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길목에 선 고남산과 수정봉

수정봉(804m), 임망봉(705m), 고남산(846m)
산행일시: 2006년 2월 19일 11시 - 16시 15분 산행시간: 5시간 15분 산행거리: 약 14,5km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주천면 이백면 송암 산악회 날 씨: 맑음 인 원 : 29명
꽃샘추위 반짝 추위도 수그러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수정봉 고남산 구간의 대간 길을 찾아 남녁 땅으로 향하는데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운봉의 들녘에도 아직은 겨울잠이 한창이지만 양지바른 언덕아래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봄의 전령사로 제주의 서귀포에는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수정봉 자락에 자리잡은 노치마을
오늘 우리가 걸어야할 수정봉, 고남산 구간은 지리산의 고산준령을 넘어온 건각들의 여독을 풀어주고 사치재를 넘어 북으로 올라가며 봉화산과 백운산, 덕유산을 넘기 위한 휴식구간이라고 할까? 인월면을 들어서며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대간길은 누애가 뽕잎을 먹고 있는 형상으로 수정봉과 고남산이 양쪽으로 우뚝하고 잘록한 허리에 여원재를 중심으로 완만한 평원위에 마루금을 이어가고 있으니 아주 평화롭게 보인다 (11시 출발)
지난번 내려선 고기리의 당산 나무에는 대간꾼들의 표지기 들이 화려한 꽃으로 만발을 하고 남원과 정령치를 넘는 삼거리에서 출발한 우리는 가재마을까지 1.5km의 도로를 따라 워밍업을 하고 마을 뒤편의 물맛 좋기로 소문난 노치샘을 지나면 대간길의 입구에 잘 생긴 소나무(당산나무) 4그루가 반갑게 맞아주고 안이한 생각으로 만만하게 보아온 경솔함에 일침을 가하려는 듯 무성한 소나무 숲 사이로 가파른 비알 길에서 가쁜 숨소리만이 정적을 깨트린다. (11시 20분)

10여분 만에 주능선에 올라서니 왼쪽의 남원 쪽으로는 현기증이 나도록 수 백 길의 단애를 이루고 있으니 고기리에서 바라보는 수정봉이 800m가 넘는 고봉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은 운봉과 주천면 일대가 해발 500m가 넘는 고원지대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오는 착각으로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린다. (참고로 덕치샘이 해발 550m)

대간길을 열어주는 당산나무
수정봉에 오르면 남원시가 보이련만 울울 창창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이정표 하나 없이 대간꾼의 리본만이 바람결에 나부끼며 실망감을 안겨주는데 쇠 음달 내리막길에는 잔설 녹은 빙판길에 오금이 저려오고 아이젠도 없이 객기를 부리다가 호된 신고식으로 혼쭐이 나고 무성한 소나무 숲의 터널 속에서 짙은 향기에 흠뻑 취한다. (12시 )

울울창창 수정봉 정상
20여분간 빙판길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안간힘을 쓰다보니 이백면과 운봉읍을 오가는 오솔길의 입망치에 내려선다.
운치 좋은 소나무 숲은 계속 이어지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진땀을 흘리며 올라선 곳이 입망봉으로 이곳 또한 하늘을 가린 소나무 숲으로 사방이 가로막혀 조망을 기대할 수 없는 대신 펑퍼짐한 정수리에는 피로에 지친 대간꾼들의 휴식처로 안성마춤이라 모두들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12시 20분 - 10분간 식사)

운무속의 남원들녁

입망봉 정상에서 식사
또다시 내리막길, 연속되는 빙판길에 오금이 저려오고 완만한 주능선에 내려서니 소나무 숲 사이로 남원시 이백면의 들녘이 내려다보이고 능선의 끝자락에 우뚝 솟은 암봉 하나, 전망대바위에 홀려 열심히 달려가다 보니 무심한 대간길은 우측의 사면길을 가로 질러 북으로 달려가며 설레이는 가슴에 찬물을 끼얹고 만다. (13시 15분)
참고로 우뚝 솟은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보는 남원분지의 너른 들판과 지리산의 장쾌한 산맥을 두루 조망하는 여원 낙조는 운봉팔경의 으뜸이라 하지 않던가?

여원재에서 바라본 전망대바위
제1경 : 할미재의 아침 햇살 제2경 : 팔양치의 저녁 놀 제3경 : 황산의 밝은 달
제4경 : 베틀위의 맑은 바람 제5경 : 봉화산의 풀 피리소리 제6경 : 개논들의 농부가
제7경 : 방장산의 돌아가는 구름 제8경 : 덕두봉의 저녁놀

여원재의 수호신
실망감을 안고 내려선 곳이 그 유명한 여원재
남원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운봉으로 가다보면 해발 477m의 여원재에 이르게 되는데 눈이 부리부리한 운성대장군이 길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우뚝 서있고 현대화의 바람을 타고 들어선 장동마을의 봉송 황토마을을 알리는 입간판이 이 고개의 사연을 알고나 있는지 무상한 세월 속에 옛일을 더듬어보기로 하자. (13시 30분)

고남산을 배경으로 평화로운 장동마을
이곳은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2차선의 도로가 시원스레 관통하고 있지만 그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남원과 운봉, 함양을 오가는 길목으로 장거리 여행길에 지친 길손들의 여독을 풀어주는 주점들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한다.

밭두렁을 끼고 도는 대간길
물자가 부족한 왜구들이 남해안을 수시로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중 고려 우왕 6년에는 부산에 상륙한 왜구들이 진주, 함양을 거쳐 남원군 인월면 일대를 점령하고 살인, 방화, 약탈 등 갖은 만행을 저지르며 한양을 향해 북상을 하던 중 이곳에 이르러 선봉대장 아지발도(당시 15세)가 미모와 자색을 겸비한 주모를 희롱하게 되는데 왜구의 손이 닿았던 왼쪽 젖가슴을 예리한 비수로 도려내고 자결을 하고 말았으니 그 고귀한 정조를 기려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짓고 고개 이름을 여원재라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삼한시대 이래 국경을 맞대고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입망봉을 지나며 허물어진 성터를 보았지만 동학군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진격을 하기에 이르자 박봉양이 운봉의 만보군과 함양등지에서 보내온 지원군과 합세하여 방아치, 관음치 전투에서 승리하므로 운봉을 지키게 되고 동학군이 처음으로 참패를 당하며 영남으로 진출하는데 실패를 한 현장이기도하다.

입망봉 아래 허물어진 성터
옛 역사를 되돌아보며 국도를 가로질러 이정표가 서있는 진입로에는 리본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어 쉽게 찾을 있는데 노치샘 6.7km 유치 삼거리 10.5km의 이정표가 우리의 가는 길을 알려주고 펑퍼짐한 둔덕의 솔밭을 가로 지르면 정면으로 아름다운 장동마을이 펼쳐지고 마을 뒤편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고남산이 수려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3시 40분)
대간길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물을 건너지 말라는 교과서를 그대로 답습하듯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고남산을 외면 한 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논둑길 밭둑길을 따라 마루금을 이어갈 때 마려운 소피줄기 오른쪽으로는 낙동강으로 왼쪽으로는 섬진강으로 갈라지는 분수령을 이루니 장동마을 안고 돌며 완만한 솔밭 길을 한없이 오르다보면 정상에 쌍묘가 나란히 누어있으니 이곳이 대간길의 꼭지점으로 561m의 장봉임을 그 누가 기억이나 하고 있나? (13시 55분)

장봉 정상의 쌍묘
가선대부 김해김씨, 정부인 경주김씨의 묘 잔등에서 직진을 하면 대간 길에서 이탈하는 것이고 우측으로 60도를 꺽어야 하는데 우리의 발길은 장동 마을 뒤편으로 이어지며 경사가 심해지는 솔밭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다 보면 수 년 전에 난 산불로 수 십 년 된 소나무들의 밑 둥이 모두 타버리고 수 만평의 산림이 황폐화 되어 나무 자르는 굉음소리가 계곡으로 울려 퍼지며 대간꾼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온다.

벌목된 불에탄 소나무들
장동 마을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무명봉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걸어온 주능선이 굽어진 활등같이 휘돌아 오르고 고남산 정상이 지척에 있건만 대간길은 우측으로 선회하여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몇 개 넘은 뒤 좌측으로 방향을 잡아 오름길이 시작된다.
정상이 가까워올수록 경사도 심해지고 가재마을의 당산나무에서 시작된 소나무 숲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철쭉나무와 억새가 자리를 잡고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답답하던 가슴이 환히 열린다. (16시)

묘지가 있는 공터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깔딱 고개를 치고 오르면 암릉길이 나타나고 늘어진 밧줄을 잡고 올라선 곳이 고남산의 정수리이다.(16시 35분)

정상직전의 암봉
스덴 기둥으로 만든 정상 표지석 옆으로 삼각점까지 구색을 갖추고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너무 좋아 운봉의 너른 들이 시선에 가득하고 88고속도로가 동서로 신나게 내달리는데 만복대에서 바래봉까지 태극능선이 힘차게 뻗어 내린 끝자락에 조용히 졸고 있는 황산이 정겹기만 하다.

고남산의 정상

통신 안테나
황산대첩이라면 우리는 먼저 백제의 계백장군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곳과는 전혀 다른 전투가 있었으니 이곳 바래봉 기슭의 인월리와 인풍리를 점령한 아지발도를 상대로 고려의 토벌대장 이성계 장군이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여원재의 주모가 꿈속에 나타나 일러준 대로 황산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고남산에서 바라본 황산벌판- 오른쪽 뒤편이 황산
고남산에 오르면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이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며 작전을 구상 한 뒤 소년장수 아지발도를 사살하므로 왜구의 난을 평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조정에서 신망을 얻어 후에 조선을 건국하고 다시 찾아와 고남산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이곳에는 이성계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눈이 소복히 쌓인 권포리로 내려가는 임도길
또한 남원하면 춘향이를 떠 올리게 되고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우는 고장으로 황산 기슭의 비전마을에는 판소리의 대가인 송홍록에서 송만갑으로 근대에 와서 명창 박소월로 이어지는 동편제의 고향이요. 춘향가와 흥부가의 판소리도 남원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중요한 무형문화재의 산실인 셈이다.
바래봉의 북서쪽 기슭에는 광활한 분지에 조성된 푸른 초원위에 수 백 마리의 소와 면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국립종축장으로 오뉴월이면 붉게 타오르는 철쭉과 어우러진 그림 같은 정경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우리나라 낙농산업의 효시를 이루며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사치재로 향하는 통안재입구
사방을 둘러봐도 막힘없이 펼쳐지는 조망
소나무 숲에 가려 지나온 한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고산준령의 지리영봉들과 앞으로 달려갈 대간의 줄기들이 북으로 내 달리는데 정수리에 세워진 통신 안테나가 옥 의 티라고나 할까?
하지만 높은 철탑에서 발신되는 핸드폰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가야산의 계곡에서 무등산의 골짜기 까지 지구촌 곳곳으로 울려 퍼지는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권포리 마을 회관
산불 감시초소를 돌아 중계소 철조망 앞에서 그동안 참아오던 아이젠을 착용하고 급경사 빙판길을 내려오니 권포리로 내려가는 임도와 만나고 흰눈이 소복히 쌓인 임도길이 별천지를 이루며
통안재에 도착하여 지난번에 달아놓은 리본과 반가운 입맞춤을 하고 마루금 13km의 종주길도 마감을 하게 된다.
대간 길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수많은 고을과 유적을 만나게 되는데 역사와 문화 예술이 살아 숨쉬는 조상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것도 우리들이 해야 할 소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통안재 16시 도착 . 권포리 16시 15분 도착)

정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