寺라는 글자와 사찰의 이름을 따서 부석면으로 부르고 있는 것 까지 일치하지만 바다에 떠있는 부석(검은여)과 중국을 바라보는 위치가 가까운 것으로 보아 더욱 사실감이 있다고 하겠다.


부석사로 오르는 길은 차가 한대 지날 만큼 협소한 시멘트 포장길로 울창한 숲 속으로 이어지는데 천여 년의 연륜 이 말해주듯 수백 년 된 고목들이 즐비하고 사찰의 중창으로 부산스러운데 절 입구의 사천왕대신 이색적인 사자 문이 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검은여를 찾기에 분주하지만 그 어디에도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답답한 마음에 법당에 들어가 보살님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더니 친절하고 자상하신 보살님께서 손수 대웅전의 앞마당으로 인도하며 부석면의 너른 들판을 손으로 가르친다.


그의 손끝에는 부석면의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넓은 수로가 있는 부근에 검은 점으로 보이는 물체가 바로 검은여(浮石)라고 일러주며 예전에는 그곳이 바다였지만 개간사업으로 육지가 되어 돌이 떠오르게 되었다며 이왕 오셨으니 산신각 뒤에 만공스님께서 기도하시던 굴이 있으니 다녀오라는 귀 띰에 그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비바람에 칠이 벗겨지고 속살을 드러낸 산신각 오르는 길목에는 삼층석탑이 바위를 기단삼아 자리를 잡고 십여 톤이 넘는 돌 거북이(일명 부석이라 주장하기도 함) 건물과 가까운 탓에 사진 찍는 것을 포기하고 철 사다리를 타고 동굴로 향한다.


비바람도 피하기 어려운 바위틈속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만공스님은 한국 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위대한 선지식인 이시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한 아름안고 20여분이면 오를 수 있는 정상을 단념한 것은 현대농장과의 약속시간으로 후일을 기약하며 부석사를 내려온다.


검은여 : 선묘낭자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할 당시 대사를 사모했던 당나라 처녀로 대사가 끝내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대사의 득도와 무사귀국을 빌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귀국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사는 낭자의 혼을 위로하기위해 당나라쪽 바다가 보이는 도비산에 절을 지으려했으나 다른 종파의 불승과 주민들의 반대로 부처님께 어려움을 호소하자 검은 바위로 변신한 선묘낭자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떠

다니면서 절 창건에 반대한 무리들에게 호통을 쳐 평정을 하고 공중에 떠있던 바위가 땅에 떨어져 검은여가 되고 이 검은여가 바라보이는 산 중턱에 절을 지었으니 이곳이 부석사라고 전해온다.


팔봉면 진장2리의 현대 조경 농장을 찾아가는 연도에는 낮은 구릉지대가 그림같이 펼쳐지고 싱그러운 해송이 가을걷이 끝난 을씨년스러운 들녘을 보듬어 안으며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서산시내에서 태안쪽으로 10여 km를 따라가면 어송교에 이르고 곧바로 팔봉 중학교에서 건너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자리 잡은 현대 농장에 도착하니 오후 1시 최향월 여사와 부군인 이은범 사장님, 아들 며느리의 환영 속에 10개월 만에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친화력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장거리 여행의 피로도 말끔히 가시고 넓찍한 거실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어서 왼쪽으로 팔봉산의 연봉들이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금북정맥이 하늘 금을 그으며 잘록한 허리를 감아 올릴때 장군산의 암봉이 하늘로 치 솟는다.


정갈하게 차려온 점심상을 물리고 현대 농장 견학을 한다.

팔봉산의 정기를 받은 지맥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농장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로부터 희귀종 까지 저마다 자태를 뽐내는데 일반 가정용이 아니고 관공서나 호텔, 빌딩의 정문이나 현관에서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는 고급 수종으로 수백 그루의 금송이 싱싱하게 자라고 빽빽하게 숲을 이룬 계수나무는 가로수로 팔려 나간다는 설명이다.


6대에 걸쳐 이 고장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오는 토박이로 양지바른 농장의 한 가운데 수 천 만원을 호가하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지은 그림 같은 2층 집에서 화창한 봄날이면 붉게 피는 찔레꽃의 향기에 취하고 장미의 넝쿨 속에서 더위를 피하며 아들 손자며느리와 오손 도손 살아가는 최 여사 부부의 행복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서산이 자랑하는 팔봉산 자락을 돌아가며 정담을 나누고 삼년 전에 다녀온 곳이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주고받는 술잔속에 돈독한 정을 나누며 직접 채취한 토종꿀에 무공해 배추, 무우와 검은 팥까지 마음의 정표를 가득 담아 한 아름 안겨주는 넉넉한 인심 속에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고 서울로 돌아오는 우리의 마음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