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호 ( 시 와 산 )
시 와 산
발 행 일: 2005년 6월 30일
일 시 : 2005년 4월 23일 -28일 까지 5박 6일
역사의 현장 서안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길러낼 때 무슨 사심이 있으랴. 바람 불면 꺼질 새라 애지중지 보듬어 안고 튼실하게 자라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시름을 덜어내지 않았던가? 철부지로만 보이던 아이들이 (명숙, 미숙, 재형)부모 생각하는 마음으로 효도관광을 마련하니,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보다도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길에 나선다.
예정보다 빠른 6시25분 공항에 도착하여 대합실에 들어서니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8시가 가까워오며 하나투어의 안내 데스크에 모여드는 낮선 얼굴들. 하지만 같은 목적지로 향한다는 반가움에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눈다. 38명의 많은 인원을 인솔할 김 해순 가이드가 상냥한 미소로 우리의 설레는 마음을 달래준다.
10시45분 예정대로 인천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항공 OZ 319기. 강화도 마니산의 상공을 선회하며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서해안을 따라 고도를 높이고, 목포를 지나며 서해바다를 건너 내륙지방으로 향한다. 목적지인 서안이 가까워오며 광활한 대지위에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서안의 시가지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장 닭 모양의 중국지도를 보면 서안은 그 중심부인 배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하는 중심지로 주나라부터 당나라까지 5대왕조가 도읍지로 정한 유서 깊은 도시다. 천년의 영화를 누렸던 서안은 섬서성의 성도이고 면적이 9,886㎢에 650만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8번째로 큰 도시다.
도시전체가 유물 전시장으로 땅속에 뭍인 문화재를 보호하기위해 당국의 감시가 철저하고. 우리가 지나고 있는 서안대로는 당나라 때 만들어진 도로지만 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어머니의 강 황하의 지류인 위수가 도심지를 흐르고 있지만 강우량이 500mm에 불과해 논농사는 거의 없고 보리, 밀, 옥수수, 면화 등 주로 밭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과 건조한 황하의 유역에서 일어나는 황사가 도시 전체를 뒤덮는 악조건 속에서도 수 천 년 간 중국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가 지나는 거리 곳곳에는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문화재들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제일먼저 찾아간 곳이 도심지에 있는 서안성벽이다. 당나라의 장안성을 기초로 명나라 17-21년(1374-1378년)에 건설되어 600여년의 역사 속에서도 중국에서 현존하는 성벽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도읍지를 북경으로 옮기며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을 서쪽에 있는 편안한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서안으로 개칭하고 둘레 14km의 성을 쌓아 도시전체를 방비하게 되는데, 동서남북으로 성문을 만들어 누각을 세우고 북문에 지휘부를 두었다고 한다.
참고로 성의 규모를 살펴보면 동서로 3,5km 남북으로 3km의 장방형으로 높이12m에 밑 부분의 넓이가 18m, 성벽위의 넓이가 14m로 마차 2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규모로 만리장성(7m)보다 배가 넓다고 한다. 성벽위로는 활을 쏠 수 있는 적대가 98곳이 있고 성 둘레에 폭이 20m, 깊이7m의 해자를 파서 물이 항상 흐르게 하므로, 적을 막아내기에 완벽함을 짐작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대 안 탑. 현장법사(삼장법사)가 불교의 성지인 천축국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와 불경을 가지고와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멀리서도 황금색7층 석탑이 우리의 시선을 압도한다. 60m의 거대한 탑이 천 사백년간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에 가깝지 않은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악조건 속에서도 기초를 할 때 힘을 분산하기위해 계란형으로 하였다는 설명에서 그 당시의 뛰어난 건축술을 엿 볼 수 있으며, 불심을 향한 정성이 기적을 낳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현장법사가 29세에 천축국으로 들어간다. 예나 지금이나 국경을 넘는 일은 당국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 현장법사도 허락을 받지 못하고 홀 홀 단신으로 왕복 5만km나 되는 머나먼 길을 떠돌며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서유기라는 불세출의 명작이 탄생되고, 17년간 천축국을 돌며 불경을 공부하고 많은 보물들을 가지고 당나라로 들어온다.
나갈 때는 몰래 갔지만 돌아올 때는 당의 고종이 친히 마중 나가 환대를 한다. 수나라 때의 무수사를 대자은사로 명명하고 1,890칸의 대사찰로 증축하여 불교의 성지로 조성하고 많은 보물들을 보관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15년(629년- 641년)에 걸쳐 대당서역기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대안탑 뒤편에는 삼신불을 모신 대웅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회랑을 돌아 아미타불전에 들어서면 삼장법사가 천축 국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과 귀국하는 장면들이 목판에 음각되어있다. 요 근래 만든 작품으로 그 넓은 법당안의 삼면을 차지하고 있다. 방대한 자료들을 일일이 파고 다듬는 공정은 불심이 아니면 이루어내기 힘든 작업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음으로 우리의 발길은 이곳의 특산품인 찻집을 거쳐 저녁에는 서 태후가 즐겨 먹었다는 교자연의 특식으로 메뉴를 정한다.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만두를 기대했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 18가지나 되는 만두들이 차례로 선을 보이지만 내 입맛에는 별로 흥미를 끌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올라오는 새알보다도 작은 진주만두로 대미를 장식한다.
별 4개의 금산반점 808호실에 여장을 풀고,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극화한 무용을 관람하기위해 당락궁을 찾는다. 일인당 30불씩 하는 경극은 화려한 무대와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극장으로 9시30분부터 시작된 쇼는 뮤지컬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중간 중간에 영어로 해설을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4대 가무극(경극, 소림사의 무술, 서커스, 양귀비 극)은 화려한 무대와 일사불란한 몸동작으로 시선을 압도하고 높은 음색으로 귀청을 파고드는데 비해 같은 동양권이지만 우리의 부드러운 음률과 자연스러운 몸동작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碑 林 의 숲길
서안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맑게 개어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는 뷔페식으로 종류도 다양하고 정갈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차에 싣고(저녁에 장 가게로 이동을 한다) 제일먼저 비림 박물관으로 향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역사 관광은 가이드의 설명이 아니면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려우므로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관계로 버스로 잠시 이동하여 박물관 입구에 도착한다. 정문을 들어서면 처음부터 양옆으로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누각 속에 고이 모셔놓은 비석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길옆에 덩그러니 서있는 비석과 100m전방의 정문 현판에 걸려있는 비림의 글자에 관한 설명이 계속된다.
길옆의 비석에는 碑 林이라 쓰여 있고 정문의 현판에는 비석비자 위에 점하나가 없다. 청나라 말기 부정부패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서방의 8개국이 연합하여 청나라를 침략한다. 그 유명한 아편전쟁이다. 임 측서 장군이 부하 장군들에게 현판을 써주며 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린 뒤에 돌아와서 점을 찍겠다고 약속을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전쟁은 패하고, 장군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그로 말미암아 아직도 점을 찍지 못한 채 그대로 걸려있다고 하니,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글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碑林에는 명필들의 친필서각 1,095점이 한자리에 전시되어 숲을 이루고, 천년이상 된 문화재급 보물들만 선정하여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 많은 보물들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전시실에 배치하였는데 제1전시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문인들의 필독도서로 四書三經을 비롯하여 12부 경서 65만 250자가 비석에 빼곡히 쓰여 있다.
당의 현종이 쓴“석대효경”은 예서체로 되어있고 비석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며 제2전시실에 들어서면 문물이 가장 성행했던 당 나라 때의“대진경교 류행중국비”가 자리 잡고 있다. 625년 기독교가 들어와 활동했다는 흔적이 아라비아 글자로 새겨져있다. 또한 당나라를 대표하는 안진경의“다보탑 감청비”와 “안씨가묘비”는 자신의 행적을 적은 글로 72세에 썼다고 전해진다.
제3전시실에는 서성 왕 휘지의 비문이 자리 잡고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이 현장법사의 공헌을 치하하여 지은“삼장성 교서비”를 왕 휘지의 필체로 비석에 새겨 넣었는데 해서, 횡서, 초서의 세 가지 글씨체를 순서도 없이 섞어서 쓰고 글자의 크기도 제 각각이어서 그 뜻도 모른 채 스쳐 지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서예가들이 온종일 자리를 지키며 탐독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세상에 둘도 없는 귀중한 보물을 자기혼자 독점하겠다는 욕심에서 탁본을 한 다음 글씨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지워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제4전시실 문턱을 넘어서면 그윽한 묵향과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탁본 뜨는 손놀림이 민첩한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탁본의 기술도 보여주고 복사본을 판매하는 곳이다. 이마저도 몇 년 후에는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금한다고 하니 귀중한 장면들을 견학하며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다.
기라성 같은 서예가들의 친필이 숲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서도 가장 추억에 남을 작품으로 “관제시죽” 이라는 시가 눈길을 끈다. 관우가 조조에게 사로잡혀 포로로 있을 때 관우를 향한 조조의 정성이 지극하였다. 하지만 유비에게 향하는 마음을 그 누가 달랠 수 있단 말인가?
한 폭의 대나무 그림 속에 임 향한 일편단심을 적은 글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며 이 천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이유를 알게 된다.
關 帝 詩 竹 (관 제 시 죽)
不 謝 東 君 意 불 사 동 군 의
丹 靑 獨 立 名 단 청 독 립 명
莫 嫌 孤 葉 淡 막 겸 고 엽 담
終 久 不 凋 零 종 구 불 조 령
얼핏 보면 대나무 그림이지만 대나무 잎을 유심히 보면 그 속에 위의 시가 숨어있다. 대나무처럼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하는 글로 청나라의 문인들이 관우를 흠모하는 뜻에서 지은 시라고 한다.
일사천리로 쏟아내는 가이드의 설명과 주마간산으로 스치는 관광길에 그 깊고 심오한 뜻을 어찌 다 되새길 수 있으며 어찌 다 소화할 수 있단 말인가?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린다.
華 淸 池
당의 현종과 양귀비의 로멘스가 서려있는 화청지는 3,000 여 년 전 주나라 때부터 황제들의 온천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산세가 수려한 진맹산맥의 지맥인 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당의 현종이 제국보다도 사랑한 양귀비를 위해 궁전을 짓고(비 상전) 목욕탕을 만들어 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아름다운 정원으로 보존되고 있으니 그 시절 화려함을 어찌 다 형언할 수 있단 말인가?
제일먼저 비상전을 돌아가면 연못이 나타나고 휘늘어진 버드나무와 수련이 만발한 못가에는 백옥같은 양귀비의 상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풍만한 허리와 허벅지는 양귀비가 70kg의 뚱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대에 따라 미인의 척도가 달라지니 양귀비(본래이름은 양 옥환)가 현재 다시 태어난다면 미인은 커녕 뭍 남성들에게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양귀비는 원래 당 현종의 며느리였지만 뛰어난 미모에 반한 현종이 부인으로 삼아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된다. 酒池肉林속에 해가 뜨고 졌다고 하니, 앞에 보이는 연못이 바로 그 현장이라고 전해진다.
왼편으로 해당탕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면 해당화 모양의 양귀비 온천탕이 있고 그 옆으로 연화탕이 있다. 하루에 112톤의 온천수가 솟아 나오고 43도의 목욕하기에 알맞은 온천수는 밖으로 돌려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명소가 되었다.
연화탕을 지나면 황제가 목욕하던 성지탕이 나온다. 휴게실에는 바닥에 물길을 만들어 온천수가 흐르며 온도조절을 할 수 있는 중국 최초의 난방시설을 만들었다. 상시탕 이라는 대중탕에는 문무백관들이 목욕을 하는 곳이다. 물길이 흘러내리는 상석에는 고관들이 하석에는 하급관리들이 목욕을 했다고 하니 계급사회의 위계질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인가.
건물을 나와 북쪽으로 날아갈듯 높은 누대에 아담한 건물이 시선을 끈다. 양귀비가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던 곳으로, 아마도 미용실의 원조가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화청지를 돌아 나오며 중국역사를 되돌아보면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라는 요부에 의해 멸망하고, 후주의 포사는 손의 미모에 반해 망하고, 당의 현종도 양귀비로 인해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으니, 양귀비도 38세의 나이에 안록산의 난으로 자결을 해야만 하는 운명으로 끝맺음을 하고 만다.
진시황제는 누구인가?
화청지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진시황 능은 여산(1,307m) 줄기가 동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가며 구릉지에 과수원이 즐비하게 이어지는 사이로 무성한 숲에 둘려 쌓인 야산(높이115m)에 이른다. 지금은 87m로 낮아 졌지만,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계단으로 이어지고 봉분위에는 타일을 깔아 공원처럼 벤치도 있고 간이상점과 사진사까지 진을 친다.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에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무덤의 규모는 넓이 25만평에 직경이 6km인데, 봉분만도 동서로 485m, 남북으로 515m의 거대한 동산을 이루고 있다. 전설 속에 전해오던 진시황 능은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양 지발-현재 75세 로 생존해 있음)에 의해 발견되어 투시경으로 사마천의 기록을 대조한 결과 확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덤을 내려와 진시황의 병사들이 열병식 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지하궁전으로 안내한다. 350분의 일로 축소된 지하궁전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먼저 돌비석에 “ 前 言 „ 이라는 글자가 우리를 반겨준다.
능원풍광 지하황궁
상구천문 하구지형
시황관침 사내여생
일람오비 사미우궁
이라 적혀있다.(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시간상 한문으로 쓰지 못하고 한글로 표기함)
좁은 계단을 따라 지하 8.7m의 지하궁전에 도착하면 어두운 조명 속에 하늘에는“일 월 성신”의 천체가 신비감을 더 한다. 해가 떠있는 낮에는 조명이 밝게 빛나고,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면 어둠 속에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재현된다. 천상에는 가위를 든“여”와 낫을 든“복 희”가 마주보며 하늘을 나는데 하반신이 뱀의 형상을 하고, 바닥의 정중앙에 누어있는 진시황을 호위하는 수호천사로 표현하고 있다.
동쪽 벽에는 “시황동기”라는 진시황제의 행차와 남쪽 벽으로“시황출순”으로 지방순시, 서쪽 벽에는“육국가무 ”로 각국의 무희들이 악기와 가무를 하는 모습, 다음으로 북쪽 벽에는“육국궁전”으로 함양궁을 중심으로 36개 군주들의 궁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실제로 지하궁전의 규모가 내성이 4km, 외성이 6km에 달하며 일월성신을 진주와 보석으로 만들고 산과 대륙은 금과 은으로 강과 바다는 수은으로 채웠으며 물고기 기름으로 장명등을 밝혔다고 하니 그 화려함의 극치는 필설로 형언할 수 없겠다.
진시황이 즉위하며 시작된 공사는 38년간 72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는데, 진시황이 죽고 그의 아들이 2년 동안 공사를 한 후에야 마무리가 되었다고 한다.
무덤에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접근하는 물체를 향해 화살이 날도록 장치를 하였으며, 무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사인부를 모조리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진시황의 시체도 처음에는 다른 곳에 매장하였다가 2년 후에 아무도 모르게 이장을 하고 마지막 인부들까지 생매장하여 비밀이 지속될 수 있었다. 항우가 함양궁을 점령하고 30만 대군으로 30일간 약탈과 방화로 파괴를 하였지만 지하궁전만은 찾지를 못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지하 궁전뿐만 아니라 천하를 통일한 후 변방에서 침입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수축하고 어마어마한 아방궁을 건설하며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살상을 일삼으니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폭군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여 성문법을 완성하고, 도량형의 표준을 정하고, 화폐를 통일한 것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지방 순시를 즐겨하여 나이 50세에 하남성 사구를 순시 중 병으로 사망(둘째 아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음)하고 만다. 진시황이 죽고 4년 만에 진나라도 망하게 되었으니 천하를 통일하고 불로장생 하겠다고 욕심을 부리지만 부질없는 인간사가 허망할 뿐이다. 지하궁전을 나서며 10분 거리에 있는 병마용총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세계8대 불가사의 중 하나.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병마용총은 진시황 능에서 1,5km떨어진 곳에 있다. 발굴현장을 건물로 지어 전시실로 보존하고, 제1전시실로 들어가면 동서로 230m, 남북으로 62m에 갱의 깊이가 5m나 된다. 책이나 T V 로 보아온 터라 낮 설지는 않지만 살아 움직이는 듯, 4열종대로 도열해있는 진품 앞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흥분과 벅찬 감동 속에 가이드의 설명이 귓전에서 맴돌고 모두들 시선을 거둘 줄 모른다.
무덤 안에는 병사가 8,000여명에 말이 500여필, 전차가 130량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병사 1,000여명과 적은수의 말과 차량만이 발굴된 상태에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기술로는 완전한 복원이 불가능 하므로 앞으로의 일은 후세들에게 숙제로 물려주고, 발굴된 부장품들을 복원하는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지만 10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俑이란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만든 부장품으로 속이 비어있는 도자기를 말한다. 실제 병사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진 토용은 저마다 표정이 다르다. 보병부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1호 갱은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칸막이를 통로로 이용하고 맨 뒤편에는 부서진 토용들을 복원하는 작업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2호 갱으로 들어서면 1호 갱의 절반정도가 된다. 토기 굽는 가마터가 있고 중장비를 갖춘 실전부대가 배치돼 활 쏘는 기마병 ,전차병, 긴 창을 든 보병들이 도열해있다. 3호 갱은 지휘부로 활용한 곳이다. 남쪽 방은 작전회의실이고 북쪽 방은 제사를 지내던 방으로 제사에 사용했던 사슴뿔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3호실 옆으로 긴 회랑에는 출토품 중에서 가장 완벽한 토용을 전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서 활 쏘는 병사와 늠름하게 서있는 병사다. 말을 끌고 가는 마부의 상은 2,000년의 긴 세월을 뛰어넘은 현재에도 살아 숨 쉬는 예술품이다. 그 옆으로는 고고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진시황의 청동마차가 전시되어 있다.
1980년 발굴된 동 마차가 2대인데 앞에서 황제의 길을 열어가는 마차를 고차라 하고, 황제가 타는 마차를 안차라한다. 고차는 말 네 필이 끄는 수레에 마부가 한사람 앉아있는 둥근 지붕이 있는 단순한 것이고, 안차는 화려한 장식을 한 말 네 필이 끄는 뒤에 마부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둥근 지붕아래 사각형으로 휘장을 치고 사방으로 미닫이문을 만들었는데 l,3kg의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하고 보석으로 치장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세계에서 개인의 무덤으로는 가장 큰 진시황의 무덤. 살아생전 백성들을 핍박하며 만든 거창한 유물이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입장객이 2-3만 명씩이나 된다고 하니 그 수입도 만만치를 않을 것이고, 가장 짧은 생애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진시황이야 말로 오천년 중국역사에 빛나는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저녁노을이 화려하게 불꽃을 피우는 서안. 공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2일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주, 진, 한, 수, 당나라까지 5대왕조의 도읍지로 천여 년 간 영화를 누리고 호경에서 함양으로 장안에서 서안으로 이름까지 바꿔가며 명맥을 유지한 유서 깊은 서안이 다시 한 번 명성을 떨칠 그날을 기대해본다.
조물주의 걸 작품, 장 가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온 누리를 비추는 8시50분. 우리를 태운 MU 2321편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피로에 지친 일행들이 모두 잠 속으로 빠져든다. 평소 허리(척추 협착증)가 부실하여 조금만 걸어도 통증으로 고생하던 아내가 2일 동안 강행군을 하였으니 어찌 편할 수가 있으랴?
온몸이 축 늘어지며 고통을 호소하는 아내를 끌어안고 구원을 요청하자 스튜어디스가 빈자리를 마련해준다. 무릎베개로 머리를 받치며 중도에 귀국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하는데 곤하게 잠 속으로 빠져든다. 한 시간 만에 장 가계 공항에 도착하여 아내의 몸을 흔들어보니 거짓말같이 거뜬하게 일어나 앉는다.
김 명철 가이드의 안내로 공항에서 머지않은 상용 국제주점에 도착하니 10시30분, 방 배정을 받고 506호실 룸에 들어가 내일의 일과를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든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꿈에 놀라 깨어보니 구름은 끼어있어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 山水觀光에는 날씨가 중요한 변수인데, 강우량이 많은 아열대지방이라 마음을 조 릴 수밖에 없다. 한 달이면 20일 이상 비가 내리고 그나마 안개 끼는 날이 많아, 쏟아지는 비와 안개 속을 헤매다 돌아가기가 다반사라고 하니 꿈속에서라도 맑은 날씨를 기원하게 된다.
장가계는 호남성 서북부에 있는 인구 170만에 20여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 토가족이 주류를 이루고, 백족, 묘족이 생활의 터전을 일구고 있다고 한다. 중국 최초의 삼림공원(우리나리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로 산수가 수려하여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무릉원을 중심으로 천자산 지구, 원가계 지구, 황석채 지구로 나누게 된다.
세상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0년 초 8개국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천문산에서 묘기를 보이는 시합이 있었는데, 천문산(1560m)에는 폭이 50m, 높이가 130m되는 구멍이 있어 이곳으로 전투기들이 편대를 이루어 통과하는 시범을 보이며 전 세계로 중계가 되고 장가계의 아름다운 산수도 함께 소개가 된 후로 동양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장가계에서 2일간의 관광이 예정되어 있지만, 무릉원에서 일박을 하는 관계로 모든 짐을 버스에 싣고 원가계가 있는 무릉원으로 출발한다. 굴곡이 심한 도로는 확장공사가 한창이고 장가계에서 무릉원까지 공사 중인 케불카(7.5km)가 완공되면 세계 최장의 길이가 된다고 하니 앞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은 쉽게 무릉원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털털거리는 길을 따라 협곡으로 들어가면 예사롭지 않은 산세가 펼쳐진다. 와, 와 소리가 절로 나오고 높이가 백 장이나 되는 백장협은 시간을 절약하기위해 차창관광으로 눈요기를 한다.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첩첩산중에 펼쳐지는 절경이야말로 동양화의 진수를 만끽한다. 중국에서 마지막까지 남았던 산적들의 근거지가 이곳이라고 하니 험준한 산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4.3km의 터널을 지나며 협곡사이로 별천지가 나타난다. 장가계 관광이 시작되는 무릉원. 호텔과 상가가 빼곡히 들어차고 수많은 관광객으로 초만원을 이룬다. 우리가 타고 온 관광버스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관광지에서만 운행하는 셔틀 버스로 갈아타야한다. 지문감식을 할 수 있는 입장권을 구매하여 48시간 동안 수시로 사용하게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셔틀버스에 오르지만 창가에 부딪치는 빗줄기가 야속하기만하다. 버스는 아랑곳없이 계곡을 거슬러 오르고, 호수를 끼고도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에는 양 옆으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차창 밖으로 비추는 경관이 너무도 아름다워 와, 와 하는 비명소리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다행히 비도 개이고 주차장에 도착하여 5분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원가계가 자랑하는 백룡엘리베이터 승강장이다. 깎아지른 수직절벽에 잇대어 만든 325m의 엘리베이터는 까마득히 올려다 보인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투명한 승강기가 초고속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원가계의 화려한 풍광들이 우리눈앞에 펼쳐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면 천상의 전망대가 우리를 맞이한다. 사방팔방 펼쳐지는 조물주의 걸작 품에 정신이 몽롱하고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오는 탄성으로 주위가 시끌벅적하다. 장가계는 태초에 바다였으나 지진과 지각운동으로 육지가 되어 넓은 분지의 모래 산이 형성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풍화작용으로 협곡이 생겨나며 첨봉들이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산수를 만들어냈다고 하니 자연의 신비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원가계관광은 수백 수 천 길의 협곡 속에서 피어나는 형형색색의 첨봉들을 바라보며 40여 분간 걷게 된다. 이곳의 특징은 계곡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관광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한탄강처럼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는 관광이라 만 가지 형상의 기암괴석들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할 수가 있다. 아름다운 바위 앞에는 편히 쉬어갈수 있는 전망대를 만들고, 그럴듯한 전설과 아기자기한 이름표까지 달아 놓았다.
중국의 축제일에 맞추어 구름같이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많은 사람들에 등 떠밀려 목적지에 도착하고 만다. 그래도 제일 인상 깊은 곳은 천하 제일교. 높이가 300여m나 되는 아슬아슬한 협곡에 두개의 바위를 이어놓은 넓이 2m, 길이 20m의 석교는 조물주가 심혈을 기울인 걸 작품이다.
원가계 관광을 끝내고 앞산을 바라보니 울창한 나무들의 중간이 모두 부러 진채 폭풍우로 피해를 입은 듯이 흉물스러운 모습이다. 금년 2월 수 십년 만에 내린 폭설로 저항력 없는 나무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부러지고 천자산으로 통하는 도로도 두절되어 한동안 왕래를 못했다니 이것도 아열대지방에서 일어난 기상 이변이라고 자랑삼아 설명을 한다.
천자산 지구로 가는 길은 버스로 이동을 한다. 여느 시골길을 돌아가듯이 울창한 삼림속으로 아주 편안하게 연결되어 조금 전의 복잡했던 머리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20분 후에 시설지구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천자산 관광길에 나선다. 제일먼저 하룡 공원으로 가는 길에 우리의 시선을 끄는 황금색 5층 석탑이 이곳의 심벌마크가 된다.
중국 10대 元帥 중에 한명이고, 모택동의 심복인 하룡장군을 기리기 위해 5.6m의 높이에 9톤이나 되는 큰 동상이 공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애마와 함께 파이프를 들고 있는 늠름한 모습이 그의 용맹함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선녀헌화로 일컬어지는 침봉의 숲이 전망대 아래로 끝없이 펼쳐지고, 천대서해의 석림들이 바다를 이룬다. 밀림처럼 솟아오른 침봉들 사이로 붓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이 끝이 뾰족한 어필봉이 群鷄一鶴이라. 보는 이의 감탄사가 절로난다. 하룡 공원으로 되돌아와 주차장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천자각에 도착하여 케이불카(길이 2,084m)를 타고 바라보는 경치 또한 일품으로 그 유명한 십리화랑으로 이동한다.
십리화랑은 양쪽으로 치솟은 기암절벽의 계곡에 왕복 7km의 모노레일을 깔아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자연은 한번 망가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손만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면서도 자연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본받아야할 관광 상품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모노레일에서 바라보는 관광은 힘 하나들이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하는 신선놀음으로 모두들 신바람이 난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푸른 숲에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암 봉들이 한데 어우러진 천하제일경이다. 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대궐로 등청하는 대신바위, 모노레일 끝자락에 우뚝 솟은 3자매바위, 갖가지 모양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십리화랑에서 만단근심 씻어내고 무릉원으로 돌아와 누에에서 실을 뽑아내는 실크 이불가게를 둘러 본 뒤 보봉호 관광길에 오른다.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면 양쪽으로 치솟은 절벽사이로 협곡이 나타난다. 가쁜 숨 몰아쉬며 계단을 오르면, 10여분 만에 명경지수 보봉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480m에 수심이 115m나 되는 반 자연, 반 인공의 산정호수가 우리를 다시 한 번 감탄 시킨다. 대만의 사업가가 운영하는 유람선은 청기와로 지붕을 얹고 화려한 색깔로 단청을 하여 아름답게 꾸며놓고, 이 태백이 술에 취해 시 한수 풀어 봄직한 분위기 속에 호수 위를 미끄러진다.
날아갈듯 아름다운 정자 앞에 도착하면 아리따운 토가족 아가씨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환영노래를 부르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호안의 절경은 산 그림자가 잔잔한 호수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보봉호를 한 바퀴 돌아 나올 때 뱃전에 나온 총각이 배웅의 목청을 높이면,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지만 몽롱한 취흥 속에 뱃노래로 화답을 한다.
40여 분간의 뱃놀이를 끝내고 나선형계단을 내려오면 호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로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든다. 늦은 시간이라 토가족의 공연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천자 대 주점(여관) 603호실에 여장을 풀고 토가족 아가씨가 제공하는 발 맛 사지 또한 여독을 풀어주는 데는 제일이라 달콤한 꿈속으로 빠져든다.
황룡동굴 과 금편계곡
동녘 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오늘도 밝게 빛나고 여행4일째 아침을 맞는다. 매일같이 잠자리가 바뀌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풀었다 싸는 짐 보따리가 부담스럽고 매일같이 갈아입는 옷으로 가방 2개가 모자라 배낭까지 한 짐 부풀어 오른다. 서둘러 호텔 구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버스에 오른다.
3-4일을 함께 생활하며 익숙해진 일행들이 스스럼없어, 정선에서 온 임 영빈 씨가 걸쭉한 입담으로 여행길의 지루함을 달래준다.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황룡동굴로 가는 길도 진입로 공사가 한창이다. 2시간동안 동굴 속을 관람하는 동안 화장실이 없다는 설명에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간다. 원주민들의 것을 그대로 본 떠 만든 것인지 문도 달려있지 않고 허리위로는 가리는 판자도 없으니 나오던 용변이 다시 들어갈 판이다.
동굴의 길이가 15km에 천장의 높이가 160m라고 하니 그 규모에 놀라고 만다. 아직까지 4km만 개발이 된 상태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산은 그리 웅장하지도 않고, 푸른 숲속에 가려진 산속에 덩치 큰 동굴이 숨어있는지 쉽게 수긍이 가지를 않는다. 일단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처음에는 별 특징도 없이 용암이 흘러간 흔적만이 동굴 벽에 남아있어 중국 사람들의 虛張聲勢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1km까지는 별 특징도 없고 지루한 탐방으로 실망을 하며, 아기자기한 삼척의 환선동굴을 떠 올린다. 하지만 잠시 후 지하에 흐르는 강물에 유람선을 띠우고 강을 거슬러 오르며 동굴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아지고 주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종유석은 갖가지 색깔로 현란한 조명을 받아 신비감을 더한다. 막다른 골목에서 벽으로 막히는 것 같지만,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또다시 굽이치는 물길이 1km나 이어지는 강물에 20여명이 탈 수 있는 유람선에서의 탐험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배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굴 속의 탐험이 계속된다.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종유석들이 무너져 내릴까봐 가슴 졸이며 오르락내리락 자연의 신비를 체험한다. 2층을 거쳐 3층까지 올라가면 출렁이는 강물소리도 멀어지고 까마득히 내려다보인다. 천장은 왜 그리 높은지 수백m 는 됨직한 넓은광장에서 안전시설이 없다면 탈출구도 찾지 못 한 채 동굴 속에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4층의 높은 광장에 올라서면 소백산의 천문대와 흡사한 돔을 중심으로 석순, 종유석이 갖가지 모양으로 아름다움을 뽐낸다. 환상적인 동굴 속에서 수 십 억년 자라온 석순들이 천장에 닿아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자연의 신비감이 절정을 이룬다. 정해시침으로 명명된 석순은 길이가 19,2m 나 되어 손에 살짝만 닿아도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보험금이 자그마치 150억 위안에 50년간 보장을 하고 있는 보물로, 유네스코에서 자연유산으로 지정한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고 가이드의 입에 침이 마른다.
오르고 내리고, 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떠밀리며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현상도 되지 않는 카메라를 연신 눌러댄다. 돌고 도는 지하궁전의 오솔길은 끝이 없고, 조금 전에 우리가 배를 타고 지나온 강물이 구름다리 밑으로 아득하게 출렁이고 환상적인 동굴 속에서 시간도 멈추고 만다.
1시간 40분간의 관광을 끝내고 지상으로 나오지만, 동굴 속의 환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또 다시 무릉원으로 돌아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동정호에서 양식한 인조진주를 관람한 뒤 중국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중국 음식 특유의 진한 향으로 고생한 터라, 모처럼 입맛에 맞는 김치찌개에 돼지 불고기로 포식을 한다.
십리화랑 다음에 만나는 계곡이 그 유명한 금편 계곡이다. 십리화랑이 모노레일 관광이라면 금편계곡은 1시간 30분을 걸어야하는 트레킹 코스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가이드의 말이 아니라도, 갖가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계곡으로 들어서면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별천지가 펼쳐진다. 계곡입구부터 트레킹에 약한 노약자들을 노리는 가마꾼들이 호시탐탐 우리의 거동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森羅萬象의 기암절벽이 하늘로 치솟고, 뭉게구름 두둥실 흘러가는 곳, 바닥에는 깔끔하게 보도 불럭으로 단장을 하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앞산에 가린 계곡을 휘돌아 돌아서면 졸 졸 졸 계곡물이 흘러내린다.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도 누구 하나 물속으로 들어서는 이 없고, 담배꽁초하나 휴지하나 흩어진 것 없으니, 그 많은 사람들이 공중도덕 준법정신을 잘도 지키는 지상의 낙원이다.
중국여행 4일 동안 부실한 몸으로 용케도 잘 버텨 오던 아내가 금편계곡을 3km 쯤 거슬러 오르며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소연을 한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가마꾼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인지, 계림으로 가는 기차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지체를 하다가는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므로 서둘러 가마꾼과 흥정을 한다.
금편계곡 초입부터 가마를 타면 20불이고 4km지점에서 타면 10불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귀 뜸 으로 듣고 15불을 요구하는 가마꾼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10불에 팁2불로 합의를 보고 신기에 가까운 보행 술로 찰랑찰랑 가마채의 반동을 이용하여 내달리는 가마꾼들을 따리잡기에 숨이 차오른다.
漸入佳境이라 계곡을 거슬러 오를수록 바위들의 모양이 갖가지 형태로 선을 보이며, 완만한 경사면의 계곡이 끝없이 이어지고, 하늘높이 솟아오른 금편암을 지나면 곧바로 고개 마루의 분수령을 만난다. 이곳을 경계로 금편 계곡의 하이킹코스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무릉원에서 장가계로 통하는 유일한 금편계곡은 깎아지른 절벽사이로 백만 대군도 막아낼 수 있는 협소한 길로 이어진다.
장가계는 천하통일의 주역인 한신과 장량의 전설이 깃들어있는 곳이다. 자기의 공을 과시하며 권력을 탐하다 유방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한신과, 권력의 속성을 알고 있는 장량은 유방의 끈질긴 권유도 뿌리친 채 장가계로 들어와 여생을 보낸다. 고향에 돌아온 장량은 원주민들에게 농경기술을 전수시키고 후손들이 이곳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웃에 있는 황석채는 그의 스승이 칩거하던 곳이다.
참고로 장량이 아들 벽강에게 이르되. 권세란 탐하면 탐할수록 그 해가 커지는 법이니 벼슬이란 곧 불과 다름없는 것이다. 사심을 버리니 근심걱정 없어지고 근심이 없으니 찬 없는 밥을 먹어도 꿀맛 같고, 부귀와 공명을 탐하지 않으니 세상을 편히 살 수 있도다. 2천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이니 높으신 분들 쇠고랑차고 감옥 가는 것을 눈여겨 볼일이다.
기차타고 계림으로
오후 5시40분 장가계역을 출발한 기차(T 2413호)는 남쪽으로 840km의 먼 거리에 있는 유주시를 향해 달려간다. 장가계가 산악지역임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수 없이 나타나는 터널과, 문명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산간마을의 모습에서 엿볼 수가 있다. 4인1실과 6인1실의 침대칸과 객실로 이루어진 기차는 작은 역은 그대로 지나고 큰 역에서만 정차를 하며 밤새도록 달려간다. 낮선 침대와 레일의 마찰 음으로 밤을 설치며 이튿날 새벽 5시 유주시에 도착한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유주역 광장에는 계림에서 우리를 안내할 최 운철 가이드가 기다리고 곧바로 버스에 올라 북쪽으로 155km떨어진 계림을 향해 고속도로(93착공하여 96년에 완공)를 질주한다. 오늘도 변함없이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우리에게 내려준 신의 축복이요. 행운이다. 연도에 펼쳐지는 농촌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년 평균 기온이 28도인 열대지방의 기후 탓에 일 년에 두 번씩 농사짓는 2모작으로 풍요로운 들녘이 평화롭게 보인다.
1시간40분만에 계림시내로 들어선다. 진나라 때 이 지방에 계수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계림이라는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10월에 개화하는 계수나무는 붉은색, 흰색, 노란색으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이고장의 특산품인 계화차와 계화주를 만든다.
십여 년 전“여명의 눈동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계림의 산수는 장가계가 남자의 산이라면 계림은 여성의 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안의 마이산과 같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봉우리가 3만 6천개나 된다고 하니 그 많은 숫자에 놀라고, 그림 속에 들어온 듯, 사방을 둘러봐도 첩첩이 포개진 산들이 파노라마를 이룬다.
중국은 소수민족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을 자치구로 지정을 하는데, 이곳은 광서 장족 자치구로 주도인 난영, 유주시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60만에 2강(리강, 도화강)과 4호(삼호, 용호, 계호, 목용호)가 도시를 감싸는 호반의 도시로 산수가 수려하여 동양화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장족을 중심으로 20여 소수민족이 살아가고 있는 계림은, 중국 20위안의 지폐 뒷면에 리강의 산수화가 배경으로 들어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수려한 곳으로 제주도와 자매결연 을 맺고 있다고 한다.
계림시내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조선족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상추쌈에 고추장으로 모처럼 포식을 하고 즐거운 관광이 시작된다. 중국에서 관광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사람들은“천원 싸다”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장사치들. 그 들의 끈질긴 외침이 호객행위라는 사치스러운 표현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모습으로 마주치는 눈동자는 그 들의 표적이 되기에 애써 외면을 한다. 거래가 이루어질 때는 절대로 돈을 먼저 건네면 안 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첩채산은 서울의 남산처럼 시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관광명소다. 높이는 얼마 되지 않지만 층층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도시 전체가 물속에 떠 있는 듯, 강과 호수가 뱃길로 연결되어 그림 같은 모습이다. 風洞이라 하여 바람 부는 동굴에는 부처님 조각상이 모셔져 있고 벽에는 청나라 시인들의 시와 그림이 새겨져있는데, 손으로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 때문인지 벽면이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고 있다.
작은 암능을 지나 정상인 명월봉(220m)에 올라서면 무성한 계수나무가 시내를 뒤덮고, 천년의 혼이 살아 숨 쉬는 古都답게 낮은 지붕의 건물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불교 사탑들이 유난히 돋보이는 중심지엔 진시황이 만들었다는 운하가 수 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어, 중국 사람들의 만만디가 백년대계를 이루는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공위성에서 바라보면 7개의 산이 북두칠성을 닮았다는 칠성공원으로 향한다. 동양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가계 와는 다르게 이곳에는 서양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이지방의 특산물로는 계수나무에서 추출하는 계화차와 계화주, 쌀로 만든 삼화주를 으뜸으로 치고 계림의 고추장, 마파두부가 유명하다. 또한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관계로 쌀국수 가게가 성행을 한다고 한다.
칠성공원은 화교를 건너면 가지런히 정돈된 잔디밭과 푸른 숲속에 수 십 만평이 펼쳐진다. 공원광장에 있는 낙타봉을 중심으로 자연생태 모형들이 전시되어 사진 촬영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이곳은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세계 환경보호 헌장을 낭독하여 더욱 유명해 졌다고 한다. 오솔길을 따라 월아산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달려드는 야생 원숭이들로 인해 혼쭐이 난다. 영역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이 어찌 인간에게만 있겠는가. 순하게만 보아오던 원숭이가 앙칼지게 덤벼들 줄이야, 혼비백산하여 되돌아오고 말았다.
다음에는 계림이 자랑하는 지질광산 박물관. 옥 비취 생산량의 70%를 이곳에서 생산한다는 설명을 들으며 전시실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실물크기로 만든 유람선이다. 정교한 조각과 오랜 시간 장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예술작품은 가히 독보적인 존재이다.
5일간 중국여행으로 지친 몸을 보신하라는 정성으로 특별히 마련한 용봉탕. 닭고기와 자라고기를 푹 고와 탕으로 내온 특식은 기름이 동동 뜨고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는 영양만점의 보신탕이다. 미리부터 잔뜩 기대를 하더니, 막상 밥상 앞에서는 모두들 외면을 하고 만다. 미식가인 김희덕 씨와 둘이서 포식을 하고 곁들이는 반주로 즐거운 관광길에 나섰으니 세상이 부럽지 않다.
시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관 암 동굴은 리강과 함께 계림이 자랑하는 관광명소다. 처음부터 모노레일을 타고 들어가는 2인승 모노레일은 전용기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관광객들이 직접 운전을 한다. 용감하게도 아내가 앞에서 운전을 하고 뒤에서 느긋하게 주위경관을 즐기며 1km를 진행한 뒤 동굴탐험이 시작된다.
동굴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귀청을 찧는 요란한 굉음소리와 함께 천정의 바위틈에서 쏟아지는 지하궁전 폭포가 펼쳐진다. 93년 인근의 농부가 염소를 찾다가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관암 동굴은 주 정부와 대만의 사업가가 합작으로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후 강물이 흐르고, 배를 타고 동굴탐험이 시작된다. 장가계 황룡동굴의 웅장함과는 다르게 비좁은 통로에 희미한 조명, 낮은 천장, 뱃전을 스치는 벽을 가까스로 피해가며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손전등에 비추는 동굴은 박쥐의 날개 짓에도 소름이 돋아나고, 어린 시절 꿈을 키우던 톰소야의 모험이 재현되는 가운데 짜릿한 스릴과 긴장감으로 모두들 숨을 죽인다.
리강과 지하로 연결된 동굴의 전체길이는 12km나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3km 만 개발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긴장과 스릴 넘치는 뱃길탐험이 끝나면, 동굴 속의 육지로 올라와 지하궁전 2-3층의 관람이 시작된다. 갖가지 모양의 종유석들이 현란한 조명을 받아 환상적으로 빛을 발하고 수정궁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자연의 신비감에 취해 자리를 뜰 줄 모른다.
현상 안 되는 일반 카메라의 약점을 이용하여 호객행위 하는 사진사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전원 풍경을 돌아가면 지상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장시간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 한 가지라도 더 보기위해 천천히 걸어 동굴입구에서 기다리는 미니카로 지하궁전을 빠져나오며 관암 동굴의 탐험도 끝이 난다.
슬피 우는 가마우지
관암 동굴에서 흥분했던 마음을 진정시키며 1시간 거리에 있는 리강으로 이동을 한다. 山水 觀光. 계림을 대표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봉긋봉긋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첩첩이 물결을 이루고, 그 사이로 흐르는 강물은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다. 우리가 보아온 동양화의 낮 익은 풍경들이 길옆으로 전개되고 조물주가 빗어 놓은 걸작 품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리강의 총길이가 423km로 한강과 거의 비슷한 큰 강이다. 그 중에서도 흥평- 어촌구간이 백미를 장식하는 절경으로 계림시내를 관통하여 양삭까지 83km가 장관을 이룬다. 계림의 산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급류에 갈리고 다듬어진 조약돌처럼 모난 곳이 없이 유연한 곡선으로 부드러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또 한 우리나라의 산들은 지맥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되지만, 이곳은 평지돌출 형으로 넓은 분지위에 우뚝우뚝 솟아오른 단일봉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리강이 가까워오며 산세도 더욱 아름답고 까마득히 높은 벼랑꼭대기에 날렵하게 올라앉은 정자는 나는 새가 지었을까? 신령님의 조화일까? 인간으로는 도저히 발붙일 자리가 없는데, 높은 곳에 지어진 정자가 신기하기만 하다. 山水觀光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바위틈을 비집고 둥지를 튼 나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고풍상의 온갖 시련을 견디며 벼랑 끝에서 푸르름을 자랑하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감탄사가 절로난다.
山 水 말 그대로 산과 강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요 그에 더하여 강상에서 뱃놀이하는 풍류시인 묵객들의 정경은 가히 선경을 넘나드는 지상의 낙원이다. 우리도 서둘러 유람선에 몸을 싣고 뱃놀이를 시작한다. 리강을 대표하는 가마우지. 발목에는 가죽 끈을, 주둥이는 재갈을 물리고 날개 죽지 비끄러매어 긴 장대에 올라앉아 주인눈치 살펴가며 긴 목을 날개 죽지에 처박는다.
흉악범의 포승이 이럴까. 염라대왕 전이 이럴까. 이에 아랑곳 하지 않는 주인 왈, 사진 한 장에 천원 싸다 싸. 가마우지 모델삼아 호객행위에 여념이 없다. 저녁 무렵 낙조가 드리워지는 석양이 되면, 목 줄기에 올가미 씌워 거친 강물 속으로 물고기 사냥에 나선다. 목울대로 넘긴 고기까지 낚아채는 인간들의 잔인함, 가련하고 불쌍한 가마우지를 바라보며 잔인하고 모진 인간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리강에 쏘가리 생각만 해도 짜릿한 그 맛. 지천으로 널려있는 쏘가리 매운탕을 우리 교민들이 전수 했다는데, 지금은 리강의 으뜸가는 별미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니 매운탕의 원조는 확실하게 우리 것이야. 또 한 가지 리강의 명물은 강둑을 푸르게 수놓고 있는 봉미竹. 1970년대 초 주은래 총리가 이곳을 방문하며 운남성에서 옮겨다 심었다고 전해진다.
20위엔 지폐를 뒤집어 보고 또 보고 모델로 찍힌 산이 신기하여 보고 또 보고 여울져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 선착장에 올라서도 다시 또 보며 1시간의 뱃놀이도 마감하고 계림으로 향한다. 고속도로인지 유료도로인지 마주 오는 차가 있어도 중앙선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강심장들, 대국이라 큰소리치는 그들이지만 우리의 교통문화를 어찌 따라 오려나. 내심 자부심을 갖는다.
한 시간 40분 만에 계림으로 돌아오니, 서산에 지는 해가 리강을 물들이고 푸른 산과 맑은 물, 기이한 동굴, 아름다운 돌. 계림이 자랑하는 4가지를 모두 돌아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계산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에서 공연하는 소수 민족 쇼를 관람한다.
장족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활모습을 극화한 것으로 3월3일이 그들의 최대의 명절이라고 한다. 그동안 총각들로부터 구혼을 받은 처녀가 공을 전해주므로 자기의 의사표시를 한다고 한다. 장족 원주민은 1m 50cm의 작은 키에 검은 피부로 화려한 조명에 일사 분란한 율동으로 관중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냉방이 되지 않은 후덥지근한 실내공기로 온몸이 끈적거리고 졸음이 쏟아져 지루하게만 느껴지는데,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열 두발 상모 돌리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차에 싣고 요산으로 향한다. 요산은 요 왕조 시대 임금의 묘를 이곳에 모신 뒤로 요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계림에서 가장 높은 요산(909.3m)은 이곳의 산들이 모두 돌산인데 비해 유일하게 흙산이고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시내에서 멀지않은(14km)거리에 있는 곳이라 30여분 만에 도착하지만, 운하와 강이 있는 탓에 엷은 운무가 앞을 가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스키장에나 있음직한 리프트를 타고 편안하게 정상으로 올라간다. 맑은 날에는 주위에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라지만, 엷은 안개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내고 카메라 속에는 그나마 형체도 잡히지 않는다.
2.3km의 리프트로 정상에 올라서면 통신 중계소를 중심으로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얄미운 안개 때문에 우유 빛 장막 속으로 눈요기만 하고 하산 길에 나선다. 동계올림픽에서나 봄직한 봅슬레이는 스텐판을 반원형으로 접어 1km나 되는 거리를 바퀴달린 썰매위에 올라앉아 달리게 되어있다. 시속 30km의 속도로 달리는 스릴은 요산의 안개를 한순간에 날려버리고도 남음이 있다.
시내로 돌아온 우리는 리강과 도화강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 지점에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상비산에 도착하며 계림에서의 마지막 일정도 마무리를 짓는다. 5박6일간의 짧은 시간에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보며 많은 감동 속에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으니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동안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여행길에 나설 것을 다짐해 본다.